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부정의 부정의 부정

준향대 if

31.6℃ by 해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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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의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지상고등학교의 졸업식을 찾은 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꽃다발을 주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통에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기상호는 농구부 졸업생들을 축하해 주고 숙소로 가던 중이었다. 옷 갈아입고 슛 연습 좀 할까. 날도 추운데 그냥 집에 가는 게 낫지 않나. 갈팡질팡하는데 지잉. 선배들 졸업식 축하는 제대로 해주고 싶어 차려입은 코트 주머니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기상호는 아, 손 시려븐디. 중얼거리다가 게임 이벤트 알림인가 싶어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엥.”

게임 알림은 개뿔. ‘농구부 성준수형’이라는 이름과 짤막한 메시지가 미리보기로 떠올라 있었다.

체육관으로 와

“뭐고…….”

가족들하고 돌아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기상호는 우뚝 멈추어 선 채 문자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내 오늘 뭐 실수했나? 아, 그러고 보니.

야. 기상호.

넵?

사진.

…네?

사진 찍자고.

아, 농구부 단체 사진이라믄 감독님이…….

아니, 씨…….

성준수는 분명 예쁘장하게 정돈한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며 그렇게 말했었다.

너하고 나, 둘이 한 장 찍자고.

설마 성준수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찍고 말았다. 성준수의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은 고스란히 성준수의 몫이 되었다. 설마 그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부르는 건 아닐 테고.

비밀로 할 필요도 없이 기상호는 성준수가 꽤 오랫동안 무서웠다. 그 손에 찢겨 죽을까 봐 덜덜 떠느라 숙소 생활은 가시밭 같았다. 그래도 우승을 목표로 함께 뛴 만큼 정이 들긴 했는지 아니면 쌍용기 우승 덕인지 몰라도 성준수는 전에 비해 화내는 일이 많이 줄었다. 분명 그랬는데…… 졸업식 날 갑자기 체육관으로 부른다고? 이거 무슨 졸업 전에 다 모아 놓고 또 한 소리 하려는 거 아이가. 기상호는 성준수의 ‘씨바거’가 환청처럼 따라다녔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서둘러 체육관으로 향했다. 늦었다가 더 혼난다. 적어도 다른 햄들보다는 일찍 가야겠다. 그중에서도 공태성보다는 더 빨리 가야 한다.

체육관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체육관의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움츠러들게 했다. 눈이 내리는 탓인지 아니면 인내심 바닥난 성준수가 벌써 야차로 변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어서는 순간 이거 뭔 일이 터졌다는 생각뿐이었다.

체육관 안에는 성준수 혼자였다.

그러니까 성준수가 혼자, 누군가에게 받은 졸업식 축하 꽃다발을 들고 서선 기상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상호는 벌써 쫄아선 주춤주춤 안으로 들어섰다.

“준수햄?”

절로 눈길이 수그러지고 언행이 공손해졌다. 기상호는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성준수의 표정을 살폈다. 화난 건 아인 거 같은데. 성준수는 단정한 교복 차림에 외투는 따로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하얀 얼굴 위로 체육관의 조명이 잔잔히 떨어져 내렸다. 성준수는 꼭 뮤지컬의 배우처럼 그곳에 서선 기상호의 눈을 응시하기만 했다. 기상호는 새삼스럽게 그 예쁘장한 외모에 감탄하느라 성준수가 “기상호.”하고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자 성준수가 성큼 거리를 좁히며 재차 이름을 중얼거렸다.

“상호야.”

“네?”

품에 안고 있던 졸업식 꽃다발을 한 손으로 옮겨 쥔 성준수가 다시 뜸을 들였다. 기상호는 영 어색한 기분이 들어 제 목덜미를 손으로 두어 번 느리게 문질렀다. 무슨 말이길래 이래 뜸을 들이지. 성준수는 말을 고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생각한 그대로 불쑥 내뱉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기상호는 이토록 서늘한 날씨에도 땀이 삐질삐질 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설마 내가 준수햄 요구르트 훔쳐 먹은 거 들킨 긴가. 그건 벌써 나흘 전인디. 아니면 농구부 일인가? 막상 물려주고 가려니 속이 편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상상이 머릿속을 부유하는데 성준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 너 좋아해.”

“햄 그 요구르ㅌ…….”

하필 타이밍이 겹쳤다. 성준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으나 도로 펴졌다. 기상호는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성준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성준수는 화를 내지도 닦달하지도 않고 기상호의 답을 기다리는 듯 덤덤한 낯이었다. 기상호는 요구르트 몰래 먹은 사람이 사실 감독님이라는 말을 꺼내다 말고 자연스럽게 우회했다.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게 내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동생이나 후배 뭐 그런…….”

성준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받아들이는 정보의 값이 한 번도 예상한 적이 없는 루트라서 좀 당황했을 뿐이었다. 아니 기상호가 아니라 기상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없을 상황이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죄송해요. 저는 불효자예요.

“넌 그 말 하나 이해하는 게 어렵냐?”

성준수는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내뱉던 한숨도 쉬지 않고 건조한 눈으로 기상호를 직시했다.

“됐고,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꽃다발 끄트머리를 쥔 성준수의 새하얀 손이 조금 더 안으로 굽었다. 뒷말이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기상호는 여전히 성준수의 눈치를 살폈으나 한편으로는 이 햄이 와 이라노, 오늘. 뭐 잘못 먹었나.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준수가 든 프리지아 꽃다발이 아래로 늘어졌다.

“연락하고 지내자고.”

“네?”

“너 아직 미자인 것도 아니까 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 없어.”

“어…….”

“그래도 연락은 하고 지내라고. 안 하면 그땐 너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간다.”

이게 고백 같은 게 맞나, 아니면 살인 예고? 경기 중도 아닌데 머릿속이 1초마다 핑핑 빠르게 돌아갔다. 좋아한다, 내를. 누가? 그 준수햄이. 연락 안 하면 내를 죽인단다. 이게 어떻게 한 대사 안에 들어갈 내용이란 말인가.

기상호는 그냥 멍청히 서 있었다. 경기의 흐름이나 상대의 약점 따위를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재능이 정작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도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만 연달아 내뱉은 성준수는 기상호가 삐걱거리며 고장 난 사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의도를 파악하느라 멍청히 서 있던 기상호가 뒤늦게 성준수를 붙잡아 세웠다.

“어……. 햄! 준수햄!”

잠깐, 잠깐만요! 냅다 외치는 말에 막 문을 빠져나가려던 성준수가 기상호를 돌아보았다. 기상호는 그제야 성준수의 귓불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고. 기상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성준수는 이번에도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기상호를 기다려주는 성준수. 실재할 줄은 추호도 몰랐던 낯선 늦겨울의 온도. 기상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연락하는 건 좀 아인 거 같애요. 햄한테도 예의가 아닌 거 같고. 전 그런 식으로 햄을 생각한 적이 없어서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 구구절절 가랑비처럼 쏟아졌다. 성준수는 그 비를 혼자만 추적추적 맞고 선 채 기상호를 쳐다보기만 했다. 기상호는 잘못을 저지른 똥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성준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기상호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

“알았어. 그렇게 해.”

성준수가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아, 준수햄. 부르는 목소리에 잠깐 멈칫한 듯했으나 찰나였다. 홀로 남겨진 기상호는 그러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조금 전의 기상호는 성준수의 돌파 방향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 진짜. 기상호는 한숨을 내쉬며 성준수가 서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햄 진짜 내 좋아해요? 장난 같은 게 아니고? 남자 대 남자, 뭐 사람 대 사람 그런 의미로? 질문 몇 개가 떠올랐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적어도 기상호가 아는 성준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고.”

휴대폰을 꺼낸 기상호는 체육관으로 오라는 성준수의 마지막 메시지를 잠시 보다가 화면을 껐다. 아니 상식적으로 고백하고 연락 안 하면 죽여 버린다는 말을 더하는 사람이 어디 있기는 여기 있지. 기상호는 성준수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대가 기상호?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벤치에 앉아 눈칫밥만 먹던 게 엊그제 같았다. 성준수는 철저히 농구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프로를 목표로 하는 성준수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기상호 한 명 때문에 팀이 지는 건 정말이지 싫었으니까. 기상호가 벤치 시절 지켜보았던 성준수는 농구 그 자체였다. 농구는 성준수, 성준수는 농구. 아마 성준수가 정말 기상호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우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성준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었으며 기상호는 그 성준수를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찬찬히 되돌아가 보자.

