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하루는 대개 과학적 근거 없이 돌아가고

생일도 마찬가지다.

502 by 티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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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시마

*시마 생일 기념 축하

*영화 ‘라스트마일’ 개봉 전이라… 날조로 40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올해는 웬일로 조용했다.

차창 밖에 시간당 강우량 7mm의 비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구름이 두껍고 짙어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이부키가 옆에서 핸들에 기댄 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니, 시마도 그냥 창밖이나 구경하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하나 있는 파트너가 답지 않게 조용한 탓에 빗소리가 유난스럽게 들렸다. 역시 비가 와서 그런가. 며칠 동안 그렇게 좋아하는 공원 달리기도 못했고, 노래를 부르던 휴가계도 못 내고 근무중이라 시무룩할 만도 했다. 시마는 그렇게 대충 추리하다 1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는 폭우가 쏟아졌지만 그래도 시끄러웠다. 아마 당직이 끝난 직후였을 것이다. 서른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며 이부키가 달려들었고, 보고서를 쓰고 있던 진바가 이부키에게서 넘겨받았을 케이크를 꺼내왔다. 아침부터 다 같이 케이크를 퍼먹고선 입이 달다며 그 길로 맥주를 마시러 떠났던 날. 그때가 벌써 네 번째였다. 자정에도 조용하길래 드디어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결국 축하를 받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마흔 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이부키는 서른여섯부터 서른아홉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축하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양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피하려고 해도 좀처럼 쉽지 않았다. 저 머리통을 들여다보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이던가. 한숨을 내쉰 그는 지난 5년을 반추했다.

서른여섯 번째는 휴일이었다. 자정이 되자마자 이부키가 메시지를 보내더니 아침 8시에 운동복 차림으로 찾아와 잠도 덜 깬 제 머리에 고깔을 씌웠다. 생일 축하한다는 한마디가 복도에 울려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발로 걷어차 쫓아내려 했지만 러닝하고 온 이부키를 갓 일어난 자신이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헛발질로 끝났고, 그가 사들고 온 정식을 식탁에 마주앉아 같이 비웠다. 일반적인 도시락이 아닌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구성이라 미리 예약하지 않고서는 못 살 밥이었다. 정성을 생각해 싹싹 비웠다. 솔직히 맛있기도 했다.

서른일곱 번째는 통상근무 중이었다. 점심을 배달 타로로 주문했다기에 그러냐 하고 기다렸는데, 작지만 휘황찬란한 케이크 박스가 왔다. 그것도 멜론 케이크. 설마 이게 밥이냐고 쏘아보는 제 시선에 이부키가 히죽 웃더니 뒷좌석에서 도시락을 꺼내줬다. 도시락 안에는 하트 모양 당근과 귀여운 반찬들, 그리고 주먹밥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연애를 시작했다.

서른여덟 번째는 같이 퇴근한 집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고구마케이크였다. 함께 동거하게 된 지 반 년 쯤 됐을 무렵이라, 이부키가 작정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이런 이벤트를 벌일 수 있었다. 그땐 고깔도 아니고 웬 장난감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빨간색에 HAPPY BIRTHDAY라는 문구가 테 위에 조각된, 스티커사진 같은 걸 찍을 때나 쓸 법한 선글라스였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이부키 생일에 놀리겠다고 사온 걸 고스란히 돌려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서른아홉 번째는 위와 같다.

물론 자신도 생일을 축하해주기는 했다. 4기수 자체가 서로 축하한다는 인사 정도는 해주는 편이라 그 정도야 쉬웠다. 이부키의 유별난 감수성에 맞춰 주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막냇동생이 이런 걸 좋아했으니까. 어릴 때처럼 케이크에 초 꽂아서 거창한 노래를 불러주는 그런 파티는 아니어도, 약간의 장난과 함께 그 나이대에 쓸 법한 선물을 골라 사주는 게 제 축하 방식이었다. 이부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했다.

반면 이부키는 하나라도 요란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막내보다 더했다. 케이크에 고깔 같은 장식까지 챙기며 야단을 떠는 성격이니까. 저 녀석은 나이를 팔십 먹어도 그럴 게 분명하니 바로 수용하는 쪽이 평화롭다.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고. 그렇게 마음 먹으려 해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마흔이 코앞인 나이에 왜 이팔청춘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것이다.

“이렇게 쏟아지는데 두 시간 후에 그친다니. 요즘 날씨 신기하네.”

“그러게.”

