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여름의 소리를 너에게

여름 청춘 if

31.6℃ by 해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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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은 기후 변화. 좆같은 매미. 그리고 진짜 좆같이 짜증 나는 여름. 성준수는 올해 여름이 유독 끔찍했다. 고3 여름 방학 직전에 이 부산 시골까지 이사 온 것부터, 에어컨이 고장 나 버렸다는 점, 수리 기사는 한 달 후에나 겨우 올 수 있다는 것까지 최악의 최악이었다. 어쩔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이니 뭐니 이런저런 말을 해봤자, 성준수는 막 사춘기를 맞은 어린애도 아니었고 여동생까지 있는 맏이인데다가 상남자 중 상남자였다. 더위 따위에 징징거릴 수야 없었다.

아니 씨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땀이 맺히는 양심 없는 기온에 온 신경이 곤두서선, 선풍기를 두 대씩 돌려 가면서 창문 밖의 매미를 향해 씨발 제발 좀 닥치라고! 소리 지르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출장이라 집에 없겠다, 동생 성지수와 둘 다 점심이고 뭐고 더위를 먹었는지 입맛도 없어 뭘 먹자는 얘기도 안 했다. 이러다가는 그냥 죽겠다. 성지수 상태가 더 안 좋아서 선풍기를 그쪽으로 고정해 뒀더니 성준수는 샤워만 세 번째요, 몸에서 바디워시 냄새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야, 성지수. 이거 냄새 진하다고 다른 거 사랬지.”

“미안해, 오빠. 난 그냥 그게 좋아서……. 다른 건 행주 냄새가 났단 말이야.”

 

성준수는 바람을 위장까지 들이마실 기세로 입을 아, 벌리고 있던 성지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바디워시에서 행주 냄새가 나는데. 성지수는 다시 바람을 마시느라 대답이 없었다. 성준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대충 털며 쾌청한 창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 오전부터 오른 온도가 최고점을 찍을 때였고 짧은 샤워로 얻은 시원함은 아주 찰나였다. 내일모레 비가 온다더니 습도까지 더해져 아가미 없는 물고기가 된 성준수는 빠르게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노려보다가 폰과 지갑을 챙겼다. 선풍기와 한 몸처럼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성지수가 곧장 고개를 옆으로 살짝 빼내 성준수를 쳐다보았다.

 

“오빠 어디가?”

“편의점.”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주면 안 돼?”

“뭘로.”

“이왕이면 콘으로, 초코 말고 바닐라!”

“씨바거.”

 

꼭 바닐라로 사 와야 돼, 초코 말고! 초코 말고, 초코 말고……. 성지수의 앳된 목소리가 중독성 강한 배경음악처럼 따라붙었다. 아, 알았다고. 성준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편의점으로 질질 관성적인 걸음을 옮겼다. 고열에 시달린 아스팔트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머리를 좀 더 말리고 모자라도 쓰고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수리를 녹일 것처럼 쏟아지는 햇빛에 정신까지 혼미한데다가 목이 타 짜증이 치미는 것까지는 그래, 괜찮았다.

준수야, 너 정말 부산까지 가는 거야? 지금 고3인데 괜찮겠어? 재첩국만 먹으면 성적 안 나올 텐데 진짜 큰일이겠다. 그래도 힘내, 준수야. 열심히 공부해서 인서울하면 되지. 물론 넌 못하겠지만 벌써 포기하진 마.

아니 씨발, 왜 이런 상황에서 전영중 목소리가 떠오르는 거냐고. 진짜 더위라도 처먹은 건가. 성준수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걷어차며 분풀이나 했다. 그나저나 편의점이 대체 어디야. 분명 어제 성지수와 같이 갔던 곳인데 그때도 이렇게 오래 걸었던가? 집에서 10분 거리쯤 아니었나? 어째 아까부터 계속 같은 골목을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아, 진짜 제발 좀.

 

“하. 개같네.”

 

성준수, 19세, 전학생.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다. 맹세코 성준수는 길치가 아니었다. 이사 온 지 일주일도 안 됐고 비슷비슷한 골목이 너무 많아서 잠깐 헷갈렸을 뿐이다. 얼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지도앱을 켜……려고 했는데, 배터리가 없었던 모양인지 화면은 까맣게 점멸한 채로 미동이 없었다. 일이 안 풀리려면 온 우주가 방해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씨바거. 성준수는 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30분, 1시간, 2시간……. 집에서 얼음을 얼려서 입에 처물고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사로잡힌 채 정처 없이 떠돌기를 다시 1시간쯤. 이 나이 먹고 길 잃었다고 경찰서를 찾아가기도 뭣한데 경찰서는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었다. 원체 사는 사람이 적은 동네인데다가 날이 덥기도 어지간히 더우니 개미 한 마리 안 지나다녔다. 얼마 후에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택시라도 붙잡아 탈 심산이었으나 뭐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야지. 성준수는 결국 낯선 놀이터 벤치에 구부정하게 앉아 이마를 짚은 채 고뇌했다. 이 동네가 이상한 건지 성준수가 돌아버려서 길을 헤매는 건지,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지금껏 신경 써 본 적도 없는 문제의 답이 나오지 않아 뒷골이 살살 쓰릴 때쯤.

 

“저기요.”

 

누군가 벤치 앞에 몸을 낮춰 앉더니 대뜸 말을 거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셔츠를 헐렁하게 입은 어린애였는데 지는 해를 등진 탓인지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성준수가 보기에야 그렇다는 뜻이지 사실 마냥 어리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미지근한 바람에 살짝 곱슬한 갈색 머리칼이 흔들리자 어렴풋이 비누 향이 났다. 한쪽 눈 아래에 찍힌 점이 꼭 새로 붙인 액정 필름의 먼지 하나처럼 거슬린다는 것과 쭉 뻗어 올라간 눈꼬리만 빼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인상이었다.

 

“가출했어요?”

 

뭐라는 거야, 이 애새끼가. 성준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으나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이래 더운데 혼자 뭐하나 싶어서요.”

 

쫌 마이 더워 보이는데. 꿰뚫는 듯 집요한 눈동자가 성준수를 담았고 성준수는 그 께름칙한 시선이 단번에 불쾌해져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신경 끄고 갈 길 가라.”

“얼굴이 억수로 빨간데, 참말로 괘안아여? 근데 여 사람 아인가 보네. 서울말 쓴다.”

 

여는 첨 왔어요? 집에 안 가고 혼자 앉아서 와 청승 떠는데요. 혹시 친구 없나?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말이 줄줄 이어졌다. 무슨 애새끼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말이 이렇게 많지? 그리고 자꾸만 코를 간질이는 비누 향이 가장 거슬리는 건 성준수 또한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이게 다 성지수가 산 그 바디워시 때문이다. 돌아가면 비누로 다시 씻든가 해야지.

 

“안색이 영 나빠 보이는데 물이라도 마실래요.”

 

콕. 차가운 물병이 성준수의 볼에 와 닿는 순간, 비누 향이 어떻고 바디워시가 어떻고 그런 상념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성준수는 벌떡 일어나서 짜증스럽게 볼을 박박 닦아냈다.

 

“……야, 씨.”

“와 욕을 하고 그래요. 싫으면 그만이지.”

 

놀라게 한 사람이 누군데 도리어 툴툴거리며 물병을 가방에 쑤셔 넣는 꼴이 성준수를 부글부글 끓게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마주 보니 키가 엇비슷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뭔, 농구 선수인가. 잡생각을 삼킨 성준수는 갈색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되받아쳤다.

 

“야, 나 욕 안 했는데?”

“씨, 까지 나왔잖아요. 내 다 들었구만.”

“하. 진짜 별.”

 

그나마 저녁이 코앞인 덕에 전신을 내리누르던 불쾌 지수가 옅어진 덕에 처음 보는 어린애의 멱살을 잡지 않아도 되니 다행인 셈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고3 입시 생활 중 난데없는 이사를 와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었다지만, 성준수는 초면인 애 앞에서 쌍욕을 지껄일 만큼 인성에 하자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불쑥 앳된 얼굴이 가까워지고 성준수는 예상하지 못할 만큼 좁아진 거리감에 움찔 주먹을 쥐었다.

 

“이 동네에선 못 보던 얼굴인디.”

 

거리가 가깝든 말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여긴 형처럼 잘생긴 사람이 하나도 없다며 칭찬인지 모를 말이 이어졌다. 그냥 할 짓 없는 어린 새끼인 줄 알았는데 눈치가 꽤 빠른 모양인지 그나저나 이 형 길치인가 보네. 얼굴값 못한다. 그런 말이 덧붙여졌고 성준수의 인내심은 이제 바닥이 코앞이었다.

 

“야, 자꾸 긁지 말고 꺼져.”

“형 어디 사는데요. 길 잃은 거 맞죠. 형 같은 사람 많이 봤으요. 이 동네가 첨 오는 사람들한테는 좀 복잡해가.”

 

성준수가 욕을 하든 말든 꿋꿋하게 제 목적을 이루려는 행태가 황당할 뿐이었다.

 

“지금 내 신상 터는 거냐?”

“네? 제가 대체 왜 그런 짓을? 아,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피해망상이라 카던데.”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성준수는 할 말이 없어져 땀으로 젖은 제 뒤통수만 문질거렸다. 길을 잃은 것도 사실이었고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인데다가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도움이나 받으면 그만 아닌가? 이 동네 오래 산 것처럼 떠들어 대니 대충 건물 이름을 알려주면 길을 찾아줄지도 몰랐다. 어차피 폰을 빌려도 가족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했으니 의미가 없었고, 버스 정류장이나 알려 달라고 할까도 고민했는데 정류장을 찾는다고 해도 내릴 때를 놓치면 또 19살 미아나 될 뿐이었다. 이래저래 오늘 운이 최악으로 치달은 걸 고려해서 안전한 쪽을 선택하는 게 그나마 빠른 귀가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래. 괜한 모험은 하지 말자. 단순하게 상황 파악을 끝낸 후 요즘 들어 부쩍 감당하기 힘들어진 성질머리를 억누른 성준수는 뒤늦게 입을 떼어냈다.

