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3

Decade

2015년 12월 11일 밤부터 2025년 12월 12일 새벽까지

2차 by 사단장

동현의 떨리는 숨소리가 총성에 묻혔다. 지하의 온도가 매섭도록 찼다. 실내인데도 불구하고 숨결에 맞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이런 씨발... 그렇다고 진짜로 상관을 쏴? 이제 아주 막 나가겠다 이거군..."

피로 흥건한 제 손을 내려다보던 동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근이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자넨 뭘 또 그리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나? 겨우 팔에 한발 맞은 걸세, 한발. 넘어져서 그런 거지..."

"의, 의무병을 불러오겠습니다."

"아, 됐고. 상황 보고 좀 해보게."

수근은 주저앉은 동현을 일으켜 세웠다.

"현재 시각 2, 23시 40분, 제2특임대대장은... 아직 연락이 안 됩니다."

"쯧, 주말이라고 빠져갖고는... 55경비단은 어디쯤 왔다던가?"

수근의 물음에 동현이 주저하다가 아, 그게, 하고 말을 흐렸다.

"빌어먹을, 그놈들은 이 바로 밑에 있으면서 왜 이리 늦어? 56사단 쪽에도 연락 좀 돌려보게. 나는 각하께 가봐야겠어."

수근이 불평하며 제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대단치도 않은, 겨우 총알이 스쳐 피가 흐를 뿐인 상처. 부대 내에서 울리는 총성과 비명에 비하면 정말 하찮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수근에겐 그 총상이 무엇보다 쓰렸다. 완벽했던 계획이 겨우 중령의 하극상 한 번에 전부 틀어져 버렸다. 원래라면 지금쯤 죽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위쪽의 누구여야 했다. 하지만 이미 일을 벌여버렸으니 되돌릴 순 없다. 어떻게든 완수해야 한다. 실패해선 안 된다.

"하, 제기랄..."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든 게 수틀린다면... 뭐 이를테면, 결국 핵을 발사하지 못한다던가, 수근 자신이 옥살이한다던가, 아니면, 아니면... 수근은 괜스레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갑자기 목덜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전부 연 중령,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이었다.

"그, 대령님-"

"자넨 그냥 좀 조용히 있게! ...골 울리니까."

수근이 동현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 동현은 한참 전전긍긍하듯 수근의 눈치를 봤다.

"...저, 대령님. 이런 말씀, 되게 주제넘다고 생각되실 수 있겠지만, 그게..." 동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제 생각엔 말입니다... 어쩌면 저희는-"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동현의 말이 끊겼다.

"내가, 언제, 자네, 생각을, 물었어!!! 씨발, 똑바로 서, 똑바로."

동현이 휘청거리며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씨발..." 수근이 재차 손을 올리다 말았다. "죄송할 짓을 안 하면 되잖나." 상처가 난 오른팔이 아렸다.

동현은 수근의 눈을 피했고, 수근도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한참 동안 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우린 이제부터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받을 걸세. 그렇게 된다면, 뭐, 일이 더 수월해질 수도 있겠지." 수근이 동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연 중령 그 개새끼가 프로토콜을 훔쳤으니, 그것도 받아와야되는군... 쯧, 귀찮게 됐어. 기왕이면 우리 쪽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편이 좋았는데...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늦으니, 조금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서둘러야지 않겠나?"

중간중간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하고 대답하던 동현의 머리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동현은 머뭇거리다 수근을 올려다봤다.

"대령님..."

수근이 마주 보자, 동현은 괜히 몸을 움츠렸다. 수근은 동현에게 떠오른 의문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원유석이 절대로 이 안건을 재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까지 저어 보이며, 수근은 미소 지었다.

"지금까진 각하께서 여당 놈들 등쌀에 떠밀려 악수만 두셨지만... 이쯤되면 어느 것이 정말로 우리 조국을 위한 선택인지 충분히 알아차리셨겠지.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상황 파악을 할 능력이 안 되신다면 그땐..."

수근이 동현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짓눌렀다. 동현이 윽, 하고 주춤거렸다. 뒤이은 수근의 너털웃음에, 동현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지금 우리 경비단에 운용할 수 있는 중대 하나쯤은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오늘 당직사령이 2중대장이니, 지금 당장도 가능합니다."

"그럼 우린 2중대와 함께 청와대로 간다. 2중대장, 그 치가 육사 60기였던가?"

호기롭게 웃는 수근의 너머로, 동현은 총에 맞아 산산이 부서져 버린 CCTV를 봤다.

"...이런 좋은 순간에 그런 표정 짓지 말지? 우린 역사에 영웅으로 남을걸세."

수근이 동현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동현은 어설피 웃으며 생각했다. 분명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기왕 남을 것이라면, 영웅으로 남는 것이 좋겠지. 그러기 위해선 동현이 이 싸움의 승자가 되어야 했다. 동현은 수근과 마주 웃었다.


