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츄린] 빗방울 속 비치는 눈동자

선과 악은 종이를 뒤집는 차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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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일어나보니, 비가 추잡하게도 내렸다. 유독 더 가라앉은 이유는 아무래도 기일과 생일이 같이 오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수많은 죽음 아래 내린 축복은 어떻게 축하해야 할까? 어벤츄린은 이 답에 대해서 언제나 정확히 내리지 못했다.

내리는 비가 감정에 직결되는 일이 생기면 기분이 미묘해지기 마련이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감정에 한 방울 끼얹으면 큰 파장이 되는 것과 같이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 속을 헤집기 매우 충분했다.

헤집어내는 모든 생각, 날을 세우는 행위에 주체는 자신을 향할 뿐이다. 남을 탓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었다. 언제나 사건의 중심에 자신이 있는데 자신의 탓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모순에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향하는 생각이 얽히면 매번 지워내고 흘러나오지 못하게 막아내지만, 그 막는 것도 빗물에 한에서는 어림도 없다. 비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컸으니까.

붉은 선혈 위에 한 방울씩 떨어졌던 빗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어벤츄린의 두 눈동자에 선명히 남은 그날의 기억은 지금 이 내리는 투명한 빗물마저 붉게 물들이기 충분하다.

지모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

행운의 은총을 받는 아이.

행운아.

살인자.

██?

이젠 지쳤어.

축복을 정말로 긍정할 수 있는가? 사실 타인의 피로, 수많은 시체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정말로 축복 그 자체로 볼 수 있을까? 답이 없는 생각은 끝없이 생각한다면 오히려 독과 같을 텐데도 답을 내려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끝을 맺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매번 이럴 수는 없으니까 택한 방법은 빗물에 지워내는 것이었다.

평소 화려하게 입던 겉옷은 걸쳐 입지도 않고 셔츠 차림으로 생각 하나 없이 빗물을 맞으러 그대로 나갔다. 그대로 빗물을 맞으며 나아간 발걸음은 어떠한 목적도 없었지만, 생각을 지우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컴퍼니에서 내어준 귀중한 옷이 젖으면서 달라붙는데도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쉴 틈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면 숨이라도 트일 것만 같아서.

하지만 끊임없이 걷고, 또 걸어도 숨 하나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숨은 제대로 쉬고 있던가? 알 수 없는 감각은 잊어버리려고 한지 오래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며 치부하더라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물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발걸음이 멈추면 익숙하다는 듯 누군가의 짙은 한숨과 함께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망할 도박꾼, 어디를 갔나 했더니.”

생각보다 조용히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나간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의 방에서 창문으로 봤으려나. 창가로 보면 입구가 보이니, 말이 안 되는 말도 아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맞고 있던 차가운 빗방울이 닿지 않자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그 상황 속에서 웃긴 것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비를 다 맞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자신에게 향한 우산을 밀어내고서 한 걸음 물러나며 미소를 품었다.

“우리 춤이나 안 출래? 가끔은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좋을 거야.”

대뜸 권유하며 미소를 품는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이 바로 맞잡아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레이시오가 거절하는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의미심장한 어벤츄린의 생각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더욱 경계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레이시오의 입장에서는 그의 그런 모습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이 내키진 않았다. 이유 모를 감정은 레이시오에게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닐 거다.

머뭇거리던 손이 결국 맞잡혔지만, 그의 뜻대로는 움직여주지 않겠다는 듯이 확 이끌었다. 손에 잡고 있던 우산이 아무렇게나 떨어지는데도 레이시오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충 적당한 곳에 던져두듯 내려놓고 발걸음을 이끌기 시작했다. 가라앉은 두 동공이 교차하며 시선을 의식하자 어벤츄린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아까와는 확실히 다른 미소. 이는 자신의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확신의 미소였다.

천천히 밟아가는 스텝은 한번 물웅덩이를 크게 짓밟았으나 발목에 튀어 오른 빗물보다 내리며 말고 있는 비가 더욱 온몸에 스며들고 있었으므로 크게 신경 쓸 감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에 감기 정도는 걸리겠지.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끊임없이 나아가는 발자국은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노래 삼아 즐기기 시작했다. 스텝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하자 중간에 한 번 빙글 돌기도하고, 잠시 한 손만 잡아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이 춤이라는 행위에 어떠한 이유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붙이는 순간 행위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그 변질은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고도 남는다. 남기 때문에 더욱 이 정의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단언을 하지 않아야만 한다.

“어벤츄린.”

레이시오는 답지 않게 그의 신분을 읊었다. 그간 레이시오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는 이름이 아닌, 신분이기 때문이다. 신분을 부른다고 해서 그에게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레이시오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굳이 찾을 이유가 있을까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레이시오, 그거 알아?”

