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종상] Rum Pum Pum Pum

썰백업 근데 이제 조금 다듬은

02:34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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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혹시 영어 할 줄 아세요?"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지랑이가 선명히 피어오르다 못해 그 형상이 용으로 승천해도 믿을 법한 무더위에 죽어가며 기상호는 살짝 턱을 치켜들고 이 지옥같은 계절에 어쩌다 한국에 왔는지 모를 외국인을 동정하다가 정통으로 눈을 찌르는 햇볕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요? 이봐요. 암전되는 시야 사이로 떠오르는 주마등 하나를 열어재꼈다. 그러고보면 그 옛날 열댓살 먹은 기상호도 지금처럼 난감했던 순간이 있더랬다. 난생 처음으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경험이었다.

어쩌면 미화일진 몰라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덥지 않았고 미세먼지도 없었고 인생사 최대 걱정이라곤 학교와 학원뿐이었던 열살 시절 어느 여름날의 하굣길.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집으로 향하던 기상호는 저앞의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떠밀리는 등에 속수무책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 내뱉을 새도 없이 멍청한 얼굴로 뒤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매만져지는 건 조금 차갑고 질긴 재질의 제가 맨 가방 뿐이었다. 곧 철퍽 소릴 내며 먹다 만 아이스크림이 닻내린 곳에서야 기상호는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시선을 조금 위로 올리니 바로 맞닿은 시선에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려온 마냥 발가락 끝이 화끈거리며 터질것 같았다. 기상호는 양 손으로 가방끈을 꾸욱 쥐고 연한 눈동자를 구슬처럼 또륵 굴리며 상대를 살폈다. 뒤늦게서야 그 작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동네 또래 아이들에게선 흔치않을 짙고 빽빽한 속눈썹과 어딘가 귀티나보이는 손길로 매만져진 풍성하고 예쁜 검은색 곱슬머리. 어쩌면 저보다 삼년정도는 먼저 태어나서 기반을 다졌을지도 모르는 단단함을 가진 콧대, 결정적으로 이국적인 특색을 가진 낯선 교복을 입은 또래의 남자아이는 어느 가게의 계산대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못박힌듯 그저 서있었다. 아무래도 한국말이 불가능한 외국인인듯 했다.

지난 시험이었다면 문과보단 이과가 체질인 기상호는 쭈굴거리며 입 한 번 뻥끗대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을거다. 그러나 요근래의 기상호는 열세과목이던 영어 시험에서 대단한 업적을 일궈내 기씨 집안 막내로서 받는 사랑 더 진득하게 받는 기간 중에 놓여있었다.

무려 영어시험을 반에서 1등, 전교에서 한자릿수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낸 것이다. 열손가락 넘지 않게 살아온 짧은 생에서 비롯된 근(거라고는 조금뿐이 없는)자감은 기상호가 그 남자아이에게 "영어"로 입을 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녕!"

가끔 이게 현실의 색이 맞나 싶을 때가 일상 속에서도 있다. 낯선 언어 속에서 들린 익숙한 언어때문인지 단번에 저와 시선을 맞딱트린 얼굴은 기상호가 좋아하는 은색 빛이 눈동자에 발려있었다.

기상호는 학교 수업시간표에서 제가 좋아하는 과학이나 수학과 다르게 2교시나 차지하고있는 미술수업의 준비물로 학교 앞 문구점에서 색종이를 구매했다. 반아이들 모두가 같은 곳에서 샀음이 뻔한 상황에서 무려 기상호가 산 색종이만 은색지가 두 장이나 들어있었다.(보통은 금색,은색 1장만 들어있다.) 우와 레어템아이가! 이맘때의 아이들은 그런것에 굉장한 희소성을 느꼈기 때문에 기상호는 잠시나마 반아이들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제 형광빛 색종이와 바꾸자는 손길들을 뿌리치며 기상호는 은색 색종이 두 장을 가방의 제일 안쪽 지퍼가 달린 속주머니에 깊숙이 밀어넣었다.

 

기상호는 부적처럼 제 가방 속에 든 은빛 색종이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 "영어"로 말을 걸었다. 

"큼.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상호 기 야. 넌 이름이 뭐야?"

지금 돌이켜본다면 이새끼 지금 이상황에 뭐라는거지? 싶은 표정임이 자명했으나 당시의 열댓살 근자감 넘치던 기상호는 사심을 포함해서 한마디라도 더 영어로 말을 붙이고싶었고 결국 천진한 열살의 소원을 눈치 챈 주변 어른들이 그 서툰 목소리에 존재감없이 못박혀 서있던 남자아이를 향해 하나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당시 어른들이 영어를 못해서 무시한게 아니라 그저 가만히 서있었기에 발견하지 못해서 그런거같다고 훗날 기상호는 생각했다.) 우여곡절 의사소통 끝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

사고싶던 것을 손에 쥐고 기상호를 내려다보길래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고맙다거나 하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오롯이 저를 담아 빤히 보는 얼굴이, 시선이 너무나도 예쁘고 꿈만 같은 색이어서 아무렴 상관 없어져버린 기상호는 그 찰나의 순간을 대신 품에 안아들었다. 이후 저의 주 관심 과목에 수학, 과학 그리고 영어를 끼워넣고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지만 초등학생에게 찰나란 저편으로 한순간에 떨어지는 별똥별과도 같아서 눈앞에서 사라진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품에서도 어느샌가 흘려서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이후로도 찰나를 몇 번 더 겪고 숨으로 들이키고 내쉰지 열다섯 해에서야 기상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에 졸업장이라곤 초등학교 졸업장 뿐이던 나이를 지나 은빛 테두리가 둘러진 중학교 졸업장을 받으며 기상호는 아 그 햄이 내 첫사랑이었구나 했다. 크게 보고싶거나 깊은 추억이 있던 것은 아닌지라 정말 그냥 온점으로 찍어 넘긴 추억 중에 하나 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십대의 기상호에게까지 상기시키는거 보면 아무래도 기상호 생애의 첫 찰나였던게 문제인 모양이다.

"종수햄 땀흘리는 외국인에게 길 잘 알려주셨나요?"

"어.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제발 먼저 나대지 좀 마."

"아아앙 근데 이번엔 정말 제가 먼저 다가간거 아이고요, 저한테 영어 할 줄 아냐고 저짝에서..."

"...?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어, 그라고보니 제 첫사랑도 햄처럼 영어 잘했어요."

"하, 씹. 안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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