 

“준상 아파트.”

“엥. 거는 여기서 완전 반대쪽인디.”

 

기다란 손가락이 성준수가 걸어온 곳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저 건물 보이죠. 저 뒤로 돌아서 한참 가면 저거든요. 어쩌다 여까지 왔대요. 그나저나 좋은 데 사네요. 거기 신축인데. 성준수는 뒤이어 들리는 말을 무시하며 몸을 살짝 틀었다. 다소 뜨뜻한 손에 붙잡히는 건 또 예상하지 못했지만.

 

“데려다줄까요.”

“뭐? 왜?”

“또 혼자 길 잃어뿔까 봐 그러죠.”

“별, 씨발.”

 

애 주제에 성준수를 완전히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물론 성준수도 아직 어른이 아니기야 했지만, 적어도 눈앞의 이 어린놈보다야 훨씬 어른답다고 스스로 결론 지은 지 몇 분 지났다. 허, 성준수의 욕지거리에 눈앞의 녀석이 헛숨을 내뱉었다.

 

“이거 완전 욕쟁이 아이가.”

“어디서 말까고 지랄이야. 딱 봐도 나보다 어린 새끼가.”

“내 이름은 어린 새끼가 아니라 기상호고요. 형은 와 이래 말버릇이 고약해요, 그거 이미지 깎아 먹기 딱 좋다고요. 가뜩이나 동네도 좁은데 조심 좀 해요. 이게 다 형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새끼 아까부터 왜 자꾸 맞는 말만 하지? 성준수는 고3이 되면서부터 부쩍 욕이 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다만 연장자 앞에서는 의식해서 조심하는 편이었기에 지적받은 적이 없었고, 동급생 사이에는 전영중만 제외하면 딱히 트집 잡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말버릇 고약, 이미지 깎아 먹는 짓, 좁은 동네. 처음 만난 어린애한테 이런 잔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러나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빨리 집에 돌아가서 씻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성준수는 의외로 큰 손에 잡힌 제 손목을 내려다본 후 힘을 줘 털어내며 으깨듯 말했다.

 

“……땍땍거리지 말고 앞장이나 서.”

 

애새ㄲ, 가 아니라 기상호는 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두어 걸음 앞서서 나갔다. 어느덧 해가 지면서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 거리는 여전히 한산했다. 여기도 부산에서는 꽤 큰 도시 외곽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인적이 드문 건지 도통 모르겠다. 마치 뭐에 홀려서 이상한 곳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 성준수는 앞장선 기상호를 빤히 쳐다보며 따라갔다.

 

오빠 그거 알아? 귀신한테 홀리면 자기도 모르는 곳에 들어가기도 한대. 다른 세계 같은 곳 있잖아. 막 귀신들이 사는 그런 세상?

 

씨바거, 갑자기 이딴 얘기는 왜 떠오르고 지랄. 성지수의 목소리를 털어내려고 고개를 가볍게 흔드는데 기상호가 앞서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휙 돌아섰다. 씨발, 뭐야? 가뜩이나 귀신 얘기가 떠올라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놀라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기상호는 어우, 욕쟁이 할매도 형보다는 덜할 듯. 따위의 말을 하고는 갑자기 성준수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돈 좀 있으신지…….”

 

이 새끼가 진짜.

 

“지금 나 털어 보겠다, 뭐 그런 거냐?”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을 자꾸 도와준다 어쩐다……. 성준수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기상호가 더 황당한 낯짝이 되었다.

 

“예? 아, 아니. 그게 아이고요. 걸어가기에는 너무 머니까 버스 타자고요. 설마 버스비도 없으신? 빌려드릴까요.”

 

길도 잃고 돈도 없고……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요즘 더위 먹은 사람이 그래 많다던데. 야, 넌 말을 하려면 좀 똑바로 해. 다짜고짜 이상한 질문부터 한 게 누군데. 고작 몇 초 사이에 착해빠진 어린애를 쓰레기로 취급할 뻔했다는 사실이 머쓱해진 성준수가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보여줬다.

 

“카드 있거든.”

“교통카드는 저도 있는데요.”

 

그걸 뭐 자랑까지. 기상호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쳐다보는 바람에 또 뭔가 치밀었으나, 이 이상한 새끼와 계속 말을 주고받았다간 밤이 늦어도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 그만뒀다.

 

“……됐다, 그냥 가자.”

 

여기 배차가 좀 길어서 지금 가도 탈 수 있을지 몰겠네요.

앱으로 확인해 보면 되잖아.

그게 안 맞을 때도 있어 갖고.

뭔 씨발. 그럼 앱이 왜 있어.

고장 난 시계도 일단 돌아가기는 해야죠. 아, 저 버스 바로 오네요. 다행이구로.

 

버스 정류장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성준수의 생각과 달리, 정류장은 꽤 근처에 있었다. 또 쓸데없는 얘기나 하면서 신경을 건드릴 줄 알았는데 옆자리에 앉은 기상호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까무룩 저문 버스 차창 밖을 내다보는 옆모습을 힐끔거리던 성준수는 예상하지 못한 침묵에 슬슬 짜증 나기 시작해서 차라리 정류장만 알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심지어 몇 정거장 지나지도 않아서 내려야 한다는데 하차할 정거장 이름이 대놓고 준상 아파트 입구였다. 씨바거. 괜히 달고 오지 않아도 될 혹을 자처해서 달아버리다니 정말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데려다준 게 사실이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빨리 헤어지려는데 기상호가 자자 얼른 갑시다, 하더니 쫄래쫄래 앞서서 걸어갔다.

 

“뭐냐? 단지 안까지 데려다줄 필요는 없는데.”

 

네? 기상호가 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저도 여 사는데요.”

 

바로 건너편이요. 진짜 이 새끼 뭐지? 성준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깊은 아득함을 느꼈다. 이거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지 집에 가는 거였잖아. 헷갈리게 하고 지랄.

 

“그럼 또 봅시다.”

 

기상호는 예민한 기류를 벌써 눈치챘는지 성준수가 말을 걸기도 전에 냅다 인사하더니 쌩 등을 돌려 저만치 멀어졌다. 아, 짜증 나는 비누 냄새. 또 보자고? 그럴 일은 아마 성준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흙이 들어가도 없을 테고. 성준수는 기상호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노려보고 서 있다가 애꿎은 제 목덜미나 벅벅 긁으며 에어컨이 없는 열대야라는 이름의 지옥에 입장했다. 이제는 대놓고 거실 선풍기 두 대 앞에 대자로 누워 있던 성지수가 고개만 꺾어 쳐다보는데 성준수와 닮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 성준수! 왜 이렇게 늦었어?”

 

내 아이스크림은?

 

“아.”

 

성준수는 그제야 뭘 위해 나간 외출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진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건 아닌지 영 기분이 찝찝해 내일 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성준수! 오빠! 내 아이스크림은! 찡얼거리는 성지수의 목소리가 따라붙었으나 으레 그랬듯 무시하고 말았다.

 

몇 주나 뒤에 온다던 수리 기사가 갑자기 일정 하나가 비었다며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다. 어제 그 생난리는 액땜이었던 모양인지. 어쨌든 에어컨 수리가 끝나고 과학의 발전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 지 며칠째, 지긋지긋한 무더위 또한 저무는 기세 없이 계속되었다. 역대 최고 기온, 기후 위기, 빙하가 녹고 그 안에 있던 뭔가가 나왔다는 둥 떠들어 대는 뉴스 또한 끊이지 않았다. 뭐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고3은 수능을 치러야만 했으므로 일단 학원부터 등록했다. 성준수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음에도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니 예민함은 극에 치달았다. 입시나 더위도 문제였다지만, 자꾸 떠오르는 이상한 비누 냄새가 그의 신경을 긁는 데에 한몫 더했다. 성지수를 닦달해 바디워시까지 새로 바꿨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고.

땡볕을 뚫고 버스로 1시간이나 걸리는 학원에 도착한 성준수의 얼굴은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누가 어깨라도 치면 당장 주먹이 날아갈 것 같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자리에 앉았는데, 이건 또 뭐야.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채로 헥헥거리며 강의실에 들어선 기상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성준수를 단번에 알아본 기상호의 얼굴은 정말 가관이었다. 꼭 간식 몰래 훔쳐 먹다 걸린 개새끼처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하는 말이라고는.

 

“어…… 형 대학생 아니었습니까? 재수생?”

“나 삭았다고 맥이냐?”

 

어디 가서 노안 소리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새끼는 정말 참신하게 성준수를 들쑤셨다. 싸가지 점수 만점이다, 이 새끼야. 성준수가 눈을 부라리자 기상호는 눈치를 살살 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인데. 어쨌든 기분 나빴다면 죄송.”

“대학생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렇게 나댄 건 뭔데?”

“어, 뭐……. 다시 못 볼 줄 알았으니까요?”

 

또 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만나지 않을 줄 알았단다. 뭐지? 왜 이딴 말에 열이 뻗치지. 성준수는 대꾸하지 않고 예의 악귀 얼굴로 기상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자 기상호가 주춤주춤 성준수 앞자리에 앉을 듯 말 듯 간을 보더니, 에어컨 명당인 빈자리가 여기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얌전히 가방을 내려놓고 착석했다. 참 눈치 빠르고 안 기특한 새끼.

 

“야, 야.”

“왜요.”

 

기상호의 동그란 뒤통수가 거슬려 앉은 의자 다리를 툭 걷어차자 곧장 반응을 보였으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성준수는 에어컨 바람에 살랑이는 뒷머리를 노려보았다. 꼭 개새끼 꼬리 같네.

