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rdians (캐캐체 기반캐)

한이화 서사

캐캐체 기반캐

나는 옛날부터 부모님의 얼굴보단 등이 더 익숙했다.


내 가장 어리고 오래된 기억부터 시작한다면, 역시 이거 아닐까. 

어릴 적, 한 4, 5살 때 친가 쪽에서 작은 고구마밭을 하고 계신 곳에 놀러 간 나는 고구마를 쪼아먹고 있는... 그래, 참새만큼 작은 새를 발견했다. 날 보자마자 날아올라 도망치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달려가 새의 목덜미를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정말 순수하고 무지하지 않은가.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괴로워했다. 나는 그저 작디작은 내 손과 비슷한 크기의 새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3분 정도 였을 거다. 버둥거리는 몸짓이 잦아들고, 새의 부리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으며, 새는 다리가 축 처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아직 따뜻한 그 작은 사체에서 떨어졌다. 물컹거리는 이상한 살의 촉감, 그리고 붉은 선혈빛 액체, 더 움직이지 않는 생명, 뭔가 이상했다. 내 손에 질척이며 남아있는 그 생생하고 이상한 감각은 눈에서 맑은 이슬을 떨어트렸다. 내가 울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그 새를 보곤

" 아이고 새가 죽었구먼... 이것때매 놀란 겨 똥강아지~?"

라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로 아직 따뜻하고 그대로 두면 다시 날아오를 것만 찾은 그 사체를 흙으로 덮지도 않은 채 나의 시선에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셨다. 내가 죽였어요. 내가 손으로 졸라 죽였어요. 같은 자백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어디선가 흙먼지가 묻은 채 굴러다닐, 이름도 모르는 그 새의 목을 졸라 죽였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섭고, 원망스러웠을까? 내 기억들 중 가장 오래 남아있는 기억이다. 아직도 손을 꽉 쥐면 그 도살의 감각이 끈적이며 남아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날, 작은 생명을 살해했다.


..부모님의 말버릇은 항상 '나중에' 였다. 무슨 말만 해도 나중에, 무슨 부탁만 해도 나중에, 어린 나는 그 단어가 참 싫었지만, 얼굴을 볼 수도 없을 만큼 바쁘셨기에 이해하기로 했다. 어떤 일을 하시는 진 모르겠지만, 항상 집에 돌아오시고 목욕 뒤에 머리만 대면 어느 새 숨소리를 내며 주무셨다. 처음엔 돌아와 반겨줘도 무심한 부모님이 서운했지만 동생이 생기면서 두 분이 안아주지 않는 횟수가 늘어가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나는 내 시간이 줄어드는 걸 원하지는 않았는 데 말이지. 

그러다 어느 날,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면, 오후 4시에 큰 고모의 집을 가서 동생들을 만나고, 저녁을 먹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종이접기를 하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다 잠드는 일이 빈번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오후 8시 12분이었지. 낡은 전화의 녹이 슨 벨 소리에 잠에서 깨 책장 위로 손을 높이 올려 내 손보다 큰 수화기를 들었다. 

달칵-

"여보세요?"

"네 여기 정 서하씨 댁 맞으신가요?"

"네! 우리 엄마 이름인데요?"

"아... 따님 분이시구나... 지금 주변에 보호자 있어요?"

"저 밖에 없어요! 왜요? 우리 엄마 무슨 일 있어요?"

"그... 지금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데, 보호자 모셔 올 수 있나요?"

나는 수화기 너머의 한 단어를 듣자마자 뛰쳐나갔다. 

"...아니면, 저기, 친구? 듣고 있어요? 친구?"

그다음 들리는 문장들은 내려놓지도 못한 채 배배 꼬여있는 전깃줄에 달랑거려 매달린 수화기 너머로 부서졌다. 아, 엄마가 전화 다 쓰면 전기료 아끼라고, 수화기 내려놓으라고 그러셨는 데. 그럴 틈도 없었던 거겠지. 그다음 기억은... 그래, 울면서 뛰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평소에 엄마의 모습이 쓰러지시기 직전 같아서 그런 걸까? 아님 병원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무서운 걸로만 알고 있던 어릴 때의 상상 때문일까. 큰 고모 댁으로 늦은 밤 엉엉 소리를 내며 뛰어간 7살 아이는 문을 열고 안도의 눈물과 동시에 엄마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나는 친척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사촌언니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다음은... 사촌언니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소리와 함께 잠들었던 것 같다. 엄마는 다음 날 저녁 좀 피곤한 모습을 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출산 후에 편히 쉬지 않아서라고 했나? 그때의 나는 엄마가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던 것도 모르고.  


