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나오 귀문의 사내 (3)
축시의 시작
* 나오야의 심리 변화를 위해 원작을 어느 정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 사망 소재가 있습니다
* 사투리가 어설픕니다
3. 고복
주술계에서 어린 시절의 낭만이란 가치 없는 것이다. 주술사의 평균 수명은 짧다. 십대에 요절하는 이들이 널린 세계다. 그렇기에 낭만이니 청춘이니 하며 무모한 짓을 하고 자신을 과신하며 낙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주술계에선 시간 낭비다. 주술사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때에 자신의 가치를 셈 당하고, 미래를 단정 짓고, 선을 그어가며 살아간다. 그러지 않는다면, 자신이 언젠가 의미 없이 죽어 없어질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불시에 마주하고 불행해지니까. 쓸데없는 꿈을 꿔 죽음을 재촉하게 되니까.
스스로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손에 꼽는 주술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천운이다. 설령 그 천운을 거머쥐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는 것은 시간의 흐름 뿐이고, 시간의 흐름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모든 것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냉담하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어찌할 수 없는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교토교에서 날아온 의뢰를 전달받은 것은 매미가 시끄러운 어느 여름 날이었다. 나오야는 나오비토의 부름에 당주의 방으로 향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분지인 교토의 폭염은 극에 달했건만 이 구닥다리 집에는 냉방설비가 거의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옷을 시원하게 벗어재끼는 것도 허락해주지 않아, 나오야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손부채질을 했다. 이런 시대를 잘못 착각한 집안에서 지금 16살이 된 나오야의 외관은 몹시도 눈에 띄었다. 겉옷은 하카마와 기모노, 속에는 스탠드 칼라 셔츠를 입은 서생풍이었지만 그 머리는 끄트머리만 남기고 모조리 수확철 밀빛으로 물들였다. 양쪽 귀에는 검은 피어싱이 달렸고 왼쪽 귀는 연골까지 뚫었다. 준 1급으로 승급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직후에 허락 없이 멋대로 한 것들이었다. 돌아왔을 때 나오비토에게 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나오야는 원체 남의 쓴소리는 듣지 않고 한 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죽어라 꺾지 않는 성정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에 그것으로 그쳤다.
문을 열자 술냄새가 풍겼다. 나오야는 이 냄새가 이제 나오비토가 마시는 것에서 나는 것인지 다다미에 배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오비토가 턱으로 맞은 편에 있는 자리를 가리키자, 나오야는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아빠는 아침 댓바람부터 술이제? 글키 마시고도 아적 정정한기 용하다.”
“핫, 아직 현역에서 물러나긴 이를만큼은 정정하지.”
나오비토는 애장품인 호리병을 입가에 기울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맞은 편에 앉은 아들은 이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길어지고, 골격은 단단해지며, 근육의 밀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신체능력이 향상되었으니 자연히 원래도 훌륭했던 체술에 무게가 붙었다. 성장기 전후로 신체 감각이 달라져 그 변화에 애를 먹는 녀석들도 많은데, 나오야는 그것에도 쉽게 적응했다. 그러한 성장세에 걸맞게 나오야는 16세의 나이에 준 1급을 달성하는 쾌거를 보였다. 몸이 완전히 완성되는 시기에는 더 강한 주술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젠인 나오야는 이미 다음 대 젠인가의 당주감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고죠가와 젠인가의 후세대가 기정 사실화 된 지금, 교토교의 제안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교토 고전에서 너에게 보낸 전언이다. 이번 년도 교류회에서 개인전에 참여해주었으면 한다던데.”
나오비토는 나오야에게 교토교 학장의 도장이 찍힌 서한을 건네주었다.
“상대는 아마 고죠 사토루 그 녀석이겠지.”
형식상의 명목은 ‘미래에 주술계를 짊어질 인재들의 폭넓은 발전을 위해’ 교토의 젊은 준 1급 주술사가 행차해주었면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의뢰였다. 교토는 오랫동안 주술의 전성기인 헤이안 시대 때부터 주술계의 뿌리로 여겨졌다.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교토에 세워진 고전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올해 1학년이 되는 고죠가의 행운아 고죠 사토루와 비술사 출신이면서 특급 심사를 앞두고 있는 게토 스구루다. 그냥 패배하는 것도 아니고 도쿄교의 1학년 두 명에게 싹 쓸려버릴 것이 분명하니 우선 체면치레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러한 전언을 보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의도는 고죠 사토루의 존재로 인한 고삼가 세력의 격변에 그 원인이 있었다. 고죠 사토루가 태어나기 전의 고죠가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고삼가였다. 이름난 주술사 하나 없이, 옛 위상과 그 역사에 기대어 겨우 카모와 젠인의 세력에 발가락 하나 정도를 걸치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고죠 사토루가 태어나고, 그가 육안과 무하한을 동시에 가진 주술사임이 밝혀지며 고죠가는 가세를 회복하다 못해 다른 가문들을 내려다볼 정도가 되었다. 육안과 무하한의 동시조합에는 그 만큼의 힘이 있었다. 고죠가가 그를 필두로 내세워 영향을 내세울 것이 분명한 지금, 주술계의 늙은이들은 후일 고삼가의 세력도를 미리 파악하고 싶어했다. 고죠가에게 짓눌릴 것인지, 비등하게 세력싸움을 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역으로 잡아먹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러기 위해 미래에 각 가문을 대표하게 될 차기당주감의 차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것이 상층부의 목적일 터였다.
물론, 젠인 나오야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나오야가 고죠 사토루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오야는 손으로 대충 봉랍을 뜯어내고 서예체로 써내려간 서신을 훑어보았다.
“그래가, 다린 아재들은? 오우기 아재랑 진이치군이 이걸 기냥 흘려보냈을 리가 없잖여.”
