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소소] 가출을 잘 하는 사천당가의 독녀 (1)

거기 가주님 딸이 있는데, 데려와야 한다고요? 제가요?

* 원작파괴 시점: 당가에피와 운남에피 사이

* 청명이 당가를 방문하기 수년 전 소소가 강호로 자의 반 타의 반 가출을 하여 비영의(飛影醫: 그림자를 날리는 의원)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청명이가 당군악의 부탁으로 비영의를 회유하러 갑니다

* 무협알못


안개가 자욱한 중경의 숲. 

약초꾼이 넉넉한 품삯을 건네 받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떠도는 신세 치곤 제법 사정이 넉넉한가보군."

"털어먹은 세가 자제가 남긴 것이 영 쏠쏠하지 뭔가."

온몸을 검도록 짙은 녹빛의 천으로 가린 죽립인이 대답했다. 겉보기엔 나이와 체격이 어떤지 가늠이 어려웠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어쩌다보니 산에서 만나서."

"그러니까 어떻게..."

약초꾸러미를 넘기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한집 자제분이 무슨 나무에서 자라는 은이버섯도 아니고 어쩌다 이 외딴 산중에서 마주친단 말인가. 

"이미 간 놈 찾아서 뭐하게?"

죽립인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내를 향해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나있는 왼손을 내밀었다.

마치 노인처럼 앙상하게 말라 뼈마디와 핏줄이 툭툭 튀어나온 손이었다. 자연스러운 노화로 인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묘하게 위화감을 자아냈다. 

그것에 이끌리듯 빤히 보던 사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렸다. 마치 나뭇가지 같은 손이 저를 가리킨다. 

그리고, 손등을 타고 소매 속에서 고개를 내민 작은 독뱀이 쉭 혀를 내밀어 날름거렸다.

"...이름도 말하지 않고 꽁꽁 숨겨대는 집안이라면 그 후폭풍은 어찌 감당할텐가? 거기서 가만 두지 않을텐데."

"글쎄다? 무서우면 얼른 내게서 멀리 떨어지세나."

쿡쿡 웃는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간드러진 여인의 것이었다. 목소리가 외양과 일치하지 않는 위화감에 사내는 소름이 끼쳐 황급히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마치 장강에서부터 뿜어나온 듯이 자욱한 안개가 숲을 가득 덮었다. 


원로원을 정리하는 조치가 마무리 되어가던 때였다. 당군악은 해도 뜨기 전인 새벽 은밀히 청명을 불렀다. 

독대는 이미 익숙했지만, 이번 대면은 더욱더 은밀했다. 두 사람은 고작 하나의 촛불만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았다. 붉은 촛불의 빛에 일부 드러난 당군악의 얼굴은 차게 식은 새벽의 공기 때문인지 사뭇 싸늘하기까지 했다. 

곧이어, 갑작스러운 부름에 의아해하던 청명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서…."

"거기 가주님 딸이 있는데, 데려와야 한다고요?"

"크게 다쳐서도 안되네."

"저 한다고 아직 안했는데..."

"또한, 내 딸을 함부로 다루지 말게."

"부탁인지 협박인지……."

"당연히 부탁이네."

'부탁'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조건을 달고 거래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들렸다. 이 일은 조건보단 호의가 더 필요한 일이라는 의미이다. 청명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얼추 파악은 했지만 암습처럼 갑작스레 떨어진 부탁에 당황스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청명이 잠시 한숨을 지었다.

"따님은 어쩌다가 집 나와서 거기 지내게 된건데요?"

"...당가의 비전을 탐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당군악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 한마디에 그가 사건을 겪으며 느꼈을 온갖 만감이 한번에 스쳐지나갔다. 청명은 그저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여자인가?

물론 여인도 문파의 비전을 전수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가주의 딸이라 한들, 아니 직계의 딸이라서 더더욱 당가의 비전을 알려 한 죄는 중하다 하였다. 수백년간 유지해온 가문의 규율을 가장 잘 알만한 자이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까. 

당군악이 뒤이어 전한 사건의 여파는 꽤나 심각했다. 

원로원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발칙한 여식의 경거망동이 미수에 그쳤다 한들 가주라는 직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흉흉한 말까지 돌았다. 

어느새 그녀는 더이상 당가타에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와중 돌연 후보 선상에서도 말단이던 어느 권세가의 자제와 혼인하겠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 한 선택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느정도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적통부터 시비들까지 모두 그 혼인은 일종의 추방이요 형벌이라고 수군댔다.

한편, 원로원은 다른 때였으면 영 눈에 차지 않았을 집안에 시집을 가겠다는 그 선택을 환영했다 한다.

그리고, 그 혼례 행렬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한밤 중 알 수 없는 이들에 의해 변을 당했다. 

