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 울음소리 _ 1

무츠노카미 요시유키X남심신자

배경은.. 일본이 아니라 어디 먼 동양풍 AU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합니다. 개체차 많음. 다테, 미츠타다, 토사 및 2차 개인 해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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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데가 다 있대냐. 고개를 빼 낡은 저택을 올려 본 무츠노카미가 신음했다. 높게 쌓인 붉은 벽돌담과 굳게 닫힌 철문 너머 우중충한 정원, 그리고 음침하게 서 있는 낡은 저택은 영화에나 나올 법했다. CCTV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래된 양식처럼 보이는 철문은 꼭 감옥 쇠창살 같고. 침엽수 산을 뒤로 끼고 있어 음산함도 더했다. 이런 곳에 정말 사람이 산단 말인가?

소설가, 필명 “텐노사마天の様.”

책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무츠노카미가 알 정도면 말 다 한 수준이다. 올 한 해 미스터리•추리 부문 최고 히트작 『뱁새 울음소리』는 그런 류를 가까이하지 않는 무츠노카미가 보기에도 그럴듯했다. 이 나라에서 하늘을 필명에 박아넣다니 어지간히 기가 센 사람이군, 생각했던 것이 쏙 들어가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되려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혹시 작가가 이과 박사를 나온 게 아니냐, 사실은 대학 교수일지도 모른다, 그런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밝혀진 바가 없어 무츠노카미 역시 백방으로 뛰어다녀 겨우 얻은 실마리였으니 아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겠지. 누가 이런 데에 사람이 살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오래된 시내에서도 차로 삼십 분쯤 거슬러 와야 닿을 수 있는 이 스산한 저택에 사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다. 텐노사마. 최근 주가를 한창 올리며 떠오르고 있는 신인 작가. 알려진 것 하나 없는 비밀스러운 인물.

그리고 사년 전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


"진짜 가려고? 네 말이 맞다면 사람 두엇은 그냥 죽인 미친놈인데도?"

"뭐~,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 봐야제.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들어가겠다는 거 아녀. 다 준비를 혔지."

가방에서 슥, 꺼내 보인 검은 피카츄에 히젠이 질색하며 작은 가방을 던진다.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낸 무츠노카미는 킬킬 웃으며 가방을 잠갔다. 가는 길에 가볍게 먹을 빵과 물,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될 검은색 메모 수첩, 막 새 심으로 갈아 끼운 애장 볼펜. 그리고 한구석에 담아둔 GPS와 매운 스프레이, 스턴건. 이 정도면 준비 만반이지 뭐.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선 히젠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말릴 수 없다는 걸 아는지 입만 삐죽 내밀었다.

"선생한테 말은 했고? 그 자료 선생이 같이 도와준 거 아냐?"

"혔지. 괜찮을 거라 하더구먼, 애초에 심증 뿐이기도 하구.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신신당부 하긴 혔는디."

"가지 말란 소리라는 생각은 안 들고. 야, 네가 형사냐? 그걸 왜 네가 확인하고 싶은 건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은 히젠이 눈을 치켜뜨고 무츠노카미를 내려다보았다.

"너 옛날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거, 니 같이 가란 소리 읎음 오케이란 뜻이여."

물 빠진 청바지 뒷주머니에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꽂아넣은 무츠노카미가 안경을 벗었다. 잠깐 흐린 시야에 찡그렸던 그는 곧 가방을 들쳐메고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히젠이 따라오겠다고 나섰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떼놓고 올 생각이었으나 그는 문지방에 서서 욕설만 내뱉었다. 무츠노카미가 차에 시동을 걸 때까지 히젠은 그 자리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내 금방 돌아올텡께 집 잘 지키구 있어야!"

"죽어서 돌아오면 죽여 버린다, 미친 놈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인적이 드물다 못해 세상 혼자 사는 곳일 줄 알았다면 고민 좀 했을 거다. 정말 사람 하나 묻어도 시체조차 찾지 못할 듯한 곳이지 않은가? 적어도 삼 층은 되어 보이는 저택이라니. 장정이 스물은 숨어 살고 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지갑에 명함까지 제대로 들어있나 확인한 후에야 무츠노카미는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거의 방치되다시피 해 보이는 저택에 초인종이 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으나 백 년도 더 전에 지어진 듯해 보이는 고저택에는 이제 뭐가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꽤 청량한 소리가 저택 안팎으로 울려퍼졌다. 이런 배경에 초인종 소리만 평범하니 더 무섭구만. 차라리 누구든 나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문 너머를 둘러보았으나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자, 무츠노카미는 조심스레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오는 사람은 물론이고 인기척조차 보이지 않았다.

잘못 찾아온 건가. 하지만 주소는 여기가 맞는데. 혹시나 누군가 나올까 싶어 해가 넘어갈 즈음까지 기다렸으나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저택은 해가 지니 점점 더 음산해졌다. 괴담에나 나올 법한 살풍경한 광경이다. 정말 뜻대로 풀리는 거 하나 없구만. 머리를 벅벅 긁은 무츠노카미는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주소는 확실한데, 초인종을 여럿 울렸음에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체 알려진 게 없는 사람이니 일부러 가짜 주소를 올려놓았을 수도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찾아온 건 이곳 말고는 더이상 나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 원점인데……."

하긴, 원래 심증 뿐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정황적 의심이 있다고는 해도 물질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에휴. 그의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푹 주저앉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한숨만 거하게 토해낸 무츠노카미는 머리를 팩 흔들고 주먹을 쥐었다.

좋게 생각하자. 사람들이 열광하는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가 살인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니까. 책은 저도 재미있게 읽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억류당해 나가지 못하는 상황까지 예상했었으니 차라리 다행인 일이다. 기지개를 한번 쭉 편 채 운전석 차 문을 열었다. 이대로 돌아가 평소처럼 히젠, 난카이와 함께 야식이라도 시켜 먹는다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가 될 거다. 새 보도 기사를 찾아야 하니 그건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한껏 끌어올린 마음가짐으로 자차에 타려던 찰나 무츠노카미의 눈에 무언가 비쳤다. 도로 끝에서부터 보이는, 이 덩굴이 가득 진 붉은 벽돌 고저택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윤기 나는 검정 세단.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츠노카미는 앞문을 연 채 그 세단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서둘러 다시 차 문을 닫았다. 문 앞에 선 세단에서 벌컥 사람이 내려서다.