오우기와 진이치는 나오야가 상전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차기 당주 후보로 가장 유력한 두 사람이었다. 토우지의 형인 진이치는 상전이 아닐뿐더러, 천여주박인 동생 때문에 그 혈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어 혼기가 꽉 차다못해 지났는데도 혼인을 치르지 못했다. 하지만 젠인의 정예 집단 ‘병’의 현 필두인데다 젠인 내 주술사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어 입지가 탄탄한 편이었다. 그 정도 인망을 쌓은 만큼 성격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얼굴만 토우지를 닮았더라면 나오야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진이치는 당주 후보로서 체통을 지키고 행동하는 편이었지만, 당주 자리에 집착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진이치를 당주로서 올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오비토의 동생인 오우기는 다르다. 그는 상전도 아니고 나오비토보다 실력도 떨어지면서 묘하게 자식의 차이 때문에 당주가 되지 못했다는 망집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쌍둥이 여식에게 돌리며 부정할 정도로 그는 당주라는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상전인 나오야를 대놓고 방해하지 않는 것은 역시 차기 당주 후보로서 체통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진이치의 지지자들과 오우기의 입장에서는 나오비토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상전을 가진 나오야가 거슬리는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몇 년전 젠인을 반쯤 쳐부수고 떠난 천여주박 낙오자를 긍정하는 성격 나쁜 꼬맹이의 지위를 끌어내리고 싶어했다. 그런 그들에게는 이것이 좋은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고죠 사토루라는 존재가 태어나면서 그 실효성이 입증된 십종영법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최근 카모가에서도 상전 보유자가 나타난 마당에, 투사주법은 두 상전에 대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했다. 그들과 향후 고삼가의 한 세대를 살아가야 할 차기 당주의 술식이 세력 경쟁에서 그닥 쓸모가 없다면…… 그렇다면 상전은 아니지만 젠인 내 입지가 굳은 자신의 세력이 당주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 무쓸모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젠인 나오야의 약함과 한계를 드러낼 수만 있다면…….
교토교의 제안을 빌미 삼아 젠인 나오야를 필패의 전장에 밀어넣을 수만 있다면.
“오우기는 찬성했다. 진이치는 네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어.”
“뭐어 글캤제.”
하지만 그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였다고 하더라도 교토교의 제안은 노골적이고도 억지스러운 내용이었다. 16세, 아직 고전에 입학할 나이도 아닌 젠인가의 차기 당주를 본인들의 체면치레를 위해 불러낸다니, 나오야가 싫다고 하다면 쉽게 거절할 수 있었다. 젠인 나오야 본인에게는 득이 거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나오야는 서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오비토를 마주 보았다. 제멋대로인 행동에 뒤따르는 악평, 차기 당주감으로서 기대과 우려를 동시에 받는 막내 아들은 옅은 금빛의 눈을 흔들림 없이 치켜 뜨고 제 아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황수정 같은 홍채를 두른 검은 동공 안쪽에, 여전히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토우지가 떠난 이후에도 흔들리는 기미조차 없이 자신을 깎아 단련하고 끝없이 기어오르는 자의 불꽃이었다.
그 표정이,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어 나오비토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아이는 타인의 평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거는 기대와 우려가 순식간에 돌변하여 제 목을 조를 것임을 걱정하지 않는다. 아마 이 아이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젠인 나오야 자기 자신 뿐이리라.
“내는 갈 기다. 사토루군과 싸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제. 기냥 넘겨삐기엔 아깝다.”
그 아이의 대답은 나오비토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오비토는 작게 한숨을 쉬며 술병을 바닥에 두었다.
“경험 삼아 가는 것이라도 말리지는 않겠다만, 그런 목적만으로는 부족하다. 알고 있겠지?”
“당연하제. 내 이길 수 있을 기라 생각하진 않아도 다아 생각이 있다. 기고에서 물건 좀 빌려쓸기다. 오우기 아재도 내 사토루군인테 묵사발 되는 길 원할텡게 싸운다카믄 좋다고 빌려주겠제.”
나오야는 패배가 뻔히 예상되는 싸움에 뛰어들겠다 선언하고는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기고 쪽으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가벼웠다. 기대와 설렘을 담은 발소리였다.
그래, 젠인 나오야는 그저 지기 위해서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원하게 패배하고 고죠 사토루에게 사토루군은 역시 강하구나, 하고 악수를 나누고 싶은 것만이 아니었다. 단지 그것에 만족하기엔 나오야에게는 타고난 갈망이 있었다. 자신의 성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목표가 있었다.
그 날 젠인을 떠난 토우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다짐했던 목표.
당주가 되어 토우지군이 옳다는 것을 이 떨거지들에게 알린다.
토우지군이 서 있는 그 저편에 닿는다.
문제는 두 번째 목표에 있었다. ‘저편’의 절대적인 기준은 토우지이지만, 젠인에는 토우지와 조금이라도 비견할 수 있을 만한 강자가 없었다. 그러니 나오야가 아무리 성장했다한들 그것을 체감할 수 없었다. 젠인에는 현재 나오야보다 등급이 높은 진이치나 나오비토가 있지만, 그들과 겨룬다고 해도 ‘저편’까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고죠 사토루와의 대결이 필요했다. 나오야가 생각하기에 고죠는 토우지보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분명히 저편에 서 있는 강자였다. 육안과 무하한의 행운아. 날 때부터 주령과 주술사의 균형을 깨뜨리고, 다른 고삼가들이 죽어라 상전에 목을 매는 계기가 된 한 살 터울의 사내아이. 나오야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잡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했다. 불쾌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격차가 있었으니까. 그는 상어였다. 송사리들의 수조에 과분하게 태어난 상어였으니 자신을 그렇게 봄은 당연했다. 그 뒤로 몇 번 말다툼을 하며 술식을 주고받았던 적은 있지만, 나오야는 단 한 번도 고죠에게 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술식을 써도 어느 순간 부웅 밀려나더니 정원의 연못에 화려하게 내던져진 기억만 무성했다.
그 때마다 언젠가 닿는다는 투지를 불태웠지만, 나오야는 그 언젠가를 막연히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강자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따라잡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까워해야 했다.
그러니 나오야는 이번 개인전을 발판 삼아 고죠에게 단 일순이라도, 아주 작은 흔적만 남길 수 있더라도 닿을 생각이었다. 십종영법술의 술사도 동귀어진이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육안과 무하한의 술사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투사주법을 가지고 닿아, 토우지가 서 있는 저편으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고 싶었다. 그 뿐이면 되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나오야에게 의미가 있었다.