 

“너 고3 아니냐? 왜 존대하는데?”

“엥.”

 

기상호가 몸을 살짝 틀어 뒤를 보더니 영 맹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 뭐냐. 곧 기상호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통에 성준수의 눈썹만 한껏 찌푸려졌다.

 

“아, 맞네. 그래, 준수. 공부 열심히 해라.”

 

어딘가 꺼림칙한 태도였다. 야. 그게 또 거슬린 성준수가 새하얀 낯을 구기는데 수업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대로 대화가 끊어졌다. 기상호는 언제 돌아보았느냐는 듯 내내 학원 강사와 화이트보드만 쳐다보았고 성준수만 독이 잔뜩 올랐다. 근데 내가 이름을 알려줬던가? 당장 목덜미를 잡아당겨 물어볼 수도 없으니 수업만 끝나 봐라, 했다. 이 새끼를 삶든 굽든 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기상호가 뒤통수에 눈이 없어 성준수의 표정을 못 보는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는 개뿔. 기상호는 성준수가 벼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누구보다 빠르게 튀었다. 닭 쫓던 개처럼 기상호의 빈자리만 노려보던 성준수는 새카만 크로스백을 대충 둘러매고서 학원을 빠져나왔다. 밤이 늦었는데도 여전히 습하고 더워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날카로운 기분이 삐딱해졌다. 차라리 비가 와라, 제발. 속으로 욕을 주절거리느라 버스 배차 시간이 들쑥날쑥하다는 것을 그새 잊고 무작정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성준수를 어디선가 나타난 기상호가 불러 세웠다.

 

“와 이래 늦었나, 준수. 굼벵이인 줄.”

 

이 새끼는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멈춰 선 성준수는 한쪽 눈을 삐뚜름하게 치켜떴다.

 

“너 뭐냐?”

 

먹구름이 달을 가린 탓인지 기상호의 얼굴은 번쩍이는 간판 아래에서도 미묘하게 어두워 보였다. 뭐랄까. 꼭 이곳과 동떨어진 무언가처럼 느껴져서 성준수는 이 새끼만 보면 자꾸 기분이 나빠 성질만 더러워지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준수가 죽일 듯 쏘아 보든 말든 기상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태연히 대꾸했다.

 

“뭐긴, 기상호지. 이래 어두운데 또 길 잃을까 봐 기다려줬더니 말뽄새 봐라.”

“별. 지랄. 야,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았는데?”

“…….”

“대답 안 하지?”

 

기상호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성준수 귀까지 들렸다. 하, 역시 내가 이름 안 알려준 거 맞네. 확신한 성준수가 닦달하기 직전에서야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문제집 표지에 이름 써 놔서?”

“구라 치지 마.”

“와, 니 진짜 의심 많다. 내가 그런 구라를 와 치는데.”

“그때 내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랬나? 아일 텐데. 뭐 있었을 텐데. 아, 저 버스 온다! 후딱 뛰라, 준수.”

 

야, 야. 어디서 또 수작질이야. 버스 안 오잖아. 딱 봐도 수상하게 구는 게 아니꼬워서 기상호의 백팩 끈을 잡아당기자 별 저항 없이 끌려오는가 싶더니, 이 씨바거는 요령 좋게 두 팔을 쑥 빼내곤 내 가방도 들어주고 보기와는 다르게 꽤 착하네, 준수.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말만 내뱉었다. 야. 성준수가 뻗치는 성질을 못 이겨 가방을 기상호의 품에 내던지려는 순간.

 

“니 배 안 고프나. 저 맛있는 떡볶이집 있는데.”

 

가방 들어줬으니 내 사주께. 따라온나. 또 자연스럽게 손목을 감아 잡는 뜨거운 체온에 홀랑 속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분식집 안이었다. 두 자리로는 부족해 네 자리쯤 차지해야 할 것 같은 덩치 둘이 좁은 분식집에 앉아 있으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또 없었다. 성준수는 대체 왜 이런 뻔한 짓거리에 자꾸 휘말리는 건지 영문을 몰라 애꿎은 젓가락만 꽉 쥔 채 기상호를 노려보았다. 새하얀 손등 위로 핏줄이 울긋불긋 올라왔는데도 기상호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유유자적이었다. 떡볶이 2인분에 순대, 모둠 튀김 하나, 준수 음료는 뭐 마실래? ……초코스무디.

 

“뭐 더 묵고 싶은 거 있나.”

“됐어. 배 안 고파.”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 잘생긴 얼굴이 몇 시간 사이에 홀쭉해졌네.”

 

쳐다보는 기상호의 눈길이 진심처럼 느껴져서 성준수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 꼴을 빤히 보던 기상호가 아하하,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보다 순진하네.”

“야, 진짜 뒤진다.”

 

성준수의 낯이 단번에 험악해지자 떡볶이를 접시에 담던 사장이 의심스럽게 둘을 힐끔거렸다. 타인의 시선에서는 성준수가 기상호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인지. 성준수는 억울했다. 전부 다 이 똥개새끼가 시작한 일인데 인상 좀 썼다고 저렇게 쓰레기 보듯 쳐다볼 일이냐고. 하지만 유교 보이답게 어른이 보는데 계속 쌍욕을 지껄일 수는 없어서 입을 꽉 다문 채 발로 기상호의 정강이를 걷어찰 뿐-물론 기상호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요령 좋게 피했다-이었다. 성준수가 내면의 어둠과 끊임없이 타협하는 동안 기상호는 차가운 물을 컵에 따라 쓱 밀어주며 또 성준수 신상털이에 나섰다.

 

“그나저나 고3에 전학이라니 니도 참 안됐네. 어디 학굔데?”

“지상고.”

 

여기서 대답 안 하면 또 헛소리나 주절거릴 테니 바로 알려주는 편이 낫다, 라고 성준수는 고작 두 번만의 만남에서 학습해 버린 스스로가 황당하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의외였는지 기상호는 잠시간 성준수의 눈을 빤히 마주 봤는데, 웃음기 없는 낯짝과 날카로운 시선이 성준수를 샅샅이 훑는 게 뻔히 느껴져서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이 새끼 자꾸 왜 이딴 눈으로 쳐다보지?

 

“아, 지상고? 내도 거 다니는데.”

 

학교에서 또 보겠네. 담주 개학이다 아이가. 어느새 찝찝한 눈길을 거둔 기상호가 헤실헤실 웃어 댔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좁은 탁자 위를 채웠고 기상호는 제 앞에 놓인 초코스무디를 성준수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떡볶이집 사장이 보기에 초코스무디를 먹을 것 같은 쪽은 기상호였던 모양이다. 정작 기상호는 마실 것을 고르지 않았는데도. 그 별것 아닌 것마저 거슬리기 시작한 성준수가 굵은 빨대로 초코스무디를 휘저으며 물었다.

 

“몇 반.”

“어?”

“몇 반이냐고.”

 

뜨거운 떡볶이를 입에 넣은 채 우물거리던 기상호는 굳이 그걸 꼭꼭 씹어 삼키고 나서야 대답했다.

 

“음, 1반?”

 

어딘가 영 애매한 답이었는데도 성준수는 어느덧 기상호의 이상한 화법에 익숙해진 듯 제발 1반은 아니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시원하다 못해 관자놀이가 아찔해지는 초코스무디를 와삭, 씹어 삼켰다. 이후로 기상호는 떡볶이 더 무라, 순대도 시켜 줄까? 사장님 초코스무디는 리필 안 됩니까? 안 되면 하나 더 주실래요. 야 기상호, 됐다고. 뭐 그런 시답잖은 얘기만 했다. 성준수는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아서 얼마 못 먹었는데 기상호 역시 많이 먹지도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럴 거면 왜 오자고 한 건데.

 

“다 먹었냐?”

 

성준수가 제 팔짱을 꼰 채 또 시비 걸 기세로 묻자, 기상호는 곧장 폰을 꺼내 버스 시간을 확인하더니 10분 남았다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성준수가 돈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체크카드를 내밀더니 니는 다음에 사라, 하고 무슨 몇 살 더 먹은 연상처럼 은근히 압박했다. 허. 성준수는 얼떨결에 얻어먹기만 한 동갑내기가 되어선 다음에 또 기상호와 떡볶이-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야, 돈 보내줄게. 계좌 불러. 성준수는 버스 옆자리에 앉아 무시무시한 눈으로 기상호를 쪼아 댔으나 기상호는 창문에 대가리를 기대고 자는 척하며 깡그리 무시했다. 그래, 나도 됐다. 괜히 또 기분이 상한 성준수는 절대 기상호 쪽은 쳐다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버스 기사 뒤통수만 뚫어져라 보며 내릴 때를 기다렸다.

기상호가 자는 척을 그만둔 것은 다음 정류장은 준상 아파트 입구라는 안내가 들릴 무렵이었다.

 

“오늘 수업 너무 빡셌다, 그제.”

 

태연히 말을 거는 게 어찌나 쥐어박고 싶은지 성준수는 반사적으로 버스 안 CCTV 위치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안 잔 거 다 안다.”

“니 삐졌나.”

“삐지긴 누가 삐져, 이 새끼야.”

“여 얼굴에 다 쓰여 있구만.”

“야.”

 

아, 다 왔다. 내리자. 삐뚜름하게 부르든 말든 버스가 멈추자마자 벌떡 일어선 기상호의 손이 성준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씹, 지금 뭔 짓거리……. 성준수가 처음 느끼는 오싹한 기분에 멍청히 앉아 있자 학생 안 내리나? 버스 기사가 백미러로 쳐다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성준수는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가방을 챙긴 후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기상호는 정류장에 서서 성준수가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뭐 빠트리고 나왔나. 늦었네. 의아한 투로 묻는 말에 성준수는 가방을 제대로 메지도 않고 다짜고짜 따져 댔다.

