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밤] LAS VEGAS
LAS VEGAS
Paradise
'Wecome Las Vegas!'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기적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밤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자, 스트립이 화려함이 단연 돋보이며 번쩍였다. 도시의 초입부터 곳곳에 설치된 머신과 네온사인, 길거리의 쇼는 화려하게 도시를 장식했다.
이곳은 마피아나 트라이어드 조직이 국가에 내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사막을 개척해 만든 그들만의 파라다이스(Paradise)였다. 규모가 좀 된다고 하는 조직은 번듯한 회사인 양 꾸며 어마어마한 자본을 들이부어 호텔이나 카지노를 세웠다. 그들이 아무리 멀쩡한 회사인 척해도 범죄자라는 본질에 걸맞게 주된 수입원은 현금 세탁과 이를 이용한 거액 투자, 부동산 투기였다.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해진 블랙머니로 돈을 벌고 있으니 정당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조직을 위해 존재하는 용병이 R이었다. 불법 비자금 추적은 기본, 경쟁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한 스파이 의뢰까지 모두 말끔히 처리하기로 유명했다. 이 바닥에서 규모로는 작은 편이었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범죄조직은 물론, 기업 가에서도 저명한 블랙리스트이자 VIP였다.
"미스터, 베팅하시겠습니까?"
딜러의 갈색 머리카락이 환한 조명에 반짝였다. 딜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나에 십만 달러짜리 검은색 칩을 세지 않고 밀었다. 딜러는 파란 눈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민 칩을 가지런히 모았다. 탁 트인 카지노에 있는 딜러들 사이에서 맑은 눈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번쩍이는 카지노의 화려함 속에서 지지 않고 더욱 빛나는 황금빛의 그의 눈과 마주친 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블랙잭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히트(HIT)하시겠습니까?"
"응"
여전히 시선은 얼굴에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의 단정한 말투와 순한 눈매가 신경 쓰였다. 슬쩍 고개를 들자 깊은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쿤의 시야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버렸다.
"딜러는 스탠드(Stand) 합니다."
카지노에 있는 게임은 보통 카지노에 유리한 규칙으로 짜여 카지노의 승률이 높게 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돈을 잃는 건 운이 아니라 카지노의 계획된 일인 게 대다수다. 그런데도 이 딜러는 게임을 잘했다. 적당히 플레이어를 이기게 해주어 판돈을 계속 잃어 흥미가 떨어질 법한 플레이어를 테이블에 붙여놓는 능력도 수준급이었다. 쿤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분주하게 나눠주는 얇은 딜러의 손가락을 쫓았다.
일주일 전, 쿤 가문이 운영하는 K그룹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말은 장황했지만, 요지는 돈 떼먹고 튄 놈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쿤은 자신 형의 의뢰는 무시하려 했었다. 쿤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숨겨진 아들이었던 그는 A.A라는 별칭으로 신분을 숨기고 가문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왔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에드안의 모습과 유독 닮은 쿤 아게로의 외모 때문에 쿤은 K그룹의 본거지인 미국과 멀리 떨어져 유럽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K그룹과 쿤은 R의 신변을 위해, 또 K그룹을 위해 서로를 모른 척해주는 게 룰이었다.
쿤은 전화내용을 이수에게만 알렸다. 둘은 고민했지만 역시 돈 떼먹고 튄 놈 잡기는 정도는 쿤이 아무리 최악의 상대를 생각해봐도 쿤가문의 인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다음 건에 일하기로 했던 기업체가 있어 거절할 셈이었다. 하지만 형님은 급한 일이라며 일전에 모스크바에서 목숨을 크게 빚졌던 것을 들먹이며 반 협박조로 간곡히 부탁해왔다. 그때 형님이 얼마나 곤란한 일을 해결해줬는지 알아 쿤은 난감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곁에서 들은 이수가 까짓것 하자며 쿤 몰래 그 형님에게 승낙해 버린 게 문제였다. 물론 쿤은 이수에게 정신이 있냐며 화를 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어쩔 수 없이 R은 홍콩의 센트럴에 잡았던 숙소를 정리하고 약속된 장소에서 K그룹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내부는 보통의 여객기와 달랐다. 승무원도 몇 명 없었으며 모두 K그룹에서 까다롭게 고른 사람들이었다. 이륙할 때를 위한 벨트 좌석 칸을 넘어가면 또 다른 작은 밀실이 있었다. 내부는 뻥 뚫려 회의할 수 있게끔 테이블과 좌석이 있었다. 비행기가 하늘 위에 안정적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모두 벨트를 풀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라스베이거스는 유동인구가 많아.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 총 쏘지 마. 절대. 변장은 하겠지만 라스베이거스는 여러 CEO와 조직 보스들의 소굴이야. 아직 그놈들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으니 항상 주위를 경계해."
이수가 회의실 가운데의 테이블에 라스베이거스의 메인 스트립과 다운타운의 지도를 펼쳤다. 사막의 기적이라, 엔도르시가 의자에 반쯤 기댄 채로 리플 만년필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걔네 라스베이거스에서 잠적했다나, 꽤 큰돈이라 어디 풀리면 너무 눈에 띄니까 계속 주시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정보가 더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봐야 해. 너무 급하게 잡힌 거라 돌발상황이 많을 거야."
쿤이 스트립 주위를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이런 대도시에서는 후방지원할 만한 곳도 없겠네."
아낙이 지도를 힐끔 보더니 웃었다. 저격과 백업 담당인 아낙은 내 할 일은 없겠다며 휘파람을 불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아, 그거라면 할 일 있어. 카지노나 호텔같은데 위장취업하기?"
이수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키가 작아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쉬운 아낙은 잠입임무에 배당된 적이 없었다. 아낙은 명백한 놀림조의 말에 매서운 눈초리로 이수를 쏘아봤다.
"농담이야. 누가 이런 작은 꼬마를 받아주겠어? 이번엔 후방지원도 필요 없어 무조건 전면전이야 아낙. 네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가야 하는데 내 살인 무술을 펼칠 순 없잖아."
이수가 슉슉 펀치를 날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아낙은 인상을 확 구기더니 테이블 위로 뛰쳐 올라가 기어코 한 대를 때렸다. 엔도르시는 하찮은 것을 보는 눈빛으로 이수를 한번 쳐다보곤 자신의 만년필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앉았다.
"어떤 배짱 좋은 녀석들이 미쳤다고 쿤가문을 건드렸을까?"
엔도르시는 손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훑곤 먼지가 쌓였다며 투덜거렸다.
"목숨이 2개 있나 보지."
이수가 농담조로 하하 웃다가 엔도르시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누구든 잃어버린 돈을 찾기 마련이고 그 금액이 많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찾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쿤가문이 직접 해결하지 않고, 혹은 못하고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며 용병까지 고용했다. 이수가 의아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리 뒷배가 좋아도 너무 무모한걸. 쿤 가문은 따로 키우고 있는 개들도 많잖아?"
엔도르시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녀석이 멍청해서 그래. 먹이 준다고 쫄쫄 따라가다니."
