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내가 너에게 스며드는 과정
* 선후배 AU
"선배!"
"어, 유지 왔어?"
자신에게 헐레벌떡 뛰어온 이타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타도리 유우지 1학년. 가식과 아양을 떨 줄 모르고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아이로, 고죠 사토루가 상당히 아끼는 후배였다.
둘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이타도리가 갓 입학했을 당시였다. 평소 활발하고 궁금증이 많던 이타도리는 점심시간이 땡 치자마자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1층에 자리한 급식실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더 이상 오를 계단이 없을 때까지 뛰어올라 막다른 문 앞에서 멈춰섰다. 무엇을 그렇게 원했던 건지 그는 기대에 가득찬 눈빛을 하며 문고리를 돌렸고, 조금 낡은 듯한 철문이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발 한 발 옥상에 발을 내딛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을 보며 이타도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이런 풍경이 보고 싶었나 보다.
"앗싸, 옥상 문 열린다!"
신나서 옥상을 방방 뛰어다니던 한구석에 누군가 누워있는 걸 발견했다. 머리 뒤로 팔을 배고 한가로이 누워있는 모양새가 낮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이타도리는 방금 전까지 방방 뛰던 것이 생각 나, 급히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런다고 이미 지른 소리가 다시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행여나 그의 낮잠에 방해될까 조금 떨어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응시했다. 몽실몽실한 하얀 구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저렇게 흘러가서 어디까지 가는 걸까. 무의미한 고민. 이타도리는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한 공상을 꽤나 좋아했다.
"이제 다 뛴 거야?"
본격적으로 자신의 공상에 흠뻑 젖어갈 때 즈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출처는 단 하나. 이타도리의 고개가 자연스레 누워있던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차마 대답은 하지 못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을 뿐더러, 풍겨오는 오오라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선배인가. 이타도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번엔 남자가 이타도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입생?"
"이타도리 유우지라고 합니다!"
"기합 빡세게 들어갔네."
일어서서 큰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는 이타도리의 모습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평범하진 않았지만 딱히 악의를 가진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이타도리는 그 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다시 앉아도 되는 건가, 아님 나가야 되는 건가, 저 선배는 누구지. 하는 여러 궁금증을 담고.
남자는 그 시선이 간지러웠는지 몸을 일으켜 앉고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이타도리와 눈을 맞췄다.
"고죠 사토루, 3학년. 별로 딴지 걸거나 하지 않으니까 편하게 있어."
"네! 고죠 선배님."
"선배님은 무슨, 그냥 선배라고 불러."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선후배 관계가 더욱 빡세다고 들어서 어떡하나 싶었는데, 막상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시금 자리에 앉은 이타도리와 고죠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둘 다 배는 고프지도 않은지, 멍하니 하늘만 보며 점심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곧 점심시간 끝날텐데."
"헉 진짜요? 저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 선배!"
나중이라. 누구 마음대로 또 약속을 잡는 거야, 후배 자식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급하게 달려나가는 이타도리의 뒷모습을 보는 고죠의 얼굴엔 개구진 웃음이 서려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역시 이타도리는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계단을 박차고 뛰어올라갔다. 철문을 밀고 옥상에 발을 내딛으니 어제와 같이 드넓은 푸른 하늘이 시야에 펼쳐졌다. 기분 좋은 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 전날 새로이 만들어진 인연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여유롭게 누워있던 고죠를 발견한 이타도리가 반가운 마음에 신이 난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배!"
고죠가 인사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이타도리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용했다. 고죠가 힐끔 제 옆에 앉은 이타도리를 쳐다봤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제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주인 눈치를 보는 반려견을 쏙 빼닮아 귀여웠다.
"오늘은 소리 안 질러?"
"어젠 기분 좋아서 그런 거예요!"
"오늘은 기분 안 좋아?"
"그건 아니지만…."
저의 눈치가 보인다는 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치를 보는 것마저 숨김없이 드러났으니까. 말하지 않으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순수하다, 순수해.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고죠는 속으로 혼자 웃고 넘겼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이번엔 이타도리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선배는 수업 안 들어요?"
"나 수업 안 들을 것 같이 생겼어?"
자신의 질문 의도에서 한참을 벗어난 대답에 이타도리가 격하게 손사리를 치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종이 치자마자 뛰어온 저보다 먼저 와 있는 게 신기해서 그런 거다. 라며 말을 빠르게 와다다다 뱉어냈다. 사실 좀 그래보이긴 하지만…, 이건 저 혼자 속으로 간직해야했다.
얼굴은 빨개지고 눈은 커다래졌다. 농으로 던진 말에 뭘 저리 다급하게 변명까지 하는지, 혼자 보긴 아까울 정도로 꽤 웃긴 모양새였다.
"나 수업 안 듣는 거 맞아."
