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츠무 모음집
지나가던 나기츠무 쵱컾러입니다... 서치 창 좀 채우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17년도 말부터 19년도 초까지 쫌쫌 했었던 나기츠무 연성을 모아 보았습니다...
과거 연성이라 현재 문체와는 많이 다릅니다... 감안하고 봐 주세요
2017.11.29) 연주
* 메카라라 나기츠무
마을 중앙의 광장, 텅 빈 무대 위의 로봇돌은 주변을 한번 돌아보더니 후,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손에 들린 바이올린은 언제나 함께하는 파트너. 관객은 없어도 마음가짐은 같다. 변함 없이 연주를 이어나갈 뿐.
가볍게 힘을 실어 어깨 위에 얹고는 톱니바퀴 장식을 기준으로 활을 손에 맞췄다. 익숙한 듯 턱을 맞추고 나니 밝게만 보이던 인상이 빛을 거두고. 단지 본 연주 전의 조율이건만 흐르는 소리는 꽤나 날카로웠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품은 아름다움이란 객석을 가득 채울만한 것. 남몰래 숨은 관객에게는 이보다 좋은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만 해준다면 모두가 좋아할 수 있을텐데. 선율을 따르던 시선이 먼 허공을 향했다.
사람이라 칭할 수 있을지 모를 수수께끼의 아이. 세계의 마지막 인간일 것인지, 아니면 타 로봇돌과 같은 기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움직이는지도 알려진 바는 전무. 파브라마저도 로봇돌을 감시하는 역할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객석 옆 골목에 숨어서는 무대를 줄곧 응시했다는 것만이 단서의 끝. 멎어가는 울림을 좇는 귀, 꾹 다문 입술, 경직된 몸이 온전히 쥬느를 향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적막을 향하던 진동 속에 객석이 채워지는 소리가 울렸다. 연주를 이어가려던 쥬느의 손이 멈칫.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몇 초간의 공백이 두 등장인물을 잇는 유일한 텀. 새로운 인물에 당황하기도 잠시, 무대의 주인공은 곧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와 눈을 환히 휘어트렸다.
"오늘이 첫 관람이십니까?"
어떻게 저리도 금방 평온해질 수 있는지. 수려하게 미끄러지는 악기마저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무대 인사에 깃든 단정함과 예의 바름에 아이는 남몰래 긴장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단어를 고르던 순간.
"아니면 항상 멀리서 제 무대를 지켜보던 저의 팬이신지요?"
깜짝, 눈에 띌 정도로 콩콩 뛰는 마음이 쥬느의 눈에 스쳤으리라. 적잖이 굳어지는 아이의 얼굴에는 확신을. 입가에도 걸친 작은 미소까지, 한없이 친절할 것만 같은 분위기건만 그 표정에 아이는 다시금 결연함을 되찾았다.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연주는 이제 그만 둬주세요."
꽤 당돌한 소리에 쥬느의 고개가 갸웃. 아이의 곧은 눈길이 전해지기까지는 무대라는 거리감도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올려보기 위해 떨어진 걸음마저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쥬느의 감정이 차근히 식어갔다.
"그건 무리입니다."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현장. 어느 새 딱딱하게 굳었던 입가가 냉소를 띠었다. 당신이 무서워하고, 겁에 질려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 기쁨이자 즐거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당신이 궁금합니다. 말이 이어지는 동안 바이올린은 여유로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럼, 제게 보여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반응."
턱을 기대고 활을 들자 분위기는 꽤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 조율과는 사뭇 다른 날 선 움직임. 귀를 위협하는 음이 쨍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아름답던 소리가 지금은 그저 공포밖에 담고 있지 않다니. 공포보다도 안타까움으로 차오르는 감상에 더욱 격해지는 악곡. 아이를 담은 쥬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즐거움이 아닌 감정을 느꼈다.
2018.01.23) 프롤로그
* 아이나나 우리 아이돌이 달라졌어요 합작 참여 연성
첫 만남에 농구. 꽤 당혹스러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방금 만난 사람답지 않은 팀워크를 과시하며 게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심판의 휘슬에 생긴 잠깐의 쉬는 시간. 리쿠가 놓치고 만 공은 입구 쪽으로 굴러가 한 레이디 앞에 멈춰 섰다. 언제 들어왔지, 누구일까나.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확인하려는 찰나 들려온 외침.
"히, 힘 내세요!"
어라.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 설마, 설마. 제게 말한 것이 아님에도 마음을 울려대는 한마디. 귓가에 아른거리는 목소리가 오래 전의 그리운 추억을 끄집어냈다.
*
기분 전환을 위해 카페로 향하던 어느 날. 길거리에 우두커니, 오도가도 못 하는 소녀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도 신경 쓰였다. 소년의 얼굴에 스치는 물음표. 다가가도 괜찮은 건가, 열댓 번이고 망설이다 행동으로 옮긴 건 서로 눈이 마주치고 나서였다.
