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놀이
사와굿 러닝중 로그
사와구치는 몹시 피곤했다. 단지 선물받은 머리띠를 했을 뿐인데 반에서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하는 학생들이 있었던 탓이다. 평소엔 나한테 그다지 관심도 없었으면서… 선물 받은거야. 남자친구 아니야. 그딴게 있겠냐! 누구에게 받은 건지는 나도 몰라… 평소보다 사회성을 배로 쓴 사와구치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렇다고 부활동을 빼먹진 않았다만.
“모두 안녕…”
“사와구치 왔다! 어? 머리 반짝반짝!”
민트가 맨 먼저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사와구치의 머리를 가리켰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된 사와구치가 민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봤어요. 사쿠라군이 사와구치 씨에게 머리띠를 줬어요.”
“아아- 그건 좀 다른데… 사쿠라짱이, 누군가가 언니한테 보내준 선물을 대신 전해준거랍니다~”
나데시코의 똘똘한 말에 단서를 붙여주자 근처에 있던 사쿠라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랑스레 동조했다.
“사와구치 무척이나 에뻐요! 꼭, 그..우음… 공주님! 공주님 같아요!”
“에엑?! 고, 공주.. 그건~ 좀 아닌데…”
“공주 아니야! 사와구치는 요정을 더 닮았어. 숲의 요정!”
히마와리와 민트의 의견분열에 사와구치만 괜히 더 민망해진다. 이이익~! 확 머리띠를 빼려고 하자 섬세하게 세공된 잎사귀와 꽃 부분에 곱슬거리는 진초록 머리칼이 올올이 엉켜 제 머리털이 다 빠질 지경이 되었다. 빠르게 포기하고는 간식시간이라며 아이들의 주제를 돌려본다.
‘괜히 하고 왔어… 나답지 않은 짓만 했네.’
한숨을 푹 쉬던 사와구치는 괜히 지나가던 부원을 홱 째려보기나 했다. 눈을 부라리면 적어도 내 머리에 쏠리는 관심은 줄어들겠지. 평소와 다름없어 보여도, 다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는 까칠함이었다.
사와구치도 공주님이니 요정이니 하는 것에 크게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느 여자아이들이 그렇듯이, 지금 부실의 아이들 나이때의 사와구치는 공주님이 되어 자신만의 왕자님을 만나는 것이 꿈이었다. 팔랑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사뿐거렸으며, 중앙에 예쁜 보석이 박힌 장난감 왕관을 사달라고 졸랐다. 신데렐라, 백설공주에 라푼젤과 인어공주… 왕자님이 나오는 동화를 들으며 매일 밤 잠을 잤고, 꿈속에서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미역마녀가! 무슨 공주는 공주냐~! 못생긴게!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의 남자아이가 그런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사와구치의 환상은 좀 더 오래 갔을지 모른다. 그날 펑펑 운 이후 (물론 그런 말을 했던 남자애는 사와구치의 손맛을 보곤 더 울었다.) 사와구치는 거울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반짝거리고 팔랑거리는 옷들과 장신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악성 곱슬인 진초록의 머리, 빨간 눈은 작았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다닥다닥 붙여져 있었다. 사와구치가 생각했던 공주님은 이런 얼굴이 아니었다. 그 남자애 말대로였다. 자신은 마녀였다. 처음으로 ‘로망’이라는 이름이 창피해졌다. 자신은 얼굴도 성격도 심지어는 마음까지 로맨틱하곤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볼땐 아주 예쁜 이름인데.”
사와구치가 거울을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문예부에서 만나게 된 한살 위의 선배, 보기 싫은 자신의 곱슬 머리도, 창피하기만 한 이 이름도 선배는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예쁘다는 말을 진심이라고 느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동안은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팔랑거리는 옷을 다시 주문해 입었다. 거울을 보며 립글로즈를 입술에 발라보았다.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그러나 확실히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응응! 너무 잘 어울려! 분명 그 선배도 너에게 넘어갈거야~!”
함께 어울려주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소근소근 내 가장 소중한 비밀을 공유하고, 꿈을 알려주며 밤새도록 통화를 한 밤들이 있었다. 시간을 사랑스럽다고 기억할 수 있다면, 로망에겐 그 순간들이 유일했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반짝이던 순간들.
“로망. 네가 추천해준 소설 읽어봤어. 솔직히 놀랐어. 재밌어서 술술 읽혔거든.”
“로망짱! 오늘은 새로 생긴 가게에 들려보자! 너랑 귀여운 열쇠고리 맞추고 싶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았다. 이 둘에게 만큼은 절대로 미움받고 싶지 않아.
“로망은 사람이 좋으니까 말이야. ҉하҉시҉모҉토҉도 너의 그런 점을 봐주는 아이겠지.”
응. 맞아요 선배. 그 아이는 내 가장 소중한 친구에요. 내가 몰랐던 내 장점을 찾아준 사람이에요.
“있잖아…, 로망짱은 왜 ҉와҉타҉나҉베҉ 선배를 좋아하는거야? 아니~ 좀 치사하잖아? 맨날 로망짱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선배는 내가 싫어하는 나를 바꿔 주었어. 선배랑 함께라면 나를 좋아할 수 있을 거 같아.
“로망”
“로망짱”
“미안해.”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애초에 선배는 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아끼는 후배라고 말해주었으니까. 선배랑 어색해지는 것은 싫었으니까. 역시 나 같은 걸 누가 좋아해 해줄리가 없어.
괜찮다고 말해야 했었다.
자기도 모르게 빠졌다고 말했으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고백은 거절하겠다고 말하니까. 나는 계속 네 친구로 남고 싶다고 울어버리니까. 미안하다고, 자꾸만 사과하니까. 그런 말이 나를 더 배신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해?
그래야 했었는데…
정말 좋아하던 것들을 싫어하게 되는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더 끔찍했다. 로망은 다시 사와구치로 돌아왔다. 까칠하고, 까탈스러우며 귀엽지 않은 사람으로. 거울을 볼 이유가 생기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에쁘게 보이기 위해 웃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모든 환상을 다 버렸다고 느낌에도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로맨스 소설 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비밀로 해두면 돼. 덮어두고 아무한테도 꺼내놓지 않으면, 앞으로 상처 받을 일도 없어.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며 사와구치는 제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띠… 역시 뺄까?’
선물 받았다는 사실에 들떠버려 한 거지만 어울리는지는 역시 모르겠다. 공주도 요정도 아니다. 자신의 눈에는 좋게 쳐줘 봐야 몰래 공주의 장신구를 훔쳐 낀 시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공주님 놀이네. 피식 웃음이 나오다 핫! 하고 돌아온다. 제 생각이 어떻든 간에 선물해준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누구야? 나에게 이런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사람은…’
매끄러운 거울 표면에 자신의 뚱한 얼굴이 비친다. 에쁘지 않다. 아이들 앞에서나 노력하지 평소의 자신은 늘 이런 모습으로 남들에게 비춰지는 것이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머리띠가 더 이질적으로 보였다.
아래쪽에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는 손아귀에 사와구치가 허리를 숙였다. 낮잠을 자다 깬 료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울먹거렸다.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료는 소심한 면이 있어 쉽게 울고 만다. 달래주기 위해 사와구치의 얼굴은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공주님 같은 거… 이제는 필요 없어.’
이 아이들하고 있으면… 그런건 어찌되도 좋은 걸.
지금은 그런 결말으로도 행복하다며. 사와구치는 과거의 자신에게 작게 속삭였다. 공주님이 되지 않아도 해피엔딩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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