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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밤] 쿤씨…. 생일이었어요?

쿤밤 합동지 - 푸른 등대에 이는 파도

FARM by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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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버]

맑은 강에서 주로 서식하는 하얀 몸통에 긴 지느러미를 가진 아름다운 신해어. 속도가 빠른 편이고 고농도 신수 속에서 살고 있어 잡기 매우 까다롭다. 플리버의 눈물은 푸른 보석으로 굳는데, 그 모습이 예쁠 뿐 아니라, 가루로 내어 의약품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꽤 비싼 가격에 팔린다. 이를 전문적으로 노리는 팀이 있을 정도.. 그러나 정작, 이 신해어가 탑 안에서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플리버는 일생에 단 한 번, 사랑을 이룬다. 짝을 만나기 위한 그 여정이 절대 쉽지 않아, 허무맹랑한 전설이라 취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한 번 연을 맺은 신해어 한 쌍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를 만들어낸다. 그 결정은….

월하익송의 본 부유성이 있는 77층의 백련의 숲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진녹색으로 물든 숲 사이사이 신비로운 기운이 솟아났고, 맑은 시냇물 위로 쏟아지는 볼라이트의 빛이 부서지듯 반짝였다. 응접실 한쪽 통유리 너머 펼쳐진 풍광을 정신없이 보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이비, 오랜만이다.”

“우렉씨도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월하익송의 부유성은 특별한 윙트리를 가진 사람에게만 보이는 인비저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1개짜리 윙트리를 가지고 있는 밤은 어렵지 않게 월하익송의 아지트에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우렉 마지노가 다행히도 부유성에 있기도 했고.

“핫초코 좋아하냐? 이거 누가 좋아하는 건데. 널 보니 생각나서 특별히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렉이 자리에 앉으며 아직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컵을 밤 쪽으로 밀었다. 밤은 컵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보다가 뜨거운 음료를 호호, 불었다. 입김을 따라 올라오던 김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었다. ...꼭 나 같다. 밤은 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어쩐지 허탈했다. 시간이 급하니 일단 월하익송에 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평소 밤의 성격대로라면 바로 용건부터 말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지만…. 쿤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도 없었다. 억겁과 같은 찰나를 고민하다 결국 이런저런 살을 덧붙이느니 그냥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월하익송에서 키우던 신해어가 도망쳤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으응?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하, 그게요.”

‘그 신해어의 분홍색 보석으로 만든 시동무기를 구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요.’그렇게 말할 뻔뻔함은 없었던 밤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 가득 진한 달콤함이 달라붙었다. 밤의 번뇌를 모르는 우렉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때마침 잘 와줬어! 베이비.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플리버,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키우고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어느 날부터 찾아왔어. 백련의 숲 자체가 말하자면 그 신해어의 서식지이자 수조인 셈이거든…. 근데 어쩐 일인지 한 마리가 가면 안 되는 곳으로 흘러가서 말이야.”

“대충 사정은 들었어요. 하츠씨와 이수씨에게 들었는데 선별인원들 사이에서는 기회라며 포획하려는 사냥꾼들이 제법 있는 것 같아요. ..많이 위험한가요?”

“그 녀석 외양은 아름답게 생겼지만 제법 흉포한 편이다. 제 구역 밖의 것들에게 무척이나 사납고 예민하지. 애송이들이 당해내기엔 꽤 위험한 녀석이거든. 잡아서 회수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선별인원 구역에 랭커는 들어갈 수 없어서.”

“애초에 고농도의 신수 속에 사는 신해어가 왜 선별인원 구역으로 갔을까요? 보통은 훌륭한 서식지를 잘 벗어나지 않을 텐데요.”

“이유를 알아내는 건 나중 문제다. 이유를 알면 다음에 탈출하는 걸 막을 수는 있어도 이미 나간 녀석을 불러들일 순 없잖아? 아무리 77층까지 온 선별인원이래도 당해내기에 위험해. 뭐, 일단 지금 당장은 발견하는 빈도에 비해 사고는 적은 것 같긴 하지만….”

우렉의 표정은 짐짓 심각했다. 플리버의 서식지가 암암리에 백련의 숲으로 알려진 이상 플리버가 선별인원 구역에서 난리를 친다면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부단장씩이나 되는 우렉이 이 일에 직접 관여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근데, 플리버는 갑자기 왜? 너도 그 파란 보석에 관심이 있나?”

베이비가 원한다면 하나쯤은 그냥 내어줄 수도 있는데. 우렉이 새끼손가락을 슬 들며 물었다. 갑자기 이러시기에요? 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데다 사레가 들러 캑캑댔다. 헛기침하던 밤은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더듬더듬 이곳까지 방문한 이유를 밝혔다.

“..보석이 필요한 건 맞지만, 정확히 찾고 있는 건 다른 색으로 만든 시동무기에요."

“아…. 그거 월하익송에 있어. 따지고 보면 무기도 아니지, 그냥 귀걸이야. 예쁘다길래 내 사랑 가람에게 주려고 구했었는데, 가람이 자기 귀를 안 뚫었다면서 매몰차게 거절당했거든..”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닌지 우렉은 풀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밤은 굳이 가람씨가 귀를 뚫으셨지만 우렉씨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죄송해요. 우렉씨,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더 나은 것도 있으니까요.. 대충 합리화를 마친 밤은 컵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그 신해어 잡아다 드릴게요. 대신….”

