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지 말지 네가 잘 생각해봐.

#호열백호 전력60분, 주제_생일

#호열백호 전력60분

주제_생일


강백호의 생일은 4월 1일, 처음 그의 생일을 말하면 모두 장난인 줄 아는 그런 날. 4월의 첫 번째 날. 벚꽃이 만개하는 날. 어느새 따뜻해진 공기에 초록빛 새싹이 돋아나는 날.

양호열은 어쩜 그리 강백호 본인 같은 날에 태어난 건지 모르겠다고 혼자 미소를 짓곤 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쬘 때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초록빛 새싹과 망울망울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것이 꼭 강백호 같지 않은가. "나는 역시 천재니까!" 그래, 천재니까 그 힘든 재활도 이겨냈고, 천재니까 그는 또 다시 농구코트에 발을 딛었다. 산왕전때 강백호는 지금이 자신의 영광의 시대라고 했던가···. 양호열이 봤을 때 그의 영광의 시대는 거기서 끝이 아니였다.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의 실력은 빛이 났고, 3학년 마지막으로 참가한 인터하이에서 결국 북산은 우승을 차지한다. 그때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응원을 왔던 북산 졸업생들이 모두 관객석에서 뛰쳐나와 함께 얼싸안을 때 양호열은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비록 그 자리에 함께하진 못해도 진심으로 강백호가 자랑스러웠다.

"강백호! 축하해!"

자신의 외침은 아마 안 들렸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환호성과 축하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강백호는 주인공, 자신은 그 무대 밑 관객. 관객은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낼 뿐.

강백호는 비록 NBA는 가지 못했으나 국내에서 꽤 유명한 농구선수들을 배출한 대학교에 추천서를 받아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 후 바로 프로농구팀에 들어가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이름을 말할 만큼 유명해졌다. 그리고 30대 중반이 되었을 때 프로 농구를 은퇴 후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 농구부의 감독이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주인공, 36세 강백호의 삶.

그렇다면 양호열은?

양호열은 오래 전, 막연히 30살이 넘어가면 적당히 괜찮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뭐 애도 한명 낳음 낳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서, 적당히 넓은 내 소유의 집이 있겠지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러나 인생이란 순탄치 않으니 인생이라던가. 여성에게 관심이 가긴 커녕 덩치 크고 붉은 머리칼의 날라리 강백호에게 두근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던가? 남자는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기 낳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순리 아니었나? 그럼 나는 뭐지? 혼돈의 사춘기를 겪으며 한가지 깨달은 점은, 남자라도 다 두근거리지 않는 다는 것. 오직 눈길이 가는 사람은 강백호 뿐이라는 것. 그러니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절대 꺼내지 않고 꼭꼭 감춰두자 다짐했다.

추천서를 받아 대학이 결정 난 강백호를 보고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역시 격차가 너무 많이 벌어져 있었다. 공부에 부족함을 느껴 결국 재수를 선택해 1년을 도서관에서만 박혀 공부 했고, 겨우 합격해 들어간 나름 서울권 4년제 대학교는 달콤한 캠퍼스 로맨스가 펼쳐지기는 커녕 엄청난 등록금과 책값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 않으면 휴학을 해야 할 판이었다. 코피 흘려가며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해 겨우겨우 휴학 없이 졸업을 하고, 대학 교수 추천으로 입사한 회사는 블랙 기업이다.

야근은 밥 먹듯이 하고 주말에도 수틀리면 출근해서 작업을 해야 하는. 그나마 위로라면 수당은 확실하게 챙겨준다는 것? 아마 이렇게 부려 먹으며 야근수당도 안 챙겨준다면 이 곳에 일하는 회사원들이 잘 벼른 식칼을 들고 사장실로 찾아갔을 것이다. 36살 회사원 양호열의 인생은 무채색에 재미없다.

실재로도 이렇게 금요일 밤 8시가 넘도록 야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 팀장님···. PPT 자료 최종본, 메일 송부해드렸습니다."

기운 없이 울리는 팀원의 목소리에 양호열은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하다. 빌어먹을 회사. 빌어먹을 과장. 월요일 발표에 쓰일 PPT 자료를 금요일 점심 지나서 추가 수정하자고 하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그러고서 지는 칼퇴를 해? 이 회사 와서 태운 담뱃값으로 중고 소형차 한대는 샀을 것이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작고 소중한 월급 때문에 버티고 버티길 몇 년. 욕하고, 담배 태우고, 술 마시며 견디니 그는 어느새 팀장이라는 직급에 올라가 있었다.

