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 갬블
오늘은 ‘갬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아쉽게도 도박이나 게임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사비나에게 버려지고 빛바래서 이젠 아무도 모르는 것. 사비나 갬블의 이야기다.
사비나 갬블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박중독에 알코올중독, 아동학대라는 화려한 전적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는 이야기. 그러니 이번에는 한단계 앞으로 나아가보자.
사비나 갬블의 학창시절은 꽤나 평범하고 평화로웠다. 그 누구도 사비나 갬블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 치수보다도 더 헐렁한 것 같은 셔츠와 조끼, 촌스럽게 무릎 아래로 내려온 치마나 관리가 되긴 한건지 부스스한 머리따위는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언제나 혼자인 사비나 갬블을 보는 아이들은 전부 비슷한 생각이었다.
‘나 하나쯤 말 걸지 않는다고 무슨 일 생기겠어?’
‘이건 왕따같은게 아니야. 그냥 친구하기 좀 그런거지…’
해서 사비나 갬블은 친구 하나 없이 지냈지만, 모순적이게도 당시 사비나 갬블은 그런 학교를 꽤 좋아했다. 이곳에는 소리지르는 어머니도, 나몰라라하는 아버지도 없었다. 제게 손찌검하는 무시무시한 손도 없고, 저를 귀찮게하는 사람도 없다. 사비나 갬블은 이 평화를 좋아했다. 다른 아이들이 저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있는 것은 진즉 알고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저들의 말 중 틀린 사실은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나? 왕따라고 하기엔 제게 오는 괴롭힘 같은 것이 없었고, 저를 혼자 내버려두는 것은 오히려 사비나 갬블이 바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서의 6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언제나 즐거운 것은 빨리 사라지는 법이지. 사비나 갬블은 중학교 건물을 보며 한숨쉬었다. 새로운 건물, 새로운 교실이나 새로운 선생님이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학생들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익숙한 이들이 대부분일테니까.
여기서 사비나 갬블은 아주 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된다는 것은, 사춘기가 온다는 것은 어마무시하게 귀찮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사비나 갬블은 배정된 교실로 들어가기 전 교장실에 먼저 들어갔다. 이 학교의 교장은 매우 친절하고 푸근한 사람이라 사비나 갬블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이야기 했다. 사정이 있어 중학교 교복을 준비하지 못했다지? 내가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말해둘테니 걱정말고 지금처럼 입으면 된다. 마침 품이 넉넉하구나!”
그렇게 말한 교장은 한 치수정도 큰 교복을 보며 사람좋게 웃었다. 사비나 갬블은 그것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올지 모르고 있었다.
교장과 이야기를 끝마친 사비나 갬블은 복도에 위치한 캐비닛에 새 책들을 넣기 위해 쭈그려 앉는다.
“야! 너 뭐야? 초등학생이 왜 여기에 들어와?”
누가 보아도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아이가 한껏 미간을 구기며 내려다본다. 사비나 갬블은 그에 겁먹지 않고 아이를 흘겨본다.
“중학생 맞아. 아직 교복이 없어서 그래. 교장선생님이 허락하셨어.”
그래, 모든 일의 원흉은 아마 여기서 시작되었다. 사비나 갬블은 자신의 가정환경에 큰 유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밝히거나 들키는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 사비나 갬블은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푸하하하!! 중학교 교복이 없다고? 왜? 설마 너 돈이 없어서?? 너 그럼 거지야?”
사비나 갬블이 한숨을 쉬며 캐비닛으로 등을 돌린다. 기껏 놀린 상대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게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아이는 사비나의 조끼를 확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당겨진 힘에 제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들고있던 책이 우르르 쏟아지니 신경도 쓰지 않던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모이기 시작했다.
“뭐야? 초등학생?”
“어, 나 쟤 알아. 작년에 나랑 같은 반이었는데…”
“근데 왜 교복이 초등학교 교복이야?”
“이름이 뭐야?”
“몰라, 이야기 해본 적 없어. 파티도 전부 거절하더라고.”
분명 소란스러운 학교인데도 어떻게 저런 말만 쏙쏙 들리는지. 사비나 갬블은 아무렇지 않은 체 하며 바닥에 떨어뜨린 책들을 줍기 시작했다. 심술궂은 아이의 발에 밟힌 한 권을 제외하고.
“야, 거지답게 구걸해봐! 그럼 너네 엄마 아빠가 못 사준 교복 내가 사줄테니까!”
이건 사비나 갬블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모여든 관중들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보라,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는 이들을.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말에 살을 붙이며 전달하는 이들을…
사비나 갬블은 결국 발 밑에 있는 책을 포기하고 캐비닛을 열었다. 빙 둘러싼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차곡차곡 정리하는건 꽤 색다른 느낌을 주었었나. 그때까지도 사비나 갬블의 머릿속에는 단 한가지의 의문이 있었다. 6년동안 잘만하던 무시과 무관심을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 탄식처럼 짧은 웃음을 흘린 사비나 갬블이 캐비닛의 문을 닫으려는데 불현듯이 퍽 소리가 났다. 제 등이 욱신거리는 것을 보니 제게서 난 소리인가보다. 그렇게 뒤를 돌아 제 등과 부딪힌 책을 집어들고 그 원인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는 성큼성큼 다가와 사비나 갬블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사비나 갬블의 이름표를 뚫어져라 본 아이가 비릿하게 웃는다.
“거지주제에 말을 안 들어? 넌 편하게 학교다닐 생각하지 마. 사비나 갬블.”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해? 꺼져, 등신같은 새끼야.”
