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종부성사

이그제큐터 단편

자극적인 소재: 폭력, 바디 호러(암시)

민감한 소재: 안락사/조력 자살

가어헤보다 앞선 시점. 페데리코가 주역, 아직 초보 집행자인 에젤, 몇몇 전개를 위한 오리지널 조연이 등장합니다.

커플링 없음. 20000+자.


공증소 업무를 맡은 지 3년이 되는 무렵부터 페데리코는 협동 외근 임무를 배정받는 일이 드물어졌다. 인적자원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임무에 그렇잖아도 인력난인 집행자를 두셋이나 보낼 필요는 없다. 다만 '선배'로서 수습 집행자를 위험도가 비교적 덜한 임무에 동행하도록 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테라를 가로질러 이동할 때 겪는 여러 어려움에 대처하고, 현지어를 구사하며 현지의 법과 여건을 고려해 행동하는 경험은 라테라노의 연수 시설에서는 얻기 어렵다. 페데리코는 그 점에 동의했고, 들어오는 요청이 있다면 위험도와 일정을 헤아린 뒤 대부분 받아들였다.

사망한 공민의 지인을 라테라노로 데려가는 임무였다. 단순한 이동과 호위, 더해 봐야 이동도시 간 이삿짐 운송 지원 정도로 끝났어야 할 임무는 페데리코와 수습 집행자 에젤이 시라쿠사로 향하는 짧은 기간 동안 복잡하게 발효되어 있었다.

사망자는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지병이 깊어져 죽음을 예감한 그는 죽기 며칠 전 '곧 집행자가 찾아가 너를 데려가겠다고 말할 테니, 그걸 원한다면 미리 이사 준비를 해 두라'는 전갈을 보냈다. 유언의 수탁인인 베티나는 친구가 스스로 보낸 부고에 놀랐지만, 시라쿠사의 생활에 지쳐 있던 차였기에 감사하며 짐을 쌌다. 문제는 베티나가 얼마 전 한 패밀리의 작은 위장 회사에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경리로 고용된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그가 취직한 지 며칠만에 '외국에 있던 친구의 유언 운운하는 석연찮은 이유로' 시라쿠사를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패밀리는 그가 처음부터 스파이였으며 패밀리의 중요한 정보를 빼돌린 뒤 잠적하려 한다고 넘겨짚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동시기에 그 패밀리의 중요한 거래 경로 중 하나가 다른 패밀리에 노출되었다. 흔해빠진 일이었으니 어디에서 정보가 샜을지 알 길은 없었다. 그러나 그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 때문에 베티나와 그 주변인들은 패밀리의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근거는 심증뿐이었지만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집행자 페데리코와 수습 집행자 에젤이 도착했을 때는 막 숙청의 움직임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들은 집 주변에 매복한 패밀리 부하 몇 명을 제압한 뒤에야 베티나를 만날 수 있었다.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베티나는 옷자락에 점점이 피를 묻힌 둘을 어리벙벙한 얼굴로 맞이했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이나마 신세졌던 회사에 인사하기 위해 막 집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30분만 늦었다면 두 집행자는 수탁인이 아닌 그 시체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예? 암살이요? 저를요? ……왜요?”

베티나가 영문을 모르는 상태였기에 왜 그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지를 조사하는 것도 집행자의 몫이었다. 일단 둘은 베티나를 급히 대피시켰다. 그리고 하루 밤낮을 뛰어다닌 끝에 페데리코는 상술한 상황을 대략 파악해 베티나에게 설명할 수 있었고(호위를 위해 베티나의 곁을 떠나지 않은 에젤은 선배가 단 하루 동안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베티나는 허옇게 질렸다. 페데리코는 최대한 빨리 함께 시라쿠사를 벗어날 것을 강권했지만 대답은 거부였다. 자신은 집행자들의 호위를 받아 도망치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면 패밀리의 심증에 더욱 큰 심증을 얹어주게 된다며. 베티나의 지인들은 그의 소재와 저의에 대해 억울하게 추궁을 받거나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무책임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호소했다. 에젤은 그 심정을 짐작하기에 차마 수탁인을 재촉하지 못했다.

페데리코는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하루 더 시간을 주십시오. 제게 제안이 하나 떠올랐는데,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판단하려면 조사가 더 필요합니다."

"그, 그러세요."

