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혼인의 행방불명 - 미르

상현미르 약혼썰 요약해드리는 용도로 썼던 3인칭 시점 글

그것은, 당사자들도 예측 못한 이야기.

"장미르, 네가 왜 거기 있냐?!"

"네? 으에에?! 선배님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한 카페에서 이루어진 개그 막장 드라마…… 아니, 맞선 이야기다.


"……."

"……."

배상현과 장미르.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원인의 발단은 둘의 집안사정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전통을 중시하는, 쉽게 말해 꼰대 기질이 심한 가정이었기에 연애를 잘 하지 않는 미혼 자녀들을 들들 볶아 선이라도 보게 시킨 것이다.

40대인 상현과 달리 미르는 아직 20대 초. 나이 상 여유가 있지만 집안에서 쫓겨난(뭐, 부모님 돈으로 독립한 거지만) 본인의 외삼촌과 바통 터치하듯이 차기 가주로 내정되어 상당히 노골적인 압박이 시작된 것이다. 사전에 물어보기는 했지만, 미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집안에서 터치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렇게, 당사자들은 서로의 이름과 나이도 모르고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만나게 된 결과가 현 상황이다.

"그, 래서…… 너도 억지로 끌려 왔다고?"

"네. 아, 하지만 차기 가주 하겠다고 나선 건 저니까요! 감당할 일이죠! 화룡류는 가족끼리 내려져 오는 무술이니까!"

마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처럼 웃으며 외친 미르의 표정에는 어두운 그림자 하나 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 상황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앞에 있는 상대가 믿음직스러운 직장 선배라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한편 상현은 카페의 푹신한 의자에 가시가 돋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상대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마주한 것이 9년이나 차이가 나는 직장 후배이자 다른 직장에서는 의사 대 환자로 만나는 사이. 그것도 나이 차이는 무려 21살. 작은 쪽의 두 배! 삼진 아웃! 당장 파토내고 헤어지는 것이 타당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기엔 양심이…… 아니, 반대도 양심은 찔리지만.'

자신과 비슷한, 어쩌면 더 심한 환경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는 후배를 보고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선한 사람이고 그렇다고 모든 장벽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대단한 선택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현은 잠시 각자가 주문한 음료를 번갈아보았다. 자신이 시킨 것은 평범한 커피…… 핫 아메리카노인 것에 비해 미르가 시킨 음료는 약간의 커스텀을 더한 달콤한 커피 음료. 단것을 꺼리지 않는 상현도 자주 먹기야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원하는 대로 커스텀 주문까지 하며 즐겁게 음료를 마시는 후배의 모습은 도저히 맞선 상대의 그것이 아니었다.

……미르는 그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안심하고 긴장을 풀어버렸을 뿐이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빨리 마시고 일어날 수 있을 에스프레소를 시켰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너도 싫을 거 아냐?"

"싫, 다기 보다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상황이라……."

싫음도 좋음도 없다. 무의 경지. 그것이 미르의 결론이었다. 첫사랑도 아직인 미르는 애초에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상태.

미르는 잠시 자신의 쌍둥이 동생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회상했다.


"나머진 엄마나 다른 사람들이 정해줄 거고, 형한테는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형 이상형은 뭐야?"

"이, 상형?"

"뭐야? 그 애매한 띄어쓰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에 미르는 놀라고 있었다. 아니,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다. 사전을 본 적은 없지만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은 수학여행 때 남자아이들과 숙소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미르는 '좋아하는 사람 있냐'라는 질문에 '강한 사람이 좋다'라고 대답했을 뿐이라, 그것이 사랑 이야기라고 인지하지를 못했다.

"그, 그러니까…… 성실한 사람?"

"성실하지 않으면 애초에 형 생활패턴을 못 따라가."

"무슨 소리야?!"

미르는 자신의 생활패턴이 너무 빡빡하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종일 깨어 있고 12시 취침. 10년 이상 버틸 만한 패턴이 아니다.

