환승연애
지원솔빈
안녕하세요, 피솔빈님. 저희는 TBS 방송사에서 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 제작진입니다. 따로 SNS를 하지 않으셔서 연락처를 따로 받아 이렇게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전에 사귀셨던 견지원님께서 함께 방송에 나오고 싶다고 하셨는데, 가능하실까요?
솔빈이 그런 연락을 받고 진짜 그 합숙소인지 뭔지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고 변덕이었다. 초등학교의 여름방학, 물론 선생님들은 매일같이 나와서 2학기의 준비를 해야했지만… 솔빈은 이미 학교의 순환에 익숙해져 있었던 참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름방학 내내 쉴 수는 없어도 그 시기에 연차를 내고 짧은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라면 할 수 있었다. 여행….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짧게 다녀와볼까. 책상 높이 조정도 다 끝났고, 2학기를 위한 학습 게시판을 꾸미는 것도 마무리했다. 이 학교에 부임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견지원과 헤어진 지는 곧 9개월 정도 되어간다. 딱 올해로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TV 프로그램이라니.
솔직히 당황했어요. 그렇게 솔빈이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나오는 길에, 지원이 그 근처를 지나쳤다. 익숙한 향, 견지원이 지독하게 그리워하던 그 향의 여자가 성큼성큼 옆을 걸어 지나갔다. 환승연애의 프로그램 취지는 다른 연애상대를 보는 것도 있지만, 예전에 만났던 그 사람과 다시 재회할 수도 있다는 꽤나 극악무도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견지원은 오직 피솔빈만을 생각하고 응한 게 맞았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출연자들 사이에서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전 애인, X가 누구인지 밝혀서는 안된다는 것. 매일 밤 특정 상대에게 환승연애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모든 순간의 대시는 자유라는 것. 견지원은 나머지 전부 관심이 하나도 없었고, 그냥 피솔빈을 만나러 왔다고 처음부터 입을 털고 싶었다. 아무도 그녀를 못 건드렸으면 했다.
처음 TBS에서 연락이 왔을 때, 지원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구태여 솔빈을 불러낼 생각도 없었고, 거기서 다른 사람과 잘 생각도 없었으니까. 다만 제작진들이 말하는 ‘본인이 하기에 따라서 재회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고, 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저희가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 남기기, 좋게 헤어지게 할 수 있도록 해드릴거니까요.’ 라는 말에 조금 흔들렸다. 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고,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을 좀 더 잘 포장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그 얼굴을 직접 보면 본인의 그런 다짐은 다 없어지고 그냥 계속 쳐다보고 있을 것도 알고 있었다. 제작진에게 대충 그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며 거절의 뜻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제작진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참여를 다시 권했다. 사실 그 즈음에 지원은 이미 넘어간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은 대신 좀 해주세요. 안한 지 오래돼서.
이렇게 된 거 솔빈이랑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잔뜩 가라앉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면서도, 지원은 본인의 얼굴이 어떤 모양새일지 알고 있었다. 누가 이런 사람을 영업팀이라고 하면 본인은 절대 못 믿을 거 같은데. 남 앞에서 표정 관리 하나 못하는 자신이 좀 바보같았다. 그저 지친 표정이 되어, 방금 지나친 솔빈의 익숙한 향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오던 말을 기억한다. 네겐 다 끝났을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이전의 기억이 생생한데. 헤어진 이후의 지쳤던 것들이 다시 성큼 눈 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왜 내가 이걸 한다고 했지, 지원은 자괴감이 들었다.
저는, 초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을 하고 있어요. 피솔빈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스물 아홉이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솔빈의 인사가 순서를 잡았다. 짐을 각자 방에 두고, 큰 거실 방에 동글게 모여 앉았을 때 제작진이 자기소개를 부탁한 것이었다. 솔빈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가벼운 미소는 여럿의 시선을 끌기 딱 좋았다. 슬림한 체형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전체적인 균형감이 조화로웠다. 지원은 가볍게 이를 악물며 솔빈을 시선 안에 담았다. 이후 순차적으로 한명씩 인사를 해나갔다. 솔직히 지원의 귀에는 썩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는데, 솔빈은 무슨 생각인지 한 명 한 명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작은 박수를 쳐가며 인사에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네, 저도…. 여기 있는 기간동안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다들!
솔빈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견지원의 차례였다. 촬영용 카메라 중 일부가 이미 견지원을 오래도록 잡고 있었다.