아낙이 발로 이수를 쿡 찌르며 말했다. 이수는 '내가 왜!' 라며 소리쳤지만 다들 그 말에 동조하는 듯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수는 속으로 생각도 없이 덥석 의뢰를 받아버리다니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내가 잘못했다, 백번 외쳤지만 당연하게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모두가 서류와 도면 더미에 묻혀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승무원이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승무원은 위성 전화를 건넸다. 이수가 전화를 건네받았으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기는 곧장 쿤에게 넘겨졌다. K그룹의 그 형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 형님은 추가로 받아온 자료를 송신했다며 쾌활하게 말했다. 쿤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일 이후에는 절대 연락하지 마. 빚은 지웠어."
-당연하지, 귀여운 동생. 걱정하지 마 빚은 확실히 지울게.
"가문 내에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차고 넘칠 텐데 대체 왜 나한테 연락한 거지? 형 때문에 이전 의뢰는 거의 엎었다고. 중요한 클라이언트였는데."
-그게, 음⋯.미안 아게로.
싹수없게 끊겨버린 통화에 은혜고 빚이고 형이고 뭐고 때려치울까 싶은 기분이 치솟았다. 끊긴 전화기를 노려보다 다시 승무원에게 건넸다. 승무원은 전화기를 돌려받곤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쿤은 봉투를 보며 이게 뭐냐 물었지만, 승무원은 고개를 숙이고 가버렸다.
노란 봉투는 단단히 밀봉되어있었다. 이수가 서류를 넘겨받아 뜯었다. 그들을 반긴 건 일급 기밀이라고 붉은 표시가 나 있는 아래 FBI라고 선명하게 인장이 찍힌 표지였다. 그 다음 장에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작성되어 있었다. C 호텔 VVIP 오후 11시, 눈으로 빠르게 훑어, 거래 관련된 사항을 지나 페이지를 넘겼다. 이후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본 예측 보고서였다. 복잡한 내용 중 곳곳에 온통 까만 칠이 있었다. 지워지지 않은 부분으로 짐작하건대 K그룹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정보인 것 같았다. 이수는 빠르게 두꺼운 종이 뭉치를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투입된 FBI 요원의 신상과 관련된 페이지는 한 명을 제외하고 아예 뜯겨나가 있었다. 그 한 명도 마저 코드네임이 25인 남자 요원이란 것 이외에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인쇄하여 까맣게 칠하는 후 작업까지 말끔히 마친 자료를 건네받은 건, 사전에 준비된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을 절대 무르지 못하게 비행기 안에서 건넸다. 이건 FBI는 아마 그들이 용병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이유라고 확신이 들었다. 새파란 안색으로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이수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하하, 하. 하여튼 있는 놈들이란. 어쨌건 자기 집 개가 귀엽다 이거지. C 호텔⋯."
이화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C 호텔은 너무 넓어요. 게다가 거긴 프랑스 마피아, FUG가 운영하는 곳이니 도면분석이 필수예요. 저, 저희는 저희끼리 상의를 해봐야겠어요."
이화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탕수육팀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탕수육팀은 그 FUG라는 곳의 조직원들이 모여 만들어진 팀이었다. 각기 FUG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어쨌건 함께 일했던 동료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들은 FUG에게 버려졌고 천운으로 목숨만 건진 채 빠져나와 설립한 팀이 탕수육 팀이었다. 왕난이 이화와 테이블에 잔뜩 펼쳐진 자료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봐 쿤. 이화는 FUG가 얼굴을 알 테니 이번 작전에서 언더커버로는 못 데려가. 이 녀석 퍼그라면 완전 전문가잖아? 꽤 쓸모 있을 거야."
"왕난씨!"
"오랫동안 네 손으로 잡고 싶어 했잖아 FUG의 비자금 장부? FUG의 카지노에서 거래한다면 수수료가 필수야. 당연히 깨끗하게 세탁한 블랙머니일 거고. FUG랑 거래한대도 마찬가지지. 이번에야말로 가문으로 돌아갈 기회잖아, 연 가문 아가씨."
"그렇지만 잠입이 위험한 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이 바닥에선 신분이 명확한 사람이 불리하단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우린 기록상 죽은 사람이고, 게다가 FUG가 개입했다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의뢰도 아니지. 그냥 우릴 믿고 보내줘."
탕수육 팀은 문을 건너 객실로 넘어갔다. 이화는 곧장 따라가려다 멈춰 머뭇거렸다. 연 가문은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가문이었지만 그들이 운영하는 Y 사의 본거지는 프랑스였다. 주 사업 분야는 총기 사업으로 꾸준히 자국의 마피아인 FUG를 추적해온 기업이었다. 이화는 FUG에 보내진 스파이였고, 그때 조직에게 버림받은 이후 죄책감에 가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불법 비자금에 까다로운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비자금 장부는 FUG를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이화는 머리를 저으며 그들을 따라 객실로 건너가려 했다. 쿤은 펜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려 그를 멈춰 세웠다.
"한 명이라도 더 인력이 부족해. 시간도 부족하고. 어차피 탕수육 팀은 널 두고 갈 셈인 것 같은데 고민할 시간에 그들을 위한 작전을 짜는 게 어때."
"⋯."
"퍼그는 그렇게 만만한 조직이 아닌 건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 저 녀석들도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아. 그냥 보내줘."
이화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알았어요. 한번 해보죠."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자 프랑스에서나 보던 에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고즈넉한 유럽과 달리 화려한 모습이 이곳은 미국이라며 요란하게 번쩍였다. 햇빛이 내리비치는 사막의 라스베이거스는 더웠다. 엔도르시는 이미 그늘로 피신한 채 챙겨온 선크림을 발랐다. 쿤은 멀리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수많은 인파에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정말 오랜만에 소란스러운 공기를 맛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쿤은 스미스&웨슨의 M19를 꺼내 탄창을 확인하며 말했다.
"정신없어. 정말 미국은 좋아할 수 없는 나라야."
"쿤, K그룹 본사가 미국에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왕난이 어느새 쿤 옆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끌며 호탕하게 웃었다. 쿤은 맡은 일이나 하라며 왕난을 밀어버렸다. 급작스럽게 앞으로 떠밀려 헛걸음을 내 짚은 왕난은 뒤돌아 하하 웃었다. 쿤은 또 뭘 바라보냐며 왕난을 째려보았다. 왕난은 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 뒤 탕수육팀이 다 모였는지 확인하곤 먼저 스트립으로 출발했다. 이화는 남이 보면 조금 우스울 정도로 비장한 모습으로 떠나는 탕수육팀을 지켜보았다.
탄창 확인을 마치고 쿤을 이수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FBI가 뒤쫓고 있는 일에 잘못 끼어들면 우리도 위험한 건 알지?"
