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구치

사와구치 에프터 로그 모음

1. 버릇

“어떡하죠… 로망 선배… 저 때문에…”

치호의 목소리는 심히 떨리고 있었다. 로망은 다급히 원장님께 양해를 구해 반차를 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치호는 더듬더듬 똑바로 상황을 전달했다. 첫째 릿카가 열이 너무 심해 급하게 병원으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아침부터 미약하게 기운 없어 보이던 걸 해열제만 먹여두고 재웠더니 어느새 열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럴거면 그냥 자신도 일을 나가지 말걸. 후회는 로망에도 짙어져 왔다. 원래도 잘 울지 않는 아이다. 더 세심하게 살펴봤어야 했는데…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소아과 병동으로 뛰어갔다. 대기실의 치호가 둘째 리리나의 훌쩍거림을 달래주고 있었다. 눈가가 빨개진 것이 그녀 자신도 한바탕 운 것 같았다. 한숨을 쉰 로망이 애써 웃으며 리리나를 안아 주었다.

“릿카는?”

“지금… 약을 먹고 잠깐 잠들어서…”

“심각한 거래?”

치호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제야 로망은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힘이 빠진 다리를 쉬게 해주고자 치호 옆에 나란히 걸터앉자 치호가 미약하게 어깨를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냥 가벼운, 감기… 감기랬어요.”

“열은?”

“이제 좀 떨어졌어요. 유치원에 안 보내고 해열제를 먹인 게 도움이 됐나 봐요.”

“그럼, 치호 네가 잘한 거네.”

로망의 말에 치호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제가, 제가 미리 알아챘더라면… 어제부터 밥도 잘 못 먹고,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밖에 나갈 때 마스크를 하고 보낼걸, 아, 아니면 역시 청소를 더 깨끗이 했어야…”

“치호.”

“어떡하죠, 선배… 저, 저 때문에… 릿카가…”

또다시 목소리 끝에 물기가 서려든다. 시선을 옮기면 손까지 모아 쥐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 로망은 치호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의 마음도 속절없이 무너짐을 느낀다. 마치 모래로 만든 성이 파도 한 번에 스러지는 것처럼. 로망은 눈을 감았다. 짧게 심호흡, 치호의 버릇이 또 나오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자신은 단단해야만 했다. 그녀가 기댈 수 있을 만큼.

“치호.”

천천히 이름을 부르니 치호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로망을 바라보았다. 가장 일찍 빛나는 별만큼 반짝이는 노란 두 눈동자. 그 빛이 지금은 자책으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바보 같긴. 로망은 치호의 옛날 선배처럼 주먹을 들어 꿀밤을 때리진 않는다. 대신 툭, 작게 이마를 맞대었다.

“네 잘못 아니야.”

“그치만…”

“선배가 얘기하면 일단 좀 들어!”

히끅! 로망의 외침에 치호가 깜짝 놀라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 또 나쁜 버릇이… 반성하듯 로망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다시 뜬 붉은 눈동자에서 치호는 익숙한 감정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함과 속상함.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자신과 딸들을 향한 깊은 애정.

“나도 릿카의 상태를 잘 보지 못했어. 걔는… 널 닮아서 자신이 힘든 건 잘 티를 안 내니까. 그리고… “

로망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잘 참아왔던 탓인가 어이없게도 지금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조심스레 자신의 손등에 손을 겹치는 온기에 로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로망이 치호에게 언제나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내 약한 모습을 금방 알아차려 주는 것도 너라서…

그래서 자꾸만 기대고 싶어져.

“나도… 걱정 많이 했어. 내 탓 같아서. 요새 바빠서 육아를 너에게 맡기다시피 했으니까… 내 탓도 많아. 아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탓이야.”

“선배…”

“하여간에 넌 잘해오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나쁜 버릇이다. 자꾸만 약해지는 것은. 로망이 고개를 물리자 이번에는 치호 쪽에서 툭, 이마를 어깨에 기대어 왔다.

“응. 알겠어요.”

“…일단 릿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자.”

“네.”

그렇지만 너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어쩌면 부부가 되어 가족을 이루는 건 그 나쁜 버릇에 의지하게 되는 일일지도 모르지.

“너 또 나를 선배라고 불렀던 거 알아?”

“에? 제, 제가요?”

무자각이었나. 동그랗게 두 눈을 뜨고 놀라는 모습이 귀여워 로망은 피식 웃었다.

“어. 이젠 이름으로 불러 준다면서…”

“아, 아… 죄송해요.”

“아니야. 나 사실은…”

네가 날 선배라고 불러주는 게 제법 마음에 들어.

어느새 무릎 위에서 잠든 리리나의 갈색 머리칼을 로망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치호를 닮아서, 따듯하고 상냥한 색이야. 그런 생각을 말로 꺼내진 않았음에도 치호는 로망의 심중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녀 또한 아이들의 붉은 눈동자를 다정하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로망은 지금 어깨와 무릎 위의 무게를 평생 짊어질 수도 있었다.

2. 꽃말

그 애는 언제나 쓸데없는 질문이 많았다. 사, 사와구치는 원래 식물을 좋아해? 어-얼마나 빠, 빨리 자라게 할 수 있어? 그, 그 그럼 꽃…같은 거, 것두 피게 할 수 있어? 왜, 왜 화를 내… 훈련하는 내내 그런 비효율적인 질문에 답을 해줘야 했고, 그럴수록 뒤처지는 그 애를 내가 챙겨야 했으니 매번 귀찮았다.

“식물 같은 거 좋아하지 않아. 그냥 능력일 뿐이야.”

“나도 몰라! 그런 건 연구부가 알아서 조사하는 거라고.”

“하아? 꽃? … 할 수야 있지만 싸울 때는 비효율적이라 별로야.”

“화낸 적 없거든? 아오! 거기서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자! 내 손 잡고.”

성가시고 귀찮았다. 매번 쪼르르 내 뒤를 쫓아오는 것도, 혼자 있는 나에게 끈덕지게 말을 걸어주던 것도, 자신은 능력 땜에 꽃을 잘 볼 수가 없으니 이번엔 이걸 피워내 달라고 쓸데없이 조르는 것도.

“이, 있잖아… 사와구치는, 그… 내가, 히- 히어로에… 걸, 맞는다고 생각해?”

귀찮았을 뿐이야. 싫은 게 아니었어.

“글쎄. 히어로 같은 거야 그냥…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후회해. 그때 내가 네 얼굴을 잘 봤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사와구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자신이 나나세 후부키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늘 붙어다니싶이 한 동기였다. 훈련도 같이 나가고, 서로의 목숨을 구한 적도 더러 있었다. 아니, 그런 경험적인 일들이 아니더라도… 사와구치는 나나세를 제법 신경 썼다. 제 딴엔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고, 나나세 또한 그렇게 여기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여기는 포인트 D 코드네임 그레이스, 듣고 있나?”