"이런 씨발!"

동현이 커피를 홀짝이며 소리가 난 쪽을 곁눈질했다. 누군가가 행정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이를 갈고 있었다.

"충성,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잘 쳐줘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마른 세수를 했다. 아마 실제 나이도 고등학생 또래일 것이다. 교복을 입는 게 어울리는 얼굴로 번쩍번쩍한 장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적잖은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슨 문제? 무슨 문제?!"

또 왜 이러지. 동현이 긴장한 듯 웃음을 흘렸다.

"기술자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말이야..." 소년이 동현의 앞에 섰다. "나를 대놓고 무시하지 뭔가."

동현은 소년을 마주 봤다. 역광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절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다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소년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혹여 쓰러지기라도 할까, 그에 따라 동현이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움직였다.

"신동현, 일어서."

"중사 신 동 현."

동현이 고분고분 일어섰다. 위에서 내려다본 소년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 동현은 고개를 돌려 당직 부사관이 있는 쪽을 봤다. "...윤경태, 너 근무지 인솔 안 가?"

"아, 병장 윤 경 태. 죄송합니다.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계속 동현과 소년을 흘끗대던 당직 부사관이 서둘러 나갔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행정반에서, 둘은 마주 보고 섰다. 소년은 히죽 웃더니 동현 앞에 놓여있던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 당직 서는 게 아주 편하지, 응? 새끼야..."

"아닙니다."

소년이 커피를 단숨에 쭉 들이키며 동현을 들여다봤다.

"저, 대령님. 약주 하셨습니까?"

대령이라고 불린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씨이발... 그렇게 티 나나? 몇 잔 안 마셨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대령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행정반 안을 두서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대령님, 괜찮으십니까?"

동현이 그런 대령을 눈으로 좇았다. 대령은 몇 번 휘청거리더니 아무 의자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그 새끼들도 나를 대령으로 여기지 않더군..." 대령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 새끼들만 그런 게 아니야, 연 중령의 따까리들도, 하물며 민간인들도... 심지어 가끔은 부하들마저... 하, 참,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

"다 부하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동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쇼, 대령님."

"...자네는 몰라." 대령이 웅얼거리며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자네같이 정당성이 있는 놈들은 모른단 말이야.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영 그분이 될 수 없는데... 대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삶은 어떤 거지? 난 도무지-"

"대령님, 취하셨습니다."

동현이 대령의 중얼거림을 적절하게 끊고,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동현은 덧붙여 대령을 더욱 몰아세워야하나 고민했으나, 구태여 이미 취기가 올라보이는 대령에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근데 자네는 안피나? 한 개비 줘?"

"아뇨, 괜찮습니다. 전 담배 못 핍니다."

대령은 못마땅한듯 동현을 쳐다보다가,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옘병, 기대도 안했네. 자네는 늘 그딴 식으로 스리슬쩍 빠져나가니까... 미꾸라지 같은 놈."

"하하... 죄송합니다."

동현이 대령에게 다가가 찰칵, 담배 두 개비에 불을 붙였다. 대령은 담배를 빨면서 먼 허공을 봤다. 두 개비의 담배에서 각각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령이 그 중 한개비를 손으로 만지작대더니, 씩 웃으며 동현을 불렀다.

"...신동현이, 이리 가까이 와보게."

자리로 돌아가던 동현이 발길을 돌려 대령에게 다가갔다.

"중사 신 동 현."

"...여."

"잘 못 들었습니다?"

취기 탓인지 워낙 발음이 뭉개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숙여." 대령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이씨, 당장 90도로 안 숙여?"

동현이 몸을 굽혀 대령의 높이에 맞게 숙인 순간, 대령이 동현의 얼굴에 대고 담배연기를 후 불었다. 켁켁대는 동현에게 대령이 담배 개비를 입에 들이댔다.

"당장 물어, 씨발. 빨아, 빨라고, 이 새끼야!"

동현이 마지못해 담배연기를 들이마시자 대령이 낄낄 웃었다.

"못 핀다고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더니..."

하여튼 대령의 기분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뭐, '대령님'도 그랬지만... 동현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꼬나물고 대령을 따라 실실 웃었다. 담배는 필 줄 몰랐지만, 요즘 나오는 담배는 워낙 달아서 피는 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동현의 담뱃재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기분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대령은 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흐릿한 담배연기가 허공으로 흩어 사라졌다.

"신동현이, 나랑 자네 방에 가서 술 한잔이나 할까? 아, 혹시 이것도 못 하나?"

대령이 비식비식 웃었다.


"에~라이, 씨발..."

"대령님...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56사단장 한 명 내뺀 걸로는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어! 하, 이미..." 수근이 동현에게로 담배 연기를 불었다. "...윤 소장, 그 새낀 이런 큰물에서 놀 양반이 못 되네. 쯧... 계속 그렇게 송사리 섀키마냥 사리다가 콱 뒤지라지! 빌어먹을 새끼..."