FBI가, 특히 그중에서도 주로 불법조직을 탐사하거나 신원불명의 시민을 조사하는 팀이 개입한 사건에 섣부르게 말려들면 큰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K그룹이 도와줄 수 있는 쿤이나, 연 가문의 비호 아래 있는 이화는 위험을 감수하고 신원을 보증받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꼼짝없이 체포될지도 몰랐다. 쿤은 이수의 말에 귀찮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까 남아있던 코드네임 25는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남겼다고 보는 게 타당해. 한마디로 걔를 찾으라는 거지. 어쨌건 부딪혀야 하는데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이수팀은 두 가지 작전을 준비했다. 본래 본부에서 지시를 하는 쿤이 필드로 나가겠다고 한 탓이었다. 쿤은 이수에게 니가 벌였으니 한번 니가 메가폰을 잡아보라며 말했지만, 이수는 친구 걱정도 살벌하게 한다며 응수했다. 쿤의 자처로 25를 찾는 일은 쿤에게 돌아갔고, 엔도르시와 아낙은 FBI의 보안실을 찾아내 쿤가문에서 찾아온 것임을 밝히고 협력을 요구하기로 했다. - 쿤가문에서 왔다는 것을 밝히기로 한 건 나름 뒤통수 맞은 이수일행의 소소한 복수였다. 모두 쿤이 먼저 요원을 만나는 게 더 당연히 좋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앞의 블라인드 된 내용을 고려했을 때 25의 신상만 남아있는건, 그가 K그룹에 우호적이거나 사건의 중요한 열쇠 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이 그 요원을 찾는 일은 그 넓은 호텔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쿤의 플랜의 성공과 관계없이 다른 작전을 안전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있어?"
"당연하지. 이수 너무 날 무르게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언제는 안 위험했냐.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하지 말자니까!"
"쿤 진정해. 어차피 엎은 물인데 떠담을 수는 없잖아."
"이수. 솔직히 말하면 엎은 물도 다시 담을 수 있어. 천에 흡수시켜서 짜거나 흙이면 통째로 떠서 가열시켜서 증발,"
"아니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맞는데. 어차피 난 가문에서도 버린 자식이고, 가문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하⋯."
쿤은 '아 엎을까'라는 살벌한 말을 신나게 읊조리며 기지개를 켰다. 날씨는 참 더럽게도 좋네. 하늘을 한번 쳐다보곤 쿤은 그늘로 피신해 있는 다른 팀원을 향해 다가갔다.
이수는 멀어지는 쿤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오늘도 팀 리더는 고통받는구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쿤은 시계를 슬쩍 보았다. 딜러는 셔플머신에 사용한 카드를 모아 넣고 있었다. 주류 주문을 받아주는 종업원이 이 테이블에서 멀어진걸 확인한 쿤은 딜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딜러가 쿤을 힐끔 쳐다보았다. 쿤은 다 비운 칵테일 잔을 내려놓고 얇은 천이 깔린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딜러."
"사적인 대화는 받지 않습니다."
"이름?"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이름을 묻는 태도에 황금빛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딜러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쿤을 쳐다봤지만 눈썹을 살짝 올리며 어서 대답하라 재촉했다. 딜러는 금세 굳은 눈빛으로 돌아와 담담한 말을 내뱉었다.
"저는 쥬 비올레 그레이스⋯."
쿤은 벌떡 일어나 손목을 낚아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가깝게 마주 보게 된 둘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쿤은 비올레의 머리칼에 손을 올리더니 귓가로 내려갔다. 놀란 비올레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쿤은 가볍게 귀 뒤로 연결되어 있는 무전용 이어폰 잭을 뽑아버렸다. 귀가 허전해짐을 느낀 비올레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내 표정변화 하나 없던 비올레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쿤은 살짝 웃음이 났다.
"뭐하시는 거죠?"
"무전기 너머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가 넘어가면 안되니까."
"손, 놓으세요."
비올레의 간결한 두 단어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쿤은 빼버린 무전기를 손가락으로 유려하게 감아 테이블에 올렸다. 셔플머신의 작동이 완료됨을 알리는 안내음이 울렸지만 비올레는 배출된 카드를 챙길 수 없었다. 비올레는 허리춤에 있는 검은색 데저트이글의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쿤의 손이 더 빨랐고 더 강한 힘으로 비올레를 자신을 향해 당겼다. 급작스럽게 중심을 잃어 휘청인 비올레는 고개를 돌려 쿤을 노려보았다.
"당신…!"
"소음기도 없는 총 쏴서 뭐하게. 내 제안을 들어보고 마음에 안들면 그때 쏴."
"싫습니다. 이러고 있으면 가드 몰려오니까 놓으세요."
"쿤이라 불러."
비올레의 테이블은 카지노 내에서도 구석진 곳이었다. 게다가 VIP실 안이었고 이곳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원이 확실한 상류층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가드들은 이쪽을 바라만 보고있지 간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지했다간 자신의 인생이 제지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업무를 모른척 하는 것이었다. 쿤은 비올레의 귓가로 속삭였다. FBI, 우리 잠깐 같이 일좀 하자. 비올레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쿤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쿤은 비올레의 말을 끊고 말했다.
"처음 봤을때부터. 언더커버 처음해봐?"
쿤이 비올레의 테이블에 앉았던건 이질감이었지만, 그 감정의 진실은 쿤 자신도 눈치 채지 못했다. 쿤은 그저 그 25를 찾았다고만 생각했다.
"⋯."
"그 어색한 연기는 뭐야? 이천마일 밖에서 봐도 알겠는데. 딜러가 하는 말이 적어서 망정이지, 내가 상관이었으면 너는 이런 임무 절대 안줘."
쿤은 비올레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금쯤 보안본부에서는 푸른 머리의 남자에게 비올레가 손목을 붙잡힌걸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놓아 주어야 제 발로 다시 잡힐 것이다. 덤덤히 본인 자리와 옷 매무새를 정돈한 쿤이 비올레를 쳐다봤다. 쿤씨는 거짓말을 참 잘하시는 분이네요. 비올레는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CCTV를 지켜보고 있던 하츠는 어이가 없어 비명소리도 내지 못했다. 밤의 돌발행동에 본부실의 모두가 비상이었다. CCTV속 밤이 급작스럽게 대기 장소를 이탈하더니, 파란머리의 어떤 도련님과 함께 카지노를 나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키스를 시작했다. 파란머리의 남자는 밤의 긴 머리카락을 헤집어 받치고 밤은 한 손을 그 남자의 목에 두른 채 격하게 얽혀들었다. 밤의 눈은 꼭 감겨있었지만 손은 CCTV방향으로 확실하게 엄지 검지 중지를 펼쳐들고 있었다.
"적은 아니라는 것 같다."
동요하는 팀원들에게 하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시말서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밤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제 동료였지만, 자신은 그의 거짓말 못하는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언더커버로 뛰겠다는 걸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맡아 2년간 백방으로 노력했고, 이 일을 자신의 손으로 끝을 보고 싶다는 밤의 강력한 뜻에 두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어 돌이켜 보니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자신만의 방법으로 날뛰는 그를 통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한가지 확실한건 밤은 절대 팀을 배신하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 당혹스러운 키스 퍼포먼스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1팀 팀원들은 여전히 웅성거리며 CCTV를 힐끔거리고만 있었다.
"동요하지마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 않나. 비올레의 이동동선을 토대로 작전을 다시 짜면 된다."
"그렇지만 리더, 작전 변경은 상부 보고가 필요합니다."
"우리팀 디렉터하고 밤의 팀 디렉터에게만 보고해."
CCTV앞의 요원이 쿤과 밤이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하츠를 향해 외쳤다.
"리더, 최상층입니다. B룸인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최상층에 도달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붙었던 입술이 그제야 떨어졌다. 떨어짐과 동시에 거친 숨을 몰아쉰 비올레는 살짝 떨어져 무뚝뚝한 어투로 속삭였다.
"잘하시네요."
"너도 잘 하면서."
