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여인

지인 가내의 실리모험(실린), 레이크바에서

왕자는 호숫가에 홀로 서 있었다.

왕가의 보검을 뽑은 그의 얼굴이 칼날에 비쳤다. 망설임과 고뇌가 가득하다. 군주에겐 어울리지 않는 나약함이라고 자조하며, 왕자는 검을 땅에 꽂았다.

지표는 자기의심처럼 단단했다.

“실리안.”

연홍빛 머리카락의 실린이 왕자를 부른다. 왕자는 그를 처음 보고, 봄철 만개한 꽃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한 감상이 다소는 시적이라는 생각 역시.

온순한 인상의 실린, 에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고민이 있나요?”

“자네로군. …그래. 사실 지금도 고민이 많네. 내게 왕의 자격이 있는지, 있다면 검이 빛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루테란의 왕좌에 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의 가치가 있는지.”

억누른 말에 눌러담긴 깊고 무거운 감정에 에스티아는 눈을 감았다. 타인의 감정에 감응할 수 있던 그였다.

“실리안.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겠어요?”

왕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물가 특유의 습기 어리고 시린 바람에 밀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꼭 들짐승이 밀밭을 달리는 풍경같다.

“폭풍에 대해 아시나요? 바람은 거칠어 모든걸 부러뜨리고, 비는 드세어 모든걸 무너뜨리죠.”

“알다마다. 동부 해안은 이따금 태풍으로 인해 곤란을 겪기도 하네.”

“맞아요.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에 재해라고도 하죠. 하지만 그 거친 바람은 대기를 풀어내어 다음 계절로 이끌고, 드센 비는 낡은 물을 헤집어 생명을 낳아요. 현상에는 아픔만큼이나 탄생과 창조 역시 수반돼요. 그것이 삶이죠. 생명은 변화의 연속이에요.”

“…….”

“전쟁을 생각하고 있죠, 실리안? 하지만 거기에 걸린 다른 사람의 목숨이 무거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두려운 것이지요?”

“…자네의 말이 맞네.”

왕자가 뼈아프게 시인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자신에게 그럴 가치와 자격이 있느냐는 의심.

“사람들이 믿고 있어요, 실리안. 나는 알아요. 그렇게 스스로 자신에게 물음을 던질 줄 아는 당신이기에, 사람들이 믿어주는 거예요.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자신을 믿는 다른 사람을 믿어줘요. 왕은 홀로 서지 않는자. 무엇보다 타인의 믿음이 필요한 존재잖아요.”

에스티아가 두 손을 깍지끼어 모았다 풀며 마력을 엮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두 손 사이에서 회오리쳤다.

“용기를 내요, 실리안. 의심과 두려움야말로 용기가 빛나는 순간인걸요. 이 폭풍의 첫 번째 바람이 되어요. 저 역시 함께할 테니.”

그 날은 왕자의 첫사랑이 시작된 날이었다.


※ 주석 : 호수의 여인(Lady of the Lake). 아서 왕 전설에서 아서 왕에게 왕의 검 엑스칼리버를 주는 인물. 즉 호수의 여인이란 왕위주장자를 왕으로 만드는 선정자이다. 실리안이 왕자이자 왕위주장자에서 왕으로 거듭날 수 있던 것은 레이크바의 호숫가에서 모험가가 위로와 응원을 해준 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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