동현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라의 명운이 달렸는데 사령관이라는 새끼들이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대령님."

동현의 대답에 수근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거, 누구냐. 그... 52사단장한테 연락되나? 저번에 육본 다녀왔을 때, 얼굴 맞대고 술 한 잔 했었는데."

"지금 당장 해보겠습니다."

동현이 스마트폰을 켜 연락처를 뒤졌다. 제52... 52... 보병사단장... 통화 버튼을 누른 동현이 긴장한 표정으로 스피커폰 모드를 켰다.

"우뚝 솟은 관악산 떨치는 기상, 승리의 함성으로 메아리친다."

뜬금없는 통화 연결음에 동현이 맥 빠진 웃음을 터트리며 수근을 올려다봤다.

"목숨 바쳐 지켜가는 누리의 평화, 서울은 나의 조국 겨레의 상징."

"사단가? 참 나, 고루하기는... 줘봐, 내가 하지." 동현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낚아챈 수근이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자네는 빠져있게. 아, 아, 사단장님! 접니다, 안 수근이!"

"네에..."

대답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동현은 어물쩍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동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상관들의 통화는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동현이 뒤편에서 군홧발로 모래 장난이나 치고 있을 동안, 수근은 사단장과 대화를 마쳤다.

"자."

수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동현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줬다. 동현은 그런 수근의 눈치를 보며, 차로 걸어가는 수근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뭐하나? 얼른 운전하지 않고. 우린 바로 청와대로 간다."

"대화가 잘 끝나셨나 봅니다?"

동현이 수근의 뒤를 따르며 해맑게 물었다.

"아무렴. 52사단장이 말이야, 응? 시류 읽는 데에 능통해." 수근이 차를 타고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청와대까지 몇 분 걸리나?"

"넉넉잡아 20분 정도 걸립니다, 대령님." 동현은 대령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운전석에 앉았다. "2중대장에게 연락합니까?"

대령이 실실 웃었다. 동현은 영문도 모르고 순진하게 따라 웃으며 기어를 넣었다.

"그래, 그래. 당장 연락하게!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군. 대령따리 말이라고 다 쌩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머리가 돌아가 들..." 수근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각하께 가서 핵 발사를 재가받고, 프로토콜만 얻어오면 되는 거지. 뭐, 물론 그전에 연 중령 그놈을 잡아낸다면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야. 혹시 그거에 관해서 연락이 오면 바로바로 보고하게."

"네, 알겠습니다. ...아, 통신보안. 임 대위, 그대로 출발하시죠."

2중대장과 통화하는 동현의 뒷모습을 보며, 수근은 제 시계를 들여다봤다. 어느새 시각은 자정을 넘겨, 12월 12일이 되어있었다. 차창 밖으로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이 마치 곧 사라질 신기루처럼 보였다.

전쟁이 시작되면 이런 서울의 모습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수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쟁은 분명 우리 조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날테니, 괜한 걱정일 뿐이었다. 오히려 지금 주저하는 것이 조국의 패배를 앞당길 것이다.

빨간불에 차가 멈추자, 동현은 허리춤에 차고있던 권총의 약실을 확인했다.

"...으흠, 쏘려고?"

수근이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필요하다면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동현이 권총을 장전하며 대답했다. "물론 말로 끝나면 정말 좋겠지만... 원유석이 그리 유도리 있는 사람은 아닐 것 같지 말입니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 각하께 원유석이 뭐냐, 원유석이."

수근은 유쾌하게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자." 대령이 동현의 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사나이답게, 알지?"

동현은 한잔을 목뒤로 넘겼다. 공업용 알코올 같은 맛이 났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공업용 알코올일지도 몰랐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주조를 하겠는가.

"한 잔 더!"

대령이 동현의 잔을 다시 가득 채우고, 제 잔을 홀짝였다. 동현은 그저 이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대령과 단둘이 있으면 늘 그랬다. 뭐랄까, '대령님'이 그러했듯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함께 있으면 저 또한 같이 우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상관과의 독대는 늘 불편했다.

"...대령님, 혹시-"

"올해로 10년인가?"

"네?"

동현이 얼결에 되물었다. 10년? 무엇이? 동현은 급하게 곁눈질로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12월 12일, 금요일.

"나는 말일세... 자네한테 늘 고마워. 그런데..." 대령이 넋두리하듯 말을 끌었다. "자네는 혹시 거울 속 자신에게 이질감을 느껴본 적이 있나?"

핵이 터진 지 10년. 그것을 자각하자 동현에게도 구토감이 밀려왔다. 대령이 제 앞에서 떠들건 말건, 동현의 마음은 이미 10년 전 그날에 가 있었다.

"자네 나이가 몇이지?"