“듣고 있습니다.”

“나나세 후부키는 옥상에 있다. 지금 S 포인트에서 후방지원이 언제나 대기 중이다.”

“…네.”

“규칙은 기억하겠지?”

S급 빌런은 발견 즉시 사살. 예외는 없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지휘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사와구치는 이를 꽉 깨문다. 나나세의 이름으로 벌어진 테러들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참고인으로 데려가도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낮은 침음이 들려온다. 지휘관은 사와구치와 나나세를 포함한 20기의 훈련 지도를 맡았던 사람이었다. 배테랑 지휘관이기 이전에 제자들을 아끼던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심란하지 않을 리 없었다.

“사와구치 양…”

“한번만요 선생님. 제가, 제가…”

그 자식 때려 죽여서라도 정신머리를 돌려 놓을게요.

“바보구나… 사와구치는.”

여전하다면 여전해. 눈꺼풀을 깜박이며 뒷말을 잇던 나나세가 헤- 하고 수줍게 웃었다. 사와구치가 잘 알던 얼굴이었다. 하아- 의지를 다지러 깊은 숨을 내뱉으면 하얀 김이 입밖으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빙판 위에 디딘 손끝이 영하의 온도에 새빨갛게 굳어갔다. 시간은 최대한 끌어봤으나 사와구치와 나나세의 능력은 상성이 나빴다. 한겨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은 거의 없었으니까.

‘초기에 잡았어야 했나…’

“사와구치 마, 말이야… 역시, 지금, 후, 후회하고 있어?”

“… 그렇게 보여?”

“… 아니.”

피식 웃으며 답하니 나나세의 두 눈썹이 아래로 쳐진다. 실망이라도 한 것일까. 이제 와서?

“이, 이제 나도 됐어… 말로 해도 네게 이해받지 모, 못할 바에야… 그냥…”

나나세의 연보라빛 눈의 이채가 날카로워지는 것과 사와구치의 뒤쪽에서 화르륵 불꽃이 튀어 오르는 것은 동시였다. 늦었잖아! 바닥의 얼음들이 녹는것과 동시에 굵은 덩쿨들이 자라나 나나세의 팔과 허리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는 나나세의 팔에 생채기가 난다. 피부 틈새로 들어간 마비독에 힘이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덩쿨로 옮아맨다.

무릎꿇은 나나세의 이마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다. B급인 사와구치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보다 확실한 방법을 늘 지니고 다녔다. S급 빌런은 발견 즉시 사살을 목표. 매일같이 같이 외우던 히어로의 매뉴얼에도 사와구치는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 왜, 왜… 망설여?”

“닥쳐.”

여전히 말이 험하네. 사와구치는 지금 나나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체념인지 여유인지 알 수없는 미소.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자신의 곁을 떠났다. 다시 마주친 모습은 언제나 제 뒤를 졸졸 따라오던 울보 겁쟁이가 아니었다. 무서워서 자기 능력도 항상 제대로 못 펼치던 애가, 지금은 이 차가운 얼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사와구치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와구치 말이야… 혹시-”

“한시 빨리 죽고 싶은가 보지? 말이 많으면 독이 더 퍼지게 될거다.”

“나, 나 없어서, 외, 외로웠던 거야?”

사와구치가 이를 악물었다. 총을 든 손에도 힘이 꽈악 들어간다. 그 모습에 나나세의 입꼬리가 깊어지다 갑자기 팍 일그러진다. 쿨럭, 뱉어내는 피는 검붉었다. 사와구치가 사용하는 식물의 독성은 늘 맹독이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습관인지 각오였는지는 사와구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여-역시… 너도 나 없이는, 아, 안되는… 거네?”

“시끄럽다고!”

철커덕, 안전장치가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 지금 쏴야 해. 이 자식은 S급 빌런이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없어.

지금이 아니면…

“빨리 쏴. 나를 죽이는 네 얼굴… 조금은 궁금할지도…”

“제발, 좀! 그 입 좀…”

사와구치는 자신의 말 끝이 떨리는 것을 자각한다. 코끝이 시큰해져 오는 건 나나세의 능력 탓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으니까. 사와구치 로망은 언제나 나나세 후부키가 성가셨다. 쉽게 울고, 자꾸 자신을 귀찮게 굴고, 바보같이 웃기나 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파급력에 두려움만 갖던…

“닥, 치란 말이야…”

권총이 건조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건물 옥상에 울렸다. 나나세는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사와구치의 시선 또한 많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피어나는 프리지어 꽃의 향기가 나나세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렇게 피워달라고 했을 땐 들은 척도 안하더니…

챙- 날카로운 날붙이가 스치자 사와구치가 반사적으로 뒤로 피했다. 아차! 얼른 잘린 덩굴을 늘려 나나세를 붙잡으려 하자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양팔로 눈 앞을 가렸다가 한기가 가시고 나면 나나세는 그곳에 없다.

“…! 저 자식이!”

홱 사와구치의 고개가 위로 올라 나나세를 들쳐매고 사라지는 남자의 인영을 쫓았다.

“여기는 그레이스. 지금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남자가 나나세 후부키를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큰 키에 흑발이라는 것밖에 확인 못함. 능력은 확인 불과. 비행은 아닌듯 합니다. 도구를 써서 오른쪽 건물로 도주. 지원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지금 바로 B팀한테 추적을 요청. 코드네임 그레이스는 복귀해도 좋다.”

“… 죄송합니다.”

“사와구치 양.”

다정한 목소리에도 사와구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의 자신은 얼마나 한심한지.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 조차 지금 자신에게는 아까웠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마저 자신은 아직 미숙했다.

“수고 많았어요.”

“…네.”

“느, 늦었어.”

“죄송해요. 저쪽에도 좀 성가신 상대가 있어서.”

평소같았으면 그-그래두우-하며 중얼중얼 뭔가 들려올 타이밍이었는데. 그 여자의 독이 위험하긴 했는지 나나세는 말이 없었다. 나도 대화에 익숙하지는 않았으니 잘됐지. 뒷골목으로 숨어든 남자는 만신창이의 나나세를 부축하면서도 주변을 경게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사, 사와구치 말이야… 예전과 또, 똑같더라구…”

“그 새 말할 기운이 생겼나 보네요.”

약이 빨리 들었나. 식물 독에 대한 지식은 미숙했는데 잘 통했다면 다행이었다.

“마-말도 험하고… 여, 여전히 나한테는 무, 무르고…”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텐데 좀 쉬지 그래요.”

“까, 까칠하고… 자, 자꾸 소리치고…”

“성격 나쁘다는 말을 굳이 그렇게 길게 할 필요 있어요?”

