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빙하기
8월, 거진 여름의 절정. 세상의 열이 절정으로 치달아오르고 매미의 울음소리도 짜증스러울 지경으로 시끄럽게 울어댈 때. 분명 그건 찝찝한 습기와 빌어먹을 열기의 범벅일 것일텐데. 후우, 하고 내뱉는 숨에는 새하얀 것이 칠해지고 몸은 겪어야 할 열기 대신 시린 것만. 발에 밟히는 것은 아스팔트도 바닥재도 아닌 새하얀 눈의 촉감. 시야를 메우는 것 또한 자연물이나 인공물이 아닌 새하얀 눈이. 바람이 한 번 불면 그 차가운 냉기가 껴입은 옷 안에 스몄다. 시린 것이 골을 스치는 감각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다. 준비하지 못한 핫팩은 아마 이 높은 눈더미 속에 묻혀있을 것이고, 찾아봤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도 없겠지. 하, 하고 뱉은 숨은 체온만을 앗아간다. 대비하지 못한 여름의 한기는 가볍게 버틸 수가 없을 테다.
8월, 여름의 절정.
세상이 하얗게 새었다.
도원은 그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더라. 하얗게 멀어버린 풍경을 계속 마주하기에는 눈이 너무 아파서 질끈 감아버리고 내뱉은 말은 그랬다. 뭐였더라, 스키를 타러 가자고 했던가? 한여름에 대체 무슨 스키냐며 구박을 주었던 거 같기도 하고. 비참한 기억력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때에 세상은 이렇게 새하얗지 않았고, 텅 비어있기보다 무엇인가가 시야를 차지하고 있었고, 또한 이렇게 고요하지도 않아서. 아니, 지금도 고요하지 않은게 아니긴 하지, 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화답하듯 귓가에 걸리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새하얀 눈이 난반사하는 빛은 눈을 아프게만 하지, 여름날 그토록 기다리곤 했던 시원한 바람이란 것은 시원하다못해 세상을 얼려가고 있지. 오히려 살아남은 자신이 이상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정신을 처음 차렸을때 도원은 대체 무엇을 했냐 하면 아마 걸었다. 걷고 걷고 걸어서 세상을 살펴보고 있었다. 쌓인 눈에 발이 푹 빠지거나 아예 굳어버린 얼음에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제 자신이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걷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찾아온 것은 터무니없는 고독감이라. 새어버린 세상이 만들어내는 화이트아웃과 오랜 걸음이 저 스스로를 지치게 할지라고 해도 그래도. 그럼에도 걸어야 했던 이유는 세상에서 외롭게 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욕이 어떤 무리라도 찾아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했을지 모르고. 확실한 것은 죽고싶지도 않고 혼자 있기도 싫었다. 그래서 걷고, 걸어서, 걷다가.
마침내 깎아 내려진 듯한 급한 경사에 도달한 순간에 힘이 탁, 풀리고야 말아서.
“하, 하하….”
힘없이 뱉는 그 탄식의 끝에 욕이 걸릴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이제까지 욕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용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렇게 꾹꾹 참아온 욕이 제 아래로 뻗어진 경사를 보자마자 튀어나왔다. 지랄하지마. 그 욕설을 들을 사람이 없음에도 욕이 튀어나왔다. 대체 뭐 때문에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진짜 힘들어도 일단 걸어왔는데. 사람을 찾으러 온 길의 끝자락에는 곡선으로 깎인 빌어먹을 낭떠러지가 있다. 사람의 흔적은 곱게 개어진 옷과 스키용 장비밖에 없고, 아마 이것을 개어놓은 사람은 아마 지금 쯤 세상에 없을 테다. 하여 계속 걷고 걸을 동안 헤매어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살아남고자 아득바득 잡아 온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도원은 그때 울었다.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한낱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는것을 알든 모르든 간에. 어쩌면 최소한의 판단을 할 이성마저 날아갔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계속 발광했다가, 지쳐서 쓰러졌다가.
드디어 지금.
.
수평선인지 지평선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아렸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버린 사유가 이 빌어처먹을 눈들 때문이라, 자체적으로 반사해대는 빛을 가만 보고 있으면 항상. 빌어먹을 종말, 쓰레기같은 눈, 혼자이고 싶지 않은 고독. 눈이 너무 아파서 감을 때면 줄곧 들던 생각들이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짜증이 나고 쓰레기같고. 손으로 바닥을 쳐도 아프진 않고 힘만 빠지고. 차마 죽을 자신이 없는데 이렇게 살고싶지도 않았다. 그때 들어온 것은 곱게 개어진 옷가지와 스키용 장비들이고, 언젠가 들었던 스키를 타러 가자는 말이다. 그것들이 스치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몸이 한번 돌아 기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들을 수 없는 사죄와 함께 옷 아래에 깔려 고정되어있던 장비를 꺼냈다. 스키랑 그것에 연결하는 부츠 한 켤레, 그리고 스키 봉—정확한 명칭이 있던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한 쌍. 그 모든 것을 챙겨 쓴 뒤에야 우리 스키 타러 가자는 말에 늦은 대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낭떠러지 앞에 서서 힘호흡하면서도 제가 왜 이런 짓을 하고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만 기억나는 누군가가 한여름에 스키를 타러 가자고 했다.
8월, 거진 여름의 절정.
세상이 하얗게 새었다.
도원은 그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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