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올레의 재킷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룸 키를 꺼내 제 주머니로 옮겼다. 아까의 키스는 충동적이었다. 카지노를 나서며 비올레가 먼저 제 허리에 손을 올렸고, 이후 정신을 차려보니 질척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동료들하고 연락이 끊겼는데 괜찮아?"
"그 무전기 FBI랑 연결된거 아니었어요."
"그럼?"
"FUG요. 쥬 비올레 그레이스는 FUG에서 쓰는 이름입니다. 진짜 이름은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좋아 밤."
내용이 들리지 않는 먼 곳에서 보면 마치 밤을 보내러 온 연인처럼 보였다. 밤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밤의 허리를 세게 붙잡아 제 쪽으로 바짝 붙인채 스위트룸의 룸 키를 태그했다. 스위트룸 답게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하얀색의 그랜드 피아노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과 잘 어울렸다.
"K그룹이 도난당한건 기술입니다."
"그럼 그 조직은 FUG가 고용한 용병?"
"아마도요. 이 호텔에서 거래하기로 한 것도 FUG의 소유이기 때문이구요."
"이런 정보를 나한테 넘겨도 괜찮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
"기술이라. 처음부터 산업스파이를 잡아달라고 했으면 좋았을걸. 우릴 못 믿은 건가?"
"K그룹에게 신뢰도가 없으시네요."
"거기 솔직히 우리 가문이 하는 곳이지만 믿을만 한 곳이 아니야. 요즘 세상에 정직하게 살면서 그 정도로 갑부인 사람이 있겠어? 분명 뭐가 있을거라고."
쿤은 바 테이블로 다가가 위스키를 하나 꺼냈다. 밤에게 눈짓으로 권했지만 밤은 고개를 젓곤 침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쿤은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물었다.
"무슨 기술인지는 알아?"
"글쎄요. 잡아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2년간 FUG에 잠입해 있으면서 단 한번도 구체적인 정보가 새어나온 적이 없어요. 기밀이라 이유를 밝힐 수는 없지만, 저희도 급하게 투입된 거라 많은 정보가 없습니다."
"너⋯. 생각보다 대책없구나?"
"뭐, 제 전공이 아니에요. 다른 분이 해주시겠죠."
밤은 침상 옆 탁자 서랍에서 새하얀 장갑을 꺼내 끼기 시작했다. 쿤은 바 테이블에 기대 밤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쿤씨 동료분들은 어디계신가요?"
장갑을 완전히 끼고 옷장에서 은색 서류가방을 꺼내 펼쳤다. 여분의 탄창과 장비 중 총집을 꺼내 허벅지에 묶어맸다. 쿤은 여전히 밤을 지켜보며 답했다.
"아, 뭐. FBI 베이스캠프에 갔겠지. 원래는 너희 팀장이나, 더 높은사람하고 직접 만날 예정이었거든. 너와 이렇게 되는건⋯. 우리의 계획 밖의 일이었어."
"그렇군요."
갑자기 본부가 털린다면 하츠씨가 많이 놀랄 것 같네요. 밤은 꺼냈던 서류가방을 착착 정리해 원위치 시켰다.
"이 거래를 의뢰한 Y는 C 호텔의 설립자이자, FUG에서도 영향력이 꽤 큰 사람이에요."
거기 책장 2번째 서가 맨 오른쪽 끝의 파일을 열어보세요. 밤은 한손으로 서류가방을 정리하며 쿤에게 말했다. 쿤은 순순히 책장에서 그 파일을 꺼내 넘겼다. Y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과 간략한 프로필이 들어있었다.
"VVIP룸으로 들어가려면 VIP 카지노를 지나야 하니까, 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문제는 FUG가 고용했다는 용병, 그들의 신상에 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딜러로 위장해 VVIP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구요."
밤이 침실에서 나오며 방 안의 불을 전부 껐다. 쿤은 잔을 완전히 비우고 현관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FUG는?"
"FUG에는 C가 조직을 배신하고 자립하려 한다고 보고했어요."
밤은 쿤의 질문에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통유리로 된 바깥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쿤은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밤을 보았다. 야경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밤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에 물들었다. 이 모습,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인데. 쿤은 밤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쿤은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밤이 어딘가 어색했다. 능숙한 키스를 하는 모습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일과 관련된 내용을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도 어색했다. 두 눈은 올곧고 매서웠지만 자꾸 겹치는 얼굴은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이었다.
"밤. 쥬 비올레 그레이스라는건⋯. 프랑스에 살았던 적 있어?"
"없어요. 아마도."
밤은 고개를 저었다. 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밤의 얼굴이 어두워보였다.
"키스 한번 더 할래?"
쿤은 생각없이 떠오르는대로 내뱉었다. 막상 말하고 보니 무척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밤은 뜬금없는 질문에 침묵했다. 쿤을 지나쳐 스위트룸의 현관쪽으로 걸어나갔다. 밤은 쿤에게 여분의 무전용 이어폰을 건네며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음에 마저 하기로 약속할게요."
"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거야?" 곧 10시라고! 이수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무전도 일방적으로 끊겨버렸고 카지노 곳곳에 숨어있는 탕수육팀도 연락이 끊겼다. 이화는 이수의 돌발행동을 한번 쳐다보고는 탕수육팀의 첩보를 수신하는 제 할 일에 묵묵히 집중했다. 라우뢰는 이수를 한번 쳐다보곤 다시 조용히 고개를 도면을 들여다 보았다.
"이건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뭘?"
"탕수육팀이 보내준 도면하고 호텔 도면하고 안맞는 부분이 있어. 34층인데 아마 밀실인 것 같아."
이불속에 둘둘 말린 라우뢰가 펼쳐진 두 개의 도면을 각각 짚으며 말했다.
"여기, 계단 수도 안맞고 외면을 생각해봤을 때 충분히 빈 공간이 있어. 난 할 일 다했어 베개 돌려줘."
라우뢰는 도면 위에 빨간 만년필로 크게 동그라미를 치고선 이수에게 던졌다. 그리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근래의 전기배치도를 꺼내와 같은 부분에 크게 표시를 해 던졌다. 이수는 라우뢰가 던진 도면을 모두 한번 훑어보곤 압수해두었던 애착베개를 돌려주었다. 그는 베개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이수는 34층과 35층의 표시부분을 토대로 도면 데이터를 업로드 했다. 라우뢰의 말대로 빈 공간이 있었지만 입구를 알 수 없어 맞지 않는 부분은 직접 확인해야했다. 그때 다른 장치에서 끊겼던 무선연결 신호가 다시 잡혔다. 쿤이었다.
-이수?
"쿤?? 너 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거야? 연락도 안되고 걱정했잖아!
-날 걱정했다고? 너도 참 할 일 없나보다.
"지금 어디야?"
-최상층 스위트룸 앞. FBI랑 같이 있어.
"뭐? 네가 왜 걔랑있어?"
-한시가 급하니까 그런 쓸데없는거 묻지마. 오늘 떼 먹힌 돈을 찾아야 할 게 아니야. 우린 다시 카지노로 돌아갈 테니까 작전 다시세우게 엔도르시한테 28층 A실로 가라고 해. 아, 임시지만 동료니까 거칠게 굴지마.