"서른다섯입니다, 대령님."

동현은 성의 없이 대답하고 다시 예전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 쿠데타의 끝이 어땠더라?

지금 북한과의 전쟁이 머잖았습니다. 아시잖습니까? 강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족통합은 물론이고 세계평화와 국제법에 반하는 그런 행위, 전 절대 재가할 수 없습니다. 미안하게 됐어요, 안 대령님.

인왕산 지하에 핵시설을 만드는 것은 각하께서도 동의하신 사안입니다! 북한과의 전쟁 준비도 말입니다, 다 각하께서 대비시키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리 꼬리를 마시니,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각하!

북한을 견제하는 용도로 충분합니다. 안 대령님도 아시지요? 그리고 만약 정말 북한과 전쟁이 일어난대도, 이런 방식은 안 됩니다. 이렇게 급작스레 결정할 사안도 아니고요.

각하! 김용일 그 새... 아니, 김용일 위원장과 몇 번 만나시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것 아닙니까? 애진즉 예고하고 일어나는 전쟁이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안 대령님.

각하, 전-

대령님, 프로토콜입니다. 어디선가 달려온 동현이 숨을 몰아쉬며 수근에게 USB를 건넸다.

뭐? 어디서 난 거야, 진짜 프로토콜이 맞나? 안주머니에 USB를 챙겨 넣으며, 수근이 따지듯 물었다.

네, 대령님. 프로토콜을 받은 장교 중 56사단장도 있었답니다, 그놈이 보냈습니다.

하!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내심 찜찜했나 보지? 2중대는?

이미 와 있습니다! 55경비단도 저희 부대에 도착했답니다. 52사단 210여단도 양화대교에 인접했다고-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대한민국은 민주국입니다, 한 사람의 독단적 판단으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이런 무력으로는 더욱이-

각하는 조용히 계십쇼, 아직 임기도 다 못 채웠는데 돌아가시면 얼마나 아쉬우시겠습니까?

안수근 대령!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말로 하는 게 뭐가 협박입니까, 각하, 이건 설득입니다! 저한테는 대통령 각하의 판단보다, 오천만 국민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대령님, 너무 힘쓰지 마십쇼, 여긴 제가 정리-

수근이 동현의 손에 있던 권총을 낚아챘다. 그리고...

"야! 안 듣지? 벽 보고 말해도 이거보단 낫겠군..."

대령이 동현의 옷깃을 잡아당겨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곤 본인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동현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대령님. 당직 서느라 피곤해서..."

"피곤은 무슨..." 대령이 투덜거렸다. "왜, 12월이 되니까 옛 생각이라도 나나 보지?"

"아... 하하..." 동현은 대령의 시선을 피했다. "뭐, 워낙 다사다난하잖습니까, 연말은."

"그분의 기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대령이 동현의 반응도 살피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네?"

동현이 바보같이 되물었다.

"자네도 나를 보며 그분을 떠올리나?" 대령은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나는... 나는 자네를 보면 그분이 떠올라."

치즈케이크 맛 담배. 동현이 라이터를 꺼내자, 대령이 동현의 손에서 라이터를 낚아채 스스로 불을 붙였다. 달짝지근하고 메케한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다.

"알겠어? 자네만 보면, 씨발... 나는 모르는 그분이 보인다고. 나는 따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영역을... 자네는 당연한 듯 답습하고 있어. 그게 나는... 정말로 불쾌해. 자네가 뭔데 감히..."

대령이 말끝을 흐렸다. 뒤따라올 말은 무엇이었을까? 동현은 대령의 뒤에 있는 사람을 알지 못했으니,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마셔."

대령은 그렇게 말하며 동현의 잔에 재를 몇 번 털었다. 동현은 그 잔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없이 마셨다. 그런 동현을, 대령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 바라봤다.

"대체 뭐지? 자네는 알고 나는 모르는 그분의 일면이 무엇이길래, 왜 나는 자네처럼 그분을 닮을 수 없는거지?"

동현은 대령이 그 누구보다 '대령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날 때부터 정해진 얼굴이 닮아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모방할래도 할 수 없는 부분을, 대령은 타고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현은 대령에겐 없고 자신에겐 있는 '대령님'의 일면을 알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대령님, 제가 생각할 때 대령님은 누구보다도-"

"내가 언제 자네 생각을 물었어? 물어본 것에나 똑바로 대답해!" 대령이 동현의 멱살을 쥐고 악쓰듯 외쳤다. "...아... 화내서 미안하네. 하, 그러니까, 내 말은..."

대령이 엉거주춤하게 앉으며 앓듯이 이어 말했다. 동현은 아직 맞지도 않은 뺨이 화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알아챘다. 대령이 말하던 그 일면이 무엇인지. 대령이 모르고 있는, 혹은 착각하고 있는 '대령님'의 일면... 동현에게 문득 옛생각이 떠올다.


