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빛

| 겨울 빛

살다 보면 평생 잊기 힘든 감각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릴 날 처음 허락된 혀가 아찔해질 정도의 단맛, 무섭게 쫓아오던 강아지가 짖던 소리라던가 아스팔트를 박차며 긁는 발톱의 소리 같은 것들. 하던 공부를 몰래 버려두고 일찍 밖에 나와서 올라가 앉은 나무 사이로 불어오던 풀잎 향은 머리가 다 자란 지금에 와서 비슷한 냄새만 맡아도 그때의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이런 감각기억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강제적인 현상이다.

요컨대, 갑작스러운 들리는 스파크가 튀고 금속이 터지는 소리 같은것은 나에게 있어 그런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어쩜 당신은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기 위해 던져진 존재처럼 행동하는지. 앞에 대고 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왜 너는 죽지도 않고, 죽이지를 않고, 떠나지도 않으면서, 떠나지도 못하게 하며 내가 가지지 못했던 하나의 미래를 보여주려고 하는지. 그러면서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방 그 빌어먹을 금속에 먹혀 사라질 것처럼 생겨먹어서는 틈날 때마다 얼음 깨듯이 조각내어 털어주어야 했다. 사라지지 말아라, 살아지지 말아. 그따위 것은 이 거친 손으로 우악스럽게라도 뜯어내 줄 수있는데, 왜 사서 흉을 만드는가.

선택은 미루는 것이 아니고, 남이 선택하게 만들어도 안 된다는 걸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살다 보면 비겁하게도, 이미 아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행실을 바꾸지 않고 관성처럼 살게 되더라. 내가 고향을 떠나서도 며칠에 한 번씩은 꼭 눈가에 검은 안료를 덧칠하는 것처럼. 그래도 여기는 해가 밝은 곳이니 필요하지 않냐고, 변하지 않음에 변명하면서. 뭐든지 미루고 마는 고약한 성격을 고치질 못해서 별다른 고민을 부러 하지 않고 편하게 머물러버린 나의 탓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나의 탓이다.

나의 어영부영한 태도가 편안한 극독이 되어 당신의 딱딱한 정수리 위로 떨어져서는 그렇게 물러 터질 것처럼 만들어버렸나 생각한다. 내 머리가 복슬하다고 할 게 아니라 당신의 그 녹을 것같은 눈망울을 보라지……. 겨울에 사는 사람치고는 물렁하기가 그지없어, 아무래도 네가 계절을 잘못 찾아온 듯싶다. 천천히 변하는 빙하는 찬 데에 두어야 하는 법인데.

전깃불 튀는 소리는 전조가 되었고, 달려가니 이미 반파된 당신이 있어서 무심코 맨손으로 먼저 잡을 뻔했다면 그건 우스운 이야기이자 사실이 된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너를 이불로 둘둘 말아, 욕실에서 끌어내고 침대로 던져둔다. 손끝이 저린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네 전기가 옮은 듯한데 제정신도 아닌 당신에게 따질 수가 없어 손목을 한 번 털고서는 그 옆에 누웠다. 잔해는 알아서 돌아오니 부러 모을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런 흉내를 낼 기운도 없었다.

무심코 손을 다리 쪽으로 내리는 너를 제지하고는 대신 내 몸을 밀어넣는다. 이게 제 몸을 건들지 못하게 하는 것에 효과가 좋더라. 그리고 귀를 심장에 가져다 댔다. 파스스 사그라들 듯이 튀어오르는 스파크 소리보다 고동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는 맥박과 귀를 뭉개며 붙여놓은 가슴팍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는 그리 다르지 않다. 채찍질을 당한 말이 절벽을 달리는, 불안함의 소리였다.

사람은 왜 타인을 갈구하는가.

