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언약식

행방불명의 길

노을빛 세계에서 너와 노래를…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드림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D + 600


뜨거운 차를 겁도 없이 홀짝이던 초월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한다. 그러나, 카마타리가 반응할 틈은 없었다. 초월은 곧, 어떤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바로 하고 반으로 갈라진 과자를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도 된다는 다정한 미소 앞에서 카마타리는 남은 과자로 손을 뻗어야만 했다. 확언은 없었으나 맛은 있었다. 유명한 곳으로 엄선하고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요령이 있는 편은 못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입꼬리가 미미하게 위로 당겨진다. 그렇게 카마타리는 자신을 기다리는 초월에게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접혔다. 많은 것을 담아내어도 머물지 않는 눈이었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찻잔을 감싼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짙은 장갑으로 감추고 있기는 했지만, 부정할 수 없이 피에 젖어 검게 물든 손이었다.

그러한 카마타리의 생각을 씻어내기라도 할 작정인지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떨어지던 굵은 빗방울은 순식간에 거센 빗줄기가 되어 시야를 잘라내었다. 창밖으로 눈길을 잠시 주었던 카마타리가 다시 초월을 바라보았다. 비를 뚫고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건만 초월에게서 당혹은 읽을 수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평온하게 바른 자세만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 머물렀다 가겠나?”

“늦은 시간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듣자 하니 밤까지 계속 쏟아지는 비인 듯했다. 차가운 빗속을 홀로 걷는 초월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카마타리가 몸을 일으켰다. 날씨가 변할 일은 없었다. 다과茶菓는 바닥을 보였고 명분 또한 사라졌다. 알 수 없는 혼란이 카마타리를 덮친다. 카마타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길을 걷고자 하였으나 초월은 그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전의 나라로 가는 건가.”

“비가 많이 오니까 오늘은 저 혼자 갈게요.”

인과관계가 어울리지 않는 묘한 문장에 자신도 모르게 무어라 말하려고 했던 카마타리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올곧은 자세로 저를 올려다보는 초월에게 부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랑을 받고, 또 주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새하얀 손이 책상 위를 정리한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희미한 미소가 입술 가득 고였다.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보조개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자리에서 일어난 초월은 오른손을 제 가슴에 얹으며 상체를 살짝 숙여 보였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카마타리 씨는 맛있었나요?”

“……그래.”

덧붙여지는 것은 없었다. 초월은 그러면 되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반면에 카마타리는 해야 할 말이 많았다. 정확하게는 하고 싶은 말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카마타리는 수많은 마음을 저 깊은 그림자 아래로 가라앉혔다. 지금, 이 순간 밖으로 꺼내야 하는 것임을 알았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카마타리가 초월을 바라보았다. 저를 향한 미소는 늘 그러하듯 상냥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옆으로 기우는 고개를 따라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내렸다.

“다음에 또 뵈어요.”

“……조심히 가라.”

“평온한 밤 보내시길 바랄게요.”

잠시 망설이던 초월이 카마타리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입을 맞추듯이 축복을 불어넣는 것이다. 초월이 자세를 바로 하면 멋쩍은 웃음이 돌아온다. 카마타리의 손은 여전히 저보다 작은 하얀 손바닥 위에 얹어진 상태였다. 깊은 바다에 잠기면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깨닫는다. 카마타리는 두 손을 거두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한 초월은 뒷걸음질하더니 우산을 펼치며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카마타리 또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바깥은 너무도 추웠다. 문을 채 닫지도 못하고 어금니가 거칠게 맞물리며 카마타리는 뒤늦게 저택을 나섰다. 하늘에서 지면으로 무섭게 내려꽂히는 빗줄기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과 같았다. 이름을 불러도 비명이 될 것 같아 카마타리는 한참 동안 홀로 비를 맞다가 저택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기에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던 수건을 지나친 것은 그 때문이었으나,

“카마타리 님, 감기라도 걸리시면 초월 님이 걱정하실 겁니다.”

“…….”

그마저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몸을 씻으면서 덥히고 돌아온 카마타리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지워질 것 같았고 눈을 감으면 얇은 눈꺼풀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가슴을 압박하며 목을 졸라대었다. 시야에 어두운 천장만이 가득 들어찬다.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텅 빈 몸을 채우고 터져나갔으나 빗방울이 부서지는 소리는 여전히 크고 선명했다.