사비나 갬블이 당할 때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던 소란이 뚝 멈춘다. 몇개인지도 모를 눈이 사비나 갬블에게 향하고, 사비나 갬블은 아량곳 하지 않고 잡혀있는 조끼를 팍 당긴다. 늘어나 있었다.
짧게 혀를 찬 사비나 갬블은 그렇게 퇴장했다. 그래서 남아있는 이들이 저를 끝까지 바라본 것, 제게 시비를 건 아이가 얼굴까지 붉어져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사비나 갬블은 급작스럽게 몰려든 피곤함에 미간을 꾹 누를 수 밖에 없었다.
‘갬블은 교복도 못 사는 거지’
‘부모님이 있는건 맞냐?’
‘쿨한 척 하는거 재수없어.’
이 외에도 갖은 욕설과 조롱이 사비나 갬블의 책상에 보란듯이 새겨져 있었다. 교실에는 저보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꽤 있었는데, 이쪽을 힐끗거리며 훔쳐보기만 하는 것이 이미 그들은 알고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비나 갬블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교실을 나섰다. 청소도구함에 뭐라도 있겠지. 똑똑한 사비나 갬블의 예상은 정확했고, 그는 걸레와 락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교실로 돌아오니 그새 다른 아이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 사비나 갬블의 시선을 끄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어제 보았던 심술쟁이였다. 이름이 마크 어쩌구였는데… 중요한게 아니라 기억나지 않았다.
사비나 갬블은 키득거리는 아이들을 지나 제 책상을 벅벅 닦는다. 얼마나 진한걸로 쓴건지 글자들을 흐릿하게 만들 뿐,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했다. 주먹을 꽉 쥐고 두 눈을 꾹 감는다. 이렇게 조금만 있으면 이 분노는 그냥 없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웃음이 터져나온다. 마크. 놈이 입을 틀어막고 큭큭 웃고있었다. 사비나 갬블은 천장을 한 번, 흐릿한 욕설이 난무하는 책상을 한 번 보고 마크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왜, 꼽냐? 이제부터가 시작-”
퍽!
사비나 갬블의 주먹이 정확하게 마크의 안면으로 꽂힌다.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의자에서 꼴사납게 떨어진 마크가 두 눈을 크게 뜬다. 사비나 갬블은 아주 평온한 표정이었다. 사람을 때렸다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그 뒤로는 마크가 일어서거나 욕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교실에서는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작은 비명소리나 중얼거림따위가 들려왔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사비나 갬블은 마크 뭐시기를 후려갈겨야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팼을까. 뒤늦게 불려온 선생님이 ‘세상에!’ 하며 놀랐으나 상처 하나 없는 사비나 갬블의 얼굴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흐어엉, 저, 저 자식이 갑자기 저를, 저를 막 팼어요. 주, 죽는 줄 알았다고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마크가-그래, 피도 어느정도 섞여있었다- 펑펑 울며 선생님에게 항변한다. 이 하나가 부러져 절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가 조금 웃겼던 것 같기도 했다.
“갬블! 어떤 이유에서도 친구를 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사비나 갬블은 지금 이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지 고민해봤다. 마크 어쩌구에게 다가간 것 까지는 얼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 놈을 죽도록 팬 것이 자신이라고? 그 부분만 머릿속에서 도려낸 것 같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기억상실일까. 전혀 아니다. 사비나 갬블은 약간의 상처와 피가 묻어있는 제 손등과 꼴이 우스운 마크를 번갈아본다. 쇠꼬챙이같은 제 체격으로 저 놈을 이겼다고? 대체 어떻게 한거지. 사비나 갬블은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게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친구 아닌데요.”
통탄스러워하는 사비나 갬블은 투덜대는 듯한 어조로 말을 툭 던진다. 맞은 편에서 마크… 콜렙. 콜렙이라고 써져있군. 하여튼 마크 콜렙의 옆에서 여즉 흘러나오는 코피를 닦아주던 선생님은 눈살을 찌푸리고 사비나 갬블을 바라본다. 반성의 기색도 없고 자신은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뻔뻔한 표정. 선생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정의에 불타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콜렙’의 눈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었을까. 사비나 갬블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콜렙의 성을 내걸고 있는 제이슨 콜렙은 현재 제약회사의 대표를 맡고있으니. 대기업이라고 부를만한 회사는 아니지만 일반 중소기업 보다는 규모가 있는 기업. 그런 집안의 외동으로 태어난 남자아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끝없이 받았고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할 수 있었으며 싫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완성된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바로 마크 콜렙 되시겠다. 그 콜렙인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적어도 이빨을 부러뜨리지는 않았을텐데… 이제와선 돌이킬 수 없는 후회였다.
“사비나 갬블!!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이니?! 안되겠다, 부모님께 연락을 넣을테니 오늘 하루는 도서관에서 자습이다. 반성문을 쓰는건 당연하고 방과후에는 콜렙의 부모님께도 연락을 넣어 면담을 할테니!”
그러니 이익을 따지는 어른에게는 마크 콜렙이 황금티켓 쯤으로 보이겠지. 저렇게 소리지르는 것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사비나 갬블은 아주 어릴 적부터 돈과 재산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했으니. 지금도 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사비나 갬블은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고 싶었다. 부모님이 학교로 와서 제 머리채를 잡는다던가, 난동을 부린다거나-사비나 갬블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누굴 공격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 어떻게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하는게 겁을 먹은 모습처럼 보였던걸까. 마크 콜렙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래, 마음대로 웃어라. 하는 마음으로 사비나 갬블은 교무실을 나섰다. 수업을 시작해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복도. 사비나 갬블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이것을 원했을 뿐인데. 적어도 6년동안 만큼은 이럴 수 없겠지. 무거운 한숨을 내쉰 사비나가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향한다.
