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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지난 자리

하우스키퍼 하스티나 Non-CP 현대AU

2020.10.27 포스타입 연성 백업


 무르익어가는 봄의 하늘은 꽤나 맑고 아름다웠다. 깊은 바다처럼 짙은 푸른 하늘, 그리고 그 하늘에 떠다니는 한 점의 구름, 그 아래로 펼쳐진 구름만큼이나 새하얀 벚꽃. 마치 동화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고등학생에게 아름다움을 즐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스티는 수업을 위해 분주히 걸음을 옮겨 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와 그의 볼을 스쳤다. 평소와 같은 나날이었다. 교문 근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저기요!”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가 절 향한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바삐 걸음을 옮기던 하스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신경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저기요! 그 목소리는 다시 한 번 같은 방향에서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먼 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한 학생이 보였다. 벚꽃 같은 밝은 분홍색 머리를 위로 올려 묶고 검은 마스크를 쓴, 여러모로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학생이었다. 학생은 하스티 앞까지 뛰어와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쓰고 있던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하스티를 바라보았다.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하스티의 손에 하얀 서류 봉지가 쥐어졌다.

 

 “그것 좀 1학년 3반에 전해주시겠어요?”

 “네?”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티나 것이라고, 티나 조퇴 서류라고 하면 모두들 알 거예요. 그게 제…… 제가 제출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급해서요.”

 

 이름이 ‘티나’인 것으로 추정되는 학생은 숨이 차는지 조금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티나는 하스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곤 살짝 내린 마스크를 다시 고쳐 썼다. 그는 곧 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교문을 향해 멀어졌다. 다시 보니 가방도 메고 있고, 교복도 정복으로 갖춰 입고 있고…… 아무리 봐도 수업을 듣는 학생보단 하교하는 학생 차림이었다. 하스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하스티는 아차 싶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다! 시계를 확인하자 수업까지는 1분이 채 남지 않았다. 하스티는 책과 티나에게서 받은 서류 봉투를 품에 꼭 안고 벚꽃이 흩어진 길을 달렸다. 슬리퍼에 꽃잎이 이리저리 달라붙었다.

 

 

 

 하스티는 3교시 수업이 끝난 뒤, 티나가 부탁한대로 1학년 교실로 내려가 서류 봉투를 반장에게 전했다. 반장은 익숙하다는 듯 서류를 받아들었다. 볼일을 마치고 다시 계단을 올라오며 하스티는 다시 한 번 올려 묶은 분홍색의 머리칼과 그의 반을 떠올렸다. 다급하게 달려와 서류 봉투를 건네고 마스크를 올려 쓰고 달려가던 모습. 익숙하게 서류 봉투를 가져가던 1학년 3반 반장.

 자초지종을 듣고 해답을 준 사람은 카이라였다. 하스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카이라는 오히려 하스티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카이라는 새우를 하나 집에 넣고 우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티나라면 걔잖아? 1학년에 연습생이라는 애. 엄청 유명한데, 몰라?”

 “…… 몰랐어.”

 “하긴, 뭐. 초코바 너라면 모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유명해, 걔. 성격도 착하고.”

 

 연습생이었구나. 하스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학생들 사이의 소문에 관심이 없는 탓이었다. 연예인이라면 알았겠지만, 연습생은……. 아무튼 꽉 올려 묶은 머리와 마스크 뒤로도 보이던 범상치 않은 외모, 살짝 스친 하얗고 부드러운 손. 확실히 평범한 학생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스티는 조용히 콩나물을 한 가닥 들어 입에 넣었다. 제 앞에 놓인 급식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카이라가 그 맛있는 새우 볶음밥과 장조림을 왜 그리 깨작깨작 먹냐고 화를 냈지만 하스티는 아랑곳 않고 허공을 응시하며 티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걔가 그렇게 신경 쓰여?”

 “신경 쓰인다기보다는…….”

 “연습생이면 조퇴 서류 같은 거겠지. 반장도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며?”

 조퇴……. 그렇겠다. 하스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조림을 하나 입에 넣었다. 생각에 빠진 하스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카이라는 하스티의 식판에서 몰래 메추리알을 하나 집어 제 쪽으로 가져왔다. 하스티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잡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아무튼 초코바, 쟨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카이라는 생각에 잠겨 있는 하스티를 바라보다 결국 메추리알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티나를 다시 만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딱 이틀 정도 뒤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일찍 등교한 하스티는 반 앞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쳤다. 복도 벽에 기대어 서있던 티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티나는 그때와 다르게 생활복을 입고, 머리를 푼 모습이었다. 티나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티나의 시선으로 하스티가 들어오자,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하스티 선배!”