"…불량 학생?"
"뭐, 그런 거라고 할까?"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넘겨버리는 고죠 덕에 다시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보통 대화를 하지 않으면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게 싫어 항상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이타도리였지만, 지금의 정적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가만히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어색함보단 안정감이 먼저 자리했다.
"오늘은 점심 먹으러 안 가?"
"오늘은 괜찮아요! 매점에서 빵 사왔거든요."
마이 안에 두툼히 갖춰 입은 후드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빵이 튀어나왔다. 뿌듯하다는 듯 웃고 있는 이타도리의 얼굴이 마치 햄스터를 연상시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맛있게 먹어."
"선밴 안 드세요? 선배 것도 사 왔는데."
"? 내 거?"
"오늘도 계실 것 같아서 사 왔죠."
해맑은 웃음. 그게 이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할 말이었나. 하도 점심을 넘기는 게 습관이 되어 배가 고프다거나,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은 이미 이타도리가 내민 빵을 받아들고 있었다. 왜지. 고죠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이타도리는 빵으로 입안을 가득 채웠다. 볼이 가득 부풀어오른 모양새가 마치 먹이를 잔뜩 비축한 햄스터를 닮았다. 어느새 빵 하나를 뚝딱한 이타도리를 보며 제 손에 들린 빵의 비닐을 벗겨냈다. 목 안 맥혀? 질문과 동시에, 이번엔 후드 주머니에서 우유가 튀어나왔다. …도라에몽? 우유를 꺼냈는데도 아직 볼록한 주머니를 보며 저 주머니를 파헤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내려가야겠다."
"벌써요?"
"나 말고, 너."
곧 종칠 때 됐어. 그 말에 이타도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옥상에서 후다닥 사라졌다. 또 멋대로 약속을 잡고 가네. 지금껏 제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이었다. 이타도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마냥 웃기고 즐거웠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둘은 날마다 약속한 듯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만났고, 이제는 장난도 서스럼없이 주고 받을 정도로 꽤 많이 친해졌다. 항상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만 만나다 보니 비밀 친구를 만나는 기분도 들었다.
오늘도 저의 비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부리나케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더니, 저를 반기는 건 텅 빈 옥상이었다. 간만에 수업이라도 듣고 있던 건가 싶어, 저들의 지정석과도 같은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충분히 올라올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고죠는 올라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젠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움직였다.
무작정 옥상을 벗어나 3학년 층으로 향한 이타도리가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일단 오긴 했는데…. 막상 3학년 층에 도착하니, 제가 고죠에 대해 아는 건 이름 뿐. 그의 교실이 어딘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타도리가 혼자 안절부절해 하며 정처없이 복도를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 선배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를 한 남자가 친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누구 찾아?"
"고죠 선배…, 몇 반인지 아세요?"
"사토루? 오늘 학교 안 왔는데. 급한 볼일이야?"
"네? 왜요?"
"본인 말로는 아프대."
이타도리가 시무룩한 얼굴과 함께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급한 일인가 본대, 주소 알려줄게. 그 선배는 친절하게도 주소를 적은 종이까지 이타도리에게 넘겨주었다. 얼결에 고죠의 주소를 받아든 이타도리가 종이를 손에 꼭 쥐고 감사하다며 자리를 떴다. 하지만 영 기분이 찝찝했다. 제가 집에 찾아가도 되는 건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남은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이타도리의 머릿속엔 그 고민으로 가득했다. 예고도 없이 멋대로 집을 찾아가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하면서도 이미 발걸음은 고죠의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 손엔 고죠가 먹을 죽까지 사 들고. 머리만 이리저리 굴리면 뭐 하나, 몸은 이미 고죠의 집으로 갈 준비를 충실하게 행동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알려준 주소에 도착하니 기가 눌릴 만한 커다란 크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런 집에 누가 사나 했더니, 이 선배가 사는 구나. 한참 대문을 구경하다 벨을 누르니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세요?
"저 고죠 선배 후배 이타도리 유우지라고 하는데요."
삑-.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대문이 열리고 길게 펼쳐진 마당에 천천히 발을 들였다. 들어와서 보니 더 넓은 것 같네.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잔디가 깔린 마당을 구경하며 현관문 앞까지 늘어진 돌을 밟고 걸었다. 그리고 현관에 다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리며 반나체 상태인 고죠가 이타도리를 반겼다.
"선배!"
"유지, 어쩐 일이야? 우리 집 어떻게 알고."
"선배 친구 분이 알려주셨어요."
이타도리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든 죽을 들어보였다. 진짜 못 말린다. 고죠가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서 이타도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우와. 밖에서도 억 소리가 났지만 집안은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깔끔하고, 화려하고, 죄다 고가로 추정되는 알지 못할 것들이 온 집안에 잔뜩 채우고 있었다. 들어올 때 갈아 신으라며 준 이 슬리퍼 마저 명품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불편할 테니까 내 방으로 가자. 죽은 이리 주고."