반성문
1학년 C반 사비나 갬블
마크 콜렙을 두들겨 팼습니다. 다른 이빨도 부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등신같은 마크 콜렙이 더 나대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쓸 말도 없네. 제기랄. 내가 왜 이딴걸 써? 안 써.
사비나 갬블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종이를 구긴다. 대여섯개의 구겨진 종이가 사비나 갬블의 옆으로 쌓이고 있었다. 작게 욕지거리를 뱉고 한 쪽 다리를 달달달 떨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쓸 말이 없었다. 별 버러지같은게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왜 자신만 이 등신같은 반성문을 써야하지? 사비나 갬블은 책상에 쿵 머리를 박은 채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 ……… 튈까?
사비나 갬블의 머릿속에 아주아주 획기적이고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결론이 나왔다. 이대로 학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다려도, 집에 가도 맞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남의 시선이 없는 집에 가서 두들겨 맞자. 맞아서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좆같은 마크 콜렙의 앞에서 그 꼴을 보여주기 싫었다. 차라리 진짜로 죽고말지. 생각을 마친 사비나 갬블은 허둥지둥 구겨진 반성문-이걸 반성문이라고 칭할 수 있나?-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고 살금살금 도서관의 사각으로 숨어들었다. 사서는 사비나 갬블을 보지 못 할 것이다.
가볍게 창문을 뛰어넘은 사비나 갬블은 누구보다 빠르고 조용하게 학교에서 도망쳤다. 깔끔한 건물들이 모여있고 척 보아도 다정한 가족이 살 것 같은 주택가를 지나고 탁한 물이 흐르는 강의 다리를 지나니 깨끗함이나 질서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달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마냥 집까지 달려오니 호흡이 딸려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이 녀석이 누구인가. 사비나 갬블이다. 사비나 갬블은 적당한 골목길에 숨어들어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내고 호흡도 골랐다. 울리던 골이 점차 안정을 찾고 상태가 봐줄만 해지자 제 옷을 탁탁 털고 다시금 발을 옮겼다.
“... 다녀왔어요,”
눅눅하게 습기를 먹은 바닥재가 사비나 갬블의 발을 붙잡는다. 거실에서 술병을 껴안고 세상 떠나가라 코를 고는 아버지는 옆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엌과 밖의 창고까지 뒤졌는데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사비나 갬블은 오늘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싶을만큼 기뻤다. 잘만 하면 최고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사비나 갬블은 부엌에서 날이 잘 듣지 않는 가위를 챙겼다. 하필 전화 선이 아버지의 머리맡에 내려와 있었지만, 한 두번쯤 건드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숨을 죽이고 엉금엉금 기어간 사비나 갬블이 낡은 가위로 전화선을 자른다. 잘 듣지 않아 깔끔하게 잘리지 않는 전화선은 숨어든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사각거렸을까. 사비나 갬블은 지저분하게 전화선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소리없이 환호한 사비나 갬블이 사뿐사뿐 가위를 돌려놓고 들어온 것 만큼이나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이제 대충 산책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가면 된다. 복잡한 달동네의 골목을 여기저기 쏘다니며 흥얼거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었다. 벌써 가을의 끝물이라니. 그때문에 저녁시간만 되어도 지금처럼 해가 금세 떨어지곤 했다. 날이 추워지면 감기든 뭐든 걸릴테니 집 근처에서 떠돌던 사비나 갬블은 빠르게 집에 도착한다. 어릴 적부터 싹수가 범상치 않았다.
“쥐가 물어뜯은거라니까!!!”
“쥐가 대체 어디서 들어오는데??? 갉아먹어도 하필 전화선을 갉아먹은게 쥐새끼야?!?! 당신이 한거지? 나한테 전화오는거 막으려고. 그렇지???”
문고리를 잡자마자 들려오는 호통에 사비나 갬블은 펄쩍 뛰어오를뻔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역시 자신은 천재라며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리는 문의 낡은 경첩이 음산한 소리를 낸다.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리는 아버지와 화장이 다 지워지지도 않은 어머니가 마주보며 대치중이었다. 두 쌍의 시선이 벼락처럼 사비나 갬블에게 꽂힌다.
뭐… 간단히 말하면, 사비나 갬블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분노로 눈이 돌아간 부모님은 사비나 갬블에게 화살을 돌렸다. 집에서 뭘 하면 쥐새끼가 돌아다니는지, 학교가 끝난지 한참일텐데 왜 이제 들어오는지, 그 덕분에 아버지가 굶었다느니 언제까지 일하지 않고 놀건지 같은 헛소리를 내뱉어대며 사비나 갬블을 닥달했다. 한가지 슬쩍 말해주자면, 이 당시 사비나 갬블은 13살이었다. 갓 중학교를 입학한 13살.
그렇게 다음 날. 사비나 갬블은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학교에 도착했다. 언제나 얼굴만큼은 피하는 자비로움이 너무나도 고마워 엎드려 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분명 한국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제 처지가 꼭 그 말에 맞아들어가는 것 같았다. 좆같은 집, 좆같은 가족, 좆같은 학교랑 개버러지 마크 콜렙!
