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시마] Fiat Lux
*이부시마
*구마 사제 au
*제 6회 쩜오 어워드에 발행한 글입니다.
*본문에 삽입된 기도문은 '성 미카엘 대천사 기도문’과 ‘악을 대항한 기도’ 중 일부 편집했습니다.
*해당 글은 원작과 무관하며 내용은 허구임을 밝힙니다.
Sancte Michael Archangele,
성 미카엘 대천사시어
defende nos in proelio,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contra nequitiam et insidias diaboli esto praesidium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 tuque,
하느님께서 사탄을 꾸짖으시기를 겸손히 간청합니다
Princeps militiae caelestis
천상의 주인이시어
Satanam aliosque spiritus malignos,
사탄과 악령들과
qui ad perditionem animarum pervagantur in mundo,
영혼을 파괴할 목적으로 세상을 떠도는 자들을
divina virtute, in infernum detrude.
신성한 힘으로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Amen.*
아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태워버릴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덥지도 않은지 새까만 사제복을 입은 한 인영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를 휙휙 걸어갔다. 로만칼라까지 단정하게 채운 행색은 뭇 사제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으나 얼굴에 씌워진 새파란 색을 띠는 안경 하나에 일순 공기마저 가벼워질 정도로 인상이 확 바뀌었다. 세례명 우리엘(Uriel), 본명 이부키 아이(伊吹 藍). 사제이지만 일반 사제는 아닌 그가 몸담은 성당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조직 MIU라는 구마 사제 집단이 존재했다. 점점 늘어나는 악령과 악마에게 먹혀버린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 그게 그들이 하는 일이었고, 이번에도 그 일을 위해 꼭 한 사람이 필요해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덥지도 않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걷던 이부키는 곧 코코노에가 적어준 주소와 일치하는 집을 찾았다. 아스팔트 위로 계란을 떨어뜨리면 익어버릴 정도로 태양이 환한데 그 집만 유독 어둠 속에 있었다. 집 위치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집을 덮을 만큼 커다란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부키는 새파란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뜨며 오기 전에 들었던 일련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내 휙휙 저 멀리 던져버렸다. 무룻 사람이란 겪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건 지난 35년간 그가 살아오며 터득한 삶의 교훈이었다.
미리 받아온 열쇠가 있었지만 이부키는 먼저 대문 옆에 위치한 벨을 꾹 눌렀다. 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은 곳에 인공적인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속으로 1분을 세고, 다시 꾹 벨을 눌러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이부키는 미리 받은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평균보다 큰 키 탓에 긴 다리가 성큼성큼 고요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기이하게 어둠이 깔린 집은 이부키가 들어선 자리만큼만 빛이 들어찼다. 제 발밑을 한 번 일별한 이부키는 주변을 빙 둘러보다 현관을 향해 발을 옮겼다. 딱 그가 움직인 만큼 기묘한 어둠이 거두어졌다.
똑, 똑, 똑.
벨 소리에도 열리지 않은 문이 노크 소리에 열릴 리 만무했으나 이부키는 예의를 지켰다. 그의 은사님이 가르친 것이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예의를 지킨다면 상대방도 너에게 예의를 지킬 거라는 것. 귓가에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씩 웃던 이부키는 몇 번의 노크에도 반응이 없자 다시 열쇠로 현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훤한 낮임에도 밤과 같았다. 그만큼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수많은 삿된 것들이 가득 차 있다는 방증이었다. 다른 이들은 현관까지 오는 것만으로 벅차 집 안을 확인하지 못 한 지 꽤 오래라고 했으니 이 사태를 본 것은 이부키, 그 하나뿐이리라. 낮게 혀를 찬 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빛이 들어찼다.
해가 잘 들어오는 남쪽. 가장 큰 공간을 가진 방 안에는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엔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 안 그 어느 곳보다 어두운 방을 빙 둘러보던 이부키는 문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워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부키를 피하듯 방 안을 점령하고 있던 기이한 어둠이 점점 사내가 있는 곳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곳이 안전하다는 듯. 허나 이부키의 목적 또한 그였기에 그것은 그것들의 패착이었다.
혹여라도 깰까 조심스레 침대 끝에 앉은 이부키는 식은땀을 잔뜩 흘려 젖어버린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찝찝할 만큼 끈적한 땀이 손바닥 아래 묻어났으나 개의치 않고 마치 나쁜 꿈을 꾸는 아이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는 손길 사이로 나지막이 자장가가 흐른다. 어린 시절 악몽을 꾸던 이부키를 매번 달래 주던 노랫소리를 따라 남자의 악몽이 씻겨져 가기를 바라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잔뜩 찌푸려 있던 미간이 곧게 펴진 걸 보고 이부키는 손을 그만 거두었다. 거둬들이려 했다. 방해하는 손만 아니었다면.
“시마 씨?”
잠에서 깬 건가 싶어 그를 불러봤으나 잠결이었던지 이부키의 손목을 붙잡은 손만 움직여 품으로 끌어당길 뿐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허-하고 짧은 웃음이 터졌으나 오랜 악몽 끝에 깊게 잠드는 잠이 얼마나 달콤한 지 이부키도 알았다. 그 달콤함을 선사해주는 손길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어느새 햇볕이 들어찬 방 안에 혹여나 기껏 잠든 이가 깰까 이부키는 조심스레 커튼을 쳤다. 은총이 내리듯 햇빛이 내려앉은 집 안은 온통 온기로 가득했다.