백방으로 수색해도 그녀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원로원의 장로가 평하길, 사람의 죽음이란 원래 이리도 갑작스러운 법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이 벌써 수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

"어딘가로 팔려가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었지."

"......"

"그런데 그게 아니었네."

"그럼..."

당군악의 입에서 낯선 별호가 나왔다.

"비영의(飛影醫)라는 이름을 알고있는가?"

"전 알 턱이 없죠."

"...그게 내 독녀 당소소이네."

"……."

비영의가 딸을 데리고 있는 칼잡이의 별호일것이라 대충 예상했던 청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미수에 그쳤다는건 역시 거짓이었군요?"

"나도 최근에야 알았네. 비영의라는 이가 소소라는 실마리가 잡히자마자 바로 중경에 아들들을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겠다 완고하게 버티는 제 누이를 차마 해칠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네."

"...걔네가 졌다고요?"

청명이 말의 행간에 감추어진 진실을 야무지게 꼬집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누이를 고작 그런 이유로 데려오지 못한 것이 말이 안 되잖아? 

정곡을 찔린 당군악이 헛기침을 했다.

"몸을 지킬 무기와 돈을 챙겨주고 왔지. 독하게 마음먹고 갔지만 막상 죽은 줄만 알았던 누이가 돌아가기 싫다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마주하니 다치게 하더라도 끌고 오겠다는 각오가 무색해졌다더군. 패가 자신을 보내라 했었지만 내가 막았네. 어쨌든, 당가인들은 소소를 데려올 수 없어. 때로는 피가 독보다 진한 것일세."

"챙겨준게 아니라 뺏긴 것 같은데……."

피가 독보다 진하다느니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기세좋게 덤벼들었다가 앗 뜨거 하고 물러서는 당가 무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할 뿐이었다. 소매도 좀 털린 듯 하고. 

듣자하니 이 여식은 제게 금지된 것인 가문의 무학을 손에 넣으려 했고, 기어이 얻어냈으며, 호의호식을 마다하고 귀가를 거부하며 강호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만 들어도 당장 알 수 있다. 당군악의 여식은 심줄이 쇠로 된 이다. 보나마나 고집도 상당할 것이다.

비록 청명은 한번도 당소소를 본 적이 없지만, 때로는 사람을 겪지 않고 한 두가지의 행동으로만 평하는것이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법이다. 어쩌면 그냥 그렇게 살게 두는게 피차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런데... 성질머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작 그 짧은 시간에 적통으로서 무학을 닦아온 형제들을 꺾었다고? 가문을 잘못 타고난 천재이거나, 그에 필적하는 기연이 있던게 분명하다. 일단 이건 차치해두고.

청명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럼, 가주님이 진정 원하는 건 뭐예요?"

"……."

"따님이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라는 거예요? 아니면, 억지로라도 데려와서 원래 주어진 삶을 살더라도 최소한 편하고 안전하길 바라는 거예요?"

입장이 충돌할수록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당군악의 대답은 의외로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하길 바라네. 지금껏 굳이 무리하게 데려오지 않은 것도 원로원의 눈이 있는 당가에서 눈치보며 지내느니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바랄 것이 없었지." 

"그럼..."

"허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네."

"비전이 밖으로 나간거요?"

"그것도 있지만, 최근 몇 달 간 비영의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

당군악은 당소소를 자유롭게 두는 한편, 여러 정보원을 통해서 비영의에 대한 소식을 수집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강호에서 사정이 좋지 않아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도와주었다는 평범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어느 권세가 아들을 암습하여 귀를 잘라갔다든지, 여러 약방들을 협박했다든지 석연치 않은 소문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는 흑도들의 암살 의뢰를 받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좌시하기는 어려웠다. 원래 투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 강호의 생리이나, 이건 자칫 잘못하면 당가와 다른 문파가 전쟁을 일으킬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당소소의 혼례가 중간에 중단되면서 무효가 된 이상, 당소소와 당가의 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으니까.

"직접 관여하기엔  곤란하지만, 내 여식이 이 이상 이런 험한 것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네. 당가의 무학을 사용하고 당가에 근본을 두고 있는 자가 혹여 사파라 칭하는 것들과 다를 것 없는 행보를 걷는 것도 막아야 하고."

청명이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이 직접 움직이면 관련 있다고 소문나기 딱 좋긴 하겠네요."

"소소가 쌓은 명성이 아예 없었다면 내가 나서도 되었겠지만..."

당군악이 돌연 사족을 주렁주렁 붙이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어찌된 것인지 잘도 재주껏... 그것도 비전을 제대로된 스승없이 실전에서 적용할 정도로 숙달하기까지 할 줄은 나도 몰랐네. 비록 소소도 무인이었고 내공을 계속해서 연마하기는 했지만 웬만한 제자들도 그런 성취는 힘들텐데, 두렵고 캄캄했을텐데, 내가 살면서 이런 일을 내 딸에게서 보게 될줄은……."