고죠가 손에 든 죽을 부엌 식탁에 올려두고, 주춤거리며 서 있는 후배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제 시선과 맞닿는 등이 너무 가까웠다. 햇볕을 제대로 못 만난 것 같은 흰 피부와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지는 날개뼈로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남자의 나체를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닌데 괜시리 더운 느낌이었다. 손에 이끌려 나선형 모양의 계단을 올라, 수많은 방들을 지나쳐 쭉 걷다 도착한 방의 문을 열렸다. 내심 휘황찬란할 거라 예상했던 그의 방은 좀 평범했다. 평범하지 않은 점이라면 다른 가구 하나 없이, 침대와 책상 밖에 없다는 것.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방이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 거려?"
"신기해서요. 제 주변에 이런 집에 사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거든요."
"마음에 들면 자주 놀러와도 돼."
"음, 자주는 실례일 것 같으니까 가끔 놀러올게요!"
그러든가. 고죠가 이타도리가 앉을 의자를 꺼내주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으며, 조용하게 찾아온 정적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이미 다 훑어본 방 안을 몇 번이고 훑어봤다. 옥상에서 매일 만날 때는 정적마저 반가웠는데 지금은 이 정적이 왜 이리 어색한지 모르겠다. 슬며시 누워있는 고죠에게 시선을 돌리니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고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러니 아프지. 그런 생각도 잠시 저도 모르게 고죠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선배는 속눈썹이 굉장히 길구나. 코도 되게 오똑한 편이고, 입술도… 관리하는 건가. 선홍색이네. 예쁘다.
"미쳤나 봐."
이타도리가 스스로 제 머리채를 잡아뜯었다. 지금 나 선배 얼굴 보고 예쁘다고 한 거야? 아니, 예쁘니까 예쁘다고 할 수 있지. 이거 되게 실례되는 생각인가? 혼자 머리를 붙잡고 끙끙 거렸다. 이게 실례되는 생각이냐고 직접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한 번 향한 시선은 다시금 고죠를 훑기 시작했다. 목선도 두껍지 않고 적당한 게 되게 예쁜 것 같아. 움푹 패여있는 쇄골도, 그리고 군살 하나 없이 근육들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는 몸도. 야하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아예 입까지 벌리고 감상 중이었다.
"그러다 뚫어지겠다."
"……!"
자는 줄만 알았던 고죠가 입술을 움직여 작게 중얼거리자 놀란 이타도리가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의자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
작게 눈을 뜨고 이타도리를 보고 있던 고죠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크큭, 혼자 뭐 해."
"으으, 선배애!"
"왜~."
이타도리의 설움이 담긴 외침에 고죠가 말꼬리를 늘려가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모습에 심통이 난 이타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끅끅 거리며 웃고 있는 고죠의 위로 엎어졌다.
"억, 야 무거워!"
"먼저 놀린 게 누군데요!"
"누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래? 당연히 오던 잠도 달아나지."
그 말에 귀까지 시뻘개진 이타도리가 더욱 힘을 실어 고죠의 몸을 꾸욱 눌렀다. 진짜 내가 왜 그래가지고. 고죠가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인 이타도리의 등을 두드렸다. "알겠어, 알겠어. 내가 미안해 나 이러다 진짜 죽어." 슬그머니 고죠의 위에서 내려온 이타도리가 민망함에 제 얼굴을 감쌌다.
"유지, 나 환자인 거 잊은 거 아니지?"
"거짓말 치지 마요. 하나도 안 아파보이거든요."
"아, 걸렸어?"
"네. 학교에 다 이를 거야."
치사하게 그러기야? 삐칠대로 삐친 이타도리가 입술을 쭉 내밀고 가방을 챙겨 나가려고 하자, 고죠가 다급히 이타도리를 뒤에서 안았다. 진짜 말할 거 아니지? 귓가에 가깝게 속삭이면서 간지럽게 닿아오는 숨결에 소름이 끼친 이타도리가 저도 모르게 팔꿈치로 고죠의 배를 찍었다. 고죠가 진심으로 고통스러운지 억, 소리를 내며 배를 감싸고 바닥에 웅크렸다.
아, 사고쳤다.
***
이타도리가 옥상 문 앞을 서성였다. 전 날 제 팔꿈치에 맞아 고통을 호소하는 고죠를 두고 후다닥 도망나와 버린 탓에,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옥상 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열어? 말아? 갈등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뗐다, 수십 번을 반복하고 있을 무렵,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이럴 줄 알았지. 안 들어오고 뭐 해."
"선배……."
