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6화. 실패한 사랑꾼 또는 잊혀진 소설가 (2)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장마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연습으로 결석한 동아리 부원 채주현과 서하늘─결국 주현과 하늘도 나중에 고전문학부에 가입했다. 본인들의 의지가 강했다─로 인해 소연과 단둘이서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동아리 활동의 일환이었다.

“여루야, 일단은 네가 동아리 부장이니까 주현이랑 서하늘한테 감상문 걷는 건 네가 해야 할 듯. 일단 내 건 여기.”

“응. 근데 하늘이는 이미 냈고, 주현이한테는 내가 다시 말해볼게.”

여루가 덤덤한 표정으로 소연이 내미는 프린트를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 다른 팔로 도서관의 유리문을 당겨서 들어간다. 그 뒤를 소연이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도서관은 늘 그렇듯 인기척이 드문 장소였다. 두어명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는 것과 사서 선생님이 카운터에 앉아 졸고 계시는 풍경은 어느새 너무나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여루는 소연의 감상문을 책상 위에 두어 자리를 맡아 두고는 소연과 헤어져 책장의 숲 사이로 가볍게 들어갔다. 언제나 그리운 종이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고 그녀는 그것을 기꺼이 탐했다. 활자 속 세계가 눈앞에 열린다.

책장으로 이루어진 나무들 사이를 거닐다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든다. 나뭇가지의 이름은 『소유(Possession)』. 어느 여인이 벌거벗은 채 그레이브즈의 시를 암송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나지막이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 꿈틀거리며 겨울잠에서 깨어난 대지는 풀과 꽃들을 내어놓네 눈이 내려도, 떨어지는 눈에도 아랑곳 않고.

어느새 시선이 **신들의 황혼이 이끄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불꽃이 튀었다. 되 피어나지 않는 허망한 불꽃의 역사, 양심과 갈등의 역사, 온갖 사건과 냉혹한 법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어린나무가 꽃피운 들녘에 다다르자 석양이 세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변색한 종이 위 검은 글씨 사이로 그늘이 졌다. 여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젖혔다. 활자를 탐하다 보니 어느새 현실 세계에도 해가 지고 있었다. 읽고 있던 책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늘어섰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도서관의 폐장 시간이었고, 귀가할 시간이기도 했다. 익숙한 인기척에 옆을 흘긋 보니 모르는 사이 제 옆자리를 차지한 소연이 손목시계를 톡톡 치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잇츠 타임 투 고우 홈~”

“...음.”

“착한 어린이는 집에 갈 시간이에요. 여루야, 그 책 마음에 들면 빌려가지 그래?”

“아니, 됐어. 내일 또 와서 읽지 뭐.”

여루는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뭣보다 나, 이전에 빌린 책 아직 반납 안 해서.”

“아. 오키. 나는 이거 빌리려고.”

소연이 꽤 두꺼운 책을 든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총균쇠』. 쟤는 의외로 저런 책을 좋아한단 말이지. 여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빌리러 카운터로 향하는 소연을 눈에 담았다. 이제 나도 이걸 돌려놓으러 가야지. 느릿한 걸음으로 다시 나무 껍질 색의 책장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자리가… 어디였더라.”

생각이 나지 않아 책등에 붙은 스티커를 곁눈질하며 고심해 원래 자리를 찾았다. 꽂아 넣는 김에 근처 책들의 매무새도 좀 정리해주고는 자리를 뜨려고 하던 참이었다.

“…?”

같은 줄의 맨 끝 쪽, 구석진 자리. 혼자만 모서리가 튀어나와 모난 모습으로 꽂혀 있는 낡은 책이 눈에 띄었다. 어두운 와인색 벨벳 표지의, 어딘가 낯익은 표지를 가진. 여루는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서 구석 자리로 갔고 익숙한 제목의 책 쪽으로 손을 뻗었다. 『최초의 벼락이 서 있는 항구』.

“아...”

역시. 너무나 익숙한 이름의 저자.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래서 더욱 사랑했고 닮지 않으려 했던 작가의 이름.

“...아빠.”

실패한 사랑꾼이자 지금은 잊힌 소설가에 불과한 한 남자. 그녀의 아버지가 쓴 소설이었다.

*Robert Graves (1895~1985)

**『신들의 황혼(Ragnarok)』(1840), 랜돌프 헨리 애쉬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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