나는 커가면서 뭔가 이상했다. 왜 우리 집이 작아져 가고 있는 거지? 그저 내가 커서 그런 것이겠거니 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동생이 둘이나 생겨 생계는 더욱 안 좋아졌고, 부모님은 더 생기따윈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으며, 어릴 때 마냥 좋기만 했던 친척들의 험담이 점점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자애를 낳을 거면 빨리 낳는 게 좋았는 데 한약 같은 걸 달여줄 걸 그랬다.' 

'옆 동네 어떤 사람은 약 하나 처방 받았더니 지금은 아들이 셋이라더라.' 

'요새 얼굴이 많이 망가졌으니 이러다 남편한테 버림받는 거 아닌가 몰라.' 

'애는 또 잘 맡겨놓고 보답도 없어. 아주 우리가 지들 종이지 종.'

'무위한 새끼들이야.'

'저번 제사 땐 동그랑땡 몇 개 부치더니 쉬어도 되겠냐고 하더래, 누군 아침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제사 준비 하는 줄 알아?'

낮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일어났었다. 그리고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친절했던 고모와 이모들의 목소리가 우리 부모님을 쥐어뜯고 있었다. 손가락을 귓구멍에 쑤셔 넣고 눈을 꽉 감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아무것도 안 들려. 저건 바닷소리야. 바다 파도 소리. 그 후에 해조음이 잦아들어 나가보니 잠시 외출을 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이젠 친척들은 내가 뵈러가도 날 반겨주지 않고 이제 겨우 3살된 남동생에게만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아기니까. 나도 아기였으니까. 아기는 당연히 귀여우니까. 그러니까, 이 허전함은 당연한 거야. 


10살 때였나,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불 속이 아닌 현관의 차가운 바닥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전에도 잠버릇이 심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10살 때부터 더욱 심해졌다. 한 번은 매우 추운 곳에서 벌벌 떠는 꿈을 꿨는 데 눈을 떠보니 계단이 보인 경우가 생겼고, 그날 밤늦게까지 부모님 방 너머에서 면면히 말소리가 들렸으며, 난 방문에 귀를 대보았지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는 지 스르륵 잠들었단 기억만 남아있다. 다음 날 웬일인지 부모님은 같이 놀러 가자며 정말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부모님 손을 붙잡고 따라간 곳은 깔끔하고, 하얗고, 어딘가 불편했다. 식물들은 숨 쉬고 있지 않은, 그저 흉내를 낸 것에 불과한, 살아있지 않은, 어린 내가 보기엔 탐탁지 않았다. 내 이름이 불리고 겁 먹은 상태로 발걸음을 천천히 진료실 앞으로 부모님과 옮겼다. 아빠는 내 앞에선 웃었지만 의사 선생님 앞에서 순식간에 겁 먹은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로 상담을 시작했다. 그때 내 기억은 의사 선생님의 이해 되지 않는 질문 여러 개와 부모님의 표정이 폭풍우를 만났다가 안전한 곳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점점 안심한 얼굴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냥 운동을 많이 하라나,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돈을 날릴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병원을 나오면서 부모님은 태권도에 보내주겠다고 하셨지만 돈 아깝게 그냥 알아서 운동하겠다는 말로 거절했다. 순간 두 분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때 이후로 병원에 간 적이 없다. 


"개새끼."

10살 아이 입에서 나오기엔 다소 거친, 아니 많이 험한 단어가 울려 퍼졌다. 순수해 보이는 자식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에 부모님은 상냥하게 그런 말은 어디서 알아 왔냐며 망기하다가 딸의 말이 학교에서 나쁜 아이들이 쓰는 말을 따라 한 것뿐라며, 그저 흰말일 거라 생각한 부모님은 다음 내 입에서 나온 이 단어의 출처에 적실히 화가 났다는 걸 어린 나도 느꼈다. 그리고 다신 비속어를 쓰지 말라며 혼이 났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혼이 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렇게 화가 난 부모님의 모습은 거의 처음이었다. 단어의 출처는... 글쎄, 내 주변이 모두 비속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쵸 큰 고모?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친구들과는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가난이라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 하지 않아서 우리 집은 이런 편이라며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떠들곤 했다. 정말 난 머리가 안 좋은 것 같다. 어릴 때도 사람을 얕보는 놈들은 분명 있을 텐데 말이지. 11살, 어떤 날엔 한 남자애가 교실에서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리도록 말했던가? 