“그걸 달라고?”

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렉은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월하익송의 선별인원 스페어를 보내봤으나 빈번히 실패해서 난감한 참이긴 했다. 귀걸이를 내어주는 게 아깝지는 않았다. 다만 밤이 잡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보듯 밤을 죽 훑어보았다. 전보다 몸도 튼튼해진 것 같고.

“흠, 좋아. 혼자서는 어려울 거야. 베이비, 이왕이면 네 동료와 함께 가는 편이 좋을 거다. 참, 신해어 잡이 해본 적 있어?”

쿤씨…. 생일이었어요?

<푸른 등대에 이는 파도>

쿤은 자신의 생일을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밤이 듣는다면 기겁할 소리였지만, 자신은 그날을 딱히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0가문에서 태어난다는 것. 어떤 이들에게 도달할 수 없는 축복이었지만, 실상 그들에게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뼈 안에 새겨진 운명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야 하는 꼭두각시. 가문의 암투 속에서 일찍 세상을 깨달은 쿤은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잘 알았다. 무수한 시간이 흘러 살아남으려는 집착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었어도 딱히 태어난 날을 기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생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쿤이라고 사랑하는 이의 생일을 챙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밤의 생일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스물다섯번째 밤에 태어나서 이름이 스물다섯번째 밤이라는 정보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바쁜 시기에 굳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 어떻게 풀고 맺어야 할지 피차 난감하지 않겠는가. 자연히 쿤과 밤이 알 사람은 다 아는 연인이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생일 이벤트라는 달콤하고 무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어렵게 묶어둔 인연의 끈을 조금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쿤은 생일이라는 주제가 나올 법한 순간마다 노련히 화제를 돌려왔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밤이 여태 쿤의 생일을 모르고 있을 수밖에, 아니 생각도 못 하고 있었을 수밖에.

“그러게, 이맘때쯤 쿤 생일이었던 것 같은데.”

단이 운동화의 끈을 고쳐 매며 흘러가듯 중얼거렸다. 뜻밖의 이야기에 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단에게 재차 물었다.

“네? 쿤씨의 생일이요?”

“...? 몰랐어?"

몰랐고 말고요.

밤의 황금빛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탕수육팀에 있을 때 배운 대로라면 생일이란 무조건 요란하게. 떠들썩하게. 모두가 모여서 축하를 해주는 그런 날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여태 단 한 번도 쿤의 생일파티를 한 적이 없었다! (사실 일부러 생일과 관련된 정보를 감추려는 쿤의 계략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시간 개념이 불분명한 내탑 생활이래도, 여태 연인의 생일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단 생각에 얼굴이 한층 창백해지기에 이르렀다.

하얗게, 파랗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밤의 표정과 눈빛을 보던 단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보아하니 대충 쿤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다,”

쿤 성격상 여태까지 말 한마디 안 하고 있었겠지.

“..나도 알게 된 건 우연이었으니까. 전에 쿤의 팀에 잡혀서 20층 언저리를 오르고 있었을 때는, 노빅이 팀원의 생일마다 저녁 식사 때 케이크를 만들어 줬었어. 그거 때문에 노빅이 쿤에게 생일을 물어봤고 쿤은 그냥 별 생각 없이 알려줬나 봐. 쿤은 늘 혼자 식사를 했었으니 파티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던 거지."

단은 꽤 즐거운 표정으로, 노빅의 특제 '쿤 생신 케이크'와 함께 쿤의 사무실을 급습한 일, 그리고 그의 얼굴에 케이크를 집어 던지고 훈련 시간이 2배로 늘어났던 일을 신나게 떠들었다. 듣고 있던 밤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변했다. 자신이 몰랐던 쿤의 모습, 한편으로는 해주지 못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이게 아닌데. 밤의 상태 이상을 눈치챈 단이 운동화의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급히 말을 마무리했다.

“으흠, 흠. 그래서 내 말은…. 밤 너도 해보는 거 어때? 애인한테 생일도 안 알려준 녀석한테 서프라이즈.”

단에게 돌아오는 다음 주 월요일이 쿤의 생일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 후 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혼자 고민을 해도 도저히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유선 내부를 다섯 바퀴쯤 돌았을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바로 앞에 이수와 하츠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곧장 문 앞까지 다다른 밤은 심호흡하고 세 번 노크를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편한 운동복 차림의 이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밤?이 시간에 어쩐일이야?"

“이수씨. 제가 고민이 있….”

“음, 저기 밤? 잠깐만. 혹시 만약 그게 쿤에 관한 거라면 사양할게.”

“죄송해요. 그 쿤씨에 관한 건데요....”

이수의 표정에 커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기색이 스쳤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더욱. 하지만 상대가 밤이었으니 쉽게 내칠 수 없어 문을 열어주었다. 만에 하나, 혹시 심각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하…. 그래, 밤. 무슨 고민인데?”

“다음 주에 쿤씨 생일이라 해서요….”

취소, 절대로 취소.