─길을 잃은 건가요?
노스메이아 사람이었기에 당국의 언어로 말을 거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못 알아듣는 입장으로는 더 곤란에 빠질 뿐이었다. 고개를 갸웃. 외국인인가, 하고 생각에 잠길 즈음.
"그, 저…."
정돈하지 못한, 당황이 스며든 단음에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채 단어를 이루지 못한 소리임에도 분명한 일본어의 흔적. 몇 초간의 공백을 뚫고 소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일본인?"
어라. 굳어버린 몸짓이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일본어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한 거겠지. 느리지만 차분한 말투. 소년의 표정이 진지했다. 방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시선이 오롯이 소녀를 담았다.
"일본어를… 아시나요? 저, 길을 잃었는데 도와주세요!"
다급한 목소리에 소년이 대답하려는 순간. 딸랑, 저 옆쪽 카페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에서 나온 남자와 소년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소녀에게로 옮겨가는 눈길. 누군지 묻는 눈짓에는 묵묵부답으로 답해주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진 모르겠지만 들어와서 해. 춥지 않아?
못 알아듣겠어. 소녀의 떨리는 눈빛이 소년을 향했다. 소년이 남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 아이 일본에서 왔습니다. 길을 잃어서 도와달라고. 의외의 사실에 남자가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겁을 먹은 눈치였다. 위축된 것 같으면서도 일본어를 아나 싶어 놀란 듯 했다.
"나도 일본에서 왔어. 이렇게 말하면 조금은 겁을 덜 수 있으려나? 일본에서 온 천사라니 반갑네."
여기에는 천사가 많으니까. 일본에서 왔어도 지금은 노스메이아에 있으니까 천사인 걸로. 소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건지 시답잖은 말까지 덧붙이며 말을 건네는 남자.
"얼른 가야 하는 거면 나도 강요는 못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잠깐 차라도 마시고 갈래?"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소년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던 아이의 생각은 달랐으니. 머리는 얼른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마음은 애초에 조금 놀다 들어가기로 한 거라며 빙빙 돌고 있었다. 바로 돌아가면 후회할 것만 같아 끄덕이고 만 고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소년의 눈이 조금은 커졌다 돌아왔다.
손님은 방금 들어온 둘 뿐이 없는지, 아니면 아직 오픈을 하지 않았는지 한적한 카페 안. 차를 내오겠다며 들어간 남자 덕분에 홀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입을 열지 않는 소년과 안절부절 못하는 소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차에 소년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에서, 어쩌다 노스메이아에?"
"가족이랑 같이 여행 왔어요. 너무 예뻐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길을 잃어서…."
채 정리하지 못한 대답이건만 소년은 다음 질문을 던지려 하고 있었다. 소리 내기 직전에 남자가 끼어들었지만. 오케이, 거기까지. 쟁반에 얹은 두 찻잔을 차근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름도 모르는 채 이런 질문은 조금 서글프지 않아? 긴장 좀 풀고서야 물어봐야지, 첫 만남에 이러면 누가 대화하고 싶겠어. 그치? 동의를 구하는 모습에 소녀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것 봐. 이런 곳에선 이름부터 묻고 친해지는 거라고. 우리 천사는 이름이?"
"타, 타카나시 츠무기에요."
소녀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느리게 대답해나갔다. 소년에게 다음은 네 차례라고 말하는 듯한 남자. 소녀의 조심스러운 관심도 그 뒤를 따랐지만 소년은 이름을 밝힐 생각이 좀처럼 없어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네. 이 녀석, 자기 이름 밝히는 걸 쑥스러워하거든. 내가 대신 말해줄게. '하루키'라고 부르면 돼."
'하루키'라고 불린 소년의 고개가 순식간에 남자에게로 향했다. 추궁하는 것처럼 가늘게 뜨인 눈. 남자가 모르는 척 고개를 으쓱했다. 그야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도 신상 알리기 껄끄러워했으니까, 이름 밝히기 불편한 거면 이쪽이 낫지. 속으로 해명하며.
"그럼 아저씨는요?"
아저씨라는 호칭에 남자가 조금 휘청인 것 같지만 금방 중심을 잡았다. 내 이름은 비밀.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더 물을 이유는 없었는지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애써 내와준 차를 마시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뒤늦게 들어 올린 찻잔. 앗뜨, 허겁지겁 마셔보려다 혀가 데여 손이 흔들려버렸다. 내용물이 쏟아지면 더 큰일이 날 터. 소년이 찻잔을 받혀 들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괜찮아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간 노스메이아어에 두 사람 모두 흠칫. 남자가 찬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둘만 남은 순간이었다. 소년이 한층 가라앉은 텐션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이번에 나온 소리는 일본어.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던 차가 움직임을 멈춰갔다. 소년이 손을 뗐다.