페데리코는 에젤이 무어라 묻거나 말리거나 제안하기도 전에 다시 은신처를 나섰다. 에젤은 라테라노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통신이 가능한 집행자 표준 단말의 전파가 닿는 한에서는 페데리코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종횡무진이라는 표현이 겸양으로 취급될 움직임으로 온 도시를 누비고 있었고 통신은 몇 번이나 두절되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연락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소도시 한켠에 물색한 은신처에는 시라쿠사의 관리되지 않은 건물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곰팡이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주민 하나가 이사를 간 뒤 그대로 방치된 집의 이층이었다. 전 입주자가 버리고 간 낡은 가구들, 담요 몇 장, 급히 구한 오리지늄 난로 하나가 전부인 황량한 방은 그렇지않아도 혼란스럽고 억울한 베티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페데리코는 자신에게 정서적 위안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베티나를 진정시키는 일을 에젤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에젤은 이틀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루포의 축 처진 귀를 되세우기는 어려웠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페데리코는 그것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밤늦게야 은신처로 돌아온 페데리코는 우기의 비를 거리낌없이 맞은 탓에 흠씬 젖어 있었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케이프를 벗어 문간에 걸었다. 에젤이 다가가 수건을 내밀며 물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어떻던가요?"

페데리코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수습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칸나스 패밀리의 전투원 8명이 베티나 씨의 집 주변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아직 집 안까지 눈에 띄게 손댄 기색은 없습니다. 이 정황에 대해 짐작되는 바를 말해 보세요. 그리고 간단히 마실 것이 있을까요?“

수습 집행자 에젤은 바싹 긴장했다. "아 네, 일단, 매복이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고 상당한 인원을 썼네요. 집 주변에는 8명이지만 아마 조금 떨어진 곳에 더 숨겨 뒀겠죠? 저희 뒤에 다른 패밀리 같은 조직이 있다고 넘겨짚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집을 훼손하지 않은 건 저희가 중요한 자료 같은 걸 아직 집 어딘가에 숨겨 둔 탓에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겠죠. 핫초코 드실래요? 금방 데울게요.“

"부탁합니다. 예, 이미 집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테니,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비밀 공간 같은 것이 있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확인한 뒤 습격해 자료를 빼앗으려는 계획이겠죠."

"단순히 화풀이라기에는 구체적인 움직임이네요. 진짜 스파이가 베티나 씨에게 누명을 몰았을지도요. 설탕 넣을까요?"

"감사합니다. 우리의 개입이 그들의 의심을 부추겼을 테니 누명을 굳히는 일이 더욱 용이했을 겁니다. 스파이는 이렇게 베티나 씨에게 이목이 모인 틈을 타 이미 빠져나갔겠죠."

낡은 소파에 파묻혀 있던 베티나는 두 집행자가 거의 한 문장으로 느껴질 만큼, 심지어 완전히 병렬적으로 이어가는 대화를 따라가느라 둘을 구기종목 경기마냥 번갈아 바라보아야 했다. 두 사람이 베티나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라테라노어가 아닌 시라쿠사어를 쓰고 있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 경이 때문에 낭패감은 더디게 밀려왔다. 지금 내 집이 뭐 어떻다고? 베티나가 얼굴을 더듬어 입을 틀어막는 동안 에젤은 난로에 우유를 올렸고 페데리코는 젖은 수건을 욕실의 빨래통 모서리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빈집이지만 다행히 수도는 살아 있었다.

둘이 도착했던 날 전투원 몇 명을 처리한 일은 당연히 패밀리도 인지했다. 다만 그들은 집행자가 온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에, 대체 어떤 패밀리가 총 든 산크타 둘을 고용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베티나가 '친구의 유언이 있어 라테라노로 이사를 한다'는 말을 했었다고 하니 누군가는 집행자의 파견을 추측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고작 이사에 집행자가 둘씩이나 파견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에젤의 연수가 변수로 작용한 셈이었다.

"저희가 집행자라고 밝히고 베티나 씨가 무고하다고 얘기하면 어떨까요? 오해가 점점 깊어지는 것 같은데요."

"이미 시도했습니다."

"예?"

"어제 정찰 중에 접근한 전투원 한 명을 제압하고 우리의 신원과 입장을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베티나 씨의 신변에 위해를 끼치려 했기에 위난에 대한 긴급피난으로써 물리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베티나 씨의 집 앞에 배치된 인원은 그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아, 정당방위를 시라쿠사 법에서는 긴급피난이라고 하지. "……환대의 몸짓은 아니네요. 믿지 않았거나, 무시하기로 했거나."