도대체 언제부터? 기상호가 기억하기로 성준수는 기상호를 그리 특별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실수라도 하나 하면 버럭 화부터 냈고 숙소에서 눈이 마주치면 그냥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기상호가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면 인상을 찌푸리며 옆으로 슬쩍 밀어주는 정도였다지만, 그런 건 공태성이나 김다은도 종종 하던 행동이었다. 성준수의 행동은 차갑지는 않았어도 적당히 미적지근한 정도였다.

아니면 기상호를 좋아할 서사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기상호는 성준수 앞에서 대부분 질질 짜고, 질질 짜고, 질질 짠 기억밖에 없었다. 잉잉, 내 너무 힘들어요. 숙소까지만 업어 주믄 안 돼요? 아아앙. 쌍용기 이전에는 곁에 다가가기도 어려웠으나, 입시 악귀에서 벗어난 성준수가 묘하게 기상호의 어리광을 받아주기 시작하면서는 아예 일상이 되긴 했다. 가끔 머리통도 쓰다듬어-준다고 하기는 뭣하고 한 번만 더 나대면 가만 안 둔다, 기상호. 같은 말 따위나 하며 머리통을 반으로 쪼갤 기세였다-줬지만, 그건 그냥 몇 살 어린 후배를 대하는 선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당시의 기상호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그때마다 성준수는 그 개 같은 애교 집어치우랬지. 진짜 찢어버린다. 어쩌고저쩌고. 무슨 말이든 욕을 씹어뱉지 않으면 성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피곤이 찌든 널따란 등판에 비슷한 덩치의 기상호가 업히면 질질 끌다시피 숙소까지 옮겨다 주긴 했었다. 결국 그게 전부 아이가.

다시 돌아와서, 기상호는 성준수에게 ‘고백’을 받았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게 끝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기상호는 단순한 듯 보여도 복잡했고 늘 생각이 흘러넘쳤다. 코트 위에서 공을 패스해야 하는 몇 초 사이에도 생각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패색이 짙은 순간에도 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준수의 기이한 고백은 기상호가 숨을 쉴 때마다 떠올랐으며 3학년이 되고 농구부 신입이 여럿 들어오고 경기에 승리하고 또 패배하고 또 승리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연락하지 않겠다는 말을 지킨 것은 딱 3학년의 초여름까지였다.

부정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

속절없이 흐른 시간 덕에 희석된 성준수 공포증과 입시 스트레스는 기상호를 반쯤 돌아버리게 했다. 성준수는 그때까지 지상고 단톡방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했다. 아마 내내 사라지지 않던 숫자 1은 성준수의 몫이었을 것이다.

성준수의 프로필 사진은 기본 그대로였고 다른 SNS는 하지도 않았다. 종종 연락하는 진재유나 박병찬에게 성준수는 어떤 대회에서 스타팅 멤버였다더라, 아쉽게 졌다,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완승이었다 같은 얘기만 전해 들었다. 이 인간 진짜 독하다. 인간 독종, 인간 사약, 인간 독버섯. 난데없이 기상호의 찻잔에 독을 타고 떠나간 악독한 형, 선배, 지상고 31번 성준수. 지금 사람을 이래 만들어 놓고 혼자 잘 지낸다 이거 아입니까. 방향을 잃은 감정이 성준수에게로 향하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준수가 지금 기상호의 상태를 알았다면 이 개새끼야 그럼 차인 사람이 연락하냐? 씨발, 지금 장난해? 하고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다.

뭐, 성준수가 이제 기상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상고 농구부는 성준수에게도 여러 의미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다들 별말 없는 걸 보면 다른 부원들하고는 잘만 연락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남들이 보기에 기상호와 성준수는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 형, 동생처럼 지내지도 않았으니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긴커녕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기상호 혼자만 속으로 내내 성준수의 얼굴, 목소리, 차가웠던 체육관의 공기와 바닥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로이 붙잡혀 있던 꽃다발 따위를 기억할 뿐이었다.

기상호는 갑자기 그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고 한 번 물꼬를 트니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눈이 회까닥 돌아서 성준수가 졸업하기 전까지 종종 주고받았던 때처럼 미친 듯이, 달밤에 피에 미친 광인-지켜보던 김다은은 님 뭐함? 키배 뜸? 하고 궁금해했다-처럼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 잘나고 서늘한 얼굴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햄 혹시 화났어여?

ㅠㅠ

해앰..

벌써 2년 지났는데..

(잉잉 우는 강아지 이모티콘)

숫자 1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차갑다……. 반면 성준수의 준향대 동기가 된 박병찬은 기상호의 메시지에 꽤 꾸준히 답해 주었다. 덕분에 성준수가 어떻게 지내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지만 정작 성준수가 기상호의 소식을 궁금해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나 기상호, 한다면 하는 남자.

준수햄 지상최강 안 잊으셨죠?

햄햄 숙소 에어컨 고장남ㅠ 찜통속의 만두가되는줄 만두가 된 저도 좋아해주실거죠 만두맛있잖아요 저는 참고로 고기만두파

준수햄 저 차단했어요? 진심? 레알?

햄 살아있으면 ㅇ 하나만 보내주세요ㅋㅋ

꿋꿋하다 못해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진짜 차단당했으면 성준수가 봤을 리도 없으니 점점 더 뻔뻔해졌다. 이제는 성준수가 보든 말든 멋대로 쓰는 개인 일기장이나 다를 바 없을 지경이었다.

햄 제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되면 어떡할거예요 막 더듬이도 있고 엄청 크면요 제 키만큼?

아니 후배는 다 이래요 햄?? 요즘 아들 싸가지가 너무 없다 아니에요 햄은 우리 어떻게 봐준 거임?

정희찬은 먹는데도 살이 점점 빠져요 햄 어디 아픈 아도 아인데 신기하죠

햄은 뭐하고 지내요 저는 매일 햄 생각 중ㅋㅋ 쫌기특하죠? 막 답장해주고 싶고 그러죠?

태성햄 은재 누나랑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가 아주 생난리를 떨어요 피곤해 죽겠음

얼마 전에 재유햄 왔다갔는데 햄 생각도 나더라고요 햄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햄 병찬햄한테 들었는데 이번 친선 경기 우승했담서요 축하해요 역시 성준수 지상최강의 슈터! 코트를 아주 찢어놓으셨다!!!

생각날 때마다 보내던 헛소리는 차곡차곡 쌓여 거의 팔만대장경을 이루었는데 메시지창에 들어가면 뭐랄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진짜 이 햄 한 번을 안 읽어 주네. 입시가 가까워지자 기상호는 그 정신 나간 집착을 그만두었다. 고의는 아니었고 그냥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었다. 뭐, 어차피 성준수는 읽지도 않을 테니 해명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완전 구라고 하루에 한 번은 숫자 1이 사라졌는지 꼬박꼬박 확인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었다. 뒤늦게야 서운함이 몰려왔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좋아한다고 말한 거 아이가, 이 햄. 물론 성준수가 그만큼 치밀한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 가정은 어차피 쓰레기통 행이었다.

[준향대학교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여기저기 소식을 전한 기상호는 성준수에게 캡쳐 화면 하나만 보내고서 바로 후회했다. 이건 너무 건방 떠는 것 같다. 기상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메시지 옆 1을 응시하다가 메시지 전송을 취소……하려고 했다.

이 미친 새끼야 죽고 싶냐?

갑자기 쌓여 있던 숫자 1이 모조리 사라지고 텍스트만으로 분노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답장이 한 줄 날아왔다. 이 햄, 나 차단 안 했었네. 감탄하기도 잠시.