쿤의 생일이라니, 무슨 일인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인생은 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급히 문을 닫으려 하는 이수의 위로 하츠의 검은 머리통이 뿅 튀어나왔다. 하츠는 오랜만에 보는 밤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반갑게 물어왔다. 

“밤. 어쩐 일이야?”

“하츠. 내가 장담하는데, 무슨 일인지 안 듣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걸.”

“그렇게 심각한 일인 건가. 밤 어서 말해봐라, 성심성의껏 돕….”

오 이런 미친. 이수가 경악하며 하츠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아니랬단 말이다. 밤의 심각한 표정에 쓸데없이 진지해진 하츠는 이수가 기어코 닫고 있던 문을 활짝 열며 밤을 들여보내 주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쿤씨의 생일이라고 들어서요.”

밤의 말을 들은 하츠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이수가 문을 닫고 들어오며 고개를 내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거봐, 안 듣는 게 낫다고 했지?

“그 녀석은 싸가지를 대가로 자연 발생한 줄 알았는데.”

“하하…. 쿤씨의 그 성격은 별개의 문제일 거라 생각해요. 그냥, 생일을 한 번도 챙긴 적이 없어서요.”

굳이 말해주지 않은 데에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조금은 부러웠다. 동료에게 생일 축하를 받고 당황한 쿤씨의 얼굴. 쉽게 떠올릴 수도 없는 자신은 모르는 표정이었다. 사방으로 튀어나온 서운함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어색한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챙겨주지 못한 게 서운할 수 있구나.

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주방에서 돌아온 이수는 밤에게 인스턴트 티를 건넸다. 레몬 향이 은은히 코끝을 스쳤다. 이수가 머그잔을 건넨 후 옆자리에 앉아 물었다.

“왜, 선물이라도 고르려고? 그 녀석…. 워낙 오래 봐서 자주 잊어먹지만 나름 10가문 도련님이라서, 비싼 걸 구해줘봤자 일 걸.”

“동의한다. 밤, 뭘 그렇게 고민하지? 그냥 너 자신을 리본으로 꽁꽁 묶어서 쿤한테 선물로 줘라. 그 선물을 귀치장이 제일 좋아할 거다."

“푸—웁.”

콜록콜록,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하며 하츠를 올려다보았다. 진심이세요? 하츠는 밤의 과민반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놈은 밤 네가 사주는 거라면 상점가에 파는 아무거나 줘도 좋다고…….”

이수가 다시 한번 하츠의 입을 가로막았다. 이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만 한 거랑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다른 문제라고. 하츠가 왜 입을 가로막냐는 듯 이수를 노려보자 얼른 입을 떼며 수습했다.

“밤, 이 녀석 말 너무 귀담을 필요는 없어. 사실 어느 정도 동의하긴 하지만…. 크흠, 정 생각이 안 난다면 일단 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봐.”

“쿤씨가 진짜 원하는 것….”

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심각해지기 딱딱하게 굳어갔다. 쿤씨, 뭘 원하시나요? 이 질문에 쿤이 할 만한 예상 답변이라고 하면, ‘밤, 부담 갖지 마. 네가 특별히 무언가 해줄 필요 없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이게 문제였다. 차라리 원하는 게 있는 쪽이 덜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쿤은 자신의 욕망을 잘 다뤘다. 갖고 싶은 건 깔끔히 인정했고, 원하는 게 있다면 기어코 얻어냈다. 정말 밤에게 선물을 원했다면…. 쿤 쪽에서 먼저 능글맞게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쿤 생일은 모르는데…. 하츠 너는 알고 있었어?”

하츠는 고개를 저었다. 이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밤을 보았다. 딱 봐도 자신이 눈치 못 챘다고 미안해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거, 쿤이 그냥 일부러 안 알려준 것 같은데.’

이수의 똑똑한 머리로 내린 추론은 거의 정답이었다. 평소에 가문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쿤 가문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딱히 좋은 기억이라 할 수 없겠지. 물론 태어났던 일까지 포함해서. 밤에게 어두운 일면을 숨기고 좋은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은 그 심정이 백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밤의 입장도…. 쿤이 늘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걸 하나 꼽자면 이제는 밤이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란 점이다. 그래……. 서운할 법도 하지.

이수는 이번에는 밤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숨기는 게 말이 돼. 그럼 현재 잘잘못 스코어 15:16으로 밤 쪽의 미묘한 승리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수는 크게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달픈 내 인생. 내 삶에 연애는 스칠 일도 없건만. 시도 때도 없이 이 망할 친구 두 녀석의 온갖 연애 상담으로 골백번 연애해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여태 약간은 불편한 기색으로 — 앙숙인 쿤의 이야기였으니 당연했다. 동해를 들고 있던 하츠가 밤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밤, 들은 이야기다만, 플리버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

“..신해어 이야기라면 엔도르시씨에게 들었어요.”

플리버. 맑은 강에서 사는 신해어로, 속도가 빠르고 고농도 신수에 사는 놈이라 잡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플리버의 눈물은 푸른 보석으로 굳는데, 예쁘기도 하고, 의약품의 재료로도 쓰여 박스 커뮤니티에 종종 수집 의뢰가 올라오는 편이다.