"죄송이 아니고 이걸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군대가 만만한가? 자네가 자꾸 이딴 식으로 구니까 병사들 기강이 해이해지는 거 아냐!"

2015년의 어느 날, 지휘통제실. 수근이 던진 재떨이가 동현의 머리에 맞고 바닥을 뒹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요즘은 씨발, 부사교에서 이런 것도 안 가르쳐? 아니면 자네가 덜떨어진 거야?"

동현은 자신의 얼굴에서 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리는 동안,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화난 수근이 지휘통제실에서 나가고, 동현은 책상 위에 있던 휴지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재떨이를 다시 주워 책상에 올려두고, 바닥에 흩뿌려진 재를 치웠다. 지휘통제실에 있던 다른 장교들은 다들 모르는 체하며 이 불편한 분위기를 외면하고 있었다.

"괜찮나?"

부대 안의 화장실, 세수를 하던 동현에게 연 중령이 물었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그... 아까 있잖나. 미안하네. 내가 나서서 대령님을 말렸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나 보지? 동현이 씩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무엇으로 생각한 건지, 연 중령도 마주 웃었다.

"괜찮습니다. 대령님도 제가 실수해서 그러신 거지, 평소엔 안 그러시잖습니까? 중령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동현은 정말 괜찮았다. 거기서 중령이 끼어들었다면 명백한 하극상이고, 더 피곤해졌을 것이다. 연 중령같은... 이른바 좋은 사람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령님. 충성."

동현은 연 중령을 두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얼굴을 타고 미지근한 물방울이 흘렀다. 동현은 고개를 휘휘 저어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다시 지휘통제실로 돌아가 수근을 기다렸다.

같은 날, 행정반.

"죄송이 아니고 이걸 어쩔 거냐고, 새끼야. 니들도 내가 만만해? 자꾸 일 이딴 식으로 할 거야? 니들이 이러니까 내가 경비단장님한테 욕을 처먹는 거 아냐! 똑바로 서, 이 개새끼들아!"

동현이 병사의 머리를 파일철로 내리쳤다. 동현은 겨우 숨을 고르고 병사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었다.

"요즘은 훈련소에서 이런 것도 안 가르쳐? 아니면 니네가-" 동현이 순간 느껴진 기시감에 멈칫했다. "...됐어, 다 꺼져."

그날 동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웠다. 수근이 피우는 말보로 골드. 나머지 열아홉 개비는 도무지 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버렸다. 메케한 연기에 숨이 턱턱 막혀가면서, 동현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미안하대도? 설마 사내자식이 이런 걸로 삐지고 그런 건 아니지?"

대령이 동현의 표정을 살피다가 마지못한 듯 말했다. 동현은 그런 대령을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령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이제 알았습니다. 대령님은... 너무 유약하신 것 같습니다."

"자네 방금 뭐랬나?"

동현이 대령의 멱살을 쥐고 깔아 눕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령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뒤, 동현은 주먹을 올리고...

"잠깐, 잠깐... 신동현이, 나 자네 상관이야." 대령이 새어 나오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하극상이라도 하려는 셈인가?"

대령은 신동현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누워만 있었다. 마치 다음에 올 것을 기다리듯이... 동현으로선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 그에 반해 또렷한 눈동자가 동현을 꿰뚫듯 마주 봤다.

"상관? 나한테 상관이 어딨어? 대령님은 10년 전에 죽었어. 당신은 그저 그분의 대체제일 뿐이야, 그냥 그 역할에만 집중해! 다른 생각 하지말고..."

"어떻게 그게 그렇게 되나? 우리끼리 상호합의된 거잖아, 응? 내가 자네의 명분이 되어주고, 자네는 내 뒷배가 되어주고..." 대령이 동현의 어깨를 쥐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야."

동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현은 제 밑에 깔린 대령을 내려다봤다. 안수근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정복에, 온갖 훈장들이 기세 좋게 달려있었다. 누군가 가슴을 옥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긴 동현의 방이었고, 상대는 조그마한 어린애였다. 머리가 제 가슴팍에 오는 어린애라고 때리지 못할 것이었으면, 지금껏 군대에서 굴러온 의미가 없었다. 어쨌건 얼굴만 피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다른 무엇도 아닌, 정복에 새겨진 이름 석 자가 동현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허나 동시에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것 또한 저 이름 석 자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대령은 동현을 올려다봤다. 제 위에 올라타서, 한껏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동현에게서 다른 사람이 겹쳐 보였다. 고개를 한번 휘휘 젓자, 그 사람은 사라졌다. 대령은 동현의 어깨에서 목께로 제 손을 옮겼다. 대령이 제 목을 그러쥐는데도 동현은 그저 떨리는 눈으로 대령을, 정확하게는 대령의 명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동현의 군복 주머니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현과 대령 사이에 위태로운 기류가 흘렀다.