입 안 살을 씹으며 저주란 저주는 전부 퍼부으며 교실로 들어선다. 사비나 갬블이 자신의 자리에 앉기도 전, 노기가 어린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운다.
“갬블. 지금 당장 교무실로 따라와.”
사비나 갬블은 숨길 의지도 없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정말 산 넘어 산이다. 부모님께 처맞는걸 제대로 넘지도 못했는데. 이건 넘길 수 있을까, 없을까.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교무실까지 느리게 걷는다. 교무실에는 사비나 갬블의 담임선생님과 체육선생님 뿐이었다. 다른 분들은 전부 조례중이겠지. 사비나 갬블은 담임선생님의 앞에 선다. 선생님은 앉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사비나 갬블을 노려본다.
“갬블. 어제 어딜 갔었지?”
“집에 갔어요.”
“하! 변명할 생각도 없는거니? 교사 일 하면서 너같은 문제아는 처음본다. 중학교로 올라온 첫 날에 동급생을 죽도록 패는 사람이 또 어디있겠어?”
“글쎄요… 첫 날에 학생 하나를 정해서 집단으로 괴롭히는 사람들은 많이 보셨나봐요.”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된다. 그 많은 학생들이 제 우스꽝스러운 순간을 보았음에도 그 누구하나 입 뻥긋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대단한 단합력 납셨군.
“모르겠다면 제 책상을 확인해보세요. 콜렙의 주도로 제 책상이 욕으로 꽉 차게 되었거든요.”
“... 그만! 그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텐데. 그냥 친구끼리 장난친 것에 이렇게 반응한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니??”
“장난이요? 그게 장난이면 저도 장난이라고 봐주셔야죠. 제게 선 넘는 욕을 한 학생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두들겨 팬 것은 아니니까 제 쪽이 훨씬 손해보는 일이네요.”
“뭐… 어, 어디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답을 해! 집에서 갬블 네 태도도 알만하다. 부모님 말이라곤 하나도 듣지 않고 네 생각만 하겠지. 부모님께 죄송하지도 않아?!!”
“전혀요.”
태연자약한 사비나 갬블이 무심한 얼굴로 선생님을 내려다본다. 한낱 학생이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던걸까.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사비나 갬블은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이 선생이 제 분에 못 이겨 제 뺨을 갈기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웃었을텐데. 아쉽기도 하지…
짝! 살과 살이 마찰되는 소리에 멀리 있던 체육선생님이 달려와 둘의 거리를 벌린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학생, 괜찮아?”
“제 학생이에요. 이건 학생이 잘못했으니 선생으로써 정당한 체벌이고요! 선생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갬블!!! 넌 상담실에 가있어라. 부모님께 내가 전화할테니!”
“두 분 다 바쁘신데요.”
그에 선생은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체육선생님의 손을 거칠게 떼어낸 선생이 사비나 갬블의 멱살을 잡아 가까이한다. 이쯤에서 사비나 갬블은 왜 제 멱살이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생각해봤다. 상황과 맞지도 않는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선생이 속삭인다.
“네 부모님이 바쁘다고? 참나… 그렇게 바쁘면서 왜 자식의 중학교 교복조차 마련해주지 않는건데? 콜렙처럼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별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자신만만하지? 콜렙이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면 넌 끝이야. 끝이라고.”
보통 학생이었다면 이런 협박에 지레 겁먹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걸 들은 사비나 갬블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청해도 너무 멍청해서 하품이 나올뻔 했지만 이 역시 잘 참아냈다. 사비나 갬블은 제 멱살을 잡은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럼 학생을 때린 선생님은 어떤 뒷배가 있나요?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목격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네요. 콜렙이 저를 용서하지 않아봤자 정학 내지 퇴학이겠죠. 절 죽이기야 하겠어요? 마크 콜렙의 아버지가 나선다고 해도 결과는 비슷할걸요. 그런데 선생님은… 참 유감스럽게도 품위유지의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도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봐요…”
사비나의 속삭임에 옷깃을 꽉 잡고있던 선생의 손에 힘이 점점 빠진다. 체육선생님은 이때다 싶어 사비나 갬블의 앞을 막아섰고, 담임이라는 이는 핏발 선 눈으로 사비나 갬블을 노려 볼 뿐이었다.
“학생, 우선 보건실부터 가는게 좋겠다. 같이 가줄까?”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선생님, 체벌은 다 끝났나요?”
그렇지 않아도 속이 뒤집어진 선생은 당장이라도 악을 쓰며 저 영악한 꼬마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조례는 끝났고 곧있으면 선생들과 몇몇의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올 것이었다.
“... … 방과후에 콜렙의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으니 상담실로 와라.”
이를 꽉 깨문 선생은 그리 말하고 교무실을 나갔다. 마크 콜렙의 부모가 저 얄미운 것을 끝장내주리라 믿으며.
짧은 듯 긴 것 같은 시간이 흘러 방과후. 사비나 갬블은 제게 오는 모든 시선에도 꿈쩍않고 뻔뻔하게 수업을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콜렙의 추종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비나 갬블은 그렇게 불렀다-들이 와서 끈질기게 괴롭혔지만 그건 아주 작은 사건조차도 되지 않았다.
