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 타입] S님 알티추첨 리퀘
모든 캐릭터들의 이름은 알파벳으로 리네이밍 되었습니다.
미묘한 날씨였다. 으레 추워지고 다시 온화해지기를 반복하는 가을의 날들이건만, 유독 미묘한 날씨가 지속됐다. 괜히 환절기라고 불리는 계절이 아니다 싶다. 아침 저녁으로는 외투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추위가 몸을 찌르고, 한낮에는 걸친 외투를 당장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날씨. 애매한 가을의 날씨. 그렇다면 가을답게 맑기라도 맑아야 할텐데, 야속한 하늘은 가끔 가는 비를 내렸다. 가는 비는 곧 곡물을 수확할 땅을 적시고, 으레 추워지는 저녁과 새벽에는 그 물기가 더 사람을 춥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최악의 날씨였다. 봄이라면 앞으로 따뜻해 질 일만 남았다고 즐거이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겠다마는... 추적추적 내리는 가는 비는 Y에게 잠시간의 감상에 젖어들게 했다. 언제나 지나치게 쨍한 하늘은 그녀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적당히 가려져있는 하늘, 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일까. 촬영장에 가는 내내 짙게 차양이 되어있는 차창 밖으로 비를 바라보게 된 건.
이런 환절기의 날씨는 감기와 같은 자질구레한 병을 불청객처럼 몰고 오는 법이었으나 Y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몸 관리도 배우의 역량 아니던가. Y는 자신의 역량에 자신이 있었고 그것은 건강관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관리가 덜 되어서 스케줄을 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천재 배우란 그런 것이라, 으레 생각했다.
그러나 강행군으로 진행된 촬영이 가을 내내 이어지고, 변덕스럽고 미묘한 날씨는 사람의 몸을 점점 나빠지게 하기 딱 좋았다. Y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관리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병에 대해서는 자만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병이니까. 언제 찾아왔다 갈지 모르는 지독한 불청객.
그래, 그 불청객이 Y를 찾아왔다.
강행군이 마무리될 때, 가을을 거의 다 넘었을 때 Y는 자신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단순한 감기겠거니, 하며 일찍 잠들고 몸을 관리해야 했으나 마무리 촬영에서 타 배우의 실수로 리테이크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것도 꽤 여러번. 여러번에 걸친 재촬영 덕분에 그녀의 퇴근은 늦어졌다. 늘 그녀를 마중하러 나오는 이가 그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 듯 했다.
“S.”
“아가씨, 늦으셨군요. 어서 들어가 쉬는게 좋겠습니다.”
“그래요. 오늘 따라 피곤하네요...”
“촬영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니까요. 돌아가면 목욕물을 준비해놨으니, 부디 편히 쉬시기를.”
집에 돌아간 Y는 으슬으슬한 몸을 목욕물에 담갔다. 보통 이러면 피로가 천천히 녹아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왜인지 더 큰 피곤이 몸을 무겁게 누르는 듯 했다. 천천히 몸을 씻고 나와 곤히 잠들면 되겠지. 큰 일은 없을 것이다. 늘상 그래왔듯. 늘상...
그러나 작은 바람은 왜 이리 쉽게 어그러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 일이 없을거란 Y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날 새벽부터 올라온 고열과 오한이 그녀의 몸을 덮쳐 깨웠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가 부딪힐 정도로 떨리는 몸, 마디마디 찔러오는 듯한 고통.
‘추워...’
오한이 분명히 따뜻할 터인 집안에서 이불을 끌어안게 만들었다. 몸이 덜뎔 떨렸다. 아파, 잠에서 깨며 가장 먼저 든 생각. 감히 앓는 소리 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파온다. 겨우 입에서 낸 말이란,
“S...”
그리고 그녀의 충실한 집사가 그녀의 곁에 와 이마에 손을 짚었다. 크게 오른 체온이 그의 손에 불쾌감을 준다. 덜덜 떨리는 몸에 충실한 집사는 머릿속에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린다. 우선은 체온을 떨어트릴 물수건이 필요하겠지. 해열제도 같이 복용한 후,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서 체온을 떨어트린다. 적당히 시원한 물수건으로 준비하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가씨. 약과 물수건을 준비하겠습니다.”
고열이 Y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지러웠다. 아팠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한 상태는 아무리 Y가 강한 이라도 약한 점을 드러내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으레 아픈 사람은 정에 고픈 법이지. Y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열이 오른 지금 바로 생각나는 말을 뱉었다.
“가지, 가지 마세요.”
왜지? S은 미묘한 간질거림이 제 가슴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미묘한 것은... 그러나 깊게 생각하기 전에, S은 우선 제 아가씨를 안심시켜야 했다. 아픈 이는 으레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S은 Y의 이마를 잠시 매만지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저 약과 물수건을 가져올 뿐입니다. 염려마세요. 저는 당신의 집사입니다.”
“가지... 않는거죠?”
“그 어디에도.”
짧은 대화는 미묘한 다정을 담고 있었다. 곧 약과 물을 가져와 먹이는 손길에도, 그리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열을 식혀주는 행동에도,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어떤 방향의 다정을 담고 있는 행동들. 열이 식고, Y는 S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까무룩 잠에 들었다.
“...대체 연기 따위를 해서 뭐 어쩌자는 거냐. 집안 망신을 시키자는 것도 아니고...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지는 못할망정.”
“하지만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에요. 잘 할 수 있어요. 보여드릴게요!”