"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설득의 여지는 희박해졌습니다."

라테라노 영토 안에서라면 집행자는 존중을 받기 위해 대체로 어떤 자기변호도 할 필요가 없다. 에젤은 낯선 타국에서 맞닥뜨린 이 무참한 푸대접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숱하게 겪게 될 일이다. 에젤은 그 전망을 깊이 곱씹으며 페데리코에게 머그잔을 건넸다.

페데리코는 짤막하게 감사를 표하고 다디단 음료로 입을 축였다. 에젤의 배려는 정확했다. 한참 빗속을 돌아다닌 탓에 몸이 식어 있었던데다 사고활동에는 당분이 많이 필요했다. 케이프가 비를 어느 정도 가려 주었지만 다소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그는 난로 곁에 선 채 말했다.

"오늘 칸나스 패밀리가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가하는 광범위한 위협과 착취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이 당신의 이웃들에게 미칠지 모르는 위해를 우려하기 때문에 섣불리 시라쿠사를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 칸나스 패밀리의 영향력을 제거하겠습니다."

패밀리가 자만의 악덕 대신 상상력과 위기의식의 덕목을 갖추고 있었더라도, 이렇게 평탄한 어조로 공민 한 명을 위해 패밀리 하나를 박살내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찾아왔을 줄은 몰랐으리라. 게다가 핫초코를 홀짝이면서.

베티나는 그 파격적인 문장을 현실감 없이 곱씹다가 대답을 해야 한다는 자각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그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가능한가요? 두 분이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하루가 필요했습니다. 저 혼자서도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에젤도 조금 놀랐다. 명료한 즉답에 베티나는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라고 답할 뻔했다.

"그, 죽이실 건가요?"

"제압 과정에서 불가피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베티나는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을 두둔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오르자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정말로 패밀리를 전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횡설수설하며 만류했다. 패밀리에 가담하는 사람들 중에는 생계가 어렵거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떠밀려 그 길을 택한 사람들이 많다. 베티나처럼 패밀리와 거리를 두려 애쓴 사람이라도 저도 모르게 그들의 돈줄이 되는 회사에서 일하게 되기도 하고, 친구의 친구 정도 되면 패밀리 말단 전투원쯤은 몇이나 있었다. 시라쿠사의 고약한 면모다. 페데리코는 베티나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납득했다.

"일반 전투원을 대상으로는 비살상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겠습니다. 하지만 치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패밀리 가담자로 보일 만한 인물 중에 제가 공격하지 않도록 특히 신경써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베티나는 그 질문이 '다 죽이지는 말라고 했으니 당신이 지목한 사람만 빼고 다 죽이겠다'라는 의미가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 하지만 분노한 패밀리를 상대하는 혼전 와중에 일일이 인도적인 방식을 택하다가는 도리어 집행자들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았다. 시라쿠사는 그런 사치를 허락하는 곳이 아니다. 그는 짧고 혹독한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알리체요. 동네 의사예요. 치료 아츠를 약간 알아서, 패밀리들에서 일하는 의사가 손이 모자라면 종종 불려 다녀요. 패밀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람 죽는 걸 보기 힘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에젤이 거들었다. "혹시 사진 있으세요?"

베티나는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 에젤은 그 한가로운 사물에서 안쓰러움을 느꼈다. 원래 이삿짐을 화물로 부친 뒤 간편한 짐만 들고 떠날 예정이었기에 베티나가 미리 챙겨둔 가방은 대피하는 사람의 것보다는 여행 배낭에 가까웠다. 어두운 방에서 세 사람이 나란히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액정이 아리게 빛났다. 의사 면허를 품에 안은 알리체가 몇 년 전의 베티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소박한 축하 파티의 광경이었다. 사진을 살핀 에젤은 배경에 있는 리베리를 짚었다.

"아, 이쪽은 니콜로 씨네요."

이번 임무의 의뢰인, 즉 유언자였다. 베티나는 끄덕였다.

"셋이 친구거든요. 니콜로가 여행을 다니다가 여기 들른 이후로 계속 전달자를 통해서 연락했어요. 지병이 있었던 건 이번에야 알았지만……."

"……."

예의바른 애도의 표정을 잠시 보낸 에젤은 입을 떼었다가 멈추었다. '그런데 왜 유언의 수탁인으로는 베티나 씨만 지정했을까?' 베티나는 그 기색을 눈치채고 쓰게 웃었다.