코사카를 잃은 후, 시마는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잠든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에 어느새 눈 밑은 판다처럼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잠에서 깨면 찾아오는 두통이 이젠 일상이었는데. 느리게 꿈벅이던 눈에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들이찼다. 빛을 담으면 항상 시려오던 눈은 평온했고, 골이 울리도록 욱신거리던 두통도 없었다. 이 얼마만의 안온인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시마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낮이어도 밤처럼 집 안을 가득 채우던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난방을 해도 한 겨울과 다름없던 공기가 따뜻했다. 어느 순간 쳐두는 것에 의미가 없었던 커튼이 창을 덮어 햇빛을 막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응? 깼네요? 잘 잤어요? 그럼, 이만 제 손을 놔줬으면 하는데요. 아, 물론 싫다는 건 아닙니다만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힘들어서요.”
소중한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던 무언가. 그걸 인식하자마자 귓가에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에 시마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순간적인 현기증에 끙- 하고 짧게 앓는 사이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렸다. 그 길을 따라 타인의 체온이 무방비하게 파고들어 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미 전해 들었겠지만, 이부키 아이입니다. MIU 소속의.”
“아….”
“앞으로 둘이 페어로 다니게 됐으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색안경 너머의 눈이 곱게 접히며 지은 웃음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시마는 얼결에 내민 손에 악수하고 말았다. 손바닥 사이로 닿은 온기는 옷 너머로 전해지던 온기보다 더욱더 쉽게 시마의 안을 파고들었다. 무언가 그를 내내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녹아 내려버린 듯한 감각. 생소한 느낌에 시마는 맞잡은 손을 놓지도 않고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깨기 전에도 계속 이 손을 잡고 있었었다. 어린 시절 껴안고 자던 애착 인형처럼.
“시마 씨 제 손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봐요.”
“아, 실례.”
그제야 손을 놓았지만 닿았던 체온이 쉽사리 사라지질 않아서 시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문질렀다. 그 행동 하나하나를 눈으로 담던 이부키는 시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대한 무해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대체로 처음 보는 이들은 무슨 꿍꿍이속을 숨긴 미소 같다며 뒤로 물러서는 미소였으나 시마는 여상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부키는 시마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이야기는 거절했던 걸로 압니다만.”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한 거절은 거절이야.’라고 키쿄 대장님이 전해달라고 했어요.”
“…하여간 무섭다니까.”
“저는 시마 씨가 마음에 들거든요. 그래서 꼭 같이하고 싶어요.”
“무슨 근거로요?”
“감?”
“하?”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에도 이부키는 마냥 생글생글 웃었다. 감이란 말에 사람들의 반응은 항상 무시였다. 저놈 또 저런다는 반응들. 듣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어이없어하지만 무시하지 않았다. 무시할 수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시마 카즈미가 좋은 사람이라는 방증이니까. 그 녀석의 말마따나 시마는 그걸 하나도 모른 것 같았지만 이제 알게 될 거였다. 이부키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그가 제 은사에게 받았던 것만큼, 그는 시마에게 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시마의 준비는-
“제 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거든요. 우리 제법 잘 어울리는 파트너가 될 거라고요?”
굳이 필요할까?
“됐습니다.”
“됐습니다, 금지!!”
이부키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도 시마는 뭔가 벌써 지친 느낌이 들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분명 여기에 오기 전에 무성한 소문을 들었을 텐데 무얼 믿고 이리 구는 건지 시마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 타인과 엮이는 일은 사양이었다. 두 번 다신.
“배고프지 않아요? 곧 저녁 시간이니까 밥 먹으러 나가지 않을래요?”
“내가 왜….”
“시마쨩이 아무리 거절해도 우린 파트너가 될 거니까?”
“하?”
“그리고 밥 먹고 난 뒤에 할 이야기가 있어. 시마쨩이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야.”
갑자기 반토막 난 말투보다 새파란 렌즈 너머의 싱글 웃는 눈이 시마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묘하게 싸움을 거는 눈빛이었다. 마운트인가. 이런 상대는 오랜만이라 시마는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쁜 건 결코 아니었다. 어이없음에 흘러나오는 웃음이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협력이 구해야 하는 쪽이 마운트?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시마의 눈빛에 스산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모든 걸 놓치지 않고 본 이부키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묘하게 입술에 걸쳐진 미소가 짙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밖을 나온 탓인지 시마는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색했다. 그 사이를 휙휙 걸어가는 이부키의 등 뒤를 쫓아가기도 벅찰 정도였다. 커다랗고 기다란 뒷모습만 보고 얼마나 따라갔을까? 작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부키를 따라 들어가고 나서야 시마는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환영도, 환청도 시달리지 않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집에서부터 그랬다. 잠에서 깼을 때도 그렇게 개운했던 적이 있나 싶어질 정도였는데. 시마는 가게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을 부르는 이부키는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 우동이 무척 맛있어! 진바 씨에게도 안 알려준 곳인데 시마에게만 알려주는 거니까?”
“그러냐.”
“응응. 아이쨩을 믿어보라구?”
“난 타인도 자신도 믿지 않아.”
“그럼, 아이쨩을 처음으로 믿어보면 되겠네!”
“하아….”