그런 마지막 외침은 무시하고, 쌍둥이는 다음을 재촉했었다.

"그리고……."

미르는 잠시 긴장을 느꼈다. 다음으로 생각난 이상형이란, 미르에게 있어서 말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사……."

"사?"

"상냥한 사람……."

그 결과, '사람'이라는 단어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해버렸다.

범과 이리는 갑자기 사랑이라는 화제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형을 보고 꼴값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에 미르는 볼을 더욱 붉혔다. 어휴, 꼴값.

"……구, 구체적으로 말해 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겠다 싶어진 이리가 먼저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딱히 그, 그런 걸, 말로 표현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옆에 있어주고…… 나를 도와주고, 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실패할 게 뻔하니까…… 그래도 웃어주면 좋…… 으으으으으……!"

"악! 꼬집지 마!"

"네가 먼저 이런 상황을 만든 거잖아!"

"때리지 말라고!"

미르 딴에는 조금 토닥거린 정도였지만, 흥분한 상태에서 단련을 거듭해온 미르의 주먹을 아주 매웠다. 마라탕 4단계였다.

매운 주먹에 당해버린 이리는 '멍 들겠네'라고 중얼거리면서 주물거렸다. 그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뭐, 일단 알겠어."

"형의 이상형도, 형이 밖에서 생활하게 돼서 다행이란 것도."

"뒤에 건 뭔데?!"

다소 딱딱한 말투에 가려져 있어서 미르는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이런 집에서 계속 생활하는 것보다 지금 상태가 미르에게 맞는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미르는 난처할 뿐이었지만.


막연히 이런 사람이라면 좋을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은 해봤지만 확실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고, 눈앞에 있는 상대는 생각도 못 해본 사람이었지만 싫기는커녕 안심이 된다. 그런 미묘하고 미적지근한 감정밖에 없다.

미르의 대답을 들은 상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다른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몇 번 끌려 왔댔지?"

"다섯…… 여섯?"

"그 사람들은 어땠냐?"

그 질문에는 잠시 움찔거리더니 곰곰히 생각하는 척, 시선을 피했다.

정확한 나이는 듣지 못했지만 분명 그 사람들도 나이 차이는 제법 있을 것이다. 얼굴을 보자마자 코웃음 친 사람부터 적당히 얘기만 나누고 헤어진 사람, 가족들에 대해 위로를 전한 사람,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한 사람까지. 다양했지만 긴장 탓인지 말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기억은 남지 않았다.

그 뒤에 몰래 엿듣고 있던 동생들이 자신의 미세한 반응을 토대로 'NO' 사인을 보낸 것과 어디까지나 '실수로' 상대의 팔을 꺾은 탓에 분쟁이 일어났던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그러고 보니 지금도 저쪽에 애들이 있지……. 정말이지, 공부는 대체 언제 하는 거람. 쉴 시간은 있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지만 미르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길 줄 아는 청년이 아니었다. 상현은 그 표정을 보고 별로 좋지 않은 상황임을 짐작했다.

다른 생각을 하던 미르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상현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에, 여기서 돌아가면, 너……."

"뭐, 집안에서 또 다른 상대를 찾겠죠? 그 전에 제가 사랑, 을 찾게 되면 몰라도…… 하하."

사랑이라는 말에 쑥스럽게 웃어버리는 미르. 평소와는 달리 반묶음으로 묶은 머리카락을 꼼지락꼼지락 만져대며 실실 웃었다. 사랑이라고는 만화로밖에 배운 적 없는 순박한 청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쉽지.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적인 현상인지라 웬만한 일이 없으면 또다른 맞선 상대를 찾을 게 뻔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사람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하, 돌겠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상현에게 있어서 미르는 소중한 후배이다. 그가 괜한 고생을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집안에 들들 볶이는 것도, 그 결과 이상한 사람에게 잡히는 결말도.