드디어 스마트폰에서 벗어난 이부키가 중얼거렸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시마는 좌석에 파묻혀 있던 등을 뗐다. 뒷덜미가 싸늘했다. 불확실한 감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딱 하나는 그럭저럭 신뢰도가 높았다.

-경시청에서 각 국,

무전에서 부르는 주소가 근처였다. 역시. 옆을 보니 이부키는 진작 기어를 바꾸고 있었다. 바로 무전을 받은 시마는 출동하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에 의문을 남겨뒀다. 그러니까.

왜 오늘은 이상할 만큼 조용한 거냐고.

매해 호들갑 떨던 파트너가 갑자기 철 든 소년처럼 의젓하게 구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보다 먼저 불혹에 들었다고 갑자기 얌전해졌나?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상대는 그 이부키였다. 경시청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발 빠른 들개. 거기다 바보. 최근 많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 ‘감’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아직도 단어가 뒤죽박죽인 양키. 오죽하면 자신과 5년 동안 붙여뒀겠는가.

이부키가 철이 든 거다. 아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 혼자만의 추론에 빠진 시마는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중년 남성 둘이 길 한복판에서 쫄딱 젖은 채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고함을 질러대며 삿대질하는 폼이 여간 화가 오른 게 아니었다.

“엄청나네.”

“엄청나지.”

“응. 저러다 에어컨 바람 맞으면 감기 걸리니까 말리자.”

시마는 동의의 의미로 차에서 내렸다. 우산을 펼쳐 쓰는 동안 운전석에서 나온 이부키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쪼르르 달려갔다. 남들보다 훌쩍 높은 장신이 사이에 끼어들자 놀랐는지, 싸우던 두 사람이 순간 멈칫하면서 몇 발짝 떨어졌다.

“자자. 그만들 싸우시고.”

“넌 뭐야?!”

“경찰입니다아. 아, 시마 빨리 와!”

다년 간의 경험이 쌓인 이부키가 시마에게 손짓했다. 자신이 경찰 공무원증을 내밀어봤자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시마가 함께 말리는 게 훨씬 잘 먹혔다. 시마도 알기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부키의 곁에 다가갔다. 그에게 우산을 씌우자 그새 폭 젖은 머리에 그늘이 드리웠다.

“네, 경찰입니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하? 내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니들이 뭔데!”

“아직까지는 아니지만, 지금 손에 쥐고 계신 당구봉을 상대에게 겨누시면 충분히 위협적인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통행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요.”

움찔한 시민이 손에 든 당구봉을 등 뒤로 감췄다. 그런다고 감춰질 길이는 아니지만, 시마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문이 활짝 열린 당구장과 우산도 없는 두 사람의 차림새를 보니 당구게임 중에 일어난 싸움 같았다.

“자자, 게임은 게임으로 끝내자고요. 즐겁자고 하는 건데 기분이 더 안 좋아지면 슬프잖아요.”

천사와 악마처럼 양쪽에서 속삭이는 경찰들에 두 남성이 서로를 노려봤다. 그중 당구대를 든 쪽이 먼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흥. 오늘은 내가 봐줬다.”

“뭐? 네놈이야말로 고마운 줄 알아!”

2차전이 벌어질 낌새에 시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시선이 멀리서 이쪽으로 오다 빙 돌아가는 행인을 일별했다. 자신들이 여기 오는 동안 몇 명이나 이 불편을 겪었을지. 차라리 당구장 안에서 다투든가. 속으로 냉정한 불평을 곱씹은 그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얼굴로 친절하게 협박했다.

“계속 싸우고 싶으시면 인근 파출소로 모셔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가족 분들께도 저희가 직접 연락해드리겠습니다.”

움찔한 두 남성이 어색한 헛기침을 연발하더니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시시하고 별 볼 일 없는 끝이었다.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이부키는 사태가 마무리되는 듯하자 히죽 웃었다.

“역시 시마쨩.”

“하? 구경만 하지 말고 제대로 일해.”

“나도 거들었잖아? 채찍과 당근 수법!”

“네, 네. 당근 씨. 이제 복귀하시죠.”

시마는 그대로 이부키를 운전석까지 데려다줬다. 운전석 문을 닫아주고 조수석으로 가는 사이 시동이 켜졌다. 우산을 뒷좌석에 둔 그는 곧장 조수석에 올라탔다. 손수건을 꺼낸 이부키가 머리를 털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엄청 꿉꿉해. 찝찝해!”