지금 장난하냐고

우짜노. 난 이제 준수햄 손에 디졌다. 기상호는 후다닥 폰 화면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혹시 전화가 올까 봐 성준수의 번호를 차단하는 것도 모자라 채팅방을 나가 버렸다. 그건 그러니까 방어적인 행동이었다. 절대 맹세코 성준수가 싫어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내 큰일 난 거 아이가. 괜한 짓거릴 해서는. 이불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기상호답게 그 두려움은 머지않아 침몰했다. 넓은 준향대 캠퍼스에서 성준수와 우연히 만나기는 어려울 테니 아득바득 찾아가지 않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였다.

그새 성준수 생각을 뒤로 미룬 기상호는 자취냐 기숙사냐 꽤 오래 고민하다가, 박병찬이 신입생은 붙을 확률이 높다고 해서 기숙사부터 지원했고 대기 번호도 없이 붙었다. 병찬햄 말 듣길 잘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환경이 코앞까지 다가온 탓일까. 기상호는 어느새 성준수를 완전히 잊은 채 기숙사에 발을 들였다.

이름 좋은 학교답게 기숙사도 번듯하네. 그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입실했는데…….

“얼굴 좋아 보인다?”

장장 2년 만에 마주친 얼굴에서 반가움이라고는 1g도 읽을 수 없었다. 대학교 기숙사 룸메이트가 성준수일 확률을 구하시오. 아니면 여기서 찢겨 죽을 확률이라든가. 잠시 성준수와 눈을 맞추고 있던 기상호는 가득 차서 무거운 캐리어를 슬쩍 옆으로 밀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햄. 어. 그러니까…… 잘 지내, 지내셨겠죠?”

“어, 라고 할 줄 알았냐?”

성준수의 목소리는 기상호의 기억보다 조금 더 낮게 이어졌다. 기상호는 예의 그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컨셉질이나 해 댔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저희 룸메이트란 것이 된 모양인데요?”

성준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상호는 살살 웃기만 했다. 이쪽도 만만찮게 당황한 상태인데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 보고 싶어서였다. 그 꼴이 성준수의 시선에 어떻게 보일지 알 리가 없었지만 웃는 얼굴에 침 뱉을 리가…….

“너는 씨발, 네가 좆같다는 걸 좀 알 필요가 있어.”

갑자기 멱살이 잡혀 쭉 딸려갔다. 농구공을 잡은 세월만큼 강한 악력에 기상호는 벌벌 떨었다. 막 씻고 나온 모양인지 성준수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기상호를 응시하는 눈동자에 빛이 한 줌도 없었다. 성준수가 졸업한 이후 이만큼 잘생긴 사람을 이만큼 가까이에서 볼 일이 없었다 보니 새삼 놀란 건 둘째치고, 이 햄 눈깔이 맛이 갔다……. 이러다 진짜 두드려맞을 것 같았다. 정작 지상고 시절 성준수는 한 번도 기상호를 때린 적이 없었지만. 물론 눈빛으로 두들겨 맞은 적이야 많았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기상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쭉 빼내 어떻게든 성준수와의 거리를 벌리며 싹싹 빌었다.

“제, 제가요? 일단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이럴 생각은 진짜 없었고요. 준향대에 오고 싶었던 건 사실인데, 기숙사까지 같이 쓰게 될 줄은 진짜진짜진짜 몰랐거든요?”

제 탓을 하면 너무 억울해요. 잉잉. 그냥 운명의 장난? 뭐 그런 거라고요. 상호는 또 습관처럼 질질 짜기 시작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성준수는 기상호의 멱살을 놓더니 제 어깨에 얹은 수건을 꽉 쥐어짰다. 기상호는 꼭 그 수건 꼴이 자기 같아서 흠칫 어깨를 굳혔다.

“야.”

“예, 예?”

“시끄러우니까 그냥 닥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기상호가 억울해하든 말든 성준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이내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에 기상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성준수의 졸업 후 처음 만났는데도 성준수는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락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기상호였고 거의 매일 구구절절 메시지를 보낸 것도 기상호였다. 그리고 성준수는 얼마 전까지는 기상호의 철철 넘치는 미련을 확인하지 않았다. 기상호는 성준수의 마음을 읽을 능력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쉽게 내린 결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그야 성준수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뜸 멱살부터 잡고. 기상호는 미미하게 발개진 눈가를 손으로 박박 문지르며 짐 정리부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봤자 어색할 뿐이었다. 성준수가 나오기 전에 뭐라도 하고 있으면 어그로를 덜 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허접한 계략이 무색하게 성준수는 재회의 기쁨을 멱살잡이로 표현한 이후부터 기상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완전한 개무시의 시작이었다. 같은 방에서 꽤 긴 시간을 같이 보내는데도 기상호가 보이지 않는 듯 지냈다. 차마 이런 최악의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기상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철판 깔고 들이대 볼까? 그랬다가는 준향대 뒷산에 생매장당할 것이다. 아니면 이쪽도 무시해야 하나? 혼란하다, 혼란해. 벌써 며칠째인지도 모르겠다.

기상호는 오늘도 침대에 기대고 앉은 성준수를 힐끔힐끔 보다가 눈치껏 폰게임이나 했다. 차라리 강의라도 들으러 가고 싶다. 왜 하필이면 오후 공강이 겹쳐서는. 그나마 얼굴 트고 지내는 동기들은 성인이 된 걸 어지간히도 즐길 심산인지 마주치면 술부터 들이부었다.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인 기상호는 끼지도 못해 얌전히 기숙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상호는 어색한 공기에 짓눌려 속으로만 질질 짜며 그뭔오타쿠 노래에 맞춰 손가락을 눌렀다가 뗐다 했다. 슬슬 창밖이 어두워질 무렵 지잉, 진동과 함께 박병찬의 메시지가 떴다.

상호~ 저녁 먹었어?

햄! 저 아직이여 배고파여ㅠ

아이고 밥 안 먹었어? 준수는?

기상호가 눈동자만 굴려 성준수를 살폈다. 성준수는 뭘 심각하게 들여다보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말 걸 틈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코트 위였다면 다른 생각을 한다며 공이라도 빼앗아 볼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기상호가 답을 보내지 않자 박병찬이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 나올래? 밥사줄게

역시 내한테는 병찬햄뿐이다. 기상호는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최종수가 나오라고 해도 냉큼 뛰쳐나갈 심산이었기에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데 막상 그대로 나가려니 성준수가 마음에 걸렸다. 너무 정이 없는 것 같아 한참 쭈뼛대다가 성준수를 돌아보았다. 정작 성준수는 자기 마음대로 기숙사를 들락거렸는데도 한참 후배인 기상호는 여전히 군기가 덜 빠진 모양이었다.

“저 병찬햄이랑 약속이 있어갖고 다녀올게요. 햄도 시, 식사하세요.”

성준수가 그제야 기상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씨발, 그딴 걸 왜 나한테 말해.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성준수는 잔잔한 눈으로 기상호를 빤히 보다가 농구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아예 들은 척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은가. 기상호는 제 목덜미를 문지르며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봄이 코앞인데도 공기가 차가워 기상호는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걸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쪼매 더 서운하구로. 성준수의 얼굴이 선명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맺혔다가 지워졌다. 아무리 고백 공격 후 처음 만났다 해도 이런 반응은 과했다. 또 온갖 상념이 기상호를 멋대로 저울질한다. 성준수는 정말 기상호를 좋아했던 걸까? 그렇다면 지난 2년 동안 무슨 마음으로 지냈을까? 정말 연락할 생각이 생쥐 눈곱만큼도 없었나? 지금 성준수도 기상호가 불편한가? 아니 애초에 기상호는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성준수를…….

“상호!”

박병찬의 목소리였다.

“병찬햄! 올만이에요. 와, 여가 바로 병찬햄이 인정한 그 맛집?”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아는 체하곤 곧 식당 간판을 올려다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박병찬은 씩 웃더니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 자자, 오늘은 형아가 쏜다. 그나저나 무슨 소리야? 준수가 아는 척을 안 한다니?”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며 기상호를 돌아본 박병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상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문은 박병찬이 벌써 끝냈다. 치돈에 냉모밀이 맛있어, 여긴. 그런 상냥한 설명이 짤막이 이어졌다. 기상호는 성준수의 고백만 쏙 빼고 지금껏 있었던 일을 간략히 나열했다. 사실 고백 파트가 제일 중요하기는 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상호야.”