"누구세요?"

퍽 밝은 목소리로 묻는 푸른 머리 소년 뒤로, 한쪽 눈을 가린 장신의 남자가 함께 내렸다. 흙바닥에서도 뚜벅뚜벅 소리 나게 걸어온 남자는 무츠노카미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의 그는 어떤, 평범한 직장인이나 작가라기보다는 연예계에 종사하 사람 같았다.

"저희 집에는 무슨 일로?"

"…저희 집입니까?"

"…무슨 뜻인지?"

이 사람이 그 '텐노사마' 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무츠노카미는 허둥대는 척 하며 준비해두었던 명함을 꺼내 건넸다. TSA 신문사 소속 기자입니다. 인터뷰를 좀 하고 싶어서. 짤막한 이유와 함께 멋쩍게 웃어보이는 무츠노카미를 아래위로 가볍게 훑어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판사에서 주소를 알려주던가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보다는… 제가 열심히 뛰었죠.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꽤 오래 기다렸는데, 아무도 나오질 않아서."

"아."

금빛 눈동자를 굴려 저택을 흘긴 남성은 하하 웃었다.

"사람이 있긴 한데, 조금 야행성이라. 아마 못 들었을 겁니다. 저택까지 초인종 소리가 잘 안 들리거든요. 아래층에 있다면 받았겠지만."

얼핏 본 저택엔 여전히 빛 한 점 없었다. 푸른 머리 소년은 어느새 그의 뒤까지 쫓아와 무츠노카미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이니 장난스레 웃는 것이 딱 그 나잇대 어린애 같았다.

"아드님이신가요? 젊어 보이시는데."

"그보다는 친척에 가깝죠. 그리고… 작가는 제가 아닌데, 음……."

말을 고르던 남성이 미안한 듯 덧붙였다.

"인터뷰를 해줄 지는 모르겠네요.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해줄 것 같은데? 재미있는 거 좋아하잖아."

"사다쨩, 그렇게 말하면 못 써."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도닥인 그는 얼마 더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 들어오시겠어요? 시간도 늦었으니 곧 일어날 거예요. 물어라도 보죠."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호재다. 무츠노카미는 화사한 안색으로 서둘러 차에서 노트북이 든 가방을 꺼내 멨다. 차는 여기 주차해두셔도 돼요. 어차피 오가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 것 같더군요.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며 뒷좌석을 열어준 소년이 무츠노카미를 재촉했다. 얼결에 얻어타게 된 무츠노카미가 넉살 좋게 웃었다.

"어쨌건, 감사합니다. …혹시 성함이?"

백미러를 돌려 시선을 가린 남자가 창 밖을 내다본다. 두꺼운 철창살 문이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앞에 펼쳐진 건조해 보이는 넓은 정원.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것이, 오면서 본 돌담이 전부 이 저택의 돌담인 듯했다 .질문했던 것도 잊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아무 말 없는 남자를 대신해 조수석의 소년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나는 타이코가네 사다무네. 사다쨩. 이쪽은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야."

"오."

"그쪽은?"

그쪽? 무츠노카미가 눈을 끔벅였다.

"무츠노카미 요시유키. 기자란다."

"그렇구나~, 힘들겠네~."

건성으로 대꾸한 소년은 다시 몸을 돌리지 않고 한동안 무츠노카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기자 아저씨 말이야."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린 타이코가네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무츠노카미는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살피기만 했다. 소년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고개를 젓는다.

"이상한 건 아니고. 그냥 다른 지역 억양이 있는 게 다 들려서 말 편하게 해도 된다고 하려 했지."


혼자 사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줄은 몰랐다. 분명히 정보를 접할 해도 혼자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부러 거짓말 한 거였나? 무츠노카미는 고개를 들어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린 천장을 바라본다. 오래되어 보이는 바깥과 다르게 내부는 깨끗히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이 넓은 마룻바닥에 먼지 쌓인 곳이 없다니,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고서야 전부 청소하긴 힘들 텐데. 차고도 그랬지만, 저택 안도 어지간히 컸다. 그렇게 넓은데도 차가 두 대 뿐인 건 이상했지만 여기에 비하면 별 거 아닐 정도다.

"아저씨, 못 먹는 거 있어?"

"으응, 읎어야."

"알았어~."

타이코가네가 문 밖에서 머리만 쏙 내밀었다 쑥 사라졌다. 장을 보고 오는 길이라던 그들은 트렁크에서 식자재만 한가득 꺼냈다. 도와주겠다고 했음에도 친절하게 거절당한 무츠노카미는 타이코가네의 안내를 받아 홀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저녁도 해야 하니 한 그릇 정도 하라나.

어디선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소리, 어느정도 세련되었지만 현대적이라기보다는 예스러운 양식이 남아 있는 내부에 붉은빛 카펫과 돌계단. 아마 대리석이겠지. 꼭 외국 서양의 저택을 통째로 옮겨온 세트장 같군.

가방에 손을 넣어 조용히 녹음기를 켠 무츠노카미는 쇼쿠다이키리가 말한 '안내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디로든 움직이게 되면 의심을 살 테니 얌전히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저택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니 그래도 한 건은 한 셈이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될까. 우선은 그 작가를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야 하려나. 어쩌면 저택 안에 유용한 증거가 있을지도 모르니 이왕이면 저택에 오래 있을수록 좋다. 작가를 구슬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건 분명하고. 소파에 기대 앉은 무츠노카미가 눈을 감았다. 각오하고 들어왔지만 막상 들어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장됐다. 뭣보다 일대 다수라면 필연적으로 몸싸움은 피해야 하니.

아무리 왕년에 날렸다고 해도 최소한 네 명. 그 중 한 명은 저보다 키가 어림잡아 십 센티미터는 커 보였다. 이렇게 되면 가능한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저택이 넓어도 아예 눈에 띄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게 무슨 첩보 영화도 아니고, 되겠냐.

