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Roh Eul. 17세.

21st Century Odyssey

치즈의 화덕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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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분쟁지역은 서른 곳이 넘습니다. 벌목과 이상기후로 인해 습지가 사막화되어가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도 북태평양 어딘가에는 섬이 침몰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선진국이 양산해 내는 음식 쓰레기 산에서 아사하는 기아들의 수가 늘어납니다. 실시간으로 격변해가는 정보와 문화의 21세기에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답은 바로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인류의 공동체 의식은 수만 년 전부터….]

휴게실처럼 꾸며진 커다란 방 안. 검은 머리의 소년이 빈백에 몸을 맡긴 체 앉아있다. 자신의 몸집에 몇 배는 큰 소파 안에 몸을 반쯤 파묻고선, 한쪽 벽에서 쏘아지는 프로젝트 빔이 눈부시지도 않은지 영상을 시청하는 내내 꿈쩍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옆으로 천천히 한 인영이 다가온다. 긴 금발을 한쪽으로 내려묶은 여자. 여자는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로(Roh), 재밌어? 감상은 어때?"

흰색, 녹색, 검은색, 빨간색, 무감흥한 회백색의 눈동자 위로 바뀌어가는 화면의 빛이 지나간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소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체 입을 열었다. 태도만큼이나 고저없이 따분한 목소리였다.

"글쎄요. 지구 역사상 단 몇 초를 스쳐 지나가는데 불과할 뿐인 종이 정말 많이도 해먹는다? 어차피 백여년 뒤면 다들 사이좋게 멸종할텐데 남탓 미루기를 참신하게도 한다 싶고요. 사실 이런 영상은 예전부터 질리도록 봐와서 별 생각이 들진 않네요."

그 말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둘 뿐만이 아닌 듯, 웃고 있는 것은 짙은 턱수염의 남자. 이국적인 짙은 피부색이 인상적이다. 남자는 이곳이 제 안방인 양 소파에 가로로 누워 손에 든 빈 유리병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일리나. 다큐를 몇 시간을 보게 하든 소용없다니까?"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여자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 시선은 남자가 들고 있는 유리병에 꽂힌 체 내뱉어지는 차가운 목소리는 소년에게 말을 걸 때와는 사뭇 딴판이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존. 그리고 휴게실에서는 알코올 반입 금지라고 말했을 텐데? 휴일 대낮부터 술 마실거면 나가서 마셔."

날카로운 여자의 반응이 일상적인 듯 남자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봐, 오래간만에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조언을 해준 건데 한번 들어보라고. 팀장으로서의 일도 좋지만, 우리가 베이비 시터가 되기 위해 온 건 아니잖아? '공장' 애들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까?"

그 말에 남자의 말이 시작될 때부터 인상을 찌푸리던 여자의 표정이 단숨에 일그러진다.

"닥쳐, 이 알코올중독자 새끼야. 한 번만 더 네 입에서 그 좆같은 단어가 나오기만 해봐. 랩실에서 손 떨어서 쫓겨나는 게 더 빠른지 나한테 맞아서 쫓겨나는 게 더 빠른지 한번 보자고."

"워-허-우. 알겠어. 알겠다고. 너무 그렇게 까칠하게 굴 필욘 없잖아, 자기야."

"정신 나갔어? 누가 네 자기야? 그 술병으로 네 머리라도 내려쳐줘야 해?"

"애니 뭐니 그렇게 싸고들더니, 너무 거칠게 말하는 거 아니야? 다 듣는다고?"

히죽 웃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그제야 얼굴에 당혹감을 떠올리며 다시 소년을 바라본다. 그러나 소년은 둘의 싸움엔 코빼기도 관심이 없는지, 처음 모습 그대로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체였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는데요."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언제나 참 한결같은 태도야. 안 그래? 일리나, 저 싸가지 없는 애새끼한테 적선할 정도로 시간이 넘쳐난다면 차라리 나한테 기부하는건 어때? 나한테도 그 친절한 태도를 보여달라고."

"뭐라는 거야. 더럽게 말 안 들어처먹는 너랑 로랑 같아? 넌 오늘 로 덕분에 내 손에 안 죽는 줄 알아. 당장 그 무거운 엉덩이 치우고 꺼져, 존."

여자가 으르렁거리듯 내뱉고 나서야 남자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시발, 아침부터 저놈 때문에 기분이 잡쳤어.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야. 이 등신아.

벅벅 문을 열고 나가는 남자의 등 뒤로 뾰족한 여자의 목소리가 날아가 꽂힌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중지 손가락을 올리며 문을 닫았다.

"존,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이런 일회성 프로젝트 팀에 인성 좋은 사람을 찾는 사람은 일리나 밖에 없을 거에요."

들려오는 시큰둥한 목소리에 여자가 소년을 바라본다. 여자의 눈썹이 팔자로 축 늘어났다.

"오, 로. 그래도 이 연구팀에 존 같은 사람만 있는건 아니야. 제니퍼도 있고-."

"전 남편이랑 이혼한 것 때문에 흡연실에서 소리 지르던 거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개리나 데이빗은-"

"저번에 둘이서 토론하다 멱살 잡고 주먹 다툼하던 건 기억 안 나시는가 봐요. 하긴, 그때 그건 데이빗이 잘못했죠. 팀원들 간 인종 발언은 금지인데."

"…그래도 조용한 건 애런이-"

"매일 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 사람이 말이군요. 저번에 쓴 논문은 정말 쓰레기였다고 대신 전해주실래요? 기껏 제 노트를 훔쳐갔으면서 산림파괴에 앞장서다니 안타깝잖아요."