기상호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그랬어? 으음. 하는 추임새만 넣던 박병찬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머뭇거렸다. 뭔데요, 햄. 괜히 무섭구로 뜸 들이지 말고 말해줘요. 기상호가 채근하자 박병찬이 물잔을 들어 올리곤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느릿하게 말했다.

“준수가 네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더라.”

“…예?”

“준향대 입학했을 때였나? 같은 농구부니까 마주칠 일이 많았거든. 근데 내가 지상고 얘기랑 네 얘기를 좀 꺼냈더니 그런 말을 했어.”

어, 그렇구나. 좀 상처를 받을 듯 말 듯 애매한 감정이 너울거렸다. 뭐 성준수야 대놓고 거절당했으니 기상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던 모양이겠지만. 머리로 이해하는데도 마음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래서 둘이 싸운 줄 알았어. 맞아?”

“어, 음. 그게 그러니까요.”

싸운 건 아니다. 누가 봐도 기상호가 일방적으로 팽당하고 있었다. 양심에 맹세코 기상호의 잘못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기상호는 성준수가 치기 어린 시절의 감정 같은 건 금세 잊었으리라, 멋대로 넘겨짚었을지도 몰랐다.

“저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으음.”

박병찬은 턱을 괸 채 기상호를 빤히 쳐다보다가 씩 웃었다.

“얼른 화해해야 할 텐데. 적어도 한 학기 동안은 붙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서로 불편하겠네.”

다정한 말에 기상호가 또 우는 소릴 내며 어리광을 부렸으나 박병찬은 익숙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곧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 테이블 위를 채웠다.

“근데 정말 이제 농구 안 할 거야?”

덩달아 박병찬의 대화 주제가 기상호로 바뀌었다. 사실 박병찬이 오늘 만나자고 한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기상호는 막 나온 치즈돈가스를 죽죽 잘랐다.

“이미 결심했다니까요. 햄, 전 딱 그 정도까지가 좋았어요.”

기상호는 딱 지상고 졸업까지만 농구공을 잡기로 했다. 자신의 한계를 오래전부터 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애초에 농구로 준향대에 입학한 게 아니었으므로 농구부는 발도 들이지 못할 텐데 박병찬은 꽤 끈질겼다. 기상호는 치즈가 쭉쭉 늘어난다는 말이나 하며 박병찬의 말을 얼렁뚱땅 넘겨 보려고 했다. 그러나 박병찬은 기상호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된 사람답게 흔들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너 재능 없지 않다고 했었는데. 기억나?”

“아, 그거요.”

그랬죠. 그때 내 기분 억수로 좋았는디. 기상호는 씩 웃으며 햄 저 제로 콜라 하나만요. 따위의 말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박병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에는 교수가 어떻고 조별 과제가 어떻고 그런 얘기만 주고받았다. 마무리로 카페까지 다녀왔더니 벌써 밤 11시였다.

“조심히 들어가, 상호야. 도착하면 연락하고.”

“네, 햄도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다음엔 네가 사야 한다?”

“아 물론이죠. 근데 너무 비싼 건 못 사드리고요…….”

“아하하, 상호야 형아는 비싼 건 바라지도 않아. 나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 아니야.”

자취하는 박병찬과 학교 앞에서 헤어졌다. 어차피 아직 미자라 술도 못 마시고 박병찬 또한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갔다간 성준수가 개무시 대신 욕설 폭격을 날릴지도 몰랐으니까. 음,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말을 트는 게 낫나? 미친, 내가 무슨 개똥멍청이 같은 생각을.

“아, 진짜 늦었다.”

더는 성준수가 제 다리 뻗을 상대가 아님을 인지한 기상호는 최대한 조용히, 숨을 죽여서 기숙사 안으로 들어섰다. 차라리 네발로 기어서 들어갔다면 더 좋았을걸. 그럼 정성이 기특해서라도 봐주지 않았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나 했다.

“야.”

성준수가 침대에 앉은 채 기상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천장 전등은 끄고 책상 위 스탠드만 하나 켜 둔 채라서 그런지 성준수의 얼굴 위로 역광이 완연했다.

“넌 씨발, 시계가 없지?”

“죄, 죄송합니다…….”

기상호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였다. 성준수의 그림자가 발치까지 드리웠다.

“통금 없다고 밤늦게 싸돌아다녀? 제정신이야?”

사실 들어오기 전까지도 기상호는 성준수가 어떻게 나올지 경우의 수를 여러 개 생각해 뒀었다. 하나, 개무시한다. 둘, 화를 낸다. 셋, 개같이 화를 낸다. 넷, 입시 악귀처럼 화를 낸다. 다섯…….

“씨바거, 넌 내가 아직도 너 좋아할 줄 알았냐? 그래서 기어오르는 거고?”

이건 또 예상에 없었는데. 기상호는 지금이라도 엎드려 잘못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말에 반박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껏 궁금했던 질문을 늘어놓아야 할지 잠깐 고심했다.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성준수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기상호, 내가 존나 만만하지? 내 속 긁으려고 왔냐?”

“제가 그, 일부러 그런 건 아이고여……. 준향대는 정말 그냥 오고 싶어가…….”

“야, 야. 그럼 농구는 왜 안 하는데?”

아.

기상호는 반사적으로 성준수를 쳐다보려다가 간신히 멈추었다.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고 있어야 울렁거림이 덜해서였다. 농구부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성준수가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지금 물어본다는 건 역시 타이밍을 기다렸거나 고민했다는 뜻이겠지.

“왜 그만뒀냐고.”

“죄송합…….”

“씨발 사과 좀 그만해. 어디 다쳤냐? 손목이라도 나갔어?”

“아니요.”

“그럼 왜.”

성준수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마치 지상고 31번으로 뛰던 그때처럼, 한 번도 이기지 못해 가벼운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안해하던 성준수처럼. 기상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 성준수가 내쉰 한숨에 기상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성준수는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기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2학기 되면 기숙사 나갈 거야.”

“…예?”

“내가 너 잡아먹을까 봐 지금 벌벌 떠는 거잖아. 좆같이.”

“아니, 햄. 그게 아이고요.”

“미안한데.”

성준수는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기상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잠깐 흐릿해졌다가 금세 또렷해진다. 씨발. 거칠거칠한 욕설은 기상호에게 향하는 게 아닌 듯 작은 소리였다.

“난 너 계속 보는 거 힘들어. 그래서 무시했어. 됐냐? 애초에 연락하지 않겠다고 한 건 너였어, 이 새끼야.”

기상호는 성준수가 예민한 겉모습과 달리 읽기 쉬운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상호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리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성준수의 말은 전부 다 진실이었다. 반면 아직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도 못한 기상호는 무작정 붙잡아도 되는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햄, 그러지 말고 좀만 시간을 주시면…….”

“난 졸업할 때 거기에 너 버리고 왔어, 상호야.”

그게 네가 바라던 거 아니었어? 성준수가 한숨처럼 기상호의 말을 뚝 잘라냈다. 그 체육관에, 우리가 부대끼며 연습하고 농구공 주고받았던 그곳에 너를 버렸다고.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상호는 다시 지상고 체육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늘 성준수의 옆모습을,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기상호가 되었다.

나 너 좋아해.

샛노란 프리지아와 살짝 붉어진 귓불. 스쳐 지나가던 성준수의 향과 돌아보며 까맣게 잠긴 두 눈이 그곳에 있었다.

“그럼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거 아인가.”

성준수는 당장 성불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어차피 멈출 생각이 없었던 기상호는 재차 불을 지폈다.

“햄 말처럼 거기에 내 버리고 왔으면 이래 피하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2년이나 지났는데. 마음 접었다면서 꼭.”

미련 있는 사람처럼.

“그래, 넌 예전부터 넌 개소리를 잘했지. 씨발, 내가 왜 이딴 걸…….”