그런 고민을 하는 상현 앞에서 미르는.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사람이 나오려나~. 솔직히 더 하고 싶진 않지만, 이쯤되면 랜덤 뽑기 게임 같아진단 말이지.'

그런, 쓸데없는…… 이상한? 느긋,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웬만한 상황은 즐길 줄 아는 그의 몇 안되는 특기이다. 그는 맞선을 캐릭터 뽑기 게임 감각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사람에게 레어도를 따지는 짓은 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하나, 제안이 있는데."

"네?"

상현은 고민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선을 어디까지나 '약혼'으로 성사시키는 거다."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그게 가장 최선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미르의 나이를 생각하면 꼭 언제 할 것이라고 정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일단 약속해두면 다른 상대를 찾게 만드는 압박은 사라질 것이다. 당장 해야 하는 결정의 유예는 가능하다.

그런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

그 말을 들은 미르이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역시 저 녀석도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았나 보네.'

'와아! 전혀 생각 못한 방법이다! 역시 선배님은 대단해!'

아……!

서로의 생각은 미묘하게 달랐지만 최선의 방법인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네, 그런 거라면!"

합의가…….

"잠시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대답해!"

"생각이요?"

"정말 나랑 붙어도 괜찮겠냐? 집안에선…… 아니, 그쪽은 이미 알고 벌인 거겠고. 그렇다고 해도 이건……. 하아, 쓰읍."

그 말에 무슨 뜻일까, 골똘히 생각하는 미르였다.

"자칫하면 진짜로 결혼해야 한다고."

이어진 말에는 영 와닿지가 않았다.

미르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히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상대였고, 나이 차이가 너무 큰 건 이상한 일이라는 개념도 있다.

'역시 아무래도 좋은 거 같아…….'

그러나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기가 싫었다. 정확히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고민으로 선택하고 수습은 나중으로 미루고 싶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선택해서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인생이었기에.

남의 일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자기 일이라면 조금, 생각을 덜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진짜로 그렇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고…… 선배님께서 저에게 나쁜 것만 있는 제안을 할 리는 없잖아요?"

"……그래, 그렇지."

이상하게 선배들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후배였다.


"이, 이게 이렇게 된다고?"

"집에는 이따가 연락이 가는 거지?"

"우리 형 미친 거 아냐?"

"저 사람 그 병원 원장님이잖아?! 괜찮은 거야?"

두 사람이 헤어진 후. 자연스럽게 동생들과 합류한 미르는 최종적인 결정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들이 보기엔 어땠어?"

"어땠고 뭐고…… 형이 아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당연히 분위기는 험악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쌍둥이가 판단해야 할 상황은 오지 않았다.

쌍둥이가 걱정하는 것은 약혼이 결정되면 주위의 눈총을 받을 것이고, 다른 상대를 찾을 수도 없을 상현에 대한 죄책감과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이 없는 현 상황.

"유예라고는 하지만 그냥 미봉책이잖아, 이건."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미봉책이 뭔데? 재밌는 책?"

""하아………….""

이 인간이 한 사람의 어른이긴 한 걸까? 라는 의문을 꾹 삼키고 이상한 타이밍에 내뱉은 질문에는 그냥 인터넷 사전 첫 페이지로 응답한 쌍둥이였다.

"난 이제 유예만 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해. 이 인간한테 결혼은 아직 일러."

"신기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당사자 앞에서 눈물의 슬X덩크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이 약혼이 유예를 위한 약혼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숨기기로 약속하였다.

"뭔데?!"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미르는 소명과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직전에 본가에 들러 보고한 후, 어머니의 '수고했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약간 들뜬 상태였다. 그의 모친은 무뚝뚝한 성향 탓에 그게 최선을 다해 힘든 일을 떠맡은 자식에게 주는 애정이었다. 아마도.

"왔니? 오늘 선자리에서 만난 건 어떤 사람이었어?"