그래도 아예 암담하기만 한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신분을 확인했으니 들킨다고 해도 섣불리 어딘가 묻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겠지. 보통 기자들은 스케줄을 보고하고 움직인다. 가장 먼저 의심받는 건 당연지사니까.

"하아아……."

무츠노카미가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어차피 범인을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심증을 확인하러 온 거다. 생각보다 사람은 무의식적인 반응을 쉽게 노출하니 잘만 떠본다면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땅 꺼지겠군, 손님."

"……악!"

머리 위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와 번개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던 남자는 그가 벌떡 일어나자 따라서 시선을 올렸다. 묘하게 아래위로 훑는 듯한 눈초리다. 게다가 안 그래도 창백한 피부에, 음침한 낯빛까지 더해지니 마치 귀신 같았다. 무츠노카미는 방금의 다짐도 잊고 빽 소리를 치고 말았다.

"뭐, 뭐, 뭐여! 나 암것두 안 혔는디!"

"누가 그렇대? 이거 새가슴이네."

"그렇게 말을 거는디 누가 안 놀라!"

가슴이 아직도 벌렁벌렁하구먼! 후하후하, 숨을 내쉬던 무츠노카미는 부르르 몸을 떨고서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지문 하나 없이 깨끗한 안경을 낀 남자는 고개를 삐딱히 돌려 무츠노카미를 관찰하듯 훑으며 뼈대가 도드라진 손으로 제 턱을 긁었다.

"누, 누구여? 그짝이 작가신가?"

"네가 그 기자고? 겁도 없네. 여기 오면서 뭔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들던."

윽. 가방을 끌어안은 무츠노카미가 입을 딱 다물었다. 하긴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리진 않겠지. 흐린 눈으로 남자를 쳐다본 무츠노카미가 헛기침을 했다.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믄 말이 다르제, 인터뷰 하나만 따도 기사 하나 금방이여. 그러니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안 해볼 수 있나?"

"핑계 하나는 그럴듯하네."

그는 입꼬리를 비틀고선 따라오라는 투로 손짓했다.

"보자시네. 저녁 먹기 전에."

"누, 누구. 작가님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귀찮게 하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따라와. 이건 원래 내 일 아니니까.투덜대듯 이야기한 남자는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나갔다. 거 성질머리 한번 힘들게 꼬였구먼. 무츠노카미는 속으로 혀를 차고서 남자를 따랐다. 근데 이름은 말 안 해 주는가?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거 참…….

남자는 복도를 빙빙 돌았다. 똑같아 보이는 복도를 세 번쯤 지나고서야 도착한 안쪽의 나무문은 화려한 음각으로 채워져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지금껏 지나온 문들은 무난한 호텔방 같아 보였는데, 이쪽은 어디 대기업 회장님 집무실쯤은 되어 보였다.

"여기?"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빨랑 들어가. 귀찮아 죽겠으니까."

"아, 예……."

"그리고 너."

손잡이에 손을 얹으려던 무츠노카미가 흠칫했다. 어째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날카로운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떨게 되는 어투다.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낯으로 팔짱을 낀 채다.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니 내가 또 무슨……."

"반말 할 건 아니지? 보니까 존댓말 할 땐 사투리를 안 쓰는 것 같던데."

존댓말 써. 꼬투리 잡히면 귀찮으니까. 대충 조언 같아 보이는 것을 쑤셔박은 남자는 지체없이 문을 열어제꼈다. 말릴 새도 없이 방 안으로 밀어넣어진 무츠노카미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가 찾던 작가와 마주했다.

눈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백발, 결 좋은 가느다란 머릿결, 앞서 본 자들과 같이 금빛 눈동자를 가진 채 책상에 턱을 괴고 앉은 남자. 그리고 그 옆에 선 까무잡잡한 피부의 검은 머리.

그가 기분 좋게 웃는다. 이를 드러낸 웃음은 마치 그 위로 두려운 사람 따위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듯한 포식자의 눈빛이다. 사냥당할 일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지배자의 권위. 잃을 수 없는 당당함. 반절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

"어서오게. TSA의 기자라지? 내게 뭐가 그리 궁금해서 이 저택까지 날 쫓아온 겐가?"



"어때? 못 먹는 건 없다 하고?"

"그런가봐. 뭐 그렇게 사람 나빠 보이진 않던데."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쇼쿠다이키리는 냄비 뚜껑을 열어 국자로 안을 한 번 휘저었다. 순식간에 부엌 곳곳에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간이용으로 놓인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앉은 타이코가네가 방긋 웃었다.

"스튜 하는 거야? 손님 와서?"

"제일 무난한 걸 하는 거지. 지금쯤이면 카라쨩이 데리고 갔을까."

"그렇겠지? 츠루마루가 직접 갈 리는 없으니까. 나중에 또 귀찮았다고 짜증내겠네."

그래도 부탁하는 건 잘 해주는 아이니까, 카라쨩은. 빙그레 미소지은 쇼쿠다이키리가 냄비에 후추를 더 쳤다. 타이코가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폴짝 뛰어내려 식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곳에 손님이 온 건, 특히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온 건 오랜만이다. 딱히 사람을 가리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기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고. 더불어 '작가' 가 이곳의 주소를 노출하지 말아달라고 출판사에 신신당부까지 했으니 아는 사람이란 '작가'와 그들의 친지 정도인데다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니 말 다 했다.

기자라는 건 의심스러운 부분이었지만 잠시 옛날 기록을 뒤져본 결과 같은 사람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아 보이고, 기자인 것도 맞고, 출판사에서 주소를 흘린 건 아니라지만 그 정도면 어느정도 능력도 되는 사람이다. 몇 번 대화해서 나쁠 일은 없을 거다.

뭣보다, 『뱁새 울음소리』 는 정말 잘 쓴 글이다. 인터뷰 한 번 안 하고 넘어가기엔 아쉬운 소설이 맞다. 딱히 공들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세계에서 호평을 받는 걸 보면 최소한의 퀄리티는 충족한 거나 마찬가지.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었는데 마침 그를 인터뷰하러 기자가 찾아온 것이다! 타이코가네는 평소보다 하나 더 많은 그릇을 챙기며 신이 난 콧노래를 불렀다.