시마의 깊은 한숨에도 이부키는 웃으며 가게 주인에게 우동 2인분을 주문했다. 습관처럼 가게 내부를 둘러보던 이부키의 시선이 어딘가에 잠시 머물렀다 시마에게로 향했다. 찰나였기에 미간을 문지르고 있었던 시마는 채 보질 못했다. 봤더라도 알아차리긴 쉽진 않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앞에 뜨끈뜨끈한 우동 두 그릇이 나왔다. 작게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든 두 사람은 조용히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허하던 속에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고 쫄깃한 면발을 꼭꼭 씹어 삼키자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부키의 말대로 우동은 무척 맛있었다. 분하게도.
“어때, 시마쨩. 맛있지? 응? 응?”
“뭐, 나쁘지 않네.”
“흐흥~ 좋아할 줄 알았어!”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흔들리는 이부키의 모습을 일별한 시마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딱히 싫지 않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시마는 남은 우동을 마저 뱃속으로 후루룩 넣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의 다정한 식사였다.
죽지 못해 씹어 삼키던 음식이 아니어서일까? 무얼 먹어도 항상 허허롭기만 하던 속이 오늘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따끈한 우동 국물까지 모조리 먹어서라기엔 그동안에도 없진 않았던 터라 시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이부키를 일별했다.
집에서도 그랬다. 잠에서 깨어나면 늪에서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바닥으로 꺼질 듯 무거웠다. 질 나쁜 수면에 매 순간 시마를 괴롭히던 두통도 그를 놀리듯 속삭이던 환청도 호시탐탐 그를 삼키기 위해 온 집안을 삼킨 어둠도 없었다. 한 사람의 등장만으로 그렇다기엔 과한 생각이라 들었고 우연이라 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시~마!”
“뭐…!”
“조심해야지. 넘어질 뻔했잖아.”
“아…. 고마워.”
“별말씀! 근데 무슨 생각 하길래 앞도 제대로 안 보고 걸어? 설마… 아이쨩 생각!?”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점점 걷는 속도가 느려져 시마와 거리가 벌어지자 가만히 서서 바라보던 이부키가 별안간 시마의 앞으로 훅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덕분에 툭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까워진 거리에 불편함이 일어 자연스레 시선을 피하며 시마는 뒤로 조금 물러났다.
“자의식 과잉이 대단한데.”
“흠~ 뭐, 그렇다고 해두지!”
“뭘 ‘그렇다고 해두지.’야. 그렇다니까.”
“시마는 보기보다 부끄럼이 많은 타입?”
“하아….”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곤함에 시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걸 보면서도 이부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어서 가자며 시마의 손을 덥석 잡아끌며 앞서 걸어갔다. 반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시마는 붙잡힌 손을 빼내지 않았다. 피곤해서라기보단 잠에서 깨기 전 느껴졌던 평온함 탓이 컸다. 긴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 어느 날 잃어버렸던 삶의 일부를 다시 찾은 느낌은 마치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시마, 시마, 시마, 시-마.”
“한 번만 불러.”
“시마쨩.”
“왜.”
내리뜬 시선을 들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박을 닮은 눈동자가 올곧은 시선으로 시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미에게 사로잡힌 나비처럼 시마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겁게 그를 내리누르는 기운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올곧게 바라보는 탓이기도 했고, 어쩐지 피하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피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나랑 파트너 하자!”
“…됐습니다.”
“아~ 아깝다! 스리슬쩍 대답을 얻어낼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시마는 그 말에 차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핀잔줄 생각도 못 했다. 어느 순간 긴장하고 있던 온 신경이 이부키에게 쏠려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러자고 대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에 시마는 진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작금의 상황을 피하고 싶음을 피력하고 있는 시마를 이부키는 그저 싱글싱글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듣던 거와는 다르게 쿡 찌르면 툭 하고 반응을 보이는 시마가 재밌었다.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자자, 거의 다 왔으니까 힘내라고 시마쨩!”
“지금 와서 묻는 게 웃기긴 한데.”
“응?”
“대체 어디 가는 거야?”
밥을 먹었으니 집으로 가나 싶던 생각은 이 동네에서 길지 않지만 짧지 않게 살아온 시마도 낯선 길로 접어들 때부터 사그라들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오래됐긴 했다. 그렇다고 주택과 빌라가 이리저리 뒤섞인 거리가 낯설어질 만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게 무색하게도 그의 시선이 닿는 곳 하나하나가 다 낯설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도 담벼락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고양이도 일상을 이야기하며 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성큼성큼 등만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디 가느냐 묻지도 않고 따라가는 모양이 됐다. 시마를 아는 누군가 봤다면 시마 카즈미의 탈을 쓴 다른 뭔가가 아니냐 소리칠 법한 일이었다.
“시마 생각보다 허술하네~”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다 왔어!”
“하?”
괜찮지 않다고 대꾸하려던 시마는 이부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단정한 사제복을 입고 있어도 어딘가에서 불량함이 줄줄 새고 있는 이부키와 레이스와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며진 작은 가게는 어느 모로 봐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게와 자길 보는 바쁜 시선에 싱긋 웃어 보인 이부키는 가타부타 말없이 시마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딸랑. 작게 울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가볍게 떨어졌다. 오랜 시간 이 자리에 있음을 증명하듯 가게 안엔 차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두어 개 있는 테이블과 오래 앉아 있기 편한 의자들과 벽 곳곳에 채워진 가게 주인의 흔적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가게 주인에 대해 어림짐작하게 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에요, 츠카하라 씨!”
“어머. 오랜만이에요, 이부키 군. 뒤에 계신 분은 친구인가요?”