‘... … 합의금을 달라고 하면 어쩌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해봤지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 집구석에서 제게 용돈을 줄리는 만무하고, 팔아치울 귀중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부모라는 것들은 돈을 아끼는 법을 몰랐다. 어쩌다가 1달러라도 주우면 도박장으로 달려가겠지. 자기네들 결혼반지마저 진즉 팔아치웠는데 무얼 기대하겠는가?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굴려본들 없는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비나 갬블은 사형대에 올라가는 죄수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하며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답이 없다고 한들 기세에서 밀릴 생각은 없었다. 사비나 갬블에게 남은 것은 자유분방한 입과 뻔뻔함 뿐이었으니. 상담실에는 누가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간 가여운 마크 콜렙과 그의 아버지 제이슨 콜렙, 담임 선생이 먼저 앉아있었다. 사비나 갬블은 남은 의자에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마크 콜렙은 그런 사비나 갬블을 보며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저게 바로 덜떨어진 놈들이 제게 해야하는 태도다. 저 놈은 너무 시건방졌고, 무려 자신을 때렸으니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갬블 양. 마크 콜렙을 갑자기 공격한게 사실인가? 아쉽게도 내가 조금 바쁜 몸이라 거짓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사실이에요.”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는군. 마크는 갬블 양이 때린 이후 앞니가 부러졌고 몸 곳곳이 멍투성이가 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있지. 어떻게 생각하나?”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은 정당화 되지 않는 것을 알고있어요. 아무리 콜렙이 그랬더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콜렙,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저씨께도 사과드릴게요.”
기가 죽은 사비나 갬블이 순순히 사과한다. 정말로 자신의 죄를 뇌우치는 낯이라 되려 마크 콜렙이 당황한다. 이렇게 쉽게 사과한다고?
“그렇게만 들으면 우리 마크가 갬블 양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군.”
“아, 그게… 사실 친구들끼리의 장난이었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아직 초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어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어머니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셨고, 교장선생님도 편의를 봐주셨거든요. 그런데 콜렙이…”
사비나 갬블은 마크 콜렙의 눈치를 살핀다. 힐끗거리는, 조금 처연한 눈빛을 마주한 마크 콜렙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괜찮으니 말해봐라.”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콜렙이 가난한 저희 집을 대신해서 교복을 사주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무리 가난해도 알량한 자존심은 있으니 괜찮다고 했어요. 그런데 콜렙의 친구들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봐요…”
사비나 갬블이 얼굴을 감싸고 훌쩍인다. 마크 콜렙은 제 아버지와 사비나 갬블을 번갈아보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이슨 콜렙은 분명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마크 콜렙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 아들이 먼저 실례한걸 몰랐다. 아저씨가 괜히 네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하다.”
“흑, 아니에요. 제가 콜렙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괜찮았을텐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미안해, 콜렙…”
마무리로 못까지 땅땅 박은 사비나 갬블은 제 눈가를 슥슥 닦는 섬세함까지 보였다. 눈물이라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가와 코 끝은 금방이라도 울 것 처럼 붉어져 있었다.
“아, 아니. 아빠, 아니야! 그런 말 안했어. 정말로!!! 그리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맞았잖아! 쟤 말 믿지마. 아빠 우리 아빠잖아!!”
“조용. 자세한건 집에 가면서 듣자꾸나. 갬블 양, 아들을 대신해 사과하지. 하지만 갬블 양의 말대로 폭력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어.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도록 할테니 걱정말고. 마크도 단단히 혼내마.”
제이슨 콜렙과 마크 콜렙이 떠나자 동석하던 선생은 당황하며 제이슨 콜렙의 뒤를 쫓았다. 사비나 갬블은 마지막까지 코를 훌쩍이는 정성을 보였다. 이것은 제 앞날을 위한 일생일대의 도박. 모가 될 지 도가 될 지 아무도 모르던 도박이었다. 제이슨 콜렙이 꽉 막혔거나 아들 바라기였다면 절대로 먹히지 않았겠지. 이딴 미친 도박을 할 수 있는건 내 부모 탓인가? 이러니 저러니해도 나는 사비나 갬블일테니까.
마크 콜렙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아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는 사비나 갬블은 왠지 사무치게 외로워져서. 모든 일이 잘 풀렸음에도 그것이 큰 위안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어쩐지 옆구리가 더 크게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16살의 무더운 여름날, 사비나 갬블은 책상에 볼을 붙이고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었다. 교실에 남은 학생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7명 정도였을까. 모두 자습을 위해 남은 학생들이었다. 단 한명, 사비나 갬블을 제외하고.
사비나 갬블은 공부고 나발이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집은 학교에서 너무나 멀었고, 밖은 너무나 더웠고, 교실은 무척이나 시원했으니 남아있을 뿐이었다.-아주 조금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마음도 존재했다- 해가 져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깐 졸았던 것인지 교실에는 이제 두명뿐이었다. 바깥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었고, 사비나 갬블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가방을 메었다. 시원한 교실을 뒤에 두고 복도로 나서니 뜨거운 공기가 저를 반겨준다.
빌어먹을. 왜 이동식 에어컨은 없는거지? 분명 방금까지는 시원하니 기분도 좋았건만, 뜨거운 여름 공기를 마주하자 확 기분이 나빠졌다.
“어휴…”
하지만 어떡하나. 사비나 갬블은 돌아가야만했다. 언제 한 번은 밖에서 밤을 지새웠다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기에. 어차피 맞을거지만 죽을 때까지 맞는 것보다 그냥 아픈 수준으로 맞는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비나 갬블은 망가져있었다. 응당 받아야 할 권리를 받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목줄이 잡혀 사는 삶. 하지만 사비나 갬블은 그런 인생밖에 살아온 적이 없어 억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익숙한 달동네, 음침할 정도로 어두운 골목은 사비나 갬블에게 하여금 공포를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못 볼 꼴 다 보며 살았는데 여기서 무얼 더 보고 겁에 질린단 말인가?