"미안, 차 마시라는 강요는 아니었는데. 너무 뜨거웠나 보네."
소녀가 남자가 내온 것을 두세 모금 들이켰다. 소년의 푸른빛 눈동자가 조용히 일렁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느끼는 새로운 감정. 남자가 소년을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츠무기는 음악 좋아하니? 하루키는 음악을 좋아해서 종종 여기 오는 거거든. 혹시 괜찮다면 피아노 연주 듣지 않을래?"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냐는 말에 소녀가 긍정을 표했다. 아까에 비해 눈에 띄게 활발한 반응. 조용한 음악도 좋아하지만, 아이돌 노래라거나! 그런 쪽도 좋아해요. 아이돌이라.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은 씁쓸해 보였다.
"그래? 그럼 더 좋지. 노래 부르는 건 좋아해?"
"노래는… 그렇게 잘 하는 건 아니지만. 부르는 건 좋아해요."
"그걸로 충분해. 노래는 듣고 부르는 사람이 좋아하고, 행복하고, 치유 받기 위해 만드는 거니까."
두 아이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는 듯. 남자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자연스레 시선이 따랐다.
"멋진 밴드는 없지만 피아노 한 대로도 멋진 연주를 보여줄게."
소녀가 신나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도 뒤늦게 일어나 피아노 쪽으로. 뚜껑이 열리고 앞쪽 의자에 남자가 자리잡았다. 별다른 악보는 필요 없었다.
"하루키는 저번에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츠무기는 아는 노래였으면 좋겠다."
남자가 건반을 두드리자 두 아이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쪽은 저번의 그 곡이 '아이돌'의 노래였나 싶어서. 또 다른 쪽은 익숙한 이 노래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하고. 저마다의 이유로 빛나는 눈이 마주쳤다. 아. 소년은 다시금 감정을 떠올렸다. 소녀는 싱긋 미소 지었다.
"이거 제로의 노래 맞죠! 무슨 이유에선지 사라져버린…, 전설의 아이돌, 제로!"
활짝 핀 소녀의 얼굴에 소년의 감상마저 녹아 드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선율과 눈을 뗄 수 없는 감정.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밑으로 관심을 돌리자 언제 봐도 화려한 손놀림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하이라이트가 흐르던 찰나 끊겨버린 흐름. 음을 따르던 두 아이의 낯빛이 흔들렸다. 남자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루키, 혹시 괜찮다면 이 뒤는 네가 연주하지 않을래? 저번에 했던 거 기억하지. 남자의 말이 들려오자 소년은 다소 표정을 구겼다. 왜 내가. 하지만 싫다는 생각 너머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은 남자가 비켜난 자리에 소년을 자리잡게 만들었다.
호기롭게 앉았으나 소리를 내는 건 또 다른 차원. 지켜보는 이 때문일까, 분명 처음이 아닐 텐데도 쉽사리 힘을 싣지 못하는 손가락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힘 내세요, 소년의 동공이 흔들렸다. 소녀의 곧은 표정이 소년과 마주했다.
“힘 내세요!”
무겁던 감정에 살랑 바람이 내려앉았다.
남자보다 뛰어나지는 않으나 따스하면서도 고운 음색. 소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감탄이 흘러나오는 만큼 채워져 가는 소년의 마음. 이윽고 마지막 음이 홀을 메웠다. 잔잔한 울림이 천천히 스러져갔다.
"역시 잘 하네. 연주하길 잘했지?"
무표정을 그리면서도 소녀를 향하는 눈길은 숨길 수 없었다. 제 연주에 저렇게 환히 박수를 쳐주는 기분이 새롭고도 나쁘지 않았다. 기뻤다. 못내 소년의 얼굴에도 자그마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소녀에게 닿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주 들어줘서 고마워. 우리도 더 연주를 들려주고 싶지만, 츠무기는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슬슬 돌아가야 걱정 끼치지 않을 거야."
아 맞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막고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까맣게 잊고 있었어. 허겁지겁 허둥대는 모습에 남자가 소녀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서두르지는 말고.
"연주도 차도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또 와보고 싶어요!"
"그럼 우리도 환영이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남자가 손을 흔들고는 가게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소년도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의 곁에 서 있었다. 남자가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길 잃었던 곳까지 하루키가 데려다 줄 거야. 걱정은 안 해도 돼."
소녀가 소년을 바로 바라보았다. 고갤 끄덕이더니 말 없이 카페 문을 열고 기다리는 소년. 안녕히 계세요! 소녀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오자 문을 닫고 걸어왔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하루키도 일본에서 왔나요?"
"전 노스메이아 사람입니다. 일본어를 아는 건 어머니께서 일본인이시라."