그러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견지원입니다. 올해로 서른 넷이고, 기업에서 영업팀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지원은 솔빈의 눈을 최대한 응시했고, 솔빈은 어색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말아쥔 주먹에서 살짝 힘을 뺐다. 카메라가 살짝 아래로 흔들린 것 같았다. 지원은 애써 그 모든 걸 무시했지만 카메라는 선명하게 지원의 주먹을 잡았다. 제작진은 이 모든 관계성을 다 알고 있었고, 견지원이 오직 피솔빈만을 위해서 들어왔다는 것도 진즉 알고 있었다. 모든 구도를 모아 둘 생각으로, 꽤나 악질적으로 지원을 카메라에 담았다. 웹툰작가라며 자신을 소개한 재하는 처음부터 솔빈에게 추근덕거리고 있었다. 뭘 하는지는 몰라도 성격이 꽤 활달한 것 같은데 솔빈 앞에만 가면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하는 똥개처럼 굴었다. 지원은 가만히, 아주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지원은 그 안에서 제일 컸다. 여자 출연진 중에서도 작은 편은 아닌 솔빈의 옆에 섰을 때 그토록 차이가 많이 났으니, 다른 여자 출연진과는 더욱 덩치 차가 돋보였다. 남자 출연진들 사이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반뼘 내지 한뼘은 더 위로 올라서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대체로 비슷하다고, 지원과 솔빈에게는 표가 다른 출연진보다 한두표 정도 많았다. 나머지 투표 결과도 무난하게 이어졌다. 서로를 투표한 사람들이 우선으로 정해지는 건 확정인 모양이었다. 투표 결과를 내는 도중에 진행한 짧은 인터뷰는 다들 비슷한 답변을 했다. 인상이 좋아 보여서, 잘생기셔서, 예쁘셔서, 궁금해서, 아까 보여주셨던 모습이 재미있어서…. 이유는 달랐지만 다들 첫 모습을 보고 괜찮은 느낌의 사람에게 투표한 것 같았다. 지원은 처음 옆자리에 있던 은비라는 간호사와, 솔빈은 처음부터 솔빈에게 관심을 표하는 듯이 굴던 똥개와 붙었다. 지원은 솔빈에게 투표했으니, 은비의 표로 붙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저쪽은 뭘까, 벌써 쌍방으로 투표가 오갔을까. 지원은 은비의 옆으로 가면서도 저 멀리 지나가는 솔빈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와! 솔빈씨! 저희 둘이 걸린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좋아하시는 메뉴 있으세요? 저희는 어디로 갈까요?
앞에서는 은비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재하의 목소리가 쨍하니 울리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안 쓰였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똥개처럼 굴지 않았다면 재하를 이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았을까? 저기, 지원씨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파스타라던지…. 양식 같은 거 어떠세요? 은비의 이야기에 짧고 가벼운 답변을 했다. 너무 성의없이 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아니겠지. 지원은 애써 답변 뒤에 또 다른 답변을 붙여 말을 길게 늘였다. 근처에 있는 양식 집으로 갈까요. 간호사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친절해야 하는 게 기본이라 그런걸까, 제법 상냥한 답변과 친절한 웃음이 계속해서 돌아왔다.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무덤덤하게 구는 것도 상당히 미안한 일이지만, 지원은 도무지 기분이 오르지 않았다. 뭘 시켰는지 딱히 기억도 나지 않는 상태로 은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하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텅 빈 왼손 약지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나보다. 은비가 던진 가벼운 농담에 웃으며 고개를 숙이다가 그 손을 마주하고 느릿하게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피솔빈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 자체 진행에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앞선 기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라는 점, X의 공개는 비밀이지만 추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티가 나도 괜찮다는 룰을 넣게 되었다고 밝혔다. 다만 과하게 견제를 위해 그걸 밝히거나 하는 건 편집에서 제거하고 동시에 재제를 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원이나 솔빈은 이런 연애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는지도 몰랐고, 나머지 출연진들도 썩 연애 프로그램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환승연애는 꽤 된 장기 프로그램이었다. 초반에는 상당한 인기 몰이로 온갖 곳에서 방송을 하고 있었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해당 프로그램을 이미 알고있는 일반인이 연기를 섞어 작위적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제작진은 ‘환승연애에 큰 관심이 없어보이는 사람’을 조금 우선으로, 어느 정도 적당한 직업을 가진 사람, 얼굴도 몸도 괜찮은 사람들을 순차적으로 찾았다. 제작진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욕을 먹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유명세를 가지고 오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이 커플은 그 중에서도 상당했다. 환승연애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피솔빈, 오직 피솔빈과 재회를 원하는 견지원, 그것도 쌍방이 아니라 견지원의 일방적인 구애처럼 구는 행동이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커플들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제작진은 첫 눈에 알았다, 그들이 이번 촬영의 가장 큰 변수가 될 터였다.