교류회 당일 날, 나오야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듯 내려다보는 그 파란 눈을 보고 속으로 쓴 웃음을 삼켰다. 나오야를 늙은이들에게 휩쓸린 장기말로 보는 시선이었다. 가엽다고 생각했으려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고죠가 방심을 하면 할수록, 세워둔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더 컸으니까. 압도적 차이의 강자와 맞붙는다. 비겁하다고 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고죠와 게토가 참여한 단체전은 고작 5분 만에 끝이 났다. 고죠가 무하한으로 교토교 학생들을 밀어내는 사이, 게토가 조복한 주령들을 풀어 일대를 단숨에 휩쓸어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단체전 시간은 개인전을 위한 공간을 더 빨리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개인전이 하나, 둘 이어지고 게토의 순서에서 개인전이 단 몇 분만에 싱겁게 끝났을 때, 나오야의 가슴은 심장소리로 쉼없이 울리고 있었다. 유이한 ‘저편’의 강자 중 한 명과 곧 맞붙게 된다는 사실이 나오야를 고양시켰다. 닿을까? 닿을 수 있을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고죠에게 있다는 것을, 나오야는 알고 있었다. 상관 없었다. 타인의 가치판단 따위 신경쓸 것이 못 된다. 자신은 그저, 의미 있는 일을 사력을 다하여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오야는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두 손을 맞잡아 수인을 맺었다. 24개의 프레임을 단련된 화각으로 그려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단련된 몸이 1초라는 시간을 주파했다. 주력으로 강화한 주먹을 내미는 순간, 나오야는 고죠의 손바닥 안에서 흑옥 같은 색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빨려든다. 나오야는 재차 수인을 맺어 뒤로 물러났다. 술식 순전이 그려내는 인력에 옷자락이 찢겨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팔이 휩쓸렸다. 나오야는 헉, 숨을 내쉬며 웃었다. 등줄기와 갈비뼈 안쪽이 간질거리며 떨렸다. 흥분으로 혈관이 팽창하고 근육에 피가 돌며, 흰 얼굴에 발간 핏기가 돌았다. 두 눈이 크게 뜨이고 동공이 졸아든다. 피할 수 있다. 최속을 유지하며 반응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아, …… 후, 흐윽.”
목 안쪽에서 비린 맛이 올라왔다. 호흡이 고통스러웠다. 주력을 과하게 소비한 몸이 한계를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움직이는 것을 멈추면 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나오야는 눈꺼풀을 최대한 들어올리고 다시 프레임을 그려내려 너덜거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맞잡아 수인을 맺었다. 그러나 술식은 발동되지 않았다. 왼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노리는 바가 있었다. 그것의 관건은 주력의 소비였다. 무하한은 예로부터 고죠가의 상전이었지만, 고죠에는 이름난 상전의 술사가 많이 없었다. 이유는 무하한의 지나친 섬세함에 있었다. 무하한은 잠재력이 뛰어난 술식이지만, 그 섬세함 때문에 진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주력의 미세한 제어가 요구되었고, 이는 한 세대에 한 명 밖에 태어나지 않는 육안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죠는 육안을 가지고 있어 근접 방어, 원거리 포화 등의 응용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주력이 많이 소비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투사주법보다는 그 소비의 정도가 컸다. 비록 고죠가 타고난 주력의 양이 나오야보다 월등하긴 하지만, 투사주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버틴다면 그 기회가 있으리라 나오야는 짐작했었다.
주력이 지나치게 소모되면 자연히 고죠가 두르고 있는 무하한은 약해진다. 기회는 그 때에 있었다. 나오야가 가져온 주구 중 하나는 과거에 젠인가에서 고죠가의 무하한을 상대하기 위해 제작을 시도했던 실패작이었다. 송곳형의 그것의 끝은 닿는 주력의 반대 성질로 바뀌어, 순간적으로 무하한의 아주 일부 만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범위가 형태상 너무 좁다는 것이고, 육안의 소유자라면 그 일순 이후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도 있었다. 게다가 고죠는 급소에 두른 무하한은 절대 풀지 않을 것이기에, 상대적으로 우선도가 떨어지는 부위만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그 잔챙이 같은 상처에 나오야의 의미가 있었다. 이를 위해 특정 행동에 프레임을 적게 써 고죠의 눈에 잔상이 길게 남도록 교란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다른 투척형 저급 주구로 무하한을 계속 사용하게 유도했다. 부상의 정도를 최대한 줄여가며 공격을 회피하고 주력의 소모를 노렸지만, 고죠가 투사주법의 움직임을 예측해 날린 공격 몇 대는 어찌 피하기 힘들었다. 왼팔이 부서졌다. 오른팔은 근육이 다친 듯 했다. 겨우 피해낸 혁은 복부를 길게 스치고 옷자락에 숨겨두었던 그 송곳을 부서뜨렸다. 그 상태에서 공격을 회피하려 용을 쓰니 주력의 소모가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
수인을 맺을 수 없다. 주구도 쓸 수 없다. 주력은 거의 바닥났다. 팔이 부서지고 배가 찢어져 출혈이 심했고, 크게 움직이면 복강 내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쉴 때마다 통증 때문에 시야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엉망진창인 젠인 나오야에 비해 고죠 사토루는 혈흔 하나 튄 것 없이 멀끔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 파란 눈이 나오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여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상대도 되지 않았다. 단 한 방도 허락되지 않았다. 설령 사지가 부서져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해도 단 한 순간만 닿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보아라. 고죠는 처음부터 출력을 조절하며 젠인 나오야를 봐주고 있었고, 지금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라고 온정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죠 사토루는 진심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었다. 젠인 나오야는 그런 존재였다. 전심전력을 다해 부딪혀도 ‘저편’의 사람에게 단 한 톨의 진심도 받아낼 수 없다.
그래서 젠인 토우지는 그 날 나오야를 공격하지 않고 떠났던 것일까. 젠인에 품은 그 혐오의 감정의 일부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의 흐름은 현실을 관통하는 진리를 드러낸다.