퍽 기분 좋아 보이는 콧노래에 쇼쿠다이키리가 작게 웃자, 그는 툴툴대듯 그릇을 정리하고 그의 옆에 섰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 안 해? 어쩌면 이번에 도시로 나갈 수도 있잖아."

"글쎄, 난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그건 나도 그런데, 끄응. 뭐라고 해야, 좀 더 사람 사이에 섞여야 할 것 같달지……."

"일리 있는 말이야. 물론 다른 사람들이 원한다면의 말이지만."

다정한 미소를 지은 쇼쿠다이키리가 냄비의 불을 껐다. 가스불을 가만히 지켜보던 타이코가네는 고개를 들어 쇼쿠다이키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긴 사다쨩은 이제 학교도 가야 하니까. 조만간 말을 꺼내 볼까."

"뭐, 혼자서도 살 수 있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 정도야."

"절대 혼자 보내지 않을 텐데도?"

"그건 내가 협상해 봐야지. 여기 남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잖아. 밋쨩도 그렇고."

아니야? 싱크대에 턱을 괸 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쇼쿠다이키리가 부스스 미소짓는다. 인정이 넘치는 소박한 웃음이다. 어디건 그 애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지. 부엌 천장의 형광등이 깜박인다. 벌써 갈아야 할 때가 됐나.

"근데 어떻게 딱 오늘 왔대. 내일부터 없을 건데."

"그러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타이코가네가 간이 사다리를 들고 와 찬장 안쪽에서 찻잔 짝을 꺼내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형님들도 부를까? 쇼쿠다이키리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채 냄비의 불을 껐다. 곧 식사 시간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무츠노카미는 멍하게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요리들이 인원수대로 앞에 놓여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츠루마루 쿠니나가, 필명 '텐노사마' 라고 자신을 소개한 백발의 남자는 정말 이름값을 하는 듯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연막용으로 준비했던 갖가지 질문들을 예상이라도 한 마냥 쉬지 않고 대답하기에 그 내용을 받아적는 것만으로도 한참이나 시간을 써야 했다. 원래 소설이란 게 읽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도록 어느정도 비워두어야 하는 게 중요한 거라며 세세하게 알려주지는 않았으나, 큰 틀만으로도 그렇게 오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작품에 대한 설정이 탄탄하게 잡혀있다는 반증이다.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깐깐하다기보다는 느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는데. 그 점은 확실히 의외였다. 그가 한 시간이 넘도록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옆 소파에 앉아 다른 책만 들여다보던 까무잡잡한 남성은 질린다는 얼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본래 성격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작가임은 분명한 일이다.

"기자 양반, 그것 좀 더 먹어 보게. 우리 도령이 신경 써서 준비한 것 같으니."

"아, 예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묘한 구성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무츠노카미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맨 처음 만난 쇼쿠다이키리와 타이코가네, 작가인 츠루마루와 그가 소개한 연락책 동업자 오오쿠리카라. 그리고 저를 그에게 안내한 갈색 머리의 남성과 그를 사이에 두고 앉은 투톤의 남성 둘, 총 여덟 명의 식탁. 게다가 처음 보는 얼굴들은 다들 한 덩치씩 했다. 차림새도 어둠침침하기까지 한 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피아라고 오해해도 수긍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무츠노카미가 곁눈질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쇼쿠다이키리가 가볍게 손짓하며 그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 형제들이에요. 아마노가와 군의 왼쪽에 앉은 사람이 후쿠시마 미츠타다, 오른쪽이 짓큐라고 하고요. 두 사람 다 식물 쪽에 조예가 있어서 정원 관리는 두 사람이 해주고 있네요."

"그렇다곤 해도 전문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냥 담쟁이 덩굴이나 잡초 관리만 좀 하고 있어."

"난 아예 손 안 대지만. 아까 미츠타다와 함께 들어온 사람이지? 기자라고 들었는데."

너는 좀 움직여야 돼. 후쿠시마의 농담을 짓큐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넘겼으나, 정작 그 사이에 낀 아마노가와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열과 성을 다해 제 접시 위의 당근을 사냥하고 있었다. 결국 쨍, 하는 소리가 식당을 울리자 잠깐의 정적이 일고 말았다.

"다 넘어가겠는데 왜 내가 이것들 사이에 앉아 있는 거야?"

짐승이 울듯 으르렁대는 아마노가와만 본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 당장이라도 상을 엎을 듯한 상황이었지만 정작 그의 주변은 평온하기만 했다. 안 그래도 양껏 찌푸린 얼굴에 짜증까지 묻으니 무슨 지옥 수문장 같군. 곧 츠루마루가 소리높여 웃는 바람에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던 무츠노카미만 당황한 모양새였다. 옆자리에 앉은 타이코가네가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괜찮다는 의미로 눈웃음을 지었다.

"약속했잖나, 막내. 약속은 지켜야지."

"너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 역할은 아무래도 츠루마루 씨가 가장 적격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마노가와 군, 당근이 싫으면 고기로 바꿔 줄까?"

"닥쳐. 너나 처먹어."

나는 다 먹었으니까 일어난다. 소리내어 의자를 뺀 아마노가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식당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비어버린 옆자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곧 너나 할 것 없이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온 식탁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에 무츠노카미는 생각했다. 그 사람 이래서 짜증이 많아진 걸까…….

얼마나 웃은 건지 눈물까지 찔끔 맺힌 츠루마루가 낄낄대며 손을 내저었다.

"뭐, 걱정하지 말게. 원래 성격이 저런 놈이니. 그래도 집주인이라고 우리를 안 쫓아내는 게 어딘가?"

"집주인…입니까? 저렇게 젊은데요."

"물려받은 거거든. 아마 백 년은 가볍게 넘었을 걸.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만, 우리야 낡은 시설을 핑계로 눌러앉아 있으니 다행인 셈이지."

오래되긴 했어도 낡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있기에 오륙십 년 전쯤에 지어진 걸 샀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대손손 잘 사는 집안이었다는 건가. 다른 이들도 익숙한듯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딱히 꺼리는 기색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호의라면 모를까.