"저기……."

분명 거한 규모의 사고를 치고 다니는건데 속이 문드러질지언정 왜 묘한 뿌듯함이 느껴지는거지….

하여간 부모는 속을 썩이는 자식에게서도 자랑스러운 부분을 찾게 되는 면이 있다.

"크흠, 게다가 소소를 쫓아낸 장본인들을 뒷방으로 쫓아냈으니 이제 슬슬 불러들여야지."

"근데 본인에겐 씨알도 안먹힐테니 저를 써야겠다?"

"가문의 명예와 비전이 걸린 문제네. 좌시할 수 없으나 은밀하게 움직여야하네. 돌아올때까지 운남행은 빈틈없이 준비하겠네."

"저 한다고 아직 안했..."

"소소를 무사히 데려오면, 잠시 화산에 보내어 당가의 의술을 전수하게 하겠네."

"……."

"비영의라 하지 않았나. 소소는 본래 의약당주의 수제자였네. 실력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장차 의약당주 자리를 물려받기에도 자격이 충분하지. 당가의 의술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네."

"……."

수 초간 고심하던 청명이 무언가 결심하더니 세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딱 삼 일이에요!"

청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이상 시간을 들여도 따님이 고집을 안 꺾으면 저도 바로 돌아올거예요. 이 이상은 저도 시간 못 내요!"

"...그 정도면 충분하네. "

협상이 끝났다. 어느덧 주변을 덮고 있던 어둠은 물러가 홀로 밝게 일렁이던 촛불의 빛도 희미해져 있었다. 당군악이 고개를 돌려 원로들이 있는 뇌옥쪽으로 트인 창을 바라보았다. 한꺼풀 아래 감춰온 살기가 차분히, 그러나 진하게 뿜어나왔다.

"자네라면 알겠지. 소소가 친영길에 변을 당한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란걸."

당군악이 고개를 들었다. 새벽의 하늘이 슬슬 하얗게 밝아올것 같았다.

"몇몇 태상장로들이 실각한 충격으로 인해 입마에 들어 작고한 것으로 알고 있게. 밤중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 변고였다고."

"죽음이란 으레 이렇게 갑작스러운 법이지 않은가."

당군악이 가주전을 나서 어디론가로 향했다. 쓰라리다 못해 벌리지도 못할 정도로 문드러진 숙원을 끝내러 가는 걸음걸이었다.


그것이 바로 청명이 갑작스레 홀로 중경에 오게 된 이유였다.

청명은 적당히 왕래가 많은 객잔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세명이 먹어도 넉넉할 정도로 음식을 시켰다. 들이는 돈이 많아지자 주인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 돼지꼬리 요리가 사천보다도 일색이다, 이 두부는 황실에 바치는 거 실수로 내온거 아니냐는 둥 주거니 받거니 하고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은 당소소에 관한 정보이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봐야지. 무인이 거친 행보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정확하게 한다.

"비영의가 이 근처에서 자주 보인다면서요? 혹시 무섭지는 않아요?"

"예?"

"비영의가?"

그 말에 국수를 들던 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날선 반응이었다.

"소문만 듣고 온 놈이 여기 또 있군." 

"그래요?"

"황씨, 손님에게 삿대질은 삼가게나."

"내가 은인을 위해 그것도 하면 안되나?"

"아니, 그래도……."

사내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비영의는 약값을 담합하는 관행을 멈췄을 뿐이야. 큰 상단에 얽힌 약방들이야 얄미워서 배아파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같은 이들은 오히려 잘됐다 여기지 아무도 무서워 않네."

"정말요? 그 여자, 막 사람 귀도 잘라간다면서요."

"그것도 사정이 있어요!"

부엌일을 하던 여자아이가 앞치마로 손을 닦았다.

"귀를 잘라갈 사정이 있다고?"

"서문가네 셋째 아들 말이죠? 비영의님을 두고 여기서 가장 큰 기루에서 도망친 기녀라고 헛소문을 냈거든요."  

"흐음."

"소문을 믿은 기루에서 칼잡이들 보내서 비영의님을 해코지하려 하고 보통 고생이 아니었어요. 고생이 뭐야? 죽을 뻔한거죠."

"……."

청명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장 자극적인 부분만 퍼져나가서인가. 같은 정보도 앞뒤 맥락을 따지니 영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양민들이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 가끔 수상한 사람들과 있는 모습을 본 적은…."

"나한테 관심이 많네."

청명을 둘러싼 사람들이 일동 뒤를 돌아보았다. 전신을 짙은 장포로 가린 죽립인이 걸어와 청명 앞에 섰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는 기척도 없이 들어온 비영의의 등장에 흠칫 놀랐다. 두꺼운 죽립 아래에서 조금은 발랄하기까지 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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