아니, 세상엔 홀로 된 자도 많으니. 나는 왜 다른 이의 표면에 내 살을 붙이고 몸을 기대기를 멈추질 않는가. 인간이란 무릇 타인의 온기를 느끼며 안정감을 얻길 원한다는 말은 진부하다. 그저 안정감만을 느낀 적도 없을뿐더러, 정도가 심하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

함께 잠드는 짓 따위는 위험하다. 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있거나 허벅지에 나이프 하나 장착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의식을 잃는 시간은 동물에게 가장 취약한 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몸 안으로 당신을 집어넣고 잠드는 행위를 한다는 건 꽤 멍청한 선택이었고, 그래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너는 쉽게 죽지 않으니까.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듯이 무언가 하나 내주고서라 벗어날 테니까.

아, 그래. 이것 또한 내 게으른 회피에 불과했다.

알면 좀 말해주지 그랬어. 혹시 일부러 그랬나? 당신도 게으른 도망자였나 보아.

나는 가족이 가지고 싶었나.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추운 지역 화톳불 영감이 토로했던 가족놀음 따위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 양반은 어쩌다 남의 행성에 와서 그런 불명예스러운 행세를 하고 있던 건지. 물이라도 끼얹어줄까 했다가 그만두었다. 그런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다만, 모두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와 몰래 했던 대화가 계속 생각난다.

댁은 왜 그 좁은 곳에서 그러고 있습니까?

아해는 왜 이런 곳에 있느냐. 동향 사람을 보니 좋지만, 우리네 인물들은 하늘을 볼 줄 모르지 않던가.

땅만 푸고 살다가 기회를 봐서 당신처럼 됐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제 말 통하는 이들과 함께 있겠군. 좋은 일이야.

거긴 당신이 들어간 겁니까?

그렇지. 정확히는 넣어달라 했네.

희생이 취미입니까?

뭐, 그래도 일반적인 불보다는 더 효율적이지 않나. 아해는 아직 모르겠지만, 사람은 내 죽음으로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법이네. 이제 그것도 사라졌지만.

그래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던데요. 그냥 영원히 타는 불로 알고 있습니다.

외롭구나. 보람은 있다. 여기는 이제 나 없으면 삶이 어려워질 정도이니. 그래도…….

훔쳐드릴 수 있습니다. 뭐 어디 사람 발길 안 닿는 절벽 어귀에 던져드리면 몇 년 안으로는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고 나면 또 누가 오겠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어차피 오래 남지 않았으니 괜찮다. 차라리 떠나는 길에 저들에게 언질이나 해주렴. 불이 언제 꺼지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얼마나 남았습니까. 조금은 여기 머물러도 됩니다.

어차피 불이 되면 바람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된다. 너는 땅에서 나왔으니 짧은 자유를 최대한 누려야 하지 않겠니.

아뇨, 저는 아마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꼭 동향인의 곁에 있으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슬퍼.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곁에 있어도 그에게 나는 사물에 불과하다는 거야. 나를 잊게 된다는 거야.

내 죽음은 그런 형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 한쪽은 재가 되었고 다른 쪽은 불이 되었는데, 내가 불이자 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술 몇 잔 걸치고 들어와서는 추태를 보였던 당신을 생각하면 어떤 쪽이 나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만약 내가 불꽃이 된다면, 당신은 그것을 언제까지 나로 여겨줄까. 아예 영원불멸하게 남는 것은 아니니, 당신이 살아갈 날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적은 기간이다. 당신이라면 그 불 꺼질 때까지 이고 지고, 장작 넣어주고, 바람 불어주며 잘 키울 것 같다.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내가 하는 말은 당신께 닿지 않고, 당신은 돌아오지 않을 혼잣말을 불 앞에서 중얼거리게 될 텐데.

사람 몇 년 끼고 살았던 대가치고는 값비싸게도 장례가 너무 길다. 역시 그냥 시체를 남기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고 나서도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죽기 직전에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하느냔 말이야. 그 사람은 어땠을까. 듣지도 못하는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며 죽어갔을까. 살아서 다시 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을까. 상상조차 양심이 없는 것 같아 지워버렸다.