얼굴을 보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이타도리가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울상을 짓고 있자니, 고죠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죄송해요."
한없이 다정한 그의 손길에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다짜고짜 와락 고죠의 품에 안긴 이타도리가 제 얼굴을 숨겼다.
잠시동안 아무 말없이 자신에게 안겨있는 이타도리의 어깨를 잡아 품에서 빼냈다. 그만하고 나갈까? 고죠가 손가락으로 옥상을 가르키니 이타도리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네. 길 잃은 아이를 인도하듯 이타도리의 손을 잡고 옥상으로 나간 고죠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개구지게 웃으며 이타도리를 쳐다봤다.
"유지."
"네?"
"학교 땡땡이 칠래?"
눈이 휘어지게 웃는 얼굴을 본 이타도리가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일탈이었다.
곧바로 짐을 챙기러 간 둘이 학교 뒤의 주자창에서 만났다. 수시로 학교를 재끼던 고죠야 담을 덤는 폼이 익숙한 게 당연했지만, 이타도리는 일탈을 즐기지도 않았는데 담을 아주 손쉽게 넘었다.
"담 좀 많이 넘어본 솜씨인데."
"제가 선밴 줄 알아요?"
툴툴거리는 이타도리의 말에 고죠가 픽, 바람 빠지게 웃으며 또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너 잘났다. 투닥거리며 걷고, 걷다, 어느새 시내에 도착한 둘이 뭘 하고 놀아야 학교를 빠진 보람이 있을지 머리를 모아 고민했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항상 점심시간마다 옥상에서 만난 둘이었으니 끼니를 떼우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메뉴를 고르기 위해 시내를 거닐었다. 하지만 시내 안에 식당은 너무나 많았고,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이거 고르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선배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음, 사실 이런 곳에서 밥 많이 안 먹어봐서."
맞다, 이 선배 부자였지. 한참을 골똘이 생각하던 이타도리가 이번엔 먼저 고죠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추억이나 남겨요. 그렇게 데려간 곳이 요즘 SNS에서 떠들썩하다는 매운 라멘 집이었다.
"선배 매운 거 잘 먹어요?"
"너보단 잘 먹을 걸?"
"저랑 내기할래요?"
"뭐 걸 건데? 나 없는 게 없는 남자라."
재수없어. 인상을 확 구기며 읊조린 이타도리가 결의에 찬 눈으로 답했다.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좋아, 각오해."
비장하게 가게에 들어선 둘이 제일 매운 라멘 두 개를 시키고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곧이어 빨간 국물의 라멘이 둘의 앞에 놓여지고. 이타도리는 식혀가며 입에 넣고 있는데 고죠는 라멘과 때 아닌 눈싸움 중이었다. 사실 적당히 매콤한 건 먹어봤지만 혀를 자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매운 맛을 즐기지 않았다.
"선배 안 먹어요?"
"어, 아니, 먹어야지……."
"선배 지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냐며 고죠도 뒤늦게 젓가락을 들었지만 금세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입맛에 안 맞는 걸 떠나서 뭐가 이렇게 매운지 아무런 변화없이 라멘을 흡입하고 있는 이타도리가 경이로워 보였다. 쟨 이걸 어떻게 먹는 거야. 결국 고죠는 매운 라멘을 멀리 치워버리고 다른 메뉴로 배를 채웠다. 소원 쯤이야 들어주고 말지.
"제가 이겼죠?"
"그래.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후배님?"
"지금은 딱히 없으니까 나중에 쓸래요."
지금 이타도리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이라는 듯 시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영화부터 시작해서 노래방도 한 번 땡겨주고, 오락실도 가서 이것저것 즐기다보니 본인들이 학교를 땡땡이 치고 나왔다는 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음료 한 잔씩 들고 나오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이제 슬슬 집으로 갈까?"
"네. 벌써 다들 하교했겠다."
분명 학교를 빠진 것이 마음에 걸려야 하는데, 신나게 놀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너무나 가벼웠다. 아쉬움이 조금 남긴 했지만 뭐 어떠한가. 최근에 이렇게 신나게 놀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즐거운 하루였는데. 다음에 또 선배랑 놀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날을 기점으로 고죠와 이타도리가 붙어있는 시간이 훅 늘어났다. 하교를 몇 번 같이 하는가 싶더니, 이젠 심심한 날이면 날마다 고죠의 집에 찾아가 눌러붙어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선배, 저 오늘 자고 가도 돼요?"
"옷 줘?"
삽시간에 너무나 편해져버린 두 사람이었다. 고죠는 익숙하게 편한 옷을 건네주었고, 이타도리 역시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침대에 태평하게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던 고죠가 재밌는 생각이 났는지, 사악하게 웃으며 노트북을 꺼냈다.
"선배 바로 씻을 거예요?"