 

“야, 뭐냐?”

“와 또 승질이고.”

“또? 또? 너 이 새끼 왜 남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랄이야. 내가 개새끼냐?”

 

음. 기상호가 짤막이 고민하더니 담백하게 말했다.

 

“성격은 영락없이? 귀여운 개새끼는 아이고 싸나운 쪽.”

“뭐라고 했냐, 지금.”

 

하이고, 성깔 봐라. 입시 앞둔 고3은 털끝도 스치지 말라 카더니 진짜였네. 꼭 자기는 고3이 아닌 듯 혀를 쯧쯧 차며 혼잣말하는 꼬락서니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성준수는 하, 이 씨발. 또 입에 붙은 욕을 지껄였으나 기상호는 개미 콧물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냥 팔랑팔랑 기다란 팔다리를 움직여 몇 걸음 앞서 걷더니 지난번처럼 또 성준수가 먼저 들어가기를 종용했다.

 

“수야. 잘 들어가래이.”

 

난생처음 듣는 낯간지러운 호칭에 성준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뭔 씨, 야. 징그러우니까 그따위로 부르지 마라.”

“와. 귀엽기만 한데.”

“상호야,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좀.”

 

기상호는 욕을 처먹는데도 뭐가 좋다고 씩 웃더니 큰 손을 들어 휘휘 젓고선 돌아서 갔다. 성준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선 채 길쭉한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 이상한 비누 냄새 안 나지 않았나? 떡볶이 냄새에 묻힌 건가. 열아홉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단순하게 굴러갔다. 성준수는 딱 그 나이대답게 저돌적이었고 기상호의 표현에 따르면 ‘보기보다 순진하네’였다.

 

주말이 지나고 지상고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3학년 마지막 학기 전학생이라는 드문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기에 여러 반응 따위야 심드렁했고, 앞으로 도와줄 반장과 적당히 말을 트고 나니 다른 애들이 말을 걸든 말든 적당히 흘려 넘겨 별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성준수는 전혀 상상한 적 없는 다른 이유로 당황스러워졌다.

 

“야, 반장. 기상호는 오늘 안 왔어?”

“기상호? 그런 아는 없는디. 대체 누구고.”

 

반장인 진재유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 새끼가 분명 3학년 1반이라고 했는데 여러 번 물어봐도 그런 애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란다. 급기야 니 생긴 거랑 다르게 좀 맹한 구석이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완전히 당했다. 같은 반인 것도 구라면 같은 학교라는 것도, 기상호라는 이름도 구라 아니야? 이 미친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뭐지? 표출할 수 없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덕에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성준수의 머릿속에는 온통 기상호뿐이었다. 기상호 개새끼 넌 뒤졌어. 성준수가 책상 아래로 덜덜 다리를 떨며 교과서를 노려보기만 하자 진재유가 넌지시 덧붙였다.

 

니 뭔 귀신한테 홀린 거 아이가. 조심해라, 준수. 니는 이사 와서 잘 모르겠지만 이 동네 귀신이 그래 많다대.

 

뭔 귀신이야. 성준수는 헛소리하지 말라며 일갈했으나 속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성지수가 했던 괴담과 겹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준수는 귀신이니 천국이니 그런 걸 믿는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기상호는 처음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알고 있었다든가, 종종 무기질 같은 눈으로 쳐다본다든가, 묘하게 이곳에서 한 겹 들떠 보인다거나 하는 것들. 하지만 성준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극히 이성적인 열아홉이었으므로 그러한 신호를 모조리 무시했을 뿐이다. 그래, 귀신은 개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누가 붙잡을세라 학원으로 직행한 성준수는 당연하다는 듯 기상호부터 찾아 댔는데, 정작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수업을 10분 남기고도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성준수가 대충 아무나 붙잡아서는 야, 기상호 어디 갔어? 물어도 그게 누군데? 하는 대답만 돌아오기를 세 번째, 기어코 기상호의 출석 여부와 상관없이 강의가 시작되었다. 진짜 뭐지? 성준수는 이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뭘까, 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만큼 기상호의 존재는 이상하리만치 속을 긁는 데가 있어서 아예 무시하지도 못한 채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음에도 기상호는 여전히 학원 수업을 빼먹었고 같은 강의를 듣는 녀석들은 기상호가 누구인지 몰랐다. 이거 그거냐? 트루먼쇼? 세상이 성준수를 상대로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준수는 유감스럽게도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 개새끼 오늘도 안 오면 진짜 내 손에 뒤진다. 그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학원 강의실에 저벅저벅 들어섰는데 지상고 하복을 입은 애새끼가 보란 듯 강의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줄 이어폰을 꽂은 채 턱을 괴고서 창밖을 내다보는 꼴에, 성준수는 귀신이고 뭐고 그냥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 새끼는 지금 사람 하나를 등신 만들어 놓고 노래가 귓구멍에 들어오나? 뒷골이 땅겨 심호흡까지 하고서야 간신히 진정한 성준수는 저벅저벅 다가가서 기상호가 앉은 책상을 두 손으로 꾹 눌러 짚었다. 어, 준수 왔나.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기상호가 아는 체했으나 성준수는 인사고 뭐고 당장 기상호를 파묻기라도 할 기세로 음산하게 내뱉었다.

 

“야, 나와 봐.”

“엥, 갑자기?”

 

기상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조차 거슬려서 냅다 이어폰을 잡아당겨 빼버렸다.

 

“할 말 있으니까 나오라고.”

“아, 고백은 쪼매 이르지 않나. 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나와라, 기상호.”

 

이럴 때는 또 눈치 없이 장난질이나 하는 기상호 덕분에 성준수가 기어코 목소리를 높이자 수업을 준비하던 몇몇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기상호는 그새 장난기가 싹 가신 무감정한 눈으로 성준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성준수는 또 열이 뻗쳐선 야, 그 눈깔 뭐냐. 못된 소리가 튀어나오려는데 기상호가 의자를 뒤로 쭉 밀고 일어나며 중얼거리는 통에 자연스럽게 묻혔다.

 

“남들 앞에서는 성질 좀 죽이라니까 니도 참 어지간히 드세다. 간다, 가.”

 

이건 꼭 성준수가 잘못을 저지른 꼴이었다. 성준수는 저 동그란 뒤통수를 갈겨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곤 제법 근육이 잡힌 팔을 콱 잡아당겨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벽에 밀쳐 놓고 보니 뻔뻔한 기상호 낯짝에 열이 팍 올랐으나 쿵쿵, 이유도 모르는 채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이 더 거슬렸다.

 

“지상고 3학년 1반 기상호.”

 

나직이 읊조리자 기상호가 무언가 직감한 듯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대는 게 누가 봐도 도주로를 찾는 꼴이었다. 야, 눈깔 굴리지 말고 나 봐. 성준수는 기상호가 등지고 선 벽의 양옆을 두 팔로 꽉 틀어막았다. 기상호가 어설프게 웃으며 이거 그거 아이가, 벽 쿵? 개소리를 지껄였으나 성준수는 제 할 말만 했다.

 

“없던데? 지상고등학교 3학년 1반 기상호?”

 

끌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잘난 주둥이를 놀리던 기상호가 입을 딱 다무는데, 쾅. 씨발, 기상호. 주먹으로 벽을 치며 위협하자 기상호가 화들짝 놀라더니 우물우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이실직고했다. 그게 있잖아요. 조금 전까지 반말이나 갈기더니 몇 분 사이에 공손한 개새끼가 돼서는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저 사실 1학년이에요, 형.”

 

잉잉 죄송해여……. 동갑인 척 말 놓고 뺀질거릴 때는 언제고 냅다 무릎을 꿇고 앉더니 두 손을 싹싹 빌며 햄, 봐주세요. 형, 제발. 이러고 있다. 이게 진짜 미쳤나. 성준수는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아 씨바거 진짜!”

“죄, 죄송합니다…….”

 

형 좀 놀리고 싶어서 그랬어요. 반응이 너무 재밌어가.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이후로는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이미 학원 수업 진도를 다 따라잡아서 고3 수업반에 들어오게 됐다나 뭐라나. 어이없는 말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성준수는 바보인 줄 알았던 똥개가 알고 보니 영재였다는 전개에 미미한 배신감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귀신은 아니네. 씨발, 와중에 이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안도하다니 성씨 가문의 수치다.

 

“넌 이게 재밌냐? 사람 엿 먹이는 게?”

“그게,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는디…….”

 

우째 벌써 알았어요. 설마 반마다 찾아다닌 건 아닐 테고. 상황이 이런데도 기상호는 그딴 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내가 1반이다, 이 새끼야.”

 

씹어뱉듯 대꾸한 성준수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상호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이 사기꾼 새끼를 어떡하지. 절로 이가 빠득 갈렸고 기상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낑낑 앓아 댔다. 하아.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이가 갈렸지만 이러다가 도망이라도 치면 붙잡아 오느라 번거로워질 게 뻔했으니 성준수는 어떻게든 인내심을 끌어 올렸다.

 

“그럼 너 열일곱 살은 맞냐? 고1? 이름도 구라라고 하면 진짜 죽는다.”

“아, 아니. 진정 좀 하시고……. 일단 지상고 다니는 기상호는 맞는디요. 어, 음…….”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온갖 곳으로 굴러다니는 게 심상치 않았다. 성준수는 더 구겨질 미간도 없을 만큼 인상을 찡그린 채로 허리를 앞으로 숙이곤 한 손으로 기상호의 뺨을 터지기 직전까지 꽉 움켜쥐었다.

 

“상호야, 좋게 얘기할 때 바로 대답하자.”

“그게 제가요…… 고1, 이긴 고1이 확실한데 그 생일이 다른 아들보다 좀 빨라 갖고…….”

“그래서 몇 살이라고.”