"아까 말씀드렸던 자료 추가했나요?"

"네, 추가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마무리 지을 테니 이만 퇴근하세요."

퇴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듯 팀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이미 9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지만 일단 이 회사에서 탈출한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직장인 노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말하며 후다닥 짐을 싸 퇴근하는 그에게 손 인사 하곤, 양호열은 오늘만 몇잔째인지 모를 블랙커피를 마시며 직원이 보내준 PPT 최종본 내용을 읽었다. 읽기 편하게 요점 정리가 잘 되어있고 수정사항도 확실하게 반영되어있다. 이번 팀원은 일머리도 좋고, 팀 분위기에도 잘 어울리니 제발 오래 다녔으면 좋겠는데.

월요일에 있을 발표 자료를 정리하고 허리를 펴니 사무실 시계는 11시 20분을 향해 가고 있다. 벌써 시간이? 토요일에 퇴근하고 싶지는 않으니 양호열은 슬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요일 저녁 차창 밖 세상은 야경으로 반짝인다. "아름다운 도시 야경의 진실은 누군가의 피눈물 나는 야근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푸하학 웃었는데. 자신이 이렇게 도시 야경의 불빛 하나가 될 줄이야.

회사에서 나오니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지 않다. 가로수길의 벚나무들은 어느새 꽃봉오리가 가득 올라와 하나둘 꽃을 피우니, 곧 벚꽃은 만개할 것이다.

사람들이 꽃놀이 간다고 들뜨겠군. 

습관적으로 품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무는데 누군가가 담배를 휙 뺏어간다.

"이제 끝났냐?"

눈 앞에 커다란 그늘이 진다. 검은 캡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나 불빛에 반짝이는 빨간 머리칼. 검은 트랙 수트 세트를 입고 있어 골목길에서 마주친다면 왠지 꼭 피해야 할 것 같은 외관의 남자.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

"백호?"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요건 압수! 양호열의 담배를 휙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다. 다른 사람이 담배를 가져간다면 바로 인상 구기며 멱살잡이 하겠지만 상대는 강백호다. 그저 이 금요일 밤에 자신의 오랜 친구가 회사 앞에서 자신을 기다려줬다는 게 너무 기쁜 나머지 "아~ 담배? 응응 괜찮아 백호야. 어차피 안 피울거였어!"라며 양호열은 헤실헤실 웃을 뿐이다.

양호열은 여전히 강백호에게 과하게 관대하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많이 기다렸어?"

"그냥, 할 일도 없기도 했고. 넌 바빠 보이니 내가 와서 기다렸지."

이렇게 늦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회사원들은 다 이러냐? 강백호는 목뒤를 주무르며 양호열 옆에 섰다. 고등학교 때보단 양호열도 키가 컸지만 강백호는 물을 흠뻑 맞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랐다. 지금은 196cm라고 했던가? 30대 후반을 달려가는데도 몸은 탄탄해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가다가 눈을 꽉 감았다. 정말 미쳤군. 정신 차려라 양호열.

"호열아! 나 배고픈데."

"아, 기다려줬으니 내가 살게. 뭐 먹을래?"

"전에 갔던 라멘집 갈까? 교자 추가해도 돼?"

"열접시 추가해도 됩니다. 강 감독님."

"역시 화통하시네요, 양 팀장님."

"진짜 좋아!" 신난 강백호의 외침에 양호열은 잠시 움찔 했다.

······교자가 좋다는 말이겠지. 나이를 헛먹은 것인지 양호열은 강백호의 의미없는 "좋아!" 라는 말에 아직도 가슴이 철렁인다. 언제쯤이면 무뎌질런지. 사춘기 시절은 다 끝났는데 말이다.

아마 이제 백호도 나이가 있으니, 곧 맘에 드는 여자를 데려와 결혼한다고 할 테고, 자신은 그 옆에서 예전 북산이 우승했을 때처럼 축하의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할수있다. 마음과는 다른 표정을 짓는 일. 거짓말을 하는 일은 자신 있으니까.

단골 라멘집에 들어가니 사장님이 "오! 오셨어요?" 아는 체 한다. 강백호는 타고난 먹성이 좋으니 이곳 말고도 다른 가게 사장님들에게 늘 환영받는다. 당장 이 라멘집도 매번 올 때마다 라멘은 5그릇, 교자는 열접시 이상 먹는 매출 일등 손님이기에 사장님은 콧노래를 부르며 화구에 불을 피운다.