사비나 갬블이 익숙한 낡은 집의 문고리를 잡고 당겼다.
“다녀왔습니다.”
정적. 매일 현관 앞에 뻗어있던 아버지가 없다. 술을 사러 나갔나? 어머니는 아직 안 들어왔나. 어쩌면 드물게 둘이 같이 나갔을 수도! 어제까지 돈이니 뭐니 하면서 박터지게 싸운주제에. 그 둘은 종종 치고 박고 싸운 후 명목상 화해를 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사비나 갬블은 기쁜 마음에 히히 웃었다. 둘 다 없는 날이 얼마나 희귀한데! 느긋하게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얼른 신발을 벗고 부엌과 방을 막고있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은 그 속에 있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대롱대롱
흔들흔들
아빠와 엄마가 사이좋게 매달려있다. 왜 천장에 매달려있지? 저러면 아플텐데. 왜 꼼짝않고 있지. 엄마는 종이에 손만 베여도 비명을 지르는데. 사실 별로 아프지 않은건가?
사비나 갬블은 멍하니 둘을 보며 홀린듯이 손을 뻗는다. 매일같이 저를 두들겨 패던 커다란 손은 시릴정도로 차가웠다. 딱딱하게 굳은 손은 더이상 주먹을 쥐지 못할 것 같았다. 한숨같은 숨이 잇새로 흘러나온다. 이어 어머니의 팔을 쓸어내린다. 차갑다. 손톱에 발린 붉은 매니큐어는 여상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뭐지? 사비나 갬블은 아버지의 주머니에 미처 숨지 못한 종이를 발견한다. 천천히 종이를 꺼내어 펼쳐본다.
“하하.”
사비나 갬블은 제 이름은 한 글자도 보이지 않는, 자기연민과 감성팔이가 가득한 유서를 보며 웃어버렸다. 그래, 죽은거구나. 그렇게까지 날 버리고 싶어하더니, 정말 버렸구나. 사비나 갬블은 살풋 웃으며 주머니에 다시 유서를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 달렸다. 빌어먹을 집이 머릿속에서 떠날 때까지. 이 동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아직 학생인 사비나 갬블을 받아준 것은 달동네와 한참 떨어진 어느 성당의 보육원. 귀여운 아이들과 든든한 언니 오빠들이 몇 있는 아주 단란한 장소.
“사비나, 오늘은 일찍 들어올 수 있니? 신부님께서 너희들에게 선물이 있다고 하셔.”
부드럽게 웃는 이 사람은 아가타 수녀님. 16살의 끝물인 사비나 갬블은 더이상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건만, 이 수녀님은 언제나 사비나 갬블을 걱정하며 챙겨주곤 했다.
“잘 모르겠어요. 되도록 일찍 올게요.”
거짓말. 사비나 갬블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뱉어낸다. 사비나 갬블은 부모님이 목을 매달았을 때부터, 그 좆같이 빌어먹을 유서를 읽었을 때부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사비나 갬블은 돈이 필요했다. 아주 많은 돈이.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국 돈때문에 죽었다. 돈이 많고 여유로웠다면 목을 매달지도, 그 이전에 싸우지도,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았을테니까. 마크 콜렙을 봐라. 말을 들어먹지 않아도, 멍청하고 등신같아도 잘 살고있다! 그네들 속사정이야 알 바 아니다. 적어도 배 곯으며 남은 술안주를 집어먹어보지도 않았을테니.
사비나 갬블은 이 삶과 인생이 지긋지긋했지만 죽고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있다. 그렇기에 돈이 필요했다.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니까. 이만큼 데여봤으면 모르는게 더 바보지. 해서 사비나 갬블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했다.
질 나쁜 무리에 들어가 작은 도둑질부터 소매치기까지 훌륭하게 배웠다. 무리의 언니 오빠들은 사비나 갬블을 꽤 좋아했다. 손도 빠르고 도망도 잘 치는데다가 영리하기까지. 잘 구슬리면 저들 손 더럽힐 일 없이 사비나 갬블의 소득을 빼돌릴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다시 돌아온 여름. 그동안 사비나 갬블은 꽤 많은 돈을 모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리되면 제 목은 끔찍하게 늘어나 고통스럽게 죽겠지.
습관처럼 엄지 손톱을 뜯고있는데, 갑자기 제 곁으로 세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퍼뜩 정신을 차린 사비나가 칠판을 확인하니 조별로 함께하는 과제를 내주고 있었다. 젠장.
“다들 안녕! 나랑 친한 애는 없네… 헤헤,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지내자!”
반장인 마리아 화이트가 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비교적 조용한 안나와 제이콥은 마리아 화이트가 조금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사비나 갬블 역시 셋 다 안면만 튼 사이라 구태여 친절히 인사하지 않았다.
“그럼 역할 분담을 먼저 할까? 자료 수집에 한 명이, 자료 정리와 프레젠테이션에 두 명이, 발표는 남은 한 명이 하는게 좋을 것같아.”
“어어… 그럼 자료 수집은 내가 해도 괜찮을까?”
안나가 소심하게 손을 들고 묻는다. 사비나 갬블은 남은 자리에 들어가 대충 할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예상 밖의 인물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음. 사비나, 어때?”
“... 나?”
마리아 화이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가 어떠냐는거지? 저를 은근슬쩍 조장으로 밀어붙일 생각인가 싶어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마리아 화이트가 가까이 붙어 속삭인다.
