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dia

소망은 바다로 (1)

'한번만 더, 그 애를 부탁해도 될까?'

by 愛

Nadia

러시아어로 '소망', '희망'을 뜻하는 이름인 나데즈다(наде́жда, Nadezhda)의 애칭이다.

트라팔가 로우가 잠들어있는 방은 어두컴컴했다. 마치 칠흑의 밤이 내려온 듯했다. 정작 그 방 주인인 트라팔가 로우는 침대 위에서 잘 자고 있었다. 라고 하고 싶었지만, 호박색 눈동자가 살짝 떠진다. 온기가 있던 방이 갑작스럽게 차가워졌기 때문이었다. 선장의 방, 일명 트라팔가 로우의 방에는 바닥과 침대 위에 서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에 ‘DEATH’ 라는 단어 문신이 새겨진 기다란 손이 마치 기계처럼 서적을 집어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아무래도 근처 겨울섬이라도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부상해야 알겠지만, 잠수함인 폴라 탱 호는 현재 바닷속을 유유히 거느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부 또한 어두운 거였다. 오히려 트라팔가 로우는 이 어둠이 더 익숙하고 친숙하지만, 곧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여러 발소리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캡틴!”

방에서 나온 트라팔가 로우를 반긴 것은 항해사인 베포였다. 베포를 시작으로 선원 하나 둘이 선장인 트라팔가 로우를 반긴다. 잘 주무셨어요? 라는 샤치의 물음에 트라팔가 로우는 고개를 한번 주억거리는 게 전부였다. 캡틴, 근처 섬의 계절이 겨울이에요. 이어서 펭귄이 빠르게 상황을 보고 한다. 역시나 그랬나, 트라팔가 로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절로 나오려던 한숨을 도로 삼킨다. 시기를 따졌을 때 들려야 하는 섬은 맞았다. 겨울섬에서 조달할 것이 있겠냐만은, 괜히 있는 섬은 아닐 터. 깊게 생각해볼 것도 아니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잠수함을 부상시키라고 말한다. 그 명령에 선원들이 일제히 경례와 함께 짧게 대답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겨울, 겨울이라. 분명히 하얀 눈이 뒤덮여져 있겠지. 그것을 생각하니 트라팔가 로우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는다. 하얀 마을, 제 고향이었던 플레반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첫 번째 가족이 떠오르고,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웃음과 함께 죽임을 당한 두 번째 가족인 코라 씨가 떠올랐다. 트라팔가 로우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아직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었던 그 어린 날에, 하얀 눈을 싫어하는 자신에게 눈토끼를 만들어서 내밀어줬던, 끝에서는 따듯한 미소를 지었던 노조미가 아른거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트라팔가 로우는 헛웃음이 나오면서 중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벽에다가 제 머리를 살짝 기댄다. 덕분에 이번에는 머릿속에 한 사람이 가득했다. 정작 그 사람은 지금 제 옆에 없음에도. 아니, 그렇기에 어쩌면 더더욱 이토록 머릿속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노조미를 보러 스왈로 섬에 다시 간다던가, 편지를 주고 받거나 전보 벌레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후자는 쉬지 않고 이동하고 있는 이 해적선으로 인해서 무리였다. 거기다가 애초에 노조미는 자신들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그 날, 그곳에 남겠다고 했으므로.

그러니 만남을 기약하는 건 지금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째인지 모르는 보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트라팔가 로우는 하얀 눈이 내린다는 선원들의 목소리에 조용히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다.


하트 해적단 선원들은 선장인 트라팔가 로우가 하얀 눈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겨울섬 만큼은 같이 내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용히, 적당히 둘러보고 조달할 것들만 사갖고 와서 바로 또 바다를 누벼야 하므로. 그토록 선장을 따르던 선원들이 다 내리고 없으니 폴라 탱 호는 고요했다. 트라팔가 로우는 이 고요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폴라 탱 호 안에는 트라팔가 로우의 걸음 소리만 울렸다. 아직 닫지 않은 입구에 기댄 채 팔짱을 낀다. 그 상태로 트라팔가 로우는 챙모자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로 밖을 바라본다.

하얗게 내리는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릴 거 같았다. 실제로 이미 바닥은 그 색으로 뒤덮어진 상태인지라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는 트라팔가 로우의 눈동자는 꽤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침참된 기분에 사로 잡히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올라오는 기억과 감정으로 인해서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이젠, 괜찮을 거야.’

남자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눈토끼였다. 오히려 그것을 건네던 노조미에게 어울렸다. 선택적 함묵증을 앓고 있는 노조미가 그 날 처음으로 트라팔가 로우에게 목소리를 들려줬다. 괜찮을 거야, 로우. 이어진 말에 당시 어렸던 트라팔가 로우는 괜스레 울컥함이 올라와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당황한 노조미가 눈토끼를 내려놓고 자신을 두 팔로 안아줬다. 괜찮아, 괜찮아, 로우. 노조미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트라팔가 로우의 등을 쓸어내렸다. 따듯한 온기를, 포근한 위로를 받은 그 날 트라팔가 로우는 적어도 내리는 하얀 눈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눈토끼 옆에 눈사람을 놓아주자 맑게 웃었던 그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다.

