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종려] 악우 : 起
성균관 유생 AU : 첫 만남
영화 <전, 란>의 두 인물에 대한 주관적이 해석이 다분하며 AU로 인해 날조된 서사로 캐붕 가능성이 높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성균관은 <전,란>의 시대 배경 상 기관 자체가 제 기능을 못했거나 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에 타 폐허가 된 적이 있기 때문에 대략 조선 후기 어드메라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기관을 가볍게 차용하였으므로 고증은 잘 못합니다…) 또한 원작은 둘 다 무예에 능해 무과 장원을 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문과 응시를 했다는 설정입니다.
"사흘 후면 신진들이 들어온다면서?"
"나도 들었네. 이야, 나도 드디어 갚을 날이 왔구나. 이번 신참례*가 기대되는군."
"하하, 나체로 은행나무 위에 올라가던 자네가 아무래도 제일이었지!"
"......"
순식간에 굳은 얼굴로 걸음을 저만치 재촉하는 동기를 쫓는 모습이 여러 사람의 눈에 띄었다. 그런 광경을 보던 박사* 둘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어수선해지긴. 다들 마음이 붕 떠서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소."
"뭐, 연례행사인데 새삼 걱정하십니까?"
"하긴. 아, 그러고 보니 올해 소과 장원이… 그 서얼 출신의..."
그 말을 들은 동료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문제가 드러난 것에 퍽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예, 법이 있더라도 현실은 거의 유명무실이나 마찬가진데. 그것도 최고 성적이라니 유생들 분위기가 더 소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지금의 주상이 즉위한 이후로 과거 시험이 아무리 양인 이상 모두에게 열려 있다 한들, 무과가 아닌 문과에 응시해 합격할 만큼 공부할 환경이 안 되는 자들에게 성균관 입학이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소리가 있다. 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가는 사다리는 있으나 거기까지 올라갈 시간도, 정신력도 없다’는 뜻으로. 그래서 실제 동서재에 거주하고 있는 건 암묵적으로 적자라는 전제로 여겼다. 어려서부터 쏘아대는 따가운 시선이 나이를 먹는다고 변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발 들일 일도 극히 드물 법했다.
"싸움판이나 열리지 않길 바라야겠소."
"아무리 바른 유생들만 모여도 싸움은 벌어졌지요. 하하!"
후배들 골려먹을 생각에나 빠진 유생들과 망가진 면학 분위기를 타박하는 관직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천재적인 행운의 주인공이 누군가의 인생을 뒤집어엎어 버리게 될 것을.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서재 두 번째 칸. 그곳은 병조참판 이득조 대감 댁 장자인 이종려가 1년 째 머무는 곳으로, 상재생들이 지내는 서재 중에서도 높은 권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들이 차지하는 방 중 하나였다. 본래 배경에 의한 방 배정법이 공식적으로는 없었으나,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구도를 만들어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종려는 석 달 전에 치러진 대과로 장수생인 동방생이 나간 후 홀로 편히 지내고 있던 참이었다.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친 벌새처럼 양인 출신 신참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기 전까지는.
"남는 자리가 여기 뿐이라지 뭐요? 그러니까... 아, 인사부터 한다는 걸 잊었군. 천영입니다."
이종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상대를 놀라게 한 것은 생각도 없는 기세로 손을 내미는 후진은 초면에 넉살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범하게 친절해 보인다고 하기엔 꽤나 약이 오를 법한 뻔뻔함이 보이는 인상이었다.
꽉 조여매 상투를 틀었음에도 흩어져 나온 잔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게 보였고, 옅은 속쌍꺼풀에 당겨진 눈은 흰자위가 보통 사람들보다 크게 보여 시선을 끌어당겼다. 흰 피부가 아님에도 매끈한 얼굴결 때문인지 조금 밝은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종려는 자신이 누군가의 생김새를 이렇게 살피는 것이 처음인 것조차 잊었다.
"...아~! 그쪽은 소개할 필요 없소. 이 방 주인이 누군지, 서재로 가야 한다니까 귀가 썩도록 들어가지고. 이거, 독방이었던 모양인데 저 때문에 나리도 좋은 시절이 다 갔군요."
"......그냥 사형이라고 부르시오. 이곳에 머무를 자격을 갖춘 이상 다들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니까."
동등한 대우. 천영은 순간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나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나라에서 허락한 시험을 쳐서 떳떳하게 봇짐 지고 상경했건만. 밑 빠진 독처럼 말이 어찌 그렇게들 많아서 줄줄 새는지 원.
사실 꼭 다른 생원, 진사들과 같이 배우는 성균관에 들어오지 않고도 독학하여 대과를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양인의 신분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게 어려웠던 것처럼 그중에서도 절대 소수를 뽑는 대과에 합격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자신은 어려서부터 검부터 잡아 무관이 되려다 우회한 신세가 아닌가. 제 몸으로 입신양명해 보이겠다는 서자를 말리지 못하다가, 결국 몸 다치는 것을 막고 싶어 반대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짧은 회상을 거친 천영이 눈앞의 사형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동네 벗을 대하듯 고개 들어 쳐다보는 것이 영 기분이 이상했다. 같은 양반끼리도 집안과 부모의 이름으로 갈라대니 말뿐인 대등함이라고 하지만... 천영은 말로만 듣던 이종려를 마주 보고서야 깨달았다. 표면적일지언정 밖의 세상과는 다른 규율과 체계로 이루어진 곳. '반궁'*이라 부르는 이 공간에 자신이 입성했다는 것을.
"어쨌거나 동기가 아닌데도 순서가 뒤처져 동방생이 되었으니 잘 부탁하겠습니다. 저는 바깥 문 쪽에서 잘 테니 사형께선 따뜻한 안쪽에서 주무시오."
"......알겠네."
마침내 어미를 바꾼 이종려는 짧지만 느린 대답의 전후에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누군가와 한방을 쓴 적이 없어 낯설었던 신진 시절에도, 조용한 책벌레였던 동방생 덕분에 있는 듯 없는 듯 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이는 따발총처럼 나불대지는 않았지만, 어째 존재 자체가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머리가 뜨거워졌다 차가웠다 반복하는 것처럼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마 동기였다 해도 절대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 같은 부류였기에.
이종려는 천영이 짐보따리를 정리하는 동안 자리를 세 발 짝 쯤 옮겨 다시 앉았다. 필사하던 쪽의 먹이 다 마른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침에는 북이 두 번 울릴 때까지 잠에서 깨어 의복을 단정히 해 준비하고, 3번 울릴 때는 식당으로 가야 하네. 출결이 점수의 기본이니, 내가 깨우거나 재촉해주리란 기대는 하지 말고 알아서 챙기게."
"예, 예. 그런데 지금 하시는 말씀이 친절이라고 하는 걸 아십니까?"
그럼에도 만약 그와 벗이 된다면, 필시 악우(惡友)이리라.
*신참례 : 새로 입학한 신진 유생들에게 주어지는 신고식.
*박사 : 유생들의 교육을 맡는 정7품 관직. 오늘날의 교수와 같은 느낌이며 정원은 3명이다.
*대사성 :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직이자 성균관의 장(長)으로 정원은 1명이다.
*반궁 : '반(泮)'이란 글자는 나라의 학교라는 뜻으로, '반궁(泮宮)'은 성균관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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