연애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은 언제나 있다. 특히 일반 예능이 점점 연예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는 관찰카메라식 프로그램이 되며, 일반인의 가벼운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던 탓이었다. 연예인들이야 결국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일 뿐이다. 이번 기수야말로 환승연애는 가벼운 일반인을 가득 담았다. 초등학교 교사가 살짝 걸리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스타트업의 이사, 동화작가, 간호사, 영업직 직원, 이외에도 살짝 특색있는 직업들을 가진 진짜 일반인을 모았다.
초등학교 교사요? 아이들을 대하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
재하는 가볍고 위트있는 대화를 주도했다. 솔빈은 오랜만에 이런 대화를 하는 사람이 생겨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재하를 대했다. 물론 낯을 가리는 성격 상 곧장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교의 M.T를 다른 느낌으로 진행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냥 이 여행 분위기를 최대한 즐겨보고 싶었다. 자꾸만 저만을 눈에 담던 견지원을 잠깐 잊고 싶었다. 이미 솔빈은 진즉 지원을 정리했다. 완벽하게 정리했다고 하기에는 어렵겠지만,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적의 본인의 모습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지원을 마주하고도 눈물을 터트리거나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허전한 왼손 약지가 자꾸만 걸렸다. 어느새 자신의 버릇으로 자리잡은, 텅 빈 왼손 약지를 테이블 아래에서 자꾸만 문지르고 있었다. 반지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은 왜인지 많이 허전했다. 처음 반지를 뺀 그날 이후로 계속.
어제 늦은 밤까지 가볍게 술이나 음료를 마셨고, 오늘만큼은 가볍고 편하게 풀어나가기 위한 이야기는 크게 영상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첫날부터 다들 편안하게 분위기를 탔다. 남성 출연자 중 대부분은 흡연자였고, 여성 출연자 중 일부도 흡연자라서 그 사이에는 또 작은 연이 생겼다. 지원은 전자 담배를 들고 술을 몇 모금 하다가 곧장 밖에서 연신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재하는 솔빈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와 남성 출연자들끼리는 이 큰 방에 이층침대를 몇 개를 넣은거냐며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방 활용도가 낮다느니, 다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거 아니냐느니.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X와 있었던 일이나, 오늘 데이트 상대가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흘렀다. 동성끼리만 모여 있는 방, 가볍게 술을 마시기도 한 상태. 그 중에서도 재하는 원래 말이 조금 많은 성격인 듯 싶기도 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재하의 데이트 상대였던 솔빈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귀여운 사람인 것 같고, 호감이 생긴다. 첫 날부터 찍어두기라도 하는 거냐며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으로 재하를 빤히 쳐다보는 지원이 있었다. 결국 그 이야기가 늘어지다 못해 모두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지원은 재하 옆에서 그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무슨 음식을 먹었고, 어떤 얘기를 했고…. 반쯤 술에 취해 재하가 늘어져, 결국 형 저 안돼요, 이제 진짜 자야겠어요. 라고 하는 순간까지. 지원은 그러고 나서도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아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기껏해야 풀벌레가 우는 소리 정도만 들리고, 온 사방이 고요했다. 지원은 그 안에서 연기를 몇 번 뱉다가 질질 발을 끌며 안으로 돌아갔다. 내일도 솔빈을 마주해야했다.
지원도 솔빈도 일찍 일어나는 생활 패턴이 몸에 배여 있었다. 솔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 할 게 언제나 많았고, 그런 솔빈을 아침부터 차에 태워 데려다 주려면 지원도 그런 패턴을 몸에 익혀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좋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지원의 고객 중에는 아침부터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겸사겸사 지원도 생활 패턴을 솔빈에게 맞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헤어지고 나서도 그 생활패턴을 바꿀 수 없었고, 지원은 그냥 그 모든 것에 솔빈을 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일찍 일어나는 패턴을 지켰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재하 같은 사람은 술에 꼴아 제대로 활동도 못할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제 술 마셨네요. 지원은 익숙하게 솔빈에게 한 마디를 던졌는데 그러게요, 저는 안 마셨는데 다들 마시더라구요. 가볍게 콩나물국으로 아침 먹을까요? 근처에 마트가 있더라구요. 라고 은비가 대꾸를 했다. 솔빈은 가만히 서 있다가 지원 옆을 지나가며 아, 죄송… 지나갈게요. 하고 다른 얘기나 하고 있었다. 은비는 익숙하게 핸드폰의 지도를 켜서 이것저것 검색하며 중심을 잡았고 지원과 솔빈은 그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다른 속내도 있어 보였지만, 은비는 혹시 운전을 부탁드려도 되냐며 지원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지원은 기꺼이 차를 운전해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은비는 선뜻 조수석에 앉아도 되냐며 지원 옆에 딱 붙었다. 솔빈은 그런 둘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뒷자리에 앉았다.