그런 미르의 상태를 보고 아주 나쁜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심과 함께 웃으며 맞아준 것은 당연히 집에서 기다리던 소명이었다.

미르는 상현과의 약혼이 결정된 직후, 소명에게 맞선 결과를 알려주었지만 정작 중요한 상대에 대한 이야기는 빼먹은 상태였다. 분명 자신이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에 까먹은 것이리라.

소명은 하던 일을 멈추고 미르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다.

좋은 결과라면, 이제 남은 문제는 상대에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것뿐이다.

"선배님도 잘 아시는 분이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응?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니?"

워낙 해맑은 웃음에, 소명도 평소의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며 되물었다.

동시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아이와 선을 볼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상현 선배님이요!"

"……."

순간의 정적.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라고?"

"어, 배상현 선배님이요……?"

소명은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지만 제대로 들은 것이었다. 청각도 예민한 무술인이 이렇게 조용한 집안에서 잘못 들을 리가 없음에도.

순간적으로 그 웃음이 굳어버리고, 무의식중에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심상치 않게 보던 미르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저, 저기……."

"잠시 나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배웅을 할 뿐이었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홀로 남아버린 미르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이렇게 미룰 수 있게 됐다면 당분간은 화룡류 무술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겠다! 아, 물론 주월 임무랑 알바도……'하는 느긋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명과 상현은 주월 내 훈련장 대련실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현은 어린 후배가 보지 않는 곳에서 시원하게 후드려 맞고 있었다…….

"오빠 미쳤어?!"

공식적인 대련 신청 후 대련실에 들어서자마자 소명이 상현을 발차기로 화려하게 날려 보냈다. 아직 경계태세조차 갖추지 않았던 상현은 그 발차기에 보기 좋게 날아갔다.

쓰러진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상현은 소명을 보았다.

"야, 지금 뭐 하자는……."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 말은 듣지도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주먹이 상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현은 반격이야 하지 않았지만 불시에 들어온 그 공격은 무의식중에 피해버렸다.

"설명 좀, 듣고! 윽!"

"지금 이게 설명한다고 납득이 될 상황이야?!"

소명의 이어진 공격은 전부 상현의 몸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진심이 담긴 매운 주먹질과 발차기가 여과 없이 상현을 타격했다. 그 모습을 이 일의 제일 큰 관계자인 미르가 본다면 필시 '역시 선배님이셔! 태권도 멋있어!'라고 할 것이 뻔하다. 상현 본인은 어느 정도 공격을 막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은 그냥 맞는 대로 맞았고, 아주 험한 공격만을 피했다.

소명이 손발에 준 힘만큼 소명의 분노만은 확실하게 와닿았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그리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상현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현에게도 입장이란 것은 있었다!

"아니, 이유가, 있었다고!"

그런, 사촌지간의 격렬한 몸싸움(일방적)에 지나가던 멤버들은 모두 소란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고, 저기는 뭔 일이냐?"

(그게……. 상현 씨가 20살 연하를 만난댔나? 그렇게 들었어요.)

"뭐? 형씨가?"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어린애를…….)

(그것도 주월 13호 동료래…….)

"허……."

귓속말 따위 하지 않지만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것이 무성한 소문의 작은 시작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동안 이어진 몸싸움(일방적) 끝에, 소명의 화려한 돌려차기가 상현의 관자놀이를 세게 때렸다.

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상현은 힘없이 쓰러졌다.

"어윽……!"

"후우……."

쓰러진 상현은 그대로 엎어져서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일단 화를 억누른 소명은 상현을 내려다보며 웃음기없는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하아……. 설명은 미르한테 들을게.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연락하지 마."

소명은 쓰러진 사촌오빠를 두고 성큼성큼 대련실을 나갔다.

힐끔힐끔, 또는 대놓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어느새 해산한 상태였다.


저녁을 준비하고, 멍하니 아무 생각없이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미르는 벌떡 일어나 문앞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은은한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는 선배의 모습에 잠시 긴장하고 맞이해버렸다.