주술계는 불합리하다. 태어나는 순간 주술사로서의 9할이 결정되고, 노력과 근성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런 것 따위로 태생의 차이를 메울 수 있다면, 세상에는 상전의 구분이 없을 것이고 고삼가는 더 강한 주술사를 가지기 위해 사람을 교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오야의 눈 앞에 있는 고죠 사토루와 나오야 본인은 그 교배로 태어난 주술사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죠 사토루는 손에 꼽는 성공작이고, 젠인 나오야는 2등에 불과한 투사주법의 보유자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들 상전, 상전 그렇게 부르짖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었다.
고삼가를 대표하는 각 상전인 무하한과 적혈조술, 그리고 십종영법술의 공통점은 그 범용성에 있었다. 각각 한계가 있다고 해도 그 술식들은 제령, 대인, 방어, 광범위 공격, 근거리, 원거리에 모두 적합한 형태로 응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술식을 보유한 자들이 그 극한에 다다르면, 단 한 명이라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이른바 ‘특급’이 되는 것이었다.
…… 하지만, 투사주법은?
고죠 사토루에게 닿기 위해서는 십종영법술이 필요했다. 그것은 오래전 어전시합에서 드러난 진실이었다. 육안의 무하한 술사를 상대로 억제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허라, 즉 십종영법술이 필연적이었고, 그것이 젠인이 목표했던 것임을 나오야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오야는 자신의 술식이 투사주법임을 알았을 때 낙담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강해질 것 같았으니까. 매번 훈련할 때마다 부족함을 깨닫지만, 그 부족함을 계속해서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애초에 나오야가 투사주법의 극한에 다다른다고 해도, 그래서 무언가 바뀌기라도 할까? 고죠 사토루는 지금 무하한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아직 성장하는 주술사다. 그 또한 무하한을 갈고 닦아 극한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면……
…… 지금 닿지도 못하면서, 향후 그들이 나아가는 ‘저편’에 있을 수 있을까?
나약해 빠진 소리 집어치워라. 나는 꼭 그들이 있는 저편에 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그것을 증명해내야만 했다. 저편에 있는 강자와 맞붙을 기회는 거의 없다. 지금 닿아야 했다. 여기서 닿지도 못하는 약자를, 강자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약자가 겨우 한 걸음 따라붙을 때 강자는 저만치 달려나가 점처럼 작아진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 순간, 뼈가 부서지고 피와 내장을 쏟아낼 지라도 여기에서 고죠 사토루에게 닿아야 했다.
어딘가에서 그 강함을 지니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을 동경에게, 토우지에게 닿을 수 있다는 증명을 자신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 가능성에 의미가 있었다. 수많은 타인들의 눈 앞에서 비참한 꼴로 버티어 서며 숨을 쉬고 있는 의미가 있었다.
“하하, 하…… 내나, 사토루군에게 이런 잔재주는 안되겠제.”
나오야는 흐읍, 숨을 들이키며 호흡을 골랐다.
수인은 맺을 수 없다. 하지만 투사주법 없이 고죠에게 덤벼들어 닿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투사주법을 쓰면서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을 술식 없이 한다고 될 리가 없었다. 수인을 만들어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오른팔은…… 그래도 움직일 수 있다. 주력을 부목처럼 둘러 휘두르면 된다. 주구는 부러졌지만 그 끄트머리는 옷자락에 남아 있었다. 이것을 오른손 주먹에 끼우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크게 움직이면 내장이 왈칵 쏟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일직선으로 달려들자. 일직선에 프레임 24개를 전부 끼워넣어, 단숨에 도움닫기를 끝내자. 그렇게 일격을 내리꽂자.
나오야는 복부를 누르던 오른손을 내렸다. 금빛의 두 눈을 크게 떠 프레임을 그려낸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해낸다. 수인 없이 그려낸다. 달려든다. 내지른다.
뚫어낸다.
토우지군에게 닿을 여지를. 내 의미를. 나 자신의 숨구멍을. 뚫어내 틔워내겠다.
호흡이 멈춘다. 몸을 돌던 피가 뇌에 후욱 몰리는 감각. 신경계에서 불꽃이 튀고, 시간이 느려지며, 시야가 넓어지는 듯 했다. 나오야의 몸이 앞으로 내달렸다. 속도는 무게. 속도와 무게는 힘. 그렇게 젠인 나오야는 무한에 도전했다. 그 무궁무진함에 손을 뻗었다.
공기를 만지는 듯한 감촉이 들었다. 어린 시절, 고삼가 회의 때 빠져나와 고죠 사토루와 놀 때에는 항상 이런 느낌이 들었다. 구름과 공기를 손에 쥐는 듯한 촉감이었다. 닿지만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그저 불가해한 존재로, 소꿉친구가 그렇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아, 내는……. 일순, 시야가 점멸하며 머릿속이 합선된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뒷목이 차가워졌다. 눈 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싶더니, 픽, 하고 새카맣게 물들기 전에 문득 부서진 바닥을 보았다.
“…… 독한 놈.”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잡어들의 수족관에서 키워진 잡어 주제에 상어를 꿈꾸는 그 미련함이?
그런 사고를 이어가던 나오야의 의식은 깜빡깜빡 명멸하다, 어느 순간 끊어지고 말았다.
나오야의 눈 위로 주홍색의 불빛이 비스듬히 떨어졌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가에서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오야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렇게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는데, 아픔이 적었다. 주력을 과하게 쓰고 출혈이 심해 멍하고 어지러운 것만 제외하면 외상은 거의 없었다.
그 반전술사라는 여자의 솜씨인 듯 했다. 과연 희귀한 부류의 천재라더니, 그 명성의 값을 했다. 창 밖을 내려다보니, 직원들이 개인전이 끝난 그 흔적을 치우고 있었다. 나오야는 그것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멀구나, 토우지군은.”
드르륵, 의무실의 문이 닫혔다.
젠인 나오야는 개인전에서 예정된 패배를 맞이했지만, 수인을 생략한다는 큰 발전 덕분에 차기 당주감 지위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오비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장한 나오야를 칭찬했다.