“… 아무것도 모르네. 사와구치가 화를 내는 속뜻은 말이야…”

“너- 너무해… 내, 내가..그,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한 것도 아, 아닌데에…”

“아! 정말!! 종알종알중얼중얼 시끄럽네! 됐냐? 됐어? 나 꽃 피울 줄 안다! 자! 가져가라! 가져가!”

‘너를 신경쓰고 만다’의 의미니까.

3.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요!

사와구치 선생님이 마을의 순경 아가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만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거다. 평소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꾸벅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던 그녀였다. 점심시간마다 마을을 한바퀴 도는 산책길의 파출소에는 늘 인자한 인상의 나이 지긋한 순경님이 있었느나 오늘은 달랐다. 사와구치가 아이들과 함께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마주친 얼굴은…

“어라? 사와땅?”

“이사미?”

고등학생때보다 앳된 기는 좀 가셨을까. 노란 머리에 밝고 귀여운 눈웃음만은 여전했다. 베이비시터 부면서 늘 자신이 더 어린애처럼 굴곤 했는데… 사와구치는 갑작스레 마주친 후배의 얼굴에 놀라움보다는 신기함이 더 컸다.

“오랜만이네! 어라? 뭐야? 그 앞치마…”

허억! 이사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놀라는 시늉을 한다.

“사와땅… 유치원 선생님이야?!”

“뭐, 뭐야! … 그렇게 안어울려?”

아하항~ 하고 민들레 홀씨마냥 가볍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순간 그때의 부실로 되돌아간 것 같은 향수감에 사와구치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 사와땅 지금 웃었다? 그치?”

“… 아니거든. 너는 어떻게 된 게 다 커도 선배를 놀리려 들어?”

“꺄아악~ 사와땅이 또 꿀밤 때리려고 그래!”

“선생님… 경찰 언니에게 꿀밤 때려요?”

헉!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르칠 수는… 더군다나 여기는 경찰서 앞이다. 당황한 사와구치를 앞에 두고 이사미는 허리를 숙여선 손으로 조심스레 봄바람에 팔랑거리는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니야~ 음, 사와땅은 좀 엄하긴 해도 좋은 선생님이니까~”

계절이 바뀌고 말았구나. 사와구치는 이제야 자신이 ‘성장’한 이사미를 만났다는 걸 실감했다.

평화로운 마을의 파출소에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잠시 쉬어갈 공간도, 선생님에게 줄 오렌지 주스 한 캔도 충분했다. 사와구치야 일에 방해가 될거라며 급구 말렸지만 이사미는 “어차피 선배도 한바퀴 돌고 오느라 조금 늦어~ 5분 정도는 괜찮잖아!” 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진남색의 모자와 푸른 계열의 제복이 이사미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옆에서 곁눈질로 힐끔거리던 사와구치를 보고 이사미가 고개를 쑥 내밀며 갸웃거렸다. 깜짝 놀라는 걸 보고 재밌다는듯 쿡쿡 웃는 걸 보면 여전한 것 같기도 했다.

“왜애~? 사와땅은 내가 경찰이 된 게 신기해?”

“음… 글쎄. 조금은? 너는 육상부 쪽으로 갈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으음… 그쪽을 갈까도 고민했었는데… 나, 아빠가 형사거든. 그래서 뭔가~ 힘내볼까나… 하다가 이렇게?”

자신의 일임에도 어딘가 붕 뜬 어투. 하지만 사와구치는 이사미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안정감과 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사람이 경찰이 되는 이유에는 정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뭐어… 여긴 평화로우니까, 순경이라고 해도 별로 하는 일은 없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아~”

너처럼 작은 평화를 지키고 싶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네. 이사미 너랑 잘 어울려.”

“정말~? 고마워~ 에, 사와땅도 유치원 선생님 무척이나 잘 어울려!”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던 사와구치가 이사미의 말에 두 눈을 깜박거렸다. 아까전에 선생님인 자신을 봤을때는 놀라더만…

“내가?”

“응! 여전히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사와땅이야!”

와락 안겨오는 것에 사와구치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와, 왁! 이, 이거 놔!” 강하게 떼어놓지는 못하고 버둥거리기만 하자 주변에서 우르르 아이들이 몰려와서는 안기는 바람에 사와구치는 병아리들에게 둘러쌓인 꼴이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이제 닭이 된 거 같았지만.

“자~ 히요코를 따라서~”

“순경 언니라고 해야지! 자자, 모두~ 순경 언니를 따라서~ 두손 들고! 양쪽을 살피고! 건너갑니다~”

이사미가 앞장서는 것에 쪼르르르 원복을 맞춰 입은 아이들이 달려나갔다. “얘들아! 천천히! 순경언니 따라서 맞춰 걸어야지!” 뒤에서 여전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하며 따라오는 사와구치의 모습에 이사미는 덩달아 삑-삑! 호루라기를 불며 횡단보도를 마저 건너갔다. 마지막 아이까지 다 건너고 나서야 삐리리릭! 길게 휘슬소리를 내곤 척, 제법 각이 진 동작으로 차들에게 지나가라는 표식을 했다. 그래봤자 승용차가 두대 나 있었을까. 피식 웃던 사와구치가 허리에 양손을 얹어 외친다.

“자, 모두~! 여기까지 안내해준 히요코 순경 언니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지?”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한데 합쳐 인사를 하자 이사미가 팔짝팔짝 뛰다가 몸을 쪼그려선 아이들 하나하나를 다 껴안기 시작했다. 이제 곧 돌아갈 시간이라니깐.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사와구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 사와땅도?”

“어, 어?”

나도? 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이사미가 꾸압 자신을 껴안아 온다. 아래쪽에서 아이들이 꺄르륵 웃는 것에 길게 한숨을 내쉬던 사와구치도 결국 이사미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잘가~ 사와땅~! 다음에 또 만나!”

붕붕 팔을 흔들며 자신과 아이들을 배웅하는 이사미 위에 늦봄이 져녁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 장면을 아릅답다고 느끼는 데엔 분명 예전의 네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라서. 사와구치는 지금 느끼는 조금의 섭섭함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버리고 마니까.

3. 등대에서 바라보는 일등성

머리가 웅웅 울린다. 아, 제길… 못 막았구나. 손에서 힘이 들어가지 않을 걸 보니 등이고 어깨고 멀쩡한 곳이 없는거 같았다. 뼈는… 부러지지 않은 거 같은데. 눈앞을 붉게 가리는 피를 훔칠 힘은 남지 않았지만 주변 건물이 다 부셔져 잔해만 남은 꼴은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퍼특 곁에 있던 이를 떠올린 사와구치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서, 선배… 얼른 일어나 보세요…네? 제발…”

아오야마 이 자식, 또 사고쳤구나.

“이번 기수에 S급이 있다며?”