제 할말만 마치고 또 끊겨버린 무전이었다. 제 할말만 하고 끊어버리는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수와 쿤이 포지션을 체인지 한 상태라 평소 쿤의 고충을 이해하는 시간이겠거니, 순순히 그의 뜻에 따라 주기로 했다. 아아, 엔도르시? 네가 할 일이 들어왔어.
"무사!!!!"
문을 세차게 열고 뛰쳐들어온 사이드 테일의 여자는 들어오자 마자 하츠를 찾아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말이야? 우리 밤이 키스를 했다니? 하츠는 예상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밤의 첫키스를 가져간 개새끼 누구야? 목을 비틀어버리겠어!"
첫키스는 아닌 것 같던데요. 하츠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짓삼키며 눈을 감았다.
"저 파란새끼 뭐야?"
왜 밤의 팀 디렉터가 유리인지 알 것 같았다. 팀장이고 디렉터고 팀원이고 저 팀은 죄다 일단 몸으로 부딪혀보자 타입이야. 다 죽이겠다는 기세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마자 CCTV 모니터 앞에 붙어버렸다. 우리 팀 디렉터는 언제 오시려나.
"유리. 진정해 애들이 일을 못하잖아."
금발의 남자가 열려진 문으로 유유히 걸어들어왔다. 하츠는 '디렉터' 하며 인사를 했다. 그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회의용 원형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로, 작전이 개박살난건 둘째치고 우리 밤이!"
"밤씨가 이럴 줄은 나도 몰랐지만 유리. 일단 시간이 급하니 먼저 구하고 나서 생각하자."
"십이수! 나 도착했어! 여기 열려있는데! 여기 맞아?"
엔도르시가 숨을 고르며 문을 붙잡았다. "때마침 필요한 손님도 도착한 것 같네요. 회의 시작합시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회의에 참가하러 본부를 이화에게 맡긴 이수도 내려왔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를 맞대고 나온 대책들도 바로 실행하기에 남은 시간이 아슬아슬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려면 작전 수행을 필드에 나가있는 쿤과 밤이 해야만 했다. 그들은 많은 계획안 중에서 여러 계산을 거쳐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찜찜한 기분에 이수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쿤에게 무전을 넣었다.
"쿤?"
-어 이수.
"34층에 밀실이 있는 것 같아. FBI에게 받은 도면하고도 비교 해봤는데 밀실이 있는게 확실해."
-그래서?
"K그룹의 산업스파이라는 시나리오로 가보려고."
-뭐?
"네가 쿤 가문에서 기술을 넘겨준 내부자인 것처럼 해서 밀실에 숨어있는 진짜 용병대신 나가는 거야. 네 얼굴은 쿤 회장님하고 닮았으니까 굳이 변장할 필요도 없잖아. 첩보에 따르면 Y는 용병을 고용하긴 했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신상을 몰라."
-아,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이수씨라고 했나요?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할게요.
밤이 쿤의 이어마이크를 빼앗아 대답했다.
"밤!"
"한시가 급해요. 쿤씨."
"하지만 무슨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덥썩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죄송해요. 하지만 이 작전은 쿤씨의 동료분들과 제 동료들이 힘을 합쳐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일 거예요. 믿어야해요."
쿤은 고집스러운 밤의 태도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쿤도 제가 아무리 고민하고 문제점을 지적해도 결국 밤의 뜻대로 하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좋아. 하지만 뭔가 위험한 것 같으면 바로 중단하는거야."
밤은 고개를 끄덕이곤 쿤과. 34층으로 향하는 앨리베이터로 향했다.
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34층에 도착했다. 평범한 객실이 잔뜩 펼쳐진 이곳에서 밀실을 찾아야 했다. 쿤은 창문하나 없는 꽉 막힌 이곳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밤. 총 꺼내. 일반인 없어."
밤은 쿤의 손끝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었다. 심지어 비상시를 대비해 상시 대기하고있는 메이드가 단 한명도 없었다. 밤은 허벅지에 매어두었던 총집에서 데저트이글을 꺼내 들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온 복도를 울렸다. 쿤은 이수가 보내준 도면을 확인하고 멈췄다. 방과 방 사이의 벽면 앞에 멈춰선 쿤은 M19를 꺼내며 벽에 손을 올렸다.
"여기."
"벽이네요."
쿤은 자신의 머리보다 높은 곳을 두어번 두드렸다. 확실히 빈 곳을 두들기는 맑은 소리가 났다.
"쿤씨. 어느쪽 객실이 이곳과 연결되어있을까요?"
"이수가 보내준 도면에는 여기 밀실이 있다고도 표시 되어있긴 한데 34층과 35층 사이 계단의 높이랑 다른 층의 높이가 안 맞아. 다른 층간 간격은 같은데."
"그렇다면⋯."
"34층과 35층 사이에 걸친 반층일 것 같아."
쿤은 윗벽과 아랫벽을 차례로 두들겼다. 윗벽의 소리는 맑았지만 허리 아래에 위치한 벽은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밤은 시계를 한번 확인하곤 말했다.
"그럼 살펴봐야 할 방이 총 4개네요. 지금 10시 15분이니까 10분이면 충분할거에요. 제가 올라가서 바로 확인할게요."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계단이 잠겨있어. 엘리베이터가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더 오래걸릴테니 비상계단 문을 부수자."
밤은 쿤의 말이 끝나자 비상계단 쪽으로 동시에 뛰어갔다. 비상게단의 문 앞에 다다르자 밤은 빠르게 데저트이글의 탄창을 장전했다.
"소음기는?"
"챙겨왔어요."
쾅, 하는 거센 소리와 함께 문의 손잡이가 박살이 났다. 손잡이가 사라진 반동으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위쪽 비상계단은 막혀있을까요?"
"내 생각엔 열려있을 것 같은데. 봐봐 CCTV선을 누가 억지로 끊어서 다른 선이랑 연결한 흔적이 있어."
쿤이 말을 하면서 CCTV를 향해 총을 쏘았다.
"나라면 이 곳을 감시하고 있을거야. 듣고 있었지 이수?"
-쿤 너, 알뜰살뜰하게 부려먹는구나.
"얼마나 걸려?"
-금방. 너 상황 지켜보다가 부수기 전에 해킹 시작했거든.
쿤은 이수와 말 없이도 척척 일을 진행해 나갔다. 이수가 처음 쿤과 팀을 맺었을때부터 쿤의 일방적인 까칠함으로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둘은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고 사고속도도 비슷해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이수는 쿤의 삐뚤어진 말을 잘 통역했고 쿤은 그런 이수의 바보스러운 리더십을 인정했다.
-됐어. 출발해.
35층의 문은 쿤의 추측대로 잠겨있지 않았다. 쿤은 아마 1층도 잠겨있지 않을 것 이라고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35층도 사람이라곤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34층에서 밀실이 있었던 지점에 도착해아래쪽과 위쪽을 차례로 두들기자. 아까와는 반대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왼쪽 방이네요."
밤이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왼쪽 방 아래쪽 카페트에 무언가에 강하게 끌린 자국과 얼룩이 남아있었다.
"사람이 끌린 자국 같은데."
쿤이 가까이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댔다. 꾹 눌린 실들이 무언가에 엉겨붙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피."
쿤이 손을 털며 일어났다. 누구의 피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스위트룸에서 픽업해온 마스터키를 이용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방은 평범한 스탠다드 원 룸이었다. 하지만 방 안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깨끗했다. 주위를 한번 훅 둘러본 쿤이 무감하게 말했다.