"난 이따 씻으려고. 그나저나 유지 너 야동 본 적 있어?"
"예? 아니, 무슨 그런 걸 물어봐요!"
당황한 이타도리가 머리를 닦던 수건을 고죠에게 던지며 버럭했다. 하지만 고죠는 너무나 능숙하게 수건을 낚아채고서, 이타도리의 눈 앞에 노트북을 들이댔다.
"유지는 어떤 취향~?"
"진짜 미쳤나 봐. 왜 이래 또!"
고죠의 짓궂은 장난에 이타도리가 베개를 들어 고죠의 몸뚱이 이곳저곳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죠의 손가락이 멋대로 어떤 영상을 클릭했고, 노트북에서 살색이 뒤엉킨 화면과 듣기에도 민망한 야릇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하는 거야! 빨리 꺼!"
"잠시만……!"
네가 멈춰야 나도 멈추지! 다급한 고죠의 외침에 이타도리가 손을 멈추자, 그 틈에 이타도리의 손에 들린 베개를 확 빼낸 고죠가 영상의 소리를 더 키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겨."
"아악! 진짜 왜 이러는 거예요!"
눈과 얼굴을 가린다고 가리는데 귀가 불타듯이 빨개져만 가는 것은 가릴 수 없었다. 놀릴 때마다 반응이 쏙쏙 드러나는 이타도리가 웃기고 귀여워서 더욱 놀리고 싶었다. 슬슬 그만할까 싶어 고죠가 영상을 껐는데도, 이타도리가 가린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러는데 어떻게 장난을 그만 둬. 슬그머니 이타도리에게 다가선 고죠가 귓가에 속삭였다.
"후배님 즐거웠어?"
"악!"
"푸하하, 아 진짜 웃기다니까."
"…저 집에 갈래요."
또 심통이 난 이타도리가 벌떡 일어나 다시 환복하기 위해 제 옷을 찾는데, 고죠가 이타도리를 끌어안고 침대로 누웠다. 팔 다리로 꽁꽁 묶어버리니 위 아래로 속박 당한 이타도리가 집에 갈 거라며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지만, 고죠는 이타도리 못지 않게 꽤 힘이 센 편이었다. 작정하고 얽어매고 있으니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탈출에 실패한 이타도리가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어딜 가."
"선밴 진짜 못됐어요."
"에이, 진짜?"
"…변태 선배."
혼자 큭큭 웃던 고죠가 힘이 다 빠져서 축 늘어진 이타도리의 몸을 풀어주고 운동도 했으니 씻어야겠다며 옷가지를 챙겨 방 안에 딸린 샤워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이타도리는 지친 몸과 정신으로 천장만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얄미울 수가 있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곧이어 들려오는 물소리에 이타도리가 저도 모르게 목을 축였다.
왠지 모르게 갈증이 나는 밤이었다.
***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은 건지 모르겠다. 아주 작고 작은 새싹이 트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 봤을 땐 무섭지 않은 선배구나 싶었고 몇 번 봤을 땐 편안하고 좋은 선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치도 못하게 많이 가까워졌을 땐, 그땐, 뭐였지. 뭐라고 생각했었지.
"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빨대를 잘근잘근 씹다, 음료수를 한 번 쪽 빨아마시고 제 앞에 있는 고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할 말 있어?"
"선배는 제 첫인상 어땠어요?"
"너무 뜬금없네. 특이한 신입생?"
뜬금없다 하면서도 대답해주는 고죠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때 당시엔 이렇게 선배랑 단 둘이서 카페에 한가로이 앉아있게 될 거라고는 저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의 관계라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 넌 어떤데?"
"잘 모르겠어요. 선배 좀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니……."
고죠가 상처 받은 척 눈물이 나오지도 않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이타도리가 빨대에서 입술을 떼고 턱을 괴면서 말했다.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
고죠는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자신이 예뻐하는 후배의 행동이 최근 들어 이상해졌다는 것. 계속 자신에게 이상하다는 말만 던지면서 진정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은 본인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펜을 입에 물고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고죠가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이탈했다.
"대체 뭘까."
"뭐가?"
유유히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물음을 되받아치는 존재에 흠짓 놀라 돌아섰다. 자신을 놀래킨 존재를 확인한 고죠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인 줄 알았잖아."
"그래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야 스구루.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갑자기 피하면 이유가 뭘까."
"널 피해?"
"피하는 건 아닌데, 뭔가 좀… 아니다."
대화를 이어가다 툭 자르는 고죠의 화법에 게토가 뒷덜미를 확 잡아챘다. 말을 하다가 마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예의일까. 게토의 손을 거칠게 쳐낸 고죠가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하는 건 아닌데 거리를 두는 느낌이야."
"네가 뭐 잘못한 건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없단 말이지."
