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밭 거북이들 외전 2. 술김에, 홧김에, 꿈결에!

쓰다 말았음

비망록 by 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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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새로 산 CD를 리핑해 핸드폰에 담았다. 눈을 감고 관현악기의 음색을 감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카톡! 갑자기 알림음이 음악 사이로 끼어들었다. 눈이 떠지고 미간에 자동으로 힘이 들어갔다. 누구냐 이 새벽에.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스팸이나 게임 초대장이면 누구든 상관없이 차단해버릴 거야. 나는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방해꾼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방해꾼은 김수혜였다.

[ㄴㅏ 슥ㄹ껨ㅣㅁ하디ㅣ가 마ㅎ이 취햏ㅇ여]

질서를 찾지 못한 자음과 모음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도착해있었다. 낯익은 문자들의 낯선 배치에 나는 당황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 때 주구장창 보던 고전시가 같았다. 하지만 가르치는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다수의 국어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기를, 고대 한글로 써진 고전문학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소리를 내어 읽어보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침착하게 입으로 개미만한 소리를 내어 읽어보았다. 나 술게임 하다가 많이 취했어. 술게임? 김수혜가 술게임을?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봤다. 그러자 며칠 전, 단체채팅방에서 날뛰던 김수혜의 시끄러운 글자들이 떠올랐다. 가군에 추가합격을 했다면서 합격 인증 사진을 올리고 그랬지. 김수혜는 기뻐하고 나와 전석영은 축하하고 여간 난리도 아니었더랬다. 오호라, 이 녀석이 새터 갔다더니 게임도 잘 못 하는 게 벌칙 엄청 걸려서 존나 취한 거구나. 얼굴이 삭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약간 나른하게 웃으며 액정을 톡톡 눌러 글자를 입력했다.

[자]

전송완료. 핸드폰을 놓고 일시정지한 곡을 재생했다. 한 곡이 다 끝나갈 때 즈음 핸드폰에서 알람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아씨ㅣ ㅇ심싯ㄷ해 나랑 놄아줘 싷ㄴ이 나랑놏아줜]

또 다시 외계어가 답변으로 날아왔다. 다시 한 번 천천히 낭독했다. 그래도 아까보단 읽기가 쉬웠다. 아 씨 심심해 나랑 놀아줘 신이 나랑 놀아줘. 신이라고 읽었지만 분명 김수혜가 적으려고 했던 단어는 시현이일 것이다. 근데, 이게 미쳤나 진짜.

[심심하면 가서 게임이나 더 하던가]

[진상 부리지 말고]

이번에는 답장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계어로 이루어진 메시지가 도착했다. 음악은 끈 지 오래였다.

[나 만싯#쥫ㄱㄱ햇타고]

천천히 읽어보았다. 나 많이 취했다고. 취했으면 엎어져서 잠이나 잘 것이지 나에게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럼에도 요 녀석이 조금 걱정되었다. 한창 술게임을 하고 있을 때 자기 혼자 빠져서 친구한테 메시지나 보내는 일의 후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이렇게나 걱정해주다니, 난 좀 좋은 녀석 같다. 혼자서 뿌듯해하며 답장을 보냈다.

[너 지금 어디냐? 이렇게 보내도 돼?]

[아직 술게임하고 있으면 답하지 마]

[선배들 눈치 준다]

메시지 세 통을 연속으로 보냈다. 다시 핸드폰 화면을 껐다. 몇 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알림음이 울렸다. 김수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술 캔다꼬 지븝ㅁ 밖이이ㅡㅑ]

내가 원하는 대답이 밖, 이라고 선명하게 떠 있었다. 바깥이라면 눈치 안 보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

[야 그럼 나 전화로 한다]

곧장 김수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딸깍, 김수혜가 전화를 받았다. 술 때문에 입이 풀려 발음이 새고 웅얼거리는 김수혜의 몇 마디들이 수화부를 통해 줄줄 흘렀다.

“야, 너 왜 통화해……. 새끼가 매너도 없이 통보도 안 하구…….”

“카톡으로 보냈거든. 그걸 확인 못 한 니 잘못이지.”

“암튼 왜 전화했어…. 안 자고 뭐했냐…? 나 때문에 깬 거?”

“그래 너 때문에 깼다.”

자고 있지 않았지만 괜히 심술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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