비록 닿지 못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오야는 쉬지 않고 수련과 제령에 매진했다. 하루에 세 건의 의뢰를 해치우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수련에 매진하는 바람에 젠인에 있는 허수아비의 공급이 부족해진 적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멈추어 설 수는 없었다. 그 때 닿지 못했다면, 따라잡기 위해 그들이 보기에는 하찮아보일 걸음이라도 계속해서 내딛어야만 했다.
그러다 다시 여름이라는 그 계절이 돌아왔다. 토우지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토우지는 어느 비술사 여자의 데릴 사위로 들어갔다고 했다. 후시구로 토우지가 된 그는, 성장체 암살 사건에 관여하여 삼천만엔에 성장체인 아마나이 리코를 살해했다. 당시 성장체의 호위로 두 특급인 고죠 사토루와 게토 스구루가 있었으나, 고죠와 게토 둘 다 중상으로 전투불능이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특히 고죠는 두부와 내장을 칼로 찔리는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 생과 사의 기로에서 반전술식을 터득하여 극적으로 회복, 토우지를 쫓아가 재대결을 벌였고 토우지는 왼쪽 상반신을 잃으며 사망했다고, 그런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야 그 토우지다. 젠인의 정예 집단이 떼거지로 달려들어도 상처 하나 없이 전부 처부순 사내였다. 그러나 젠인 출생인 토우지가 텐겐의 융합을 방해하고 성장체를 죽이는 범죄를 저지른 탓에 젠인이 한동안 소란스러워지고, 그를 처리하던 나오비토가 조금 피곤한 얼굴로 내일 고죠 사토루가 토우지의 유골을 인도하러 올 테니 네가 처리하라는 말을 건네오자, 나오야도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사실이란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매미 소리가 시끄럽고 푸른 하늘이 드넓게 펼쳐진, 아주 무더운 여름날에 나오야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본가로 이어지는 길목에 서서 고죠를 기다렸다. 본래는 집 안에서 받을 생각이었지만, 한동안 상층부에 젠인은 텐겐의 융합 방해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느라 뒤집어진 집안에서 토우지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역린이었다. 나오야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헤까닥 돌은 놈들이 유골함을 훼손하려 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처음에는 토우지의 유골을 건네받지도 말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주술계에 몸담은 자들의 유해는 주구나 주물의 주 재료로 쓰였다. 그런 이유로 겨우 유골이라도 받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나오야는 아지랑이가 자라나는 시야 저 너머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은색으로 빛나는 백발에 보석 같은 푸른 눈을 가진 사내가 저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다르다. 그 조각 같은 아름다운 외관은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달랐다. 1년 전 맞붙었던 그 1급 주술사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를 마주했을 당시에는 닿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젠인 나오야가 지금당장 어찌 용을 써도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것을 실감케 하는 격의 차이가 있었다.
나오야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같은 강자를 잡아먹고 최강이 된 옛 소꿉친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리들은 여저이 토우지군을 좋아하지 않은께. 영 불안해가.” 그리고 어색하게 살짝 웃어보였다. “내 미리 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자 고죠는 들고 온 유골함을 나오야에게 순순히 건네주었다. 흰 도기면에는 후시구로 토우지라는 이름이 서예체로 적혀 있었다. 무게는 가벼웠다. 그 거대한 사내가 자신의 품에 들어오는 크기로 작아지고, 이만큼 가벼워졌다니, 그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 뜨거운 체온을 가졌던 토우지가 이렇게 차가운 함에 전부 담겨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 우뗬나?”
나오야는 두 팔로 안아든 유골함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젠인 내에서 가장 강한 자리인 당주의 자리를 차지해 지키며, 토우지에게서 상대로 인정할 만하다는 눈빛을 받고 싶었다.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 토우지의 강함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는 집 밖에서 재회하기도 전에 이렇게 작은 유골함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나오야가 채 보지 못한 강함을 마주할 방법은 고죠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고죠는 나오야의 물음에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들어올렸다. 그러자 백발 아래 숨겨져 있던 상흔이 드러났다. 보통 칼로 찔리면 즉사가 확정적인 급소에, 제법 큰 상처가 흉으로 남아 있었다.
토우지는 고죠에게 닿았다. 닿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급소를 칼로 찌르고, 죽음까지 몰아넣었다. 만약 고죠에게 반전술식의 터득이라는 천운만 없었더라면 고죠 사토루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으리라.
“강하더라.”
고죠의 그 말이 아득하게 들렸다.
사력을 다하는 자신을 가여운 것을 보듯이 내려다보던 그가 귀신이라 멸시 당했던 토우지를 인정했다. 젠인의 떨거지들은 귀신 주제에 고죠 사토루에게 덤벼 죽음을 재촉했다고 토우지를 조롱했지만, 저편의 강자인 고죠는 그를 알아본 것이다. 거 보아라. 내가 맞다. 내가 옳았다. 토우지군은 강하다.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은 환희였을까?
아마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토우지는 고죠의 무하한을 뚫어내고, 칼을 찔러넣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를 최강으로 부활시킨 후 떠나버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와 동급인 강자와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고죠 사토루를 벼려내며, 모두가 외면하고 멸시하던 자신의 흔적을 주술계에 크게 새기고 사라졌다.
그 모든 행적에, 나오야가 서 있을 만한 곳은 없었다.
토우지를 바라본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아 기뻤고, 한 편으로는 그의 강함을 직접 목도하고 끼어들 수 없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내는 결말을 맞이할 줄 알았더라면, 먼저 그를 찾아가기라도 했을 것이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는, 뱃속을 태우고 심장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 식은 덩어리가 갈비뼈 안쪽에 틀어박힌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고, 목이 메였다. 나오야는 겨우 입을 열었다.
“…… 응, 고마워, 사토루군.”
나오야는 고죠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집으로 걸어갔다.
나오야는 유골함을 본인의 방에 놓아두고 북동쪽으로 향했다. 토우지가 보고 싶었다. 그 강인했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한데, 이제 그는 세상에 없다니. 유골함을 품에 안으니 애써 미루어두었던 현실감이 둑이 무너진 것처럼 몰려와 숨 쉬기가 힘들었다.