“곧바로 실전에 투입해야 해서 사와구치를 붙여 단기로 실전 훈련에 들어간다나봐.”

“사와구치가? 걔 성격에 후배 지도는 좀 아니지 않냐?”

“성격도 성격이지만 일단 20기 애들이 문제가 많잖아. S급이었던 연수생 두 명은 조직에 가 버리고…”

쑥덕거릴거라면 좀 숨어서라도 하지. 한창 시끄러운 단원들을 한번 쏘아보니 모여있던 이들이 움찔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별로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푹 한숨을 쉬며 사와구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식으로 만나기 전에 인사 좀 해보려고 그랬는데… 어제 자료를 받아 읽어 보았기 때문에 대충 생긴건 기억하고 있었다.

보라색 머리… 한쪽 눈에 안대… 아, 저기 있다.

“네가 아오야마 세이이치?”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에게 사와구치가 다가갔다. 상대도 이름을 불린 것에 퍼특 허리를 일으킨다. 청년이라기엔 앳되고 소년이라기엔 성숙한 모양새. 사와구치가 고개를 슬 기울이며 아오야마를 가늠하듯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체격은 큰데… 실속은 없을거 같네. 히어로라고 능력에게만 의지하면 안된다. 게다가 아오야마 세이이치는 등급은 높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능력을 잘 발현하지 못한다고 했다. 실전에 투입되려면 우선 체술부터 가르쳐야 되겠네.

“나는 사와구치... 로망. 사와구치라고 불러. 너도 말은 전해 들었지? 앞으로 네 실전훈련 지도를 맡은 20기수 히어로다. 오늘은 일단 인사만… 음?”

사와구치의 시선 끝에 아오야마의 앞 탁자의 쟁반이 보였다. 아직 먹기 전인 우동이 엎어져선 면이고 국물이고 다 못 먹게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사와구치의 머릿속에 방금 전 수근대던 무리가 스친다. 자기 기수때도 S급이지만 성격이 유약한 애들을 괴롭히던 질나쁜 무리는 있었다. 히어로라고 다 성격이 정의롭고 좋은 것은 아니다.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정부에서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도 있으니까.

“뭐야! 누구야! 얘 밥 먹기도 전에 이렇게 엎은 인간!”

미간을 팍 찌푸린 사와구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으르렁거렸다. 깜짝 놀란 건 주변 다른 사람들보다 당사자인 아오야마였다. 쭈뻣쭈뻣거리며 사와구치에게 자신은 괜찮다, 진짜 괜찮다고만 연신 반복하고 있으니 주변 다른 기수생들의 시선이 힐끔거리며 모아졌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빨리 나오지 못해? 아주 내가 가만 안 둬? 아무리 애가 좀 어벙해 보인다고 해도…”

“서, 선배 저 정말 괜찮아요… 그, 그게…”

“너 이런거 봐주면 안돼. 팀으로 일할 때도 많을텐데 이런 애들이 있으면 어떻게 협조가 되겠어? 빨리 안 나와?”

“제, 제가 한 거에요…!”

아오야마가 눈을 질끈 감고는 소리치자 사와구치가 깜짝 놀라선 그대로 굳었다.

“너 거짓말 하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 제가 좀, 운이 나빠서…”

시무룩해져선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는 아오야마를 보고 사와구치는 기가 찬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마음이 약해서는… 그렇다고 벌써 선배에게 거짓말이나 하고. 아주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 하겠구만?

그러나 고쳐진건 사와구치의 편견이었다.

아오야마는 정말 운이 나빴다. 불운 체질이라는 말이 진짜로 쓸 수 있는지 사와구치는 처음 알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건 예삿일이고, 갑자기 뭐가 날라오거나 어딘가에 부딪치기도 일쑤였다. 이러니 체술이 제대로 습득될리가 없지. 사와구치는 방법을 바꿔 아오야마의 능력을 개발시키려 애썼다.

“지금 장난해?”

시뮬레이션 전투실 안을 가득 울리는 사와구치의 고성에 아오야마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슬쩍 시선을 내려 우물쭈물하는 꼴에 사와구치의 울화통이 결국 터졌다.

“능력을 쓰라고 능력을! 양팔로 가리면 뭐 가릴수나 있어? ‘히어로는 시민들의 생명 구조를 제 1목적으로 삼는다.’ 첫번째 원칙도 기억 못하는거야? 너 자신이 그렇게 어이없게 당해버리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고 했지?”

“… 죄송해요…. 그, 그렇지만 능력을 쓰면 선배가, 다, 다치실..것 같아서…”

또 그 소리. 하아, 사와구치의 한숨이 깊어졌다. 애초에 심성이 여린 애이기도 했다. 아무리 훈련용이라 타일러도 총이나 나이프를 손에 쥐여주면 덜덜 떨면서 떨어트리곤 했으니.

그렇지만,

“너… 날 너무 무시하는거 아니냐?”

사와구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우물쭈물거리는 아오야마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걸 보는 시선이 무심하다.

“그, 그렇지만 선배…”

“그래, 그래. 소문의 S급 염동력. 한번 나한테 써보지 그래? 왜? 내가 당할거 같아서 걱정되냐?”

정곡을 찔렀는지 아오야마의 시선이 우물거리며 아래로 내려간다. 참내. 사와구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둔하고 약간 멍청하지만 속내는 착하고 좋은 애다. 능력이 높아 히어로가 되었다지만…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이 일을 버틸 수 있을까?

기억이 멀지 않은 어느 지점을 헤엄친다. 이해를 찾아 떠난 이도 이유를 찾아 떠난 이도 사와구치는 붙잡지 못했다.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었다. 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미래에 가능성을 두어야 해. 어쩌면 사와구치는 자신의 이기심을 지금 아오야마에게 맡기려고 하는지 몰랐다. 자신은 선배고, 아오야마는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상관하지 말고 덤벼. 새파란 어린 후배에게 당할 정도로 난 어리숙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강해져줘야겠어. 아오야마 세이이치. 넌 나의 희망이거든.

“그렇지만…”

사와구치는 또 다시 입을 열진 않았다. 훅 덤벼드는 나뭇가지에 아오야마는 깜짝 놀라 옆으로 달아났다. 반사신경은 그나마 가르친 보람이 있네. 주변 전봇대에 덩굴을 휘감아선 매달린 사와구치가 단숨에 아오야마의 뒤로 접근했다.

“지금 너는 한번 죽었네.”