흐름은 전체적으로 전 기수와 동일했지만, 어제의 투표 결과에 이어 점심부터는 데이트가 이어진다고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사람들끼리 만든 콩나물국을 마시며 다 같이 해장을 하는 도중, 제작진에게 이번부터는 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숙소에 남아 직접 밥을 만들거나 배달을 시켜 먹어야 한다고 전달받자, 어제의 편한 분위기를 이어 재하가 솔빈에게 연신 웃음을 내비쳤다. 곧 은비도 지원 옆에서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며 다른 메뉴를 물어보고, 다른 사람들도 마음을 얻어내기 위해 여럿과 연신 대화를 걸고 본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플리케이션은 특정 상대의 이름을 누르면 메세지를 보낼 수 있는 구조였는데, 솔빈에게는 꾸준하게 1표가 더 쌓였다. 분명 재하가 밤에 그런 이야기를 한 참이니 다른 남성 출연진들은 솔빈에게서 어느 정도 시선을 뗀 느낌이었다. 그리고 굳이 솔빈이 아니어도 다른 여성 출연진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런 공간에서 굳이 그런 인기있는 사람을 골라 스트레스 받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지원을 제외하고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제도 지원이 남긴 1표와 재하가 남긴 1표를 제외하면 솔빈은 딱히 표를 받지 않았었다. 재하는 처음부터 솔빈에게 반응을 보였기 때문일까, 1표이거나 표를 받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견지원에게 도달하는 표수가 언제나 1표에서 3표 이상이었다는 점이었다. 분명 지원도 솔빈을 제외하면 딱히 시선을 맞추거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지원의 기본적인 성격 상이 나쁘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성 출연진들은 아무래도 초반부터 누가 좋다거나 신경이 쓰인다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비도 다른 여성 출연진들이 많아지면 지원에게 다가오는 것을 줄였다. 이게 기싸움인가, 하고 지원은 무감하게 웃었다. 누가 자신과 마주앉아 식사를 해도, 지원은 가벼운 대화만 이어갔다. 그의 직업인 영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스몰토크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원은 유사한 토크 주제를 몇 개 가지고 있었고,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는 그 중 두어개를 꺼내 대화를 가볍게 이어갔다.
진행이 빠른 것인지, 시간이 빠른 것인지. 지원은 대충 먹은 점심으로 더부룩한 속을 억지로 눌렀다. 첫 영업으로 고객과 식사를 할 때도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식사를 하진 않았었는데. 밥을 어떻게 먹는지 기억도 흐렸다. 그냥 빨리 솔빈이 보고 싶었다. 상대를 숙소로 데려와 야채주스를 만들어주겠다며 익숙한 비지니스 화법으로 입을 털었다. 정작 돌아와서 보이는 모습이라고는 마찬가지로 일찍 돌아온 재하와 솔빈이 하하호호 웃으며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표를 받지 못한 출연진들은 진작 따로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그 큰 부엌에는 재하와 솔빈만 있었다. 지원이 낯에 철판을 깔고 부엌 좀 같이 써도 되냐고 물어도, 솔빈은 시선을 슬쩍 돌렸다. 별 생각이 없어보이는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 지원을 형이라고 불렀다.