성준수는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으로 할 수만 있다면 기상호를 찢어 죽일 기세였다. 기상호는 굳이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심장이 쾅쾅 빠르게 날뛰는데도 목소리와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차단도 못 했으면서 말을 왜 그래 차갑게 하는데요.”

내내 사라지지 않았던 숫자 1이 그새 싹 지워진 타이밍이 하필이면 준향대 입학 소식을 알린 직후였다. 물론 성준수가 그동안 보낸 시시콜콜한 기상호의 일상을 다 확인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대도 기상호는 성준수의 속내 읽기를 멈추지 않았고 성준수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기상호는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야.”

제발 입 좀 다물어. 지금 나 긁냐?

저 햄 그렇게 말하는 거 이제 별로 무섭지도 않고요. 저도 이제 성인이거든요. 아직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대학생이라고요.

기상호가 눈을 마주 보며 내뱉는 말에 성준수가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닫았다. 기상호는 올라간 눈매를 우그러트렸다.

“진짜 죄송해요, 형. 그런데 저도 헷갈리고 어려워서 그래요. 그러니까 좀만 봐주시면 안 됩니까?”

이기적인 거 아는데 확실히 하고 싶어가 그래요. 기상호가 우물쭈물 그제야 성준수의 표정을 살폈다. 막상 터트리고 나니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너무 나갔다 싶어 슬슬 눈치가 보였다. 확실히 누가 봐도 기상호가 못됐다. 좋아한다는 말을 그리 매몰차게 거절해 놓고 이제 와 시간을 달라고 하니 성준수의 머릿속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했다.

“너 이 씨발……. 그래, 상호야.”

그래도 성준수는 이를 악물었을지언정 버럭 화를 내지는 않았다. 무언가 골몰하듯 침묵하더니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바로 앞까지 다가와 기상호를 마주 보았다. 준수햄 졸업하고 키가 좀 컸나? 성준수의 눈이 묘하게 위에 떠 있었다.

“시간을 주면 뭐가 달라져?”

이미 넘치게 줬잖아. 뭘 얼마나 더 기다려줘야 하는데? 연이어 튀어나온 의문에 기상호는 또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하나, 둘, 셋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 얼마 돌리지도 않은 머리가 금방 멈춘다. 기상호는 버거운 숨을 삼켰다. 성준수는 분명히 프로 선수가 될 거다. 기상호는 농구를 그만뒀다. 성준수는 꽤 오랫동안 코트 위에서 빛날 것이다. 차라리 기상호가 계속 농구를 했다면 그나마 답이 금세 나왔을 텐데 아쉽게도 이미 폐기된 설정이었다. 아무리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고민해 봐도 쉬이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점이 바로 이 침묵의 이유였다.

그런데도 기상호가 계속 성준수를 떠올린 것만은 진실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떠오르는 얼굴 또한 성준수였고 발개진 귀와 순풍을 만난 듯 흔들리던 눈동자가 오래도록 잔상처럼 기상호를 따라다녔다.

“됐다.”

성준수는 이렇다 할 변명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기상호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응시했다. 그리곤 과잠을 챙겨 입더니 기숙사 문을 열었다. 어디 가냐고 붙잡으려던 기상호는 그만두었다. 성준수의 뒷모습이 꼭 졸업식 날 체육관 문으로 사라지던 때와 겹쳐 보여서 잡을 수 없었다.

“내 이러려고 여까지 온 거 아인데.”

기상호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헝클며 탄식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단순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이 모양이 꼴이었다. 또 상처 줬네, 준수햄한테.

성준수는 이후로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상호가 수업을 들으러 가면 종종 들렀다 가는 모양인지 벽에 걸려 있던 옷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다든가, 먹고 남은 초코우유 팩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다든가 하는 것이 전부였다. 기상호는 그 옆에 서서 한참이나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마음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점점 무거워졌다.

기상호는 태생이 예민한 편이었다. 겉으로는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는 정신 나간 오타쿠 컨셉충이었다지만, 어느 정도 지켜본 이들이라면 다 알 만큼 속내는 그 누구보다 여렸다. 무엇보다 기상호의 자기 객관화가 뚜렷하다는 점이 넘지 못할 큰 벽이었다. 즉 성준수가 절대 기상호를 좋아할 리 없다는 생각을 쉽게 내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건 성준수가 따라다니며 기상호 귀에 대고 좋아한다는 염불을 외워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설령 기상호가 성준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도, 혹은 이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문제는 풀기 전보다 꼬인 채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뭐, 상상해 본 적은 없어도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성준수가 같은 남자인 기상호를 좋아한다? 기상호 세계관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 기상호는 이제 답을 찾고 싶었다. 기상호와 성준수 두 사람에게 후회 없을 단 하나의 답을.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기상호는 딱히 친한 사람도 없이 출석이나 충실히 하고 과제에 매몰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끔 박병찬과 약속을 잡기도 했으나 밥을 먹고 카페에 들렀다가 헤어지는 게 전부였다. 성준수는 여전히 기상호와 마주치기를 바라지 않는 듯 잘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상호가 부랴부랴 시험 범위를 확인하는데 강의실에서는 무슨 대회에서 농구부가 몇 점을 넣었다더라, 뭐 그런 얘기가 화제였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이야기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너도 농구 했었다며?”

불쑥 얼굴만 아는 동기 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책 위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펜이 멎었다. 기상호는 질문한 동기 쪽으로 잠깐 시선을 뒀다.

“어? 아, 그랬지.”

“지금은 왜 안 해? 키도 이렇게 큰데.”

“나름 사정이 있어가…….”

기상호를 볼을 긁적이며 영 어색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어정쩡한 반응 탓에 금세 흥미가 식었는지 동기는 다른 자리로 떠나갔다. 기상호는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집중해야겠다, 했더니 이번에는 조금 더 신경 쓰일 대화가 들려왔다.

“아, 그 선배 이번에 좀 다쳤다던데?”

“누구?”

“그 무서운 선배 있잖아. 얼굴 하얗고 잘생긴.”

“아, 뭔 준수였나?”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대화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뭐 크게 다친 건 아니라던데 다음 대회 못 나가는 건 아닌가, 그런 숙덕거림이 이어졌다. 기상호는 의식하기도 전에 펜을 내려놓고 폰을 꺼냈다. 메시지? 아니면 전화? 모르겠다. 기상호는 냅다 성준수의 번호를 눌렀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신호가 몇 번 흐르더니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두어 번 통화를 시도하던 기상호는 결국 강의 시작을 5분 앞두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일단 기숙사부터 확인할 심산이었다. 아무리 기상호가 보기 싫어도 다친 게 진짜라면 기숙사에 들를 것이다. 게다가 성준수는 지금 기상호가 수업을 듣는 줄 알 테니까.

기숙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막 상의를 반쯤 벗던 익숙한 얼굴이 멈칫했다. 늘 차분히 침잠해 있던 검은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이, 미친. 노크 안 하지?”

“햄 다쳤어요?”

“뭐?”

다짜고짜 내던진 말에 성준수가 여전히 옷을 입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미간을 좁혔다.

“내가 다쳤으면 좋겠냐?”

“그, 그게 아이고 아들이 농구부 누가 다쳤다고 하는데 이름이…….”

“다쳤으면 뭐 어쩌게.”

“진짜, 진짜 다쳤어요? 어디요? 얼마나 다쳤는데요.”

기상호는 신발을 내던지듯 벗으며 안으로 들어가 성준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웃통을 까고 있든 말든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옅은 비누 향이 났다. 손목, 클리어. 얼굴, 클리어. 두 다리로 잘 서 있으니 다리 클리어. 그럼 이제 등짝…….

“야. 호들갑 떨지 말고 비켜.”

묘하게 굳어 있던 성준수가 신경질적으로 상의를 마저 내려 입더니 기상호를 밀어냈다. 기상호의 손이 눈치도 없이 등을 더듬거리기 직전이었다. 기상호는 그제야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섰다. 죄송. 더듬으려던 건 아니고요. 추잡한 변명이 줄줄 이어지기 전에 성준수가 잘라냈다.

“내가 다친 거 아니야.”

“진짜예요?”

“넌 지금 강의 시간 아니냐?”