“무엇을?”

“축복은 사실 타인의 희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그건 네 이야기인가?”

“글쎄, 모든 축복이 사실은 피로 시작되었다면 너는 그 축복을 받을 수 있겠어?”

레이시오의 발걸음이 잠시 그대로 멈춘다. 당황할 법한데도 어벤츄린은 예상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발걸음을 맞춰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눈빛은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빛이 꽤 가라앉아있다. 천천히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자, 어벤츄린이 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대로 얼굴이 더욱 가까워진다. 보랏빛 눈동자에 드리워지는 큰 손이 시야를 차단하고 짧은 입술의 감촉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기억에는 매우 선명히 남았을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더, 아직. 까치발을 들고 다가가 입술을 꾹 맞추자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다시 생각이 헤집어진다. 복잡했던 생각을 잘 잊고 있었는데 행동이 멈추니 다시 기억에 각인되는 것은 당연했다. 또 시작되는 추락이 생각과 환상을 깊게 밀어 넣는다. 또 너야?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두 눈동자가 제 앞에 있는 사내의 너머를 응시한다.

목소리가 섞여 든다. 소음과도 같은 소리와 그것을 포옹하는 듯한, 어쩌면 지워내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렇게 잘 들리진 않았다. 시끄러워. ···츄린. 넌 아직도 헤매고 있어? 시끄럽다고.

네 눈앞에 있으니, 네 편이 있기라도 하는 거 같아?

아니.

그래도 제 주제는 잘 알고 있네?

···어벤츄린.

아쉬워. 네가 뭐라고 그가 곁에 있는 걸까?

······나를 봐.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시선을 그대로 끌어온다. 그가 무엇을 본 것인지 레이시오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상태를 살펴보면 유추할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 환각이라도 본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 환각은 누구인가? 환각에 관한 정답은 레이시오가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가 이렇게 구는 이유를 알고도 남았을 테니까. 이해할 수 없는 답을 파헤치는 것은 학자의 본분이지만, 지금은 학자라기 보단 의사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어벤츄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의 손은 매우 떨고 있었다. 빗물의 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감정을 투영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레이시오는 다시 그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이끌어 나갔다. 생각 없이 이어지는 발걸음에 모든 것을 맡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다시 지워진다.

처음보다는 비가 더 많이 오고 있는 데도 둘의 춤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은 비가 다시 올라가는 것만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비는 더 이상 신경 쓰이는 요소가 아니게 되고, 오롯이 상대를 깊게 바라보기만 하게 된다.

“아까 물었지.“

맞잡은 손을 위로 올려 자연스레 그가 몸을 틀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바라보니 보랏빛 눈동자에 이미 젖은 머리카락이 정말 추잡하게도 들러붙어 있는데 살풋 웃는 그 미소는 만큼은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따라 미소를 품는다.

“만일 축복이 피 위에 쓰였다고 한들, 이는 결국 정의하는 존재에 따라 달라질 뿐이야.”

레이시오는 찰나의 물음에 지식을 덧대어 생각했다. 지식 역시도 피로 쓰이고, 피로 지워진 지식이 상당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의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테고, 그 부정은 다른 학문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자로서도, 우주를 치료하려는 의사로서도 단언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 그 물음에 관해 처방을 내리지··· 네가 그렇게 정의한다면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축복으로 남고자 한다면 네가 내린 정의가 세상의 정의가 될 거다.”

붉은 눈동자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투명한 그 말을 담아낼 수 없다. 그때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은 것 같아서. 더욱 헷갈리는 감각이 확고하게 삶과 이어낸다.

이제는, 더는 지쳤어. 나를 삶으로 끌어올리지 마. 내뱉어지지 않는 말을 속에 삼켜내며 어벤츄린의 시야는 그대로 암전되었다.

무너지는 몸을 붙잡아 품 안에 끌어안는다. 끌어안은 몸은 매우 차갑기 그지없다. 이런 몸으로 계속 그 빗물 속을 버텨오고 있었다는 말인가. 지친 그의 몸을 끌어안고 이미 젖었지만, 그에게 겉옷을 걸쳐주었다. 적어도 그 얇은 셔츠보단 덜 추울 것이다. 레이시오는 그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빗방울 속에 비치는 눈동자가 매우 서늘한 것은 선명히 기억한다. 품 안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사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선과 악은 종이를 뒤집는 차이라고 하지. 네 축복 역시도 똑같을 거야.”

잠시 침묵으로 이어지는 머뭇거리던 입술이 조용히 귓가에 내려앉고 목소리가 그 귀를 간지럽힌다.

“카카바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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