"야!! 너네 집 거지라며?"

"..아니거든??!!"

어린 나는 이성적이긴 무슨, 그냥 소리를 크게 질러 모두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켜 버렸다. 이런 버릇을 고쳐야 하는 데..

"너 맨날 구린 것만 쓰고, 들고 다니잖아! 맞잖아 거지!"

"아니라고!!"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그 쪽으로 다가갔다. 약간 움찔한 듯했지만, 입은 쓸데없이 가벼운 놈이었다. 그 뒤엔... 뭐라고 했더라? 거지는 거지답게 살라고 했나? 아니면 자기가 오백원 줄 테니까 상한 우유 들이켜보라고 했었나? 아니라고 부정하긴 했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아 근데 하나는 기억나네. 

"너희 가족 다 거지잖아!"

뚝-

뭔가 소리가 들리며 끊어졌다. 아마 그것이 나의 마지막 인내심이었는 지, 아니면 저 가벼운 주둥아리만 뻐끔거리는 놈의 생명줄이었는 지 모르겠다. 눈을 한 번 깜빡하고 감았다 뜨니 앞엔 쓰러져 코에서 붉은색을 흘리고 있는 연갑의 동급생이 기절한 듯했다. 까슬까슬 건조하고 거친 나무로 이루어진 교실바닥에 몇 방울 싱싱하고 새빨간 액체가 떨어졌다. 나무들은 목을 축이고 싶은 지 그 액체를 꿀꺽꿀꺽 잘도 마시더라. 바닥에 조금씩 번져가는 선혈이, 내 옷과 손에 조금씩 흡수되어 가고 있는 그 생명이, 살해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난 거친 바닥에 주저앉아 연한 무릎 피부가 까지던 말던,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말던, 교실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피를 마신 나무들이 내 눈물을 머금도록, 목을 눈물로 축일 수 있도록, 울었다. 계속 울었다. 잠시 후에 선생님께서 나와 그 친구를 교무실로 따로 불러내셨고 부모님을 호출하겠다는 말에 나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 친구에게도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아무리 우리 가족을 욕했다지만 폭력을 쓴 건 잘못한 것이다. 그 도살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손을 꽉 잡고 고개를 여러 번 숙였다. 바쁜 부모님을 학교에 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선생님께선 나의 사과를 알아채신 건지 아니면 그 친구도 잘못했단 것을 아신 것인지, 부모님을 호출시키진 않았으나 한숨 소리와 호통을 몇 번 하시고 서로 사과를 하라며 시켰다. 그 뒤론... 어떻게 됐더라? 그 친구는 다시 나에게 시비를 걸지 않고, 좋게 넘어갔지만 주변 친구들이 멀어져갔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적어졌다. 그냥, 그 정도려나. 역시 폭력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내 지갑이 사라졌어!!!"

하교종이 울린 직후,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집중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도 귀를 쫑긋 세우며 대화에 집중하려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야 어떡해 너 엄마한테 용돈 받았다면서!!"

"누가 훔쳐 갔냐?? 나와!!"

교실은 지퍼를 잠군 입들만 있는 모양인지 조용했다. 하긴 이런 거에 자백할 사람이 있나. 

"아 나와라 진짜!! 선생님한테 이르러 간다!"

조용했던 교실에서 쇠가 딱딱한 것에 부딪치는 마찰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내 옆에서. 주머니에 있던 백 원짜리 동전이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동전을 집어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고 여러 개의 발걸음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내 책상 앞으로 세 명의 학생이 둘러싸 마치 나를 압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아... 이거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맞다 너 우유 당번이잖아. 점심시간에 교실 들어왔었지?"

"....응."

"지금 빈 교실에 들어왔던 사람이 너 밖에 없어."

"....."

이미 아이들은 먹잇감을 잡았다는 듯이 눈을 어둡게 반짝이며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긴 그때 일 한 달도 안 됐으니... 난 그 이후로 벌이라는 명목하에 우유급식당번을 방학식까지 맡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 아니야."

멍청이... 내가 말싸움을 못한다는 걸 깜빡했다. 참... 머리 안 돌아가네.

"아니 근데 너 말고 가져갈 사람이 없다니까? 야 누가 점심시간에 왔던 사람??"

당연하게도 없다. 오늘은 체육 시간도 없었고, 이동수업도 없었다. 그럼 그나마 비는 건 점심시간인데... 여름처럼 더운 날에는 점심을 빨리 먹고 빈 교실에 우유를 옮겨야 하는 우유당번이 제일 수상하긴 하다. 근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나 진짜 아니야.."