“여, 열여섯이요…….”

 

이런 씨발. 열일곱 살이라고 해도 기가 막힐 판에 열여섯 핏덩이란다. 성준수의 얼굴에 진 그늘은 비상구 안내 문구의 형광 초록 불빛으로도 밝힐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진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자비로운 준수 형이 한 번만 봐주자. 내 이래 빌게요. 봐주자, 봐주자. 이만치 빌면 쪼매 봐줘도 될 거 같은데? 그죠?”

 

성준수는 고개를 꺾어 복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 그냥 이 새끼 죽이고 나도 죽을까. 기분이 뭐랄까. 좆같았다. 이보다 더 좆같을 수는 없을 것처럼 좆같았는데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라고 물으면 글쎄. 정확히 콕 집어서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 좆…… 씨발, 그만 좀 좆같으라고. 성준수의 손아귀 힘이 살짝 약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기상호가 또 입을 놀렸다.

 

“그, 화는 좀 풀리셨는지……. 떡볶이 사드릴게요. 아니면 초코스무디 무료 이용권도 괘안은데.”

 

그래, 고작 열여섯. 성준수보다 세 살이나 어린애였다. 여전히 눈치나 살살 보며 상황을 모면하려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귀신도 아니었고 작정해서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더 성질을 부려 봤자 성준수만 속 좁은 인간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도 괜히 기상호의 볼을 꼬집어 당겼다가 놓아준 후 바지주머니에 삐딱하게 손을 꽂은 이유는 단지 닿아 있던 손가락이 간지러워서였다.

 

“야, 너 왜 학원 안 나왔어?”

“진짜 죄송…… 네?”

 

기상호가 영 멍청한 낯을 하는 바람에 성준수는 눈썹을 찡그리며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그동안 학원 계속 빼먹었잖아.”

“아. 별일은 아니고 감기에 걸려가.”

 

혹시 제 걱정했어요? 묻는 얼굴이 그새 평소의 기상호라 성준수는 기어코 다시 그 머리통을 콱 짓눌러 버렸다.

 

“아이고, 제 머리 박살 나요. 햄은 지금 미래의 천재 기상호를 죽이고 있다 아입니까.”

“야, 그만 좀 징징대. 머리 울려.”

“머리는 내가 잡혀 있는데 왜 햄 머리가 울린대요…….”

 

무슨 블루투스도 아이고.

시끄럽다니까.

아니 내 진짜로 아프거든요.

어쩌라고.

사람이 정이 없어도 너무 없다…….

상호야.

……죄송합니다.

 

이 애새끼를 콱 물어뜯고 싶다는 심정과 달리, 기상호와의 거리감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졌지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성준수에게는 의외였다. 학년이 아예 다르니 학교에서는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음에도 같은 학원, 같은 강의실인 만큼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성준수는 기상호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면 당겼지 고작 그런 이유로 먼저 피해 다닐 만큼 유약한 인성 또한 아니었다. 그렇게 성준수와 기상호는 자연스럽게 월화수목금은 학원에서 토일은 독서실에서 붙어 다녔다. 둘 중 누구도 먼저 돌아서지 않았으니 암묵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기상호는 거짓말을 들키고 나서는 며칠 동안 알아서 기며 성준수의 비위를 맞췄으나, 성준수가 더는 그 일을 언급하지 않으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서는 슬슬 헛소리를 입에 달고 지냈다.

 

그거 아세요, 햄. 사실 저는 먼 우주에서 왔거든요. 그래서 정체를 들키면 곤란하다 아입니까. 이건 준수햄만 알고 계세요.

뭔, 씨바거. 내가 그 이상한 애니인지 만화인지 좀 그만 보랬지.

아아아, 저는 햄의…… 미래를 알고 있…….

야, 닥치고 문제나 풀어.

넵.

 

기상호와의 일상은 대개 비슷하게 흘러갔는데도 지루하다거나 귀찮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학원에서 만나 같이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이면 같이 음료수를 뽑아 마시거나 줄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낀 채 뭔 일본 애니 노래나 들었다. 수업이 끝나 밤이 늦으면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거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버스를 탔다. 기상호는 매번 성준수를 아파트 단지 안까지 데려다줬으며 그것으로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래서 늘 마지막까지 기상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서 있는 쪽은 성준수였다.

 

아니 씨, 이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원래 사내놈들끼리 이렇게 지내는 건가? 굳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뭐 이어폰을 나눠서 끼고 가끔은 손등을 쿡쿡 찔러 가며. 마시던 음료를 굳이 한 입 마셔 보겠다며 가져가 입을 댄 채로 마시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나선 등에 달라붙어 칭얼거리고? 형이라는 호칭이 햄-성준수에게는 꽤 낯간지러웠다-으로 자연스레 바뀌었으나 성준수는 여전히 기상호를 야, 기상호라고 불렀는데도 미묘하게 좁혀진 감정적 거리에 절로 위화감이 들었다.

 

원체 남에게 무심하고 독불장군처럼 앞만 바라보던 성준수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것은 9월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습관처럼 같이 버스를 타러 가던 중이었는데 비는 며칠째 내린다, 아니다로 일기예보도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했다. 습도는 여전히 저녁만 되면 치솟았으며 낮 동안 예열된 아스팔트의 열기가 고스란히 올라와 고작 10분을 걷는 데에도 엄청난 불쾌함이 휘몰아쳤다. 바로 옆에서 발을 맞춰 걷는 기상호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본 것은 아주 찰나의 우연이었다. 기상호는 무슨 생각 중이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선을 반쯤 내리깐 채 성준수가 야, 하고 부를 때까지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꼭 고장이 난 인형처럼.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불안해 보였는지 성준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기상호의 목덜미를 잡아 눌렀다.

아, 성준수 갑자기 와 이라노. 기상호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져서 짓누르듯 붙잡았던 탄탄한 목을 살살 쓸어내렸다. 더위 탓인지 기상호의 목은 살짝 젖어서 성준수의 손바닥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그게 또 썩 나쁘진 않아 성준수는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뭔 생각을 종일 처하냐, 넌. 그리고 또 말 까네? 아예 기어올라라? 어?”

“아, 죄송요. 오늘 배운 게 쫌 어렵더라고요.”

 

기상호는 그새 유순해져선 근데 제 목은 왜 그렇게 만지시는지, 변태 같구로. 성준수를 이상한 놈처럼 쳐다보며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빼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햄햄, 근데 뭐 운동은 안 해요? 농구 같은 거요. 햄 키도 커서 꽤 잘 어울린다 아니에요.”

“별로. 아무 생각 없는데. 하고 싶냐?”

“그건 아이고 그냥 뭐.”

 

이 햄은 고독한 늑대, 운동 따윈 관심 없는 타고난 근육 범생이 컨셉이구나. 그딴 소리를 주절거리길래 뭔 헛소리냐며 목덜미에서 손을 떼 그 주둥이를 꽉 잡아당겼더니, 금세 아 죄송해여! 어제 본 애니에서 나온 대사예여, 햄! 하고 질질 짰다. 사실 입을 잡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웅얼거릴 뿐이었다지만, 성준수는 기상호 번역기로 대충 알아들었다. 아프요, 햄. 우는 소리에 그제야 입술을 놓아주니 기상호가 억지 눈물을 짜 대다가 또 물었다.

 

“맞다. 햄, 내일 토요일인데 독서실 하루 쉬고 놀러 오실래요.”

“뭐? 어딜?”

“예? 당연히 기상호의 러브하우스? 는 농담이고 집이요, 집. 같이 영화나 볼까 하고요.”

 

뜬금없이 집에 오라니 기상호다우면서도 또 기상호답지 않은 제안이라 성준수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러브하우스 어쩌고 하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집, 영화 그것만이 성준수가 알아들은 전부였다. 햄, 와 안 와요. 기상호가 몇 걸음 더 앞에 서서 가더니 몸을 비스듬히 돌려 성준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처럼 어디선가 뜨뜻한 바람이 불어와 기상호의 뻗친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성준수는 오랜만에 거슬리는 비누 향을 맡았다.

 

“어, 갈게.”

 

대답은 다소 성급하게 나왔으나 성준수가 아니라면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역시나 기상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여상히 그럼 오기 전에 연락해 주세요, 하고 버스 곧 오겠다며 빨리 오라는 말이나 덧붙였다. 성준수는 약 3초간 멈춰 서 있다가 발을 떼어냈다. 집에 놀러 가는 게 뭐 대수냐.

 

는 씨발, 왜 갑자기 집에 오라고 지랄이지?

호기롭게 가겠다고 한 게 바로 어젯밤이었는데 성준수는 그날 늦은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가뜩이나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 수면 부족으로 새하얗게 뜨니 귀신 저리가라였다. 오죽하면 성지수가 성준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까지 쳤을까. 하, 씨. 개같네. 어쨌거나 고작 잠을 좀 못 잤다는 이유로 약속을 파투 낼 수도 없으니 성준수는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기상호의 집으로 향했다. 막상 벨을 누르려니 내키지 않는 탓에 기상호네 현관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는지 모르겠다. 벨을 누르려고 하니 손가락 끝이 유난히 경직된 기분에 몇 번 굽혔다 펴고 나서야 겨우 벨을 꾹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세여, 하는 질문과 나. 하는 대답이 번갈아 텅 빈 복도를 울리고 문이 열렸다. 곧 편안한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기상호가 당황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니 와 이래 일찍 왔어요?”

“점심 먹자고 일찍 오라며.”

“그게 이래 일찍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오기 전에 연락 좀 달라했잖아요.”

 

뭐? 성준수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정오는 벌써 지난 줄 알았는데 아직 오전 10시. 분명히 집을 나오기 전 시계를 봤을 때는 오후 1시쯤이었는데 어쩌다 3시간이나 착각했는지 당황스러웠다. 숫자 1만 보고 나머지는 그냥 시선 저편으로 밀어 버린 건가? 이래서 사람은 잠을 제대로 자야 한다. 이게 다 기상호 때문이다.