"알리체도 저랑 비슷한 연락을 받았었는데 거절했었다나 봐요. 할 일이 있으니 시라쿠사에 남고 싶다고."

새삼스러운 존경심을 느끼며 사진 속의 의사를 다시 보았다. 베티나와 같은 루포이고 털 색도 엇비슷해 마치 자매 같았다. 다만 심약한 베티나와 달리, 이 피와 죽음이 흔해빠진 도시에서 의사의 길을 택한 결기가 온화해 보이는 눈 안쪽에 서려 있었다.

"사실 이번 직장도 알리체가 주선해 준 건데…… 패밀리와 얽힌 곳인 줄은 몰랐겠죠. 자책하고 있지 않을지 걱정이네요."

가만 얼굴을 기억하며 이따금 핫초코를 줄여나가던 페데리코는 대화가 일단락되는 듯하자 고개를 들었다.

"주의할 인물이 더 없다면 바로 작전에 돌입하겠습니다. 에젤, 당신은……"

페데리코가 빈 머그잔을 내려놓고 행동방침을 공유하기 위해 단말을 꺼냈다. 에젤도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베티나는 기겁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이렇게 빨리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얼마나 필요합니까?"

"네?"

"결정에 시간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페데리코는 상대가 질문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반복했을 뿐이지만 베티나는 다그침받은 기분을 느꼈다. 은신처의 조명은 바깥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낮추어져 있었고, 난로를 등진 페데리코의 어두운 광륜은 그 표정을 거의 비추지 않았다. 그는 이 초인적인 집행자의 인내심이 이윽고 바닥났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황급히 대답했다.

"두, 두 시간?"

"제가 제공한 정보에서 이해되지 않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퍼다 줬는데 아직도 망설이느냐?' 라고 들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에젤은 아연실색했고 불쌍한 루포는 거의 울 뻔했다. "아아뇨, 죄송해요……"

페데리코는 단말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하다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왜 사과하시죠?"

"제가 자꾸 지체하니까……"

"아뇨, 제시하신 시간을 활용할 생각입니다. 저는 그 동안 휴식을 취해야겠습니다. 이후의 작전행동을 위해 체력을 보충하는 쪽이 좋겠죠. 2시간 뒤라면 0시 26분이군요. 에젤?"

페데리코는 베티나를 다그친 적이 없었다. 그가 질문했던 이유는 만약 베티나가 더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면 본인의 휴식을 후순위로 미루고 거기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그 당연한 결론을 따라잡은 에젤이 끄덕했다.

"아, 네. 말씀하세요."

"단말에 지도를 갱신했습니다. 내용을 숙지해 두시고, 더불어 지금까지처럼 베티나 씨의 경호도 부탁합니다. 시간이 되면 깨워 주세요."

"그럼 침대……" "괜찮습니다."

페데리코는 바로 돌아서며 테이블에 방치되어 있던 물컵을 비웠다. 그리고 난로에서 약간 떨어진 벽에 기대어 앉더니 수호총을 무릎 위에 놓고 눈을 감았다. 에젤은 무언가 질문할 것이 남은 기분이 들었다. "저, 페데리코 선배님?" 대답이 없었다. '단호하게 잠들었다'는 영 호응되지 않는 서술이 걸맞는 속도였다. 에젤은 페데리코에게 스스로 의식의 전원을 끄는 능력까지 있는지 잠시 의심했지만, 그저 어마어마하게 지쳤을지도 모른다. 이틀 밤낮 동안 온 도시를 누빈 데다 둘째날에는 비까지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행히 안정적인 호흡을 보면 혼절하지는 않은 듯했다.

에젤은 페데리코가 소리내 불러도 모를 만큼 완전히 경계를 내려놓고 잠들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꼈다. 자신은 그만한 전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소도시에 도착해 상황을 파악한 직후 페데리코는 말했다. '수습 집행자 에젤, 이번 임무의 위험도는 이미 현장 연수에 기대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섰습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의 경험을 위해 임무에 어느 정도 당신의 자율 판단을 반영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제부터는 제 지시에 정확히 따라야 합니다.' 그간 에젤은 자신이 페데리코의 두 번째 보호 대상 정도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에젤은 혹독한 집행자 양성 과정을 소화할 만큼 건전하며 이성적인 정신의 소유자이고, 자신이 아직 수습이라는 사실에 자책하거나 의기소침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에젤의 능력이 충분히 쓰일 수 있는 상황에도 페데리코가 그것을 가용 자원 목록에 넣지 않는다면 그만큼 페데리코의 일이 과중해질 것이 걱정이었다. 에젤은 조금 전에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기억했다. ‘선배님, 혹시 제가 할 만한 일이 있는데 무리하고 계신다면……’ 하지만 선배가 지금 보여준 신뢰는 그 공연한 염려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래도 그렇게 피곤하시면 티는 내 주셨으면 좋을 텐데.