고죠가 자신의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는 것을 지켜보던 게토가 핵심을 찌르듯 한마디 던졌다.
"너무 가까워진 거 아니야?"
게토의 말대로 고죠는 누구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친한 것도 지금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게토 정도. 저 고죠 사토루라는 인간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걱정할 정도로 친해지다니 게토는 그 상대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혹시 그 후배인가, 주소 받아간."
"역시 그거 너구나."
"역시 그 후배 맞구나."
말 돌리기가 수준급이었다. 태평하게 인자한 미소나 짓고 있는 게토를 보자니 화낼 의욕도 사라졌다. 고죠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가? 곧 점심시간이잖아. 딱 보니까 매번 옥상에서 만나는 구나. 파악한 게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고죠는 차가운 옥상 바닥에 가만히 누워 이타도리가 오기를 기다렸다. 점심시간 종이 쳤으니 오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선배!"
한 손에 비닐 봉다리를 들고 해맑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이럴 때 보면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한 번씩 이상해진단 말이지.
"편의점 갔는데, 마침 먹고 싶은 게 남아있길래 사왔어요."
"너 때문에 이제 점심을 안 먹으면 허전해."
또다. 맛있겠다며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 무슨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에게 그런 인내심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미 기다려줄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네?"
"너 요즘 왜 그러냐고. 나 피하잖아."
막 젓가락을 들던 이타도리가 행동을 멈추더니 어설프게 웃었다.
"제가 언제 선배를 피했다고 그래요. 지금도 점심 같이 먹고 있잖아요."
"지금."
너 그거 나 피하는 거잖아. 고죠의 말에 이타도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렸다. 마찬가지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살며시 무릎을 꿇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죠가 뭐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타도리는 꿋꿋하게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너 지금 뭐하는,"
"저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고죠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언제부터야."
"네? 뭐가요?"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고백이 있던 이후로도 둘의 사이는 변함없는 친한 선후배 관계였다. 여느 때와 같이 어울려 놀았고, 심심할 때면 서로를 찾았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들이댈 것이라던 고죠의 예상과는 달리 그 관계에 이타도리의 개인적인 감정은 딱히 개입되지 않았다. 이쯤되면 정말 자기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벤치에 등을 기댄 고죠가 이타도리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물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어요."
"뭐야, 그게."
시시하다는 듯 고죠가 음료수를 들이키자 곰곰히 생각하던 이타도리가 뒷말을 더했다.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아요. 전에 물어봤잖아요 제 첫인상이 어땠냐고. 전 되게 괜찮고, 편안한 선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부턴가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전부에요."
가만히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 있던 고죠가 벌떡 일어나더니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캔을 꼼지락거리며 만지던 이타도리가 놀라 그를 쳐다보니 무심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꼽으며 말했다.
"영화보러 가자."
"지금요?"
"그래 지금."
어영부영 고죠를 따라 영화관까지 간 이타도리가 한 손엔 팝콘 한 손엔 콜라를 들고 앞서 걸어가는 고죠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근데 이거 무슨 영화예요? 고죠가 물음에 답은 하지 않고 이타도리가 들고 있던 콜라를 빼앗더니 덩그러니 남겨진 손을 잡고 묵묵히 걸었다. 아, 손. 얼결에 잡힌 손을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고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콜라를 먹는 척 빨대 물고 있는 것을 보아, 어떤 질문을 던져도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기분이 좋았다.
"선배 감정이 매말랐어요? 어떻게 이걸 보고 눈물이 안 나?"
재미없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쓰레기 같았다. 삼류 사랑 이야기와 신파를 교묘히 섞어 즙을 짜고야 말겠다는 감독의 발악이 그대로 드러나는 영화였다. 스토리, 개연성, 담겨있는 내용,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 없는 쓰레기. 내 감정이 매말랐다면 매말랐지만 이런 걸 보고 울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펑펑 울던 녀석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슬펐어."
"그쵸? 전 진짜 선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
이번엔 이타도리가 먼저 고죠의 손을 덥썩 잡아왔다. 방실방실 웃으며 슬쩍 눈치를 보자 고죠가 눈치 보지 말라는 듯 손을 맞잡았다. 썩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오늘은 바로 집에 가. 데려다줄게."
"저희 집을요?"
"생각해보니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이타도리는 생각보다 순순히 승낙했다. 한 번도 안 데려가길래 무슨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또 그런 건 아니었나보다.
"형제나 누나 있어?"
"아뇨, 저 외동이에요."
어쩐지. 고죠가 혼잣말로 작게 속삭였지만 귀신같이 그걸 들은 이타도리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 같아서?"
"어."
"맞아요. 할아버지가 자기 자식처럼 키워주셨거든요."
