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

트친이 주는 첫문장으로 글쓰기

1. 만주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만년에게 밀애의 단어를 거절하지 않는 주인은 상상해 본 적 없는 것이어서, 그는 미묘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왜 이런 꿈을 꾸고 난리야. 만년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 책상에 앉는 내내 꿈에서 본 주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뺨을 붉히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긍정을 표하는. 현실의 주인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이질적임을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2. 몯깃

유독 추운 여름이었다. 해도 길어지고 날도 분명 뜨거워졌는데, 한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땀이 차도록 손을 잡고, 숨이 모자라도록 입을 맞추고, 날이 밝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던 그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와 함께 겨울에 머무르는 제 계절이 다시 흘러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였다.

3. 탐집

“사람이 신경 쓰인다는 건 뭘까?”

“그 용의자가 범인이라는 거 아닐까요?”

“용의자가 아닌 상황에서는?”

“보통의 경우라면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 거겠죠.”

“그게 내 얘기라도?”

“네.”

“탐정 보조, 이 일 하려면 눈치가 있어야 해. 아직 멀었네.”

4. 몯깃

어느날, 눈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피곤한 탓인가 싶었다. 잠을 푹 자고 나도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지속되자 그다음에는 나이를 탓했다. 나이를 먹으면 그런 일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알리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 말해줄걸. 미리 말해주고, 미리 네 얼굴을 더 들여다보고, 미리 좋은 곳에도 가보고. 이제와 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 얼굴에 눈물방울이 닿고 나서야 네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울지 마요, 언니. 이제는 내가 달래줄 수도 없는걸.”

5. 탐집

사계절이 너와 함께였다. 사람 대부분이 봄부터 계절을 새어갔지만, 네가 새는 계절의 시작은 겨울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네 인생에는 늘 아릿한 추위가 들러붙어 있어서, 나를 만난 것도 한 해의 마지막 달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계절의 시작은 겨울이라고 네가 그랬다. 긴 겨울을 지나 봄, 여름, 가을. 또다시 겨울. 너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바다를 보고 싶다고. 코와 뺨이 발갛게 얼었는데도 지칠 줄 모르고 바닷가를 걷는 네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몇 걸음 앞서 나가지 않아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를 여러 차례. 차라리 손을 잡고 걷자고 했다. 차가워진 네 손을 잡아 내 코트 주머니에 넣으니, 네가 배시시 웃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등이 조금 붉었다. 네가 지칠 때까지 걷다 돌아온 차 안에서 너는 다음에는 여름 바다에 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돌아오는 여름을 기약했고, 우리가 맞이한 두 번째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6. 집탐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365일 중 하루. 특별한 날도, 공휴일도, 하다 못해 주말도 아닌 평범한 목요일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전부 너 때문이었다. 네가 돌아온다고 한 날이니까.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칭찬해주겠지. 네가 없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났는지. 아무곳에도 쓸 일 없는 이야기를 이미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너는 흥미롭다는 듯이 들어줄 테였다.

7. 만주

거짓말이란 걸 알면서도 속아넘어갔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는 말에도, 한순간의 실수였다는 말에도.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바보 같이 용서해주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네가 하는 말 중에 진실한 것은 아마 미안하다는 말뿐이었을 테였다.

나니까 넘어가지, 그런 성의 없는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줌마. 그렇게 말을 하면 너는 왜 이제야 아는 척인지 물어볼까? 아니면 왜 속아주었는지 물어볼까. 한숨에 푸념을 섞어 흘려보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였다. 사랑. 관성이 생겨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사랑.

8. 몯깃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부모의 복수를 위해 인생을 걸었다는 흔해빠진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생긴 망설임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좁게는 복수의 실패를 불러올 테였고, 크게는 아무 의미도 없이 목숨을 버리게 될 테니까. 네가 잃을 것이 되어버려서. 남겨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서. 네 이름을 가진 망설임을 지워버리기에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9. 탐연-스핀

당신은 항상 그런식이었어. 내가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잖아. 사랑하는 만큼 사랑 받고 싶다는 것도 아니야. 그냥, 한 번만.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나도 이제 지쳐. 그만하고 싶어. 이제 그만 할래.

