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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헴프혁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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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성과의 연애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옆 학교 남자애들이랑 사귀고 그럴 때도 나는 저걸 왜 하는 거지 싶은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릴 때는 이걸 문제 삼는 이가 전혀 없었다. 학생의 본분은 학업이라며 오히려 기특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니, 10대에서 20대가 된 그 찰나의 순간 이후로 남자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는 나는 어딘가 하자 있는 여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연애할 생각이 없는 나를 다들 이상하게 바라보았으며 자신이 가진 인맥을 동원하여 내 짝을 찾아 주려 애를 쓰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흘러간 것은 시간 뿐이고 바뀐 것은 없었는데도.


소개팅 어플을 깔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고 누구라도 보란 듯이 사귀어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저는 평범해요!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어플은 정말 간편했다. 아는 사람에게 소개를 받았을 때 생기는 불편함과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웠고 화면을 넘기기만 하면 짝을 찾는 남자들이 자판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내가 호감 표시를 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신청이 들어왔다. 나중 가서는 계속해서 들어오는 신청에 소개글을 읽기 귀찮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샌가 나는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들이고 친구일 하나의 인격체들을 나이, 사는 곳, 성격, 외모(경제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노력해서 번 재화를 나의 이득으로 여기고 프라이드 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를 유통기한 확인하며 물건 사듯이 따져 가며 고르고 있었다. 내 인간성의 상실이 느껴졌다. 정말… 정말 기분 더러워지는 어플이다.

몇 번의 매칭이 있었다. 만남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초밥, 파스타 따위의 체면치레를 위한 재미없는 메뉴와 함께 방어적인 대화가 오간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상대방의 약점을 떠본다. 소개팅이란 거 원래 이렇게 거북한 거구나. 환심을 사기 위한 표면적인 칭찬, 이상형 이야기, 결혼과 출산 계획, 직장 이야기, 시사교양이나 독서 같은 보여주기식 취미 얘기. 이상적인 사회성으로 점철되어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표면적인 대화에 그쳐버리는 소통. 밥을 먹는 도중에 토하고 싶어졌다. 형식적으로라도 2차는 카페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날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처음 만난 남자에게 항상 밥을 샀다. 그러면 관계 형성의 책임에서 도피하더라도 부채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들어가셨나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푹 쉬세요.” 마법의 문장이다. 대개 이 말을 들은 남자들은 바로 거절을 직감할 것이다. 듣고 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저 씨발년 뭣도 없는 게 비싸게도 군다’고 생각하려나. 상관은 없다. 납득되지 않는 거절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남자를 만났다. 무명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현재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나는 서로를 알아가겠다는 명분의 식사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그와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나에게 연예계 생활의 이면을 알려주었고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연예계 생활에는 여러 제약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연애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랑을 제한 당했던 고충을 토로하며 자신이 그리워하는 지난 사랑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요즘에도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 이 남자는 정말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사랑을 했다. 마음이 이끄는 것에 제일 충실할 수 있는 그런 뜨겁고 바보 같은 사랑을 했다.

살아갈 만큼의 돈만 있으면 된다는 그는 돈에 큰 욕심이 없었다. 돈과 당장 먹을 수 있는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디저트를 고르는 그런 남자였다. 돈이 생기면 여행을 다녔고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며 운전하는 것보다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것을 못 하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매 순간 아주 조금이라도 모두에게 자신의 온기로 따뜻하게 데운 마음을 내어줄 줄 아는 그런 사람.

내게 이상형을 물었다. 나는 대답을 피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키가 크지 않고 얼굴은 나와 비슷한 인상이면 좋을 것 같으며 성격은 강인하기보단 연약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대답했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자기 키가 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자긴 눈물도 많고 연약한 사람이라며 웃었다. 그 남자의 키는 177cm로 평균보다 큰 키였는데. 타인에게 눈물을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강한 사람이어서 가능한 것일 텐데.