“됐다. 천덕꾸러기도 이런 천덕꾸러기도 없을 텐데. 네가 그런다고 성공할 거 같으냐? 지금이라도 너의 자리를 알고, 가업을 이어. 두 말 하지 않겠다.”
“...저는 할 수 있어요. 해낼 수 있어요!”
“없어. 네 자리를 알아라.”
“해낼거에요. 보란듯이!”
“듣기 싫다! 쓸모 없는 것.”
짧고 날카로운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아버지, 어머니, 다른 가족들의 목소리가 웅웅댄다. 가업을 잇지 않는 쓸모없는 딸에 대한 날 선 말들, 한숨들, 조롱 섞인 웃음들... 그것들은 열에 달아오른 Y의 머리를 휘젓는다. 아주 괴롭게, 한 숨도 편히 자지 못하게...
그런 그녀를 깨운 건 S이었다.
“아... 너무 늦었어요?”
“안심하세요, 아직 새벽입니다. 아가씨께서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 잠시 와봤을 뿐입니다.”
“다행이네요, 아직 늦지 않아서...”
“이 몸으로 스케줄을 소화할 수는 없습니다. 쉬셔야 합니다. 촬영장에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통의 Y라면 S이 그러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스케줄을 미루다니, 그럴 수는 없다. 막바지에 다다른 촬영인데, 마무리를 완벽하게 해야 하니까. 완벽해야만 하는데, 고작 감기로 스케줄을 미룰 수는 없는데. 증명해야만 하는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럴 힘조차 없었다. 지독한 감기였다. Y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풀썩 힘없이 누워버렸다. 몸은 아까 전보다는 덜 아팠지만, 지금 무리를 했다간 더 악화될 게 뻔한 몸 상태란 걸 스스로도 알았다. 그래서 Y는 S을 말리는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저는 아가씨의 집사입니다. 당연히 와봐야지요.”
“...그래도요.”
“다시 주무세요. 아직 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더는 악몽을 꾸지 않도록.”
Y가 다시 잠에 든 후, S은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의 푸른 빛을 바라보았다. 마치 Y의 눈동자 같은 색. 이 정도의 일로 감상에 젖을까, 악마가? 그러나 가을비를 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던 Y처럼, S도 짧은 시간 하늘을 훑고 지나갈 새벽의 푸른 빛을 보고 감상에 잠시 빠졌다. 제 눈 앞에 있는 아가씨, 아니, 먹이... 반드시 극상의 맛으로 만들어 집어 삼키겠다고 다짐했건만, 어째서인지 자꾸 마음을 간질이는 미묘한 감정은 뭘까.
이 여자는, 뭘까. 자신의 예상을 늘상 뛰어넘는, 그래서 자꾸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게 되는 것일까. 이 감정의 이름은 뭘까, 잠시 감상에 젖어 창 밖과 Y를 천천히 번갈아본다. 제가 계약할 때 알던 아가씨로서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이 만든 고비마저 스스로의 힘으로 넘어버렸을 때, S은 어떤 직감을 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그것을 인정할 때가 아니다. 그래서 S은, 가만히, 새벽의 푸른 빛이 가시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의 경쾌한 아침인사가 울린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8시 뉴스의 000 아나운서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쌀쌀합니다. 큰 일교차에 요즘 감기에 걸린 분들이 많으신데요, 아침 저녁으로 가벼운 외투나 가디건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의 뉴스 시작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침대에 늦은 시간까지 누워있다 일어나는 듯 했다. 푹 잤기 때문일까, Y는 몸이 지난 밤보다 훨씬 가벼움을 느꼈다, 그녀가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S은 그녀를 위한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왔다. 차가운 아침공기가 창가에 닿아있었다. Y는 아직은 열감이 있는 손을 창가에 댔다. 손이 닿는 곳에 하얀 자국이 생겼다. 희미한 미소가 Y 입술 가에 피어올랐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가씨?”
S은 가져온 음식을 침대맡 테이블에 올려두고 Y의 이마께에 손을 올렸다. 지난 밤과 새벽에 비하면 한풀 꺾였지만 아직 열은 남아있다. 이마의 열을 재는 손이 묘하게 오래 붙어있다가 떨어진다. Y는 그 미묘한 다정함을 잰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와 같이 예의바른 미소를 짓는 S은...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몸이 한결 나아졌어요. 열도 많이 떨어진 것 같고요.”
“그런 것 같습니다. 식사를 하시고, 아침약을 드신 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습니다. 열은 내렸다지만, 요즘 감기가 독하다는 말이 돌더랍니다.”
“저기, S.”
“네, 아가씨.”
“새벽에 와줘서... 고마워요.”
“저는 아가씨의 집사인걸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요. 고마워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당연한 다정함이 아니다. 이유 없는 다정함이 아니다. 이 묘한 기류, 감정, 그리고 부정을 둘 모두가 안다. 그렇기에 이 시간은 곧 녹아버릴 작은 얼음만큼 연약하고, 또...
“식사를 다 하실 때 까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씻고 싶은데... 간 밤에 열이 났으니까요.”
“목욕물 역시 준비되어 있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고마워요, ...언제나.”
오늘따라 고맙다는 말이 잦음을 Y도, S도 안다. 기묘한 기류는 평소보다 좀 더 둘 사이의 거리를 미묘하게 바꿔두었으니까. 거리감 마저 미묘한 이 때에, 단어 하나하나는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이 단어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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