“연구 씨,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아, 죄송해요, 탐정님. 갑자기 이메일 알람이 와서요.”

“그랬어요? 하여튼 매번 미안해요.”

“으응, 괜찮아요. 다음에 같이 가면 되죠.”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알았어요. 그러면 몸 잘 챙기고요. 주말에 봐요.”

“네, 탐정님도 몸 조심하세요.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지긋지긋하게 멍청하고 한심한 주연구.

10. 탐집-스핀

나 사랑해?

사랑해. 너무 당연해서 대답하기 싫을 만큼.

누구였더라.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 애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풋내가 나는 생채소를 좋아하고, 비닐에 쌓인 책을 쌓아두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던 사람. 처음에는 그것을 숨길 만큼의 다정함을 가졌으나, 본성을 숨기지 않아도 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지독한 상처를 남겼던 것까지. 잊어버렸던 흉터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어디 아파요?”

“네? 아니요.”

“이상한데.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그냥 옛날 생각이요.”

탐정은 집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 캐묻지 않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옆자리를 눈짓했다. 집착은 조금 떨어져 탐정의 곁에 앉았다. 집착은 허리에 감긴 팔이 잡아당기는 대로 빈틈없이 탐정에게 기댔다.

“탐정님.”

“왜요?”

“그냥요.”

“…싱겁기는.”

탐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집착은 잠시 탐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럴 때면 그가 주는 애정이 영원할 거라는 안락한 착각에 빠지고 싶어졌다. 언제든 제 부름에 답해주고, 제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고, 듣고 싶은 말을 속삭여줄 것이라는.

“탐정님.”

“네, 주집착 씨.”

“저 사랑하세요?”

탐정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집착을 바라보았다. 조금 의아한 빛을 띠는 얼굴을 집착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랑하죠.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네.”

“또 듣고 싶어지면 말해요.”

“그래도 돼요?”

“이미 아는 거, 또 말해주는 게 뭐 어렵다고.”

집착은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고 부서지고, 바랜다는 걸. 지금, 이 순간 찬란하게 빛이 나는 그의 애정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걸.

11. 탐연-스핀

“나 기다리는 거 잘해요.”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연구는 그런 식으로 거절을 회피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제 눈앞의 탐정처럼 당당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조금 기가 차기도,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그래. 저 말이 따라오지 않으면 섭섭하지. 연구는 눈을 굴리며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셨다. 탐정의 제안을 수락하면 을의 연애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문득 든 생각에 표정을 구겼다. 정신 차려, 주연구. 저 수작에 넘어가려고?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번드르르한 얼굴에 한두 번 속았어? 그건 또 그렇지.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을 탐정은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12. 변증-스핀

“도대체 나를 얼마나 쓰레기로 본 거야?”

주변호답지 않게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서운함과 속상함, 약간의 자기혐오. 셋 다 주변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증인은 물끄러미 변호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얼굴을 해서는 저를 쏘아보는 변호의 눈이 조금 젖어있어서,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 조금 다친 거지 죽을병 걸린 거 아닌데.”

힘없는 증인의 목소리에 침상에서 조금 떨어져 선 변호는 더 꽉 팔짱을 꼈다. 이도 악물었는지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런 표정도 할 줄 알았구나, 주변호. 증인은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조금 다쳤다는 사람이 의식이 없다는 연락이 오게 만들어?”

짜증의 탈을 쓴 변호의 말에도 증인이 피실피실 웃자, 변호가 뭘 잘했다고 웃냐며 쏘아붙였다. 증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걱정했으면 걱정했다고 해, 자기.”

“내가 언제 걱정했대?”

