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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1

기억소거 기반/승천 후 천국-지옥간 전령 임무를 맡은 펜셔스

b-luray by 루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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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옥불에 타던 것을 주께서 건져올리시매 마땅히 주의 뜻대로 그 쓰임을 다할지어다.

*

따지자면 펜셔스는 성미가 급한 편이었으나 유독 아침만큼은 뭉그적거렸다. 이유야 여러가지였다. 제일 큰 이유는 그가 밤늦게까지 사부작사부작 만드는 것을 즐기느라 밤잠이 충분치 못하다는 데에 있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가 그냥 아침해를 싫어하는 데에 있었다.

천국의 아침해는 너무 밝았다. 그의 거처엔 암막이 켜켜이 쳐져있었는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이치는 아침해 때문에 반나절의 컨디션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수가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았다가 그 사이로 새어들어온 빛 때문에 하루 종일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펜셔스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강한 빛 때문에 눈이 잠시간 멀어버리는 경험이야 흔하겠지만 그게 해가 다 지도록 이어진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원체 겁이 많은 펜셔스는 제 눈이 아주 완전히 멀어버린 줄 알고 그날 내내 울었더랬다.

어쨌든 그의 눈은 천국의 빛에 유독 약했다. 펜셔스는 이것이 제가 ‘죄인 출신’이기 때문에 가진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추측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지옥에도 밤낮은 있었으나 이토록 밝은 태양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명은 오직 지상의 몫이었으므로.

그래서 펜셔스는 낮에 나다닐 때는 꼭 고글을 썼다. 나안보다 시야가 불편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이 너무 시큰거렸다. 눈이 아리다못해 뽑혀나갈 것같은 통증을 찾아 겪는 취미는 없었다.

펜셔스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어렵지 않게 단장을 하고 옷을 걸쳤다. 매무시를 하고 고글까지 내리고 나서야 그는 커튼을 젖힐 수 있었다. 환한 빛이 들이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거울에 제 모습을 한 번 비쳐보고는 거처를 나섰다.

그는 의회에 볼일이 있었다. 말이 의회지 만능 국무처리단지 같은 곳이었는데, 법도 만들고 행정도 처리하고 심지어 재판까지 진행하고는 했으니 실질적으로는 왕성에 가깝지 않은가 싶었다. 물론 펜셔스 입장에서는 썩 낯설 것도 없는 통치체제긴 했다.

그의 거처에서 목적지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아니 사실 천국의 모든 가도와 건물은 ‘비행’을 상정하고 세워진 모양으로, 도저히 걸어서는 제시간에 도달할 거리가 아니었다. 여유있게 집을 나서기는 했으나 제때 도착하려면 그 역시 날개를 써야만했다. 다만 그는 나는 것이 영 익숙지 않았다. 이 역시도 그가 ‘죄인 출신’인 탓이었다. 악마 중에도 날개를 가진 자들은 많다지만 펜셔스는 뱀의 태를 하고 있었다. 아마 지옥에서도 날개 따위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비행에 좀처럼 숙달이 되지 않는 것이리라. 펜셔스는 그게 억울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제대로 된’ 천사가 될 날이 한참 멀었다는 표식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을 뿐이다.

빨리 걷는 것보다 조금 나은 속도로 그는 날았다. 몇 번의 상승과 활강 끝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도착이었다. 이정도면 ‘스승’에게 자랑을 해도 되겠는데. 그는 회중시계를 두어번 여닫으며, 볼일을 마치고 스승과 잠깐 얘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지를 생각했다.

잠깐 대기하고 있으려니 회의장에서 펜셔스를 불러들였다. 높으신 분들을 알현하는 자리였으므로 펜셔스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그는 다시금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날개는 올바르게 갈무리 되었는지, 옷이 구겨진 곳은 없는지, 머리는 차분한지 확인한 후에, 펜셔스는 고글을 챙 위로 올리며 문을 넘었다.

의장 내부는 과하게 밝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는 것으로 최대한 눈이 받는 빛을 줄여보려 노력했다. 고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펜셔스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 앞에서 자신이 ‘덜된’ 천사라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드니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이 중 하나가 반갑게 활짝 웃어보였다. 에밀리였다. 죄인 출신인 펜셔스가 완벽하게 천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없는 시간을 쪼개 스승—멘토—을 자처하고 나선 이가 바로 그였다. 펜셔스는 에밀리가 이 자리에 동석했다는 것이 굉장히 든든했다.

“펜셔스.”

높이 앉은 천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대를 이자리에 부른 것은 그대에게 내려진 과업을 다시금 확인하고, 주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마땅히 필요한 권능을 허하기 위함이다.”

