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즈빈호텔

뱀의 눈

펜셔스 승천하면서 디자인 변경점 날조

b-luray by 루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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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온통 새하얀 곳에서 눈을 떴다. 꿈인가? 그게 가능한가 싶기는 하지만, 펜셔스가 느끼기에, 이곳은 공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지탱할 수는 있지만 무언가를 딛은 느낌은 없다. 허공에 떠있다기에는 부유감이 없다. 가깝고 먼 것, 땅과 하늘의 경계,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완벽한 하양이었다.

아하, 그렇군. 사후-사후 세계란 거구나. 펜셔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공허라는 곳일 수도 있겠다. 그는 지옥에서 들어보았던 소멸 후의 삶을 떠올렸다. 생각과 다르기는 했지만—공허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암흑물질 같은 것에 빨려들어가는 것쯤으로 생각했기에—패닉에 빠질만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제 소멸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거대한 비행선이 폐허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반쯤 기운 채 누워있는 비행선은, 놀랍게도 어느 한군데 파괴된 곳도 없이 멀끔했다. 중심만 바로 세우면 곧장 이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공허에 떨어졌는데 비행선도 함께 주다니 나름 괜찮은 사후-사후 세계구나 싶었다. 아마 그는 존재가 스러지도록 이곳에 혼자 있어야겠지만, 적어도 비행선을 분해조립하는 걸로 무료함을 달랠 수는 있을 터였다.

혹시 모르지. 혹시 모르니까…… 펜셔스는 저를 보좌하던 에그보이즈가 혹시 선내에 있지는 않을까 싶어 기울어진 비행선 벽체를 타고 오르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얘, 뱀아. 깨어났니?」

펜셔스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디서 들렸는지 알수 없었으나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놀라지 말거라. 네게 용무가 있어 불렀단다.」

어디 먼 곳에서 울리는 느낌도 아니고,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온통 새하얀 세상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었는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는 심장이 쿵쾅거려왔다. 그는 호흡곤란을 겪을 정도로 놀라서는 몸을 움츠렸다.

“누, 누구? ……누가 있……나?”

「그럼. 네가 내게 있단다. 눈앞에 보이길 원하니?」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어떤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까? 모습이란 내가 갖지 않은 것이란다.」

그 말과 함께 눈앞에 뿌연 뭔가가 어른거렸다. 그러다 그것은 곧 형체를 갖추었다. 펜셔스는 저도 모르게 후드를 최대한 펼치며 위협성을 냈다. 눈앞에 자기 자신이 서있었으니까.

「불편하니? 네 모습이 가장 익숙할 줄 알고.」

그리고 곧장 목소리는 다른 모습을 취했다. 에기의 모습을 하고 넥타이를 한 번 바로잡은 그것은 펜셔스의 표정을 보고는 어깨를 한 번 들먹였다.

「어떠니? 네 수족의 모습이라면?」

영 아니다 싶었는지 그것은 다시 한 번 모습을 바꾸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아, 이 모습도 별로인 모양이구나.」

펜셔스가 눈물을 왈칵 쏟는 것을 보고 목소리는 난색을 표했다. 체리의 모습으로 손수건을 건네며,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모습을 바꾸었다. 이번엔 펜셔스가 아는 이들의 태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는 펜셔스 본인에다 표백제를 들이부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정도로 타협하자꾸나. 너와 대화를 하기는 해야하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그는 그 모습을 취하고도 펜셔스가 진정하기를 한참 기다렸다. 체리의 모습으로 건넸던 손수건이 흠뻑 젖은 뒤에야 펜셔스는 겨우 울음을 멈췄다.

“……그래서…… 무슨 대화를 하자는 거죠? 아니 그보다…… 당신은 뭐야? ……신?”

「그렇단다. 내가 스스로 칭하는 건 아니고,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일컫는 거지만.」

“세상에.”

비늘 대신 보송보송한 솜깃이 돋은 흰 뱀이 뒷짐을 지고 굼실굼실 움직이며 말했다.