"오,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예요!"

"그래. 맛있는 냄새네. 먹으면서 얘기할까?"

"네!"

'무슨 얘기……?"

신X함께 앞뒤가 다른 짤마냥 의아해 하던 미르였지만, 소명이 물어보는 대로 맞선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선 서로의 인적사항을 거의 모른 채 만나서 당사자들도 매우 놀랐다는 사실부터, 어디까지나 약혼에 그친다는 것, 가족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진짜로 결혼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

"상현 선배님은 아마 저를 걱정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소중한 선배인 소명이 걱정할까봐 이제껏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맞선 경험이 꽤 많은 상현에게, 미르가 했던 약간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예상이 가는 문제였다.

미르의 눈에는 그런 자기를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상현이 존경스러운 선배로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됐다는 거지……? 그래. 나중에 셋이서 얘기해보자."

"네!"

별다른 생각이 없는 미르와는 달리 소명은 여전히 복잡한 심경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상현 오빠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르랑……? 하아, 미치겠네…….'

그것은 나이를 42살이나 먹은 사촌오빠가 21살밖에 안된 자신의 제자같은 후배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며칠 후……가 아닌 다음날.

삼자대면이 시작되었다.

"……그래. 그래서, 유예를 가진 다음에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그러는데?"

소명의 질문이 들어오자마자 미르는 진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전혀,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선을 피한 곳에는 온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 상현이 있었다.

그런 미르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상현이었다.

"최대한 시간 끌어야지. 내 나이가 더 많아지면 저쪽에서 좀, 꺼리지 않…겠냐?"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점철된 문장과 사촌동생의 눈치를 보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소명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가로저어 반박했다. 특유의 긴 포니테일이 고개의 움직임의 맞춰 흔들거렸다.

"저쪽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 말이 맞았다. 그렇지 않으면 귀한 자식을 상대의 나이도 안 따지고 선을 보게 시켰겠는가.

실제로 장씨 집안 사람들은 유예를 받아들이기만 할뿐, 그로인해 상현의 나이가 많아질 예상을 하고도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사회적으로 용납이 될 나이 차이가 될 거라고. 애초에 미르는 출산을 할 수 있는 몸도 아니다. 아이는 입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이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이다.

이미 장씨 집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소명은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도 집안에 압력 들어와서 선본 거 아냐?"

"윽……. 그, 하아……."

무언가 말을 해보려고 입을 연 상현이었지만 결국 말을 찾지 못했는지 얼굴을 슬어내리며 다시 주워담았다.

그 둘을 번갈아보던 미르는 여전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소명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둘 다 대책없이 이러면 어떡해? 아니, 둘 다 내가 믿고, 아끼고…… 그런 사람들이지만……. 하아……."

동시에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 모습은 서로 닮은 사촌남매라는 것이 느껴졌다. 설령 지금 당장 의견이 갈린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이 같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힘이 있겠냐?"

"배상현!"

일순 소명의 언성이 높아졌다.

자신이 선택해버린 일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며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소명은 그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상황에 가장 크게 동요한 것은 다름 아닌 미르였다.

"……허억——!"

쿵, 하고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스스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몸이 붕 떠서 다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감각.

찰나의 순간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래, 주월에서 자기 앞으로 초청장이 도착해 조금 들떠 있었던 그날.

(왜 그렇게 생각이 없니?)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데에 대책도 없이 들어가서 어쩌려고 그래?)

(고등학교도 안 들어가고?)

(생각 좀 해라. 도대체가 네 일인데 너는——)

다시 이 장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선이 아래로 박힌 뒤였다.

그렇다. 그에게 이런 상황은 별로 낯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깨우쳐버린 정답을.

""네가 사과하지 마!""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알면 됐다'도 '잘못했으면 이제 어쩔 거야?'도 아닌 제3의 대답이 돌아와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당황해버린 나머지, 미르는 "으에……?"하고 힘 빠지는 소리를 내버렸다. 입가에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머리가 맑아지고 숨 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단은…… 해결할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해.'