"청소했네. 흔적하나 안남기고."
프로네 프로야. 쿤이 중얼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덧 10시 30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방을 매번 청소하고 새로운 손님들이 오가면서 들키지 않는 곳. 보통 호텔방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가구를 벽에 붙이거나 고정시키기 때문에 문을 숨길 공간은 무척 한정적이었다. 여기서 움직일수 있거나 들어갈만한 곳은 옷장, 침대 아래, 금고, 신발장…. 잠시 생각하던 밤은 주저없이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를 밀어버렸다.
"들키지 않을만한 공간은 이곳밖에 없어요. 이 방의 금고는 너무 작고, 옷장이나 신발장은 호기심에라도 열어보면 끝이지만 대부분 고정되어있는 침대를 밀어보지는 않으니까요."
침대를 가뿐히 밀어버린 밤은 침대 밑에 깔린 카페트를 돌돌 말아 걷었다. 밤의 말대로 카페트 아래에는 작은 문이 보였다. 작은 문을 활짝 열자 자욱한 연기 너머로 희미하게 방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밤은 퀴퀴한 냄새에 구역질이 나 뒷걸음질 쳤다. 쿤이 살짝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아편…!
"약이야. 방독면 있어?"
"객실에 구비되어 있을거예요."
밤은 신발장의 안쪽에서 방독면 가져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알전구가 들어오는 투룸이 있었다. 내려오자 마자 여기저기 널려있는 사람들은 마약 연기에 취했는지 쿤과 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문이 있는 방과 또 다른 방은 유리문으로 분리되어 공기가 맑았다.
유리문 너머에는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포커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묶여있는 커다란 포대자루가 보였다. 쿤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위협용 공탄을 발포했다. 탕, 공탄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한창 포커에 집중하고 있던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쿤과 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거기 아저씨들."
"쿠,쿠,쿤가문? 너희가 왜 우릴 쫓아왔지?"
"왜 우리가 쫓아오면 안돼? 쿤가문의 것을 가져갔으면 응당 보복 할거라는건 꼬마도 알아."
"그럴리가! 너희는 그럴-"
쿤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총을 겨눠 팔을 쏴버렸다. 팔이 뜯겨져 나가는 파열음이 울려퍼지고 그 열기에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동시에 총을 맞은 사람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퍼졌다. 그 사람 주위에있던 사람들도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총을 꺼내들었지만 밤의 손이 훨씬 빨랐다. 데저트이글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이미 총을 잡은 손이 몽땅 날아간 후였다. 역시 이곳은 환풍구가 있었다. 밤은 환풍구를 최대한으로 열어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했다. 그동안 쿤은 비명소리를 가로질러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묶여있던 포대자루를 풀자 머리에 피가 온통 흘러내려 굳은 사람이 나왔다.
"쿤가문 사람이야."
"누군지 아시겠어요?"
쿤은 고개를 저었다. 가문을 어린나이에 떠났기 때문에 친척이나 이복형제를 잘 몰랐다. 쿤은 바로 옆에 바닥에 얌전히 놓여있던 은색 서류가방을 열었다. 서류가방 속에는 돈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쿤은 익숙하게 돈 뭉치를 차곡차곡 꺼냈고 그 속에는 USB 하나와 작은 플라스크가 있었다. 쿤이 일어서며 두 물건을 모두 집어들었다.
밤이 자연스럽게 아직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의 팔을 비틀어 뒤로 빼 제압했다. 밤은 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일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묶어두려 했다. 그리고 이 일이 모두 끝나면 본부로 데려가 적법한 처벌을 위해 조사할 생각이었다. 쿤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밤의 뜻에 따라 한쪽 벽면에 걸려있던 밧줄을 밤에게 던졌다. 앞쪽으로 밧줄을 감기위해 방심한 사이 그 사람은 온몸으로 밤을 밀쳤다. 밤의 눈과 마주친 그는 이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말을 더듬었다.
"너,너!"
밤은 자신을 공포스럽게 쳐다보는 그를 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아는사람이야?' 쿤이 물었다. 밤은 고개를 저으며 마저 밧줄을 감았다.
"저의 신분은 FUG의 간부 쥬 비올레 그레이스. 저는 몰라도 오며가며 저를 본 FUG의 조직원들은 꽤 있을지 몰라요."
밤은 모든사람을 안전하게 묶어둔 뒤 귀에 꽃아두었던 이어폰의 마이크를 키고 말했다.
"여기는 25. 34층 밀실이에요. 마약이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아, 그리고 민간인 환자가 있으니 서둘러 지원을 와주세요. 진입 경로는 35층 오른쪽 끝방인 F방 침대를 옆으로 밀면 입구가 있어요. 아, USB복사해야 하니 장비도 가져오셔야 할 것 같아요."
-밤.
"유리누나."
-넌 FUG에 잠입해 있던 시간도 길고, 아무리 변장을 한다지만 너무 위험해. 지금 다른 요원 보낼테니까 교대하자.
"아뇨. 제 일이에요. 제가 끝낼게요."
밤은 유리의 말에 대답을 하며 긴 포니테일의 가발을 벗었다. 긴 머리를 하고 한참을 뛰어다니느라 본래의 짧고 복슬복슬한 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밤은 왜 위험한 곳만 골라서 다니는 걸까. 마음같아서는 옛날처럼 현장에 뛰어들어가 밤을 낚아채 본부로 데려다놓고 싶었지만, 밤은 이제 어엿한 한 팀의 팀장이니 그럴 수는 없었다. 또 이 사건도 다른 팀이 가져간다는 걸 밤이 병원에서 링거 뽑고 뛰쳐나와 자신이 하겠다고 회의장을 난장판을 만들고 따냈는데 망칠 수도 없었다. 이렇게 깊은 고민에 빠질 일이 별로 없었던 유리는 괴로운 소리를 내며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쳤다. 이번에도 자신이 져주게 될 것을 직감한 유리는 마이크를 비장하게 고쳐 쥐었다.
-알았어 밤. 대신 파란머리. 밤 얼굴에 생채기라도 나면 내가 죽이러간다.
10시 48분. 쿤은 빠른 걸음으로 카지노로 돌아가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K그룹이 기술을 도난당했다고 의뢰를 했다면 애초에 검은돈이라고 추측하고 계획을 세워 헛짚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USB 째로 도난당한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USB로 이동된 자료의 기록은 컴퓨터에 로그로 남는다. USB는 생산된 고유번호가 있고 당연히 경찰이나 전문가에게 의뢰할 필요도 없이 K그룹의 컴퓨터 전문가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비층을 알리는 엘리베이터 안내음이 울렸다. 카지노의 VVIP룸. VIP룸을 지나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이다. 이곳이 거래장소가 맞는지 아까는 없었던 가드들이 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Y를 만나러 왔어."
"소지하고 계신 무기는 모두 반납해주십시오."
경호원은 주위에 있던 다른 2명의 경호원을 불러 작은 함을 가지고 오도록 지시했다. 밤은 쿤 앞으로 나오며 쿤을 가로막았다. 밤의 움직임에도 쿤은 미동도 없이 무표정한 채 말했다.
"내가 너희의 무엇을 믿고 무기를 맡기지?"
"규칙입니다."
