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긴 기억.

NCP.

* 사이비마을 힐데 날조 존재함.

* 크리처 날조 존재함.

* 걍 적폐 어쩌고임.

모든 사건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육감에서 잡히지 않는 크리처. 이미 사라졌을, 우리의 세계에서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왔을 크리처로부터.

이름없는 존재를 마주친 이들의 면면은 제각각이었다. 성인 남자의 두 배의 크기, 거대하다면 거대한 것이겠으나……. 문제는 그 형태였다. 정사각형의, 반투명한 천자락처럼 생긴 것은 별 자아도 없이 허공을 하늘하늘 날아다니고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아니였다면 (발성기관으로 보이는 부위가 없는데 어떻게 소리를 내는건지, 윤은 거기에 집중했다.) 그냥 누가 놓치고만 거대한 천자락이 바람에 날려가고 있는거라 착각할 것만 같았다. 물론 저게 ‘크리처’ 라고 명명된 이상 위험할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저렇게 맥아리없이 팔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탁,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미조차도 한 번 만져보고 싶은지 커다란 눈을 초롱거리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여튼 저게 위험할지, 괜찮을지, 확인하는 과정은 필요했고, 가능한 한 샘플을 얻어갈 수 있다면 좋을터였다. 금방 발도할 수 있도록 검을 손에 얹은 힐데베르트가 해파리마냥 흐물대는 크리처에게 두어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그의 작은 행동은 조금 잘못된 결과를 불러왔다. 흐느적대는 움직임이 단번에 방향을 틀더니 놀라운 속도로 힐데베르트를 확 덮어버린 것이였다. 힐데! 선임들의 경악이 섞인 비명이 터져나왔다. 거대한 보자기 같은 크리쳐는 힐데를 꽉 움켜쥐듯 감싼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틈없이 꽉 잡힌 탓에 쳐내기도 힘든 건지, 힐데베르트에게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저러다 질식해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지체없이 그것에게 달려들었다. 번뜩이는 창의 날 끝으로 천을 주욱 찢어낸 리카르도가 급히 힐데를 살폈다. 동시에 힐데베르트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기울어진 몸을 급히 잡아 챈 리카르도의 눈이 커졌다.

“힐데베르트!”

다급한 선임의 부름에도 이미 의식을 잃은 듯한 힐데베르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천자락처럼 생긴 크리쳐의 샘플은 연구동으로, 힐데베르트는 의료동으로 각각 보내졌다. 윤은 당장에 힐데베르트가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 확인한 채, 처음보는 크리쳐의 연구를 위해 연구동으로 빠졌다. 갑자기 크리쳐에게 공격당한 힐데베르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빠른 연구는 중요했다. 함께 임무를 나갔던 아미와 릭은 하얀 복도를 연신 서성이며 새뮤얼의 진찰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소란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힐데베르트의 병실 안. 무언가 우당탕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 힐데베르트의 것이 분명한. 그것을 자각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병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 하얀 병원복을 입은 힐데베르트의 날카로운 시선은 새뮤얼과 간호사, 그리고 막 문을 열고 들이닥친 두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힐데베르트의 손에 들린 볼펜을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그의 금안의 눈동자로 시선을 옮겼다. 사나운 기세로 그것을 숨기고 있는 듯 했으나, 리카르도의 예리한 녹안의 눈동자는 그 안에서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극렬한 공포감을 읽어냈다. 공포감이라고? 힐데베르트가 자신에게 쩔쩔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피부에 와닿을 정도의 공포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미와 새뮤얼,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앞에서, 저런 공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새뮤얼 역시 곤란한 낯으로 양 손을 든 채 힐데베르트가 쥔 볼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평소엔 필기구에 불과한 물품. 하지만 저런 물건은 누가 쥐느냐에 따라 무기로 충분히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쥔 인물은 그것을 무기로 쓸 줄 알만큼 유능한 이였다. 공기가 바짝 얼어붙는 것을 느낀 아미 역시 눈만 크게 뜬 채로 힐데베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이 살얼음 판 같은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다. 힐데베르트의 흥분한 듯한 거친 숨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몰아내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처럼 긴장감이 극에 달해갈 즈음, 힐데베르트의 입이 열렸다.

