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소설 속 조연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라푼젤

절대로 그 마녀처럼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

소설 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달도 뜨지 않고 모닥불만이 조용히 일렁거리는 밤, 유예성은 꼬마 유릭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동화들을 들려주곤 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라푼젤이라는 제목의 서양 동화였다. 유예성 본인이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주인공은 마녀의 탑에 갇혀 살던 긴 머리칼을 가진 소녀 라푼젤이다. 마녀는 탑에 들어갈 때마다 라푼젤의 장발을 사다리처럼 사용하여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우연히 탑 근처를 지나가던 왕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마녀의 손에 의해 머리칼이 짧게 잘려 쫓겨난다.

마녀는 자신이 잘라낸 라푼젤의 머리카락으로 왕자를 유인하여 높은 곳에서 그를 떨어뜨린다. 하필이면 가시덤불에 추락한 왕자는 눈이 멀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푼젤을 찾아 세상을 떠돈다.

하늘의 도우심일까, 결국 왕자와 라푼젤은 재회한다. 게다가 왕자를 껴안고 흐느끼던 라푼젤의 눈물이 왕자의 눈에 떨어지자 왕자는 시력을 다시 회복한다. 이후엔 마녀가 천벌을 받으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예성. 궁금한 게 있어."

"응?"

꼬마 유릭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녀 말이야. 라푼젤이 엄청 소중했으니까 탑에 가둔 거잖아?"

"…뭐?"

당황한 유예성은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잠깐, 감금은 애초에 소중한 상대에게 해도 괜찮은 행위가 아니라고 설명해야 하지 않나? 유예성이 속으로 허둥지둥하는 하는 사이에 꼬마 유릭이 말을 이었다.

"마녀의 행동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 나라면 탑을 오를 때도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잡고 올라가지 않았을 거야. 차라리 손가락에 힘을 줘서 탑 외벽의 돌출된 부위를 잡고 올라갔을 거라고.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그런 식으로 쓰면 라푼젤이 아플 게 분명하잖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건 안되지만 감금은 된다는 건가. 기묘하게 비틀린 꼬마 유릭의 가치관에 유예성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마지막에 라푼젤을 탑 밖으로 쫓아내는 것도 이상해. 차라리 왕자를 죽이는 편이 낫지 않아?"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화들짝 놀란 유예성을 꼬마 유릭이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잖아? 왕자만 없어진다면 마녀는 여태껏 지낸 것처럼 라푼젤과 단 둘만의 탑에서 지낼 수 있는걸. 나라면 그랬을 거야. 절대로 그 마녀처럼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

기껏 꼬마 유릭을 위해 꺼낸 이야기가 흉흉한 결론을 맺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담.

"잠이나 자자. 꼬마는 푹 자야 키가 크는 거야."

당혹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얼렁뚱땅 꼬마 유릭을 재우려 하자 다소 뾰루퉁한 시선이 유예성을 향했지만, 푹 자야 키가 큰다는 말이 꽤나 솔깃했는지 꼬마 유릭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더는 꼬마가 아니게 된 유릭이 중얼거렸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검은 장갑을 벗고, 정신을 잃은 유예성의 뺨을 맨손으로 쓸어내렸다. 무수한 시간이 흘렀으나 유예성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죽었다가도 다시 부활하는 기이한 특성 또한 여전했다. 부활의 대가로 그가 섭취해야 할 식사량이 '다소' 많긴 했으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유릭 자신의 피와 살점이 유예성의 체내로 들어가는 건 오히려 기껍기까지 했다.

"예성. 이젠 정말로 피를 나눈 사이가 됐어."

가족이란 건 그런 거잖아. 유릭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문득 침대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유예성의 긴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붉은 머리칼을 한데 고이 모아 천천히 땋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라푼젤의 머리칼 같군. 그럼 내 쪽이 마녀인가? 유릭이 조소했다.

유예성의 붉고 긴 머리카락을 땋아 길게 늘어트린 유릭은 그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쥐었다. 그리곤 그 위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절대로 그 마녀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 우리 둘은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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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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