“비를 맞았으니 당연하지.”

그러게 누가 후드만 쓰고 뛰쳐 나가랬냐며 시마가 이죽이죽 놀렸다. 그 사이 강우량이 줄어 지금은 덜하지만 내릴 때만 해도 쏟아졌다. 우산을 들고 내리지 않았더라면 이부키의 꼴도 아까 그 아저씨들과 비슷해졌을 것이다. 이부키도 그건 아는지 입만 댓발 내민 채 꿍얼거리다 스마트폰을 켰다.

“오. 이제 한 시간 반.”

“뭐가?”

“응? 비가 그칠 때까지 한 시간 반 남았다구.”

어딘가 신난 듯도, 기대하는 듯도 한 목소리에 시마가 갸우뚱했다. 이부키가 오늘따라 유난히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긴, 아침마다 밖에서 달리던 녀석이 맨션 헬스센터에서 트레드밀만 쓰고 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역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퇴근하고 달릴 수 있겠네.”

“응?”

“며칠 동안 밖에서 못 뛰었잖아.”

“시마쨩.”

“왜.”

“나 위로해주는 거야?”

“하?”

이부키가 히죽거리며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시마도 자석의 같은 극처럼 밀려나듯 기울었다.

“아, 붙지 마. 축축해.”

“이럴 땐 같이 축축해져야 파트너지!”

“거절, 아, 머리 털지 마! 어이, 이부키!”

뺨에 물방울이 잘게 튀었다. 찝찝함에 미간을 찌푸린 시마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볼에 닿는 감촉에 멈칫했다. 쪽! 깜찍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황당하게 쳐다보자 이부키가 보란듯이 입술을 쭉 내민 채 웃고 있었다. 아니, 이 자식이?

-경시청에서 각 국.

하지만 타이밍은 이부키의 편이었다. 신고가 들어온 주소가 현재 위치에서 엄청나게 가까웠다. 주먹을 쥐었던 시마는 한숨과 함께 안전벨트나 마저 맸다. 의기양양하게 무전을 잡은 이부키가 흥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는 404. 히라츠카 공원에서 출발합니다. 말씀하세요.”

-경시청, 알겠습니다.

드득. 기어가 바뀌고 핸들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 그럼 다음 장소로 출발!”

차창에 기댄 시마는 신나게 외치는 이부키를 일별했다. 피식. 결국 웃고 만 그의 입술이 어쩔 수 없이 곡선을 그렸다.

느지막한 점심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우동이었다. 덥고 습한 공기에 저항하기 위해 속을 차가운 국물로 가득 채우고 나니 그나마 살 맛이 났다. 이걸로는 양이 부족하다며 사이드로 주문한 새우튀김도 훌륭했다. 바삭바삭한 튀김옷은 물론 속에 꽉 찬 새우가 신선하고 통통했다. 가장 좋은 건 식사 도중에 호출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모처럼 느긋하고 배부른 점심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먹는 도중부터 바깥이 잠잠하더라니, 어느덧 비가 그치고 새파란 하늘이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아. 그쳤다.”

“오. 완전 럭키잖아?”

배도 부르고, 날도 맑고. 한껏 즐거워진 이부키가 으쓱거렸다. 옆에서 덩달아 어깨를 으쓱한 시마는 두리번거리는 그를 데리고 이동했다. 즐겁든 어쩌든 간에 중점밀행은 이어져야 했다. 그렇다고 신난 이부키의 입이 닫히지는 않았다.

“냉우동 엄청 오랜만인데 맛있네.”

“음. 다음에 또 와도 되겠어.”

“그땐 여기 말고 다른 곳 가야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아니지만 새로운 식당을 발견하는 것도 좋잖아? 맛있는 가게가 얼마나 많은데.”

“뭐, 그건 그렇지.”

시답잖은 잡담이 멈출 새도 없이 차고 넘쳤다. 시마는 그런 점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이를 먹다 보니 직업과 분리된 삶의 행복에 대해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를테면,

“있잖아, 시마쨩. 이번 휴일에 거기 갈까? 공원 근처에 거기, 그 초밥.”

이런 식으로.

“아. 거기. 가보기로 했었지.”

“응, 응.”

집 근처에 공원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에 초밥 가게 하나가 그 맞은편에 새로 생겼다. 꽤 맛있다고 소문이 난 모양인데 아직 한 번도 가지 못했던 터라 자신도 궁금하기는 했다. 차키를 쥔 그는 운전석으로 향하며 끄덕였다.