「뱀아, 나는 네게 용무가 있단다. 네게 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공허에서 건져왔지. 처음에 말했는데, 기억 나니?」

정신이 없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얼핏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펜셔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래도록 세상을 보고 있었단다. 나의 대행자들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내 즐거움이지. 나의 대행자들은 나의 눈이요, 나의 손과 발이라. 하지만 지옥은 나의 대행자들이 창조한 곳이 아니지. 하여 내게는 지옥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단다.」

새하얀 펜셔스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의 대행자들이 지옥을 징벌하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눈을 가린 채 벌어지는 일. 나는 지옥의 공주가 천국에 왔을 때에야 참상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단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 학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호도 아니요, 불호도 아니라.」

“……뭔…….”

새하얀 펜셔스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야 나 또한 슬프단다. 지옥의 죄인들 또한 나의 대행자들이 창조한 이들의 영혼이 아니니?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지켜본단다. 작은 풀 한 포기, 하루살이 한 마리조차 나의 즐거움이라. 지옥에 떨어졌다한들 그들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던 영혼이니, 그들 역시 나에게 소중하다. 허나 내게 소중하다해서 모든 영혼들이 마냥 행복하기를 원할 수는 없지. 나는 그저 좌관할 뿐이므로.」

“허, 신이라는 작자가 이러니 천사들도 그 모양이로군.”

「네게는 기껍지 않으리라는 것, 충분히 이해한단다.」

펜셔스는 불쾌하다는 듯 쉿쉿거렸다. 흰 뱀은 아랑곳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펜셔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흰 뱀은 가만히 펜셔스를 들여다보다가, 슬쩍 한 발 물러주었다.

「어쨌든 내가 바라는 것은 지옥을 굽어볼 수 있는 눈이란다. 이를테면, 네가 가진 수많은 눈들 말이다.」

“한마디로, 소중은 한데 죽어나가는 건 아무렇지 않은 학살을 직접 감상하고 싶다?”

「말하지 않았니? 나는 좌관할 뿐이니.」

“끔찍하군.”

그렇게 관망이 좋으면 아무 천사한테나 캠코더 하나 들려주고 찍어오라면 되지 않나? 요즘은 기술이 하도 좋아져서 무슨 3D니 4D니 하는 것들로 극장을 채우더만. 천국과 지상을 굽어보는 게 취미인 양반이라면 영화관에 무슨 신기술이 들어와있는지도 알게 아닌가? 펜셔스는 팔짱을 끼고 불쾌한듯 꼬리를 탁 쳤다. 흰 뱀은 그저 빙긋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럼 이건 어떨까? 네가 내게 눈을 준다면, 나는 네게 육신을 새로 주마.」

“……예?”

「너의 영혼은 온전하단다. 천사의 업화는 너의 육신과 죄악을 모두 태웠고, 멀리 떨어져나간 네 영혼을 내가 흩어지지 않게 오롯이 건져왔지. 새로운 육신만 있다면, 네 영혼을 거기에 안착시키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닐 터. 어떠니?」

“당신 말은…… 다시 지옥에서 되살려 준다고요?”

「그건 안 돼. 나는 지옥의 신이 아니니 악마의 육신을 줄 수는 없지. 하지만 천사의 몸을 네게 줄 수는 있단다. 그 몸으로 네가 지옥에 내려가는 것은 너의 자유라.」

“어쨌든 다시 살려준다는 거잖아요?”

「어떠니?」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다시 그곳에 돌아갈 수 있다면 펜셔스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죽음은 찰나였으나, 그 순간 느낀 슬픔과 공포는 아직까지 절절했다. 다시 돌아가서 그의 친구, 아니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런 것쯤 멀끔히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당신은 신이라면서 굳이…… 이런…… 거래를?”

「네 것이잖니? 너는 지옥이 품었던 영혼이니, 네 것을 멋대로 취할 수는 없지.」

흰 뱀은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지옥에서 살아왔기에 거래와 계약을 앞에 두고 십수 번은 더 생각하는 진중함을 갖게 된 펜셔스였다. 허나 이것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흰 뱀의 손을 마주잡았다. 맞잡은 손이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지옥에서의 거래처럼 어떠한 힘의 이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악수인가? 펜셔스는 생각했다.

흰 뱀은 허리를 다시 펴 펜셔스와 같은 눈높이를 하고는 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펜셔스의 하반신과 후드에 자리했던 눈알과 무늬들이 하나둘 감기기 시작했다. 펜셔스는 화들짝 놀랐으나 딱히 통증이 따르지는 않았다. 그저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감긴 채 다시 뜨이지 않았을 뿐이다.