 

“……미안하다, 됐냐?”

 

차마 잠을 못 자서 시간을 착각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어서, 대충 사과했더니 기상호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실실 웃었다.

 

“알면 됐고요.”

 

어쨌든 일단 들어오세요. 이래 빨리 올 줄 몰라가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어쩔 수 없죠. 성준수는 기상호가 또 주절주절 뭐라고 하는 걸 무시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 성준수가 사는 아파트보다는 확실히 좁았다. 성준수는 슬쩍 내부를 훑어보고는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기상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족들은?”

“사정이 있어가 잠깐 저 혼자 지내요. 햄, 아직 식전이에요?”

“어. 근데 됐어. 배 안 고파. 뭐 영화 보자고 하지 않았냐?”

“그럼 식빵이라도 하나 구울게요. 잼 발라 드세요. 공복이 오래되면 근손실 온다 카니까.”

 

야, 됐다고. 그러나 기상호는 성준수의 거절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기어코 토스터를 돌렸다. 이럴 땐 말 더럽게 안 듣네. 성준수가 어색하게 거실 소파에 앉은 채 폰만 들여다보는데 기상호가 곧 작은 쟁반에 딸기잼과 식빵 그리고 오렌지주스까지 야무지게 담아 들고 오더니 잠시만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성준수는 괜히 목이 타 오렌지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사이 노트북을 들고 돌아온 기상호가 소파 아래에 앉더니 능숙하게 넷플릭스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 하며 성준수를 돌아보고는.

 

“근데 생각해 보이까는 무슨 영화 보는지 말을 안 했네요, 제가.”

“아무거나 상관없어.”

 

성준수는 컵을 쟁반 위에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가 기상호 옆에 앉았다. 소파를 등받이로 쓰는 한국인답게 나란히 앉은 꼴이 제법 자연스러워 또 속이 울렁거리고 기상호의 비누 향이 거슬리기 시작하는데 기상호가 사뭇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진짜죠. 나중에 딴말하시믄 안 됩니다.”

“이 새끼가 속고만 살았나. 틀기나 해.”

 

어차피 이 상황에서 뭘 보든지 집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될 게 뻔했으니 상관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러닝타임 1시간 30분의 지옥을 겪지 않았더라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그랬을 것이다. 기상호 이거 완전 또라이다. 기상호가 고른 영화는 B급 공포 영화였는데 성준수 체감상 귀신이 종류별로 3초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성준수는 씨발, 씨발, 씨발만 되뇌었고 기상호는 아 햄, 저 집중하잖아요. 타박하다가도 그냥 다른 거 볼까요? 물었고 성준수는 그 잘난 자존심에 됐어, 그냥 봐. 이랬다. 왜 그랬지, 등신같이. 겨우겨우 엔딩크레딧이 올라오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준수햄 무서운 거 어지간히도 못 보시네요.”

“씨발, 아니라고.”

“지금 성준수 얼굴 하얗게 질렸는디?”

“내 얼굴 원래 하얀데?”

“성준수 자아도취 모드 ON.”

“그만 나대라, 기상호.”

 

사나운 눈으로 흘기며 겁을 줬는데도 기상호는 웃기 바빴다. 이 새낀 뭐가 이렇게 즐거운 거야. 웃을 때마다 휘어지는 눈, 드러난 목선과 손목, 말려 올라간 탓에 살짝 드러난 허벅지 같은 것들이 그제야 성준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뭔,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햄 괜찮아요? 제가 다른 거 보자 했잖아요. 하여튼 고집은 세계 1등일 듯.”

 

그러면서 슬쩍 동그란 머리통을 성준수의 어깨에 비비는데 아, 씨바거. 제대로 좆됐다. 성준수는 아랫배가 뻐근한, 정말이지 느끼고 싶지 않았던 감각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벌떡 일어났다. 전신의 피가 몽땅 아래로 쏠린 것 같았다.

 

“야, 나 화장실 좀.”

“저 옆으로 가면 화장실 있어요.”

 

성준수는 대답을 듣자마자 화장실로 내빼는 짓을 하고 말았다. 아이고,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기상호의 목소리가 뒤따라왔으나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어 이를 악물고 화장실 문을 잠글 뿐이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은 채 신체적 문제를 가라앉히는 그 시간이 꼭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 이 씨발, 진짜 가지가지 지랄이네. 자괴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성준수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변기 물을 내리고 꽤 오래도록 손을 씻었다. 묻은 것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젖은 손으로 앞머리를 정돈하고 나오니 기상호가 소파에 드러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하도 오래 걸려가 뭐 배탈이라 났나 했네요. 좀 괘안아요?”

“어. 영화 다 봤으니까 간다.”

 

성준수는 이 새끼는 왜 오늘 반바지를 입고 지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으나 의외로 이성은 성준수의 의지 그대로 올곧게 서 있었다. 다만 계속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음이 삐, 삐 하도 시끄럽게 울어 대는 통에 제대로 된 말이 안 나왔다. 기상호가 눈치도 없이 곧장 뒤따라 나왔다.

 

“벌써요? 점심은 먹지도 않았잖아요.”

“피곤해. 다음에 먹자.”

 

짤막이 대꾸한 성준수는 혹여나 기상호와 손가락 끝이라도 스칠까 봐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 도어락을 눌러 열었다. 문도 좆같이 늦게 열리네.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고 문손잡이를 잡자 기상호가 또 불러 세웠다.

 

“준수햄.”

“왜.”

“내일 독서실에서 봐요.”

 

성준수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다만 문이 닫히고 도어락 잠기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운 채 오만 가지 생각을 하는 바람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말도 아니었을 텐데 그게 뭐라고. 성준수에게는 지금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게 뭐 뒤늦은 사춘기 그런 건가? 성준수는 맹세코 지금껏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 게이라고 확신하기에는 지금껏 여자든 남자든 관심이 없었으니 비교할 경험이 전무했다. 그럼 왜 하필 그 기상호에게 반응하는가? 성준수는 복잡하게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답은 금방 나왔다.

 

내가 그 똥개 새끼를 좋아하니까, 씨발.

 

솔직히 말해 시작점부터 유별난 관계에 어느 순간 풀어져 옆을 내어 준 것은 사실이었다. 기상호가 곁에 두고 있다 보면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대상-실실 웃으며 햄, 햄 불러 대고 수시로 곁에 와 꼬리를 흔들어 댄 것 포함-이었다는 점이 성준수의 패착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정했다고 해서 그게 본격적인 첫사랑 이루기로 진행되는 건 또 아니었다. 성준수는 일요일부터 기상호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어로 나열하자면 단순했다.

고3, 3살 연하, 똥개. 어차피 대학 가면 만나지 못할 테니 마음이 제멋대로 커지기 전에 정리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성준수는 기상호에게 앞으로 나 혼자 공부한다. 딱 그 정도의 메시지만 보낸 뒤 할 수 있는 만큼 기상호를 피해 다녔다. 같은 강의실인 것까지는 어쩔 수 없어 최대한 늦게 가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쉬는 시간에는 일부러 자리를 비우고 나갔다. 그래서 기상호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기껏 쥐어짜 보낸 메시지에 답장 또한 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적당히 알아들었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그렇게 대놓고 피해 다닌 지 며칠쯤 됐을 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바로 기상호가 나타난 꿈이었다. 기상호는 흰색 셔츠를 입고 햇볕 아래에 서 있었는데 바람이 살살 불어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성준수는 그 장면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기상호는 성준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 기상호가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한 듯 환하게 웃었다. 뭐야, 기상호. 너 대체 누굴 보고……. 성준수는 전신을 짓누르는 불쾌감에 느릿느릿 날아가는 미소의 행방을 따라 시선을 굴렸다. 그리고 아, 씹. 성준수가 그곳에 있었다. 기상호가 바라보는 방향에 또 다른 성준수가.

기이한 기시감에 정신이 나갈 것 같던 그 순간 성준수는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전신이 축축했고 머리카락은 비라도 맞은 듯 힘없이 늘어져 얼굴을 덮었다. 이 개같은 꿈은 대체 뭐지? 꿈 내용이 신경 쓰이는 건 둘째치고 고작 상상 속 기상호의 웃는 얼굴을 보고 또 반응한 몸뚱이가 지독해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아, 진짜 다 찢어 죽이고 싶다.

하필 그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상호를 피해 다니고 나서 처음 맞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독서실에 가기에는 여러모로 손해가 더 커서 성준수는 얌전히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성지수는 이런 날씨에도 굳이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부모님은 서울 출장을 떠난 지 사흘째였으니 빗소리만 들리는 넓은 집에 성준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창문을 닫았는데도 빗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쏟아지는 듯해 좀처럼 집중을 못 하고 인상을 찡그린 채 책상머리에서 시간만 보내던 중.

 

저 햄네 집 앞이에요.

 

타이밍 맞게 들여다본 액정 화면에 그 메시지 하나만이 깜빡깜빡. 성준수는 이게 무슨 개소리야, 생각하다가 퍼뜩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섰다. 이 새끼가 진짜. 이렇게 비가 오는데 여기까지 왔다고? 왜? 가뜩이나 꿈 때문에 싱숭생숭한 상태인데 왜 하필 지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현관 벨이 울렸고 잠시 멈칫하던 성준수는 이내 휘적휘적 걸어가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갑자기 찾아와가 죄송해요, 준수햄.”

 

야, 이 미친 새끼. 어디서 비를 이렇게 맞고 왔는지 기상호의 입술은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성준수는 그 꼬라지에 그동안 피해 다녔던 것조차 잊은 채 잔소리를 퍼부으려다가 그만두고 서둘러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 있냐? 성준수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그때 지잉, 진동이 울리더니 성지수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오빠 우산 좀 갖다줘ㅠㅠ 미안 아이스크림 쏠게!!! 정류장에서 내릴 거야 30분 뒤!