북동쪽. 귀문이 열린다는 불길한 방위에 남아있는 낡은 건물. 토우지가 떠난 후 저 귀신의 물건을 부수어 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나오야가 반대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유지한 장소였다. 가끔 토우지가 보고 싶을 때는 이곳에 앉아 아직 자신은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런데 이 꼴을 보아라. 그렇게 인내하고 노력한 끝이 이것이다. 토우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죽었다. 저편의 강자답게 샛별만치 본인을 빛내며 스러졌다. 그가 젠인을 나가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자신은 그 시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자신은 그를 그렇게 빛내는 연료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 낙담하는 자신이 미웠다.
나오야는 미닫이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이부자리를 대충 꺼내고 그 위에 털썩 누웠다. 베개를 끌어안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길게 이어지던 호흡은 곧 뚝뚝 끊어지기 시작하더니, 낮은 목소리와 뒤섞여 점점 젖어갔다. 베갯잇을 적시는 울음으로도 전부 끌어내지 못한 슬픔은 사지를 움직였다. 나오야는 꼴사납게 뒹굴며 울었다. 우는 것은 여성스럽다 경시되는 집안이다. 나오야도 머리숱이 검게 난 이후부터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도 토우지는 나오야를 쉽게 울게 만들었다. 오직 그 만이 그랬다. 토우지 만이 나오야를 이렇게 만들 수 있었다.
울음이 잦아들 즈음에 나오야는 베개를 꽈악 껴안고 몸을 뒤척였다. 등 뒤에 탁자 같은 것이 닿았다. 무언가가 덜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나오야의 머리 위로 어떤 것이 툭 떨어졌다.
나오야는 그 물건을 본 적이 있었다. 대체로 이 방에 있는 모든 것은 나오야가 관리했으므로 나오야가 모르는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익으면서도, 몹시도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은장도의 형태를 닮은 물건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칼집을 당기자, 그 아래 반짝이는 날이 드러났다. 이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야, 나오야가 토우지에게 주었던 물건이니까. 나오야는 저급 주구를 손 끝으로 만지작 거렸다. 가라앉은 두 눈에 칼날이 반사하는 빛이 비치다 사그라들었다.
두고 갔구마. 하긴, 토우지군이 기고를 습격하고 가지간 특급 주구가 몇 개인디, 이래 잡시러운 길 가져갈 이유가 읎제. 하찮고, 눈에 띄지 않고, 씰데도 적은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은께.
“…… 후후, …… 아하하, 토우지군은, 참말로,”
웃음이 나왔다.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을 접어 휘이며 나오야는 웃었다.
“내 같은 건……”
토우지군은 참말로 내 같은 긴 신경쓰지도 않았구나. 내는 참말로 토우지군인테 암것도 아이었구나.
품었던 일말의 희망이 깔끔하게 부정당하자 오히려 상쾌함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오야는 웃으며 칼을 손에서 굴리다, 가만히 그것을 양 손으로 쥐고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의 살아생전에 나오야가 아무것도 아니었더라도, 토우지의 삶 속에 나오야란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더라도, 나오야는 그저 자신이 토우지에게 닿을 만한 존재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괜찮다고 문득 생각했다. 토우지의 사후에라도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젠인 나오야가 고죠 사토루를 젠인의 부지에서 재회했을 때에는 3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오야는 그 사이 더욱 실력을 갈고 닦아 특 1급의 주술사가 되었다. 젠인의 정예 주술사 부대인 병의 필두 자리도 꿰찼다. 그 과정에서 진이치와의 1대1 시합이 있었고, 아무래도 인망이 높은 진이치의 자리였었기 때문에 잡음이 있었지만 당주를 제외한 제일의 강자가 나오야라는 데에는 다들 이견이 없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젠인의 최강자로서 입지를 굳혀가던 어느 날, 모두의 귀를 사로잡는 소식이 들려왔다.
십종영법술의 아이가 나타났다.
‘나타났다’ 라는 말은 참 이상한 단어였다. 술식은 갑자기 마른 하늘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전적 요소가 짙게 작용하기 때문에 고삼가는 상전의 피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런데 직계도, 방계도 아니고 외부에서 십종영법술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래전 젠인을 빠져나가 성마저 갈아치운 사내가 있었으니까.
그래, 그는 후시구로 토우지의 아들이었다. 다들 천여주박의 그 귀신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기다리던 상전의 아이가 나올 수 있냐고 수근거렸다. 그러면서도 기대를 품었다. 4년 전 그 개인전에서의 참패로 다들 십종영법술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던 차였다.
어쩌면 젠인 나오야를 밀어내고 차기 당주감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소리가 아닌 척 쉬쉬 하면서도 끊임 없이 들려왔다. 나오야의 귀에도 그런 말이 들어왔지만 그는 무시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고죠 사토루가 후시구로 메구미를 데리고 십종의 확인 차 젠인가를 방문하기 전에는 그랬다.
“옥견.”
삐죽삐죽한 검은 머리의 아이가 손으로 그림자 놀이의 개 모양을 본뜬 수인을 맺자, 아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그 검은 웅덩이에서 두 마리의 개가 솟아났다. 흰 개와 검은 개, 이마에 특유의 문양이 있는 그 두 마리의 개는 분명 십종영법술의 식신이었다. 옥견들은 메구미의 주변을 지키듯 맴돌다,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곧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치 자신이 6세였던 시절을 보는 것 같다고, 나오야는 생각했다. 상전. 상전이다. 젠인이 그렇게 원하던 상전이다. 어떻게 그 남자에게서. 이렇게 되면 젠인가의 차기 당주는, 그렇다면 지금 후보들은-……. 자연스럽게 그 화살은 중앙의 아이와 나오비토의 옆에 앉아있는 당주 후보들을 향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차기 당주임이 확실시 되었던 나오야에게는 더욱 그랬다. 군중들은 나오야의 굳은 얼굴이 더 월등한 상전을 가진 아이의 존재 때문이라 믿으며 쑥덕거렸다.