……에젤은 페데리코의 감정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그 피로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시라쿠사까지 함께 이동하는 며칠간 그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에젤은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깨어나시면 바로 사과해야지.

잠시 빗소리만이 들렸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의 보호를 받는 민간인에게 동요를 보여서는 안 된다. 그는 생각을 수습하기 위해 핫초코를 한 잔 더 만들어 베티나에게 건넸다. 베티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잔을 바라보다가, 한 차례 방을 휩쓸고 지나간 정신적 폭풍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그것을 받아들었다.

"저…… 라테라노 분들은 다 이런가요?"

"하하…… 아닐 걸요."

그는 적당히 예의바른 거리를 둘 겸 창가에 기대서서 살짝 열어둔 덧창 바깥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이따금 집행자 표준 단말에 눈을 두었다. 페데리코는 무단 증개축된 건물 때문에 공식적인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막다른 길이나 샛길 따위를 직접 돌아다니며 확인한 듯했다. 더불어 지도에는 이동 경로가 몇 가지 그려져 있었다. '페데리코가 패밀리의 주요 거점과 저택을 박살내며 전투원을 유인하는 동안, 에젤은 베티나를 호위해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간다'라는 골자를 이미 짜둔 모양새였다. 여기서 박살은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다. 폭탄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수로 경비를 피해 패밀리 저택의 정원 한가운데에 폭탄을 설치한 걸까?

최초의 놀람이 가라앉은 뒤 지도의 경로를 되새긴 에젤은 역시 선배가 그를 믿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병력 대부분은 페데리코가 맡을 테니 도주 경로에 결정적인 난관은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수탁인의 신변을 완전히 에젤에게 일임하는 작전이었다. 안전한 거점에 숨어 있는 것과 탈출 임무는 책임의 차원이 다르다. 에젤이 새삼스러운 긴장감을 가다듬으며 그것을 차근차근 숙지하는 동안 베티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 침묵했다.

"……칸나스 패밀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은 진짜인가요?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패밀리는 패밀리인데. 그 많은 사람을……."

에젤은 화면에서 눈을 뗐다. 베티나는 맞은편 벽에 잠든 페데리코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채 마르지 않아 부스스한 백발에 광륜이 희박한 반사광을 뿌리고 있다. 어쩌면 오늘 중 몇 번은 피를 뒤집어썼을지도 모르나 그것은 시라쿠사의 빗물에 다 씻겨 내려갔다.

"음, 지도에 기록해 놓으신 내용을 보면 진심이세요. 비슷한 일을 하신 적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고. 아마 오늘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베티나 씨의 입장을 확인하느라 돌아오신 것 같아요."

"그치만……칸나스가 약해진다고 이 동네가 조용해지진 않을 거예요. 반대로 한동안은 더 시끄러워질 걸요. 다른 패밀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테니까. 그걸 생각하니까 갑자기 무서워져서."

에젤은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시라쿠사의 생리에 대해서라면 외국인인 자신보다 베티나가 훨씬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럴지도요. 하지만 그건……아마 선배님의 고려 밖일 것 같네요. 선배님이 칸나스 패밀리를 치려고 하는 건 이 도시가 평화로워졌으면 해서가 아니라, 그냥 베티나 씨가 그 패밀리가 신경쓰여서 떠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니까."

"에젤 집행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 걸까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수탁인의 판단에 영향을 미쳐도 될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베티나는 무슨 말이든 듣고 싶어하는 듯했다. 에젤은 일단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의견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그 뒤에도 잠깐 골똘히 생각했다가 입을 열었다.