"그럼 다른 분들도 전부 세를?"

"뭐, 그렇게 됐네. 그래도 꽤 정들었어. 오래 지냈으니까."

추억을 그리는 듯한 목소리다. 무츠노카미는 그런가요, 짫게 추임새를 넣으며 조금씩 식어 가는 요리를 늦지 않게 입에 넣었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의문들로 가득찬 것과 별개로 음식은 상당히 맛있었다. 그렇다고 맛을 느낄 여유까지 갖춘 건 아니었지만.

츠루마루는 제 몫을 다 비우려 식기를 놀리는 무츠노카미를 빤히 보다,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난 사람마냥 씩 웃으며 숟가락으로 스튜 그릇을 두드려 그의 주의를 끌었다. 반쯤 접힌 금빛 눈동자가 흥미를 타고 일렁였다. 무츠노카미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기자 양반."

"예, 예?"

"궁금한 건 다 풀렸나? 인터뷰를 하려고 한참이나 기다렸다면서."

"어느 정도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라면 깊게 파고들어도 괜찮겠지만 아직은 안 읽은 사람도 많은 것 같기에."

"현명한 편이군?"

"종종 듣습니다."

그쯤이다.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오오쿠리카라가 그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췄다. 그는 거의 비운 그릇을 옆으로 물리며 작게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생각입니까?"

무츠노카미는 함께 놓인 잔을 홀짝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필요한 만큼의 정보는 아직 얻지 못했다. 그가 작가임에는 확실했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그가 과거 연쇄 살인 사건들의 범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물론 처음 들었던 정보와 다른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고, 더 있었다간 정말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 차라리 이쯤에서 얼굴도장만 찍고 물러나는 게 좋은 선택이긴 하겠으나…….

무츠노카미는 예의바르게 대답을 골랐다.

"가능하시다면 좀 더 찾아뵙고 싶습니다만."

"…아직 궁금한 게 남았나?"

"조금. 뭣보다 이런 외진 곳에 거주하는 신인 베스트셀러 작가라면 더 그렇죠."

은근슬쩍 운을 띄우는 무츠노카미에 대화를 듣고 있던 쇼쿠다이키리가 미소지으며 끼어들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솜씨가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수준이었다.

"그건 어떨까 싶은데, 저희가 내일부터 한동안 여기를 비워야 해서."

"아.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연례 행사 같은 거라. 미루기가 조금 힘드네요. 그렇지, 츠루마루 씨?"

동의를 구하는 투로 말을 돌린 쇼쿠다이키리를 대차게 외면한 츠루마루가 방긋 웃었다.

"꼭 내가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우와~, 자주 듣는 말이지만 어째 오늘따라 더 제멋대로 들리는걸~."

"정말 이럴 거야?"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군! 여기 지내는 날도 그렇게 길지 않으면서, 그리 걱정할 것 없네. 어차피 한 명씩은 남아있어야 하지 않나? 저 말썽쟁이 도련님을 누군가는 남아서 돌봐 줘야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천장으로 향한 츠루마루에 오오쿠리카라가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고, 집주인이라더니 그런 것까지 해줘야 하는건가. 하지만 한 명만이 남는다면 결국은 인원은 두 명. 빼빼마른 사람과 싸움이라곤 해본 적 없어 보이는 도련님이 상대라면 여차할 때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상 아래로 내려 둔 손이 쉬지 않고 다리를 두드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집안을 둘러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진다. 이건 운이 따르는 건가? 무츠노카미는 초조하게 다른 이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더 오래 있는대도 상관없어. 츠루마루 씨만 괜찮다면."

후쿠시마가 느긋하게 이야기하며 비운 그릇을 오오쿠리카라의 옆으로 물렸다. 대수롭지 않은 태도다. 그 옆의 짓큐는 망설이는 것처럼 숟가락을 몇 번 까딱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쉽게 빠질 수 없는 일정인 것 같았다. 옅은 한숨을 내쉬는 게 남고 싶지만 그러기 힘든 모양이었다.

"나도 츠루마루가 남는다면 걱정은 안 해. 아, 식사 걱정은 좀 해야겠지만. 아저씨가 하는 게 좋을 거야. 못 먹을 거 먹고 쓰러지면 여기선 구급차도 못 부른다."

"뭘 또, 그 정도는 아니네."

"칭찬 아니야."

가볍게 수긍한 타이코가네,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동의를 표한 오오쿠리카라. 결국 미츠타다만이 츠루마루를 달래려 들었지만 허사였다. 하긴 나 같아도 처음 보는 사람이 집에 머물겠다고 하는데 잘 봐주긴 힘들겠군. 여전히 웃는 낯이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도련님을 어지간히 아끼는 건지, 츠루마루를 못 믿는 건지.

그러고보면 이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을 확실히 그었었지. '어쩔 수 없다' 는, '내키지 않지만' 같은 투였다. 이 작가가 그만큼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애초에 서른은 된 것 같고. 그렇게까지 싸고도는 건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아니, 그럴 수도 있다. 만약 숨겨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무츠노카미는 나름의 진심이 담겨 보이길 바라며 주먹을 꼭 쥐고서 쇼쿠다이키리에게 말을 건넸다. 간절해 보이면 좋으련만.

"폐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있다 인터뷰만 끝내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

뭐라 덧붙이려던 쇼쿠다이키리는 츠루마루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을 흐렸다. 이마를 부여잡은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이러면 영… 멋없어지는데……. 도령, 자네는 언제나 멋이 있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샤워는 방 안에 딸린 욕실에서. 크진 않지만 그럭저럭 할 정도는 될 거고요. 수건같은 것도 아까 사다무네 군이 채워 두는 것 같았으니 한번 열어보세요. 캐리어는… 오오쿠리카라 군이 가져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저기 있네요. 감사합니다."

고동색 가구로 꾸며져 차분한 분위기를 내는 손님방은 책장도 여럿 들어차 있는 게 서재 같기도 했다. 달빛이 훤히 들어오는 큰 테라스가 있음에도 무거운 분위기인 건 가구들의 색과 배치 때문이겠지.