제 몸의 변화에 조금 당황한 펜셔스는 맞은편의 흰 뱀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뭔가를 물어보려던 그는, 흰 뱀의 등 뒤에 십수 개의 붉은 눈이 원을 이루어 둥둥 떠있는 것을 보고 펄쩍 뛰어오르며 비명을 질렀다.

「놀랐니?」

“아니…… 아니 무슨…….”

「맘에 드는구나. 잘 보여. 좋은 눈을 받았으니, 나도 값을 치르마.」

마주 서있던 흰 뱀이 사람을 부르는 듯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인력이 훅 끼쳤고, 펜셔스는 꼼짝없이 거기에 딸려갔다. 고꾸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마주보고있던 흰 뱀이 아니라 아까의 비행선이었다.

“엥?”

「어떠니?」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또렷하게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뒤에서 들린 소리에 펜셔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떠있던 눈알과 눈이 마주쳤다.

“꺄아악!”

다시 비명이 터져나왔다.

“뭐, 뭡니까, 진짜!”

「새 몸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던 펜셔스가 문득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흰 깃털이 돋은 몸…… 아까 마주보고 있었던 그 몸이었다.

악마의 몸을 줄 수는 없다고 했으니 이걸 준 모양이지만, 허옇고 보송보송한 뱀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펜셔스는 복잡한 기분으로 신을 쳐다보았다.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 신은 어떤 형태도 취하고 있지 않았으나, 지금은 어쩐 일인지 사람같은 윤곽이 보였다. 천사라서 신이 눈에 보이는 걸까? 펜셔스는 생각했다.

신은 뒷짐을 지고 펜셔스에게 받은 눈알들로 그를 내려보았다. 펜셔스는 그가 만족스레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실체가 또렷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게 느껴지다니, 기묘했다.

「자, 뱀아. 너도 이제는 나의 대행자란다. 너는 천국에 들게 될 거야. 그곳에 가서, 네가 바라던 것을 하렴.」

“제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다시 지옥으로 가서 살아도 된다는…… 거죠?”

「내게 허락을 구한들 다른 대행자들이 고이 보내줄까 싶다만, 너의 새로이 태어남은 뭇 이들의 존중을 받을 것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란다.」

신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펜셔스는 그가 재미난 티비쇼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쨌든 자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지, 다만…… 네가 나를 만나 거래를 했음을 다른 이들은 몰라야 한단다. 알겠니?」

신이—아마도—제 입가에 검지를 갖다댔다.

“어차피 제가 다시 살아난다면 천사들은 다 알 텐데요? 천사들도 바보가 아닌 한.”

「알지 못 한단다. 그저 추측할 뿐이지. 다만 네가 실수로라도 이 거래를 발설해서는 아니 되니 금제를 남기마. 나는 증표로서 이것을 받으리라.」

신이 다시 손짓했다. 이번에는 몸이 끌려가는 대신 쓰고있던 모자가 딸려갔다. 모자는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하얘진데다 눈썹까지 도드라진 모습이 볼만했다—눈알을 굴렸다. 신의 손이 모자의 입을 가렸다 치우니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너도 이제는 나의 대행자이므로, 너의 눈 역시 이제는 나의 눈이라. 네게 받은 눈으로는 지옥을 보고, 네게 남은 눈으로는 천국을 볼 것이다. 알겠니?」

그가 손가락으로 펜셔스의 후드를 가리켰다. 그 끝단에 붉은 무늬가 남아있는 것이, 마치 앞전의 눈알무늬같이 보였다.

「자, 이제 가보렴. 뜻깊은 세 번째 삶이 되면 좋겠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펜셔스는 몸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위에서 뭔가가 당기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제 머리 위로 천사만이 갖는 광환이 떠있고, 더 위로는 광환을 십수 배는 키워놓은 듯한 통로가 빛나고 있었다.

잠깐, 이대로 보낸다고? 어디로? 천국으로? 정말로? 천국에서의 주의사항 같은 것도 안 알려주고? 지금 당장? 펜셔스는 뭐라도 물어보고 싶었으나 당혹감이 머리를 새하얗게 날려버린 탓에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러는 새에 그는 통로의 지척에 도달했고, 신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천국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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