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에 대하여3
[한 : 다시 그리는 시간/ 빛과 밤의 사랑 드림]
나는 다짐한 그대로 집에 오자마자 빌어 처먹을 결혼반지를 빼냈다. 가지고 왔던 작은 가방에 반지를 그대로 쑤셔 박고 가방도 방 어딘가에 집어 던져버렸다. 이제 로샤와의 기억은 모두 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바로 집을 나와 집에 들일 가구들을 고르고 외박했다. 그 후, 가구가 전부 집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집 - 도서관 - 공원 - 카페- 집 생활을 반복했다. 가끔은 뮤지컬을 보러 갔고, 또 어떨 땐 F1 레이싱을 보거나 트랙을 돌았다. 디자인에 대한 감각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잡지도 보고 디자인 공부도 했다. 나름 바쁘게 산 셈이다. 그러다 문득 셀레인 섬에 두고 온 내 바이크가 생각났다. 내 20대의 대다수를 같이 보낸 애마를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나는 바로 배편을 예약했다. 출발은 내일 아침. 일단 내일 바이크를 챙겨서 계약했던 집도 해지하고 셀레인 섬에서 내 흔적을 완전히 지울 생각이었다.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대다수는 슬프거나 힘든 기억이 많은 곳이었으니까. 인생에서 지워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책상에 펴두었던 디자인 북을 덮고 뜨끈해진 머리를 식히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앞의 공원이나 가서 산책할 셈이었다. 나는 나갈 준비를 하다가 육시헌을 떠올렸다. 육시헌은 내가 공원이나 카페에 들르면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참 신기한 남자였다. 그는 매번 나를 보면 옅은 미소를 지었는데 나는 그를 보면서 우습게도 로샤를 떠올렸다. 나도 참 중증이었다. 미친년. 이혼해 놓고 다른 남자 보면서 전남편을 떠올리는 정신 나간 인간이라니. 결혼반지 빼서 구석에 처박아버릴 땐 언제고. 나는 나를 자책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이잉-.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액정에 뜬 이름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테디 라일리입니다.”
“테디 씨, 언제까지 딱딱하게 전화를 받을 건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나를 타박했다. 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하고는 다시 귓가에 대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육시헌 CEO님. 몸에 익은 버릇이라. 웬일인가요?”
“편하게 육시헌이라고 불러줘요. 당신만 괜찮다면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싶은데, 어떤가요?”
“저녁 식사요? 음…, 괜찮아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1시간 뒤에 집 앞에 나와 있어요.”
나는 육시헌과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무얼 입을지 고민했다. 나는 옷장을 마구 뒤져 너무 격식을 차리지도 너무 편해 보이지도 않는 옷을 찾아 입고 얼굴에 가볍게 화장했다. 작은 핸드백까지 옆구리에 끼고 나서야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허겁지겁 신발장에서 힐을 꺼냈다. 최소 5분 전에는 나가야 하는데 고작 3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평소에 잘 신지도 않던 힐을 억지로 신은 채 허둥대며 바깥으로 나갔다. 내가 나가자마자 검은 세단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타이밍이 잘 맞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차에 탔다. 육시헌은 평소처럼 정장 차림이었다. 나는 그를 너무 빤히 봤단 자각이 들어 볼을 붉히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육시헌 씨… , 잘 지냈나요?”
“그럼요, 테디 씨는 잘 지냈나요? 휘명시는 지낼 만 한가요?”
“네…, 괜찮아요. 셀레인 섬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건네며 정말 돌처럼 굳어 앞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로샤의 차에 처음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돌처럼 굳어 있었다. 로샤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긴장을 풀어줬고. 육시헌 역시 내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 가벼운 이야기들을 건넸다. 나는 그 가벼운 이야기에 적당히 대꾸하곤 다시 나를 자책했다. 나는 왜 자꾸 육시헌과 로샤를 겹쳐보거나 비교하는가. 둘 다 전혀 다른 사람이다. 가정 환경도 이름도 생김새도 회사가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종목도 전부. 내가 자책을 간신히 멈췄을 무렵 육시헌이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도 눈만 끔벅거리며 육시헌을 바라봤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뗐다.
“하실 말씀이라도…?”
“테디 씨가 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든 괜찮아요. 전남편을 떠올려도 괜찮다는 이야기에요.”
내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남자는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그대로 차 문를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는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리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절대 당신을 보며 전남편이란 작자를 떠올린 적은 없어요. 같은 말은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다. 결국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말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식사 내내 음식의 맛 같은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육시헌이 데리고 온 이 식당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내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곤 육시헌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나는 받아먹기만 할 순 없었다.
“다음 식사는 제가 살게요.”
“좋아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휘명시 맛집 리스트를 뽑아서 골라놓을 테니까요.”
우리는 그런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도로를 달렸고 차는 금세 우리 집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육시헌에게 인사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곤 굳을 수밖에 없었다. 집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육시헌에게도 나에게도 익숙한 남자였다. 페이슨 요튼의 CEO, 나의 빌어먹을 전남편. 로샤 로스차일드.
“로샤…”
“테디? 내 아가씨 맞아?”
나는 솔직히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네가 왜 여기 서 있냐부터 시작해서 기억은 돌아온 건지, 일은 어떡한 건지 같은 것들. 잘 지내냐고 묻고 싶진 않았다. 나는 한동안 잘 지내지 못했으므로. 내가 잘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로샤 역시도 잘 못 지내길 바랐다. 나는 그런 말들을 전부 삼켰다. 어차피 이혼했으므로. 내가 제안했지만 로샤가 받아들였으니까.
“아뇨, 당신의 아가씨는 이혼할 때 혀 깨물고 뒈졌고요. 대체 왜 왔어요?”
“사과하려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오밤중에 개그 하세요? 미쳤어요? 당신이 다시 시작하고 싶으면 내가 얼른 가서 네 하고 혼인 신고서 작성하고, 당신이 끝내고 싶으면 나는 또 달려가서 이혼 서류 작성하고?”
“테디, 그런 게 아냐. 나는….”
“됐어요, 지금 엄청 구질구질하고 꼴 보기도 싫으니까. 가세요. 전부인 집 앞에서 서 있지 마시고.”
나는 로샤를 버려두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육시헌의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촌극을 전부 본 것이다. 전부. 나는 도망치듯 내 집으로 들어왔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도 꺼버리고 집 안에 커튼이란 커튼은 전부 내리고 나는 내 집을 암흑 천지로 만들었다. 지금 심정을 말하자면 혀 깨물고 뒈지고 싶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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