펜셔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높으신 분들의 음성은 언제 들어도 긴장이 됐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어려운 자리에서의 음성은 늘 광환을 통해 머리로 직접 꽂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얘기가 길어지면 멀미를 하는 듯이 메슥거리고는 했다.

“그대는 저 아래 지옥구렁에서 건져올려진 최초의 죄인이라. 이는 주께서 지옥을 굽어보리라 뜻을 보이심이니, 그대는 곧 주의 뜻의 증좌니라.”

무슨 말을 저렇게 장황하게 한담. 슬슬 느껴지기 시작한 울렁거림에 펜셔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높이 앉은 이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황한 연설을 하던 이보다 조금 낮게 앉은 천사였다. 그는 길쭉한 무언가를 비단천에 둘둘 감싸 들고 있었다. 펜셔스는 그게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마땅히 필요한 권능’. 그에게 맡겨진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었다.

“……하여, 펜셔스, 그대에게 궁창과 뭍과 구렁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권능을 하사하니라.”

펜셔스는 슬금슬금 기어 허리를 깊이 숙인 채 그것을 받아들었다. 비단천 너머로 금속의 냉기가 느껴졌다.

“그대는 지옥불에 타던 것을 주께서 건져올리시매 마땅히 주의 뜻대로 그 쓰임을 다할지어다.”

*

그가 받은 권능은 나무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지팡이였다.

날개 한 쌍이 달린 눈알장식이 머리에 자리하고, 그 아래로 지팡이를 타고 오르는 뱀 두 마리가 주물되어 있었다. 후드를 바짝 세운 두 마리 뱀에는 각자 다른 색의 금속이 입사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희었다.

펜셔스는 지팡이 역시도 맵시의 한 축을 담당하던 시대를 살았던 영혼이지만, 이건 좀 과한 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지옥에 보내는 전령에게 맡기는 권능인데, 좀 과하게 휘황찬란한 편이 천국의 위세를 보이기에는 나을 것 같긴 했다.

제 볼일을 마치고도 회장 근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려니 기다리던 이가 나왔다. 에밀리였다. 반가운 목소리로 펜셔스를 부르며 작은 소녀가 포르르 날아왔다.

“먼저 가있지 않고요. 세라에게 인사하고 가야하죠?”

천국의 총책임자인 세라는 펜셔스에게는 어려운 상대였다. 단지 그녀가 세라핌의 수장이라는 까마득한 위치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느끼기에, 아직 자신은 세라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지극히 보수적이었고, 아마도 제 출신때문에 빗장을 여는 것이 더딘 것일 터다. 펜셔스는 이것도 자신이 감수해야할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죄인 출신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는 세라가 어려웠으므로 에밀리를 굳이 기다렸다. 그녀가 동행해준다면 조금 덜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에밀리도 말은 하지 않지만 펜셔스가 왜 구태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멀리 나가는 건데, 긴장되지 않아요?”

어째 당사자보다 더 긴장된 표정으로 에밀리가 물었다. 에밀리의 기준으로 지옥행은 까마득한 여정이었다. 권능이 있으니 손 한 번 휘저으면 한 걸음만에 닿을 수 있는 곳인데도 그랬다. 하긴 에밀리는 하계에 강림할 일도 없었으므로, 천국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큰 모험으로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글쎄요, 중책을 맡은 게 제일 긴장되는 일이에요. 지옥은 뭐…… 제겐 익숙한 곳일 테고.”

펜셔스는 어깨를 들먹였다. 딱히 자조적인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에밀리의 표정에 얼핏 안타까움이 스쳤다. 아차 싶어진 그는 하사받은 권능을 들어보이며 덧붙였다.

“그으……보다는, 권능이 있으니 그냥 옆 동네 마실 나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예, 그런 의미죠.”

“음, 그렇구나. 펜셔스, 그치만 임무 때문에 긴장할 건 없어요. 당신에게 맡겨진 일이라는건, 당신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천국의 과업이란 그런 거니까!”

그녀가 활짝 웃었다. 에밀리는 사람을 북돋아주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천국 곳곳에 기쁨과 행복을 전하는 것이 그녀의 과업이라는데, 이것도 권능의 영향일까? 펜셔스는 그녀의 격려를 받을 때마다 그게 궁금했다.

그들의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의장에서 세라의 집무실까지 별로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밀리가 세라에게 방문을 알리는 동안 펜셔스는 재빨리 매무새를 다시 바로잡았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전면창을 등지고 앉은 세라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서류더미가 탑처럼 쌓여 있었는데, 모두 그녀의 최종결재를 기다리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손짓 한 번으로 서류와 깃펜 등을 어딘가로 치워버리고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녀 등 뒤에 있던 전면창에 휘장이 내려졌다.