할아버지? 고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로 알아차리곤 뒷말을 이어붙였다. 저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순간 고죠의 표정이 싹 굳었다. 다른 것보단 신기함이 앞섰다. 그런 사실을 덤덤히 말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런 환경에서 이렇게 밝고 올곧게 자라온 게 대견하면서도 신기했다. 고죠의 손이 이타도리의 머리를 덮었다.
"고생했다."
고죠의 마음을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타도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가 저희 집이에요."
"평범하네."
"선배 집에 비하면 뭔들 평범하지 않겠어요."
큭큭거리며 웃던 고죠가 어여 가라며 이타도리의 어깨를 떠밀었다. 어깨를 밀린 이타도리는 알겠다며 곧장 집으로 달려가면서도 인사는 잊지 않았다.
"내일 또 봐요 선배!"
***
오늘따라 머리가 멍했다. 전날은 선배가 약속이 있는 덕에 딱히 무리할 일도 없었는데 몸이 쑤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을 잘못잤나. 복도를 걷다 스탭이 꼬여 비틀거리니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쿠기사키가 이타도리의 몸을 부축했다.
"야 미련하게 굴지 말고 아프면 보건실을 가."
"어? 나 안 아파."
"지랄 말고 가라."
한마디만 더 하면 불같은 성질을 가진 자신의 친구가 정말 자신을 아프게 만들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한테 내가 말할테니까 지금 당장 가. 바로 뒤돌아가버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보건실로 돌렸다. 행동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선생니임……. 선생님?"
아무도 안 계시나. 타고나길 건강하게 태어나 보건실에 올 일이 워낙 적었던 탓에 낯선 곳에 발을 들이기가 눈치 보였다.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건실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직 3교시니까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만 기다릴까. 마침 침대를 보니 잠이 쏟아져오는 느낌이 들어 별다른 고민없이 바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조금만, 조금만 자야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시계와 옥상문을 번갈아 확인하던 고죠가 몸을 일으켰다. 대체 말도 없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해놓고 좋아하는 사람을 고생하게 만드냐고. 투덜투덜대면서도 이타도리의 반까지 파악하고 있던 고죠가 교실을 한 번 훑어봤지만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명찰이 3학년인 것을 확인하고 다들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쿠기사키가 나타났다.
"뭐하세요?"
"후배 좀 찾고 있는데, 이타도리 유우지라고."
"걔는 왜요?"
노바라의 눈에 경계심이 드러났다. 하긴 느닷없이 보지도 못하던 선배가 찾아오면 그럴만도 하지.
"해코지 하려는 거 아니니까 좀 알려주지 않을래?"
눈이 휘어지게 웃는 고죠를 보고도 쿠기사키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걔 오늘 상태 안 좋아서 보건실에 있어요. 보건실에 있는데 자기가 어쩌겠어. 안전장치를 엄두해둔 쿠기사키가 그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교실로 홱 들어갔다. 아프다고? 유지가? 고죠가 멍한 얼굴로 천천히 걷다 드디어 상황파악이 완료됐는지 보건실로 빠르게 달려갔다.
"유지!"
자고 있다는 건 생각도 안 한 건지 문을 세게 열어재꼈다. 쾅 하는 소리와 같이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잠에서 깬 이타도리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고죠를 쳐다봤다.
"선배……."
목소리까지 쩍쩍 갈라지는 게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타도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고죠가 다짜고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했어."
"저 안 아파요. 친구가 하도 가보라고 해서."
"무슨 소리야, 열이 이렇게 나는데!"
아프지 않다는 이타도리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친 고죠가 미안하다며 이마에 올린 손을 치웠다. 꼴을 보아하니 점심도 아직일테고 빈속에 약을 먹일 수도 없고. 이타도리가 안절부절 못하고 머리를 굴리던 고죠를 보다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얹었다.
"그냥 이렇게 있어줘요. 선배 손 시원해."
"하아, 진짜."
"안 돼요……?"
안 될리가 없잖아. 대신 일어나면 같이 죽 먹으러 가자는 약속을 받아낸 뒤 이타도리를 다시 재웠다. 새근새근 자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 걱정이 됐다. 이렇게 순진한 얼굴로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모르는 건가. 언제부터 이 귀여운 후배가 이렇게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아이가 아프다고 자신이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것. 그걸로 설명은 충분했다.
"유지, 일어나. 집에 가자."
"벌써 하교 시간이에요?"
"그래. 너 하루 왠종일 잠만 잤어."
힘없이 몸을 일으킨 이타도리가 신발을 신으려 침대에 걸터앉아 고죠가 쭈그리고 앉아 손수 신발을 신겼다.
"선배 뭐해요."
"아프잖아. 아플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괜찮은데. 이타도리의 말을 들은채 만채 흘겨들은 고죠가 신발을 다 신기고 일어났다. 이제 다 된 건가 싶어 가방을 매려하자 이번엔 가방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특권이라고 생각하라니까."