재하와 솔빈은 밖에 나가서 가볍게 음료를 마셨다. 아침부터 콩나물국을 먹기도 했고, 당장에 점심이 그리 먹고싶지 않은 탓이었다. 대신 카페에 먼저 왔으니 오후에 적당히 숙소에 돌아가면 요리라도 해줄까요?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재하는 지금 X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전 X와도 그리 오래 사귄 것도 아니었고, TV 프로그램에 나와 새로운 인연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는데, 거기에서 첫 눈에 솔빈에게 반했다. 재하는 솔빈에게 가득 티를 내며 본인이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풀어놓았다. 솔빈은 또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호응을 해주어 말하는 재미도 있었다. 재하는 본인만큼 말이 많은 타입은 솔빈처럼 덤덤한 타입과 잘 어울린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지금 오므라이스 하고 있는데 먹어볼래요? 재하가 솔빈을 불러세웠다. 솔빈은 딱히 어떤 음식을 만들건 그렇게 흥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재하가 본인에게 표하고 있는 관심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인거구나, 환승연애라는 건. 이게 또 TV에 나가고 있는거구나. 솔빈은 울렁거리는 것도 같았고 불편한 것도 같았다. 어느새 돌아와 멍하니 재하와 솔빈을 바라보고 있는 지원이 있기에 솔빈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이제와서 이런 걸 느낄 이유도 없는데. 지원은 같이 나갔던 채연과 함께 야채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시선만큼은 솔빈을 향한 채로. 무슨 감정인지, 솔빈은 그냥 재하의 곁으로 갔다. 네, 하고 답변하자마자 능숙하게 웃으며 숟가락을 내미는 재하의 모습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어색하지만서도 티내지 않고 그냥 받아 먹었다. 지원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지원의 야채주스는 전부 없어져 있었다. 입 한가득 들어찬 오므라이스가 맛있었고, 지원의 시선은 불편했고, 재하는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며 요리를 했다.
곧, X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 온다.
다음날은 아침에 가벼운 비가 내렸다. X의 존재를 밝히며 연애 중에 있었던 일이나, 연애 기간 같은 것을 가볍게 밝히는 날이었다. 헤어진 계기도 가볍게 흘렀다. 솔빈은 재하가 싫지는 않았다. 상냥했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게 연애와 직관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솔빈에게 있어 견지원이라는 사람은 정말 사랑한 사람이었고, 두 번 다시 그만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올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헤어지고 이제와서 그러는 것도 우습지만, 솔빈은 지원을 진심으로 잊을 수는 없었다.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한 게 견지원이라는 남자니까. 어떻게 보면 솔빈의 삶의 일부가 되었던 사람이고, 아예 지워버리면 어떤 순간이 아예 사라져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재하는 당연하게도 이 사실을 이 때에 처음 알았다. 수상스럽게도 꾸준하게 바라보던 지원의 시선의 의미를 알았다. 솔빈이 어색하게 굴면서도 너무 익숙하게 그 존재를 알고 있던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둘이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다는 것의 의미도 알았다. 어떤 이유의 헤어짐이건, 확실하게 둘은 더 이상 만날 것 같지 않았다.
이제껏 가벼운 연애 전선을 펼치던 출연진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재하는 확실하게 지원을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동물들마냥 시선이 서로 날카롭게 흘렀다. 여성 출연진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류는 계속해서 흘렀다. 지원의 시선의 의미가 꽤 여럿에게 닿았다. 은비는 씁쓸한 표정으로 지원과 솔빈을 여러 번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채연은 재하를 미련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석우는 그런 채연에게 괜히 손가락 장난을 걸었다. 그렇구나, 둘이 X였던거구나. 그렇네요, 뭐 그랬었네요, 빗소리와 함께 다소 열이 오른듯한 목소리들이 작은 신경전을 벌였다. 그런 안에서 지원과 솔빈은 대화 하나 없이 그 공간 안에 같이 존재했다. 재하는 지원이든 솔빈이든 말을 걸고 싶었지만, 꾸준하게 솔빈의 어정쩡한 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솔빈을 바라보는 지원과,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솔빈이 보였다. 재하는 주제를 천천히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올곧게 자신의 X를 찾는 건 지원밖에 없었다. 그토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지원 밖에 없었다. 결국 환승연애의 마지막은 특정 누군가와 함께 나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재하도 시선을 살짝 돌려 다른 출연진과 연을 쌓기 시작했다. 다른 것보다 재하에게 지원이라는 사람은 아직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강약약강은 아니더라도 지원같은 존재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다면 굳이 그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출연진들도 점차 여러 곳에 연을 쌓고 있었다. 오직 견지원만 다른 행동 없이 피솔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빈은 그저 그 모든 것에 잠깐 이전 기억을 떠올렸다. 집 안의 소파에서 바르게 앉아 자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지원을,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도 뽀뽀를 요구하던 지원을, 잠들기 전까지 자신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던 지원을. 아주 잠깐 마음이 술렁거렸다.
오늘부터는 서로 마음을 표시하신 분과만 식사를 할 수 있고, 이외 분들은 전원 직접 요리를 하시거나 배달을 시켜 드셔야 합니다. 이 안에서 좀 더 거리감을 친밀하게 쌓으시고, 더 많은 대화를 하실 수 있도록 스태프가 준비했으니 편하게 즐겨주세요.