저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짐작 가는 곳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조금은 늦게 나와버린 대답.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일본으로 올 수도 있겠네요? 만약 오게 된다면 일본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드릴게요. 알고 싶어 하던 거 맞죠. 아이돌 노래도 같이 들어요. 소년은 역시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근처 숙박 시설은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나올 겁니다."
"여기서부턴 알 거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하루키!"
감사는 이쪽에서 해야 할 것 같은데. 목까지 차오른 말은 내지 않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소녀의 손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가벼운 입맞춤을. 소녀가 화들짝 뒷걸음질쳤지만 소년은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따스한 기운. 놀랐던 속내도 그 모습에 점점 지워져 갔다.
"그럼 안녕히, 츠무기."
소년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만큼 길을 나왔으면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몰라. 점점 속도가 올라가는 발걸음은 질질 끌리는 듯 어딘가 무거웠다. 이대로 돌아가면 더는 못 보겠지. 좋은 경험이었구나, 잠깐의 만남을 그리 보내야 했건만 어쩐지 마음이 아려왔다.
*
그게 끝일 줄 알았다. 좋은 경험이었을 뿐의 잠깐의 만남. 당신이 노스메이아를 떠나는, 제가 카페에 들르지 못했던 그 날. 잠깐이나마 찾아왔었으나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는 말에 다시는 못 볼 줄만 알았는데.
재개된 경기 중간중간 당신에게로 향하는 눈길을 돌리려 애썼다. 당신이 보는 앞에서 실수할 수는 없다. 끝까지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싶었다.
이윽고 시합 종료. 결과는 12대 12로 동점. 다행이다, 따라잡았구나. 기쁜 마음으로 모두가 모인 자리에는 우리들의 '매니저'의 소개가 이어졌다. 매니저, 그렇구나. ‘타카나시’ 프로덕션. 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확신이 차오르는 순간의 기쁨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모두를 지켜보았다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소가 차올랐다.
"나도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마드모아젤."
당신의 손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가벼운 입맞춤을. 당신의 놀란 표정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 때와 똑같은 반응. 하지만 더는 놓칠 수 없다. 손을 그대로 끌어와서는 당신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두근대는 이 소리가 들키지 않기를 자그맣게 바라며.
"손가락에 하는 키스는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프롤로그.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한대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대도. 마지막 인사는 첫 인사로 바꾸어 새로운 시작을. 기적적인 프롤로그는 어떤 에필로그를 맞게 될지. 적어도, 앞으로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만나 반가워요, 츠무기. 저만이 생각할 수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기쁜 마음으로 다짐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방방 뛰는 마음에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웅웅, 심장이 울려갔다.
2018.01.23) 에필로그
문득 정리해본 가족 앨범. 어쩐지 눈에 띄는 한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
IDOLiSH7이 데뷔한 여름을 지나 어느 새 찾아온 눈 덮인 겨울. 바쁜 스케쥴 속 간만의 오프에 멤버는 각자 쉬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한 외출을 하기도, 숙소에서 뒹굴거리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지금 막 돌아오는 양 문 앞에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나기씨? 어디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신가요?"
들려올 줄 몰랐던 목소리에 살짝 놀란 채 뒤돌아섰다. 츠무기를 본 나기가 세상 환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OH! 츠무기. 들어오는 길입니까?"
"네. 나기씨는요?"
저도 들어가려는 참이었습니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지요. 안쪽으로 에스코트하는 팔놀림에 츠무기가 고맙다고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 손잡이를 돌리려는 찰나 멈춰버린 움직임.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기가 묻자 츠무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아니고 생각난 게 있거든요. 나기씨한테 묻고 싶었던 게 있어요."
"저한테 말입니까? 무엇을?"
츠무기가 가방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음? 보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나기. 츠무기가 그리운 시선을 그리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몇 년 전에 해외 여행을 갔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어딘지는 기억이 안 났었는데."
이윽고 공개된 사진. 사장님께 여쭤보니까 노스메이아더라고요. 신기해서 이것도 들고 와봤어요. 새하얀 눈이 뒤덮여 눈이 부신 풍경. 마치 천국과도 같은 경치 속 츠무기와 타카나시 사장은 활짝 웃고 있었다. OH…. 의외의 말을 들었는지 나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보기 좋게 휘어 츠무기를 바라보고는.
"노스메이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 않았습니까?"
"사진으로 봐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때 나기씨도 여기 어딘가에 있었던 거겠죠?"
살그머니 떠오른 미소 한 방울. 츠무기가 추억에 잠겨 과거를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예쁜 곳인 만큼 멋진 추억도 한가득 쌓았다는 모습이 기쁜 듯 환해서. 나기는 감상에 젖은 츠무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가지 추억을 읊었을까. 한 순간 현실로 빠져나온 츠무기. 나기가 아쉬운 소릴 냈다.