"아 그럼 아닌 이유라도 말해보던가!"

"....."

없다. 증거고 나발이고 뭘 들이밀어야 날 용의 선상에서 지워줄까. 

"아 근데 진짜 얘 같은 데... 얘네 집 돈 없잖아.."

"뭐?"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의문형 한 단어를 그만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마지막 문장의 부분이 날 용의자로 만든 증거인 건가? 내가 돈이 없어서? 우리 집이 가난해서? 왜? 차라리 우유급식당번이어서 오해를 하던가.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 진짜 못 참겠다. 끼익거리는 의자의 소음과 미간이 찌푸려진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이름이 적힌 사물함으로 발소리를 쿵쿵내며 걸어갔다. 사물함의 손잡이를 잡고 당긴 다음 문을 열고 안에 있는 내 물건을 바닥에 우르르 쏟았다. 펄럭이며 떨어지는 교과서 소리, 양치할 때 쓰던 컵과 칫솔을 보관하고 있는 플라스틱이 부딪치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으로 엎어졌다. 

"뭐... 하는 거야..?"

황당하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다시 내 책상으로 걸어가 꼬질한 내 가방의 지퍼를 열고 거꾸로 들었다. 안에 있는 물건들이 사방팔방 흩어지며 떨어졌다. 

"야 뭐 하는 데."

그러곤 내 책상을 거꾸로 쓰러뜨려 책상서랍에 있는 종이와 공책들이 공기를 타고 흔들흔들 민들레 홀씨마냥 떨어졌다. 

"왜 저래?"

"내가 안 훔쳤어.."

치울 생각에 조금 귀찮았지만 이걸로 오해가 풀린다면 그걸로 괜찮겠지.

"야! 00아 니 지갑찾았어! 저기 3반에 @@이 책상서랍에 있었대!"

교실에 순식간에 설한풍이 지나간 것마냥 공기가 차가워졌다. 세 명은 동시에 나를 쳐다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짓곤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해가 풀렸으니 그걸로 된 건가. 하지만 셋을 포함한 같은 반 아이들 전부 나를 보는 시선이 잠깐이라도 차가웠던 것이 비참했다. 이상하게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서 혼자 구겨지고 더러워진 교과서를 주우며 소리 없이 나의 수분을 뚝뚝 게워냈다. 

 


"큰누나, 우리 거지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을 연화를 생각하지도 못한 채 이불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아 다행이다, 깨진 않았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 데~?"

아, 큰일 났다. 목소리 덜덜 떨린다. 안 되는데 이거. 

"우리 반 지훈이가 그랬어."

천화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왜...????"

"그냥 왜 그러고 사냬."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난 그렇다고 쳐도, 이제 겨우 5살인 애한테 그런 말을 해? 돈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친구관계도 못 맺을 만큼?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이 찢어질 정도로 꽉 쥐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친구가 잘못 알았네~"

"진짜?"

목소리가 밝아진 상태로 묻는 셋째가 귀여워 보이면서도 안쓰러워졌다. 나는 그런 소리 들어도 너희들은 절대 안 돼. 천화 쪽으로 다가가며 이불을 더 가지런히 덮어주고 토닥여주며 말했다.

"응 그럼~ 그런 거 걱정하지 마~ 분명 오해한 걸 거야~"

잠시 쉬어야 한다. 오던 잠이 싹 다 날아갈 만큼 화가 났지만 동생들이 자는 데 방해할 순 없었다. 

"언능 자~"

"큰누나는?"

"화장실 다녀올게!"

"응 잘자."

동그란 방문 손잡이를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닫았다. 부모님은 둘 다 야근이라 집에 오시지 않았다. 왜 우리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거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왜? 그동안 고이고이 쌓아 올렸던 응어리가 조금씩 눈으로 쏟아져 내렸다. 소리 내면 안돼, 소리 내면 동생들 깨니까 안돼, 참아, 한이화 참아야해. 

"하......"

조용히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시발 진짜......"

집에서 소리내어 말해선 안되는 금기어를 내뱉었다. 속에 있는 응어리가 연기마냥 올라오더니 눈과 코, 입에서 동시에 빠져나와 연기마냥 공기 중으로 편편파쉐되어 흩어졌다. 



"안녕하세요!"