X가 밝혀지고 난 후, 짧은 인터뷰가 있었다. 솔빈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X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부탁한다는 말에 느지막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거나, 좋게 만나 좋게 헤어졌다는, 틀에 박힌 이야기였다. 만나는 내내 그런 분위기였고, 헤어짐을 말한 건 본인이었다며 본인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헤어지자고 요청했다며 시작과 마찬가지로 어색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인터뷰 직후의 목소리가 다음화 예고로 울렸다.
저, 마음 정리 다 했어요. 솔빈의 나긋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숨을 가득 뱉어내는 목소리는 견지원이었다. 지원은 숨이 고르게 섞인 목소리로 왜 벌써 다 정리했어? 라는 미련 넘치는 목소리를 뱉었다. 얼굴은 확인할 수 없게 어두운 밤이었고, 두 인영이 언뜻 거리를 한참 벌리고 서 있었다. 제가 원래 욕심이 없잖아요. 그래서 금방 다 정리할 수 있었나봐요…. 지원씨, 들어가세요. 다음 인터뷰 차례여서 오신 거 아니에요? 다음화 예고는 그렇게 끝났다.
SNS는 한참 그 내용이 클립으로 잘려 돌아다녔다. 이제 지원과 솔빈은 환승연애에서 가장 뜨겁게 달궈지는 커플 중 하나였다. 익명 창구의 SNS는 둘이 뭐 때문에 저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건지 궁금해했고, 서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6회]
다른 커플은 어느새 점점 정돈이 되어 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와중에 메기 남자와 여자가 뒤늦게 합류해 특출나게 잘생긴 외모나 정말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다른 커플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일어났고, 방영 중간에 5회 예고에 나온 그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6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파민으로 가득 찬 회차였다. 견지원은 하루 종일 숙소 바깥에서 전자담배를 물고 있었다. 잠깐 흡연하러 나온 다른 출연자에게 연초를 받아서 피우기도 했다. 그냥 견지원은 내내 흡연장소에 붙박이마냥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인터뷰에도 그냥 씁쓸한 웃음으로 잘 모르겠다고 털어넘기는 모습이 흘러나왔고, 피솔빈은 다른 남 출연진과 식사를 했다.
[7회]
시작부터 피솔빈과 견지원이 마당 앞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드물게도 피솔빈이 토스트기 앞에서 멍때리는 견지원을 불러 세웠다. 잠깐 나가서 얘기해요. 주변이 웅성이는 사이에 둘은 그렇게 자리를 비웠고, 마당 앞에는 카메라 세대 이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이크 안의 소리는 밖으로 나온 탓에 숨소리 하나까지 온전하게 담겼다.
저는 마음 정리가 다 됐다고 했잖아요, 근데 지원씨는 아닌 거 같아서. 이런 거… 이런 관계는 진짜 아닌 것 같아서 말하려고 불렀어요. 만약 여기서 다시 만난다고 해도…. 그건 제가 지원씨한테 못할 짓 하는 거니까…. 제가 견지원씨 마음을 인질로 잡는 거 같잖아요. 이제 그만해요. 다른 좋은 분들도 너무 많으신데, 여기에.
솔빈은 너무 다정한 말로 지독한 표현을 쏙쏙 골라 뱉었다. 지원에게만 지독한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도 잘 마무리 하기 위해 그런 표현만 고른 건지. 지원은 불안한 시선처리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숨이 한가득 섞인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을 뱉었다.
그래, 내가…. 내가 네게 그러면 안되는데. 그냥, 그냥 편하게 있다 가. 난…. 나도 그럴게. 먼저 들어가, 난 흡연하고 갈테니까.
마지막까지 솔빈의 얼굴을 채 마주하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 제 얼굴에 마른 세수를 몇 차례 한다. 지쳐보이는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가볍게 손을 흔들고 견지원은 또 흡연장소에 가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이후 숙소 내부 카메라에는 한참 견지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저녁이 되어서 남자 출연진들이 흡연장소로 이동하는 장면에서야 다시 나타났다. 그 사이에 이전 회차에서 솔빈과 같이 식사를 한 남자 출연진과 솔빈은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다만 솔빈은 무덤하게 그 출연진에게조차 확답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거절의 뜻을 띈 이야기를. 그 이후에 외부 카메라로 변환되며, 솔빈에게 거절의 답을 들은 남자 출연진조차 흡연장소로 향하자 그 중심에는 견지원이 뻔뻔스레 웃으며 다들 어떻냐고 연애 상황을 찌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회차가 마무리됐다. SNS에서는 반응이 상당히 갈렸는데, 대개 솔빈에게 재회할 생각도 없고 연애할 생각도 없어보이는데 왜 나왔지, 따위의 썩 좋지만은 않은 댓글이 다수 있었다. 견지원 또한 솔빈 외에는 관심도 없는거냐고 촬영에 나왔으면 제대로 임할 생각을 하던지, 적어도 피솔빈은 뭔가 하려고 하기는 했다며 견지원을 상당히 불편하게 보는 댓글도 꽤 있었다.