"무전 받아, 새끼야."

그제야 동현이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며 대령의 위에 걸터앉았다. 대령이 옷깃을 정리하며 떨어뜨린 담배를 주워 입에 물었다.

"충성, 당직사관님, 어디십니까?"

동현이 고개를 돌려 대령을 내려다봤다. 대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시던 담배 연기를 뻐끔대고 있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다. 왜?"

"다름이 아니고, 경계근무 서던 병사들이 짬타... 아니, 고양...? 하여튼 짐승이랑 싸우다가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으흠, 전쟁 이후 태어난 애들은 전부 호랑이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는 버릇이 있지.”

"왜 그딴 걸로 나한테 연락하지? 교대시키고 대충 치료해!"

"네, 이미 그러긴 했는데, 그래도 보고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동현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무전을 끊었다.

"매정하군. 그만 일어나지? 무거운데."

동현이 비키며 일어서자, 대령은 기다렸다는 듯 날름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방금 그것에 대해선 별말 않겠네." 대령이 슬금 미소 지었다. "이제 정확히 알았어. 자네가 그분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닮았는지."

"...그렇습니까?"

동현이 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이제 대령은 보았고, 그래서 알고 있었다. 그분과 동현이 속한 것은 단편적으로 전해 들은 정보로는 결코 모방할 수 없다. 대령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전제부터가 틀렸으니 그 위로 쌓은 탑은 무용지물인 게 당연했다. 그들은 부정의한 이들과 싸우는 게 아니었다. 그 정의와 불의는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갇혀있었으니...

대령이 소주병의 목을 쥐었다. 그리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히죽 웃으며 고쳐잡곤 잔에 술을 따랐다.

"...그만 드십쇼. 제 방에 오시고 나서만 두 병째입니다."

"왜? 내가 취하면 못 할 말이라도 할까 봐? 됐어, 이제 밖으론 안 나갈걸세. 어차피 자네 오늘 당직이니까, 내가 여기서 자도 괜찮겠지?"

"못할 말은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동현이 대령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취하셨으니까 봐 드리는 거예요, 아시죠?"

대령은 조용히 술잔을 홀짝였다. 취했다고 상관 취급도 안 하더니, 이젠 다나까도 안 지키는 건가.

"그리고 다음에 기술자 놈들이 또 그러면... 절 부르세요."

"자네를 부른다고 뭐가 해결되기는 하는 건가?" 대령이 술병을 기울였다. "솔직히 나는 자네가 더 불안한데?"

"그럼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

"이봐, 나도 그때 총은 있었어. 그저... 내 멋대로 행동했다가..." 대령은 동현을 올려다보다 멈칫했다. "놀래라, 표정 풀지?"

동현이 대령의 무릎 위에 손을 얹자, 대령은 동현과 슬쩍 마주 웃었다.

웃기는... 동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 이만 부대로 복귀해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동현이 대령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주무세요, 대령님."

"그래, 가보게."

조금 후, 주인 없는 빈방, 대령은 문득 방에서 나는 체취가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을 알아챘다. 향수, 섬유유연제, 여타 그런 것들의 다양한 종류가 얼기설기 섞여 하나의 분명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동현의 향이 아니었다. 아니, 동현의 향은 맞았다. 하지만 이건 동현의 향이기 이전에.…

"하, 씨발..." 대령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젖혔다. "웃기는 새끼네, 이거…."


수근이 동현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동현이 살짝 웃어 보였다.

"웃기는..."

2015년의 어느 날, 부대 회식 자리. 왁자지껄한 술집의 내부에서 기름내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수근은 동현의 무릎을 한참 매만지다가, 술잔을 비웠다. 그에 동현도 따라 술잔을 비웠다.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지?"

"아, 저는..."

"알아, 새끼야. 그냥 나가서 있자는 거 아냐."

수근은 한참동안 동현을 지분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현도 머뭇대다가 수근의 뒤를 쫓아 술집을 나갔다.

"하..." 개운한 밤공기를 맡으며, 동현이 몸의 열기를 식혔다. 숨을 내쉼에 따라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수근은 아무 말도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동현이 그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수근이 숨을 들이쉬자, 담배의 끝이 붉게 빛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몇 차례 연기를 들이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던 수근이 고개를 돌려 동현을 봤다.

"자네는 나를 왜 따르는 거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동현에게 수근이 물었다.

"질문하신 의도를 잘..."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나를 왜 따르나?"

"대령님이 제 상관이시니까... 그렇습니다."

수근이 연기를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뱉었다.

"그 말은, 나와 다른 상관의 명령이 상충한다면... 내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르겠다는 소린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령님께서 제 직속상관이시니..."

수근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동현은 그 의중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알딸딸한 술기운에 따라 웃었다.

"퍽 마음에 드는군."