"사장님~ 돈코츠라면 점보랑요, 교자랑 모둠 고로케랑 치킨 가라아게랑요. 호열이 넌 뭐 먹을래?"

"전 차슈동 하나요."

아, 라멘집 사장님 웃는다. 오늘 매출 수직상승인가 보군.

주문한지 얼마 안 되어 금세 따뜻한 라멘과 사이드 메뉴들이 나왔다. 강백호는 "잘 먹겠습니다!" 외치며 먹기 시작하는데 엄청 빠른 것도 아니고 느린 것도 아닌 일정한 속도로 음식을 해치운다. 마치 청소기가 일정한 속도로 음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양호열은 식사를 천천히 하는 편인데 강백호가 추가로 시킨 네 번째 라멘을 비울 때 쯤 자신의 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여기까지만 먹어야겠다! 외치는 강백호. 저렇게 먹어도 왜 살은 안 찌고 근육만 찌는 지 모를 일이다.

식당에서 나오니 어느새 자정을 지난 시각. 양호열은 배도 부르고, 요즘 계속 격무에 시달린 터라 슬슬 피곤함이 몰려왔다. 아쉽지만 슬슬 헤어져야겠다 싶어 휘파람을 부는 강백호를 불렀다.

"백호야, 나는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응, 좀 피곤해서."

"열아."

강백호는 꼭 뭔가 숨기는 게 있을 때 양호열을 "열아." 라고 부른다.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어? 오늘 토요일······."

"흐음, 몇 월 며칠?"

"오늘? 오늘······."

어제가 31일이었으니 오늘은 1일인가? 그럼 4월 1일. 4월 1일······. 4월 1일?

4월 1일!

"아! 세상에! 백호야 생일 축하해!"

"하하핫!"

강백호는 웃음을 터트리며 양호열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아무리 은퇴했지만 전직 농구선수의 손바닥은 여전히 맵다. 양호열은 방금 먹은 라멘이 다시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매년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겨주던 백호의 생일이다. 올해는 정말 미칠 듯이 회사가 바빠서 날짜 개념이 없었는데! 그는 다급히 강백호의 팔을 잡았다.

"백호야,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엉? 가지고 싶은 거? 이미 매 해마다 네가 다 줘서 말이야. 모자, 밧슈, 운동복······. 그러고 보니 오늘 입은 거 다 네가 선물해준 거네? 잘 입고 있다 야!"

"응, 잘 입으니 내가 더 좋네. 그럼 올해는 시계 사줄까?"

"시계는 나 이미 있어. 옛날에 협찬 들어온 거."

"아, 그렇지? 훨씬 비싼 게 있구나. 그럼······. 그럼 양복?"

"나 어차피 시합 할 때나 예의상 걸치는 거지 트레이닝복이 훨씬 편한 거 알잖아?"

"그럼 새 트레이닝복을!"

"아니아니아니, 열아."

잠깐만 기다려봐.

강백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깜짝 선물도 좋지만, 30대가 넘어가니 상대에게 실용적인 게 최고였다. 양호열은 강백호가 필요한 것을 잘 파악하여 매해 선물을 해줬고, 그의 선물은 늘 강백호의 마음에 쏙 들곤 했다. "야! 호열아! 어떻게 알았어? 새 밧슈 필요했는데!", "호열아! 모자 고마워! 하나 사려고 했는데 잘됐다!", "호열아! 이 트랙 수트 세트 너무 편해! 그냥 막 입어도 되니 너무 좋아!" 양호열은 강백호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면 행복했다. 팍팍한 이 세상 돈 벌어서 뭐하냐,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게 최고다.

그런데 올해는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이렇게 생일 인 줄도 몰랐으니 생일선물을 무엇을 줘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

올 해 강백호는 무엇을 달라고 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정했다!"

강백호는 씨익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역시 이 몸은 천재야! 시원스레 웃던 강백호는 이내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양호열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얇은 와이셔츠를 사이에 두고 전해지는 커다란 두 손은 불 같이 뜨거워서 양호열은 진지하게 혹시 보증을 서달라고 하는 건가? 돈을 빌려달라는 걸까? 싶었다.

"양호열 씨."

와, 양호열 씨래. 진짜 보증 서달라고 하는 건가 봐.

"제 생일 선물로."

어떡하지? 보증은 가족도 서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백호인데? 해줘야 하나? 해줘야 하나!

"당신의 인생을 내게 주세요."