미르는 잠깐 눈을 감고, 천천히 뜨며 말했다.

"진짜로 결혼하게 되면…… 분명 상현 선배님께 피해가 갈 거예요. 그럼 힘으로라도 어른들을 설득해서……!"

본인 스스로도 하면 안되는 방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각오하고 한 말이었다.

다른 이를 지켜야 할 검을 들고 가족들을 협박해내 원하는 바를 이뤄버리면 된다. 그런 사고방식은 마치, 지금은 그 집에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야, 장미르. 나한테 피해가 왜 와? 손해보는 건 너지. 안 그러냐, 류소명?"

"그래, 아는 사람이 왜 그랬어? 처음엔 드디어 오빠가 노망이라도 난 줄 알았거든?"

"아, 좀. 그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니까?"

미르를 두고 두 남매는 가벼운 말투로 말을 빠르게 주고 받았다. 미르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감을 느꼈다.

'기, 기분 탓인가? 분위기가 갑자기 누그러진 듯한…….'

기분 탓이 아니다.

두 사람은 미르의 반응을 보고 열이 조금 식은 것이었다.

본인은 전혀 눈치를 못 챘지만, 그의 반응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안 좋은 일을 떠올리고 주눅든 그 모습을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아무튼! 넌 잘못한 거 없고, 네가 힘들어할 필요도 없다. 알겠냐, 장미르?"

"아……."

미르는 스스로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자기 사정에 선배들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상냥한 사람들에 기대서 자신이 감내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것이라고.

자기가 전부 포기해버리면 될 일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안 드는걸요?! 그냥, 몇 년만이라도 어물쩡 넘길 수 있으면 충분해서…… 그래서…… 또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점점,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더이상 선배들에게서는 부모님의 잔상이 보이지 않았기에, 미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저는, 제가 원하는 건 미루는 거예요. 그 다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그걸 가장 원해요!"

마지막에는 다소 편안한 웃음을 띄우며(조금 헤실거리는 바보 웃음이기도 했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선언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의 결말은…….


"어, 장미르~, 요새 바쁘더니 웬일이야?"

미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알마만인지 모를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빴던 게 조금 줄어들었어요! 헤헤……."

'어째 전보다 더 헤실거리는 거 같다.'

소화제 광고라도 찍을 것만 같은 얼굴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미르의 친구들은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해결됐나 봐'라는 시선으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부모님도 쉽게 허락해주셨고, 선배님들도 납득해주셨고…… 당분간은 무술 연구에만 몰두해도 될 거 같아요!"

"어, 그래. 근데 무슨 허락?"

"아, 음……. 그건 비밀."

"뭐어?"

"그런 것보다 얼른 가요!"

그렇게 서로를 위한, 위장 약혼이 성사되었다.

상현은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대충, 자기보다 20살 어린 주월 동료를 꼬셔서 결혼을 앞두고 있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수준으로 거대해진 소문에 휩싸이게 되면서 모든 화살을 받아내야 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뭐,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이 약혼은 의미 없는 얘기지. 괜찮아, 괜찮아.;

……누구를?


요약.

그런데 이제 1만자에 가까운.

이 당시에는 상현미르가 연애관...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그냥 개그적인 의미였는데 그렇게 됐네.......

만약에 여기서 상현씨가 약혼을 하지 않고 각자 다른 상대를 찾았다면 아마도 미르는 조금 고압적인... 자기 엄마랑 외삼촌을 잘 버무린 듯한 여성과 결혼해서 시달리면서 살게 되지 않았을까요......(이 세계관은 동성혼이 법제화 되었으며 자캐동맹은 올젠더 동맹입니다.)

TMI. 아직은 백업이지만 2차 창작이나 개인적인 글을 새로 쓰면서 유료글을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9할 정도가 타의에 의한 거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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