“최근 탐색꾼 커뮤니티에 77층 선별인원 구역에서 플리버를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올라오고 있다. 이런 저농도까지 오지 않는 신해어라 다들 기회라며 말이다. 근데 그 녀석…. 백련의 숲에서 탈출한 녀석이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해."

 이미 성심성의껏 돕겠다고 말해버렸다. 한 입으로 두말 할 순 없었던 하츠가 고민 끝에 내놓은 대답이었다. 이수가 눈썹을 까딱이며 네 주제에 제법이라는 듯 쏘아보았으나 하츠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플리버에 관한 이야기는 이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츠가 나머지는 네가 하라는 듯 눈짓을 하고 뒤를 돌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제멋대로군. 한숨을 쉰 이수가 테이블 위에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플리버의 눈물 보석은 푸른색이라 알려졌지만,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어. 분홍빛의 아름다운 보석."

무슨 이유로 만들어지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플리버가 일생에 단 한 번 흘리는 눈물은 찬란한 분홍빛의 보석으로 굳는다. 이수가 손가락을 들어 밤의 코끝에 바짝 가져다 대며 커다란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삭였다.

“보석 자체도 희귀한 편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걸로 만든 시동무기야. 먼 옛날에 공방의 한 연구원이 연인을 위해 만든 건데, 탑 안 어디에 있어도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다나 봐. 소문에 의하면 죽음의 층 근처에서 사라졌다고….”

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쿤이 언젠가, 네가 어딜 가도 좋으니, 따라갈 수 있게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시동무기. 쿤은 밤이 어디로 가는지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험의 층에서 밤이 죽었던 때의 후유증이었다. 밤이 쿤의 옆에서 아무 데도 못 가게 막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디를 가도 좋으니, 어딜 가는지 알려달라’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밤은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 이수씨, 저 월하익송에 가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밤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이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해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밤 네가 행복하면 됐다.

아니, 커플은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다….


우렉과의 대화를 마친 다음 날, 월하익송에서는 꽤 본격적으로 밤에게 신해어잡이 의뢰를 맡겨왔다. 정식으로 의뢰를 보낸 것은 물론이고 필요한 자원은 모두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다만 한 가지 의뢰서의 보수 란은 공란이었다. 우렉은 밤의 포켓으로 ‘백지 수표인 셈이니 원하는 것을 적으면 된다’라며 호탕한 메시지를 남겼다.

엔도르시가 회의실 테이블에 삐딱하게 걸쳐 앉았다. 현대의 탑에서는 거의 이름만 남아 승탑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면 크게 구분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신해어를 잡을 때만큼은 모든 포지션이 필요했다. 수색을 담당하는 탐색꾼, 최전방에서 신해어와 싸우는 낚시꾼. 원거리에서 보조하는 창지기와 파도잡이, 그리고 전장을 아우르는 등대지기. 엔도르시의 친구 아니랄까 봐, 마찬가지로 삐딱하게 앉아있던 아낙이 회의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이봐, 신해어 잡는데 등대지기가 빠졌잖아?”

“죄송해요, 쿤씨에겐 비밀이라서요.”

밤이 빙그레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포갰다. 밤은 숙소로 돌아와 신해어 ‘플리버’를 잡을 사람을 구인했다. 플리버와 그 보석에 흥미가 있던 엔도르시는 덥석 하겠다고 했다, 전후 사정을 모두 아는 하츠와 이수도 밤의 설득에 엉겁결에 승낙했다. 창지기 쪽도 수월하게 구했다. 우선 대충 사정을 들은 라크가 ‘사냥의 시간이다!’라며 소리치며 우렁찬 참가 의사를 밝혔다. 아낙은 별 내키지 않아 했으나, 엔도르시가 ‘조이나 보지?’란 한 마디에 덥석 하겠다며 튀어나왔다. 낚시꾼 하나, 탐색꾼 둘, 창지기 둘, 파도잡이 하나. 등대지기 없음. 엔도르시가 의자를 위태롭게 기울이며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쿤이 많이 섭섭해할 텐데?”

“….”

회의실에 나서기 직전까지도 쿤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했다. 우렉도 쓸만한 등대가 없으면 어려울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했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른 등대지기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밤이라는 파도의 일렁임은 쿤이라는 푸른 등대만이 평생 지켜보기로 약속했었다. 밤은 쿤에게 몇 번이나 말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몰래 방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답 없이 멀거니 서 있던 밤을 뚫어지라 보던 엔도르시가 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바로 하며 외쳤다.

“됐어. 밤. 그런 물고기 하나 등대 없다고 못 잡을 건 없어.”

“아니, 못 잡을 걸.”

회의실 뒤쪽에서 맑고 부드러운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있어선 안 될 사람의 목소리에 일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뒤쪽으로 꽂혔다. 진작 다 알고 온 건지 한 손에는 내용 모를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단정한 흰 와이셔츠 차림의 쿤이 문에 기대어 화이트보드가 있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밤은 옛날부터 거짓말을 잘 못 하니까. 날 빼놓고 재미있는 걸 하고 있었네.”

밤은 평소와 다름없는 쿤의 싱그러운 미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한 번 힐끔 올려다보고 시선을 피했다. 끝까지 숨길 수 없을 거라만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키는 건 계산에 없었을뿐더러 회의실까지 직접 찾아올 줄 몰랐다! 쿤은 눈길을 피하는 밤을 빤히 보다가 곧장 회의실의 중앙으로 성큼성큼 내려왔다. 쿤이 눈앞에 바짝 나타나자, 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큰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어렵사리 서두를 열었다.