[8회]
최종 선택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 견지원과 피솔빈은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시청자들은 점차 기대도 안 했다는 눈치가 되고, 이후 추가된 출연진 두명으로 인해 엉망이 된 다른 커플의 관계도에 더 열광했다. 견지원과 피솔빈은 그렇게 짧은 어그로 끌이 용으로 사용되고 점차 시들어갈 타이밍이었다. 최종 선택에서 피솔빈이 견지원을 선택한다는 결과와, 견지원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부터 최종 선택을 진행하겠습니다. 어플리케이션에 상대를 눌러주시고, 상대에게 메세지를 보내주신 후 그 상대를 찾아가주시면 됩니다.
먼저… 남자 출연진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최종선택, 견지원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남자 출연진 최종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여자 출연진의 최종 선택이 진행됩니다.
최종선택, 피솔빈은 견지원을 선택했습니다.
최종선택이 전부 종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종 선택에 이어진 커플은…….
♪ 띠링, 『인질로 잡아도 돼요?』
♪ 띠링, 『평생?』
SNS가 불탔다. 정말 말 그대로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1초에 1번씩 환승연애와 관련된 글이 올라왔다. 다른 커플보다 견지원과 피솔빈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된 클립이 올라왔고, 이 클립의 길이가 채 10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둘의 겨우 있던 교류가 ‘거기 있는 간장 좀 주세요’ 정도 따위였다는 점, ‘제가 견지원씨 마음을 인질로 잡는 거 같잖아요’ 의 발언, 하루 가까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던 견지원, 이런 장면이 순식간에 넘어가는 클립은 실시간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까지 올랐다.
마지막에 피솔빈이 전달한 메세지의 내용과, 최종 선택의 내용이 역순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SNS 내에서는 둘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부터 견지원의 SNS가 공개로 풀리기 시작했고, 환승연애는 2편을 남겨놓고 있었다.
[9회]
X와 깨지고 다른 사람과 최종 커플이 된 커플들의 예전 기록을 천천히 불태우고, 서로 좋게 마무리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찬 특집 회차였다. X와 다시 재결합한 커플들의 경우, 싸우게 된 경위나 헤어졌을 때의 기록 위에 새로 찍은 사진이나 메모를 덧붙여 앞으로 더욱 견고한 관계가 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의 기록을 처분하거나, 혹은 마지막 대화를 하는 것으로 특집 회차를 마무리했는데…. 수상하게도 견지원과 피솔빈은 해당 회차에 전혀 출연하지 않았다. SNS는 도대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에 대해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리고 다음, 최종화 예고에서 견지원과 피솔빈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등장하고, SNS에서는 둘이 재결합한 게 아닐지에 대해 추리하기 시작했다. 그 날, 견지원의 SNS에는 와인잔 2잔이 나란히 있고,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작은 손이 나온 사진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식탁과 접시는 견지원의 집안 소품으로 이전부터 자주 올라오던 것들이었다.
[최종회]
솔빈아, 잠깐만, 아니. 저기 촬영 다시 한 번 어려울까요? 아니 이건 아니잖아요. 솔빈아, 솔빈아?
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흔들리는 카메라 사이에서 들려온다. 촬영 스탭들이 모자이크 되어있는, 정말 급박하게 찍은 촬영본이었다. 겨우 지탱한 카메라는 주기적으로 흔들리기도 하면서 지원과 솔빈을 찍고 있었다. 지원은 언뜻 달려오면서 그 모습을 보았지만, 애써 그 카메라를 무시하고 솔빈을 잡았다. 짐을 챙기고 돌아가기 직전의 모습이라, 이어진 커플들은 같은 차량을 타기도 하고, 친해진 동성 출연자들끼리 가볍게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는 뒷모습도 있었다. 그 정도로 어수선한 상태에서 견지원과 피솔빈은 대화하고 있었다.
역시 인질은 좀 그렇잖아요. 붙잡히지 말고 살아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난 그냥 네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아뇨, 저 선택도 안 하셨잖아요.