보증을, 보증을······.

뭐?

"······아. 미안, 뭐라고?"

"크흐으으음! 크흠!"

어느새 제 머리만큼 붉어진 얼굴이 된 강백호는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하하, 백호야 어깨가 떨어져 나갈것같은데?" 아픔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던 양호열은 어느새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은 강백호의 표정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잦은 야근이 이리 무섭다. 헛것이 들리다니.

"양호열 씨, 올해 제 생일선물로 당신의 인생을 주십시오."

또박또박 말하는 강백호의 말이 양호열을 꿰뚫는다. 양호열은 이제 어깨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반응이 없자 강백호는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어, 너무, 너무 비싸다면! 내 남은 인생도 너에게 줄게. 어때? 이 정도면?"

나 이제 돈도 많이 모았고! 집도 살 수 있고!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강백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강백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양호열은 이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피로 누적으로 인한 것인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저 사람이 정말 강백호가 맞나? 그 강백호가 맞냐고? 이거 진짜야? 꿈 아닌가? 인생을 달라니! 결혼하자는 말인가? 아니 남자랑 남자끼리 결혼이 되나? 아니! 애초에 사귀지도 않는데?

이건 진짜······.

"거······."

"응? 거?"

"거짓말! 하지 마!"

"후눗?!"

퍼억!

갑작스러운 이마 박치기에 주저앉은 건 스스로 강백호 이마에 박은 양호열 본인이었다. 강백호는 그저 놀란 얼굴로 굳어있을 뿐이다. 쟤는 머리까지 근육인 건가 왜 스스로 머리를 박은 사람이 더 아픈 것 같지? 화끈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든다. 꿈이 아니야. 양호열은 바닥에 주저앉아 부어오른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강백호. 사람 놀리는 거 적당히 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대체? 나 놀리니 재미있냐? 오늘 만우절이라 그래?"

아차.

양호열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4월 1일. 강백호의 생일이자 세간에서는 만우절, 거짓말을 하는 날. 아마 강백호는 자신의 생일을 말했을 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거짓말!" 일 것이다. 강백호는 그래서 자신의 생일날에 "거짓말이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용팔이도, 구식이도, 대남이도 암묵적으로 4월 1일에는 절대로 강백호에게 거짓말로 장난을 치지 않았다.

큰일이다! 백호가 길길이 날뛰겠구나! 싶었는데 강백호는 조용히 양호열을 바라볼 뿐이다. 다만 그 눈빛은 형형히 빛나고 있어서 꼭 야생동물의 눈빛 같다.

"야, 호열아."

강백호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저건 백호가 민망할때 주로 나오는 버릇인데.

"그, 갑작스럽긴 해도 나 꽤 오랫동안 고민했거든?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줬음 좋겠는데."

"······으어?"

"아무튼 올해 내가 원하는 생일선물은 그거 하나야."

줄지 말지 네가 잘 생각해봐.

다시 시원스레 웃으며 모자를 쓴 강백호는 그럼 양 팀장님 퇴근 잘 하십쇼, 잘 먹었습니다! 외치며 뛰어갔다. 가로등 불빛에 잠깐 비춰진 그의 뒷목이, 귓가가 제 머리칼 같이 붉다. 

길거리에 홀로 주저앉아 있는 양호열은 점점 멀어지는 강백호를 바라보다가 이내 버릇처럼 담배를 찾았지만, 아까 강백호에게 뺏긴 담배가 마지막 돗대였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강백호에게 잡혔던 양 어깨에는 아직도 그 뜨거운 손의 열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양호열 씨, 올해 제 생일선물로 당신의 인생을 주십시오.'

내 인생?

고작 내 인생을 건네주고 너의 인생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싸게 먹힌 거 아닌가?

백호야

너는 내 인생을 달라고 했지만 너에게 줄 내 인생은 너무나 작고 초라하고 재미없는데

정말 그걸 원하는 거니?

"하하하······. 미치겠네, 진짜."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05분.

강백호의 생일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22시간 55분.

양호열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비척비척 걸어갔다. 집으로 가자. 일단 집으로 가서 푹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줄지 말지 네가 잘 생각해봐.'

도시의 야경은 반짝이고, 올려다본 밤하늘은 별 하나 없이 깜깜하다. 오직 달빛만이 휘영청 빛나는데.

36살 양호열 팀장의 심장은 눈치도 없이 두근거리고, 재미없다 생각했던 그의 무채색 인생이 조금씩 붉은 빛으로 젖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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