동현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취기에 혀가 꼬여서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몇 주 후, 수근이 곧 부대 지하에 있는 '그것'을 쓸 일이 생길 것이라고, 저에게만 넌지시 전했을 때서야 동현은 그 의중을 알아챘다.

"대령님, 그 말씀은..."

"왜? 싫은가? 군인이 되어서 전쟁이 무섭나?" 수근이 코웃음 쳤다. "하기 싫으면 지금 말하게, 전출은 어디가 좋겠나?"

임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사관에게 전출이라니... 동현이 떫게 웃었다.

"이미 여타 장교들도 동의한 바일세. 비록 블러핑이라지만, 대통령 각하의 요즘 행보를 좋지 않게 보는 이들이 많거든... 아, 물론 우리 부대의 장교들은 아닐세. 아직 별도 못단 것들하고 무슨 얘기를 하나?"

"제, 제게... 왜 알려주시는 겁니까? 다른 장교들도 동의했다면 굳이 제게까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그런 위대한 순간을 자네가 누렸으면 해서지, 물론." 수근이 동현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뭐, 어차피 전쟁이 시작되면 모두가 알게될테지만... 내 부관된 자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게."

동현은 시선을 돌려 자신과 수근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아 부드러운 손, 부족한 현장경험에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손가락... 그리고 자신의 곱절을 살아온 중년 남자의 거칠은 손, 왼쪽 약지에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 이것들을 두고 자신의 상관은 대체 무엇을 바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동현으로선 가늠할 수 없었다.

"난 오로지 우리 조국의 평화와 안녕을 바랄 뿐일세."

수근이 동현의 손을 맞잡았다. 동현은 다시 시선을 돌려 수근의 눈을 봤다.

이 사람, 전쟁이 뭔지 알긴 하는 건가? 현장에 나가지 않은지 워낙 오래되어 그 감각을 잊어버린 걸까?

내뱉지 못한 온갖 반론들이 동현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내심 동현도 수근의 말에 묘한 끌림을 느꼈다. 단언컨대,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는 아니었다.

"저는 계속 대령님을 보좌할 겁니다. 못해도 십수 년은 말입니다."

"손은 왜 이렇게 떨어? 십수 년 후면 내가 정년퇴직하고도 남는데, 입바른 소리하긴..."

수근이 피식 웃으며 맞잡았던 동현의 손을 놓았다. 동현을 두고 걷는 수근의 뒷모습을 보며, 동현은 뒤늦게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긴장, 두려움, 경멸, 불안감, 그리고 약간의 성취감... 잠시 숨을 고른 동현이 수근을 쫓아 걸었다.


"대령님, 좋은 오후입니다." 중령이 수근의 맞은편에 앉았다. "항상 조국과 국민을 위하시는 대령님의-"

"언질도 없이 무슨 일인가? 아직 일과 중일 텐데."

수근은 중령의 말을 끊더니,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를 까딱였다. 중령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고쳐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중령이 말끝을 흐리며 흘끗 뒤를 봤다. 얼결에 중령과 눈을 마주친 동현이 모른체 고개를 돌렸다. 수근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흠..." 수근이 못마땅한 듯 발을 까딱였다. "...신동현이, 잠깐만 나가 있게. 멀리 가진 말고."

"예, 대령님."

동현이 주변에 흩어져있던 서류들을 품에 안고 나갔다. 수근이 동현에게 눈짓하자, 동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대령이 몸을 고쳐 앉았다.

"저번에 하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저번? 아, 지난 정훈교육 말인가? 뭐, 집중정신교육 시기니까 신경 좀 썼지." 수근이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자네답지 않게 서론이 길군."

중령이 멈칫하며 수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수근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잠깐 누군가를 찾듯 눈을 굴리다가, 이내 책상 서랍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중령이 수근의 얼굴을 마주보며 뜸을 들이자, 수근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동현이 말이야, 이런 추운 날 복도에 오래 세워두기가 미안한데... 방금 봤나? 나가라니까 뭘 걸쳐 입지도 않고 쫓기듯 나가던 거..." 수근이 웃기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여유로운 몸은 아닐텐데? 하여튼, 얼른 끝내지?"

그렇게 말한 수근이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었다.

"대령님과 몇몇 장성들께서 북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령이 고심하여 뱉듯, 한 단어 한 단어 명료하게, 그러나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참나,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연 중령. 우리 국군은 언제나 전쟁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나? 난 또 무슨 말을 한다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대령님이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수근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중령을 돌아봤다.

"...누구한테 들었나, 그 얘기?"

수근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1공수 여단장님께 들었습니다. 오히려 여단장님께서 제게 물으시덥니다, 대령님의 직속 부하인 제가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느냐고..."

"자네가 여단장님과 가까운 사이인 줄은 몰랐군." 수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끝까지 숨기려던 건 아닐세. 그저 확실히 정해지기 전엔 알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괜히 혼란이 생기면 피곤하기만 하지..."