그 말대로였다. 사와구치는 자신의 능력의 부족한 점을 무기와 체술로 채우고 있었다. 실전이었다면 버러 자신의 머리통은 날라갔을 터. 선배가 더 이상 봐줄리가 없어! 그리 생각하니 절로 소름이 끼쳐왔다. 아오야마가 손을 뻗음과 사와구치의 몸이 두둥실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를 악문 그녀의 모습에 흠칫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와구치가 휙 무언가를 던졌다. 등나무 줄기가 순식간에 자라나 아오야마를 덮쳐 온다. 퍼특 놀란 그가 다시 엉거주춤 손을 뻗는다. 그러나 덩쿨은 계속 아오야마를 향해 뻗어져 왔다. 양 손목을 모아 잡히면 아오야마의 머릿속이 새하얘져 온다.

“너는 능력이 폭주할까봐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네 능력의 상식을 뒤집어야 해.”

어느새 능력이 풀려 일어난 사와구치가 아오야마를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염동력이라는 건 단순히 사람이나 물건을 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거야. 네 힘을 네 손에서 뻗어져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공중에서 잡아당기거나, 미는거라고 거라고 생각을 해라.”

“네….”

어벙벙하던 얼굴이 점차 뭔가를 고심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코로 한숨을 쉬던 사와구치가 손을 움직여 아오야마를 구속한 덩굴을 치워주었다.

“작은것부터 찬찬히 하는거야. 네 능력은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어. 곡 적과 싸우기 위해 쓰지 않아도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거나, 덮쳐오는 산사태나 파도를 막을 수도 있겠지.”

손을 내밀어 아오야마를 일으킨다.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들은 진홍빛 눈동자가 새벽별처럼 반짝였다. 피식 웃던 사와구치가 손을 뻗어 아오야마의 보랏빛 머리칼을 툭툭 쓰다듬었다.

“그래도 잘 했네. 수고 많았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아오야마의 얼굴에 미약한 웃음이 스르륵 번졌다. 이게 이 아이에 진짜 얼굴이구나. 손을 거둔 사와구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역시 얘한테 히어로는 안 맞을지도 몰라. 사와구치가 그 사실을 아오야마에게 알려줄 생각은… 아직은 없었다.

“생존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수색을 시작, B급 빌런 두 명을 제압, 호송하는 과정에서 신원 불명의 빌런 난입, 아오야마 세이이치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걸 파악하고 전투를 속행하던 중 정신을 잃었습니다.”

몸이 회복중이던 어쨌던 후속 보고는 해야만 했다. 자신은 중간부터 기절해 나가 떨어지고 만 형편없는 작전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오야마에게 보고를 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아오야마군은 자신이 어떻게 상대를 제압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고 했어요. 정신을 차리니 당신이 쓰러져 있어 급하게 본부에 연락을 했다는군요.”

바보 같긴. 안봐도 뻔했다. 아오야마는 분명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사와구치가 미간을 찌푸리자 침대맡에 앉아있던 지휘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B급이라는 것과 아오야마 군이 아직 신입이라는 것을 노린 것 같아요. 아마 납치라도 해서 회유를 시키거나…”

뒷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히어로 연수생을 빌런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조직들이 할 일은 하나 뿐이었다. 미래의 적은 미리미리 없애는 게 좋지 않은가. 그런 쪽에서는 비상하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들이었다.

“그 녀석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일단은 전해 두었어요. 계속 당신의 상태를 걱정하더군요.”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해. 사와구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대로 정신 차렸어야 했는데. 정말 생존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 염두하는 바람에 빈틈을 보였었다.

“… 인명피해는…”

“걱정하지 말아요. 그들이 잡아뒀던 인질들은 무사히 구출되었어요. 아오야마 군이 지원이 올때까지 게속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잡아뒀던 모양이에요.”

그 말에 쭉 아래를 떨구던 사와구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커진 그녀의 두 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지휘관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다.

“인명피해는 제로. 임무는 성공입니다. 사와구치 양과 아오야마 군 모두, 수고 많았어요.”

하아, 하는 사와구치의 한숨에 문 뒤에서 서성거리던 아오야마의 어깨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경직되었다.

“… 그쯤하고 들어오지 그래.”

결국 기운없는 모습의 아오야마가 슬그머니 의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사와구치가 누워 있는 침대까지 느릿느릿 걸어와 털썩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는 모습이 영락없는 죄인이었다.

“… 서, 선배.. 몸은 좀, 어떠..세요?”

“덕분에 괜찮아.”

“… 죄송해요.”

또, 또 그놈의 죄송해요… 사와구치의 주먹이 아오야마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때렸다. 묵직한 아픔에 결국 아오야마의 고개가 들려 억울한듯 두 눈을 깜박거린다.

“뭐가 그렇게 죄송한데?”

“… 제가, 폭주.. 하는 바람에… 선배도, 다치고… 저, 저 때문에… 이번에 노려, 지게 되어서… 이렇게 다치시게, 된…”

“아니거든?”

딱콩! 아오야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와구치가 아오야마의 머리를 또 때렸다. 양손으로 두번 맞은 머리를 감싸던 아오야마의 얼굴이 어벙해지다 또 다시 자책으로 물들여갔다. 이게 정말…! 다시 주먹을 훅 위로 들자 아오야마가 움찔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왜 아니예요! 저 때문에 선배가 이렇게 다쳤잖아요. 임무도 실패하고… 겨, 결국 저는…”

“임무가 실패라고 누가 그래?”

“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오야마를 보며 사와구치가 팔짱을 낀다. 아직 모르는건가. 하긴 정신이 없을 만도 했지.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이유는 분명 자랑스러움이다.

“네가 건물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며? 지원이 왔던 것까진 기억하지?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한 모양이야. 범인 호송과 인질 구출. 임무는 성공이야. 다 네 덕분이라고.”

“아… 아…”

넋을 잃은 듯 사와구치를 보던 아오야마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새하얀 이불 위에 올려진 사와구치의 손은 붕대로 꼼꼼하게 감싸져 있었다. 생명에 큰 지장은 없다고 하셨지만…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렇지만 선배가 이렇게 크게 다쳐 버려서….”

딱콩! 사와구치의 주먹이 기어이 세번이나 아오야마에게 명중했다.

“아 진짜! 네 탓 아니라고 했지?”

왁왁 걸걸하게 울리는 고함에 아오야마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방심한 탓이야. 넌 능력을 써서 나와 시민들을 구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지금 네가 그렇게 쓸데없는 일로 자책을 하던 말던, 너는 히어로서의 일을 완수한 거라고.”

멍하니 사와구치의 말을 듣는 아오야마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진다. 하나의 진홍빛 눈동자에 차오르는 투명한 감정을 보니, 분명 저 안대 뒤에 가려진 곳도 제 여린 맘을 감추고 있진 못할 것이다. 눈부시네. 사와구치는 이런 광경을 많이 봐왔다. 단순한 연수생이었던 이들이 눈동자에 어떠한 의지를 담아내는 순간.

“잘 했어.”