“음. 그렇게 할까.”

“종류별로 먹어야지. 그 중에서 맛있는 건 두 번!”

“엄청 들떴네, 너.”

원래 초밥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고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좋아하면 기억해둬야겠지. 그렇게 내심 깔끔한 결론을 내린 시마가 운전석으로 가려 할 때였다.

잘그락.

손에 찬 단단한 양감이 홀라당 사라졌다. 순식간에 키를 도둑 맞은 시마는 황당하게 범인을 쳐다봤다.

“뭐야?”

“응? 이번에도 내가! 나 이제 도쿄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

키를 흔들어보인 이부키가 히죽거리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든 시마는 탐탁찮은 낯으로 조수석에 탔다. 보통 중점밀행에 들어가면 반반 나눠서 운전하기 마련인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부키가 운전대를 독차지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자신이 잠깐 운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저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리고 이 차는 어디로 향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중점밀행 구역이 맞기는 한데 특정한 장소로 가는 느낌이었다. 핸들을 꺾을 때 망설임이 없고, 종종 표지판을 확인하는 눈이 그 증거였다. 정황 증거일 뿐이지만 시마는 조수석에 앉은 채 반쯤 확신했다.

“어디로 가는 건데?”

“으으음. 뭔가 예쁜 곳?”

“하?”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정말로 생각한 장소가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대답이 의문을 충분히 해소시키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시마는 일단 두고 보자 싶어 팔짱을 꼈다. 이부키가 아무리 야생 바보 들개라는 전대미문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해도 근무 도중에 대놓고 이탈할 만큼 못난 녀석은 아니었다.

식당에서 7분 가량 차를 타고 이동한 끝에 멈췄다. 5층 빌딩 앞이었다. 예쁘다고 할 만한 건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칙칙한 빌딩만 줄지어 선 도심 특유의 회색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부키는 뭔가 설레 하는 얼굴로 안전벨트를 단숨에 풀었다.

“자, 잠깐 내립시다아.”

“뭐? 도착한 거야?”

“응. 여긴데?”

진짜냐고. 흠칫한 시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잊고 있던 오늘 날짜가 떠올랐다. 설마… 서프라이즈 같은 건가. 그런 걸 준비하기에 적절한 장소 같지는 않은데. 쓸데없는 고민에 빠진 사이 이부키는 벌써 내려 조수석 창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시-마. 빨리!”

“잠깐만.”

고민해봤자 소모전일 뿐이다. 눈으로 확인하자. 판단을 끝낸 시마는 가볍게 내렸다. 비가 내린 직후의 습하고 더운 공기가 호흡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숨을 가득 들이켠 그는 이부키를 따라 빌딩 안에 들어섰다. 딱히 출입 허가가 필요한 곳은 아닌지 계단이 개방되어 있었다. 입주한 사무실에서 간간이 통화하는 목소리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렸다.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옥상을 향해 쭉 걸었다. 5층까지 금방이었다. 신나게 계단 몇 개를 먼저 올라간 이부키가 옥상문을 벌컥 열더니 빛 너머로 뛰어들었다. 저도 모르게 발이 빨라진 시마는 뒤따라 문턱을 넘었다.

“짠!”

습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이부키의 얄팍한 후드티가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눈부심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시마는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이부키의 손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고층 빌딩 뒤에서 뻗어 나온 선명한 다채색의 곡선이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마도 익히 아는 현상이었다. 어느 옛 시대의 사람들은 그 끝에 보물이 심겨져 있다고도 믿었던 찬란한 빛의 다리.

“오늘 아이쨩이 준비한 선물! 어때?”

무지개였다. 멍하니 바라보던 시마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 치도 예상할 수 없었던 오늘의 이벤트에 또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선물로 이런 걸 보여줄 생각을 하는 걸까. 너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안 거야?”

“후훗. 다 방법이 있지.”

자신만만하게 웃은 이부키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줬다. 화면에는 얼마 전 유타카와 코코노에에게서 배웠다던 츠붓타가 켜져 있었다.

무심코 단어를 누른 시마의 눈동자에 다채로운 무지개가 떴다. 장소는 모두 다르지만 같은 하늘을 본 사람들이 찍어 올린 사진이 가득했다.

“오늘 비가 오다가 그친다고 해서 가끔씩 검색했거든. 어때? 굉장하지?”