“햄, 제 시간표 다 외웠어요? 저 없을 때만 왔다 가던데.”

“지금 그게 중요하고?”

긴장이 탁 풀린 기상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준수와 이전처럼 대화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성준수가 다치지 않아서 안도했다. 기껏 강의실까지 갔다가 자체 휴강하는 멍청이가 됐는데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기상호.”

“네에…….”

“넌 진짜 웃긴 새끼야. 너도 알지?”

징글징글하다.

그러게요. 저도 이런 제가 징글징글해요, 햄.

성준수는 피곤한 듯 가라앉은 눈으로 기상호를 한참 쳐다보다가 방을 떠났다. 기상호는 이번에도 성준수를 붙잡지 못했다. 그만 인정하면 좋을 텐데 그러지를 못해서 또 놓치고 말았다.

햄은 제가 왜 좋았어요? 지금도 제가 좋아요?

여전히 그 질문을 내뱉지 못한 이유는 단지 돌아올 답이 무서워서였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대답일까 봐 혹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대답일까 봐. 어느 쪽이든.

봄 날씨는 갈수록 따뜻해지는데 기상호는 때에 맞지도 않는 감기에 걸렸다. 기숙사 침대에 혼자 누워 죽도 못 먹고 앓으면서 시험이 끝나 다행이라는 생각이나 했다. 농구까지 그만뒀는데 성적이라도 잘 챙겨야지. 그래야 등록금이며 기숙사비며 뒷바라지해준 부모님 얼굴을 볼 엄두가 났다. 어우, 추버라. 짐을 줄인답시고 본가에서 들고 온 얇은 이불은 체온을 데워 주는 용도로는 꽝이었다. 체온이 오르니 그 반작용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전신이 달달 휴대폰 진동처럼 떨려 댔다.

기상호는 가뜩이나 작은 침대에 완전히 우겨져선 잠이라도 잘 수 있기를 기도했다.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상호는 여전히 벽에 이마를 댄 채로 웅얼거렸다.

“…준수햄?”

“꼬라지 뭐냐.”

“저 보러, 왔어여?”

“입 다물어.”

차가운 손이 기상호의 이마를 짚었다. 기상호는 반사적으로 그 손바닥에 이마를 비비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햄 손이 너무 차갑다. 밖에 있다 왔나? 어디에서 지내고 있었을까. 친구 집? 부실? 아니면 여자친구나 애인……. 또 쓸데없는 방향으로 생각이 튀었다.

“농구 그만뒀다고 몸도 막 쓰나 보다? 똑바로 안 챙겨? 씨바거, 잘 때마다 이불 걷어차더니 잘하는 짓이다.”

“저 일어나면 맨날 이불 똑바로, 하아. 덮고 있었거든요.”

“은혜도 모르는 똥개 새끼.”

성준수는 혀를 차더니 손을 거두었다.

“그거 햄이…… 덮어, 준 거예요?”

얇은 이불이 스르륵 당겨졌다. 그 대신 조금 더 무겁고 푹신한 이불이 기상호를 감싸듯 뒤덮었다.

“그럼 누구겠냐.”

이거 준수햄 이불이구나. 양쪽 코가 다 막혔는데도 시원한 향이 나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햄. 쿨쩍거리는 통에 발음이 형편없이 뭉개졌다.

“야, 야. 됐고 죽이나 처먹어.”

“입맛 없으요…….”

“약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성준수가 드물게 달래는 말로 기상호를 반쯤 일으켜 앉혔다. 기상호는 콜록콜록 기침하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 얕은 숨만 몰아쉬었다. 얼굴 꼴 봐라. 곧 불어 터지겠네. 핀잔을 준 성준수가 미지근한 죽을 한 숟가락 떠서 기상호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기상호는 기계적으로 입을 벌렸고 무슨 맛인지도 모를 죽을 삼켰다. 그러나 반도 비우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다물어버리자 끈질기게 떠먹이던 성준수도 포기했다.

“고집은. 더 안 먹을 거면 약 먹고 잠이나 자.”

약국에서 산 약이 아닌 처방받은 약을 꺼내더니 포장지를 뜯어 기상호의 입에 밀어 넣었다. 기상호는 멍하니 성준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약과 물을 얌전히 삼켜 먹었다. 햄이 먹던 약이에요? 감기 걸렸었어요? 언제요? 네 약이야, 등신아. 가방에서 꺼냈어. 건성으로 안심시키더니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았다며 짜증을 내던 성준수는 기상호를 도로 눕힌 다음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주었다. 얼마 전까지 죽어라 내 피해 다니던 사람이 맞나. 기상호가 멍하니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햄, 아직 내 좋아해요?”

“…그게 중요하냐.”

“중요해요. 저한테는 아주 중요하다고요.”

그래. 이건 꿈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를 해도 괜찮다. 기상호는 꿈과 현실의 경계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무작정 성준수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직 나 좋아해요? 굳이 한 번 더 던진 말에 성준수가 느지막이 되물었다.

“넌 어떤데.”

“솔직히요?”

“어. 솔직히.”

“제가 햄을 좋아한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성준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상호는 발개진 눈으로 성준수를 올려다보았다. 형은 너무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내가 좋아해도 되는지, 몇 년이나 고민해 봤는데도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 말들이 속으로만 생각한 건지 기어코 입 밖으로 기어 나왔는지조차 모르겠다. 성준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또 기상호만 주절주절 떠드는 꼴이었다.

“형은 내가 왜 좋아요?”

“넌 대체 이딴 질문 왜 하냐?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형은 농구도 억수로 잘하고, 잘생겼고 성격은 좀 나빠도.”

“내 성격이 뭐 어떻다고?”

“아, 아니. 그게 아이고요. 계속 궁금했거든요. 차라리 좋아한다는 소릴 들었을 때 물어볼걸, 내 얼마나 후회했다고요.”

열이 올라 제정신이 아닌 건지 아니면 참았던 무언가가 터진 건지. 기상호는 겁도 없이 계속 입을 놀렸다. 무슨 표정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 성준수가 얕은 숨을 뱉었다. 곧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한 목소리가 깃털처럼 기상호의 귀를 간질였다.

“등신같이 웃는 게 좋아. 어울리지 않게 잡생각이 많은 거, 덩칫값 못하고 마음만 약해 빠져서 별일 아닌 일에 질질 짜는 것도. 지금도 이렇게 못생겨서……. 진짜 이딴 새끼를 내가 왜 돌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같이 기상호가 싫어하는 기상호를 성준수는 좋다고 말한다.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너는 진짜 쓰레기야. 차인 것도 어이없는데 하루에 연락을 몇 번이나 처하는 거냐? 내가 그거 보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나 해? 넌 좆도 몰라, 기상호.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욕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이 이어지자 기상호는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와, 준수햄 진짜 내 좋아하나 보네.”

“만족하냐? 이제 잠이나 처자.”

성준수의 서늘한 손이 기상호의 눈을 덮었다. 기상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간지러우니까 그만하라는 으름장에 얌전해졌다. 이윽고 까무룩 잠이 몰아쳤다. 너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결에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얼마나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시간이 지난 건가? 아니면 하루? 허기는 지지 않았으나 목이 말랐다. 기상호는 퉁퉁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천천히 깜빡여 보았다. 몸살이 너무 심했는지 몸이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었다.

“아…….”

잠긴 목에서는 무슨 쇠 긁는 소리 비슷한 것만 튀어나왔다. 기상호는 불편한 자세를 바꿔 보려고 뒤척였고, 이내 단순히 감기의 여파로 몸이 무거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왐마야.”

그러니까 기상호는 지금 성준수에게 안긴 상태였다. 베개인 줄 알았는데 성준수의 팔이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였으며 작은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고. 지상고 숙소에서 지낼 때도 이렇게 가까이에 붙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기상호는 뒤늦게야 무슨 헛소리를 얼마나 지껄였는지 떠올렸다. 미친. 또라이 새끼다, 나는. 약이 제대로 들었는지 정신이 퍼뜩 났다. 성준수가 일어나서 또 도망칠까 봐 겁이 났는데 한편으로는 어제 멋대로 떠든 말을 되새기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상치 않은 방광의 사정이 두려웠다. 내 진짜 돌아삐겠다.