우리는 등대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내며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 사명. 이 길을 자의로 걸었든 타의로 왔든 히어로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했다. 빛을 내는 일은 고독하고 고단하다. 히어로들은 구했던 사람들의 수보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라서.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밝은 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등대에서 빛을 내는 이들까지 믿고, 의지하고, 소망할 수 있는 이들.

자색으로 빛나는 일등성. 내가 발견한 다정하고 여린, 그러나 분명히 강해질 등불.

너는 히어로가 잘 어울려.

허나 사와구치는 아직 그 말을 아오야마에게 해줄 맘이 없다. 벌써부터 후배가 건방져지는 건 사양임으로.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 칭찬해줘도 되겠지? 사와구치의 손이 퍽 상냥하게 아오야마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만 울어. 이게 뭐, 울 일이라고…”

아직도 멀었네. 어쩔수 없구나.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아니면 앞으로의 많은 나날에서도. 사와구치는 아오야마가 바라볼 등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새벽이 어두운 것은,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오르는 별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4. 우리가 헤어지게 된 진짜 이유

많은 로맨스 소설을 읽었지만 나는 너랑 그런 걸 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냥 딱 평범한 연애. 그런 걸 하고 싶었어.

“사~와구치! 어떤 1학년이 밖에서 너 기다리는데?”

같은 반의 친구의 말에 사와구치가 흠칫 놀라 일어났다. 무심한 듯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제 머리칼을 매만지게 된다. 복도로 나가는 동안 뒤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산노미야와 사귄다는 걸 어디에 소문내지는 않았는데… 확 붉어지는 두 뺨이나 입술이 우물거리는 얼굴에서 이미 다 드러나고 있다는 걸 사와구치 본인은 잘 알지 못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산노미야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 이동수업 가는 길이었거든요.”

“아, 그… 그래?”

제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곤 쭈뻣거리다 크게 숨을 들이쉬는 사와구치는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여전히 산노미야에게 짜증도 내고, 잔소리나 고함도 평소와 똑같지만 이렇게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싶어질 때가 잦아졌다. 예를 들면, 그래… 이렇게

“그럼, 그… 오늘은 같이 당번이니까… 부활동 끝나고 같이 갈래?”

시선을 내리깐 채로 긴장한 듯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거라던가. 새삼 보면 왜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진작에 거리를 좀 둘 수 있었을까. 가능성은 미지인 채로 남을 뿐이라 산노미야는 천천히 두 눈을 끔벅이며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뭐, 그럴까요.”

“정말?”

확 눈이 커지며 놀라는 모습은 낯설다면 낯설었다. 낯간지럽기도 했고.

“어차피 그전에도 같이 갔었잖아요. 새삼스럽게…”

“야!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르지 임마!”

팍 성을 내며 눈썹을 위로 꿈틀거리는 사와구치를 보자 산노미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이렇게 예전과 다름없게 지낼 수 있는 걸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귄다느니 서로 좋아한다느니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자, 이거나 먹어요.”

“너 또 멋대로 남의 머리에… 이게 뭐야?”

사와구치의 머리 위로 초코우유를 툭 얹어 놓은 산노미야가 뱅글 뒤돌아선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쉬는 시간은 길지 않으므로 이만 가봐야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건 사와구치 뿐이었다.

“뭐야… 진짜…”

새빨개진 얼굴을 감출 능력도 없다. 자꾸만 쿵쾅거리는 심장 고동의 원인을 줄일 방법도. 사와구치 로망은 산노미야가 던지는 작은 파동에도 이리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원래 사와구치 로망은 자신의 감정을 산노미야 카네키에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짝사랑은 지긋지긋했던 탓이다. 애초에 사와구치는 자신이 왜 산노미야에게 빠졌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자신에게 건방지게 구는 후배에 불과했는데. 빠진다는 비유가 맞았다는 것엔 동의했지만.

“아! 나도 모른다고! 그냥, 네가 자꾸 성가시게 굴어서 내 과거 말해줬고… 그걸 네가 잘 들어주니까 안심이 되고, 그냥… 그냥, 네가, 자꾸 눈에 밟히고, 보고 싶고… 그러는데 어쩌라고.. 너, 진짜 짜증나. 왜 자꾸 물어보냐고… 그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 볼품없는 고백이라고 사와구치는 생각했다. 주황빛으로 노을 지는 하늘에 어떻게든 꼴사납게 우는 얼굴을 감추려고 했던 것만 기억난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꼭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사와구치는 산노미야와의 관계가 소중했다. 나만 잘 숨긴다면, 이대로 쭉 감춘다면. 지금 나란히 걷는 이 순간을 망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너, 너도 날 좋아해?

거짓말 같았다. 사와구치 로망은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산노미야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했으니까. 그런데도… 아니, 그랬기에 머릿속이 붕 뜨는 감각이었다. 쭉 동경해 마지않던 제 사랑이 이루어지는 장면. 자신의 상상만큼 눈이 부시게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사와구치는 자신이 이 순간을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함께 손을 잡고 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진 않을 것 같아서.

그와 공유했던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려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사와구치는 들떠 있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기쁨은 이런 것이구나.’ 처음 겪는 벅참은 단거리를 뛴 만큼 심장을 뛰게 했고, 마라톤을 더 달릴 수 있는 감동을 주었다.

어쩌면 나는 이기적이었구나. 사와구치는 이젠 그때의 자신을 그렇게 회상하곤 한다.

조금 더 네 얼굴을 잘 살펴봤어야 했었다고.

“오늘도 크게 별일은 없었네.”

쭉- 크게 기지개를 피는 사와구치의 옆을 나란히 걸으며 산노미야는 가볍게 하품했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지는 하늘은 먼 배경이 군데군데 까맸다.

“료짱이 헤어지기 싫다고 울어준 건 처음이었지. 뭔가 뿌듯하네.”

“제가 잘 놀아줘서 그런 거 아닐까요?”

“또 까분다. 아직도 멀었거든? 너는 좀 생동감이 넘치게 놀아줘야 하는데 좀 대충대충…적당히 하잖아. 아이들은 생동감 있게 연기해주는 걸 좋아한다고!”

“그 정도로도 다 충분히 좋아하던데…”

평소와 다름없는 하굣길, 시시한 대화. 그러나 이따금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사와구치가 짓는 표정은 예전과는 달랐다.

“… 너, 너는 지금 돌아가면 뭐 해?”

“집에서요? 뭐… 저녁 먹고, 씻고, 동생들 좀 놀아주다… 음, 적당히 자겠죠.”

그 시선이 이상하게 찔려와 산노미야는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사귀게 된 이후로 그는 사와구치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지 않았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슬그머니 피할 뿐인데도 산노미야는 묘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일러도, 잘 설득되지는 않은 가느다란 죄책감.

“헤, 헤에… 동생들이 있구나… …”

“왜요?”