“자료 수집이 그나마 편하고 쉽거든. 사비나 너는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테니까… 하는 척만 해도 좋아. 내가 도와줄게.”
사비나 갬블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게 맞는지 생각해봤다. 사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명백한 동정. 마리아 화이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 어려있었다. 사비나 갬블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이전-마크 콜렙 말이다-의 경험을 교훈삼아 잘 참아냈다.
그렇게 사비나 갬블은 자료 수집을, 안나와 제이콥이 프레젠테이션을, 마리아 화이트가 발표를 맡았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먼저 이야기 하고 있어.”
사비나 갬블이 자리를 뜨고, 눈치를 보던 안나가 조용히 묻는다.
“저, 저기… 마리아. 왜 자료 수집에 갬블을 넣었는지 물어봐, 봐도 될까? 갬블은 그게… 조금 비협조적이잖아. 만약, 만약에 자료를 구하지 않으면…”
“안나 네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알아. 물론 사비나는 대부분 혼자고 수업도 잘 안 듣는 것 같지만, 나는 알아. 사비나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충분히 나아질거야. 분명히!”
“어… 하지만 우린 사비나의 부모님이 아닌걸. 이제 우, 우린 17살이잖아. 어린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그에 마리아 화이트는 과장되게 놀란 얼굴이 된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는듯 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쉿! 안나, 사비나가 있을 때엔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줘. 사비나의 부모님은 작년에 돌아가셨거든. 그것도 이맘때에 자살으로. 나는 사비나가 너무 가여워. 사랑하는 부모님이 날 두고 세상을 떠난다면 난 참을 수 없을 것 같거든. 생각해봐, 사비나는 한창 학교 생활을 즐길 나이에 우울하고 축 처져있잖아. 난 사비나가 밝아질 수 있다고 믿어.”
마리아 화이트가 씩씩한 얼굴로 주먹을 꼭 쥐어보인다. 이 때 제이콥은 당황스러운 낯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비나 갬블이 보육원에 산다느니 부모님이 어떻게 됐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지만, 그게 놀라운 이유는 아니었다. 왜 남의 일을 멋대로 이야기하지? 제이콥의 얼굴에 떡하니 쓰여있었지만 마리아 화이트는 그것을 보지 못한 눈치였다. … 정말 ‘못’ 본 것이 맞을까?
“와아… 마, 마리아 너는, 그러니까… 굉장하다. 난 너처럼 치, 친절하지 못 할거야. 나도 도울 수 있으면, 나도 돕고싶어.”
어색하게 웃는 안나를 보며 마리아 화이트는 고맙다며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리고 때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사비나 갬블이 자리로 돌아온다. 어쩐지 돌아오니 뭔 이상한 눈빛을 받은 것 같은데... 사비나 갬블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시작된 조별과제는 마냥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사비나 갬블이 잘못된 자료를 가져온 적도 있었고, 안나가 정리에 서툴러 제이콥이 전부 다시 해야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리아 화이트의 부재까지. 곧 다가올 경연대회를 준비한다나 뭐라나. 어차피 발표는 다음 주니 상관 없고. 사비나 갬블은 그리 생각한 생각이나 하며 연필을 돌린다. 시끄럽게 종알대는 녀석이 빠지니 꽤 평화롭고 좋았던 것 같다.
얼추 완성이 보여 설렁설렁 과제를 하고, 언제나처럼 책상에 엎드린 사비나 갬블은 눈을 감았다. 점심시간은 사비나 갬블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차피 급식비를 낼 생각도, 뭘 먹을 생각도 없으니 오로지 휴식만을 취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비나는 느리게 눈을 떠 두어번 깜빡인다. 아직 교실에 아무도 없고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이제 막 점심을 다 먹은 것 같았다. 수업 시간까지 잘 생각인 사비나 갬블은 아무래도 좋아 다시 얼굴을 묻었다.
“야, 마리아! 너 그… 뭐더라? 아! 갬블이랑 같이 과제한다며?”
모르는 남학생의 목소리가 사비나 갬블의 귀를 파고든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애들한테 들었지! 야, 조심해. 걔 중학교에서 완전 미친 놈이었어! 콜렙이 떡이되도록 처맞았다고.”
장난스러운 어투에 주변 이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사비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잠을 청했다.
“거짓말치지마! 사비나는 좋은 아이야. 과제 참여도 성실하게 하는걸?”
“마리아는 너무 착한 것 같아. 욕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갬블 걔는 진짜 미친거 맞아. 우리 수학선생님은 진짜 다정하셨거든. 갬블만 빼고. 듣기로는 선생님을 협박했다나봐.”
역사 왜곡이 이렇게 생겨나는 거였군. 사비나 갬블은 미간을 구기고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 마리아 화이트가 열심히 자신을 변호하는데도 어째서인지 감동은 개뿔, 기쁘지도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정말 자신이 미쳐버려서 그럴 지도 몰랐다.
“다들 그러지마. 사비나가 불쌍하지도 않아?”
사비나 갬블의 눈이 뜨인다.
“사비나는 충분히 착하고 밝아질 수 있는 아이야! 비록 곁에서 사비나를 사랑해주는 가족은 없지만… 꼭 가족만 사랑을 줄 수 있는건 아니잖아? 친구들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해. 나랑 친구가 되면 더 좋고!”
뿌듯하게 웃는 마리아 화이트를 보며 그 무리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곤 마리아 화이트가 너무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꼴을 보니 사비나 갬블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가족이 없다니? 걔 부모님은?”