"패밀리들은 아마도 저랑 선배님이 어떤 패밀리에 비밀스럽게 고용되어서 집행자를 사칭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떠나기 전에 그 오해를 살짝 부추겨 두는 것도 좋겠죠. 물론 저희는 어느 쪽 소속도 아니니까 조사해도 알 수 없겠지만, 패밀리들은 상대가 중요한 카드를 쥐고는 잡아떼고 있을 뿐이라고 의심할 거예요. 이번에 큰 소동이 일어난다면 저희 둘의…… 아니다…… 페데리코 선배님의 소재가 확실해지기 전까진 피차 섣부른 행동을 삼갈 거라고 생각해요. 자칫하면 칸나스 패밀리처럼 당할지도 모르니까. 그 억지력이 하루를 갈지, 몇 달이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에젤의 전망은 그럴듯했지만 시라쿠사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어쩔 수 없는 사유로 인해 완전히 사실적이지는 않았다. 시칠리아 부인이 지켜보는 패밀리 간의 싸움은 전면전보다 대부분 신경전이고, 숨기기 어려울 만큼 인상적인 전력을 보유했다면 아예 내놓고 과시하는 쪽이 유용하다. 그래도 이번 사건을 그 단 한 번의 과시라고 오인하게 만들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일이 그렇게 잘 될까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계실 테니 최선의 경우도 한 번은 생각해 보는 쪽이 균형이 맞을 것 같아서요."

베티나는 에젤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맥없이 약간 웃었다. "고마워요, 집행자님."

"갑작스러우시죠, 이렇게 큰 일이 될 줄은 모르셨을 텐데."

핫초코를 다 마신 베티나는 그것을 소파의 빈 자리에 내려놓고 무릎을 끌어다 가슴에 안았다.

"저는 페데리코 집행자님이 시간을 달라고 하셨던 게 탈출 루트를 찾는 데 필요한 시간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건 이미 어제, 아니 아예 오는 길에 확인해 두셨을 거예요. 제가 없었다면 일단 탈출해서 베티나 씨를 적당한 곳에 맡기고 혼자 돌아와서 다음 행동을 하든 하셨겠죠. 이번엔 제가 베티나 씨의 호위를 도맡을 수 있으니까 순서가 이렇게 되었고요. 이쪽이 일정이 더 빠르고 베티나 씨도 더 안전하니까요."

베티나는 비록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았더라도 그 가지런한 합리성에 머릿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창가의 에젤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생각을 읽으시네요. 두 분 많이 친하세요?"

재미있는 질문이었다. 테라의 누가 페데리코 잘로와 친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에젤은 머쓱하게 어깨를 들었다.

"다 제 짐작이에요. 선배님이랑 같이 일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요. 음, 2주 정도 됐네요."

"아아, 그럼 산크타시라서?"

베티나의 짐작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지만, 에젤은 조금 전 자신이 페데리코의 피로를 '느끼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부끄러워졌다.

"……이건 선배님이 직접 얘기하시는 게 맞는데."

하지만 에젤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페데리코의 무표정한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수탁인이 임무 수행 인원의 의사소통 능력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가지는 것도 임무에 부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분주해질 테니, 오해를 정정할 수 있다면 제때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에젤은 프라이버시와 예의를 논하며 그 가상의 목소리를 지우려 노력했지만 페데리코는 그가 만나 본 모든 사람 중 그 두 개념에 가장, 다소 지나칠 정도로 구애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곤란하게도 자신이 떠올린 예측이 정말 그럴듯하다는 생각만 점점 굳어졌다. 베티나는 이미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에젤을 보고 있었다. 페데리코가 일어나면 사과할 것이 하나 늘었다.

에젤은 페데리코의 먼 친척이 듣는다면 퍽 재미있어할 비유를 동원했다.

"음, 사람들이 머릿속의 반주를 따라 노래를 불러서 의사소통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음악을 조금 배운다면 상대가 부르는 노래의 음계나, 속도나, 가사를 잘 듣고 상대의 머릿속에서 어떤 반주가 흐르고 있을지도 약간은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반대로 노련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반주와 상관 없는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그런데 산크타의 광륜에서는 아예 그 반주 일부가, 이를테면 박자 같은 게 밖으로 퍼지는 거예요. 그건 산크타끼리만 들을 수 있고요."

새하얀 도시를 떠나온 어둑하고 습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외국어로 자신의 종족에 대해 설명하는 경험은 복잡한 감흥을 가져왔다. 산크타의 '공감'에 포함된 투명성과 동시성을 함축할 단어가 시라쿠사어에는 없었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공감은 주체가 객체의 행동을 보고 미루어 짐작해 일방향으로 투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젤은 그 단어를 일부러 배제했다. 그는 지금 도시 전체를 헤아려도 동족이 백 명이 되지 않을 타지에 있었다. 이해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근사치로 우회할 수밖에 없는 경험들. 앞으로도 자주 이러할 것이다. 익숙해져야 한다.