오오쿠리카라가 가져다 준 간이 캐리어는 침대 옆에 세워져 있었다. 어두운 색으로 가득한 방에서 그의 주홍빛 캐리어만이 눈에 띄었다.

"걸어서 다녀오긴 힘든 길이니까요.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거예요. 한동안 안 돌아올 테니 편하게 계셔도 되지만… 츠루마루 씨는 은근히 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조심하시고요."

"경고입니까?"

"그보다는 걱정이겠죠?"

"무엇에 대한?"

"잘 알지 않을까요?"

무츠노카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제가 그렇게 불편하신가요?"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웃으며 대답하지만 눈빛은 전혀 아니군. 짓큐 미츠타다는 내내 무츠노카미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마주하기 싫은 건지, 따로 이유가 있는 건지. 팔뚝부터 얼굴까지 번진 흉터에 시선이 간다. 모양으로 봐서 꽤 오래된 흉터다.

시선을 느낀 건지 머리칼 아래로 대충 목덜미를 한번 쓸어넘긴 그가 가볍에 허리에 손을 올린다.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워진 단추, 늘어뜨린 하얀 넥타이와 검은 정장 자락. 무츠노카미는 '그들'을 본 이래 계속해서 품어왔던 의문을 입 밖에 냈다.

"실례지만 혹시 외국 분이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미 아시는 것 같은데요."

능청스레 받아넘긴 무츠노카미에 짓큐는 처음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깜박임 너머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목덜미의 흉터를 잠깐 긁적인 그는 대답을 피한 채 소리내어 웃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가 무지한 자에게 보내는 웃음이다. 무츠노카미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계속 놔두었다가는 눈가까지 훔칠 기세였다.

제 가슴께를 느리게 쓸어내린 짓큐가 눈앞의 그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건… 나중에 츠루마루 씨에게 물어보시죠."

"모든 답은 작가님께 있다, 뭐 그런 건가요?"

"…팔십 퍼센트 정도는요."

미소 띤 얼굴로 남은 숨을 쥐어짜내듯 대꾸한 그는 일그러지는 낯을 가리듯 이제 가봐야겠다며 방을 나섰다. 문단속 잘 하시고, 아무한테나 열어주지 마시고요. 설마하니 아무 방이나 덥석 열어보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조언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남긴 그는 식당을 나설 때처럼 미련 한 점 남기지 않은 태도로 등을 돌렸다. 그러겠습니다, 예의상 돌아온 대답에 짓큐는 선 채로 주먹을 꾹 쥐었다. 돌아볼 듯 어깨를 움직이던 그는 옅게 숨을 내쉬며, 아주 느리게 덧붙였다.

"…아마노가와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쇳소리 기어가듯 긁어내는 목소리가 방 안을 긁었다. 마치 뱀이 속삭이는 것 같은 숨이다. 무츠노카미는 순간 선 채로 뻣뻣하게 굳었다.

"예?"

멍청한 되물음이 문 닫히는 소리에 묻혔다. 기름칠이 잘 된 마룻바닥은 짓큐가 복도로 나선 후에도 한참동안 구둣소리를 울렸다. 무츠노카미는 움직이지 못하고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첫째 날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황량하기 그지없는 정원이다. 장식된 돌이며 잘 깎인 분수대와 나무들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저택과 함께 있어서인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고 어두웠다. 나뭇잎의 푸름까지도 한층 더 낮아 보였다. 음산하기 짝이 없군.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의 곁에 함께 있는 이는 정반대다.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새하얀 머리, 새하얀 셔츠, 새하얀 얼굴에 적당히 어울리는 흐린 곤색 바지와 깔맞춤된 윤기나는 구두. 가벼운 걸음으로 한두 발 앞서 나가는 '작가' 는 저택을 소개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새벽에 그들을 배웅한 후, 아침부터 한 시간 동안 그를 끌고 다녔다. 아니, 야행성이라면서. 더 놀라운 점은 한 시간이나 소개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저택의 구조다. 정말 십구세기도 전에 지어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사치스러운 저택을 이런 외진 곳에 멋대로 지어 관리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서재엔 또 무슨 책이 그렇게 많은지, 밥 먹고 책만 읽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 말이네, 기자 양반. 듣고 있나?"

"아, 예. 소설의 배경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이 저택이었군요."

"그렇지. 많이 바꾸기는 했지만 나름 고풍스런 묘사이지 않았나?"

무츠노카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 죽어가는 색의 식물들을 훑었다. 색만 보면 내일이라도 명이 끊길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싱싱하게 생겼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츠루마루는 무츠노카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는 관심도 없는 듯, 오디오가 빌 때마다 그의 소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제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아직도 할 얘기가 더 남아있다니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있긴 한가 보다.

정원 한가운데 다다랐을 즈음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로 향했다. 무츠노카미는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어제 짓큐 녀석과는 무슨 이야기를 했지?"

아니, 훅 들어오네. 어제 그 사람이 이야기했나. 새하얀 뒤통수에 대고 어설프게 둘러대려니 살짝 불안했다. 어째 이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 같지가 않단 말이지.

"뭐…, 여기저기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그런 얘기들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고요."

"그 녀석이? 하긴 이런저런 얘기를 일부러 늘어놓는 녀석이 아니긴 해."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그거야 자네 행동거지에 따라 달린 거였을 테고."

빙글 돌아 시선을 맞춘 채 짓는 눈웃음이 어딘지 서늘하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무츠노카미가 아닌 척 몸서리치고 있을 즈음 그는 다시 가볍게 반 바퀴 돌아 걸음을 옮겼다. 누가 스릴러 소설 작가 아니랄까봐 섬뜩한 면이 있다. 작풍이나 문체로 남을 판단하는 건 그리 좋지 못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이 딱 맞다고 하고 싶었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어서 그런가, 날씨가 서늘했다.

"오늘 인터뷰는 이쯤 하지. 자네도 자료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할 테니."

"감사합니다."

"여기가 전기는 통하는데 전파는 가끔 막혀서 말이야……. 혹시 안 된다면 저기 바깥쪽 서재로 가보게나. 그래도 거긴 어지간하면 끊기는 일이 없어. 우리가 쓰는 것도 그쪽에 있거든."