“쉿!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크게 말하지마. 그게, 사비나의 엄마랑 아빠가…”
마리아 화이트가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무리들에게 속삭인다. 왠지 말을 시작하기도 전 놀란 얼굴이 된 무리의 시선은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제 뒤에 있는 것을 보는듯 한…
“내 엄마랑 아빠가 뭐?”
마리아 화이트가 천천히 뒤를 돈다. 처음보는 사비나 갬블의 웃는 얼굴. 하지만 지나가는 3살 꼬마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사비나 갬블은 웃는 것이 아님을.
퍽!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마리아 화이트의 멱살을 잡아 끌며 제 머리로 그의 인중을 들이박는다. 급소를 노릴 생각은 없었다. 사비나 갬블의 키가 작은 탓에 박치기를 해도 아래를 칠 수 밖에 없었는데, 우연스럽게도 그곳이 급소였을 뿐이었다.
“꺄악!!!”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다른 이들은 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사비나 갬블은 그들이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휘청거리는 마리아 화이트의 턱에 주먹을 꽂는다. 이번건 급소를 노린 것이 맞았다. 주먹질은 마크 콜렙 사건이 처음이었고, 이후 한 번도 싸우거나 패지 않았기에 사비나의 손 역시 미친듯이 아팠다. 그럼에도 눈 앞의 상대를 어떻게든 조져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차린 학생 하나가 사비나를 끌어당긴 덕분에 마리아 화이트의 이가 깨지거나 빠지는 일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갬블 학생.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보호자를 불러와야겠다.”
교장실 옆의 면담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있다. 엉망이 된 머리, 양 코를 막고있는 휴지와 붉어진 턱과 인중까지. 꼴이 말이 아닌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 였다. 사비나 갬블은 이번에도 그 일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제 옆에서 끝없이 눈물을 흘려대는 마리아 화이트를 바라본다. 시끄러웠다.
“그만 처 울어. 불쌍하다며? 가여운 거지새끼가 한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래.”
“흑, 나, 나는 너랑 친해지고 싶었던 것 뿐인데. 흐어엉…”
그리 말하며 서럽게 우는 마리아 화이트를 본다. 사비나 갬블의 눈빛은 경멸에 가까웠다.
“그래, 떠돌이 동물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고기를 던져줘야지. 바닥에 떨어져도 좋다고 집어먹으니까. 그렇지?”
마리아 화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며 모두에게 사랑받는데. 소극적인 외톨이도, 잘 나가는 럭비부의 부원도 저를 선망했다. 단 한 명, 사비나 갬블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처음엔 저를 질투해서 싫어하는 줄 알았다. 선망의 대상이란 그런 것이니까.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듯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사비나 갬블은 정말로 제게 관심이 없었다.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마리아 화이트는 길가의 개미를 보는것만도 못한 그 눈이 싫었다.
그래서 마리아 화이트는 사비나 갬블에 대해 수소문했다. 몇 년동안이나 친한 사람이 없어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소득은 의외의 곳에서 얻을 수 있었다.
봄의 끝물인 어느 날. 선생님은 마리아 화이트를 불러 이야기한다.
“마리아. 사비나라는 아이 있잖니… 사비나는 작년에 힘든 일이 있었거든. 마리아가 반장이니 잘 좀 챙겨줬으면 해서.”
마리아 화이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참아내었다.
“무슨 일인데요?”
선생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마리아 화이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다.
“그게… 사비나의 부모님은 작년에 돌아가셨거든. 듣기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나봐. 그 때문에 사비나가 많이 힘들어 했다고 중등부 선생님께 들었어. 마리아 네가 반장이라서 이렇게 부탁을 하지만 무리하지 않아도 좋아.”
“...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해볼게요. 같은 반 학생을 다독이는 것도 반장이 할 일인걸요.”
선생님은 마주 웃으며 마리아만 믿겠노라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온 마리아 화이트는 쾌재를 부를 뻔 했다. 그래, 그래야지! 사비나 갬블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이였다. 부모님을 여의고 우울과 절망에 빠진 불쌍한 아이! 마리아 화이트는 그런 아이를 오로지 자신만이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 제게 구원받아 저만을 졸졸 쫓아다닐 사비나 갬블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축 처지고 기운없던 ‘그’ 사비나 갬블이 이런 짓을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도 손대지 않은 제게 감히 폭력을 휘두르다니. 어쩌면 퇴학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사비나 갬블은 평온한 얼굴로 제게 욕지거리를 뱉고있었다.
“잘난 주둥이는 친구들 앞에서만 나불댈 수 있나봐. 네 친구들을 불러줄까?”
사비나 갬블이 상냥한 어조로 묻지만 마리아 화이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우며 또 공포스러웠다. 모든걸 다 잃은 가여운 사비나 갬블. 동시에 잃을 것이 없는 사비나 갬블. 마리아 화이트는 어째서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는지를 오늘 깨달았다.
“네가 입을 다무니 정말 좋다. 이전부터 다물고 있었으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사비나 갬블은 교장실에서 교장과 선생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슬쩍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어디가…?”
“답답해서 좀 걸을거야. 너도 나랑 같은 방에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잖아.”
방긋 웃는 사비나 갬블의 말에 마리아 화이트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비나 갬블은 가벼운 걸음으로 면담실을 나서서 두 번 다시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수녀님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학교에 찾아와 마리아 화이트와 화이트 부부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 화이트 부부는 실종된 학생의 보호자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어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 수녀님은 몇번이나 학교를 왕래했지만 사비나 갬블의 실종에 대한 흔적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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