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

윤힐데

백업 by 126
257
22
3

“윤. 이만 퇴근하는 게 좋겠어.”

나직한 목소리에 최윤이 데스크에 푹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퀭한 낯으로 예현을 빤히 응시했다. 아직 점심 때밖에 되지 않았는데 누가 봐도 철야한 사람의 몰골이었다. 그렇게 바쁘지 않았음에도. 최근 윤은 몰두할 것이 필요한 사람처럼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랩실에서 대충 숙식을 해결하며 일에 매달렸다.

“퇴근해.”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마냥 몸을 축내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현은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듯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예현을 올려보다가, 마지못해 “예.” 하고 답했다. 예현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는 윤이 느릿느릿 일어나 가운을 벗은 뒤, 겉옷을 걸치고 고개를 까딱 숙이며 랩실을 나서는 것까지 확인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밖은 대낮이었다. 윤은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 꽃이 만개했다. 그 놈이 봤다면 좋아했을텐데,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전광판에는 하필 신형 게임기기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오늘 날 잡았나.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퉁한 기분이 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침대에 누웠다. 열 두 시간 쯤은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을듯한 느낌이었다. 밤 샌 보람이 있긴 했다.

업무 관련자들에게 간단한 연락을 돌린 뒤 곧장 눈을 감았다. 어지간히 급한 건 아닌 이상 내일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가벼운 경고였다. 그는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요란한 벨소리에 눈을 떴다.

잠에 취한 시선이 방 안을 훑고 창문을 보았다. 한 밤 중이었다. 어떤 당돌한 놈이지.

정말 급한 건이거나, 업무 중요도 파악이 안 되는 얼간이거나. 후자일 가능성을 더 높이 치며 윤이 여전히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하.”

그러니까 얼간이가 맞긴했다. 휴직 중이라 합법적으로 갈구지는 못하겠지만.

괘씸한데. 이걸 받아 말아.

잠깐 짓궂은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고민은 짧았다. 실없이 굴긴 해도 선은 잘 지키는 놈이었으니 이 시간에 전화를 건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왜.”

그러나 수화기 너머는 고요했다. 먼저 전화를 걸어온 놈이 왜 답이 없어. 윤이 미간을 좁혔다.

“힐데베르트?”

“…어…….”

막혔던 것이 탁 터져나오듯, 불안정한 숨소리와 함께 힐데베르트의 목구멍이 트였다. 직후 다시 고요해졌지만.

최윤은 상대를 재촉하지 않고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숨소리, 바람소리, 훌쩍이는 소리. 밖인가? 주변이 시끄러웠다.

어으, 으으……. 옹알이인지 뭔지 의미불명의 소리를 계속 흘려대던 놈은 한참만에야 첫마디를 꺼냈다.

“유운…….”

배배 꼬인 발음이었다. 거하게 처마셨군. 헛웃음이 샜다. 스카 오웬이 이런 꼴을 보려고 놈에게 휴직을 명한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선을 잘 지킨다던 놈은 어디 가고.

“그래.” 윤이 답했다. 달리 용건을 묻진 않았다. 힐데베르트가 전화한 목적을 알 것 같았으므로. 놈은 답을 돌려준 후로도 또 한참을 말이 없다가, “욱.” 별안간 죄없는 사수에게 청각적 테러를 시도했다. 최윤이 빠르게 전화기를 귀에서 떼었다. 가지가지 하네.

그는 조금의 텀을 두었다가 다시 상대를 불렀다.

“힐데베르트.”

“네에!”

즉답이었다. 텐션이 잔뜩 올라간 것을 보니 속도 개운해진 모양이고. 이렇게 발랄한 목소리는 또 간만에 듣는다. 윤은 뻐근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술 마셨냐?”

“네, 쪼끔…….”

“조금이 아니지.”

“네…….”

윤의 추궁에 힐데베르트의 목소리가 급격히 침울해졌다. 그러나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실수라는 둥의 변명도 없었다. 정말 술기운이 이성을 이긴 것인지, 술기운이라는 핑계에 기대고 싶은 것인지. 윤이 주정임을 알고도 별 말을 않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힐데베르트의 목소리가 다시 발랄해졌다.

“자고 있었, 아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그래. 네가 깨웠다.”

“오늘 꽃이 엄청 예쁘게 피어있는 걸 봤거든요…….”

다시 자라는 소리도 안 하네, 이 새끼.

윤이 졸린 눈을 깜빡이며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힐데베르트는 윤에게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을, 마땅한 용건도 없이 떠들어대었다. 꽃을 보니 당신 생각이 났다. 점심엔 동기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본부 근처에 고양이 한 마리가 돌아다니더라. 검은색이었다. 윤을 닮았다. 물론 당신보다야 고양이가 훨씬 귀엽지만…….

윤은 간간이 맞장구 치며 별 영양가도 없는 말들을 얌전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윤 생각이 나서…….”

힐데베르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같은 이야기만 주워섬기고 있었다. 이래서 당신 생각이 났고, 저래서 당신 생각이 났다. 결국 내내 최윤의 생각을 했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말이 뚝 끊겼다. 수화기 너머로는 다시 고요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최윤이 이 자식은 선 채로 잠들었는가 고민할 때쯤,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보고 싶습니다…….”

윤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헤어진 연인 사이에 술에 꼴아 연락할 이유는 하나 뿐이지.

“보러 와, 그럼.”

간단한 용건에 서두 한 번 길다.

최윤은 쉽게 답했으나, 이것이 힐데베르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여 힐데베르트가 긍정의 답 대신 “죄송함미다…….” 같은 쌩뚱맞은 사과를 해도 놀라지 않았다. “죄송할 짓은 애초에 하질 마라.” 하고 받아치는 것까진 참지 못했으나. 애초에 차인 것은 이쪽 아니던가. 왜 저가 더 간절한듯 절박하게 구는지.