막힘없는 소년의 말에 여자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할 말이 없어진 듯 한숨을 쉬었다. 소년이 그 모습을 보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알아요. 남동생때문에 저한테 잘해주는거요."

"뭐? 아니야.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니?"

여자가 화들짝 놀라 소년을 바라봤다.

흰 가운 앞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는 소년. 달깍, 하고 무언가를 누르자마자 함께 옅게 들리는 재즈풍 음악과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시끄럽게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음 속에서 웅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녹음된 전파를 타고 독일어 특유의 발음이 가마된 영어가 뭉개지듯 울려퍼졌다.

[난 도무지 이해가 안가. 퍼킹- 그 빌어먹을 시설이라는 건 이 지구상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공부 말고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서 독립했다고 어린애들을 돈 받고 팔아먹는 게 말이 돼? 제니, 난 걔가 이곳에 열세 살 때부터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내 남동생은 이제 열 아홉살인데 걘 아직도 몸만 큰 애나 다름없어. 그런 식으로 취급받은 애들이 정상일 리 없잖아! 전부 다 실적에 미친 새끼들뿐이야. 난 이딴 곳에서 일하려고 그 개고생을 하며 박사학위를 딴 게 아니라고…….]

다시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정적. 녹음기를 품 안에 다시 넣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회식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거 저도 들었어요. 좀 취하셨던데요. 평소에 본인의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크셨나 봐요."

"…미성년자를 펍에 데리고 갔어? 누가?"

멍하니 묻는 여자에 굳이 대답하지 않는 소년.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여자는 마른세수를 하고 만다. 오, 시발. 존 이 개같은 놈이. 독일어로 된 욕설이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 사실 소년은 이 연구실에서 존이 특출난 개자식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심란해보이는 여자를 위해 그 말을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이곳에 대한 제 기대는 이미 0에 수렴하니 걱정마세요.

"저 때문에 팀장 월급도 자발적으로 적게 받고 있다면서요. 어차피 당분간 이곳을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괜한 수고는 안해도 된다고 말씀드릴게요."

가끔 이곳이 가장 '덜' 보수적인 곳이라는 게 소년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고하여 딱히 가고 싶은 다른 곳도 없었으니 소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여자는 한참을 말을 고르는 듯 했다. 말버릇처럼 음, 따위의 의미없는 소리를 세번은 더 하고가서야 가까스로 소년에게 해줄 말이 생긴 모양이었다.

"…일단 너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할게.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네 말을 부정하진 않아. 하지만 난 언젠가 네가 변할거라고 믿어.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아직 좋은 어른들이 많으니까."

그러나 그런 여자의 노력도 여실 제 마음에는 들지않은 모양인지. 소년은 시종일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좋은 어른은 모르겠고 그럴 거면 해양 쓰레기나 좀 줄여줬으면 좋겠네요. 매탄가스도. 저희 세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게요. 무엇보다 교차 검증 시간 때 되지도 않는 꼬투리 잡는 짓도 작작하라고 전해줘요."

"물론 그것도 바람직한 어른이 해야하는 의무 중 하나지……."

비아냥처럼 들릴법도 한 대답에 여자의 목소리에서 일순 힘이 빠졌지만, 여전히 설득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제 인내심을 쥐어짜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는, 아직 어린만큼 주어진 시간도 많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그럼 그럴 시간에 차라리 멍청이들이 써재낀 종이 쓰레기나 한 줄 더 읽어보려는 노력을 할게요. 누가 알아요. 이제 제가 동물이랑도 말을 틀 수 있게 될지."

연이은 즉 개소리라는 말이었다. 땅이 꺼질 듯 여자의 한숨이 깊어졌다.

"제가 이곳에서 불만을 가진게 있다면, 그건 연구에 관한 것뿐이에요."

"로. 이곳에서 너는 한 명의 연구원으로서 마땅히 자유롭게 연구 할 자격이 있어. 애런은, 그래. 연구팀장인 내가 조금 더 신경 써볼게."

"하지만 저번 실험에 대해서는 반대하셨잖아요."

도르륵, 소년의 불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두 눈이 처음으로 여자를 직시했다. 퇴적물같이 침전 된 먼지들이 여자의 상을 제 안에 담았다.

"수치에 대한 신뢰도도 낮고, 실제로 검증이 꼭 필요했던 연구였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망상만 늘여놓을 뿐인 소설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그 약품이 얼마나 인체에 유해한지 너도 잘 알잖아. 로, 안전하지 않은 화학물을 핏줄에 밀어 넣는 건 살인미수나 마찬가지야."

"하다못해 제가 제 팔뚝을 기증하는 것도 안되나요?"

"내 대답은 변함없어. 안돼."

지금까지와 달리 단호하게 끊어내는 여자의 말에 그럴줄 알았다는 듯 소년의 두 눈에서 힘이 풀렸다. 이내 소년은 다시 고개를 프로젝트 빔이 쏘아내는 영상에 처박은 체 입을 열었다. 조금은 불퉁한 어조였다.

"그럼 이번 연구에서 제 이름은 빼주세요. 전 그런 쓰레기를 생산하는데 제가 일조했다는 걸 사람들한테 동네방네 자랑할 생각은 없거든요."

아, 애런은 좋아하겠네요. 축하한다는 말도 전해줘요.

어떻게든 소년의 생각을 돌려보려던 여자는 몇 번 소리없이 입을 방긋거린 이후에야 이 이상의 대화가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것 같었다. 오, 그래. 그렇구나. 음……. 아무런 의미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담요나 간식거리가 필요하겠니?"

"아니요."

마지막 시도마저 실패해버린 여자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찌꺼기마냥 남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여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자리를 떠나기 전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이미 관심을 돌린 소년에게서 되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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