“음- 아직 아니지만 곧 친구가 될 예정?”
식당에서도 벗지 않았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윙크를 날리는 이부키에 시마는 하마터면 초면인 사람을 두고 그런 끔찍한 말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대체 오늘 하루만 몇 번을 이성을 잃을 뻔했는지. 그런데도 뻔뻔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왜 싫지 않은지. 시마는 내뱉지 못할 말 대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친구를 혼자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줄 몰랐는데.”
“그래서 열심히 꼬시는 중인데?”
“…퍽이나.”
“후후. 곧 엄청 친해지겠는걸요?”
가만히 지켜보던 츠카하라의 말에 시마는 믿을 수 없단 눈빛을, 이부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츠카하라는 말을 더 얹지 않고 그저 웃으며 두 사람을 가게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얇은 흰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공간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앉기 딱 좋을 크기의 공간에 동그란 탁자 하나와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창문 하나 없이 조명 하나만 켜져 있어 낮임에도 어두웠지만 칙칙하다기보단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언제나처럼 준비해줄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츠카하라 씨.”
“잠시만 기다려요.”
여느 가게와 다르게 메뉴판도 없이 주문받아 가는 츠카라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시마는 가게 안에 가득한 차향을 떠올리곤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이부키를 바라봤다. 파트너를 해달라고 하더니 친구가 될 거라던 말을 내뱉은 이는 처음 봤던 순간처럼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덕에 날카로운 눈매가 순하게 뭉그러지는 게 꼭 개를 닮았다. 단번에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맹수면서 사랑 앞에서 한없이 순해지는 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야?”
“아직 차도 안 나왔는데 마음이 급하네, 시마.”
“말 돌리지 마.”
“말 돌리는 거 아냐.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해도 되잖아?”
여유를 가지라며 너스레 웃는 이부키의 얼굴엔 악의는 없어 보였다. 무릇 인간이란 악의 없는 얼굴로 악의를 가진 채 다가오기도 한다는 걸 시마는 충분히 알았다. 그럼에도 저 해를 품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뭐, 작정하고 속이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지 않나 싶어 생각을 더 잇지는 않았다.
“시마는 말이야 생각을 좀 덜 할 필요가 있어.”
“하?”
“가끔은 감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됐습니다.”
“에~ 너무한걸?”
짐짓 상처받은 듯 울상을 지으며 삐죽 입술을 내미는 이부키에 시마는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생각해봐도 이리 어린애처럼 구는 그가 어떻게 정식 서품을 받은 사제가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악령과 악마를 퇴치하는, 찰나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구마 사제를.
“내가 어떻게 사제가 됐는지 궁금해?”
“뭐?”
“시마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
어느새 이부키의 웃는 얼굴에서 눈에만 웃음기 하나 서려 있지 않았다. 그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보이면서도 그가 이렇게 한 번에 알아차릴 만큼 수 없이 질문을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자주 호기심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곤 하니까.
“미안.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
“어?”
“내 생각이 적절치 못했다는 말이야.”
“…시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
“하?”
얼빠진 바보처럼 눈을 데굴데굴 구르다 이내 활짝 웃으며 건넨 말에 시마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어딜 봐도 이런 류의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라 이부키는 더 자주 말해줘야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시마가 알았다면 분명 쓸데없는 짓이라고 일축할만한 다짐이었다. 어쩌면 나중엔 그만하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이부키는 속으로만 웃었다. 그게 얼굴에 다 드러난다는 게 문제였지만.
“뭐,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방법으로 사제가 되긴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긴 해.”
“다른 이유?”
“시마는 신을 믿어?”
“…신앙심을 말하는 거야?”
“아니, 아니. 음- 시마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해?”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겪어본 이부키는 헛소리하는 부류는 아니라 시마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생각이 깊어지는지 따라 깊어지는 미간의 주름을 보며 이부키는 기다려주었다. 기다리는 건 언제나 질색인 그이지만 제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을 생각해주는 이를 만나는 건 무척 오랜만이라 즐거워서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성경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지만 난 죽으면 끝이라 생각해.”
“그럼, 혼이 있다는 건 믿어?”
“글쎄….”
두 번째 물음에서 시마는 쉽사리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악령과 악마를 퇴치하며 오랜 시간 지냈지만 그만큼 환청과 환영에도 오래 시달렸다. 당장 어제만 해도 시마는 환청과 환영과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서 하루를 보냈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매일 보였던 환영이 그려졌다. 그건 거짓이라고 속삭인 날들이 천 일이 넘었다. 그게 거짓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오래 기다렸죠? 차에 어울릴만한 다과도 같이 내왔어요.”
“역시 츠카하라 씨! 잘 먹을게요!”
“아, 감사합니다.”
“뭘요. 그럼, 천천히 이야기 나눠요.”
그녀가 나가자 침묵이 내려앉은 자리엔 과일과 꽃향기가 뒤섞인 차향이 은은하게 퍼져갔다.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지만, 시마는 머릿속을 타르처럼 끈적하게 달라붙던 생각들이 씻겨 내려간 듯 뭔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난 가만히 있는 건 질색인데 여기 차를 마시면서 쉬는 건 좋아. 잔뜩 쌓여있던 게 지워지는 느낌이 들거든.”
“…….”
“어때 시마?”
“…나쁘지 않네.”
“그럴 줄 알았어!”