"알 듯 말 듯하네요. 생각을 다 읽지는 않는다는 거죠?"

"감정만이요. 그것도 본인이 내놓거나 듣고 싶어하는 만큼만. 하지만 저한텐 페데리코 선배님의 반주가 항상 음소거 상태로 들려요. 그런 체질이시라고. 이건 나중에 선배님한테 직접 이야기 들으시는 쪽이 정확할 거예요."

베티나는 가만 곱씹은 뒤 얼떨떨하게 확인했다.

"……그냥 산크타 아닌 사람이랑 같은 거네요?"

"어느 부분에선 그렇겠죠."

"그럼 에젤 집행자님은 어떻게 읽으셨어요?"

"읽은 건 아니고…… 지금까지 봐온 모습으로 짐작한 거죠. 선배님은 항상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하시니까?"

베티나는 모아 안은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잇새로 긴 한숨을 흘렸다가 반쯤은 체념조로 말했다.

"패밀리를 공격하는 것도 그쪽이 제일 합리적이어서려나요. 에젤 집행자님도 비슷하게 보고 계시고."

에젤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전 설득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지만요."

"역시 어렵겠죠. ……저도 당장 더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네요."

위로하려 입을 반쯤 열었던 에젤은 난로의 희미한 빛을 마주한 베티나의 얼굴을 다시 보았고, 그가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에젤은 덧창 밖의 추적추적한 밤거리를 한 번 더 살핀 뒤 기대어 있던 벽에서 등을 떼었다.

"준비할게요. 12시 반에 출발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깨어난 페데리코는 에젤의 사과를 들었다. 그는 일단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난감한 기색이었다. 왜 에젤이 고해한 것들이 사과의 사유로 여겨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투였다. 그는 수탁인을 공연히 곤란하게 만들 필요가 없기에 피로를 언급하지 않았고 에젤은 그런 그에게 할 수 있는 적절한 배려를 건넸었다. 더불어 그는 에젤이 수탁인의 오해를 제때 바로잡은 데에 도리어 감사하기까지 했다.

에젤은 선배의 관대함에 안도하며 무장을 챙겼다.

“……하지만 역시, 다음에는 혼자서 무리하시기보다 뭔가 지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페데리코는 다시 한 번 이해되지 않는다는 기색을 했다. “? 당신은 극한상황에 처한 수탁인의 정서를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가? 에젤은 베티나를 에스코트하면서도 긴가민가하는 기분으로 은신처를 나섰다. 그리고 속으로 조심스럽게, 상당한 주저와 유보를 덧붙였지만, 자신이 페데리코 선배와 아주 약간은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새벽 1시 19분.

재앙이 닥치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재앙은 억울하긴 해도 이해할 수는 있으니까.

페데리코는 베티나가 부탁한 불살을 여건이 허락하는 한 따르고 있었기에, 확실히 간부로 판명된 대상이 아니라면 수호총의 탄환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에 그때그때 잡힌 조명 스탠드, 꽃병, 그 꽃병을 받치던 사이드테이블 따위가 익숙한 생활용품의 삶을 등지고 무기라는 새로운 진로를 대담하게 탐색하고 있었다. 칸나스 패밀리의 일원들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소화하지도 못한 채 쓸려나갔다. 애초에 정원 한가운데에서 폭탄이 터진 시점에서 그들은 상황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페데리코에게 모욕이나 분노의 기척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이 산크타의 형상을 한 재난을 더욱 예측불가능하고 모독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미친놈, 차라리 총을 쓰라고!" 기가 막혀 애원하듯 외친 페로는 그 요청대로 샷건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졸도했다. 조금 전 에젤이 저 존재에게 관대하다는 평가를 떠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주저없이 에젤도 미쳤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페데리코는 에젤의 재치있는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어느 패밀리의 일원으로도 해석될 수 있도록 행동했다. 즉 소속에 대해 무엇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든 저항을 매우 파괴적인 방식으로 무시하며 뚜벅뚜벅 저택의 심부로 걸어들어갔다. 실상 그것은 페데리코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출처조차 알 수 없다는 점은 패밀리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혼비스트를 실내에서 달리게 한 듯한 폐허와 널브러진 사람들이 남았다.

"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건데!"