사실 힐데베르트가 사랑하는 방식은 최윤에게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비단 힐데베르트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은 늘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이였다. 하여 그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이해와 납득을 별개의 영역으로 두게 된 것이다. 최윤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에게는 아니었지.

결국 먼저 이별을 고한 쪽은 힐데베르트였다. 최윤은 이해 못했으나 그저 받아들였다. 늘 그래왔듯이. 소중히 여기고 싶은 사람에게 베푸는 그 나름의 아량이었다. 허나 그것이 제 손아귀에서 온전히 자유롭도록 놓아주겠다는 선언은 결코 아니었는데, 이 놈은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제가 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줘서…….”

“상처 안 받았다.”

윤은 힐데베르트가 웅얼대며 자기비하를 시작하려는 것을 막았다. 제게 부채감을 가진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표출된다면 말이 다르다. 메일 술에 꼴아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힐데베르트는 머뭇댔다. 알코올에 푹 절여진 정신으로도 답답하게 구는 것이 참 그 다웠다. 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 알아.”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줬지.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고. 혼자 있는 게 질리면 그때 내 곁으로 돌아와.”

“…저희 헤어졌잖습니까…….”

힐데베르트는 울먹이며 거의 목소리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윤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들었다. 이렇게 서러워할거면서.

“궁금했는데. 그건 단순히 연애가 끝난 거 아니냐? 더이상 애인이 아닐 뿐이지. 너는 여전히 내 부사수고, 널 놓아줄 생각도 없어.”

힐데베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는 상대의 말을 곱씹는듯 몇번인가 어? 맞나?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사회적 합의와 상식보다 본인의 욕심을 우선하기로 결심했는지 “윤 똑똑하시네요.” 하고 감탄했다. 이게 정말 술에 꼴아 제정신이 아니구나. 최윤 역시 감탄했다. 힐데베르트는 술과 우울에 잠겨죽다 말고 급격히 살아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 윤 보러가도 됩니까? 돌아가는 건 아니고요……. 그냥 얼굴만 한 번 보고싶은데…… 윤은 저를 보기 싫을 수도 있지만. 아, 그럼 안 가겠습니다. 싫겠죠 역시……. 근데 만약 안 싫으시다면…….”

“야. 그냥 오라고.”

윤은 꼬인 혀로 횡설수설하는 힐데베르트의 말을 뚝 잘랐다. 그도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힐데베르트나 이제 최윤을 어떻게 봐야하나 지지리 궁상을 떤 거지, 최윤에게는 처음부터 헤어졌다고 그만 볼 생각 따윈 없었다. 그냥 참아준 것이다. 근데 먼저 연락 따위를 하질 않나. 저는 근무상의 이유로 술도 못 마시고 담배나 뻑뻑 피워댔는데 휴직 중이라고 미친 주정뱅이가 돼서…….

“나도 보고 싶으니까 보러 와.”

목소리만 듣고 있자니 더 갈증이 일었다.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꺼질듯한 목소리로 “…네.” 하고 답했다. “갈래요. 지금 가겠습니다.” 조급함을 차마 숨기지 못하며. 뛰고 있는지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그토록 좋으면 다시 사귀자고 하면 될 일이 아닌가. 왜 사서 고통 받고 있나……. 최윤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검 한 번 휘두르면 모든 것을 해결 가능한 무력을 가지고도 애써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빙 돌아가는 힐데베르트의 답답한 모습 역시 그의 일부였기에. 자신과 달리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걸 납득했으므로.

전화는 어느새 끊어진 채였다. 누구 부사수인지, 버르장머리를 아주 잘못 들여놨다. 윤은 핸드폰을 툭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다. 동거인들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간만에 보는 얼굴이 제법 그립기도 하고.

내일부터는 다시 랩실에서 썩어야겠다. 얼굴 보면 더 참기 힘들어질텐데 얼마든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좋은 애인 노릇도 참 피곤한 일이다. 돌아오기만 하면 전부 보상을 받아낼 셈이었다. 그러니까, 힐데베르트를 안정적인 상태로 곁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이러한 시간과 노력들도 전부 불필요한 것이 아니게 되니까.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창 밖을 보았다. 힐데베르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낯짝은 술기운에 시뻘겋고. 눈은 팅팅 부었고. 저쪽도 몰골이 말이 아니다. 꼴을 보아하니 오래 걸리진 않을 듯했다. 저 녀석만큼 정에 허덕이는 놈도 드물었으니.

그간 못 본만큼 놀려먹어야겠다. 최윤은 얼굴에 피로를 덕지덕지 달고도 비죽 웃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윤힐데
3
  • ..+ 19

댓글 3


  • 멋부리는 바닷가재

    아!!!!! 너무 좋아!!!!!! 정말 좋아요!!!! 고함지름 아ㅠㅠㅠ 첫줄부터 막줄까지 너무 좋아요..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랩실에 처박혀있는 윤이나 술에 취해선 전화해서 주정부리면서 보고 싶다고 하는 힐데나...어휴 평생 함께해야겠다 안 되겟다 간만에 보는 얼굴이 제법 그립기도 하고 << 얼굴보면 참기 힘들다고 랩실에 다시 처박히겟다고...이썪어빠지겟어요

  • 운동하는 산양

    아 젠장.... 입안이 달아요...

  • 열렬한 물개

    최고의 윤힐.. 정말 올려주시는 글마다 글솜씨에 감탄하게 되네요ㅠㅠbbbb 같은 CP 파고 블배 덕질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만..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