"그려 우리 손주들 오랜만이구나~ 많이 컸네~"

이 신선한 공기는 여전히 좋구나. 오랜만에 친가 댁에 방문했다. 아쉽게도 부모님은 같이 올 수 없었지만... 뭐, 당연한 건가. 시원한 바닥 위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엎드렸다. 고구마밭은 가지 않을 거다.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동생들은 밖으로 놀러 가겠다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손을 붙잡고 나가버려서, 나 혼자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뒷산이나 가볼까? 흙을 밟아 뭉개면 들리는 바스락 소리와 바람이 살랑 부는 것에 맞춰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중간중간 나무들이 미처 가리지 못한 녹빛의 햇살이 나를 비춰준다.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고, 어떠한 값을 주지 않아도 돼. 그저 서로가 공존하며 성장하는 이 생명을 나는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위로를 해주는 듯하다. 이 공간 전체가 나를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아 포근했다. 어쩜 이리 편안할까? 누나도, 언니도, 학생도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장소.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 지 몰라도 나에게는 최고의 장소이다. 아무런 목표도 역할도 필요 없는 곳.


나는 어느 날 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비척비척 거실로 나갔다. 아마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나는 날이 선 듯한 말소리가 들리는 부모님 방으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리곤 문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장난해?"

"이화 엄마... 일단 진정 좀 해봐.."

"시발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나는 평소에 듣던 엄마의 목소리가 거칠게 변해 험한 말을 내뱉는 소리에 움찔했다.

"내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돈 함부로 빌려주지 말랬지. 학습을 못해? 우리 코도 못 붙이게 생겼는 데 무슨 돈을 빌려줘 개새끼야."

"...."

"하, 됐고. 어차피 오늘 내가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애들 니가 떠맡으라는 말은 안 할게. 지장 찍어."

"...이화 엄마 그게 무슨.."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단 생각도 안 들어? 우리가 좀 철이 없긴 했어도. 난 니가 뭐라도 있을 줄 알았어. 그나마 먹고 살만큼은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

"난 그렇게 가고 싶은 대학도 포기하고, 너랑 같이 살겠다고 했는데 그럼 그만큼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니가 지금 벌어 오는 거, 천화 기저귓값도 못해."

"..."

"그렇게 우리 청춘 날려 먹고, 지금 남은 게 뭔데? 온몸이 쑤시는 것밖에 안 남았어. 약값밖에 안 남았다고. 우리 인생이 그냥 다 빚이 되어버렸는데. 너라면 살만하겠냐? 배부르고 잠만 잘 수 있으면 다야? 애들은 어쩌고? 이화 곧 있으면 중학생이야. 난 그래도 너처럼 책임감 없이는 안 살 거야. 달마다 애들 양육비로 30 정도만 보내. 나머지는 차차 정하고."

"서하야... 이건... 이건 아니야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 응..?"

"내 이름 부르지 마. 좋은 말로 할 때 지장 찍어."

"...서하야... 제발......"

"한정덕, 고개 들어. 애새끼처럼 굴지 마. 이게 우리 가족을 위한 거야 더 좋은 선택도 없어."

"나는... 나는 이렇게 헤어지기 싫어 서하야... 제발 한 번만 생각해주라... 제발...."

"난 그동안 너랑 살면서 기회 여러 번 줬어.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거니까 지장 찍어. 군말 말고."

"...."

방안에선 부스럭거리는 서류 종이 소리와 흐느끼는 아빠의 목소리, 그리고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엄마의 딱딱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잠깐의 정적 후에 발걸음 소리가 성큼성큼 들려왔다. 나는 후다닥 뛰어 깜깜한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어렸을 때 나름의 위장이다. 문이 벌컥 열리고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엄마 앞에 서서 물었다.

"엄마 어디 가요...?"

"이화야...!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미안해. 엄마가 시끄럽게 했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하는 엄마는 방금까지 아빠와 대화하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어디 갔다 오시는 거에요..?"

"그... 이화야.."

"...괜찮아요! 전 엄마 기다릴게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

엄마는 그 뒤로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나에겐 안심하라는 말들을 해주셨지만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멋있고 당당한 엄마였지만 그날의 엄마는 마치 무너져 내린 모래성처럼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얼굴이었다.


"이화야 거기 있는 그릇들만 하면 돼~!"

"...네."