"아, 제가 물으려던 건 이게 아니라. 그 때 한 아이를 만났었어요. 되게 예쁜 아이였는데, 이름이 하루키라고."
나기의 눈빛에 순간 반짝임이 흘렀다. 성은… 모르겠지만 일본 혼혈이었어요. 육 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까지 기억하는 건 그 이름이 가까운 곳에서 들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츠무기가 나기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츠무기의 조심스러운 눈빛에 나기는 곰곰히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마 없을 겁니다. 최소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쉬운 우연은 아니기에 츠무기가 고갤 갸웃했다. 어딘가 걸리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며 나기가 화제를 돌렸다. 츠무기가 말을 끌며 그에 따라갔다.
"마지막에 한 번 정도는 더 만나고 싶었는데, 다시 찾아갔을 땐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쉬워요."
"츠무기를 아쉽게 만들다니. 그 때 만난 사람이 그 소년이 아닌 저였어야 합니다! 저는 츠무기를 놓치지도 않고, 아쉬워하게 하지도 않았을텐데."
나기의 과장된 말투에 츠무기가 웃음을 짓고 말았다. 노! 츠무기, 저는 진지합니다! 그리 전하자 더 터트려버리는 츠무기. 진심이라며 다소 울상이던 나기의 얼굴도 조금 평소 페이스를 되찾았다.
"역시 그 때 츠무기를 놓친 것이 분합니다. 제가 그 아이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 기억 속에 저를 넣어주십시오! 나기의 외침에 츠무기가 무리라며 웃음소릴 섞었다. 또 다시 시무룩해지는 나기. 그러다가도 그럼 스스로 대신할만한 존재가 되겠다며 기합을 넣어 의욕에 불타올랐다.
"두고 보십시오, 츠무기. 제가 후회 없을 즐거운 기억만을 선사해드리겠습니다."
후회한다는 말은 한 적 없는 걸요. 계속 있다간 끝없이 치고 들어올 것 같아 츠무기가 이제 슬슬 들어가자며 운을 뗐다. 문을 열고 나기 먼저 들어가라고 배려하는 찰나 눈에 들어온 눈토끼 두 마리. 어라? 츠무기에게 의아함이 떠올랐다. 현관으로 들어온 나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금발 벽안의 '하루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아이. 설마, 하는 생각을 잠시간 했었으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럴 리가 없지. 나기가 하루키라는 아이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잠시 생각하다가도 너무도 다른 분위기인지라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런 우연이 있을 확률도 얼마나 될지. 츠무기가 고민을 마치고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스르륵, 현관문이 닫혀도 나기의 도전은 끝이 없었지만.
눈토끼는, 그냥 우연이겠지? 어릴 적 만들었던 것과 너무도 똑닮은 토끼 한 쌍. 나기의 장갑 안쪽으로 빨갛게 오른 손을 츠무기는 알지 못했다. 묘하게 들떠보이는 눈토끼만이 기쁜 마음을 소중히 품을 뿐이었다.
*
"하루키도 일본에서 왔나요?"
"전 노스메이아 사람입니다. 일본어를 아는 건 어머니께서 일본인이시라."
저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짐작가는 곳이 있다. 카페로 오는 길, 이 근처에서 눈으로 토끼를 만들 사람은 없는데 하고 생각했던 기억. 저 아이를 만나자마자 아, 그걸 만든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확신하는 속마음. 그 길로 가면 소녀가 왔을 법한 숙박 시설도 나오기에.
그런 생각을 하느라 조금은 늦게 나와버린 대답.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일본으로 올 수도 있겠네요? 만약 오게 된다면 일본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드릴게요. 알고 싶어 하던 거 맞죠. 아이돌 노래도 같이 들어요. 소년이 역시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이윽고, 눈토끼가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서로에게 시선이 향하자 걸음은 멈춰섰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2018.02.23) 눈
* 피타조+나기츠무
저 길 끝에서부터 노랑, 주황, 초록 우산이 나란히 하얀 눈 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한 겨울에 꽃이 핀 것처럼 색색깔로 물드는 기분. 하하호호 소리도 떠나지 않는 것이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말이다.
외출의 의도는 장보기. 오늘은 미츠키가 할인 시간을 딱 맞춰 갔다며 꽤 하이 텐션이 되어 있던 참이었다. 그 탓일까, 자신의 할인 무용담을 늘어놓던 미츠키는 앞쪽에 누군가 넘어져 패인 흔적을 보지 못했다. 나기가 뒤늦게 알아채고는 눈이 커졌다.
"OH! 미츠키, 조심하십시오!"
"우와앗!"
말을 끝냈을 땐 이미 엉덩방아를 찧은 후. 아야야…. 미츠키가 제 엉덩이를 문지르다 나기를 쏘아보았다. 직전에 말해주면 어떡해! 대가 부서진 우산이 바닥을 뒹굴었다. 야마토가 미츠키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 아저씨가…. 웃지 마!"