“쿤씨….”

“됐어. 사과하지 마. ..밤 네가 뭘 숨기는 거라면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굳이 묻지 않을게. 그래도 이건 좀 서운한 데.”

쿤이 밤의 귓가에 스치듯 속삭였다. 평소보다 조금 냉랭한 어투에 심장이 저 끝까지 떨어졌다. 굳이 묻지 않겠다는 그 한마디에 밤의 마음이 한층 착잡해졌다. 차라리 왜 숨겼냐며 추궁하는 편이 나았다. 지금 당장 오해를 풀려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옳았으나. 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온 듯한 태도에 이상하게 입이 다물렸다. ‘알려주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났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 적당한 할 말도 찾지 못해 점점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밤의 대답을 기다리던 쿤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빠르게 눈을 굴리며 둘 사이를 잠자코 보고 있던 이수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쿤? 너무 갈 것 없어. 월하익송에서 밤한테 부탁했대. 월하익송의 스페어 팀이 모조리 참패했다고 하더라. 밤은 그저 네가 피곤할까 봐 걱정된다고 해서 따로 말 안 했을 뿐이야.”

“신해어를 잡겠다고.”

이수의 항변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쿤은 화이트보드에 쓰인 자료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이수는 일어선 자리에서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단단히 화났다. 오랜 동료만이 알 수 있는, 쿤의 고약한 버릇이다. 이수는 급히 밤 쪽을 살폈다. 밤 또한 모른 척 쿤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순한 낯의 한쪽이 미미하게 굳은 채 묵묵히 쿤을 응시했다. …아, 망했다. 이쪽 반응도 오랜 동료만이 알 수 있는, 밤의 무언 항변이었다. 이수는 좌절했다. 대체 왜 이런 전개로 흘러가는 건데?!

“플리버는 밤에 주로 활동해. 몸체가 하얀색이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아.”

쿤이 빙글 돌아 관객석을 향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명실상부 팀의 작전참모가 돌아왔으니, 평소라면 평범한 회의가 시작됐을 것이다. 조금 전에 있었던 쿤과 밤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회의실의 공기가 유독 차가웠다. 쿤이 브리핑을 바로 시작했다는 건, 여태 밤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줬다는 뜻이 아닌가. 눈치를 바나나 시리얼에 말아 먹은 라크—사냥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다들 쿤 한 번 보고, 한 번 보고, 두 사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뒷사정을 모두 다 아는 하츠와 이수는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하츠가 네가 밤의 진심을 아느냐며 칼 뽑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걸 이수가 옷자락을 꾹 쥐고 말리는 중이었다.

“고농도의 신수에 들어가야 하니 신수 저항력이 낮은 십이수만 조심하면 돼. 이상 끝. 본격적으로 회의 시작하기 전에 질문 있는 사람?”

쿤은 입에 지퍼를 잠근 듯 조용한 청중석을 죽 돌아보았다. 느리게 돌아가던 시선의 마지막에는 밤이 담겼다. 평소보다 굳은 모습으로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쪽은 오히려 자신인데. 그런데도 화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속 좁게 굴고 있는 자신이 더 화가 날 뿐. 쿤은 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질문했다

“없으면 내가 질문하나 할게. 밤, 보수는 어떻게 받기로 했어?”

“….”

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음 주가 쿤씨 생일이라길래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못한다! 말하는 게 부끄러운 건 둘째 치고 쿤이 이미 다 알고 온 듯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만약 합당한 보수가 없다면 이건 안 하는 게….”

쿤의 말은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내막을 자세히 모르는 쿤의 입장에서는 밤이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의도일 것이다. 사실 그게 아닌데. 뜻대로 되지 않아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무거운 마음에 밤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회의 내용은…. 이수씨에게 듣겠습니다.”

밤은 쿤을 돌아보지 않고 즉시 문을 열고 나갔다. 장내가 서늘했다. 몇 분간의 정적 끝에 아낙은 한숨을 내쉬곤 ‘사랑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라며 사라졌다. 분노를 삭이고 있던 쿤이 남아있는 인원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너네, 제정신이야? 그렇게 위험한 신해어를 등대 없이 잡겠다고?”

“이봐 쿤, 나는 분명 물어봤어. 등대는 없어도 되겠냐고.”

“너희가 밤을 말렸어야지! 애가 또 위험한 일에 가려는데!”

엔도르시가 곧장 반박했으나, 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또 밤이 위험한 일에. 자신 없이.