 

“하.”

 

기상호는 기껏 도망쳐 다닌 보람도 없이 갑자기 불쑥 찾아오고, 이 날씨에 기어코 밖으로 기어나간 성지수는 들고 나간 우산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또 데리러 오란다. 어린 새끼들이 쌍으로 성준수를 괴롭히니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에 불이 붙었다.

 

“야, 왜 왔냐?”

 

날카롭게 물었는데도 기상호는 별말 없이 성준수의 손목을 붙들었다.

 

“저 오늘 할 말이 있어가 왔어요.”

“할 말이고 뭐고 일단 씻어. 또라이냐, 너. 우산도 없이 어딜 싸돌아다닌 거야?”

 

성준수는 미간을 좁힌 채 무작정 기상호를 욕실로 떠밀었다. 젖은 몸에서 미미한 열기가 느껴져 그게 또 기분을 이상한 쪽으로 비틀었다. 기상호는 정말 할 말이 잊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말았다. 씻고 나와. 성준수가 기어코 욕실 문까지 쾅 닫아 주자 몇 초 후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준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고 서둘러 서랍에서 제 티셔츠와 바지를 꺼냈다. 속옷, 까지는 좀 그렇겠지. 왜 이딴 고민을 처하는 거냐. 성준수는 신경질적으로 서랍을 닫고 욕실 앞에 옷을 가져다 놓은 후 우유를 데웠다. 진짜 애새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우유가 너무 뜨겁지 않은지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혀끝에 대 보는데 달칵,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뒤이어 기상호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성준수는 식탁 의자에 앉으라는 뜻으로 눈짓하곤 그 앞에 우유를 내려놓았다.

 

“마셔.”

 

그래서 그 할 말이 뭐길래 비까지 처맞으면서 오냐. 기상호는 머그잔을 든 채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성준수는 당장 말 안 하냐고 닦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 참았다. 그야 지금 기상호는 평소와 어딘가 묘하게 달랐으니까. 성준수가 애꿎은 손가락만 식탁 위에 탁, 탁 두드려 대는 동안에도 기상호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야, 기상호. 결국 또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성준수였다. 그 눈치를 살피던 기상호는 그제야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넌지시 입을 열었다.

 

“햄 사실 제가요, 미래에서 온 기상호거든요.”

 

시작부터 그 뭔 허황한 이야기라 진지하게 들어보려고 했던 성준수가 단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야, 씨발. 너 그 이상한 애니인지 만화인지 좀 그만 봐라. 이젠 현실 비현실 구분도 못 하냐?”

“아, 진짜라니까요.”

 

와 이래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있지 않아요? 내가 아는 준수햄이라면 분명 의식했을 텐디. 기상호가 드물게 초조한 눈을 내보였다.

 

“어쨌든 좀 들어봐요, 햄. 부탁할게요.”

“나 지금 나가야 하니까 우유 마시고 가라.”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어 몸을 일으키자 기상호 또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잠시만요. 어디 가시려고요? 성준수는 기상호가 붙잡기도 전에 우산을 두 개 챙겨서 현관문을 열었다. 준수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러 대는 건지. 성준수는 기상호와 둘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조급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비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쏟아졌고 시야가 흐린 탓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또 길을 잃었을 듯했다. 아, 씨바거. 날씨 미쳤네. 차라리 비가 오라고 했던 얼마 전의 성준수는 그새 사라졌다. 맞은편에서 내릴 테니 분명 저쪽일 거다.

 

“성준수!”

 

성준수가 신호등 없는 짧은 횡단보도를 향해 막 한 발 내디뎠을 때, 기상호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기상호가 우산도 쓰지 않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 너머에서도 그 얼굴이 얼마나 창백하게 질렸는지, 성준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기상호를 기다렸다. 너 미쳤어? 기껏 옷 갈아입히고 우유까지 먹여 놨더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성준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던 그 순간.

 

빠앙―!!!

 

성준수의 바로 뒤로 커다란 트럭이 지나갔다. 들고 있던 우산을 건드렸는지 우산이 부서진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트럭은 브레이크가 고장이라도 난 건지 전혀 속도를 줄이지 못하다가 거칠게 비틀어지더니 쾅. 그대로 벽에 들이박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신고하라고 외치거나, 갑자기 난리가 벌어졌다. 운전 기사가 어떻게 됐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고, 성준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만약 기상호가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그대로 횡단보도를 건넜다면 분명 트럭에 치였을 것이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 날뛰었다.

 

“햄, 준수햄!”

 

성준수! 차가운 손이 성준수를 인도로 잡아당겼다. 기상호가 헐떡이며 두 손으로 성준수의 얼굴을 붙잡았다.

 

“괜찮, 괜찮아요?”

“야, 너…….”

 

성준수는 거기까지만 간신히 내뱉고 말을 잇지 못했다. 기상호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울지 마, 왜 울어. 누가 죽기라도 했냐. 성준수는 잘게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았다. 빗소리보다 더 소란한 것은 성준수였고,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준수보다 더 놀라 질질 짜는 건 기상호였다. 이제는 놀라서 심장이 뛰는지 품에 기상호를 안고 있어서 뛰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기상호. 야, 나 봐.”

“햄, 잠시만요. 일단 집에 가요. 여기서는 안 되니까.”

 

훌쩍거리면서도 할 말은 또박또박하는 꼴이 역시 기상호다웠다. 이 사고 현장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으니 성준수는 별 저항 없이 기상호의 손에 끌려갔다. 두 번째로 들르는 기상호의 집은 여전히 조용했고 어딘가 쓸쓸한 감상을 자아냈다. 둘은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식탁에 마주 앉아 꽤 오랜 시간 침묵했다. 기상호는 고개를 숙인 채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성준수는 말을 고르느라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준수햄.”

“아까 했던 얘기 진짜야?”

 

아 씨발. 동시에 말을 꺼내는 바람에 기상호가 부르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성준수가 반사적으로 욕을 짓이기며 제 이마를 짚었다. 너 먼저 말해. 그러자 기상호가 눈을 들어 빤히 쳐다보는데 눈물은 멈췄으나 눈가가 여전히 발갰다.

 

“그러니까요. 저는…… 준수햄을 살리고 싶어가 왔어요.”

 

조금 전의 일이 없었다면 그딴 개소리를 믿으라고? 했겠지만, 타이밍과 성준수의 촉이 알려주고 있었다. 아까 그 횡단보도에서의 사고는 분명 기상호가 막은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찝찝했고 그 사고 이전에 기상호의 말이라든가, 행동이 성준수를 외면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성준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오늘, 이 시간, 이 날씨. 저는 이미 한 번 겪었거든요.”

“그건 내가…….”

“제가 있던 시간에는 성준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상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이 말을 몇 번은 연습한 사람처럼 그토록 태연해 보였으나 흔들리는 옅은 색의 눈동자라든가 떨리는 입꼬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성준수는 손으로 제 눈을 꾹 눌렀다. 이게 무슨 SF 영화도 아니고, 상호야.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요. 근데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하거든요.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고…….”

“……뭐?”

“그, 이게 영원한 게 아이고 시간제한이 있는 모드랄까. 딱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어요.”

 

이후로 기상호는 평행세계의 자기가 성공한 과학자고 지금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어른이며 성준수가 아는 기상호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고 덧붙였다. 그 말투며 목소리가 어찌나 무덤덤하고 차분한지 성준수는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참아냈다. 야. 결국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기상호의 말을 뚝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다.

 

“너만 아는 단어로 설명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마이 복잡하죠, 이게. 기상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 볼을 긁적이더니 재차 설명했다.

 

“그럼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말할게요. 저는 이제 이 시간에서 떠나야 해요. 지금도 이래저래 너무 많이 질질 끈 상태라…….”

 

이게 정확한 시간을 잡는 게 쪼까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성공했으니까……. 기상호는 가끔 말을 늘려 댔고 그러면서 성준수의 눈치를 살피거나 괜히 제 입술을 잡아 뜯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준수햄, 이해했어요? 그렇게 묻는 억양은 분명 익숙한 사투리였으나 내뱉는 말은 평소와 아예 결이 달라 성준수만 기분이 저 아래로 침몰할 듯했다.

 

귀신한테 홀리면 자기도 모르는 곳에 들어가기도 한대.

기상호? 그런 아는 없는디. 대체 누구고.

이 동네에 귀신이 그래 많다대.

그게 누군데?

 

내내 위화감이 들었던 일들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 이 씨발. 성준수는 입을 꽉 다문 채 두어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그럼 너 귀신, 뭐 그런 거냐?”

“네? 아, 그래 생각할 수도 있구나.”

 

기상호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귀신은 아이고요. 그냥 다른 세계의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 그래 생각하면 좀 쉬울 듯요. 성준수는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 모른다고 하던데.”

“그건 동기화에 한계가 있어 갖고 당신한테만 기억되도록 설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즉 저를 인지할 수는 있는데 돌아서면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성준수는 입을 딱 다물었다. 나만, 오직 나만이 이 기상호를 기억한다. 그제야 하나둘 조각이 들어맞는다. 늘 머무르는 공간에서 한 겹 들떠 보이던 기상호. 학원에 있을 때는 다들 태연히 인사를 주고받았는데도 막상 기상호의 이름을 대면 그게 누구냐며 되묻던 아이들.

 

“왜 나는, 왜 나만 널 기억하게 했는데?”

 

기상호는 애매하게 미소 지었으나 대답하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건, 내가 준수햄을 좋아하니까요.”

“뭔…….”

“잊지 않고 기억해 줬으면 해서요. 제가 쫌 이기적이라.”