주변을 끌어와 뭉친 눈덩이가 야마토에게로 날아갔다. 야마토가 가볍게 피하자 방향은 나기를 정통으로 향해버리니. WHAT? 예상 못한 일격을 맞은 나기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치자 아, 미안! 하고 사과하는 미츠키. 그에게 돌아온 건 야마토의 손을 떠난 하얀 선물이었다. 약이 오른 미츠키는 당장에 일어나 야마토에게로 전쟁을 선포했다.
"해보자는 거지?"
"OH! 눈싸움입니까?"
모른 척 웃던 야마토는 된통 당하고는 항복했지만 이제 와서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나기까지 합류해 시작된 한 판의 눈싸움. 모두 우산도 길 옆에 내려두고는 열심히 눈덩이를 던져대기 시작했다. 주변의 눈을 모두 소진했을 때는 자리를 옮겨서 새롭게 시작. 나기가 근처 한 포인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들 열심히 싸우고 있기에 머지 않아 다시 게임을 시작했지만.
나기가 멈췄던 곳에는 한 쌍의 크기 다른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을 지켜보며 여유로이 웃는 모습. 나기는 그곳에서 힘을 얻은 듯 더 열심히 싸워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양. 세 사람의 갑작스런 눈싸움은 그렇게 누구 한 명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
얼마 전의 일이었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 두껍게 쌓인 거리를 나기와 츠무기와 함께 걸었던 때. 예보에도 없던 눈이라 겨우 얻은 우산 하나 들고 조심조심 걸어가다가 츠무기가 미끄러졌던 적이 있었다. 나기가 잡아주다가 결국 두 명 동시에 꽈당. 나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츠무기부터 살폈다.
"NO! 츠무기, 괜찮습니까?"
"아, 네. 저는 괜찮아요. 나기씨는…."
"저도 괜찮습니다만, 레이디를 넘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세상 시무룩해진 나기의 모습에 츠무기는 내심 귀엽다며 미소를 걸었다. 달래주려면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답을 찾은 츠무기가 반짝 하고 나기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도 이렇게 눈 온 날에 막 뛰어 다니다가 넘어졌던 적 한 번 쯤은 있었잖아요?"
그 때는 뭐가 그렇게 서운한지 펑펑 울었었는데, 지금은 그거에 비해선 엄청 괜찮은 거죠. 주변의 깨끗한 곳을 그러모아 손 위에 살포시 얹어보았다. 막 내려서 더러워지지도 않고요. 탈탈 털어 아래로 내리는 눈이 고와 꽤 아름다웠다. 나기가 빤히 바라보다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츠무기도 기쁜 듯 손 위에 조금 남은 걸 나기에게 뿌려보았다. 막 내리는 눈과 만나 소복이 녹아들었다.
"가끔은 이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나기씨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요?"
"저는 이렇게 넘어질 일이 잘 없었습니다. 눈이 와도 금방금방 치워졌었거든요."
나기가 주변을 슥 돌아보더니 그대로 포옥 누워 보았다. 차가운 기온이 전신에 느껴졌지만 기분만은 나쁘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기분 전환으로 나쁘지 않으니.
"당신의 말 대로, 가끔은 이러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누운 채 손만 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잡아 보았다. 금방 녹아들었지만 역시 나쁘지 않은 기분. 츠무기도 그 옆에 꼭 누워 나기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럼 첫 꽈당을 해보신 기분은요?"
"첫 상대가 츠무기라니 더 없이 행복합니다."
"원래는 상대가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긴 건 주변 길가에 작은 눈사람 한 쌍을 만든 이후였다. 작게 만든다고 만들었건만 어째 나기가 만든 것보다 커져버려 츠무기가 볼을 붉히기도 잠시. 사이 좋게 나란히 두고는 행복을 그리고 자리를 옮겼다.
망가져버린 우산은 접고 뽀득 뽀득 소리 즐기며 걸어가는 길. 송이송이 내리는 눈송이가 마음을 따뜻하게 덮었다.
2019.02.22) 고양이의 날
* 피타조+(약)나기츠무
어느 새 신곡 준비도 막바지. 타마키와 소고는 앞으로 있을 신곡에 대비해 홍보 활동 차 예능국에 나가 있고, 이오리와 리쿠는 컨디션 비례 최고의 소리를 내기 위해 아직 저 안에 남았다. 집중하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것만 같아 슬그머니 빠져나온 아이돌리쉬 세븐의 나머지 세 사람. 트레이닝 문을 지나며 미츠키가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구나, 신곡 활동."
"이런 오프도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거지. 앞으로 여유 없어질 준비는 됐어?"
"예스! 우리들을 사랑해주는 팬 여러분과 같은 마음으로 두근대고 있습니다!"
