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샤테디시헌] 상실에 대하여 2

[한 : 다시 그리는 시간/ 빛과 밤의 사랑 드림 연성]

내가 기억을 잃은 로샤를 우리가 살던 집에 버리고 원룸에 들어선 지 한달쯤 지났을 때, 페이슨 요튼의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다. ‘로스차일드CEO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욕을 짓씹었다. 씨발놈. 지가 직접 연락하면 되는 것을 굳이 법무팀을 끼고 연락하시겠다? 나는 욕을 있는 대로 퍼부으면서도 갈 준비를 했다. 어디서 보나 했더니 프라이빗한 찻집이었다. 천하의 페이슨 요튼 CEO 로샤 로스차일드도 사람들 입방아는 무서운가 보지. 나는 비식비식 비웃으며 찻집으로 바이크를 몰았다. 물론 찻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금새 도착했다. 나는 근처에 바이크를 주차한 뒤 찻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 짧은 와중에도 찻집 내부를 구경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로샤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물리적인 아픔보다는 정신적인 아픔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이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나를 모른다 말하는 아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앞자리 의자를 빼서 털썩 주저 앉았다.

“왔습니까?”

“공사다망하신 로스차일드 CEO님이 부르는 데 와야지요. 안 올 수 있나요.”

“다름이 아니고, 이혼 서류입니다. 전적으로 제 책임으로 해서 위자료는 원하시는만큼 드리겠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결말은 이혼이었다. 최소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위자료 명목으로 지급될 돈은 내가 아무리 숨만 쉬며 일한다 해도 모을 수 없는 거금과 집, 차량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이보다 더 달라는 이의 제기 따윈 하지 않고 조용히 이혼 서류에 내 이름을 적었다. 위 당사자 사이에는 진의에 따라 서로 이혼하기로 합의하였다. 위와 같이 이혼의사가 확인되었다. 라는 확인을 구함. 합의 이혼 서류에 적인 문구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나는 내 이름을 적은 서류를 로샤 앞으로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삭막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나는 그대로 뒤로 돌아 찻집에서 나와 주차해놓았던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멍청한 테디, 모자란 테디 라일리. 네가 먼저 이 사람과 그만두기로 마음 먹어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등신이 따로 없지 않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쩔거야. 로샤와의 사이는 끝난 거야. 테디 라일리, 네가 포기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쉴 새 없지 자책하며 미친 듯이 바이크를 몰았다. 그 후, 아무도 반기지 않는 원룸으로 돌아와 또 다시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 사이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과 합의이혼서류가 잘 접수되었다는 알림이였다. 결국 나는 한동안 셀레인 섬을 떠나기로 했다.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다간 슬픔에 익사할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나는 망설임 없이 휘명시를 선택했다. 휘명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


항공, 해운. 내가 있는 곳이 섬이었기에 휘명시까지 갈 수 있는 방법에 제한이 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늘길을 선택했다. 나는 별로 챙길 것도 없이 지갑과 몸뚱이, 작고 가벼운 가방 하나를 챙겨 공항으로 갔다. 휘명시로 가는데 여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생필품은 거기서 사면 되는 일이었다. 돈이 많으면 뭐든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씁쓸해지는 기분을 무시하며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샀다. 공항에 앉아 사람을 구경하다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얼마 뒤에 안내 방송과 함게 높게 날아 올랐다. 나는 지금 남아 있는 구질구질한 마음들을 버리기로 했다. 기억 상실증 환자의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기적에 가까웠고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내가 삶에서 바랄 수 있는 기적을 전부 로샤와 연애하고 결혼하는데 다 썼다고 생각했다. 쥐뿔도 없는 천애 고아, 테디 라일리가 거대 다국적 기업 CEO와 연애할 수 있는 확률과 결혼할 수 있는 확률은 0%였으니까. 어쨌건 이제는 쥐어 짜도 나올 수 없는 기적을 바라느니 내가 모든 걸 놓고 떠나는 것이 맞았다. 뭐, 로샤야 결혼하고 싶은 여자들이 줄을 섰지 않은가. 만일 그가 돌싱이 아닌 애 딸린 이혼남이 되었어도 줄을 섰을 것이다. 그러니 나같은 것보다야 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서 애 갖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훨씬 더 좋을 테지. 나는 비행기 창 밖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거대한 빌딩숲. 셀레인 섬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나는 비행기가 착륙 전까지 셀레인 섬과 휘명시를 비교해보다 휘명시 공항에 도착했다. 어차피 셀레인 섬이나 휘명시나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니까 크게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을 가슴에 새기며 두둑한 통장과 두 다리를 믿고 부동산부터 갔다. 가장 마음에 드는 매물을 골라 계약하고 작고 아담한 집에 들어왔다. 셀레인 섬에서 가져온 짐 따위는 없으니 이제 조금씩 채워넣으면 된다. 어차피 돈은 많았고 괜찮다면 여기에 뿌리를 내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날씨 참 좋네.”

나는 바깥에 나와 중얼거리며 근처에 보인 카페부터 들어갔다. 나는 카운터에서 익숙하게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사람을 구경하기 딱 좋은 창가자리였다. 한참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 카운터에서 만들어진 커피를 가지고 왔다. 나는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커피를 마셨다. 옆자리에 인기척이 났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지?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로샤와 파티에 갔을 때 자주 마주친 남자였다. 월슨 그룹 CEO 육시헌. 그가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테디 씨.”

“…안녕하세요, CEO님. 그…, 여긴 어쩐 일로?”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테디 씨가 보여서 들어왔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아, 네, 뭐…. 그냥저냥이요. CEO님께선…?”

“저야 잘 지냈죠. CEO 말고 육시헌 이라고 불러주면 좋겠군요.”

“네…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남은 커피를 급하게 들이키곤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사석에서 높으신 분을 보는 건 이제 질색이다. 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상류층이라고 불리는 작자들의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로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가 진짜 기억을 잃은 건지 나랑 이혼하고 싶어서 머리통이 비워진 척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솔직히 새벽에 자다 말고 머리통 속이 표백되는게 말이나 되나 싶고. 나는 카페에서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손에서 결혼 반지를 빼지 않았다. 집에 가서 빨리 빼야겠다. 그리고 다른 손가락에 훨씬 더 예쁘고 실용성 좋은 반지를 끼자. 그리고 결혼 반지 같은 건 어디 구석에 처박아서 영원히 꺼내지 말자. 나는 그리 다짐하며 집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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