한동안 조금 전 대화는 잊은 채 두 사람은 차를 마시는 것에 집중했다. 손바닥에 닿은 찻잔에서 퍼지는 따스함과 한 모금 마신 차에서 퍼지는 향과 온기에 마음 어느 한구석이 몰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은 공간과 향긋한 차의 조합은 언제나 마법을 일으켰다. 이부키는 시선을 살짝 들어 손에 쥔 찻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시마를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긴장이 풀어진 모습에 이부키는 살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부터의 일을 시마가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볼 순 없었다. 일렁이는 찻잔에 떠오른 누군가의 모습에 숨을 크게 들이쉰 이부키는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놨다. 순간 무거워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읽은 시마도 찻잔을 내려놓고 이부키를 마주 바라봤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생각하곤 해. 어렸을 때 말이야 가난하단 이유로 반에서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어. 내가 아니라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지.”
“…….”
“결국 다른 애가 범인이라고 밝혀졌지만, 그 누구도 내게 사과한 사람은 없었어. 선생님조차도.”
무덤덤한 말속에서 시마는 오래된 상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상처가 아물며 다쳤던 기억은 희미해지는 법이다. 다만 어떤 상처는 상처가 아물어도 다쳤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을 때도 있다. 때때로 혹은 자주 기억이란 건 아팠던 일을 들추곤 한다. 이젠 다 나아 아플 리 없는 곳이 아파져 올 만큼.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으니까 점점 말하지 않게 됐어.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나중엔 만났어. 내 말을 믿어주고 들어주는 사람.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어.”
“좋은 사람을 만났네.”
“그렇지?”
“뭐, 전혀 사제처럼 보이지 않지만 말이지.”
“너무하네!”
입술을 뾰죽 내밀며 투덜거리는데 밝은색 눈동자엔 즐거움이 한가득 담겨 있어 시마의 핀잔 아닌 핀잔이 그리 싫지 않음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이부키는 시마가 만나본 사람 중 단연코 어딘가 알기 어려운 듯 보이면서도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게 싫다면 그건 아니고 그저 어려웠다. 이제까지 그가 만났던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서, 그게 전부야?”
“…아니.”
무심하게 넘어가는 듯 해도 시마는 이렇게 중요한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게 이부키는 좋았다. 이부키는 무작정 앞만 보고 직진하다 보니 놓치는 게 많았다. 시마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게 문제라면 이부키는 오로지 감을 쫓아서 문제였다. 시마의 단점을 이부키가, 이부키의 단점을 시마가 보완해준다면 이보다 더 괜찮은 파트너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더더욱 시마가 이제 나올 말을 믿어주길 바랐다. 이부키에게 시마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반환점이었으니까.
“시마는 감을 믿어?”
“하?”
“그러니까- ‘오늘은 감이 안 좋네.’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데 괜히 시선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육감을 말하는 거야?”
“비슷할걸? 나 꽤 감이 좋거든. ‘이쪽으로 가면 안 될 거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100의 100은 사고나 사건이 터져.”
“신기하긴 하네.”
무조건 직진만 할 거처럼 보이는 녀석이 빙빙 돌리는 말로 운을 띄우기에 시마는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줬다. 덤덤하게 내뱉은 과거의 이야기보다도 지금 꺼낼 이야기가 더 무겁고 어쩌면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아 준 이야기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간 이부키가 했던 이야기를 조합해보면 오답은 아닐 거란 판단도 있었다.
“그렇지? 어릴 땐 뭣 모르기도 하고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오해를 많이 샀어. 워낙 작은 동네여서 소문도 괴상하게 퍼져선 별칭도 생겼어. ‘귀신의 아이’라고.”
“단지 감이 좋아서?”
“지나가는 사람 보면서 ‘엄마, 저 사람 머리 피나.’하고 말한 게 눈앞에서 떡 하니 벌어지고, 그게 한두 번이 아니게 되면 사람들은 뭐든 이유를 갖다 붙이려고 하기 마련이니까.”
씁쓸함이 맺힌 입꼬리에 시마의 시선이 찻잔 위로 떨어졌다. 그 말뜻을 시마는 모르지 않았다. 아주 잘 알았다. 그 일 이후로 시마에게 꼬리표처럼 붙어있는 수식어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낙인으로 남아있으니까.
“뭐, 많이 틀린 이야기도 아니긴 해.”
“뭐가?”
“‘귀신의 아이’ 말이야.”
“……?”
“죽은 사람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않아?”
마치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뜨겠죠?’ 같은 가볍게 던진 물음이지만 숨겨지지 않는 긴장이 찻잔 손잡이를 문지를 엄지 끝에 묻어나왔다. 그제야 이부키가 계속 그에게 던진 질문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부키는 바라고 있었다. 시마가 그의 숨겨진 이면을 내보였을 때 그를 무시하지 않기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더라도 믿어주기를. 그를 믿지 않고 무시했을 수많은 사람 속에 시마가 포함되지 않기를. 오늘 아침의 시마였다면 그 수많은 사람 속에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허나 지금 시마는 이부키가 얼마나 환하게 웃는지, 별거 아닌 일에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고 있었다.
“‘파트너 죽이기’만큼이나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
그래서 내던졌다. 시마에게 영영 지워지지 않을 낙인과 같은 꼬리표를. 이부키도 내보였으니 시마도 보이는 게 셈이 맞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 말하는 것과 건너 듣는 건 차이가 있으니까. 순식간에 야차처럼 변하는 얼굴은 예상치 못했지만.
“사실이 아니잖아! 그런 말 하지마, 시마!”