무엇도 할 수 없는 채로 질식하려는 찰나 카마타리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짙은 어둠에 잠겨 형태가 보이지 않았기에 무엇도 그저 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카마타리는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말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움직임을 따라 오래된 피 냄새가 퍼진다. 이윽고, 칠흑 속에서 두 손이 빛을 받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닳고 닳아 지워지지 않을 핏자국만 남은, 이 추악한 손을 너는 스스럼없이 잡아주었던가. 그래, 안온安穩 역시…….

짧게 다듬은 손톱이 단단한 손바닥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저를 위한 바람마저 이루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카마타리는 파도에 떨어져 나간 파편처럼 손을 떨어뜨렸다. 이불 위로 툭, 내려앉은 손은 과하게 들어간 힘으로 인한 떨림이 아직 남아있었다. 끝내 상체를 일으켜 앉은 카마타리가 힘없이 얼굴을 쓸어내린다. 토막 난 숨을 가다듬으며 뒤늦게 호흡을 되찾으려 했다. 초월을 위해서라도 분수는 확실하게 지켜야만 했으므로 카마타리는 모든 것을 어둠으로 뭉뚱그려 씹지도 않고 무작정 삼켰다. 이름조차 받지 못한 그것이 이내 기도까지 압박해 왔음에도 카마타리는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아침이 밝고 폭포처럼 쏟아지던 비마저 그치자, 카마타리는 평온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눈 밑이 짙게 그늘져있기는 하였으나 평소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출근한 카마타리는 본인의 일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다. 그러고, 사라진 오우지를 찾는다며 궁을 나섰다. 카마타리는 어렵지 않게 오우지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고 그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초월이라면 후히토를 찾아가는 게 빠르지 않아?”

“…….”

그러나, 자신이 다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도 신경이 주변을 향했다는 것을 오우지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간파당한 카마타리는 그로는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오우지를 핑계로 삼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변명도 찾지 못하는 사이에 오우지가 카마타리를 후히토에게로 이끌었다. 두 사람의 방문을 지레짐작한 후히토가 질색했으나 카마타리는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

“안 맡아. 조수도 없다고.”

“초월은, …오지 않았나?”

“오늘은 쉴 수 있냐고 하더라. 빨리 찾으러 가.”

상태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후히토의 말과 함께 지난밤에 씹지도 못하고 무작정 삼킨 어둠이 몸 안에서 존재감을 발하였다. 아무래도 식도에서 다 내려가지 않고 어딘가에서 농성을 벌이는 듯했다. 카마타리가 그대로 방향을 놓아버린 채로 애꿎은 목만 쥐었다 폈다 매만지고 있으니, 사이에서 상황을 살피던 오우지가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이 카마타리의 어깨를 두들긴다. 가볍고 경쾌하며 다정한 모습이었다.

“나는 궁으로 갈 테니까 카마타리는 초월한테 가 봐.”

“오우지.”

“대신 빨리 찾아서 나를 도와주러 와야 해?”

“…예, 알겠습니다.”

내내 딱딱하게 굳어있었던 카마타리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궁으로 향하는 오우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것으로 배웅한 카마타리는 후히토에게 짐작 가는 곳을 물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후히토가 초월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으므로. 예상대로 후히토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한 곳을 짚었다.

“월이, 그 녀석이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하니까 장담은 못 한다만 나는 바다라고 생각해. 평소에는 바다를 피하려는 것 같았고 대신 오늘 같은 날은 잘 가지 않던 곳으로 숨어버린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래, 고맙다.”

카마타리는 후히토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로 감사만 겨우 표하고 가장 가까운 해안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바다. 초월을 찾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종국에는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바다에는 초월이 파도를 밟고 서 있었다.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에 다시금 숨을 잊는다.

아, 이대로면 익사하고 만다.

카마타리는 얼어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초월의 손목을 황급히 붙잡았다. 당연하게도, 초월은 안개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눈이 시려오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카마타리의 등장으로 드물게 놀란 초월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구속되지 않은 손으로 카마타리의 뺨을 감쌌다.

“카마타리 씨?”

“바다는, 바다만은 가지 말아다오.”

“바다가 싫으신가요?”

“바다는 내가 찾으러 갈 수 없어.”

느린 깜박임을 따라 풍성한 속눈썹이 새하얗게 내려앉는다. 카마타리는 제 뺨을 매만지는 초월의 손을 딱딱한 움직임으로 감쌌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이 흔들린다. 초월은 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쓸었다. 옅은 미소가 이미 삼켜버린 어둠을 밝혔다. 머뭇거리던 카마타리가 조심스럽게 초월을 끌어안는다. 그러면, 새하얀 손이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저를 잃어버리게 두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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