⌜řižem'ě……!⌟

문제는 그게 알아들을 수 없다는 언어라는 것. 방 안에 있는 이들의 얼굴에 곤란한 낯이 스쳐지나갔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곳의 언어가 맞다면, 지금 이 자리엔 힐데베르트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이가 없다. 윤이 있었다면 적어도 저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을 텐데. 그와 함께 지내는 동족들이 옆에 있기라도 했다면…….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걸까, 조급한 걸음 소리와 함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병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병실 문이 왜 열려있는지, 의문을 표할 틈도 없이, 마치 힐데베르트와 대치하고 있는 듯한 선임들과 새뮤얼의 모습에 벌어지려던 카이로스의 입이 도로 다물렸다. 힐데베르트의 날카로운 금안이 막 등장한 카이로스에게로 향했다.

⌜넌 또 누구지?⌟

힐데베르트의 물음에 주홍빛 눈동자가 크게 띄였다. 농담이라면 질이 나빴으나 힐데베르트가 그런 농담을 던질 이가 아닌 것을 잘 알았으므로, 카이로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온 몸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는 힐데베르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카이로스가 천천히 걸음을 더 안쪽으로 옮겼다. 그 모습은 답지않게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마물을 눈 앞에 둔 사람처럼, 그의 경계심을 더 높히지 않도록 애쓰는 기색이었다.

⌜힐데, 펜을 내려놓고 잠시 이야기를 하는 건 어때?⌟

⌜……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네가 누구냐고 묻는 말이 안 들렸나보지?⌟

카이로스의 제안에도 도저히 그 날카로운 기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잠깐 사이에도 탈출구를 찾기 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 이 상태의 힐데베르트를 놓쳤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몰랐으므로, 덩달아 그들의 긴장감도 함께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기색을 느낀 힐데베르트 역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악순환이네……. 리카르도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자네를 위험하게 만들 생각이 없어.⌟

카이로스의 말에 힐데베르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그가 짓던 다정한 웃음과는 아주 동떨어진, 날카로운 웃음. 힐데베르트가 손에 쥔 펜을 고쳐쥐며 낮게 으르렁 댔다.

⌜내가 너의 무엇을 믿고.⌟

냉랭하기 그지없는 어투. 힐데베르트의 기억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신뢰감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는 차가운 말을 듣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힐데베르트를 설득해 저 위험한 물건을 건네받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카이로스는 빠르게 계획을 수정했다.

⌜좋아,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군. 그럼 이 자리에 서서 자네와 대화하는 건 허락해주겠지?⌟

산뜻한 반응에 힐데베르트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달싹였다. 퍽 괴이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에 카이로스는 하마터면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예 병실의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카이로스는 가만히 선 채로 상황을 살피는 선임들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힐데베르트를 바라보았다. 힐데베르트는 여전히 펜을 제 무기마냥 꾹 쥔 채 카이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임들에게 향해있던 지금 이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동족에게 쏠려있다.

⌜먼저 궁금한 걸 물어봐도 좋아.⌟

⌜…….⌟

선뜻 건네진 제안에 힐데베르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이로스가 건넬 대답을 어떻게 믿느냐고 항의하는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질문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들이 아는 힐데베르트보다 더 어리숙해보였다. 펜을 고쳐쥔 힐데베르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여긴, …… 어디지?⌟

⌜음, 기본적인 질문이군. 이곳은 병동이야.⌟

⌜…… 병동?⌟

내가 왜 그런 곳에 있지? 힐데베르트의 표정에 생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카이로스의 대답을 곱씹는 듯 했다. 자신이 가진 기억과 대조해보고 있는 것일까? 그 틈을 노려 이번엔 카이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 마을을, 빠져나와서…….⌟

⌜마을?⌟

⌜그래, 마을. 나를 가두고, …… 아니, 난 너한테 질문하라고 한 적 없어!⌟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건지 별안간 힐데가 목소리를 높렸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던 선임들의 눈동자가 커다래지며 카이로스에게 시선이 몰렸다. 선임들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던 카이로스의 태양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흘러나온 것은 제국어가 아닌 공용어였다.

“아무래도, 힐데의 기억이 꽤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 얼마나?”

선임의 물음에 카이로스가 곤란한 웃음을 띄웠다.

“200년 정도.”

턱, 새뮤얼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덮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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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지면 끊는 버릇이 있는 편. 다음을 가져올지 안 가져올지 각을 재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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