오래 있을 거라면 알아둬야지. 무츠노카미는 츠루마루가 손끝을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지나쳤던 곳이다. 저택 오른쪽 끝 사 층. 서재라 그런지 영 햇빛이 안 들어오는 곳이어서 한기가 돌았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떠나는 츠루마루를 보던 그는 전파가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방으로 향했다. 인터뷰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을 정리하고, 히젠에게도 이메일을 보내둬야 했다. 적어도 이곳의 위치 정도는 알려두는게 좋겠지.

츠루마루 쿠니나가, 그러니까 작가라는 사람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이다. 가벼운 태도도 그렇고. 이제 겨우 이틀째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도통 확실한 것 없이 의문스럽고, 동시에 의뭉스러운 면만 있는 사람 같다.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 이때 쓸만한 방법은 한 가지.

있는대로 정보를 끌어모아 대조하는 것 뿐이다. 뭐, 다른 사람도 이곳에 있는 사람이니 신빙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마는.

늦은 오후다. 무츠노카미는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오전에 헤어진 츠루마루는 어디로 간 건지 저택을 한 바퀴나 돌았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신출귀몰한 사람이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넓은 서재는 온갖 책장이 들어차 있었고 심지어 넣을 곳이 없어 바닥에 쌓인 책도 많았다. 하나 건너 하나 뛰어넘어 들어가면, 워낙 조용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서재엔 의외로 사람이 있었다. 긴 직사각형으로 딱 하나 나 있는 창을 통해 붉은 노을이 길게 늘어져 들어왔다. 그 빛으로 책을 읽고 있던 건지, 창문을 마주하고 앉아 있던 그는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알아챈 듯 목을 비틀어 그를 보았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조용한 독서 시간을 방해한 건 그인 듯했다.

"볼 일 있나?"

"…메일을 좀."

"그건 여기보다 아래층 응접실이 더……."

말을 끝내던 '도련님'이 인상을 찡그렸다.

"취미 고약한 새끼."

"놀렸나 봅니다."

책을 소리나게 덮고 담요와 함께 일어난 그는 안으로 들어오는 무츠노카미를 지나쳐 빽빽한 책장들 사이로 들어갔다. 사이사이 소파가 놓여 있더니 이런 걸 위해서였나. 시끄럽게 하면 쫓아낼 거라며 조용하게 속삭인 그는 귀신처럼 소리없이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

아마노가와가 앉아있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콘센트가 있는 곳을 찾아 노트북 선을 연결한 무츠노카미는 곁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소파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다각대는 소리에 높은 책장 사이 보이지 않게 배치된 소파에 앉아 있던 아마노가와가 으르렁댔다.

"소리 너무 커. 시끄러워. 무슨 메일에 쓸 말이 그렇게 많아? 방에서 정리하고 들어오든가."

"아, 매일 연락하기로 해서. 거의 다 됐습니다."

거 요만한 소리 가지고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네. 삼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책장 너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불평에 무츠노카미는 조그만 창으로 들어오는 흐린 햇빛을 흘끗 보고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히젠에게 쓰는 간단한 안부메일이다. 혹시나 넘어가는 길에 문제가 있을까 적당히 암호를 섞어서. 외우는 데는 머리가 빠질 뻔 했지만 외운 후로는 유용하게 잘 쓰이고 있는 그들의 연락책이다.

작가 만났음. 사람이 많았는데 한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다 나갔고 지금은 집주인과 작가 두 사람만 남음. 생각보다 친절하고 요리도 수준급으로 함. 후식이 없었던 게 아쉬울 정도. 일주일은 넘게 머물 것 같음. 사람은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인기척은 없음. 길어질 듯하니 부모님 납골당 헌화를 부탁함. 반지도. 간단한 인터뷰 자료 첨부. 텍스트 파일.

마지막 확인을 거쳐 메일을 보낸 무츠노카미는 눈동자만 굴려 서재를 훑고선 노트북을 닫았다. 가방에 집어넣고 지퍼까지 닫아 소파 위에 올려둔 그가 아까의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암갈색 패브릭 소파에 파묻힐 듯 기대앉은 남자는 감탄이 나올 법한 자세로 앉아 두꺼운 서적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작은 협탁의 보조등은 약했지만 책을 읽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따로 차려입은 것 없이 가벼운 셔츠에 파우더 블루 가디건만 걸쳤는데도 나 이 저택 주인이오, 주장하는 풍경이다.

저 모습만 보면 그림자만 늘어져 침침하게 좁아터진 책장 사이도 편안한 침실 같군. 원래 잘 먹고 잘 자라면 저렇게 되나. 책장에 소리없이 기대 그를 관찰하던 무츠노카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에 영어가 가득했다.

원서인가, 싶어 주변에 꽂힌 책등을 훑으니 아니나다를까 죄다 영어였다. 무슨 집에 영어 책이 이렇게 많아. 무츠노카미는 설렁설렁 그의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원래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알 바야? 신경 꺼."

"아니, 좀 오래 머물게 될 것 같아서, 사과도 드리고 뭐… 그러려고 했죠. 취미십니까?"

"어."

성의도 없고 예의도 없고 짜증은 가득 담긴 대답이다.

"여기 오래 사셨습니까?"

"다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

한번만 더 물으면 나를 대신 물어뜯겠군. 적의 가득한 소리에 무츠노카미는 그쪽으로 기울였던 허리를 다시 폈다. 이런 사람은 멋모르고 계속 찌르면 물리적으로 나를 찌르는 경우가 제법 된다. 설마하니 여기서 당장 덤벼들지는 않겠다만.

하지만 츠루마루의 성격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확률상 꽤 적다. 기회를 놓치고 다시 우연을 가장해 쫓아다니느니 차라리 이번에 궁금했던 걸 다 풀어놓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저 성질 가득한 사람이 얼마나 정직하게 대답해줄 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답을 바로 찾으리라는 기대를 한 적은 없으니 잘 됐다. 무츠노카미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앉았다.