미츠키부터 튼 말꼬는 이런저런 얘기로 조잘조잘 퍼져 나갔다. 한동안 자유가 없어짐에도 다들 그를 반겼다. 팬들과 만나는 기회는 많을 수록 좋았으니까. 과거를 죽 돌아 보다 어느 새 도착한 숙소 거실. 미츠키의 시선이 거실 귀퉁이에 걸린 달력에 닿았다. 들뜬 대화의 끝은 어느 한 날의 추억. 이 월 이십이 일, 작년의 프로그램을 기억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기억 나? 작년 오늘, 예능 나갔더니 고양이의 날이라고 모두한테 고양이 귀 씌웠던 거."
"OH! 출연진 모두가 고양이 귀를 쓰고 진행했었죠. 너무나 귀여웠습니다."
나기가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절로 행복한 표정이 그려지는 중, 야마토의 표정이 조금 굳어 버렸다.
"아하하, 아무래도 좋지만 형아에 대한 기억은 지워줬음 좋겠는데."
반기지 않는 눈치에 나머지 둘의 장난기가 올라왔다. 다소 음흉한 미소를 짓는 미츠키와 장난스런 나기의 시선이 맞닿았다.
"맞아, 우리 리더가 원하면 그래야지. 고양이 귀 머리띠 초록색으로 맞춰 끼고 '냥' 이라고 말했던 것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쭈뼛거리던 야마토, 지우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괜히 말했다. 야마토의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미츠키가 머리 위로 뾰족 고양이 귀를 그리며 당시의 야마토를 재연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미츠키의 놀림을 애써 무시하던 그대로. 나기가 한 술 더 떠 당시 대사를 꺼내자 미츠키가 바로 받아치며 즐거워 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둬…."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야마토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야마토의 항복 선언에도 조금 더 이어지는 놀림. 두 손에 붉은 기 도는 야마토의 얼굴을 파묻어버릴 때에야 다른 인물의 등장으로 잠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이들을 책임지는 매니저, 타카나시 츠무기로 인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츠키와 나기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어두운 상이던 누구와는 대조되게 나기의 얼굴은 활짝 피어났다.
"어서 오세요, 츠무기! 뭘 그리 들고 있는 겁니까?"
"나기 씨! 미츠키 씨도…, 야마토 씨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
고개를 들지 못하던 야마토가 츠무기의 목소리에 잠깐 새 퀭해진 눈을 들었다. 괜찮다는 듯 손을 몇 번 휘적. 야마토를 기웃거리던 츠무기가 미심쩍은 눈길로 거실 한 모퉁이에 상자를 내려 놓았다. 그제야 나기의 질문에 대답하며.
"작년에 썼던 방송용 소품이에요. 신곡용 새 소품을 들여야 해서, 잠시만 여기다 내려 놓으려구요."
"오오, 안 그래도 작년 얘기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있으려나? 확인 해봐도 돼?"
작년 소품이라니, 아무도 모르게 흐릿해진 야마토의 시야. '그거' 라는 지칭에 츠무기가 조그마한 의문을 품었으나 상자에서 물러서며 확인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천천히 다가와 안을 들여다 보는 미츠키와 조금 기웃거리다 옮길 게 더 남았으면 도와 주겠다는 나기. 아차 싶은 표정의 미츠키가 츠무기를 쳐다봤다. 아, 미안. 먼저 물었어야 하는데, 하고. 나머지는 다른 분들이 날라주신다며 괜찮다고 손을 젓는 츠무기에 그럼 안심! 하며 즐겁게 원래 시선으로 돌아왔다. 나기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츠무기를 잠시 바라보다 저도 보겠습니다! 하고 관심을 합쳤다.
"아, 이것 봐! 작년 여름에 썼던 부채랑, 이건… 소고가 만든 모조 임금님 푸딩이네."
"이오리가 선물받은 귀여운 토끼도 있습니다."
"방송에서 룰렛으로 받고 필요 없다고 했던 거? 어디 갔나 찾더니 여기 있었나 보네."
"이오리 씨, 그 후에 찾으셨어요? 그럼 찾아드릴 걸 그랬나 봐요."
어느 새 츠무기도 옆에 앉아서는 쪼르르 참여한 대화판. 어느 새 고개를 든 야마토가 이 틈에 도망칠까 하며 소파에서 일어선 참, 나기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격한 반응을 내보였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저의 보물!"
큰 소리에 야마토가 흠칫하며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 귀 머리띠인가 싶었던 물건은, 의외로 아름답게 장식된 조화 부케. 모델 촬영을 하며 쥐었던 꽃을 프러포즈하듯 츠무기에게 내밀었다. 제 사랑을 받아달라며 건넨 부케. 츠무기는 감사해요, 나기 씨! 하며 잠시 들고 있다가 소중하게 상자 안으로 다시 정리했다. 자신만만하게 빛나던 나기가 OH… 소리를 내며 시무룩해 졌다.