"우리 거래자 아니었나? 이거 왜 꼴이 갖다 바치는 것 같지. 여기까지 직접 거래하러 온 날 보면 알텐데. 난 나한테 손해면 가문도 버리는 사람이라."
쿤은 싱긋 웃으며 구김한번 없이 자란 버릇없는 도련님 연기를 했다.
"말로 할 때 비켜."
맨 앞에 서있던 경호원은 함을 가지고 오는 경호원을 제지하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무언가 지껄였다.
"아, 네. 알겠습니다."
"뭐야?"
"그냥 들여보내라고 하십니다."
"거봐! 역시 아랫것들하고는 말이 안통한다니까."
쿤은 길게 휘파람을 불며 경호원을 조롱했다. 경호원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후 VVIP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복도 끝의 노란 문을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VVIP실의 내부는 살짝 어두웠다. 사용된 벽지나 카펫, 가구가 어두운 색인데다 곳곳에 달린 노란 조명의 밝기가 충분하지 않아스산했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는 터벅이는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복도의 방을 지나칠 때마다 곳곳에서 잔이 깨지는 소리, 하이톤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복도 끝에 다다라 노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노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부는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역한 냄새가 폐부로 들어오자 소름이 끼쳤다.
"아, 걱정하지마 약은 아니야. 내가 좀 독한 시가를 피워서 그래. 들어와."
"당신이 Y야?"
"쿤의 애송이. 가문을 등지고 이런 일을 하다니."
"우리 아버지는 자식이 많아서 나 같은 애가 있는지도 모를걸."
쿤은 비웃으며 자신 주변의 연기를 휘휘 저어 없앴다. Y의 방은 복도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한쪽 벽면은 서가였고 창문하나 없는 방에 짙은 갈색의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조명도 검붉은 색인데다 연기가 자욱해 방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Y는 나른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약은 가져왔어?"
밤은 약이라는 소리에 살짝 흠칫했다. 쿤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은색 가방을 열어 투명한 플라스크를 꺼냈다. 쿤은 플라스크를 보란 듯이 흔들며 이야기 했다.
"당연하지. 원하는게 이거야?"
쿤의 손에 들린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던 Y는 고개를 끄덕였다.
"쿤의 애송이. 조심해서 다뤄. 그걸로 한 조각 만들어도 12시간은 지속되고 24시간 내에 체외로 배출되는 최신형이라고. 비싼거야."
"아, 이게 이렇게 비싼거란 말이지?"
쿤은 밤이 잘 보이게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밀실에서 나올 때 현장에 도착한 팀원들의 도움으로 USB는 복사를 했지만, 플라스크의 내용물은 단단히 밀봉되어있어 샘플을 따로 수집해 놓지 않아 이 투명한 액체의 성분을 조사하지 못했다. 밤의 귀 뒤에 숨겨놓은 소형 카메라가 그 장면을 소형 카메라로 상황실로 중계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요원들이 이곳을 진압하고, 쿤의 동료들은 FUG의 비자금 장부를 털기로 했다.
밤은 과하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FUG의 간부 비올레 휘하에 있던 고스트들을 탈출 시켜준 이후로 FUG는 요 근래 자신의 정체에 관해 의심을 갖고 있었다. 밤도 그 일로 큰 부상을 입었고 때문에 본부에서는 밤의 안전을 위해 본래 계획보다 이르게 이 일을 마무리를 짓기로 했던 것이다. FUG는 분명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고 FUG의 이어폰을 쿤이 빼버린 직후부터 사람이 따라붙을 것을 생각해 쿤과 한눈에 반한 것처럼 키스를 하며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분명 누군가는 따라 붙었을 텐데. 전혀 그런 낌새도 없이 순조롭자 불안감이 온몸을 찔렀다.
쿤은 플라스크를 가져온 은색 가방에 넣고 케이스를 잠구곤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쿤은 케이스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돈."
"급하시네."
Y는 손에 들고 있던 다 탄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그는 손을 까딱여 바로 곁에 있던 조직원 하나를 불렀다. 그리고 쿤과 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입을 가리고 귓가에 작게 무어라 전했다. 깍두기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곧장 룸을 나갔다.
"금방 가져올거야. 시가라도 피울래?"
쿤은 무표정한 채로 그의 말을 무시했다. 가죽 자켓의 안 주머니에서 시가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설치된 전자인두에 끝을 비벼 불을 피웠다.
"아쉽군."
Y는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연기를 길게 뿜었다.
-밤?
밤의 이어폰을 타고 이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약하게 끄덕여 카메라의 흔들림으로 대답을 전했다.
-쿤은 이어폰을 뺀거야?
다시 한번 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진입했다고 판단하고 모든 팀원을 베이스캠프로 불렀다고 했다. 하지만 호텔 곳곳에 변장하고 숨어있던 탕수육팀 전원이 연락이 닫지 않는다고 했다. 이수와 함께 베이스캠프에 남아있었던 이화는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하고, 심지어 FBI의 CCTV실까지 찾아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탕수육팀의 행방이 묘연한 것 자체로도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탕수육이라는 말에 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밤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쿤이 밤을 돌아보았다. 아까와 달리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에 '무슨 일이야?' 라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그때 노란 문이 열리며 아까 나갔던 조직원이 커다란 검은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Y는 고개를 쿤을 향해 치켜들어 가방을 열어 보여주라는 사인을 보냈다.
"현금. 5000만 달러야. 충분하지?"
"좋아. 깔끔하게 가자고."
쿤은 은색 가방을 발로 밀었다. 은색 가방을 받아든 조직원은 돈이 든 가방을 잠궈 쿤 쪽으로 밀었다.
"그럼 이제 볼일 없지?"
쿤은 가방을 챙기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밤도 곧장 뒤이어 쿤의 뒤로 바짝 붙었다.
'하나, 둘,'
쿤이 손잡이를 꾹 쥐었다. 저쪽에서 '달칵' 하며 내용물을 다시 확인하기위해 가방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멈춰!"
'셋'
조직원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문을 확 잡아당기자 문 너머에 서있던 요원들이 방 안으로 들이 닥쳤다. 빠르게 대형을 맞춘 요원들은 순식간에 Y와 그의 조직원을 포위해 총구를 겨눴다. Y는 당황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시가를 피웠다.
"애송이. 이거 한방 먹었네."
하츠가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밤은 하츠에게 다가갔다.
"하츠씨."
"밤. 다음부터는 이렇게 급박하게 뛰쳐나가지마라. 그 유리공주가 걱정하느라 중계모니터 앞에서 꼼짝앉고 2시간을 서있었어."
"죄송해요. USB는 회수 하셨나요?"
"응. 거기 있던 녀석들도 수습해서 본부로 이송중이다. 어이 파란머리 귀치장. 무전기 받아."
하츠는 쿤을 향해 무전기를 던졌다. 쿤은 무전기를 깔끔하게 받았지만 저 놈의 말투가 매우 마음에 안들었다. Y는 재떨이에 시가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표적의 움직임에 요원들은 예민하게 주시했다. 뜬금없이 서가 쪽의 책을 몇권 뽑으며 말했다.
"사실은, 너가 누군지 이미 알고있었어. A.A."
"뭐?"