중령이 미심쩍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제게 말씀하지 않으신 게 문제가 아니라-"

"그리고 알잖나, 안 그래도 자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도는데..." 수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혹시 모르나?"

중령이 멈칫했다. 그에 수근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말했군. 별 건 아닐세. 뭐, 자네가 3사 출신이잖나? 되도않는 군인 놀이긴 하지만..." 재떨이 위로 재가 쌓여갔다. "나는 자네를 많이 아껴. 내가 언제 자네 서운케 한 적 있던가? 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자네 부대의 중대 하나가 곧 유격-"

"대령님." 중령이 수근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동현이, 많이 춥겠습니다."

수근은 중령을 위아래로 훑었다.

"3사에서 상관 말을 끊어먹으라고 가르치던가? 나는 자네와 할 말이 없는데." 수근이 담배 개비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래서 뭐? 우리 국군의 사명인 멸공을 그만두라는 말인가? 전부 다 각하의 지시일세. 자네도 인수인계받으면서 다 들은 사안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시다면야, 저도 대령님과 더 나눌 말은 없습니다만..." 중령이 수근의 시선을 피했다. "저희가 경계해야 할 건, 공산주의도 북한도 아닙니다. 전쟁 그 자체가-"

"북과의 전쟁을 준비중이다... 그게 끝인가?"

"예?"

수근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단장님에게 들은 얘기 말일세."

중령은 수근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중령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수근은 예상했던 바라는 듯 피식 웃었다.

"연 중령, 나는 말이야... 사람들이 무엇을 왜 주저하는지, 그 망설임에 어떤 혹독한 결과가 따르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 사람이 왜 전쟁을 두려워하는지, 어떻게 전쟁에서 미쳐오는지, 그 끝에서 얻는 승리의 달콤함은 궁금하지만..." 수근이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물었다. "단지 자네가 집요하게 구는, 그 얇은 위선을 한 겹 걷어내면 알 수 있어. 그 명예와 영광을 말이야... 우린 위대한 역사를 쓰게 될 걸세."

수근이 담배를 문 채로 중령을 봤다. 미세하게 떨리는 중령의 눈동자엔 오직 당혹감만이 서려 있었다.

"국민 중 그 누구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괴롭지 않게, 나는 모든 걸 우리 것으로 하고자 해. 우리 손으로 직접 평화를 쟁취해 내자는 게... 그렇게나 이상한가?"

말문이 막힌 중령은 그저 가만히 수근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하, 그렇게 쳐다보지 말게. 나도 자네도, 다 같은 조국의 종 아닌가. 내가 설마 멋대로 전쟁을 일으킬까 봐? 이보게, 나 같은 한낱 경비단장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나? 그건 그냥 미친놈이지." 수근이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몇 번이고 딸깍였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는 그저... 철저히 대비할 뿐이야."

중령의 시선이 한구석으로 향했다. 난초 하나의 잎 끝이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었다. 중령은 한참동안 입에 맴돌던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겨우 뱉어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이봐, 신동현!" 한참을 라이터와 씨름하던 대령이 외쳤다. "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령이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쪼록 평안과-"

"아, 됐어. 우리가 그런 인사치레를 할 사인가? 이만 가보게. 자네 대대도 요새 정신없을 텐데…."

중령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경례하곤 뒤돌아 나갔다. 들어오던 동현과 눈이 마주친 중령은, 동현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곤 완전히 나가버렸다.

"요즘은 3사 출신인 걸 저리 티 내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대령님?"

동현이 수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물었다. 수근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아무것도."


"쯧, 먼지가 너무 많이 쌓인 거 아닌가? 관리 똑바로 안 하지?"

"아하하... 죄송합니다, 대령님. 아시다시피 내려올 일이 많이 없다보니..."

대령의 궁시렁에 동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그건 그렇지. 이게 열릴 일은 프로토콜을 해독해 핵을 사용할 때 빼곤 없을 테니 말이야..." 대령이 턱을 매만졌다. "뭐, 그러면 이만 올라갈까? 지하라 그런지 상당히 춥군.. 아, 젠장, 무슨 실내에서 입김이 나?"

"음, 기계장치가 과열될까 봐 그렇게 설계된 걸 수도 있습니다."

"그래? 물어보지도 않은 걸 나불대는군..."

"시정하겠습니다."

"하하, 장난일세, 장난."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던 동현의 시선이, 지하실 구석으로 가닿았다. 미처 메우지 못한 총자국이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동현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봤다. 굳은 살 박히고고 흉진 손... 피따위는 묻어있지 않았다.

"안 올라오나?"

계단에 발을 디딘 대령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올라가시죠."

동현이 대령의 뒤를 따랐다.

인적없는 지하실에서, 텅 빈 발사대가 언젠가 열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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