“해, 햄……. 일어나 봐요. 예?”

저 지금 큰일이 났다고요. 몇 번을 흔들어도 꿈쩍 안 하던 성준수가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이래 잘생기면 어째요.

“뭐야.”

“햄 저 진짜 방광이 터질 거 같아갖고…….”

“하.”

씨발. 험악하게 일그러진 성준수의 잘난 얼굴 앞에서 기상호는 잉잉 우는 얼굴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야.”

엉거주춤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성준수가 또 가부장 자세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까맣게 어두웠다. 기상호는 어깨를 구부린 채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넵.”

“할 말 없냐?”

“가, 감사합니다?”

“그거 말고 없냐고.”

“죄, 죄송합니다?”

“야 이, 씨바거. 그거 말고!”

기상호가 입을 딱 다물고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눈동자만 굴리자 성준수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해?”

“…죄송해요.”

기상호는 까치집을 지은 동그란 머리통을 연신 굽신거렸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이미 어제 다해버려서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제 어예 되는 거지. 준수햄과 나, 괜찮은 건가? 정작 기상호의 좋은 점을 줄줄 나열했던 당사자는 얼굴색 하나 안 변했는데 기상호만 얼굴이 새빨갰다.

“차단이나 풀어.”

“예, 예……. 그런데 햄 무슨 차단이요?”

“너 내 번호 차단했잖아.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죽인다.”

어. 아. 어.

“아!”

성준수가 갑자기 메시지 답장을 보내는 바람에 전화까지 차단했던 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성준수가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기상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꺼내 차단을 푼 다음 성준수에게 보여주었다.

“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나 제때 받아.”

성준수는 꼭 어떤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좋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럼 그냥 너는 모르는 채로 살아. 당시에는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 말이 미친 성준수 버전의 티저였다는 것을.

성준수는 다시 기숙사에서 지내기 시작하더니 시도 때도 없이 기상호를 갈구고, 들볶고, 밥을 먹이고, 늦게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했다. 그나마 좀 친해진 동기들과 어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는 가오 빠지게 목덜미를 질질 끌고 갔다. 확연히 달라진 태도에 기상호는 얼떨떨하면서도 어쩔 줄을 몰랐다. 동기들은 고등학교 선배라더니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냐며 수군거렸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박병찬은 둘이 다시 친하게 지내서 다행이라는 말만 했다. 병찬햄은 아무것도 모른다. 준수햄과 내는 친하게 지낸 적이 애초에 없다니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얼렁뚱땅 성준수에게 이끌려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또 익숙해졌다. 꼭 지상고 숙소에서 함께 지내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달갑기까지 했다. 성준수가 원래의 ‘지상고 31번 주장 성준수’로 돌아온 덕인지 기상호의 마음도 조금씩 편해졌다.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몰아치니 감정의 이름이고 좋아할 자격 따위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성준수가 말하지 않아도 왜 이러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넌 그냥 내가 보여주는 것만 봐. 잡생각 좀 그만해. 성준수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게다가 지은 죄가 한둘이 아닌 탓에 예전처럼 도망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으나 기상호는 애써 또 합리화했다. 그래, 준수햄도 이러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 애초에 성준수의 욱하는 성격이 몇 년 사이에 바뀌었을 리도 없다, 그런 생각이 확고했다. 유감스럽게도 기상호는 여전히 성준수를 잘 몰랐고 그게 패착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성준수는 예상외로 집요했고 기상호가 겪었던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인내심이 강했다.

농구부 연습 시간만으로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시간을 쪼갰는지 굳이 기상호를 따라 도서관까지 드나들었으니 말 다했다. 사실 기상호도 도서관까지 와서 공부할 마음은 없었다. 기숙사에서 밀착 감시하는 성준수를 잠시라도 피해 있고 싶어서 고른 선택지였는데 설마 따라올 줄 몰랐을 뿐이다. 아, 그냥 혼자 편하게 만화책이나 읽으려고 했는데. 기상호는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감 기간이 한 달도 더 넘게 남은 과제의 참고 서적을 뒤적였다.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기말 과제를 하는 멍청이가 어딨노? 어딨긴, 여깄지.

다들 술이나 마시러 갔을 금요일 저녁 시간대라 도서관은 한산했다. 사실 한산한 정도가 아니라 기상호와 성준수 둘뿐이었다. 이게 무슨 만화적 허용 같은 상황인지. 넓은 탁자에 앉아 성준수와 마주 보고 있으니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니 그리고 와 이래 쳐다보는데, 진짜. 기상호는 검은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이인 책을 애써 내려다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우, 깜짝아.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성준수와 곧장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준수는 턱을 괸 채로 기상호를 빤히 직시했다. 기상호는 큼, 헛기침하며 속삭였다.

 

“햄, 공부도 안 하실 거면 왜 도서관에 오자고 한 건데요.”

“공부하고 있잖아.”

“지금 제 얼굴만 보고 계신 거 같은디요.”

“뭔. 씨발. 너야말로 과제나 해.”

 

성준수가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큰소리로 욕을 짓이기더니 발끝으로 기상호의 정강이를 쿡 찔렀다. 아, 아파요. 세게 치지도 않았어, 새끼야. 엄살은. 내 좋아한다면서 말을 너무 막 한다아이가. 애꿎은 책만 펄럭펄럭 넘기며 구시렁거리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도로 성준수를 쳐다보니 단번에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아이고.

 

“어……. 그.”

“…….”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성준수의 얼굴이 너무 새빨갰다. 하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미간을 찌푸린 낯이 기상호가 지금껏 본 어느 성준수보다도 붉었다. 보는 사람까지 민망할 만큼 적나라한 반응이라 기상호는 고작 사과하며 어깨를 구부러트리는 게 최선이었다. 성준수가 무슨 말에 버튼이 눌렸는지 정도는 눈치챘다. 고작 좋아한다는 단어 하나일 것이다. 이럴 때마다 새삼스레 자신이 뭘 하는 건지, 성준수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졌으나 구태여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직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진짜 쓰레기 같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기상호는 쓰레기다. 본인을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답조차 해주지 못하면서 칼같이 자르지도 않고 어쩔 수 없다는 핑계나 대며 성준수에게 이끌려 다니는 꼴이 정상일 리 없다. 더 최악인 점은 그 사실을 잘 알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서관은 원래 정숙해야 하는 공간이라지만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이 분위기 우짤낀데. 기상호가 끙 앓는 소리를 내기 직전 성준수가 벌떡 일어났다. 기상호는 깜짝 놀라 어깨를 좁힌 채 물었다.

 

“어, 어디 가세요?”

 

성준수는 아무 말 없이 저벅저벅 출구로 걸어갔다. 가방이나 책을 그대로 둔 걸 보면 이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 모양인데, 걸음새만 보자면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기상호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불안해 주춤 엉덩이만 살짝, 아주 살짝 의자에서 떼어냈다.

 

“준수햄, 어디 가시는지…….”

 

막 유리문을 한쪽 팔로 열어젖힌 성준수가 아주 느릿느릿 돌아보았다. 얼마나 느렸냐면 반쯤 일어선 기상호의 다리가 제어 불능으로 달달 떨리다 못해 탁자를 치기 직전까지 될 만큼 느렸다. 성준수는 그 꼴을 한심한 눈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커피, 씨바거.”

 

안도한 기상호는 도로 의자에 몸을 바짝 붙여 앉았다.

 

“네, 넵. 저는 자판기 핫초코요.”

“어.”

“아이스 말고 핫이요. 뜨거운 거.”

“알았다고.”

 

성준수는 니가 사서 처먹으라는 말은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기상호는 그제야 차갑게 식은 제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말조심해야겠다. 아무리 성준수가 비교적 너그러워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예전이 비해서지, 여전히 욱하는 기질과 거친 언행은 변함이 없었다. 준수햄은 어디까지 봐주려나. 불쑥 치기 어린 궁금증이 튀어나왔으나 아직 그 정도 깡은 없었으므로 지그시 억누른 채 성준수를 기다렸다. 성준수는 바람이라도 쐬고 왔는지 20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자판기에서 뽑은 핫초코를 내밀며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그, 연습 경기인데.”