총 7권째 책을 뽑자 서가가 움직이며 뒤의 깜깜한 밀실이 드러났다. 이쪽까지는 접근하기 어려워 정보가 부족해 도면 담당인 라우뢰가 조사하지 못한 밀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준비를 했지." Y가 문을열자 두명의 조직원들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요원들은 애써 잡은 간부가 도주할까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총을 세게 쥐었다. 이내 밀실 안에서 두 조직원들이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여기는 FUG야. 도망친 쥐새끼들 얼굴정도는 기억해."
"왕난!"
"왕난씨?"
쿤과 밤이 동시에 외쳤다.
"약에 취해서 아무것도 못 들어. 얘네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물러나."
하츠도 놀라 수천번 훈련했던 인질대처 순서도 하얗게 증발되어버렸다. 밤의 FUG시절 동료들. 섣부르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Y는 얼음같이 굳어버린 모두를 보고 큰소리로 웃었다.
"아, 그래. A.A.뒤에있던 너. 쥬 비올레 그레이스. 오랜만에 동료를 만나니 어때 감회가 새롭나?"
밤은 금방이라도 뛰쳐 나갈듯한 태도로 총집에 손을 올렸다. 죽은줄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있었다. 밤의 눈이 드물게 분노로 일렁였다. 두 번째로 같은사람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놓으세요!" "FUG네테 바라는게 많아."
"당신들, 그들에게…, 떠난 사람들에게 손대지 않기로 했잖아!"
"가족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 그들을 다시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한적 없어."
Y는 가래가 끓는 걸걸한 목소리로 미친 듯이 웃었다. Y는 서랍장을 열어 자신의 총을 꺼내 가장 어린아이인 미생이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댔다.
"일단 사람부터 물려."
방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한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민간인의 보호가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의 요구를 들어주며 대책이 나올 때 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좋아, 그다음 A.A. USB와 플라스크는 어디있지?"
"몰라. 너희가 열다가 빠뜨린건 아니고?"
"귀치장!"
"여러분 일단 물러나세요. 민간인, 민간인의 보호가 첫 번째입니다."
밤의 말에 Y는 고개를 까딱이며 미생이의 머리에 총구를 더 바짝 가져다 댔다. 요원들은 총구를 거두지 않은 채 Y에게서 한발짝씩 물러났다.
-밤! 동요하지마! 훈련한대로 해.
이어폰너머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의 목소리 너머로 로의 다급한 목소리나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상황이 좋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구할겁니다. 유리누나, 근처 병원을 수배해 주세요."
미생이의 상태는 좋지 않아보였다. 밤은 쿤이 물건의 위치를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재촉하지 않았다. 쿤은 쓰러진 왕난을 무표정한 채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물건 어디있지?"
쿤은 마지막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츠는 답답했다. 일단 말해주고 후일을 도모해야지, 여기서 버티면 어쩌자는건지. 저 새끼 때문에 오늘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Y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축 늘어진 미생의 목을 비틀어 쥐었다.
"안타까워. 네가 한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아인거야."
'탕'
"으아악!"
Y의 총이 엄청난 힘에 의해 튕겨져 나가 손가락이 부러지며 비틀렸다. 엄청난 고통에 미생이를 잡고 있던 다른 손이 풀렸다. 그 순간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왕난이 빠른 속도로 Y를 붙잡아 결박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위의 FUG의 조직원들이 손 쓸 틈도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왕난을 향해 총구를 겨눴지만 쿤과 하츠, 밤의 총탄에 이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온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왕난은 안 주머니에서 마취제를 꺼내 Y의 목덜미에 꽃아넣었고 Y는 저항한번 못하고 축 늘어졌다. Y가 쓰러진걸 확인하자 왕난은 '끝났어! 모두일어나!' 라며 외쳤다.
"다 끝났어?"
아크랩터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프린스는 기지개를 켜며 묶여있느라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고생은 일어나자마자 미생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크게 다친데는 없어보이지만 미생이는 약에 노출되었었으니 깨어나도 후유증이 심할거에요. 일단 병원으로 가야하는데⋯."
"고생씨. 이 사람을 따라가세요. 도와주실 수 있을거에요."
밤이 한 요원에게 안내를 지시했다. 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밀실에 있던 내내 미생이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아크랩터와 미생이를 업은 호량과 방에서 사라졌다. 프린스도 왕난에게 따라가보겠다며 가볍게 손짓을 하고 방에서 나갔다. 여러 요원들이 들어와 방 내부를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쿤은 왕난에게 팔짱을 낀 채 다가가 물었다.
"용케 제정신이었네."
왕난은 Y의 총을 날려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탄환을 주웠다.
"쿤. 우리가 깨어있다는거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몇년을 이 바닥에서 굴렀는데. 그리고 FUG놈들의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겠어? 물건은 어쩐거야?"
쿤이 Y가 열었던 케이스를 가져와 열어 보였다. 아까는 없었던 플라스크와 USB가 고이 들어있었다.
"흔한 마술가방이지"
왕난이 네가 그럼 그렇지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바꿔치기 한거야? 그건 그렇고 이 탄환은⋯."
"여러분은 믿으라면서 남들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에요. 저 아니었으면 또 어쩔 뻔 했어요?"
이화가 밀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탄환을 챙긴 왕난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화염차~, 너도 마술사야? 어째 거기서 나와?"
"갑자기 연락도 안되지 CCTV에 남은 흔적도 없지. 사람 걱정은 다 시키고⋯. 이 호텔은 대칭구조니까요, 반대편에서도 통로가 있었다구요."
"대단한데? 게다가 명중했어~ 대단한데?"
이화가 뾰로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저도 할때는 한다구요! 저, 저,저사람은 비올레?"
밤이 웃는 표정도 아니고 우는 표정도 아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이화씨." "당신이 여기에! 당신 FUG의 간부잖아요!"
"다들…. 살아계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왕난이 밤의 어깨를 감싸며 안았다.
"비올레.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다!"
왕난은 하하 웃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우리 비올레, 보통사람 아닌건 알았지만 무시무시한 퍼그에 몰래 들어온 비밀요원이었다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느낌에 밤은 가슴이 아릿해왔다. 이화는 들고있던 꽃이 새겨진 하얀색 총을 정리하며 툴툴거렸다.
"비올레씨. 그,그래도 나쁜사람은 아니었네요."
"저는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여러분은 여전히⋯, 탕수육을 좋아하시나봐요."
"일 끝나고 다같이 시켜먹는 탕수육이 제일 맛있잖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당장 다같이 시켜먹을거라구. 비올레, 아니 밤 너도 오랜만에 함께 먹을래?"
밤은 살짝 맺혔던 눈물을 금세 지우고 웃어보였다.
"네!"
어느새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미생이가 깨어났다는 연락에 왕난과 이화도 병원으로 떠났고, 하츠도 밤에게 먼저 가보겠다며 사라졌다. 물론, 유리공주가 귀치장놈을 찢어 죽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큰 사건을 하나 끝냈다는 감동과, 이유 모를 답답함이 뒤엉켜 설렘과 비슷한 두근거림이 온 몸을 휘감았다
"밤. 우리 아직 약속이 있지 않아?"
쿤이 문에 기대 밤에게 물었다. 그 두근거림에 대한 해답이 바로 앞에 있었다. 아, 하는 의미없는 소리를 내뱉은 밤은 피가 묻은 하얀 장갑을 벗으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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