불퉁하게 대답해 놓고도 증인이 링거가 꽂힌 손을 내밀자, 변호는 굳이 반대로 돌아가 자유로운 손을 찾아 쥐었다. 툭 떨어진 변호의 눈물을 모르는 척, 증인은 변호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러면 걱정 안 했어?”

“…했어. 당연히 했지.

13. 변증

“물구나무설 줄 알아?”

“아니?”

변호는 갑작스러운 증인에 물음에 더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디서 또 뭘 본 모양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이어지는 말이 없어 흘긋 바라본 증인의 얼굴이 어쩐지 실망스러워서 변호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증인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대답으로 넘어가 주지 않을 테였다. 변호는 조용히 문서창을 끄고 물구나무서는 법에 대해 검색했다. 증인의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면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겠지.

14. 탐집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탐정은 고개를 들어 집착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집착의 긴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제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작은 부탁을 하는 데까지는 또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의 상상 속 저는 또 얼마나 다양한 말로 그를 거절했을까.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집착은 제 손가락을 괴롭히며 신경 쓰지 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탐정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며 집착에게 손짓했다. 가벼운 손짓에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집착을 제 무릎에 앉힌 탐정은 가까워진 집착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부르고 싶어요?”

집착은 한참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말간 얼굴에는 조금의 기대감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언제 이렇게 읽기 쉬워졌지.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탐정은 집착의 뺨을 콕 찔렀다. 아마 그를 좋아하게 된 그 순간부터였을 테다. 탐정은 피어나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집착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15. 탐집

날이 맑아요. 지난주에는 내내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구름 하나 없더라고요. 저 하늘 위에 누군가가 당신 생일인 걸 알기라도 하나 봐요. 집착 씨, 당신이 그랬죠. 당신이 태어났음을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당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있었잖아요.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다면 날씨를 관장하는 누군가도 있을 테고. 내가 신을 들먹이는 거 좀 웃기죠. 하긴 그런 거 믿어본 적도 없는데. 그래도 지금은 조금 믿고 싶어요. 신은 자기가 사랑하는 인간을 빨리 데려간다고들 하잖아요. 변하지 않는 사랑을 당신을 늘 바랐으니까. 지금 당신은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좀 욕심쟁이네, 그 신이라는 작자. 가진 것도 많으면서 당신을 홀라당 데리고 가버리고. 하여튼 거기 날씨는 어때요? 여기처럼 화창한가? 당신은 너무 맑은 날은 또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조금은 흐릴지도 모르겠네요. 아직도 흐린 날을 좋아해요? 나는요? 나도 아직 좋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는 아직 집착 씨가 좋거든요. 아주 많이요. 좀 더 일찍 말해줄 수 있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요? 그건 모를 일이지만, 그런 상상을 가끔 해요. 당신이 자주 앉았던 자리를 볼 때나, 당신이 좋아하던 몇 안 되는 것을 마주칠 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당신도 그랬을지 궁금해지기도 해요. 말이 또 딴 데로 샜네. 오늘은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려고 왔는데. 생일 축하해요, 주집착 씨. 보고 싶어요.

16. 탐집-스핀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집착은 몇 번이고 탐정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의 사랑을 받으려면 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 질문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건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빚어져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소모품. 집착은 탐정에게만은 그렇게 쉽게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되고 싶지 않았다.

17. 탐집-스핀

“주집착. 이제 이런 거 그만하라고 했지?”

탐정의 서늘한 목소리에도 집착은 태연하게 탐정에게 웃어 보였다. 탐정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형 카메라가 달린 인형을 구겨 쥐었다. 손에 닿는 촉감이 물건의 본질과는 달리 보드랍고 푹신했다. 꼭 제 눈앞에 선 사람처럼.

18. 탐집-스핀

“이걸로는 부족했나요?”

“집착 씨, 잠깐 내 말 좀 들어봐요.”

“무슨 말이요? 부족한 건 저였다는 말이요? …그건 말해주지 않으셔도 알아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러면요?”

“그냥 실수였어요.”

“거짓말. 탐정님은 실수 같은 거 안 하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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