적어도 그때부터였겠지. 단지 자각이 조금 늦었을 뿐이었다. 늦은 자각이 무섭다고 하더니 거하게 짝사랑을 하고 있어서 문제지만. 트라팔가 로우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호박색 눈동자를 한번 감았다가 뜬다. 이상하게도 펑펑 내리는 그 하얗고 고요한 세상 속에서 눈토끼를 만들어서 내미는 노조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연쇄 작용이 일어난 탓이었다. 그로 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이 감정이 어디까지 번질 수가 있는지, 커질 수가 있는지 트라팔가 로우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스왈로 섬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노조미도 하얀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을까.

너는 잘 지내나?

나는 잘 지낸다.

그에 결국은 속으로 안부 인사까지 주고 받게 되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하얀 입김을 한번 토해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밤이 내려앉은 새 하얀 세상이었다. 소복하게, 하얗게 내리는 눈을 향해 두 손을 살며시 내밀었다. 차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가 꿈속이니까. 그리고 이미 이 장소는 어릴 때 꿨었다. 그때 이 곳에서 새카만 털코트에 알 수 없는 화장을 하고 있었던, 총상을 입어서 피를 흘리고 있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그 애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두 눈을 뜨고, 볼프 씨를 따라서 걸음을 옮긴 곳에는 로우가 쓰러져 있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꾸지 않았던 꿈이었는데, 어째서…….

‘한번 더….’

당신은 또 나를 만나러 온 건가요? 노조미는 물었으나, 그것이 제대로 입밖으로 내뱉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랬다. 말도, 행동도 제 의지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노조미는 바라보기만 했다. 오히려 입을 여는 건 상대방 쪽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투성인 채였다. 그럼에도 저번처럼 웃고 있었다. 그 상처가 아프지 않는 사람처럼, 괜찮다는 것처럼, 어쩌면 조금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가 노조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의 꿈과 달랐다. …움직일 수 있을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노조미가 발을 떼자, 다행히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꿈이라는 건,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는 잠옷차림으로 있기 때문에 꿈속에서의 노조미는 맨발이었다. 그러나 차갑다는 생각도, 하얗게 쌓인 눈이 밟혀서 나는 특유의 소리도 없었다. 그야 꿈이니까. 노조미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을 뻗는다. 앞에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큰 어른이었으므로, 제 작은 두 손으로 겨우 그 큰 손을 감쌀 수가 있었으니까. 잡은 손은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았다. 그가 좀 더 깊은 미소를 그린다.

‘한번만 더, 그 애를 부탁해도 될까?’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리고 이 사람이 누군지도 알았다. 로우가 말했던 은인, 로우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 그리고 로우가 이 사람을 이렇게 불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코라 씨.

목소리가 나온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에 있는 그가 잔잔한 미소를 그린 것을 보아서 제 목소리가 닿은 모양이었다. 남아있는 큰 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로 안착했다. 마치 큰 모자를 쓴 거 같았다. 이곳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을 맞지 않도록 가려주는 모자. 다정하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코라 씨가 아이처럼 맑게 웃는다.

‘고맙단다.’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으로 인해서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반쯤 눈을 뜬 노조미가 상체를 일으키자, 부스스한 백발이 한껏 흘러내렸다. 눈을 비비던 노조미가 이상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이불을 걷어서 확인해보니 상자가 있었다. 상자의 크기는 적당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심플했다. 문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노조미는 자기 전에 이 상자를 제 곁에 둔 기억이 없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상자를 두 손으로 잡아서 흔들어보자, 안에 내용물이 있다는 듯이 달그락 소리가 들려온다. 노조미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악마의 열매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조미의 두 눈이 크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잘게 흔들리는 금안은 지금 이 상황이 ‘있을 수가 없는’, ‘있으면 안 되는'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려주고 있었다. 무려 악마의 열매였다. 거기다가 이 열매의 이름은,

‘고요고요 열매.’

과거에 트라팔가 로우가 읽었던 악마의 열매 도감에 적혀있었던 것과 아주 똑같았다. 한번만 더 그 애를 부탁한다는 의미가, 이런 의미였어? 그렇게 생각한 노조미는 저도 모르게 소리없는 한숨을 내쉰다. 어차피 이 악마의 열매는 노조미가 먹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노조미는 이미 악마의 열매 능력자이니까. 소망소망 열매. 솔직히 노조미는 여전히 자신이 먹었던 열매의 능력에 대해서 그닥 잘 아는 게 아니었다. 본인의 소망이나 타인의 소망을 들어주지만, 어떤 기준으로 그것을 들어주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단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것을 이루게 해주고 그로 인해서 노조미가 아프다는 것.

그리고 트라팔가 로우와 펭귄과 샤치 마지막으로 베포가 항해를 시작했던 그 날 이후로도 노조미는 계속해서 미열을 앓고 있었다. 그 애들의 항해가 위험하지 않기를 계속 바라고 있으니까, 소망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제 역할은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노조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버린다. 아무래도 고요고요 열매는, 코라 씨는 이걸 가지고 자신이 로우에게 가는 걸 바라는 듯했다. 그 애들과 만나지 못한 시간이 얼마나 되었더라. 자신을 잊지 않고 있으면 그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애들 성격상 자신을 쉽게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만약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했다.

노조미는 고요고요 열매가 담긴 상자를 품에 안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난다. 창문을 가리고 있었던 커튼을 옆으로 치우자 환한 빛이 들어왔다. 그것을 넘어서 노조미는 창문을 열었다. 눈이 자주 내리는 스왈로 섬과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맑은 하늘이었다. 그래, 마치 그 애들이 항해했던 그 날과 비슷했다. 노조미는 오랜만에 볼프 씨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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