“…뭐, 다를 바 없잖아? 지키지 못했으니까.”
자조적인 시마의 말에 이부키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그냥 있어도 매섭게 생긴 인상이 누가 보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냅다 무릎부터 꿇고 잘못을 빌고 볼 것처럼 생겼다. 그 이유가 필히 99.9%는 저 날카로운 눈매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마는 이부키가 이렇게까지 화낼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시마에겐 앞서 이부키가 했던 자조적인 고백과 별다른 바 없는 고백이었기에.
“시마. 누가 뭐라고 욕해도 시마만큼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왜? 내게 상처니까?”
“코사카에게 못 할 짓이니까.”
“…뭐?”
처음 듣는 답변보다 이부키의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지 못한 이름에 시마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눈앞이 핑핑 도는 듯 어지러웠다. 다만 그 어지러운 시야 안에서도 매섭게 빛나는 밝은 눈동자만은 또렷해서 발밑이 꺼지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렵사리 숨을 크게 내쉰 시마는 한참 의식적으로 숨을 쉬었다. 막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호흡하던 시마는 여전히 무서운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부키를 똑바로 바라봤다. 마주한 시선에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약간 호선을 그렸다.
“내가 시마를 찾아간 이유엔 키쿄 대장의 추천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코사카 때문이야. 찾아왔거든. 도와달라고.”
줄곧 시마를 향해 있던 시선이 약간 비스듬하게 옮겨져 시마의 뒤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시마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리라. 다시 돌아온 시선이 시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웃음이 맺혔다.
“시마, 세상엔 굉장히 신기한 일이 많은 거 알아?”
“…또 무슨 말 하려는 건데?”
“나처럼 보면 안 되는 걸 보는 사람이 있잖아? 그럼, 보여선 안 될 게 보이는 장소 같은 곳도 있을 법하지 않아?”
“너….”
“여긴 그냥 차 마시러 오기에도 좋지만, 약속했거든. 시마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누구와’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어도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시마 또한 가장 만나고 싶었으니까. 만나서, 만나면, 만나기만 한다면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순간 크게 울렸다. 긴장한 시마의 모습에 이부키는 웃으며 시마는 보지 못할 이를 바라봤다. 그쪽도 똑같이 긴장한 모습이라 이부키는 손뼉을 크게 쳤다.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영혼이 의아한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자, 그럼 난 나가볼게!”
“뭐?”
[네?]
“이건 시마와 코사카 둘이서만 풀어야 하는 문제잖아? 제 3자인 난 빠지는 게 맞지. 시간제한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옅은 배신감이 묻어있는 네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를 향해 이부키는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가 자리를 비워도 분명 잘 풀어낼 거란 믿음이 있었다. 아주 약간의 용기가 남아있다면. 이부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헤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뒤돌아보진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창가 자리에 츠카하라가 앉아 있었다. 제 몫의 찻잔 외에 반대편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찻잔에 이부키는 익숙하게 그 앞에 앉았다.
“괜찮니?”
“괜찮아요.”
츠카하라는 이부키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이부키의 사정을 모두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부키가 왜 시마를 찾아갔는지, 웃고 있는 저 얼굴 아래 흐르지 못한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저 커튼 뒤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이 이부키에게 얼마나 절실한 동아줄인지.
“애써 웃지 않아도 돼.”
“…….”
그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진 얄팍한 가면에 츠카하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 가장 답답한 건 눈앞의 아이일 테니.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순간이기에 츠카하라는 빈 잔에 말없이 차를 따라주었다. 잘 익은 포도 향과 달콤한 꽃향기가 뒤섞여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갔다. 맺히지 못해 떨어지지도 못하는 눈물이 조용히 씻겨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포트에 끓여 둔 차가 부족해 한 번 더 차를 우려왔으니 속에 둔 모든 걸 꺼내 보기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터였다. 커튼이 살짝 열리고 머쓱한 표정으로 시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전보다 한결 가벼워 보이는 모습에 벌떡 일어난 이부키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
“…덕분에.”
“코사카는?”
“감사했다고 전해달래.”
“다행이다.”
이부키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아무리 맑은 영혼이라도 어둠 속에 있다면 물들기 마련이다. 코사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영혼은 여전히 맑았으나 그렇기에 더 위태로웠다. 맑은 물은 한 방울의 잉크로도 더러워질 수 있으니까. 해묵은 미련도, 걱정도 모두 떨궜으니 온전히 떠나갔을 코사카를 향해 이부키는 짧게 묵념했다. 시마는 잠자코 이부키를 지켜봤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코사카가 이부키에 대해 짧게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부키 씨에겐 이미 단단한 땅이 있는데 아직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마 씨가 옆에서 알려주세요. ‘네 두 발은 단단히 이 땅을 딛고 있다고.’]
언젠가 누군가 해줬던 말이 있었다. 믿음을 받아본 사람만이 제 발밑에 단단한 땅이 있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라고. 믿음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제 발밑의 땅이 있음을 의심하며 나아가기에 항상 불안해야 한다고. 그러니 그 발밑엔 무너지지 않을 땅이 있음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누가 그에게 해줬는지 이젠 잊어버렸지만, 그때 말하던 순간의 눈빛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새파란 렌즈 너머에 있던 다정한 밝은색 눈동자 같은 다갈색 눈동자였다. 시마는 오늘 하루 그에게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놓쳐버린 신호가 여기저기 있었다. 이젠 더는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으니 시마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오래 쉬어서 감이 다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
“응?”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
슥, 이부키의 앞으로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않아 새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쉽사리 제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이부키를 시마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오늘 몇 번이고 이부키도 그를 기다려주었으니까. 게다가 시마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까.