생각에 대한 벌을 받은 건지 꿈을 꾸었다. 지독한 것 같기도 하고, 외로운 것 같기도 했는데 악몽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동시에 지독하게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태양 빛 받은 얼음이 되어 녹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는 허겁지겁 밤을 찾아갔다. 달이 떠있는 곳을 찾아 우주선을 몰았는데, 내부가 더웠던 건지 내 손이 뜨거웠던 건지 너는 줄줄 눈물을 흘리듯 작아지고 있었다. 차라리 똑같은 얼음들 틈에 너를 넣어두면 더 오래 버틸 것 같은데, 네가 아닌 다른 얼음이 섞일까 두려워서 내 손에서 놓질 못했다.

겨우 찾은 달의 그림자에 너를 숨겨두고 네가 만든 물웅덩이를 긁어모으러 다녔다. 이삭 한 톨 놓칠 수 없는 심정으로 습기마저 빨아들이고 싶었다. 바리바리 품에 안고 돌아온 자리는 다시 물 바다가 되어서 그것도 엉엉 울면서 양동이에 담았는데, 아마 내 눈물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밍밍한 물 몇 동이를 들고 겨울로 가서 너를 다시 조각했는데, 영 너와 같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건 그거 널 닮았을 얼음 조각이었다. 약한 불이라도 쬐기만 하면 금방 녹아버려서 불도 피우지 못하고 안아보지도 못했다.

조각상을 세워두고 혼자 지내는 일에 익숙해졌을 무렵에 나는 혼잣말이 늘었다. 처음에는 대꾸를 바라는 말이었고, 다음에는 대답이 끼어들 수 있는 말이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누구도 말을 붙일 수 없는온전한 혼잣말이 되었다. 돌아오는 것은 동굴 벽에 부딪혀 돌아온 메아리 뿐이라 내 친구는 나밖에 없었는데, 결국 뒤이어 들릴 메아리를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법을 터득했다. 대답을 먼저 뱉고, 이후에 질문을 말하면 메아리가 앞선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하니 이후에 메아리가 다시 질문을 던지길래 몇 번 하고 그만두었다.

그즈음에는 조각을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에 열중했었다. 오래간만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 틈으로 들어온 빛에 이미 얼음이 다 녹아있었다. 웅덩이에 비친 내 얼굴은 새파랬고, 턱은 볼썽사납게 떨려서 이 부딪히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동굴 안에 울리던 소리는 내 치아와 얼음의 물방울이 내는 소리였다.

밖은 추웠는데 저 동굴만큼 춥지 않았고, 사람이 없었지만, 저기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가웠고, 슬펐다.

그렇다면 너는 어땠을까. 내 온갖 헛짓거리를 보았을, 녹아가던 너는 어땠을까. 이 모습을 보는 게 방송을 보는 것처럼 즐겁기라도 했을까.

나는 평생 내 고향 행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 말마따나 내 부모 종족은 홀로 떨어지게 되면 소멸하는 그날까지 외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예측하면서도 내심 돌아가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죽을 때가 되어서 우주 밖으로 몸을 날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딱히 가족을 바라는 건 아니다. 평생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다만 언제도 주변에서 사람이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내가 죽는 순간까지, 어쩌면, 만에 하나인 죽음 이후에도. 주변에 사람을 두는 건 죽음을 옆에 두는 것이 나 다름이 없는 걸 알면서도.

밤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막 뜨고 있는 해를 등지고 나를 살피고 있는 네 얼굴이 보인다. 내 손목은 또 언제 풀어둔 건지 휑하니 시원하다. 괜히 뱃가죽에 얼굴을 꾹 밀었다가 손을 뻗어 커튼을 닫는다. 배꼽에 대고 웅얼거리며 말한다.

그게 너라면 딱 괜찮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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