비가 오다 그친다고 해서 무조건 무지개가 뜨지는 않는다. 그보다 복잡한 조건과 여러 운이 작용한다.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에서 비롯된 순진한 운이 아닌, 여러 과학적인 운. 그럼에도 시마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개가 뜰 것이라 믿고 기다린 그 마음을.

“굉장하네. 이건 솔직히 예상 못했는데.”

“흐흥. 이제 인정하는 거야? 역시 내가 최고라는 걸!”

“무작정 바보가 아니라는 건 인정하겠어. 바보.”

“정말이지! 하나도 인정한 게 아니잖아!”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시시콜콜한 투닥거림이 이어졌다. 몇 마디 실랑이 끝에 먼저 양손을 든 시마는 제게 드리우는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인생에 다시 없을 파트너가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시마.”

축하한다는 말이 꼭 이리 오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가지 말까. 짓궂은 장난기가 이럴 때에도 눈치 없이 손을 들었지만, 오늘만큼은 이부키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다.

“고마워.”

체감 기온보다 높은 이부키의 체온이 얄팍한 옷 너머로 느껴졌다. 이제 일일이 이런 포옹으로 호들갑 떨 시기는 지났지만, 들려오는 심장박동에 몸이 아닌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부키의 등을 팡팡 두드려준 그는 품에서 벗어났다.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 아쉬운지 이부키가 그대로 어깨동무를 하며 무게를 실었다.

“벌써 가게?”

“가야지.”

“그럼 기념으로 사진!”

“하?”

“빨리빨리! 없어지기 전에!”

어느새 카메라 어플을 켠 이부키가 팔을 쭉 뻗었다. 셀프 카메라 모드로 바뀌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반쯤 찼다. 심드렁한 콧숨을 내쉰 시마는 결국 그에게로 머리를 기울였다. 아직 영롱한 색을 발하는 무지개가 그들의 뒤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셔터음이 몇 번 울리고, 화면 속에서 이부키가 머리칼에 입술을 묻거나 폭 기대는 등의 여러 자세를 취했다. 마지막에 고개를 들어준 시마는 자연스레 닿는 입술에 키득거렸다. 이부키와 함께 행동하다 보면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많지만, 역시 나쁘지 않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이부키가 거리를 벌렸다. 에어컨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한 시마가 상의를 펄럭거리는 동안 그는 찍은 사진을 확인하다 만족한 듯이 끄덕였다. 볕이 쨍해서 그런가. 사진이 유난히 잘 나왔다.

“이거 복사해야지.”

“인화지 다 썼을 텐데.”

“에? 벌써?”

“네가 너무 많이 인쇄해서 어쩔 수 없어.”

“그치만 몇 장만 고르기 어렵단 말이야.”

“알겠으니까 잘 저장해두기나 해.”

“응.”

조만간 인터넷으로 더 주문해야겠다. 장바구니 계획을 대충 짠 시마는 문으로 향하다 말고 돌아봤다. 처음보다 옅어진 무지개를 등진 채 여전히 사진에 골몰한 이부키가 서 있었다. 픽 웃은 그는 이부키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이부키. 가자.”

“오케이!”

드디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이부키가 다가왔다. 손 대신 그의 팔뚝을 잡은 시마는 어둑한 옥상문 너머로 발을 내딛었다. 전설과 같은 보물은 없었고, 여전히 날은 덥고, 또 아직 근무중이지만 분명히 얻은 건 있었다. 즐거움, 행복, 추억, 또렷한 형태를 가진 애정, 그리고 사랑스러운 누군가가 즐거워하는 모습.

그는 오늘부터 무지개를 좋아하기로 했다.

*

“그래서, 오늘 서프라이즈는 이걸로 종료?”

“응? 아니?”

“…?”

“당연히 집에 더 있지. 아이쨩의 스페-셜한 이벤트, 기대해도 좋… 에? 왜 그런 표정?! 잠깐! 같이 가, 시마!”


본격 제목과 아무 상관없는(있는 것 같긴 한데 의미를 모르겟는) 생일 축하글.

시마도 이부키 생일에 분명 뭔가를 해줬을 텐데 말이죠.

본인은 별로 생색을 안 낼 것 같고 선물 받은 이부키만 여기저기 자랑하고 사진 찍어둘 것 같다는 게 저의 뇌피셜.

이부키가 괜히 시마 생일 때마다 호들갑 떠는 게 아닐 텐데 본인은 그냥 이부키 성격이라고만 믿을 듯…. ㅋㅋㅋ

아무튼… 생일 축하해. 아이보랑 행복한 하루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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