 

 티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와 하스티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황한 것은 하스티 쪽이었다. 얘는 원래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나……? 당황해서 굳어버린 하스티와 달리, 티나는 아무렇지 않게 하스티의 목을 한 번 꽉 끌어안곤 떨어져 하스티의 두 손을 꼭 잡고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도와주셨잖아요. 감사합니다. 저번 일은 꼭 기억할게요.”

 “네…….”

 

 하스티의 귀는 꽤나 붉어져 있었다. 갑작스레 포옹을 당한 탓이었다. 그런 하스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나는 아무런 기색 없이 웃으며 가지고 있던 젤리나 쿠키 따위를 하스티의 손에 쥐어주었다. 감사의 의미로 전하는 선물인 모양이었다. 선물을 받은 하스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하스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호의였는데, 보답까지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티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같은 젤리를 더 꺼내 하나는 제 입에 넣고, 하나는 하스티를 향해 내밀었다. 하스티는 얼떨떨하게 티나를 한 번, 젤리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곤 젤리를 집어 들었다.

 

 “하스티 선배, 1학년 사이에서는 꽤 유명합니다. 알고 계셨나요?”

 “…… 어떻게 말입니까?”

 “저도 선배를 알고 있었거든요.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선배, 입학식에서 다친 학생을 도왔잖아요. 한 1학년이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모두 방관하며 수군거리기만 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선배보다 큰 남학생을 부축한 게 정말 멋졌어요.”

 “어, 그건…….”

 “아, 물론. 선배가 그런 사람이어서 선배에게 부탁을 한 건 아니에요. 급히 가야 하는 상황에 선배가 교문 앞을 지나고 있길래…….”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스티가 갑자기 말을 끊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스티는 제가 더 당황하여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잠시 작아졌던 하스티의 목소리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건……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기껏 뱉은 하스티의 말에 티나가 풋,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꽤나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던 하스티는 티나의 웃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스티는 여전히 손에 티나가 준 젤리와 쿠키를 손에 쥔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티나는 진지한 하스티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다, 진정이 되고서야 하스티의 손을 놓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래요. 저는 선배의 그 마음에 감동한 겁니다. 선배의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그 날은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너무 급해서 그랬나 봐요.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사람이 선배였더라고요.”

 “…… 그렇군요.”

 

 하스티는 칭찬을 받은 것이 쑥스러워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티나는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스티에게 서류를 맡긴 다음날, 등교했을 때 반장이 2학년 하스티 선배에게 서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입학식에서의 하스티의 모습을 떠올린 것. 마지막엔 하스티를 꼭 만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날은 조퇴를 해야 했어요. 선생님께서도 허락한 일이었는데, 미리 서류를 제출하는 걸 잊었더군요. 제 일이니 다음부터는 잊지 말아야죠. 선배의 호의는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진 않아도 돼요.”

 “선배는 본인의 호의에 자각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단호한 티나의 어투에 하스티의 말문이 막혔다. 더 덧붙일 말이 없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스티는 어색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티나는 다시 한 번 하스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스킨십에 있어 자유로운 티나와 다르게 하스티는 작은 접촉에도 깜짝 놀라고는 했다.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그 날, 조퇴는 왜 했던 거예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즘 바쁘거든요. 저, 연습생이거든요. 연습이라든지…….”

 

 티나는 말끝을 살짝 얼버무렸다. 하스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티나의 대답에 살짝 의아함을 느꼈지만 구태여 물어보진 않기로 했다. 대답을 하는 티나의 표정이 난감해 보이기도 했고, 곧 예비종이 울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티나는 하스티의 손목을 붙잡아 시간을 확인하고는 하스티의 쪽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선배도 수업 준비하세요.”

 

 티나는 하스티를 향해 손을 흔들곤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가볍고 여유로운 발걸음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스티는 조용히 제 손에 들려 있는 형형색색의 과일 젤리와 초코 쿠키, 노란 하스티 초코바를 바라보다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복도에 서 티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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