“응! 잘 부탁해, 시마!”
“나야말로. 잘 부탁해, 이부키.”
무언갈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던 이부키가 이내 덥석 손을 붙잡고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사람이 누군가의 구원은 될 수 없지만 누군가의 필요는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침잠해 가던 시마에게 이부키가 필요했고, 단단한 땅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달려가는 이부키에게 시마가 필요하듯이. 물론 언제까지나 성립될 공식이 아님을 시마도, 이부키도 안다. 그렇더라도 완벽한 오답은 아니니 상관없지 않을까?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이들의 삶에 완벽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럼, 당장 가자!”
“어딜?”
“대장님에게 보고해야지!”
주인이 흘린 산책이란 말에 흥분한 개처럼 이부키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굴었다. 어떻게 저리 인내심도 없으면서 구마 사제로 지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이부키부터 붙잡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보고하러 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도 들어야 할 말도 있었다.
“엥? 왜 다시 들어가?”
“츠카하라 씨 차 한 잔씩 다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려요.”
“에? 응? 시마? 츠카하라 씨?”
이부키만 어리둥절한 채로 시마의 손에 끌려 들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에 시마가 앉을 때까지도 이부키는 영문 모른단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시마가 준비할 것과 들어야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전자는 대충 알겠지만, 후자는 그게 도통 뭔지 알 수 없어서 시마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 이번엔 좀 달콤한 차로 준비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야기들 나눠요.”
차가 나올 때까지도 말이 없는 시마에 이부키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걸 알면서도 시마는 차가 나오고 각자의 찻잔에 차를 따른 후에도 말이 없었다. 문득 아까완 반대인 상황이란 생각에 이부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기다렸다. 기다리며 어떤 질문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았다.
“구마해야 하는 사람이 네 소중한 사람이야?”
“응?”
돌리는 법 없이 꽉 찬 직구로 들어온 물음에 와장창 무너져 소용없었지만. 차를 마시다 멈춘 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는 이부키에 시마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 돌직구에 당황하다니 아직 제대로 된 구마 사제가 되려면 멀었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마도 제대로 된 구마 사제는 아니지만. 그건 차차 함께 맞춰가며 배워가면 되는 거니까.
“아마 다른 구마 사제들은 도망가거나 쫓아냈으니 안식년이라는 핑계로 도망친 날 찾아온 거겠지.”
“…….”
“키쿄 대장님이 날 추천해준 거 보면 꽤 지독한 놈이 붙었거나 소중한 사람이거나 혹은 그 둘 다거나.”
꽤 날카롭게 집어내는 시마에 이부키는 그저 눈썹만 긁적였다. 키쿄 대장이 소개해줄 때 시마 앞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 했었던 게 이런 말이었나 싶었다. 관찰력이 좋고, 냉철하게 상황 판단할 줄 알며, 논리적인 추론까지 가능하고, 겁도 없고, 대담하기까지. 그렇기에 이부키가 앞으로 하려는 일에 시마가 제일 제격이라고 했었다. 다른 구마 사제들의 능력이 나쁘다는 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이며 모든 결정은 이부키를 따르겠다고 했다. 당연히 이부키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그는 사면이 낭떠러지였으므로.
“아까 있다고 했잖아, 내 말 믿어주고 들어줬다는 사람.”
“응.”
“그분도 사제였어. 젊었을 때 구마 사제로 지내셨다가 결혼하게 돼서 사제직을 내려놓으셨지.”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와 다르게 느리게 이어지는 말을 시마는 차근히 들어주었다. 다행히도 느긋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만큼 포트에 차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적당히 식혀 마시면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마실 수 있는 양이었다.
“내가 정식 서품을 받았을 때 당신 일처럼 굉장히 기뻐해 줬어. 또 내가 구마 사제의 길을 걷는다고 했을 땐 염려해주셨지. 그 길은 한 번 넘으면 돌아갈 수도 없고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니까. 그래도 이런 눈을 가지고 태어난 이유가 있을 테니 해보겠다고 하니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주셨어. 그 옛날 자신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이부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띠었다. 문득 시마도 정식 서품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사제의 길을 걷겠다 집 안에 고했을 때만 해도 반대했던 가족들은 정식 서품을 받을 땐 모두 펑펑 울면서 기뻐해 주었다.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기억이 싫지 않아 시마는 이야기를 들으며 제 안 어딘가로 흘려보냈다. 그건 또 언제고 그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몇 년 동안 이 눈 탓에 별일 없이 구마 사제로 지냈어. 그게 소문이라도 퍼진 건지 약 올랐던 건지 악의는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었지.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어.”
이부키는 아직도 그 웃음소리와 악담을 퍼붓던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보지 못했음에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사고의 순간도,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린 이의 절망의 나락에 빠져버린 순간도. 아주 좋은 눈으로도, 그의 또 다른 자랑인 빠른 다리로도 한 사람은 구하지 못했지만 다른 이만큼은 구하고 싶었다. 그 사람은 원하지 않더라도 이부키가, 이미 떠나간 이가 그러길 바라기에. 그의 욕심이 더 크더라도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단 한 번도 부린 적 없던 어린양이라도 피워 떼를 쓰고 싶었다. 제발 다시 한번만 더 제 말을 들어달라고.