나는 내 손과 맞지 않게 큰 고무장갑을 집어 들었다. 이젠 부려 먹는 것도 익숙하구나. 엄마는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정적 씨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은 이미 친척들의 귀에 들어가 입에 오르고 내렸다. 아빠는 일을 더 열심히 하셔야만 했고 나와 동생은 큰 고모의 집에 맡겨졌다. 여전히 친척들은 천화만 좋아하신다. 그리고 난 이제 고모가 말하는 문장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로 그릇만 닦았다가는 눈칫밥을 먹을게 눈에 뻔하지. 나는 헐렁한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들을 하나둘씩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고모! 뭔 애한테 설거지를 다 시켜요!!"

"으응? 아니 애가 하겠다길래~ 난 말렸어!'

"하, 이화야 나와! 언니가 할게!"

"..어...? 그..."

아, 사촌 언니 왔구나, 유일하게 이 집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언니는 어느새 내가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자신의 손에 끼고 익숙하게 그릇들을 박박 닦았다. 그러곤 방에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옆에 든든한 나무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맑아진 공기 덕분에 숨이 편안하게 쉬어지는 것 같다.


사촌언니는 멋있는 사람이다. 성격도 좋고 성적도 좋고, 심지어 꿈도 자기 스스로 이룰 거라며 학업 지원도 받지 않았다. 친척들은 무슨 여자애가 저렇게 기가 드세냐며 험담했지만 언니는 그런 말에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떠드는 건 찌질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며 무시했다. 내 눈에 비치는 언니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치켜세우지 말라며 언니는 장난스럽게 넘어갔지만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어느새 나는 언니가 고모네 집에 오면 뒤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언니는 내가 하는 말에 항상 귀 기울여주었다. 내가 하는 말에 화내주기도 하고 웃어주기도 하는 그런 고마운 언니다. 어느 날은 언니가 산책이나 가자며 근처 공원 잔디에 앉아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했다.

"이화야, 너 중학교 어디 갈 거야?"

"어...? 나는... 아직 못 정했는데.."

"흠, 이화야 너 세인트 중학교 들어갈래?"

"..세인트 중학교?"

12살의 나는 학교 같은 건 어떻게 되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였다. 돈이 없으면 학교 같은 거? 안 다니면 돼! 하는 그런 해맑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명문 학교 같은 건 당연히 관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관심이 있어도 못 갔을 것이다.

"응, 나 거기 넣었다가 떨어졌거든."

"언니가 떨어졌다고?? 그런 곳에 내가 어떻게 가..."

"나도 사람이야, 실패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치만..."

"그거 알아? 큰 고모네 아들도 세인트 학교 들어가려다 떨어졌다? 뭐 당연하지,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놈이 어떻게 들어가. 나도 떨어졌는데."

"진짜?"

"응, 그러니까 너도 넣어봐, 누가 알아? 혹시 붙을지? 뭐, 다른 곳 가고 싶다고 하면 강요는 안 할게."

"으음.."

"...이화야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지금 친척들 너희 다 무시하는 눈치야. 어린 애한테 잡일 시키는 것만 봐도 만만히 보고 있는 거라고."

"..."

"근데 나도 못 들어가고 고모네 아들도 못 들어간 학교를 네가 들어간다? 그럼 집안 다 발칵 뒤집히는 거지 뭐. 난 큰 고모 얼굴 상상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 야!"

"나는 근데... 머리도 안 좋고... 얼굴도 안 예쁘고..."

"야, 학교 가는 데 얼굴이 뭔 상관이야. 네가 연예인 할 것도 아닌데 뭐."

"...."

"...너 또 뭔 소리 들었지, 누구한테 들었어."

"그... 작은 고모부가... 나는 얼굴 안 예쁘니까 머리 기르지 말래. 못생겼다고..."

"아오 그 뚱땡이가 지 뱃살이나 관리할 것이지 애한테 뭔 얼굴 타령이야!!"

언니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치다가 이화야 잠깐만. 하곤 주머니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내 내 머리를 한쪽 방향으로 높게 묶어주었다. 분명 머리가 짧아서 엉망이었겠지만 나는 초록빛의 나뭇잎 모양을 한 그 머리끈이 마음에 들었다.

"너 머리 기르고 이렇게 묶고 다녀. 넌 긴 머리가 잘 어울려."

"....응.."

"..이화야 그거 알아? 너랑 네 동생들 이름에 다 꽃 한자가 들어가 있다? 너희 어머니가 그러셨어, 꽃처럼 예쁘게 클 거라고. 그래서 이름에 다 꽃 화가 들어가 있는 거야."

"...으응..."

"이화야 너 예뻐, 예쁘니까 그런 말에 상처 받지 마. 왜 이렇게 언니 말을 못 믿어."