"안 가냐?"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는다. 가볍게 종이를 넘기는 손가락을 따라가며 무츠노카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질문이 좀 있어서요. 작가님한테 궁금한 것도 있는데 이게 직접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과장된 손짓에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린 그가 짜증스런 신음을 뱉었다. 버석버석 소리가 날 듯한 회갈색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은 그가 들고 있던 원서를 퍽소리나게 제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어우. 아프겄는디. 안그래도 날카로운 눈매가 치켜뜨니 지나치게 사납다. 무슨 맹수도 아니고.

"헛소리 하는 거면 죽여버린다."

"어련히요."

"그리고 너 존댓말 그거 쓰지 마."

"예?"

"표준어 억양 존나 이상해. 시발, 이게 어디 말이냐? 그냥 니 쓰던 말 쓰라고."

"…그정돕니까? 그 남자애도 그렇고 다들 귀가 엄청 밝네요. 다른 사람들은 다 토박이인 줄 알던데."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그런 거 여기선 하나도 안 통하니까 때려치워. 기분 더러워."

무츠노카미는 그를 마주보며 소리없이 빙긋 웃었다. 아오 성질 진짜 드러운 새끼. 기자 일 하면서 별 이상한 인간 다 봤지만 이런 쪽으로 사람 열받게 하는 인간은 또 오랜만이다. 아쉬운 쪽이 저니까 참지. 그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아마노가와는 다시 책을 주워들었다. 대답은 해 주겠지만 상대는 안 해 주겠다는 건가. 하긴 이쪽도 필요한 정보만 얻는다면야 그 쪽이 편하지.

조용히 일어나 노트북 가방에서 예의 다이어리를 꺼낸 무츠노카미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볼펜을 딸깍이며 질문을 정리하던 그가 그러고 보니, 하고 운을 뗐다.

"사투리 쓰려면 반말을 해야 하는데."

"해."

사람이 참 열렸는데 닫혀 있다. 도련님처럼 자라서 그런가.

하라는데 안 할 이유는 없지. 무츠노카미는 볼펜 끝으로 머리를 슬쩍 긁적이곤 질문했다.

"여 산 지는 얼마나 된 겨?"

"기억 안 나. 그놈이나 나나 오래됐어."

"그렇구먼……."

다이어리엔 짧게 요약된 답변만이 쓰였다. 오래됨.

"다들 외국인인가? 성씨가 뒤로 가는 것 같던데."

"몽땅 현지인이다. 그건 걔네 문제라 나도 몰라. 관심도 없고 안 물어봤고 걔네도 말 안 해줘."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가 보구먼."

"한 지붕 아래 산다고 다 사이 좋냐?"

예, 아니죠. 개인사 있음, 하지만 미츠타다가 성씨는 맞는 듯. 현지인.

"흉터도 있던데, 그 둘은. 다른 사람은 문신 같아 보이는 것도 있고."

"알 바."

흉터 출처는 모름. 문신 출처도 모름. 아는 게 뭐지.

"그렇게 다 가족인가?"

"아마 친척. 묶여있는 것 같긴 하던데 피인지는 모르지."

친척과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나. 그럼 구심점은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그 사람일 확률이 높다. 다른 이들과 형제고, 대부분의 이들과 친근해 보이는데다 그들과 같은 금색 눈을 가졌으니. 실제로 저녁 요리도 그가 했었지. 쇼쿠다이키리의 이름에 별표가 추가된다.

퉁명스럽게라도 대답해주던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그가 쏘아붙였다.

"아직 멀었나?"

"거의 다 됐제, 그러니까 남은 질문이."

볼펜 끝으로 툭 툭 쳐가며 내려온 눈동자가 아마노가와를 흘겼다. 책 읽는 자세도 그렇고 독서 꽤나 해본 사람의 손놀림이다. 한번 물어볼까.

"혹시 그 사람 소설 읽어본 적 있는가?"

"뭐?"

"『뱁새 울음소리』 말여. 여 사는 사람이 썼잖어."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아 하지 말 걸 그랬나. 근데 그렇게 이상한 질문도 아닌데.

"…읽었지."

전과 달리 아주 느리고 조용히 들려온 대답에 무츠노카미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해가 져 서재 안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양 옆에 책장을 두고 뻥 뚫린 중앙이 아까까지는 붉은 빛으로 가득했는데, 이제는 시꺼멓게 어둠이 깔리고 있다. 들어올 때 전기불을 켜지 않았던가. 아마노가와 옆의 작은 보조등만이 여전한 노란빛을 내며 서재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는 까끌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가볍게 해석하기 힘들 정도로 영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페이지다.

"더럽게 못 쓴 책이던데."

"…다들 좋아하던데."

"그딴 게 책이면 발로도 쓰겠다."

감상을 듣는 건 무리겠다. 팔걸이에 이마를 괴고 그를 관찰하던 무츠노카미가 순간 눈을 감았다. 두꺼운 안경 렌즈를 거친 보조등의 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의 긴 속눈썹이 간간이 깜박이느라 빛을 가렸다. 길고 창백한 손가락이 가끔 가다 안경을 다시 들어올릴 때면 습관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땐 사람들 파악하기에 바빠서 이런 생각도 안 들었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던 무츠노카미는 불현듯 그에게 물었다.

"혹시 말인데."

"또 뭐."

"거…, 잘생긴 건 이 동네 유전인가? 어째 하나같이 얼굴이 빠지는 데가,"

얼굴에 푹신한 게 날아왔다. 어후. 야, 개소리할거면 가라 이제. 예. 무츠노카미는 쿠션을 얌전히 끝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죽어도 책은 안 던지더라.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짐을 든 채 발소리를 죽여 입구까지 나온 그는 문 옆의 스위치를 보고서 마지막으로 소리 높여 물었다.

"불 켤까? 어둡지 않어?"

"꺼지라고!"

예상은 했다. 무츠노카미는 구시렁대며 최대한 소리나지 않게 서재 문을 닫았다. 집주인 성질을 돋구면 귀찮아지는데다, 이 나이 먹고 바람이 불어서 세게 닫혔다는 둥 모양 빠지는 변명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창문이 닫혀 있었으니 춥진 않겠지. 가방 속의 사탕을 까먹으며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 돌아나오던 무츠노카미는 문득 드는 생각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작가 양반하고 사이가 안 좋은가. 도련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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