한참 시간이 흘렀고 뉘엿뉘엿 기울던 해는 어느새 사라졌다. 내 잔은 이미 비어 얼음만 달그락거린 지 오래였고 그는 한 모금 정도 남은 커피를 계속 마시지 않고 있었다. 혹시 다 드신 거냐고 물으니 슬픈 얼굴로 “아… 왜요?” 하고 되묻는다. 이 사람 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구나. 잔을 비우는 순간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구나. “아니 그냥… 다 드셨으면 산책이나 같이 할까 해서요.” 그의 슬픔에 젖었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너무 좋다며 냉큼 잔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깜깜해진 밤거리를 함께 거닐었다. 그의 친구 이야기, 전 연인 이야기, 전 직장 이야기. 수많은 이야기들이 적막한 밤공기를 채웠다. 정적이 찾아올 때마다 서로에게 물을 말을 고르고 고민하던 밤. 나는 그에게 흡연을 한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담배를 피우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원래는 피우지 않았는데 몇 년 전 연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 슬픔을 이겨내기 힘들어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말을 해주던 목소리는 울음을 참는 듯 가볍게 떨렸던 것 같다. “아직도 많이 생각나시겠어요.” 나의 말에 그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젠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며 또 웃었다. 거짓말. 명백히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랑을 잊고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잊힐 리가 없다. 그 사람이 만든 공백은 아무리 좋은 사람을 새로 만난대도 그 사람이 아니면 완벽히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영원한 이별이란 건 내 일부를 안고 떠나가 버린 그 사람을 찾아 헤매며 가끔씩 원망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이다. 나는 타박 섞인 위로를 건넸고 그는 그제야 그 사람이 아직도 떠오르며 그런 날이면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습하고 열기가 가득했던 그 밤. 암흑 같던 하늘은 그녀를 다시 추억하기라도 하듯 보슬비가 내렸고 우리는 둘 다 손에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우산을 펴지 않고 비를 맞으며 밤길을 걸었다.

길었던 산책의 끝자락. 그는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게 카톡으로 잘 들어갔냐는 말과 함께 자신의 영화 같은 인생이 나의 글 쓰는 일에 좋은 영감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슬퍼졌다. 지금까지 나의 그림은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글에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현학적인 글로 아첨을 떨어 환심을 산 적은 제법 있었지만 순수하게 쓴 내 글이 사랑받은 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을 보고도 내 마음은 왜 이리 고요했을까. 저런 아름다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다음날 아침,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출근길 그와 카톡을 나누며 버스에 올랐다. 나 덕분에 어제의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단다. 두려웠다. 이 사람은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과 달랐다. 정말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저 사람에게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를 사랑했다. 톡 치면 터질 것 같은 봉숭아마냥 그 남자의 고백이 갑자기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왜 당신 같이 빛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해요? 제가 뭘 어쨌는데요…’ 묻고 싶었다. 뭐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난 찬란하도록 따스한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사랑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랑은 정말 이유 없이 생기는 걸까. 청소를 아무리 해도 어디서 생겨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초파리 같은 게 내 사랑이야? 너무 못났다. 그 남자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나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는 자꾸만 거짓말을 했으니까. 종국에는 나는 이 남자의 마음을 병들게 할 거야. 자신과 어긋나는 나의 마음을 체감할 때마다 그는 하루하루 고통받을 거야.

그 남자의 마음은 결국 터져버렸다. 나를 만났을 때 너무나 설레고 좋았다고 고백했다. 아침에 그 카톡을 받고 나는 퇴근할 때까지도 하루 종일 답장을 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에게 푹 쉬라는 한 마디로 어떻게 비수를 꽂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남자의 마음은 더 불어나겠지. 빨리 끝을 내야 했다. 그에게 건넬 말을 고르고 써 내려갔다. 이별 자체가 상처이기에 상처 주지 않는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한 거짓말을 잔뜩 풀어 글을 썼다. 위선적인 활자가 가득 담긴 카톡. 나는 그것의 전송 버튼을 누르고 바로 그의 연락처를 차단해버렸다. 그에게서 어떤 답이 왔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에 대한 궁금증과 죄책감은 내가 잊지 않고 안고 살아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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