그 말이 맞았다. 나오야의 두 눈은 좌중의 무거운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후시구로 메구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의 두 눈은 단정하고,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해 젖살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성장하면 미려한 미남이 될 것이다. 토우지를 닮은 아이였다. 아무런 정보 없이 마주하면서도 토우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만치 똑 닮은 아이였다.
그 아이가, 지금 나오야의 앞에서 십종영법술을 보이고 있었다. 육안과 무하한을 막아설 수 있는 유일한 술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젠인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상전을 가진 채 나타났다고 했다.
나오야는 살아생전 토우지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시간의 흐름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나가, 변치 않는 사실을 드러내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오야는 토우지의 사후에라도 그 의미를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편’의 강자들이 보기에는 그저 잡어들이 득실거리는 수족관일 뿐인 젠인이라도, 이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아 젠인 나오야가, 토우지가 옳았다고 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시구로 토우지는 십종영법술을 가진 아들을 보여주며, 나오야에게 너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후시구로 메구미는 단지 십종을 가진 것 뿐만이 아니라, 주력의 양도 월등했다. 아무리 옥견이 기본 식신이라지만 안정적으로 소환하는 것을 보아하니 재능도 상당했다. 아마 후일에는 분명히 강한 주술사가 되어있으리라. 현 당주인 나오비토는 고령임에도 아직 현역으로 의뢰를 수행할 만큼 정정하니, 나오비토가 은퇴할 즈음에는 젠인의 당주 자리를 차지하기에 적합한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오야는 토우지가 좋았다.
같은 성이라서 좋았다.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동세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토우지는 어느 비술사 여자의 것으로 자신의 성을 갈아치웠고, 젠인을 떠나가, 나오야가 보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젠인이 갈망하고 나오야가 가지지못한 십종영법술을 지닌 천재라고 한다.
당신이 나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자는 옳다. 강자란 주술계에서 절대적인 옳음의 영역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토우지가 나오야를 돌멩이 보듯이 한다면 나오야는 돌멩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갈 날을, 자신이 그들에게 의미를 가질 날을 열망했다. 하지만 토우지는 나오야에게 목표를 던져주고,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그것을 송두리째 도려내고 있었다.
발 밑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뼛 속 내장들이 추락하는 것처럼 덜컹거렸고, 뱃 속이 울렁거렸다. 문득 등줄기가 서늘하다 싶더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나오야의 시선이 메구미의 무상한 두 눈과 마주쳤다. 아무런 의도를 담지 않은 공허한 눈빛이, 마치 그 사내 같았다.
쿵.
나오야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 지고 시선이 쏠렸다. 하아, 나오야는 겨우 숨을 들이키고 내쉬며 입을 열었다.
“거, 귀한 구경은 다 한 거 겉꼬, 안자 주요한 이바구를 해야 할 턴디 잡어들은 어데 씨잘떼 없는 기라. 그제?”
나오야는 그렇게 말하며 나오비토를 흘끗 바라보았다. 나오비토는 대답하지 않고 술병을 기울였다. 이곳의 인파는 고죠와 십종의 아이에게 십종영법술이 젠인에게 가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과하게 모은 것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이야기를 굳이 들어야 할 자들은 아니었다. 나오야는 주변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그들에게 무례한 축객령을 내렸다.
“다들 썩 나가라. 느그들이 당주니 뭐니 들어서 무엇에 쓸 건디. 어차피 다~ 구색 맞추기인거 알고 있응께 어여 가라.”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들은 대부분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몇몇은 당주 자리를 빼앗기게 생겨서 굳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이라며 나오야를 안쓰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하수구의 마개를 뽑아낸 것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대응접실은 휑하니 비었다. 나오야는 자신을 바라보는 메구미를 흘끗 보고는, 자신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속을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후로 이어지는 대화는 뻔했고, 나오야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나오야가 걸어가자, 뒤에서 진이치가 나오야의 이름을 불렀다.
“머고, 내 눈치 볼 필요 없은께, 패이 이바구혀라.”
나오야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방을 빠져나갔다. 탁, 문을 닫자 그제서야 자신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렇게나 가슴 속이 차가운데 심장이 멀쩡히 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오야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동북쪽으로, 토우지가 자신의 옆에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로 향했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옹송그려 앉았다. 우스웠다. 온 몸을 다해 원했던 상대가 자신을 그 근본부터 부정하고 있는데 찾아온 곳이 결국 이곳이라니, 아주 웃긴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토우지가 보고 싶었다. 이젠 후시구로 토우지가 된 그가 그리웠다. 그런 감정이 너덜너덜한 갈비뼈 아래에 남아 떨려오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은행빛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바깥에서 끼익,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 근처에는 다른 건물이 없으니 마루에 누군가 온 것이었다. 나오야는 비척비척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 아이가 있었다. 마치 도망치지 말라는 듯이 후시구로 토우지의 아들이 이 외진 곳까지 와서는 마루에 앉아 있었다.
“니, 머고?”
메구미는 흠칫 몸을 들썩이며 나오야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듯 했다. 하기야 이리 외진 곳에 낡은 건물 하나만 동떨어져 있었으니, 창고나 뭐 그런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토우지가 이곳에 살기 전에는 실제로도 창고로 쓰였다고 들었다.
“니는 사토루군과 함께 있어야 하는 기 아잉교.”
“…… 고죠씨가 잠시 놀고 있으라고 했어요.”
그 말이 참 황당했다. 젠인이 십종영법술을 얼마나 원하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곳에 애를 혼자 풀어놓다니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고죠는 최근 고전의 선생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렇게 행동하면서 어떻게 교편을 잡을 수 있는 것인가 새삼 의심하게 된 나오야였다.
“하아? 여가 어디 놀이터도 아이고 애를 함부레 풀어노코 자빠짓나 사토루군 제정신이가…….”
나오야는 이마를 꾹꾹 짚으며 메구미를 내려다보았다. 토우지를 닮은 얼굴이 이 장소에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불편했다.
“니, 돌아가는 길은 아나?”
그 말에 메구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오야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벗어둔 신을 다시 신었다. 이 자리에 메구미를 가만히 두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아 싫었고, 그렇다고 애를 무작정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끔 이곳에 오는 방계의 사람들도 헤매는 집구석이다. 길을 알려준다 해도 제대로 간다는 보장도 없었고, 서로의 발목 잡기에만 능한 잡어놈들이 아이를 노리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진다.