“어? 어? 뭐, 뭐가?”

사와구치가 말꼬리를 늘이는 것에 산노미야가 툭 묻는다. 이 선배는 무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길 때 이러는 버릇이 있다. 그때도 이런 버릇을 눈치채는 바람에 장난처럼 툭 찔렀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와버렸다. 알았더라면 묻지 않았을까? 또 같은 질문을 하는 자신에게 질려 산노미야는 가볍게 눈썹을 찡그리며 머리를 털었다. 쏴아- 쌀쌀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그, 그냥… 뭐, 나중에 네 동생들 한번…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우물쭈물거리던 사와구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외동이거든 그래서 항상 형제자매 있는 애들이 좀, 신기하다고나 할까… 부럽다고나 할까…”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아는 모습인 것 같으면서도 조금 생소했다.

“뭐, 뭐… 안된다면,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산노미야가 아무 말이 없자 금세 기운이 빠져선 목소리가 줄어든다. 그게 또 마음에 걸려 산노미야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한번 말은 꺼내 볼게요.”

“그래…? 조, 좋아.”

화악 달라진 분위기. 이게 그렇게 기쁜가. 그야 산노미야 자신도 사와구치의 과거를 그렇게나 궁금해하긴 했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거 같으니 안심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산노미야가 사와구치의 한걸음 정도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사와구치가 속도를 맞춰 걸으려다 문득 아래에 놓인 그의 왼손을 보았다.

여러 생각을 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 고백했던 날도 전부 엉망이었지만 제 마음 하나는 진심이었듯이. 어쩌면 자만이었을까, 역시나 사와구치는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야 그렇게 떠올리곤 했다. 좋아하니까, 너에게 더 닿고 싶어. 물어보는 건 너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날 놀릴 거 같았기도 했고…

그렇지만 설마 날 그렇게 볼 줄은 몰랐어.

단지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 그렇게 변명은 했지만 사와구치가 뻗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짝 온기가 닿았다 싶었을 때 사와구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 얘 지금 당황했구나.

수치는 단숨에 몰려왔다. 홱 손을 빼려고 들자 산노미야가 다급히 맞잡아 왔다. 사와구치의 시선은 내내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슬프게도 로맨틱한 이유는 아니었다. 다급해진 눈초리가 평소처럼 되돌아오기까지는 짧았다. 맞잡은 손은 잠시 차가웠다가 서서히 서로의 온기로 따듯해졌다. 그렇지만 사와구치의 기분은 더 이상 설레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날 좋아하지 않는구나…’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쿵쾅거리는 기분나쁜 심장소리만 울렸을 뿐.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멍하니 한가지의 생각만 반복했다.

‘산노미야는 날 좋아하지 않아.’

그 순간 사와구치가 느낀 감정은 오롯한 비애 뿐이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우습게도 고백하려 하지 않은 이유와 맞물렸다. 예전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것이 싫었으니까. 산노미야와 자신이 서로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다고 해도, 사와구치의 감정은 산노미야의 것과 일종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너도 날 거절하지 못했던 거겠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상처 받은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기적이게도.

그렇지만 또 네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져 버려서.

산노미야가 노력하고 싶었던 만큼 사와구치도 모른척 하려 애썼다.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드물게 입술을 맞추는 행위를 하고도 서로 웃으며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와구치는 산노미야가 자신을 향해 웃어줄때마다 바참한 기분이 들었다. 들고 말았던 것이다. 꼭 예전의 나를 동정해서 얘가 이러나 싶어서…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걸로 해.

“너 사실 나 좋아하지도 않지? 너한텐…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인거야? 너한텐 이게, 다, 장난으로 보여? 내, 내가 너한테 그냥… 그냥 그런 말을 했을거 같아?”

내가 다 망친 걸로 해.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역시 동정한거야? 내가 사랑받지 못했다고 하니까… 내가 불쌍했어? 왜, 왜 그런거야? 맘에도 없으면서… 나는 널, 내가 널.. 얼마나…”

얼마나 좋아했는데. 너랑 부실에 있는 시간, 시덥잖은 대화, 같이 돌아가는 하교길에 보는 풍경을. 꽉 잡은 두 주먹이 떨리는 만큼 눈에 힘을 주었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사와구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소리의 끝이 젖어 온다는걸 알면서도 사와구치는 고개를 들어 산노미야의 마지막 얼굴을 보았다.

“… 정말 싫어. 너…”

그때 했던 말 중 거짓이 딱 하나가 있다면 너를 싫어한다는 말.

그때 묻고 싶었던 말 딱 하나가 있다면…

졸업식 전날을 이후로 사와구치는 산노미야를 만나지 않았다. 억지로 안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바빠서 그럴 틈도 없었다. 목표가 있다는 건 좋았다. 쉴새 없이 달리느라 옛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가끔 새로운 만남이 다가오기도 했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그런 느낌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어쩐지 자꾸만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만 생각이 나서.

시간이 지나도 사와구치는 여전했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틈만 나면 오지랖이나 부려 잔소리를 늘여놓는 사람. 대학 졸업을 앞둔 싱숭생숭한 시기였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들락거리던 서점을 찾아간 건 오랜만에 생긴 여유에 옛 취미를 다시 해볼 시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토 작가님… 요새는 신작 안내시네.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건지…’

익숙한 곳은 역시 로맨스 소설 코너였다. 가볍게 훑어보면 저절로 예전 생각이 났다. 사귀던 시절에는 함게 서점 데이트도 종종 했던 기억이 변하지 않은 서점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자신의 취미에 함께 어울려주는 상냥함이 그저 저를 향한 동정은 아니었을텐데. 또 다시 서글퍼지는 기분에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면 자신의 팔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사와구치… 선배.”

“사, 산노미야?”

조금 앳된 기가 가셨을까. 머리, 여전히 염색하고 다니는구나. 초조해 보이는 모습은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파악할 만큼 사와구치가 정신이 있지는 않았다만.

왜 하필이면 네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걸까. 마치 내가 쭉 이 순간을 기대라도 한 것 같잖아. 우연을 운명이라 믿는 철없음은 이제 졸업한지 오래임에도.

“아…”

뒤늦게 깨달았는지 산노미야가 사와구치의 팔을 놓았다. 어색한 기류가 게속되기 전에 사와구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오랜만… 이다? 여긴 어쩐 일이야?”

“… 선배야말로, 여태껏 연락 한번이 없으셨네요.”

뚱한 목소리가 저를 놀리는 건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 사와구치는 옛날처럼 주먹을 들어 산노미야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아야, 익숙하다는듯 산노미야가 제 머리를 문지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둘을 둘러싼 공기가 부드러워지자 여러 말이 나온다. 야, 너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저야 뭐… 선배는 어떤데요? … 여기서 이야기 하기도 좀 그런데,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할래요?