인질로 삼아줘, 인질 시켜줘.
그 공터에 견지원 목소리가 빽빽하게 울렸다. 잠깐 사이에 짐을 다 챙기고 나온 출연진들조차 그들에게 시선이 끌릴 정도로, 흔들리는 카메라 줌 안으로 솔빈의 발갛게 달아오르는 볼이 언뜻 스쳤다. 견지원은 숨 길게 뱉고 솔빈의 곁까지 냉큼 걸어갔다. 지금 주변이 그 둘을 향해서 모조리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솔빈만 한참 시선을 뒤흔들다가 고개를 숙이고 급하게 캐리어를 끌고 반쯤 뛰듯이 걸어나갔다. 그제서야 따라붙은 다른 카메라가 둘을 좀 더 집중해서 촬영하고, 다른 출연진들의 소리는 더 뒤로 묻히기 시작했다.
집에 어떻게 가려고, 아직 차 안 뽑았지? 데려다줄게. 아직 그 근처에 살아? 아니면 학교 근처?
아뇨, 저… 저 택시 타려구요. 괜찮아요.
그러지말고, 지금 겨우 잡은 인질인데 인질이랑 같이 가야지. 응? 나 차 깨끗해. 가자, 데려다줄테니까….
푸하, 작게 솔빈의 숨소리가 마이크를 먹었다. 솔빈도 진즉 마음 정리를 다 했으면서 종종 눈에 밟히는 지원이 있기는 했다. 단순히 1년, 2년이 아니라 5년이 넘는 순간을 함께했다. 심지어는 함께 그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마음이 아예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애써서 제 곁을 한참 맴돌고, 또 마음을 정리하라는 말에 충실하게 그 말을 지키려고 다가오지도 않다가 최종 투표에서조차 본인을 선택하지 않은 이 사람이라서, 그래서 솔빈은 견지원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집에 가요. 같이.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은 환승연애의 패널로만 자리하고 있었던 저희 세명이, 이번에는 최종 커플 분들을 만나러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자, 한 커플씩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어서오세요~
그동안 환승연애 내에서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고, 출연진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짚어주던 패널들이 이렇게 나와 시청자들의 질문을 대신하고 또 여러가지 비하인드와, 촬영이 종료된 후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하나씩 물어보는 것이 최종회의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어진 커플 셋과, 특별출연 커플 하나가 자리했고, 당연하게도 특별출연의 커플은 견지원과 피솔빈이었다. 회차 내에서는 결국 선택을 하지 않아 이어지지 않았으나, 마지막에 풀려진 비하인드 영상 내 견지원의 지독하게 절절매는 모습과 피솔빈의 웃음소리로 모두가 예측할 수 있었다.
모든 회차가 공개되고, 그 날 저녁 견지원의 SNS 내에 프로필 사진이 변경됐다. 커플링을 나란히 끼고 손을 잡고 있는 사진. 또 새롭게 올라온 피드 하나에는 핀이 꽂혀 메인으로 걸리게 되었는데, 둘이 나란히 커플 파자마를 입고 같이 환승연애를 보며 가벼운 식사를 하고 있는 셀카였다.
[비하인드 컷]
솔빈씨는 따로 주변에서 연락 온 건 없으세요? 왜냐면 마지막에 지원씨와 그렇게 엇갈리게 되었으니까~
아… 사실 저는… 반 아이들이 그래서 어떻게 된건지 많이 물어봤어요. 같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질문을 많이 받았었고… 하하. 그래도 매번 커플링을 끼고 있어서 선생님들은 다들 눈치를 채시더라구요.
커플링은 제가 매번 끼라고 했고, 솔빈이 반은 초등학생들인데도 많이 물어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린이들도 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을 보는구나 싶어서 신기했어요.
[속마음 메세지]
To. 솔빈 오늘 옷 잘 어울려요. 새로 샀어요?
To. 솔빈 다음에 제가 같이 나가자고 하면 응해주실 생각 있어요?
To. 솔빈 오므라이스 맛있었나봐요. 나도 잘 만들 수 있는데
To. 솔빈 나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 X 소개서 : 피솔빈 소개서 ]
견지원 -> 피솔빈 소개
솔빈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지만, 가끔 한가득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가 많아요. 종종 엉뚱하게 굴고, 의외로 알지 못하는 게 많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덤덤하고 모든 욕심을 포기할 줄 알아서 가끔, 아주 가끔 마음을 힘들게 해요. 하지만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해서 무심코 지나치면 이미 온 생각이 솔빈이에게 쏠리게 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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