고작 신해어를 잡는 일이 뭐가 대수라고 과민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쿤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여 괜히 밤을 귀찮게 굴지 않으려 몇 번이고 다시 계산하고, 또 검토한 후 내린 이성적 결론이었다. 플리버는 위험했다. 정확히는 이 플리버는 위험했다. 신해어는 종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니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어떤 이유에서건 살던 곳을 떠난 녀석들이 절대 정상적 상태일 리 없다! 월하익송의 스페어 팀이 그리 호락호락한 팀이 아닌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평범한 선별인원이 잡을 수 있는 난이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십이수. 네 똑똑한 머리로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쿤이 즉시 이수 쪽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십이수는 쿤이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니 더 배신감이 느껴질 수밖에. 다만, 쿤이 단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쿤의 판단력은 밤이 끼어드는 순간 기준이 박살 났다. 십이수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해명 대신 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알아! 위험하다는 거. 그럼 밤 성격에 이 일을 안 받을 것 같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정확히는 밤이지 랭커도 아니면서, 랭커만큼의 전력을 낼 수 있는 선별인원은 온 탑을 통틀어 밤밖에 없어.”

“됐다. 십이수, 저런 멍청한 녀석에게 설명해봤자 다. 이봐 귀치장. 그렇게 등대 속에 숨겨도 바다는 숨길 수 없다.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여태 반강제로 얌전히 있던 하츠가 이수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뭐? 등대 속에 숨겨? 하츠의 말에 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 이를 노려보았다.

“끼어들지 마 할복 무사. 난 밤을 내 등대 속에서 못 나가게 막지 않았어. 단지, 무슨 일이 날까 걱정된다는 거야.”

“그게 그거 아니던가? 너는 밤의 모든 일이 네 앞마당에 있길 바라는 것 같군. 아니, 네 앞에 있는 밤 만이 진정한 밤이라고 생각하나?”

쿤은 입을 다물었다. 밤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가두어 두겠다는 건 욕심이다. 밤이 자신 때문에 느리게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몇십 년을 고민해온 자신이야말로 그것이 과욕임을 제일 잘 안다. 바다를 온전히 가질 수 없어도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마저 저버리지 못했다. 가장 바다가 잘 보이는 외딴 섬에, 푸른 등대를 세우고 끊임없이 치는 파도를 지켜봐 왔다.

등대에서 보이지 않는 바다의 이면은 어떤가.

신경 쓸 게 있나? 쿤은 그저 외면했다. 밤의 일부인 비올레도, 라헬도. 진정한 밤다움은 누가 정의하고 있었는지, 하츠의 말은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쿤은 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말을 죽였다.

“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위험한 일을 하는지,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못 가게 무작정 막기보다는 함께 걷는 길을 택했을 거다. 착각하지 마라, 쿤. 밤은 네 녀석의 쓸데없이 높고 까다로운 울타리를 기어코 넘어 들어온 타인이지 네가 문을 열어주어 들어온 사람이 아니다.”

하츠는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하츠는 밤을 찾으러 갔겠지. 하츠와 자신과 너무나 다르지만, 진절머리 정도로 닮았으니 다음에 할 일이야 뻔했다. 이 상태론 회의를 지속할 순 없었다. 쿤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이수는 직감적으로 사랑스러운 아들과의 1:1 면담의 시간임을 깨달았다. 회의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대충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낸 후 십이수는 심호흡을 하며 쿤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스코어 16:16…….

쿤과 밤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부유선 안에 빠르게 퍼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싸운 것은 아니었으나, 둘 사이의 공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거의 모든 이들이 눈치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이라도, 룸메이트인 두 사람이 각방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따로 방을 쓴 적이 없었다!)

팀 내부의 혼란과는 별개로 의뢰는 변함없이 진행됐다. 밤의 고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해서 꼭, ‘서프라이즈’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하츠는 거의 매일 그런 머저리 같은 녀석의 생일 따위 안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밤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기만 했다. 팀의 혼란과, 쿤밤의 불화설(?)과는 별개로 전략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두 사람은 딱 필요한 만큼의 말을 하고 돌아갔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러갔다. 11월 27일 저녁, 77층의 외곽으로 향하는 워프 포탈을 타기 위해 승차장 근처에서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 오래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건 숨겨진 층에서 잠들었던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새 야위었나? 밤은 어제오늘 쿤이 식사를 하러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따라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해 보여 걱정스러웠다.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쿤이 먼저 밤의 어깨를 두드렸다.

“..밤.”

“…….”

“몸조심하고.

승탑시험이든, 무슨 일이 있기 전에 꼭 하던 안부. 부드럽고 다정한 그 말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하마터면 평소처럼 웃으며 쿤의 품에 파고들 뻔했다. 쿤은 옅은 미소를 짓고 먼저 부유선에 올랐다. 밤은 쿤이 들어간 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에 굴의 흔적은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연락해. 아, 라크? A구역."

[이쪽에 아무것도 없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어쩐지 허탕일 것 같은데?]

쿤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보고를 들으며 등대에 떠오른 모니터들을 죽 훑었다. 등대 위에 플리버는 주로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직접 정보를 수집하는 탐색꾼의 역할이 중요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정보가 턱없이 적어 발견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밤. 그쪽은 어때?”

“.. 아무것도 안 보여요.”

“역시…. 일단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쿤씨, 플리버는 왜 도망쳤을까요?”

밤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회의 동안 집중적으로 파고든 부분이 아니었기에,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기존의 계획으로 수색이 어렵다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쿤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일을 꺼내놓았다.

“산란?”

“아뇨 산란은 아니에요. 서식지가 안 맞았다던가. 그런 이유도 아닌 것 같아요.”