젠장할! 나는 왜 그런 약속을 해 가지고!

사와구치의 머릿속과 다르게 손은 옷장에 있는 옷을 휙휙 뒤지고 있었다. 그래 이건 복수심이다. 너와 헤어진 뒤에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이러는거 뿐이다! 합리화를 하면서도 착실히 검은색과 붉은색 체크무늬로 된 원피스에 베레모에 부츠까지 고르고 있었다. … 아, 화장도 할까?

‘아니 나는 별로, 별로 미련 같은거 남지 않았다니까!’

뭐가 그리 들뜨고 신난건데. 사와구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나면 일부러 그 주제는 살살 피할거면서. 걔 취향은 너 아니야. 호박에 줄 더 그어봐야 수박 안 된다. 어른의 마음으로 충고를 계속했으나 사와구치 안의 19살은 말을 듣지 않았다. 처음 주말에 따로 만났을 그때처럼, 거울속의 자신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진짜 왜 그렇게 난리 친거지…’

복수는 무슨 복수. 정작 상대는 자신과 눈을 잘 마주쳐 주지도 않는다. 이래선 옛날과 다를바가 없네. 창피한 맘에 술만 들이켰다. 알아챈 건 아직 산노미야에게 잘 보이고 싶은 어줍잖은 자신의 마음 뿐이었다. 적어도 들키지는 말아야지. 괜히 긴장해선 쓸데없는 말만 늘여놓는다. 술이 들어가니 정신이 멍해지는 탓도 있었다. 웃음이 헤퍼지거나 산노미야의 머리를 멋대로 쓰다듬는다거나 한건 절대로 무슨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 아마도.

“선배 원래 술 마실 때 이래요?”

“어? 어! 나, 워, 원래 이런데? 평소에도! 이런데?”

“… 흐응….”

“… 아! 안주 없는데 뭐 좀 더 시킬까?”

“아니요…”

흠칫, 뺨에 무언가 서늘한게 닿는다고 생각하니 확 얼굴이 붉어져 왔다. 그저 뺨에 손 좀 댄거 가지고… 얘는 원래부터 스킨쉽에 거리낌이 없는 애니까!

“그, 그만 돌아가야겠다!”

“갑자기요?”

산노미야가 뭐라 하든 사와구치는 돌아갈 생각이었다. “일어나요. 데려다 줄게요.” 왜? 이유를 묻는 순간 안쪽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서 사와구치도 말없이 일어났다. 술기운인지 아님 다른 무언가의 탓인지 뜨거워진 뺨에 닿는 밤바람은 딱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사와구치가 금방 엉키려 드는 곱슬머리를 정리하려 들자 산노미아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예전보다 커진 하얀 손 사이사이에 진초록의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헤엄친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여전, 한 거 같아?

시간이 멈춘듯한 착각이 인다. 네가 나한테 빙긋 웃어준 것 같은 느낌도 분명 이 밤만의 마법일까. 사와구치는 확실히 취해 있었다. 언젠가 산노미야의 옆 얼굴을 가만히 훔쳐보던 날의 공기와 지금 이 순간의 공간이 닮은 것 같아서. 그 향수에 질식할 정도로 취해버려서.

“여전하지 않은 것도 있어. 내가 그땐, 널 참 많이 좋아… 했었, 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깊이 묻어둔 타임캡슐을 거내는 감각이었다. 애뜻하고, 그립고, …

“지금은…내가, 너를…”

여전히 많이 좋아해.

한없이 사랑스러운 기분. 사와구치는 깨달았다. 쭉 자신을 동정해 온 건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 제 뺨에 흐르는 눈물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얼른 양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닦으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되려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사와구치는 지금 창피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또 다시 산노미야를 곤란하게 하는 자신이 싫어질 뿐이었다.

“아이, 씨… 진짜.. 짜증나…”

애매한 기분을 짧은 단어로 뭉개버리며 사와구치는 결국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고 제발 산노미야가 다른 곳으로 가길 기도하며 훌쩍거린다. 너무 울어 머리가 띵한 와중에도 앞에 있던 이가 자신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추는 기척은 느껴진다. 또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건데. 결국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었을 게 분명한 얼굴을 들어 상대를 본다.

“오늘 선배한테 중요한 할말이 있었는데…”

뺨에 붙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곤, 손가락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쳐주는 손. 사와구치는 이 손을 맞잡고 싶었다.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함께 두근거리고 싶었다.

“그냥 다음에 해야겠네요.”

“… 뭐였는데?”

메인 목소리로 물으니 산노미야가 눈웃음을 짓는다.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하는 것 같기도 한 미소. 너는 늘 그렇게 알쏭달쏭해. 알 수가 없어. 예나 지금이나 그의 그런 점을 매력이라고 느꼈었다.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말이에요.”

“그건…”

내가 널 배려 안 해서. 너랑 틀어지는 게 싫어서 고집을 부렸으니까. 너를 내 이기심으로 계속 붙잡아 두고 있어서…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꺼낼 용기는 없어 천천히 고개를 다시 숙이니 산노미야의 손이 느릿하게 사와구치의 뺨을 감싸선 살짝 들어 보였다. 뺨이 조금 눌러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게 바보 같아서 또 놀리고 싶어지는 걸 꾹 참는다.

“다음에 얘기해 줄게요.”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자요. 축축한 뺨에 닿아오는 입술에 사와구치는 뒷말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훅 다시 귀끝까지 끼쳐오는 열기에 이 모든게 제 술기운의 탓인지 의심할 정도였으니.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그런 거, 알 게 뭐야.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로 사와구치는 중얼거렸다. 사와구치는 늘 산노미야와 만나고 오는 날이면 이렇게 누워서 여러 생각을 하곤 했다. 설렘과, 망상과, 그 사이의 애상 속에서 네가 자신에게 해줬으면 하는 여러 말들을 감히 상상했었다.

‘그 중에 그런 말은 없었는데…’

가장 원하는 말은 있었다. 한때는 같은 마음이라 여겼던 그 한마디. 아닌 걸 알고 나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못했던 저의 미련.

‘너는 나한테 무슨 말이든 해도 좋아…’

예를 들면 그때 내가 너에게 했던 단 하나의 거짓말이라도. 오히려 사와구치는 그 말을 들으면 산노미야를 말끔히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처럼, 헛된 희망처럼 품어왔던 이 마음까지 전부.

‘내일, 내일 또 만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오직 그 약속에 기대고 싶었다. 매일 밤 다음날 널 만날 생각에 설레이던 젊은 날의 나처럼…

네 꿈을 꾸고 싶어.

사와구치 로망은 실로 오랜만에 단 꿈을 꿨다. 로맨틱에 한껏 잠겨 있던, 엣날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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