“예?”

“다음 주 수요일에 연습 경기한다고.”

“아.”

 

농구부요? 당연한 얘길 물으니 성준수가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상호는 직감했다. 이거 분명 보러 오라는 걸 텐데. 핫초코는 어째서인지 미지근해서 홀랑 다 마셔 버렸더니 답변을 보류할 시간은 너무 짧았다. 종이컵 윗부분을 앞니로 씹어 대자 성준수가 자연스럽게 빼내어 갔다. 다 마셨으면 버린다. 최후의 가림막까지 빼앗긴 기상호가 손가락만 꿈질거리자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괜찮으면 보러 오라고. 나 주전으로 뛰니까.”

 

기상호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고작 연습 경기일 뿐이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오만이었다. 그러나 기상호는 돌아가기에는 늦은 순간에서야 후회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응원 소리, 후끈 달아오른 코트 위, 그 코트 위에서 가장 빛나는 성준수. 기상호의 눈에 담긴 사람은 오직 성준수 한 명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쌍용기의 하이라이트 필름 속 기상호와 성준수가 되었다. 기상호의 삶에서 가장 눈부셨던 찰나를 함께했던 사람의 새로운 무대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마지막 쿼터가 되어서까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더니 4쿼터 끄트머리였다. 마지막 공격 찬스를 얻은 선수는 31번, 성준수. 성준수의 손을 떠난 공이 익숙한 선을 날아가는 순간 기상호는 직감했다. 들어간다. 성준수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버저가 울렸다. 모두가 환호했는데 기상호 혼자만 고요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성준수가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눈이 마주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성준수는 처음부터 기상호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성준수가 뛰어온다. 기상호는 도망치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로? 코트 위를 벗어나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도 몇 개월 동안 농구 코트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성준수의 버저비터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므로 기상호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이곳은 오로지 성준수의 공간이었다. 꾸역꾸역 내 발로 들어온 주제에 도망치고 싶다니 대체 뭔 짓거리고.

 

“기상호!”

 

바로 아래까지 달려온 성준수가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이름을 불렀고,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마주 손을 들어 올렸다. 성준수는 공태성만큼 높이 뛰지는 못하니 허공에다 내지를 뿐이었으나 닿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기상호는 그 벅찬 감정을 실로 오랜만에 느꼈기에 목석처럼 우뚝 선 채 성준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지나치게 뜨겁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날이었다. 그 무게가 버거울지언정 싫지는 않았다. 기상호에게 성준수는 그랬다.

 

당연하게도 고작 농구 경기 한 번 본 것만으로는 무언가가 크게 뒤바뀌지 않았다. 기상호는 여전히 머뭇거렸고 성준수는 구태여 들쑤시지 않았다. 단 하나 평소와 달라진 것이라면 성준수가 오늘은 농구 코트 앞 벤치까지 기상호를 끌고 간 것이다. 지난번 연습 경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상호는 며칠 만에 보는 농구 골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셔.”

“예? 저 미자라 술은 쫌…….”

“뭔 헛소리야. 이거 콜라거든, 멍청아.”

 

성준수가 쥐여준 콜라 캔은 미리 물기를 닦아냈는지 차가운데도 축축하지 않았다. 왜 여기로 왔는지 구태여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속으로 꽁꽁 싸매 뒀던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할 것 같아서. 주황색 노을이 새하얀 운동화 끄트머리를 느릿하게 데웠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성준수였다. 익숙하게 골대 밑까지 걸어간 그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농구공을 주워 들더니 기상호를 바라보았다.

“던질래?”

기상호는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성준수는 대답을 듣고서도 잠시 눈을 맞추고 서 있다가 두 팔을 뻗었다. 언제 봐도 깨끗한 폼이었다. 손을 떠난 공은 그물을 살짝 스치며 들어가더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팅, 팅, 퉁. 농구공이 튀는 소리에 기상호가 어깨를 움찔했다. 성준수는 한 골 넣더니 도로 돌아와 기상호 앞에 섰다. 기상호가 고개를 푹 숙이는 바람에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떤 감정을 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상호는 반도 비우지 못한 콜라 캔을 꾹 눌러 쥐었다.

“햄 저 농구 그만둔 거요. 이유 안 궁금해요?”

“저번에 물어봤더니 다 죽어가는 얼굴로 말도 안 했잖아.”

“아…….”

“말하고 싶으면 해. 네 선택이지.”

노을이 침잠한다. 기상호는 손가락만 꿈질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성준수는 다시 공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기상호는 그제야 눈을 들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요. 그냥…… 자신이 없더라고요. 재능도 없는데 계속 농구만 해도 되나 싶어 갖고. 제가 좀 겁쟁이잖아요.”

그런데 좀 후회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기상호는 콜라 캔을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어느새 공을 쥔 성준수가 기상호를 향해 돌아섰으나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털어놓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기상호.”

농구공이 품으로 날아왔고 기상호는 습관처럼 그것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입학 후 처음 만지는 공이었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몇 년을 손에서 놓은 적 없던 농구공이 지금은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기상호는 그런 자신이 다른 사람 같았다. 던져. 성준수가 말했다. 나 믿어. 기상호는 그제야 팔을 앞으로 뻗었다. 묵직한 공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이 손을 떠난다. 림에 튕긴 공이 들어갈 듯 말 듯 간을 본다.

성준수가 뛰어오른 건 그때였다. 툭. 가볍게 건드린 공이 그물 안으로 들어가 떨어졌다. 기상호는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제야 온전히 알아차렸다. 원하던 하나의 답. 내가 농구를 하지 않아도, 슛을 성공시키지 못해도 되는구나. 겁이 나서 도망쳤다 제멋대로 돌아오는 미성숙한 기상호를 위해 성준수는 늘 그곳에 있었다. 어설프게 쏘아 던진 공의 무게를 같이 감당해 줄 사람.

“기상호.”

“네.”

성준수는 과거, 기상호가 얽매여 있던 그때보다 훌쩍 성숙한 눈으로 기상호를 응시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어와 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좋아하는 데에 자격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러니까 대답해.

“넌 어떤데?”

시간은 이제 충분히 줬잖아. 성준수가 오늘은 기필코 들어야겠다는 듯 채근했다. 기상호는 아주 느리게 농구공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딱, 졸업식 체육관에서 떨어져 있던 만큼의 거리였다. 농구공이 스르르 앞으로 굴러가더니 성준수의 발치에 닿았다. 동점이었다. 기상호는 마치 전력으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 호흡이 힘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생각이 전부 음소거였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성준수의 얼굴만이 선명했다. 이 세상에 마치 둘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성준수와 기상호, 기상호와 성준수.

“좋아해요.”

계속, 좋아했어요. 머뭇거리던 기상호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오로지 하나의 답을 얻기 위한 과정. 수많은 부정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도달한 유일한 긍정.

“알면 됐어, 등신아.”

허리를 숙여 농구공을 주워 든 성준수가 그제야 웃었다.

+++

“야.”

기상호는 서늘한 목소리에 꾹 내리감았던 두 눈을 살짝 떴다.

“뭐 하자는 거냐?”

탁. 성준수의 굳은살 빼곡한 손바닥이 기상호의 입술을 막았다. 기상호는 어리둥절하게 대답도 질문도 아닌 말투로 대꾸했다.

“엥. 사귀는 기념 뽀뽀요?”

“그걸 왜 하냐고. 너 이 새……. 상호야, 대가리에 총 맞았지?”

“예? 아, 아니. 햄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저 좋아한담서요!”

기상호의 눈치 없는 말에 성준수의 얼굴은 다시 복각한 입시 악귀로 변모했다.

“너 아직 미자잖아, 씨발. 누구 쇠고랑 채울 일 있냐?”

그러니까 둘이 사귀게 된 것은 약 1년이 더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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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연구하는 앵무새

    간만에 읽어도 너무너무 좋아요… 상호가 농구를 그만둬도 준수는 여전히 상호를 좋아한다는 게…마음이 이상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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