강가를 따라 걷던 밤이 갑자기 멈추며 물속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검은 물. 홀린 듯 잔잔한 물결 위에 손바닥을 대고 신수를 흘려 넣었다. 물의 흐름이 뒤바뀌는 감각 사이로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다. 밤은 일어나 물이 흘러오는 방향을 빤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상류 쪽에 신수의 흐름이 이상해요. 아니, 강한 파동이….”

“밤.”

“아뇨, 그 이야기는 나중에요. 지금은….”

“아니, 중요하니까 답해줬으면 해.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맡은 거지?”

말만 두고 보면 비꼼으로 들리기에 십상인 말이다. 그러나 등대 너머 들려온 쿤의 목소리에는 어떤 부정적 느낌이 없었다. 여태 한 구석에서 불편했던 감정이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어긋났던 라디오의 주파수가 원래대로 돌아온 듯 또렷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밤은 강가에 앉아 편한 투로 말했다.

“대신 쿤씨도 제 질문에 답을 해주세요.”

생각보다 말이 빨랐다. 아차, 이걸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엉겁결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다 생뚱맞은 소리를 하게 생겼다. 밤이 눈을 도르륵 굴리며 등대 너머 침묵에 주목했다.

“좋아.”

“쿤씨, 태어난 걸 후회해요?”

하고 싶은 말은 기회가 있을 때 해야겠지. 밤은 굳은 다짐을 하고 여태 꾹 눌러왔던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일주일 조금 안 되는 시간동안 쿤은 단 한 번도 생일 이벤트였다고 의심조차 안 했다. 본인도 생일을 까먹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운한 감정은 꺾여서, 그 사이가 걱정과 사랑으로 채워졌다.

“..밤 너 와있는 지금이 제일 중요해. 네가 부재한 미래도 과거도 없어.”

“저는 알고 싶어요. 쿤씨가 가문에 있던 시절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두 다요.”

“그다지 좋은 인간은 아니라서. 네가 끝까지 몰랐으면 하는 일도 많아. 네가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답지 않게 문장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뒷말을 삼켰다. 자신은 밤의 모든 면을 수용할 생각이지만 밤은 그렇게 못할지 모른다.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이상적인 동료이자 밤의 시험의 층 동기. 이제는 완벽한 남자친구. 그것을 벗어나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를 짚어내는 밤의 질문에 조금 당혹스러울 수밖에.

“제가 그 정도도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밤, 너….”

밤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쿤은 밤이 몰랐으면 하는 일이 많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밤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그 앞길을 치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밤이라면 자신의 비열하고, 때론 야비한 방법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오히려 다 알면서도 쿤이 모른 척 해주길 바라는 기대에 시선을 피해 주는 건 밤 쪽이었지만.

마음속 뭉쳐있던 응어리를 풀어낸 밤은 개운한 마음으로 수풀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제는 선명하게 돌아온 밤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다. 플리버는 지금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다. 밤의 움직임에 따라 즉시 푸른 등대가 따라붙었다. 뛰어가며 등대를 향해 눈짓하자, 즉시 쿤이 밤의 음성을 모든 팀원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C 구역, 발견했습니다. 두 마리예요!]

[잠깐잠깐잠깐잠깐. 한 마리 아니었어? 밤??]

[말하자면 긴데…. 아마 위험하진 않을 것 같아요]

플리버의 고향은 분명 백련의 숲이다. 신해어가 살아가는데 최고의 환경이 틀림없다. 다만 그 신해어에게는 아니었을 뿐이다. 발견 빈도에 비해 사고 횟수. 비슷한 체급의 신해어 탈출 사건과 비교했을 때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적었다. 애초에 사람을 해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뭔지는 모르겠다만. 두 마리 다 백련의 숲으로 돌려보내면 되는 건가?]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요]

“밤, 오른쪽 15m 부근이야.”

밤은 홱 방향을 틀어 쿤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멀찍이서 짙은 신수의 파동이 느껴졌다. 풀숲을 헤치고 마주한 광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볼 라이트가 부서지는 작은 폭포에 하얀빛의 아름다운 신해어 두 마리가 곤히 잠들어있었다. 주변에는 푸른 보석이 온통 널려있었고 분홍빛 보석이 두 개 떨어져 있었다.

“신해어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군요.”

맑은 강에서 주로 서식하는 하얀 몸통에 긴 지느러미를 가진 아름다운 신해어. 속도가 빠른 편이고 고농도 신수 속에서 살고 있어 잡기 매우 까다롭다. 플리버의 눈물은 푸른 보석으로 굳는데, 그 모습이 예쁠 뿐 아니라, 가루로 내어 의약품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꽤 비싼 가격에 팔린다. 이를 전문적으로 노리는 팀이 있을 정도.. 그러나 정작, 이 신해어가 탑 안에서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플리버는 일생에 단 한 번, 사랑을 이룬다. 짝을 만나기 위한 그 여정이 절대 쉽지 않아, 허무맹랑한 전설이라 취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한 번 연을 맺은 신해어 한 쌍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를 만들어낸다. 반려를 만났을 때 흘리는 첫 번째 눈물이 굳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매우 희귀하다.

그 결정은 서로가 어디에 있어도 서로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플리버는 자신의 짝이 사라지더라도 본능적으로 짝의 생사와 위치를 느낀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전설은, 서로를 잃기 쉬운 이 탑 안에서 살아가는 연인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전설의 보석이다.