"리더, 어딜 가려고?"
"응? 아니, 뭘, 가긴 어딜 간다고."
피곤해서 방이나 들어가려고 했지. 하하, 웃으며 다리를 빼는 야마토에 미츠키가 응, 그렇구나.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왜 오는 거냐는 야마토 앞으로 서서히 다가가더니, 그럼 이건 쓰고 가기! 하면서 고양이 귀를 머리에 쏙. 으악! 하는 야마토 옆으로 나기가 제 몫을 찾아 쓰며 만족스레 저쪽을 바라 보았다.
"역시 리더─! 아주 잘 어울린다니까?"
"내가 왜 이 나이 먹고 이걸 써야 하는…."
미츠키마저 주황색을 쓰고는 천진하게 냥! 하고 웃는 새, 나기는 츠무기 뒤로 슬쩍 다가가서는 츠무기 머리 위로 양 손을 올려 고양이 귀 모양을 만들었다. 츠무기가 나, 나기 씨? 하면서 뒤돌아 봤지만 나기는 태연하게 그를 따라 팔을 졸졸 움직일 뿐.
"이걸로 이곳의 모두는 고양이로 변신 완료입니다!"
나기의 기분을 나타내는 츠무기의 귀가 방방 접었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조금만 어울려 주십시오, 하는 작은 속삭임에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고 마음 먹은 츠무기가 맞아요, 야마토 씨도 고양이가 되는 거에요! 라며 냥! 소릴 내뱉었다.
멋쩍게 웃던 것도 지운 진지한 동참에 빵 터진 미츠키와 체념하는 야마토. 나기는 츠무기, 매우 매우 귀엽습니다! 를 외치며 손을 강아지 꼬리처럼 붕붕 내달리게 했다. 물론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눈길과 함께.
"좋아! 그럼 이거 찍어서 SNS에 올려야지. 고양이의 날 리턴즈다!"
"자, 잠깐! 쓰고는 있을테니까 사진은…."
"팬분들은 기뻐하실 거에요!"
그렇지! 츠무기의 덧붙임에 환호하며 미츠키가 야마토를 향해 찰칵 셔터를 터트렸다. 움직이지 마, 아저씨! 흔들렸잖아! 하는 미츠키와 누가 찍으랬냐며 요리조리 피하는 야마토. 미츠키가 어쩔 수 없이 이거라도 올려야 겠다며 SNS를 켜자 야마토가 진이 다 빠져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마토가 함락됐습니다! 다른 멤버들도 돌아오면 모두 고양이가 되죠!"
"그것도 재밌겠네, 다 같이 사진도 찍어 올리고!"
야마토를 제외한 미츠키, 나기, 츠무기의 셀카가 미츠키의 휴대폰에 담기고, 그 모습을 보며 포기의 웃음을 흘리던 야마토의 모습도 사진으로 남았다. 아차 하고 표정을 바꿨을 땐 이미 늦은 상황. 더 이상 말릴 기력도 없어 낯선 물건을 매만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미츠키가 오옷, 잘 나왔다! 외치자 츠무기는 박수 짝짝 치며 축하를 전하니. 정말 어쩔 수 없다며 손을 내리고 저 흐름에 끼기로 결심했다.
사진 어떻게 나왔나 보여달라는 말에 이미 다 백업해서 삭제해도 소용 없다는 미츠키와 하하, 참 철두철미하네 하며 영혼 없이 사진을 확인하는 야마토. 나기는 혹시 자세가 불편하냐며 노랑 머리띠를 츠무기에게 씌우고는 직접 제 고양이 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제각기 놀고 있을 때 연습을 마친 이오리와 리쿠가 거실로 들어왔다. 다음 타겟은 이오리다, 고양이 사인방이 소리 없는 사인을 맞추고는 이오리에게 슬금슬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고양이 귀에 순수하게 재밌어하는 리쿠와 불길한 기운에 뒷걸음질치던 이오리로 제 이회전 시작이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15년 전 죽은 최애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prologue
다우트
갓생 오타쿠. 그것은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픈 것도 없는 내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목표 의식이 뚜렷해 성적이든 뭐든 원하는 건 다 쟁취해 내는 미친놈. 그 위에 여유 있는 집안에 태어난 우쭈쭈 막둥이 공주라는 설정 한 스푼.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100% 믿어주는 가족들의 신뢰까지도. 그 견고한 신뢰를 품에 안은 나
#웹소설 #소설 #다우트 #창작 #방탄소년단 #방탄 #전정국 #민윤기 #김태형 #김석진 #정호석 #김남준 #박지민 #방탄빙의글 #빙의글 #나페스 #방빙 #방빙추천 #bts #nps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