“자, 데려다 주낀께 이리 온나.”
나오야는 메구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구미는 고개를 들어 나오야를 바라보았다. 토우지의 눈색을 그대로 담은 두 눈이 마주친다 싶더니, 아이는 그 손으로 시선을 옮길 뿐 잡지는 않았다. 뭐, 상관 없었다. 나오야도 굳이 아이에게 친절해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나오야는 아이의 앞에 서서 걸었다.
“니도 여까지 용케도 왔네. 한참 구석진 곳에 있어가 사람도 밸로 읎는디…… 아, 그래가 온 기가.”
“……거기는…….”
“내 방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토우지가 떠난 뒤 그 건물은 나오야가 억지를 부려 그의 관리 하에 있게 되었고, 토우지는 이 집에 그 무엇도 남기지 않았으니 이제 그곳은 나오야의 것이었다. 나오야가 그 방에서 토우지의 존재를 그리워할 뿐, 그곳은 나오야의 장소였다. 그럼에도 잽싸게 대답한 것은, 아이에게 토우지에 관한 말을 조금도 꺼내고 싶지 않아서 일 지도 모른다.
아이는 그 이후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몇 번 모퉁이를 도니 금세 대응접실의 문이 보였다.
“다 왔다.”
나오야가 말하자, 아이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그 문 옆에 섰다. 하기야 어디 놀 데도 없고, 그렇다고 고죠가 용건을 끝내기 전까지는 젠인을 나갈 수도 없으니 메구미가 있을 곳은 이곳 뿐이었다. 나오야는 눈 앞의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십종영법술. 자신이 가진 투사주법에 비해 월등하고, 후시구로 토우지를 죽인 고죠 사토루를 막아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아이. 이 작은 아이의 앞에서 자신은 2등짜리이며 대용품이 된다니, 우습고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오장육부가 삐걱삐걱 뒤틀렸다. 열등감과 뒤섞인 질투가 솟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짓누르는, 어떠한 체념이 있었다. 그것이 나오야를 이 아이의 옆에 있게 했다.
만약, 토우지가 젠인을 떠났을 때 그를 지켜보기만 하지 않고 덤벼들었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토우지가 자신을 적으로 보아주었다면 고죠 사토루와 싸워 처절하게 패배했을 때에도 태연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이 잡어들의 온실 속에서 나가지 않고, 언젠가 토우지의 옆에 설 수 있다고 끊이지 않는 몽상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그랬다믄 내는 그 애린 날 건네주었던 잡시러운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니를 내쫓고 헐뜯고 물어뜯고 죽이려고 들었을 지도 모리겠다, 후시구로 메구미군.
나오야는 ‘저편’에 선 두 사람에게 확실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아이의 옆에 자리를 지키고 서서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만났을 때에는 질투와 증오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르는 아이의 옆에서, 열등감에 쓸개가 뒤집히고 들끓는 뱃속을 애써 아닌 척 하면서 서 있었다. 후시구로 메구미가 토우지와 공유했던 유일한 공간에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데려온 주제에, 자신은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었던 토우지에게 이 아이는 어떠한 존재였을 것이 분명해서.
토우지가 남긴 의미를 이 집안의 녀석들이 업신여기는 것은 참을 수 없어서, 나오야는 이곳에 버티고 서 있었다.
토우지에게 과거와 미래, 현재도 전부 부정당했으면서 아직도 나오야는 그의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자들이 직접 이것이 너의 분수라고 알려주는 이 상황에서도 그 아집을 미처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무것도 되지 못한 망집으로 이루어진 저주를, 뱃속에 품고 있었다.
그 날 밤이었다. 나오야는 문득 새벽에 잠에서 깨었다. 공기가 여름치고 서늘하고 밖이 어두운 것이 아직 새벽이었다. 이부자리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데, 밖에서 희미한 빛이 장지에 스며들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오야는 상체를 일으켜 세워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 너머에, 갑자기 거대한 형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오야보다 큰 거구였다. 아마 진이치 정도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진이치는 새벽에 굳이 나오야를 불러낼 정도로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 나오야가 장지문을 노려보는데 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야.”
나오야는 그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은 금세 가라앉지 않고 잘게 온 몸에 퍼졌다. 낮은 목소리. 감정이 없고 가라앉은, 그렇지만 사내다운 울림이 있는 미성이었다. 나오야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잊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건만 잊지 못했다. 토우지의 목소리였다.
나오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거대한 사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심장이 끊임없이 쿵쿵 두방망이질 쳤다. 그 고동이 어찌나 큰지, 손끝마저 울리는 것 같았다. 나오야는 천천히 문을 살짝 열었다.
곰 같은 거구에, 검은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입가에 상처가 있는 사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내는 짙은 색의 낡은 유카타 한 벌을 걸치고 선 채, 나오야를 푸른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건 토우지군이 아이다.
나오야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야, 이 ‘토우지’는 나오야가 아는 토우지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의 모양새였다. 세월이 흐르며 토우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나오야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젠인에서의 차림을 유지할 리가 없었다. 또한 이 ‘토우지’에게서는 희미한 주력이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토우지는 나오야를 이렇게 똑바로 보아주지 않았다. 그 바다 같은 색을 가진 두 눈에 나오야를 담아주지 않았다.
“나오야.” ‘토우지’가 다시 말했다. “들여보내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오야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 끝이 나오야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 어리석게도, 그것이 나오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고작 시선과 손길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환희에 젖는 나약한 나오야 자신이 있었다. 가짜인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이것은 진짜 토우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도. 그럼에도 나오야는 토우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빼앗겼음에도 여전히 그의 존재를 갈망하고 있는 멍청이라서. 오늘 토우지가 그의 아들을 통해 도려낸 나오야의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 시리고 아파와서.
그래서, 그래서였을 지도 몰랐다.
“들여보내 줄거지? 너는.”
‘토우지’가 말했다.
드르륵, 장지문이 크게 열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탁,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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