 

이토록 멋도 없는 고백이 어처구니없는 것과는 별개로 또 그 이상한 비누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상호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서 나는 건가? 아니면 지금 내 정신이 이상해서 실재하지도 않는 기상호를 보는 건 아니고? 그런데도 성준수는 몰아치는 혼란 끝에서 기어코 가장 해결하고 싶었던 의문을 꺼내는 것으로 모든 가정을 외면했다.

 

“왜 여기로 온 건데?”

“…….”

“고작 나 때문은 아닐 거 아니야.”

 

아니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기상호의 유일한 이유가 되고 싶은 양가감정이 성준수를 내리눌렀다. 차라리 이게 꿈이라서 그만 깨고 싶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성준수를 살리고 싶어가 왔다고. 진짜로 저한테는 그게 전부였어요.”

 

이래저래 설명하기 모호한 듯 두루뭉술한 설명만 이어질 뿐이었다. 햄, 마블 영화 같은 거 봤어요? 좀 이해가 갈라나 모르겠네. 저도 이렇게까지 다 말할 계획은 없었거든요. 죄송합니다. 기상호는 어느덧 피로해졌는지 제 눈가를 연신 문질러 댔다. 성준수 또한 유례없는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이만큼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성준수여서, 눈앞의 상대가 기상호여서.

 

“네가 아는 성준수는 어떻게 됐어.”

“아까 말했지만, 제 시간대에 없다는 것밖에는 말 못해요. 죄송합니다.”

 

기상호는 이번에도 애매한 대답만 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아,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기상호는 기상호가 아니다. 기상호는 이곳에 없다. 기상호는 곧…… 떠난다. 그중 마지막이 최악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헛짓하며 도망 다니지 않았을 텐데. 그 일주일이 아쉬워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준수햄, 준수햄. 기상호가 또 성준수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야, 기상호.”

“네.”

“네가 아는 성준수도 너 좋아했어?”

“어…….”

“너도 나 좋아한다며. 왜 그딴 반응이야?”

 

당황한 듯 제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기만 하던 기상호가 성준수의 닦달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성준수는 어차피 답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간에서든, 어느 미래에서든, 과거에서든 성준수는 기상호를.

 

“떠나면, 못 돌아오는 거냐?”

 

성준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기상호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고작 성준수 한 번 살리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고작 마주 앉아 떡볶이나 처먹고 공부나 하고 오타쿠 노래나 들으며 보낸 시간이 아쉽지도 않나? 성준수의 마음과 달리 기상호는 빌어먹게도 침착했다.

 

“제가 어떻게든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줄래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면서 도대체 어떻게 돌아오겠다는 건데. 씨발, 네가 그렇게 대단해? 뭐가 그렇게 쉬워? 성준수는 기상호의 멱살을 붙잡아 닦달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못 오면.”

 

성준수에게 어리광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거를 수도 없이 저절로 말이 튀어나와 영락없이 열아홉 어린애가 되었다. 한 박자 늦게야 입을 다물었는데 기상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도리어 속을 읽기 힘든 눈으로 성준수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뭐, 씨바거. 성준수가 눈을 부라리자 기상호가 사뭇 심각한 투로 툭 내뱉었다.

 

“기억이라도 지워줄까요. 그럼 기다릴 필요도 없을 텐데.”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됐으니까…….”

 

나 늙어 뒤지기 전에 돌아오기나 해, 이 새끼야. 성준수가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상호의 몸이 조금 전부터 흐릿해진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흡수되어 영영 사라져버릴 것처럼. 이래서야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성준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모든 감정이 담긴 한숨이 흘러나오고 따뜻한 손이 성준수의 손등을 건드렸다.

 

“준수햄, 손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씨발 이 개새끼야. 잡아.”

“이거 완전 계탔다 아이가. 그 성준수가 손도 다 잡아주고.”

 

기상호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꼭 붙잡더니 사이사이로 온기를 채워 넣는 동안에도 성준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장난이나 치는 기상호의 손이,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두려운 듯 덜덜 떨리고 있어서. 몇 살이나 더 처먹었다면서 애새끼 같기는. 성준수는 숨을 삼키며 손에 힘을 꽉 줘 마주 잡았다. 빗소리가 도통 그치질 않고 창문을, 성준수를, 기상호를 두들겨 댔다.

 

“준수햄, 이리 와요.”

 

기상호가 성준수의 손을 잡은 채 일어나더니 침대로 이끌었다. 성준수는 또 그걸 거부 안 하고 따라갔다. 잠깐 눈만 붙이고 싶어 갖고 괜찮죠. 사실 저도 좀 떨리거든요. 애초에 성준수의 대답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굳이 질문을 던지더니 뻣뻣하게 굳은 성준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성준수는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몰아친 진실에 제정신이 아닌데 기상호는? 너는 지금 어떤 심정인데? 성준수는 숱한 질문을 입 안에서만 되뇌며 눈을 감았다.

 

“햄, 자요?”

“……아니.”

“있잖아요. 내 진짜 햄 여기 두고 가기 싫거든요. 근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어서.”

 

기상호가 그제야 어른의 얼굴을 내려놓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성준수는 목이 꽉 메는 느낌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알아.”

 

아니, 사실은 하나도 몰라. 씨발. 난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인데 너는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았다는 게 믿어지겠냐고. 고작 나 하나 살려 보겠다고 무슨 영화 주인공처럼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어떻게 쉽게 믿어. 그러나 그 모든 개연성이 그저 기상호였다. 기상호니까, 기상호라서. 성준수는 입을 다문 채 기상호를 꽉 껴안았다. 분명 둘의 체격은 비슷한데도 허공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공허했다.

 

그렇게 끌어안고 누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기상호가 그새 시간 다 됐네요. 중얼거리곤 부스스 일어나더니 배웅해 달라며 성준수의 손을 현관 밖으로, 그리고 아파트 밖으로 끌어당겼다. 그 어떠한 저항도 없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성준수는 이제는 반투명해진 기상호를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 정 보기 힘들면 안 보셔도 되니까요. 기상호는 침착하게 말하더니 잠깐 하늘로 시선을 옮겼고, 성준수는 그 무기질적인 얼굴을 보는 게 진짜로 버거워져서 그만 등을 돌리고 섰다. 씨발 이게 진짜 꿈이 아니라고? 그냥 지독한 악몽 아니야? 요 며칠 기상호가 계속 꿈에 나왔던 걸 보면 아예 가능성 없는 얘기도 아닌…….

 

“성준수.”

 

고작 이름 세 글자에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기상호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순간 멀미라도 나는 듯 울렁울렁, 성준수는 기어코 고개를 돌려 기상호를 바라보았다. 기상호는 한여름의 소나기 아래에서도 그토록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기상호가 있는 공간만 투명한 막이 처진 듯 깨끗했다. 언제 비에 젖었느냐는 듯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새하얀 셔츠가 팔랑팔랑,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일렁일렁, 코끝에 닿는 비누 향기가 살랑살랑. 성준수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부풀 때쯤 기상호가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졌다. 아, 슬슬 동기화 풀린다. 그 말처럼 기상호는 꼭 망가진 프로그램 일부처럼 지직지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낯선 세상의 파편을 보는 기분이 들어 성준수가 눈만 홉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기상호는 흐려지고 금이 간 손으로 성준수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속닥댔다. 햄, 내 이제 갈게요.

 

“곧 다시 만나요.”

 

이번에는 늦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 성준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여름의 소리를 들었다. 시야가 아주 짧게 점멸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가가 빨개진 기상호는 온데간데없었다.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단체로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 멈췄던 매미 소리가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어 댔다. 진짜 갔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져서 성준수는 짜증스럽게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씨바거. 늦기만 해봐라. 성준수의 여름이 끝났다.

 

 

+++

 

기록적인 폭염, 지구온난화, 어디의 빙하가 녹았으며 그 안에서 나온 고대의 무엇인가. 벌써 몇 년째 지독하게 이어진 이야기가 이제는 별 감흥도 주지 못했다. 하, 날씨 한 번 개같네. 대학병원 인턴 성준수는 바빠도 너무 바쁜 일상이 오히려 달가웠다. 매년 여름이 될 때마다 기다리던 이가 돌아오지 않아 느껴야 하는, 그에게 도통 어울리지 않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러나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옥상에서 쏟아지는 땡볕에서 그는 또다시 지독한 공허를 체감했다. 씨발. 늦지 않게 온다며 기상호 이 개새끼야. 짜증스레 미간을 찡그린 채 그래, 일이나 하자. 돌아서는 그때.

 

“성준수.”

 

네가 나에게 다시 여름의 소리를 몰고 온다. 고막을 따갑게 채우던 매미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춘다. 아. 성준수는 멈춘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헤어질 때보다 훌쩍 성숙해진 낯짝의, 성준수의 여름이. 성준수는 메이는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달려갔다. 지금 끌어안지 않으면 또 마음대로 사라져서 이번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목덜미에 무심코 코를 비볐다. 그 기분 나쁜 비누 향이 나지 않아 성준수는 이 기상호가 진짜임을 알아차렸다. 등을 감싸 토닥이는 손의 온기가,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그냥 돌아온 네가 너무 벅차서.

 

이거이거, 성준수. 내 마이 기다렸어요?

말 까지 마라, 쥐어박기 전에.

그때도 솔직히 내가 나이 더 많았다 아니에요.

너 저번에 이름 부르고 튀었잖아, 이 새끼야.

하이고 그걸 아직도 속에 담아 두고 있었어요? 이래 속 좁은 남자를 누가 데리고 살지.

까분다, 또.

성준수.

야, 말 까지 말…….

뽀뽀해도 돼요?

……그런 건 좀 묻지 말고 해.

햄 억수로 좋은 냄새 나네요. 다 컸다고 고새 향수 뿌렸납네. 어, 여기 병원 아인가? 와 병원에…….

상호야, 닥치고 뽀뽀나 해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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