코 끝이 찡해졌다. 눈에서 주르륵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언니는 그런 나를 꽉 안아주었다. 고여있던 댐이 활짝 열린 것처럼 눈물은 멈출 기세가 안 보였다. 오랜만에 소리 내 울었던 것 같다.


"이화야, 넌 뭐가 되고 싶어?

한참을 우는 나를 달래주던 언니는 울음이 그친 나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건 있지만 되고 싶은 거? 아직 잘 모르겠다.

"음... 하고 싶은 건 있는데..."

"그래? 뭔데? 말해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언니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숲에서... 살고 싶어..!"

언니는 비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응원해주었다.

"그래? 이뤘으면 좋겠네! 언니가 도울 거 있으면 말해!"

"..응! 언니는 뭐가 되고 싶어?"

이번엔 내가 물었다. 언니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나는 FBI가 되고 싶어!"

"우와!!!"

"사실 이건 내 커다란 망상이고, 나는 말이야, 형사가 되고 싶어! 세상에 나쁜 놈들 때문에 아프거나 힘든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거든. 그래서 유학도 준비 중이야."

언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구나. 주황빛으로 빛나는 노을을 배경으로 나와 언니가 앉아있었다. 서쪽으로 지고 있는 노을은 언니를 비추기 위한 조명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서, 그 공간은 마치 언니가 존재하기만을 위한 무대 같았다.

"..언니."

"응? 왜?"

"나... 세인트 학교 들어갈래!"


한동안 언니는 세인트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나를 위해 열심히 도와주었다. 솔직히 죽을 것 같은 스케줄이었지만 명문 학교를 위해서라면 뭐, 이 정도야. 아빠는 처음엔 네 머리에 어떻게 그 학교에 들어가냐며 웃었지만 언니가 나 대신 화를 내주었다. 가려고 다짐한 애한테 무슨 말이냐면서. 엄마는 많이 바쁜지 아직도 연락이 되질 않는다. 하루에 한 번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번호를 꾹꾹 눌러가며 연결음을 듣고 있을 뿐이었지만 분명 엄마도 내가 세인트 학교에 들어가면 돌아와 주실 거야. 분명.


"언니... 나 못 열겠어... 언니가 대신 열어주라.."

"어휴, 그래 알겠다. 알겠어."

언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편물을 뜯어냈다. 나는 우편함에 여러 개의 고지서가 아닌 다른 봉투가 왔다는 것에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결과를 보고 싶진 않았는데..

"....이화야."

"...역시 떨어졌어?"

".....붙었어."

"..언니 거짓말이지."

"아니, 진짜 붙었어.."

나는 언니의 옆에 꼭 붙어서 하얀 종이에 쓰여진 검은 글자들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축하드립니다. 귀하는 세인트 중학교에 최종 합격..하셨습...니..

"....이거 꿈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바보야!"

"아야!"

언니가 내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아픈 게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진짜 꿈이 아니야. 소리를 질러가며 언니와 끌어안고 신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솔직히 내가 갈 수 있을까? 긴가민가했지만 내 손에 쥐어진 합격 통지서를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내가, 세인트 학교에 들어간대, 언니도 못 가고 큰 고모네 아들도 못 간 학교를 내가 간다고! 언니는 바로 고모 댁으로 나와 합격 통지서를 들고 뛰어갔다. 친척들은 내 합격 통지서를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언니는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얼굴을 뭉개보았지만 이미 표정에서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다음 날 저녁,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의 번호를 다이얼에 꾹꾹 눌러 수화기를 귀에 댔다. 익숙하게 연결음을 들어가며 몇 초 후에 들릴 안내원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달칵- 

"..여보세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듣지 못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그, 엄마 저예요..!"

"아..이화구나. ..잘 지내고 있니?"

"...네!"

엄마와의 대화가 어색하게 느껴져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엄마! 저..세인트 학교 들어가요! 합격했거든요!"

"어머 정말? 거기를? 정말 고생 많았어 우리 딸."

"........엄마는...언제 와요...?"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망할. 엄마는 당황한 듯 하다가 말을 피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게 뭐지...? 나는 입학식 날 아침에 가벼운 마음으로 이불을 들췄다. 달걀이긴 하지만 뭔가 무늬가 화려한 모양의 달걀이 내 이불 안에 있었다. 또 연화가 장난쳤구나.

"연화야! 언니 이불 안에 달걀 넣어놨어??"

"응? 아니!"