“오늘이로군? 펜셔스. 권능은 받았나?”

펜셔스가 지팡이를 보이듯 내밀었다.

“그대도 잘 알겠지만 지옥과는 단절되어 있었지. 교류의 의미에서 말이야.”

비록 이전 생의 기억은 없지만 천국과 지옥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다. 천국에 입성하면 천사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절로 알게 된다. 광환을 통해 전해진 지식은 대부분 천국의 역사와 사회시스템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지옥과의 개략적 관계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허나 전번의 구제(驅除)에서…….”

세라는 말을 하는 도중에 잠깐 시선을 에밀리에게 두었다. 펜셔스는 저도 모르게 힐끔 에밀리의 안색을 살폈다가 다시 세라에게 집중했다.

“상황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리가 이후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는 지옥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달려있어. 정확하게는 루시퍼와 그의 딸 말이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로서는, 지옥이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루시퍼의 딸이 처음 말한 대로 죄인의 갱생을 유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 그쪽이 원한다면 구제의 시기나 규모를 조정해줄 수도 있지. 죄인의 구원이 가능함이 증명되었으므로.”

“…….”

“허나 그것은 가장 긍정적인 경우다. 천사에게 대항력을 갖추었음을 안 그들이 마냥 순종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는 없지. 그들이 항거한다면…… 그래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가장 최악이고, 그것만은 막아야 해.”

세라가 손을 젓자 허공에서 고급스런 두루마리가 튀어나왔다. 금색 빛으로 감싸인 그것은 천국의 인장으로 봉인된 서신이었다. 펜셔스는 권능을 받을 때 들은 대로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지팡이의 눈이 깜빡이더니 양옆의 뱀 주물이 스르르 몸을 늘려 서신을 휘감았다. 와, 신기한데. 무슨 원리지? 펜셔스는 눈을 반짝이며 권능이 서신을 받아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대는 지옥왕 루시퍼에게 이 서신을 전해라. 그리고 그의 응답을 받아오면 된다. 더불어, 루시퍼의 딸이 그의 사업을 속행할 의지가 있는지도 확인하고 와라.”

*

알현을 마치고 나오며 펜셔스는 한숨을 탁 내쉬었다. 자신이 받든 임무가 새삼 무거웠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라 천옥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잘 할 거예요. 말했죠? 천국의 과업이란 그런 거라고.”

에밀리가 밝게 말했다. 좀 전의 알현에서 잠시나마 굳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저는 지옥왕에게 서신을 전하는 것까지가 제 임무라고 생각했어요. ……괜찮을까요?”

“찰리, 아니…… 루시퍼의 딸이 죄인의 구원 사업을 계속할 생각인지 알아보고 오라는 거, 그게 걱정돼요? 펜셔스.”

그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던 것은 둘째 치고, 심중을 알아보고 오라니 잠깐 접견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루시퍼의 딸이 천국행 사업을 접을 마음을 먹었다 한들, 천사가 가서 ‘어쩔 거냐’ 물었을 때 과연 그걸 곧이곧대로 대답할까?

“노력은 해보겠지만…… 아마 그들은…… 속내가 어떻든 제게 구원 사업을 계속하려는 것처럼 보여줄 것 같거든요. 그야 세라핌께서는 그것도 다 감안을 하고 계시겠지만.”

“저도 그들이 어떤 행보를 가질지 확신은 못해요.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속이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그곳에서 구원받았으니까. 당신이 보는 것이 곧 진실일 거예요. 이것만은 절 믿으세요.”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에밀리를 믿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걱정이 사그러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싹같은 용기가 고개를 내밀게 하기는 충분했다. 지옥행을 앞두고 계속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으므로 펜셔스는 결연한 에밀리의 눈빛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펜셔스, 권능을 행하려면 의구심이 있어서는 안 돼요. 당신은 당신의 맡은 바를 훌륭히 이뤄낼 거예요. 설령 앞길이 험난할까 걱정이 되더라도, 당신이 잘해낼 거라는 믿음 자체를 저버려서는 안 돼요. 당신이 믿는 한 권능은 언제나 길을 열여줄 거예요.”

“……네. 믿어요. 믿을 거예요.”

“그리고…….”

에밀리가 조금 어려운 부탁을 하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옥에 가서, 루시퍼의 딸…… 찰리를 만나면, 이 말도 꼭 전해주세요. 돕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세라핌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전하는 말이에요.”

“그 말만 전하면 되나요? 회답을 받아올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저는 찰리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녀를 지지한다고도 전해주세요.”

“……어떤 결정을 하든?”

“네.”

펜셔스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전해달라는 말에 대고 가타부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세라핌인데, 최악의 상황을 염두하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물론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은 전령의 몫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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