“원래 페어로 움직이던 신부님과 구마를 해보려고 했어. 짐작했겠지만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았지. 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분을 구하고 싶었어. 하지만 다들 도망치거나 쫓아내기 바빴어. 다만 원래 함께하던 신부님이 시마를 추천해줬어. 키쿄 대장님에게 말해주신 것도 그 신부님이야.”
“어떤 놈인진 짐작은 가고?”
“음- 감으로는?”
“그래? 말해 봐.”
“어- 진…짜?”
“네가 그런 걸로 장난할 것 같진 않으니까.”
진지한 시마의 새까만 눈동자에 이부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계속 바라보면 어쩐지 제 속을 다 읽을 것 같아 황급히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마를 소개해주며 당부하던 신부님의 말씀이 왜 이 순간에 떠오르는 걸까.
‘우리엘 사제. 이제 와 말하지만 자넨 스스로를 더 믿을 필요가 있어. 자네의 힘은 그 눈뿐만 아니야. 이 안에 담긴 걸 믿게. 내가 부족해 이번 일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해낼 걸세. 그러니 어느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말게나.’
당시엔 신앙심이 부족한 걸 탓하나 싶었다. 얼마나 더 믿어야 하냐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시마의 말을 듣고 보니 신부님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와닿았다. 이부키의 은인도, 실패한 싸움에 함께 해준 신부님도, 시마도 그에게 딛고 선 땅이 단단함을 알려주었고, 알려주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고마워, 시마.”
“빚을 갚은 것뿐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 하는 시마에 이부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아직 해결된 것도 없고, 해결될 건지도 알 수 없지만 이부키는 제 발을 붙잡던 무언가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시마가 그러하듯이.
“내 감이 맞는다면 우린 굉장히 어려운 적과 싸워야 해.”
“무서워?”
“아니. 시마는?”
“나도.”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순간 웃음이 터졌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악몽과 쉬이 잠들지 못할 날들과 귓가에 계속 맴돌 악담과 육신을 갉아먹을 저주 따윈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의 뒤엔 신의 이름이 함께하고 모든 어린 양을 굽어살피는 성모 마리아가 있으며 죄의 무게를 같이 짊어질 그리스도가 있었다. 게다가 기꺼이 손을 잡고 지옥 길을 걸어가 줄 겁 없는 파트너가 곁에 있었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들은 찾을 수 없는 악 앞에 함께 두 발로 설 것이며, 그 어떤 시련과 유혹이 닥쳐도 물리치고 나아갈 것이다.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승리였다.
Domine Deus Noster
저희 주님이신 하느님
vanifica, pelle et fuga omnem diabolicam potentiam, omnem presentiam et satanicam machinationem
모든 악마의 힘과 사탄의 모든 작용과 활동을 쫓아주시고 없이 하시며
et omnem malignam influentiam et omne maleficium aut fascinum maleficorum
악의 영향과 저주, 혹은 악의를 가진 이들의 시선을 통한 저주와
et malorum hominum perpetratum contra servum tuum.
당신 종을 향해 저지르는 악행들로부터 보호하소서.
ex omni damno aut minatione ab maleficio oriundo et serva,
모든 악과 악으로부터 오는 협박으로부터 당신의 모상을 구하시며,
et pone eum supra omne malum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하소서.
per intercessionem immaculatae semper Virginis Dei Genitricis Mariae,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영원하신 동정 마리아와
splendentium Archangelorum et omnium Sanctorum.
빛을 발하는 대천사들과 당신의 모든 성인의 이름으로 간구하나이다
Amen.*
아멘.
새하얀 성모 마리아상이 놓인 단상. 그 아래 사제복을 입은 이가 한쪽 무릎만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나직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오랜만임에도 노래처럼 막힘없이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고요한 성당 안이 낮은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성호를 긋는 것을 마지막으로 기도가 끝나고 고개를 든 시마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성모 마리아상을 올려다봤다. 이젠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성모 마리아상은 그가 떠났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라진 건 시마뿐이었다. 스스로가 나약하단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 더는 겁내지 않게 됐다. 그의 세례명이 아깝지 않게.
그 언젠가 제 숨을 조르던 로만 칼라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있던 시마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새파란 색이 들어간 안경을 낀 이부키가 몇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미카엘(Michael).”
“여기 있어.”
“준비됐어?”
“언제든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제복에 어울리지 않은 악동과 닮은 웃음이 서로의 얼굴에 피었다. 지금부터 두 사제는 무단으로 침입해 나가지 않고 있는 악마 하나를 끌어내기 위해 날뛰러 간다. 악마는 끊임없이 두 사제를 유혹하고 뒤흔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고 믿음이 있었고 그들을 지켜줄 신의 이름이 있었다. 뭐, 해도 해도 안 되면 서로의 뒤통수를 냅다 치기로 약속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른 사제들이 들었다면 그리 가벼운 마음으로 구마 하려 한다고 역정 냈을 테지만 그들이 알겠는가? 두 사제가 어떤 걸 짊어지고 지금 이 싸움을 하러 가려는지.
“가자, 우리엘(Uriel).”
“자~ 그럼, 싸우러 가볼까!”
파이팅 넘치는 외침과 함께 두 사제는 성모 마리아상을 등지고 나아갔다. 신의 이름과 모든 어린 양의 어머니와 두 대천사의 성명(聖名)을 등에 지고 그들을 기다리는 악마가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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