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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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집에 돌아가고 싶어. 왜? 거기엔 네가 없잖아. 악의 없는 말투로 고백하며 인준은 안경다리를 접어 안경집에 집어넣었다. 곧이어 피곤한 듯 두 손등이 눈두덩을 문지른다. 날렵해진 턱선과 각질이 일어난 선 고운 입술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찼다 사라지고, 손은 단정히 이불자락 위로 도로 놓인다. 그 위에 푸르게 자리 잡은 점. 동혁은 그 희끄
1. 이동혁은 자주 사라졌어. 나는 그게 맘에 안 들었고. 왜냐하면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내가 열세 살, 걔가 열두 살 때였어. 그 애는 오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어. 종종 그랬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이 내 생일이자, 엄마가 생일 축하한다는 쪽지와 함께 남은 돈을 전부 들고 새벽에 집을 나간 날, 그리고 반년만에 아버지가 돌아온 날이었다
형 잘 좀 잡아 봐. 아니, 이렇게. 아니 그건 거꾸로잖아. 해줘? 필요 없어? 알았어, 그럼 나 이거 패스워드 알아내는 동안만이라도 좀 꽉 잡고 있어. 금방 하고 가서 도와줄 테니까. 아니, ……, 야! 바람 때문에 엄청 흔들린다고 이거. 아이, 안다고. 왤케 목소리가 커, 소리 좀 낮춰. 우리 여기 온 거 걸리면 큰일나 진짜로. 알잖아. 내가
신은 광야에서도 만나를 내리셨으니 그들에게는 성이고 이름이고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정정, 아주 많다. 인류가 제 한 몸 건사할 곳을 지구상에서 찾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부터 그들이 자신을 거쳐간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 됐다. 왜냐하면 수억의 인구가 제 발자국 아래 있었으니까. 칠십오억이 단숨에 십칠억이 되기까지,
춥고 어둡고 사람이라곤 없는 곳에 홀로 남겨졌던 조난자들이 잊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찾아낸 구조견들의 눈동자라고 했다. 숨이 붙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는 희열이 담긴 눈빛. 자신이 살려낸 이가 구해지는 내내 손등을 핥으며 곁을 맴돌던 따뜻한 생명체의 눈알을. 몰래 훔친 신문의 귀퉁이에 낭만 가득한 사설로 실려 있던 이야기였다. 동네 도서관 구석에 몸을
“제노야. 체육.” 온도 높은 손바닥이 엎드린 제노의 하얀 뒷목을 덮었다. 손이 잠시간 머물다 떼어져 나간 자리에 누긋하게 열감이 남는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자 선 뚜렷한 얼굴이 드러난다. 단정하게 자른 까만 머리를 쓸어넘기자 잘생긴 이마에 아직 잠이 붙은 부은 눈가도 보인다. 초콜릿 박힌 것처럼 콕 찍힌 눈가의 점도. 별 표정 없던 동혁의 얼굴에
오늘따라 제노는 말이 없었다. 동혁이 연습용 목검을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뒤에 서 있던 제노를 돌아보았다. 앞에서는 서운을 비롯한 아이들이 하루의 수련을 마무리하며 나란히 서서 내려치기를 연습하고 있다. 하나, 둘, 붙이는 서운의 구령에 맞춰 목검들이 일정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땀방울이 턱에 고여 뚝뚝 떨어질 지경으로 열심이다. 평소라면 동혁
“동혁아!” “오셨습니까?” 동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에서 벌컥 열린 문 쪽으로 왼손을 뻗었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손바닥에 들어찼다. 더우시지요. 많이 힘드셨어요? 얼굴이 온통 땀범벅입니다. 걱정을 건네면서도 오른손에 들린 붓을 침착하게 정돈하여 벼루에 기대 두고서야 고개를 돌린다. 흐트러진 훈련복 차림으로 동혁의 손바닥에 얼굴을 맡기고 기
새 도복으로 갈아입은 동혁과,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먹물 튄 저고리를 벗어 내주고 새 옷을 꺼내 입은 제노가 나란히 전각의 계단 입구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바닥은 그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으나 제노가 지붕 아래에서 햇볕을 쬐고 싶다 고집한 탓이었다. 동혁이 눈을 굴려 이제는 익숙한 품으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제노의 눈치를 봤다. 언제 언성을 높였느냔
“너냐? 품 없이 선문을 넘은 도둑놈 새끼가.” 동혁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걷다 갑자기 멈춘 탓에 발 옆으로 잔 모래가 튀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누가 뱉었는지도 모를 도둑놈 새끼라는 말이 등을 아프게 찔러 들어왔다. 시비를 걸려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다. 별 반응 없이 도로 발걸음을 떼자, 목소리의 주인이 우악스럽게 왼어깨를 잡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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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인생을 주관한다셨던 주님께서 제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마음껏 괴로워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셨다면 아마 오늘밤이겠지요. 지금 제 곁에는 눈물을 닦아 주고 울음을 달래 줄 이가 없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선가 나와 같은 것을 위해 빌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는 신은 달랐으나 기도의 본질은 같았을 따름입니다. 저는 우유부단하며 미약한 자라 제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