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1] 소금님 연교

타브아스 행복한 김밥 / 맛있겠다

발더스3 by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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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타리온, 혹시 행복한 김밥이라고 알아? "

" 달링은 가끔 보면 그런 유행에 참 관심이 많은 것 같네. "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밥, 김밥이라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놀이 중 하나인가. 눈앞의 연인은 어디서 또 그런 유행에 관심을 갖게 된 건지. 그러고 보면,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타브를 바라본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수많은 스폰들로 혼재한 언더다크의 치안을 담당하게 된 이후로 정신 없이 흘러간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평화에는 그만큼 누군가의 헌신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불만은 없었다. 자신을 잃지 않은 채 평온을 지켜나가는 것은 싫지 않았다. 물론 타브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였다. 아스타리온이 7천명의 운명을 좌우했을 때, 타브의 얼굴에는 뿌듯함보다는 죄책감에 가까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여정이 끝난 뒤로 그가 술로 지새우는 날이면 늘 제게 사과를 해왔던 것이. 처음에는 취기로 인한 주사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눈물 맺힌 애처로운 얼굴을 떠올릴 때면 생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가 말할 필요를 느끼거든 말해주겠거니, 하고 넘기는 것도 연인으로서의 덕목이기도 했으니. 그저 지금은, 간만에 보여주는 장난기 어린 얼굴에 화답하고 싶었다. 왜, 연인 사이에는 으레 간드러진 장난도 하고 그렇지 않던가. 아스타리온은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괸 채 타브의 얼굴을 쭉 응시했다.

" 그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들어는 줄게. "

타브는 대답 대신 낡은 찬장에서 가장 푹신한 담요를 꺼내왔다. 궁핍하다면 궁핍할 칙칙하고 어두운 언더다크에서의 생활과 비교한다면 퍽 사치스럽기도 한 실크 베이스에, 갈까마귀 깃털을 손질해 채워 넣어 포근하게 만든 재질이다. 타브는 성인 남성도 충분히 감쌀 수 있을 정도의 담요를 펼치더니, 돌돌 말아 아스타리온에게 둘러 감쌌다. 순식간에 몸의 자유가 상실되자 불편하면서도 이름 모를 편안함이 공존했다. 카사도어에 의해 관짝에 1년을 꼬박 갇혀있던 기억에 비한다면 견디지 못할 건 아니기도 했고.

" 그럼, 다음은 뭘까? 맞춰볼게. 따뜻한 홍차 한 잔에 당밀 타르트? "

" 응, 잘 알고 있네. "

물이 끓으며 주전자의 뚜껑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부드러운 찻잎의 향기가 풍겨오자 아스타리온은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이렇게 평화로이 쉬는 게 얼마 만인지. 돌이켜보면 고난의 연속이기도 했다. 머릿속에 기생충이 심어진 것도 모자라 절대자의 계획에 휘말려서 난리도 아니었지. 카사도어를 죽이고 나서도 7천이나 되는 스폰들의 구심점으로서 자리매김 한 이후로는 편하게 휴식을 취해본 기억이 없었다. 그나마 타브가 함께 언더다크로 와주어서 망정이지. 상념에 잠긴 지 십 분 정도 지났을까, 타브는 트레이에 차와 다과를 세팅했다. 실론티에 스콘과 타르트를 곁들인 구성. 이 정도로도 충분히 우아한 삶을 영위하는 셈이지.

..그런데, 한 가지의 의문점이 아스타리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왔다. 이렇게 머리를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가 이불에 감싸진 상태라면, 다과는 고사하고 찻잔은 어떻게 쥔단 말인가. 본디 지하실에 던져진 채 남이 무언가를 챙겨주는 호사는 고사하고, 쥐의 피나 빨아먹으며 연명하던 시절이 몸에 배어있었기에 이런 경험은 생소했다. 그런 무의미한 고뇌에 시달리는 사이에 타브는 이미 잔에 홍차를 충분히 따르고, 다과를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타브의 다음 행동은 아스타리온이 지닌 의문을 간단하게 해결하고도 남았다.

" 자, 입 벌려봐. "

" ..진심이야, 달링? 이거 아직도 해야 하는 거야? "

" 물론. "

그새 한입 크기로 자른 타르트를 꽂은 포크가 입가에 다가왔다. 무어라 입장을 표명하려던 아스타리온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해진 타브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래도 내가 어린 나이대가 절대 아닌데. 200년은 넘게 살아왔는데? 이불에 돌돌 말린 채로 애인에게 간식과 차를 먹여지고 있다니. 아스타리온은 자괴감을 애써 내리 누르며 입을 살짝 벌렸다. 달큰함이 한껏 밀려 들어온다. 언더다크에서는 이제 제법 구하기 어려운 기호 식품의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달콤쌉쌀한 향이 충분히 퍼지자 이번엔 잔이 입가에 다가왔다. 본래 단것을 먹고 난 후에 차를 곁들이는 게 최고라지만⋯ ⋯. 아무래도 이 홍차를 받아 마셔야 그의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포기하자. 사실 타브는 이리도 묘한 구석이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마치 어떻게 하면 타인이 자신의 말을 따라줄지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그런 것들의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 경험의 연속인 건지, 이따끔씩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말에 따르게 될 때가 있곤 했다. 이것이 그에게 서서히 녹아드는 과정인 걸까. 아스타리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벌려 타브가 흘려보내 주는 홍차를 조금 받아 마셨다. 입안에 남은 타르트의 잔향이 차와 함께 섞여 조화롭게 뒤섞인 채 씻겨져 나갔다.

" 흐음⋯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 것 같네. "

" 다행이다. 오랜만에 다른 친구들도 오기로 했어. 슬슬 다 왔을 텐데.. "

" ..다른 친구들? 설마⋯ "

그 순간, 문이 두들겨지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이내 곧 문이 열리자 반갑지만 지금 이 꼴로는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몰려 들어왔다.

" 저거.. 아스타리온이야? "

" 츠크, 꼴이 말이 아니로군. "

" 위브여 맙소사. "

" 반가워, 오랜만.. 오, 벌써 술이 당기는데. "

" 아 왜들 그러냐. 존나 귀엽기만 한데! "

카를라크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타브와 아스타리온의 보금자리는 그때 그 시절 야영지처럼 왁자지껄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행복한 김밥이라기보다는 쪽팔린 김밥이 된 것 같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겠지. 아스타리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길어질 것만 같다. 언더다크에 어떤 변화가 생겨나고 있는지 말해줄 것이 산더미기도 했거니와, 다른 동료들은 원하던 것을 이루었는지 궁금했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스타리온은 옛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밥에 둘러싸인 채 말이다⋯.

" ..그래서 달링,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

" 응? 아직 올 사람들 많은데.. "

" ⋯ ⋯. "

그래도 역시 할 말은 해야겠다. 두 번은 하기 싫어,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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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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