그렇게 죽을 먹을 때도 따뜻한 물이며 휴지며 이것저것 챙겨주고, 죽을 다 먹고 나니 약국 가서 약도 사 먹여, 집에 가서 먹을 죽까지 포장해서 손에 쥐어주고 나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기어코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이타도리의 곁을 떠났다. 사실 집에 들어가서까지 챙기려다 이타도리의 만류에 쓸쓸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따로 연락을 해서 안 사실이지만 이타도리는 한 번씩 큰 열병을 앓는다고 했다. 시기가 항상 달라 몰랐을 뿐. 결국 이타도리는 며칠 간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
"선배, 선배 교실 가 봐도 돼요?"
그 한마디로 학생들이 다 떠난 빈교실에 둘만 남아있었다. 이미 집에 가고도 남았을 시간에 학교에 남아있긴 난생 처음이네. 고죠가 이미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훑어봤다. 이타도리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죠가 뭐 아무래도 어때. 라는 식의 전개가 되었다.
"선배 자리는 어디에요?"
"거기서 두 칸 뒤."
"맨 뒷자리일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구경하는 모습을 보자니 내뱉으려던 말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내 자리에 볼 게 있나. 번뜩 무언가 뇌리에 스쳐지나가고 자리로 달려가니 이미 한 차례 늦은 것 같았다. 이타도리의 손에 작은 하얀 색의 쪽지가 들려있었다.
"이게 뭐예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연애 편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이타도리의 손에 들려있던 쪽지를 확 낚아챘다. 구겨서 버리려던 찰나 이타도리의 울망거리는 눈과 마주쳤다. 내가 왜 이걸 안 버려가지고.
"선배 여친 있었어요?"
"그런 게 아니,"
순간 말을 하다 이타도리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나쁜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그런 거면 어쩌게?"
고죠의 뻔뻔한 말투에 이타도리가 입을 열다 닫았다. 그래. 선배는 나를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는 걸. 나 혼자 착각한 거지. 이타도리가 답지 않게 스스로를 위축하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잘 만나야죠, 뭘 어떡해요."
"뭐?"
"들었잖아요. 저 먼저 가볼게요."
"거짓말이야."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려는 이타도리의 팔을 다급히 잡았다. 거짓말이라고. 그대로 이타도리의 몸이 굳었다. 이런 반응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울면서 따지는 거겠거니 싶었지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줄, 아 그래 모르지 않았지. 모든 걸 안일하게 생각하던 내 탓이었다.
"무슨 이런 거짓말을 해요?"
매고 있던 가방이 고죠에게 날아갔다. 다급히 방어한 덕에 간신히 막긴 했지만 막지 않았다면 그건 얼굴을 가격했을 위치였다.
"내가 미안해. 장난 좀 쳐보려다가."
"진짜 나쁜 거 알죠?"
"알지. 내가 나빴어."
달래주겠다고 고죠가 이타도리를 꼭 껴안았다. 더불어 더 때리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잔뜩 들어있었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팔로 고죠의 어깨를 팡팡 때리다 장난이었다는 것에 안심되기도 했는지 금방 화를 식히고 고죠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제 화 좀 풀렸어?"
"몰라요. 아직 안 풀렸어."
그러면서도 제 허리를 잡고 놓지 않는 게 귀여워 계속 품에 껴안은 채로 소리 없이 웃었다. 생각해보면 여친을 만들 새도 없이 자신과 붙어다녔는데. 이런 허술한 장난에 속았다는 사실에 슬슬 창피함이 몰려온 이타도리가 고죠의 품에서 벗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이제 이런 거짓말 안 칠게."
"됐어요!"
일났다. 내가 언제 이렇게 빠졌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뾰루통한 얼굴마저 너무 귀엽게 보였다.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 거야. 교실을 나가려던 이타도리의 뒷모습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유지,"
"왜요."
"유지."
"아, 왜요!"
신경질을 내며 확 뒤를 도니 고죠의 얼굴이 가까웠다. 숨이 멈췄다. 둘 사이에 아슬하게 긴장감이 감돌다 고죠의 고개가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자 이타도리가 눈을 꾹 감았다. 이렇게 어리숙한 면도 너의 사랑스러운 부분 중 하나였다. 눈을 너무 세게 감았는데. 긴장한 듯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져 고죠가 살풋 웃으며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유지, 우리 사귈까?"
기분 좋은 떨림에 맞잡은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어울리지 않는 볼터치를 한 것마냥 붉게 물드는 뺨이 마음에 들었다. 이건 필시 절대 이루어질 사랑. 어서 대답해.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네 입으로 확인 시켜줘.
"…좋아요."
어느새 내게 스며들어온 너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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