어라, 쟤는 장난쳐놓으면 솔직하게 말하는 애인데, 그렇다고 천화가..? 천화는 장난칠 성격도 아니고... 나는 그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따뜻했다. 그럼 내 이불에 꽤 있었다는 말인데..게다가 무늬도 이상하고. 일단 입학식 날이니까 냉장고에 넣어두고 갈까..아니지? 유정란이면 어떡해? 나는 결국 수많은 고민 끝에 가방 안에 그 이상한 알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입학식이니까!

"우와...."

나는 입 밖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학교가 너무 크잖아!! 사람이 몇 명이든 들어가도 넉넉할 것 같은 건물에다가 하나하나 아름다운 식물들 하며, 다들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음? 교복? 아, 교복.... 그야 명문 학교라서 각오는 했지만... 가격이 정말 장난 아니었다. 0이 얼마나 붙어있던지 기겁하며 내려놨던 기억만 있다. 아냐! 나만 교복 안 입었겠어?! 입학식이니까 그럴 수 있지! 


"...회사, 그만뒀어요?"

"그래~ 그 자식이 날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데! 그래서 한 대 뻥~~ 차고 왔어 어때, 아빠 멋지지?"

아빠는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나에게 뿌듯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교복도 사지 못했는데, 이번 달 가스 요금이랑 전기 요금 등등... 내야 할게 산더미인데, 순간 아빠가 미웠다. 그깟 화 한 번 참으시면 안되는 건가? 나랑 동생은 아직도 그 놈의 돈 때문에 심장 철렁이며 살아가고 있는데,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 그래, 아빠도 아빠 나름의 사정이 있으셨겠지. 어른의 사정엔 간섭하지 말자. 나는 말없이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가 근처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다,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눈  앞이 뿌옇다.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이유를 쓱쓱 소매로 닦아내고 익숙한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신호가 가다가 덜컥, 걸린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엄마..."

"우리 이화구나~ 그래, 왜 전화했어~?"

"어떡..해요? 아빠... 회사 일주일 만에 그만뒀대요..."

"..."

"엄마... 죄송해요.. 죄송해요...근데...흐윽, 흐으....돌, 아와 주시면 안돼요...?"

엄마는 다음 날 살고 있던 방을 빼고 말았다. 처음으로 부려본 욕심이 엄마에게 닿은 것이다. 그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내가, 엄마의 자유를 빼앗았다. ...한화가 보이지 않네.


"하아아....."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여전히 교복을 안 입은 학생은 나밖에 없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곤 돌아다니다 옆에서 불쑥 한화가 튀어나왔다,

"한숨을 왜 그렇게 쉬고 다녀! 어깨 펴!"

"그치만....."

한화는 수호 캐릭터, 즉 입학식 때 그 이상한 알에서 나온 아이다. 솔직히 처음엔 엄청 엄청 놀랐지만 어느 새 한 달간 같이 지내면서 익숙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도 들었고... 아 참, 맞다. 이사장님이 날 부르셨다고 했지. 본관 가장 높은 층에 뭔가 어두운 듯한 느낌도 드는 커다란 문 앞에 서서 노크를 똑똑, 했다. 그래도 괜찮아, 만약 퇴학 당하더라도. 그게 내 운명이라는 거겠지. 전혀... 무섭지 않아. 그럼. 난 괜찮아.

"이화야! 얼른 들어가!"

"응? 으응..."

덜컹,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이사장님이 앉아 계신 책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긴장돼서 침을 꿀꺽, 소리가 나지 않게 삼켰다. 그러나 이사장님은 홀홀 웃으시며 날 반기시는 게 아닌가. 가디언이라는 동아리가 있는데, 나와 같은 수호 캐릭터를 가진 학생이 있는 곳이며, 우리 마을의 엑스알을 정화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처음엔 당연히 거절했다. 내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이사장님은 엄청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무려.. 교복과 급식, 학비 등등이 가디언에 들어온다면 무상 지원! 이게 무슨 소리야! 당장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 나는 순식간에 눈을 반짝이며 가디언 신청서를 거의 1분 안에 작성하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반복한 채 빠르게 가디언실로 뛰어갔다. 그리곤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이런, 노크도 안 했네. 그러자 안대를 쓴 사람과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한 예쁜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대 쓴 사람이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을 내게 건넸다.

"너 뭔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냐?"

"아... 여기 들어올 수 있나요?"

"...지금 들어와 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 아니 그러니까 여기!! 가디언에!! 들어올 수 있나요?!!"

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나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