짝을 찾은 플리버는 얌전히 77층 외곽에 터를 잡았다. 곤히 잠든 신해어를 깨워 굳이 싸움할 생각은 없어, 좌표만 남긴 채 월하익송의 사람들을 불렀다. 직접 잡았다고 떳떳하게 말하기엔 민망했지만, 월하익송쪽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동안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도 않을 것이며, 백련의 숲이 그립다면 언제든지 돌아올 것이라고 여겨 그들의 자유를 존중했다. 월하익송으로 보내는 정식 보고서는 쿤과 이수가 수고했다. 보고서를 받아든 우렉이 호탕하게 웃었다. ‘저 녀석들도 사랑하는 반려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하는구나'로 잘 마무리 지었다.

무사히 귀걸이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플리버를 잡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또 한 개의 분홍빛 보석을 공방에 맡겼다. 보석 자체에 특별한 힘이 있었던 터라 없이 본래의 주술과 새 주술을 엮어 귀걸이 한 쌍과 반지를 서로 연결했다. 밤의 오른손 약지에 있는 반지, 이제 쿤의 왼쪽에 걸릴 귀걸이. 이 탑 어디에 있어도 서로가 어디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자, 그 신해어들이 서로를 찾는 방법 그 자체. 밤은 귀걸이를 잘 포장하여 쿤의 방문을 두드렸다.

“쿤씨, 계세요?”

“어 밤….”

문이 열리자 평소보다 더 삐걱거리는 밤이 싱긋 웃었다. 밤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곤 쿤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선물 상자 속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귀걸이를 받아든 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밤을 보았다. ‘드리고 싶었어요. 생일이잖아요.’ 밤은 부끄러운 듯 강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노을빛이 내려앉은 것인지, 홍조가 떠오른 것인지.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든 그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내 생일 때문에….”

“쿤씨,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축하해요.”

“..밤, 앞으로는 내 생일같은거 챙기겠다고 이렇게 무모한 짓은….”

“또, 이런 말. 할 거예요. 매년, 챙길 거에요. 쿤씨가 태어난 일을 꽤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할 때까지. 쭉이요. 쿤씨의 미래도, 과거도, 현재도 중요했으면 좋겠어요.”

밤은 단호하게 쿤의 말을 끊어버렸다. 쿤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애정 가득한 눈빛까지 더해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밤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쿤은 손을 올려 밤의 부드러운 갈색빛 귀여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밤은 고개만 쏙 올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 귀걸이 시동하면 저한테 바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해요. 공방의 연구원이 만들었….”

“밤, 미안한데 지금 얼굴 되게 웃겨.”

“…웃지 마세요. ”

밤은 표정으로 많은 것 드러났다. 행복, 사랑, 안심, 약간의 삐짐.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을 읽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일. 오래도록 피에 새겨진 저주였지만 지금만큼은 축복이었다. 아무 말 없이 빤히 보고만 있는 게 어색한지 밤은 쭈뼛거리다 쿤의 품을 슬그머니 벗어났다. 다른 동료들과 서프라이즈 2탄! 을 준비하기 위해서. 탕수육팀에게 배운 대로 완전히 떠들썩하게, 요란하게!

“잠시만요. 이따가 올게요!”

“잠깐, 밤!”

쿤이 부르는 소리에 밤이 갑자기 멈추었다. 밤과 같은 속도로 뛰어가다 갑자기 장애물을 만나 관성으로 얼굴이 맞닿았다. 서로의 숨결이 아주 가까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찰나의 침묵 속에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가 보였다. 쿤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밤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쿤의 귓가를 만지작댔다. 쿤씨 그거 아시려나. 자신의 볼이 발갛게 물든 것을 보는 쿤의 두 귓가도 발갛게 변한다는 거.

황당한 채로 멍하니 있던 쿤의 정신이 돌아왔다. ..가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밤의 애정표현이 과하다니까. 쿤이 밤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웃었다.

“이거, 무슨 뜻이지?”

“쿤!”

“야!! 생일…!”

문이 벌컥 열리고 케이크를 들고 나타난 십이수와…. 뒤이어 줄줄이 보이는 동료들. 아니, 왜 하필 딱 이 타이밍에 문을 열고 들어와? 케이크를 들고 들어온 동료들과 마주친 밤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조용히 읊조린 쿤은 곧장 밤의 입술을 훔쳤다. 밤이 쿤의 가슴팍을 두들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야유(비명) 소리가 들렸다. 뻘쭘하게 케이크를 들고 있던 십이수가 상황을 보더니 물었다.

“..우리 나갈까?”

“아뇨!!”

밤은 거의 소리치듯 부정하고 기어코 쿤을 떼어내 동료들 쪽으로 도망갔다. 솔직히 부끄러움에 도망치고 싶었다. 힐끔, 고개를 돌려 쿤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자신의 움직임을 느리게 좇으며 씩 웃어버리는 저 짓궂은 표정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토마토가 되겠어. 얼굴을 손으로 덮어버린 밤은 다짐했다.

함께 주려고 주머니 속에 넣어둔 빨간 리본은 계속 넣어두기로.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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