마호가니 의자의 네 다리 사이에 사지가 끼워진 채 벽에 밀어붙여진 필라인이 빽 외쳤다. 값비싼 실크 잠옷 차림인 필라인은 아마 패밀리의 3인자쯤 될 듯하다. 자신이 이 패밀리의 대부라고 열정적으로 주장하던 루포와 거기에 비슷하게 열성적으로 동조하던 엘라피아는 지금 위층 복도에서 심장이 있던 자리를 무익하게 감싸쥐고 쓰러져 있으니까. 페데리코는 필라인을 가둔 의자의 쿠션을 몸으로 누른 채 그를 건조하게 마주보았다.

절반쯤 꺼진 조명이 흔들거리며 방 곳곳에 부서진 빛을 뿌렸다. 진자 운동의 주기마다 끼익 끼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페데리코의 얼굴이 한쪽만 드러났다가 다시 역광 속에 묻히기를 반복했다. 철야와 과로로 한층 창백해진 산크타의 무표정한 얼굴은 다양한 출처에서 비롯한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괴기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한 손에는 뜬금없게도 나선형 와인 오프너가 쥐어져 번득이고 있었다. 이 일상적인 물건이 무기로 기능할 가능성을 떠올리려면 먼저 상식에 대한 믿음을 적잖이 버려야 할 것이다. 폭력과 밀착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것을 상상해낼 수 있었던 필라인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그 낯빛을 본 페데리코는 상대가 바로 반격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고, 모호한 경고를 하나쯤 더 남겨 두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은 베티나 씨를 위협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복수는 그냥 핑계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잖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와인 오프너를 내리찍으려던 페데리코는 필라인의 단어 선택에 위화감을 느끼고 팔을 멈추었다. 복수?

"베티나 씨를 해쳤다는 의미입니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페데리코는 폭탄을 이용해 패밀리의 주요 전투력 대부분을 저택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에젤과 베티나의 이탈 경로가 통신기의 전파 범위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간이 송수신기까지 설치해 안배했다. 이탈 도중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다면 바로 연락이 왔을 테고, 애초에 에젤의 실력이라면 아직 시내에 산개해 있을 소수 전투원을 마주치더라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필라인은 분노와 공포와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페데리코의 질문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란 말야?"

페데리코는 정지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와인 오프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상대가 당혹하는 순간 페데리코는 떨어지는 의자를 낚아채 필라인을 후려갈겼다. 기울어지는 필라인의 몸이 바닥을 때리기도 전 그는 뛰쳐나갔다.


베티나의 집 주변의 거리에는 괴괴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시라쿠사의 국가國歌라 할 만하다. 어떤 끔찍한 일이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두가 눈치챘지만, 애써 그것을 밤의 익명 속으로 밀어넣고 잊으려 하는, 묵인된 섬약한 정적. 우기의 빗소리만이 그 허위를 줄기차게 비웃고 있다.

거의 인체가 견뎌낼 수 있는 속도의 한계를 시험하며 달려야 했던 페데리코는 젖은 문고리를 부여잡고 잠깐 가쁜 호흡을 골랐다. 한순간이나마 그런 지체를 스스로에게 허락한 이유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피로로 눈앞이 잠깐 어두워졌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그는 현관을 열었다. 역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공간에 들이차 있던 피비린내가 훅 밀려나왔다.

정갈하게 여행을 기다리고 있던 이삿짐들은 지금 사방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무엇 하나 적절한 자리에 있지 않은 기물들이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가로등의 빛에 어지러운 명암을 만들었다. 페데리코는 머리카락에서 눈으로 자꾸 들어가는 빗물을 쓸어내고 그 거실 가운데에 놓인 것을 보았다.

빛을 허옇게 반사하는 피웅덩이 중앙에 루포가 쓰러져 있다.

의도적으로 어설프게 귀와 꼬리가 드러나도록 몸을 가린.

"알리체 씨."

이름을 불리자 시체가, 아니 살아있는 그가 고개를 스르르 돌렸다. 페데리코는 그 눈썹이며 눈매에서 얼핏 베티나와의 공통점을 느꼈다. 가능한 한 비슷하게 보이도록 변장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바로 타인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패밀리는 숙청 대상의 집에 감히 찾아든 자가 설마 본인이 아니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어둠도 그를 도왔을 것이다. 이 광경을 도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페데리코가 선 문간에 눈의 초점을 맞추려 한 의사는 그것이 지금의 그에게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했다. 그래도 광륜과 날개의 실루엣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콜록거리며 웃었다.

"산크타…… 아아, 집행자구나. 베티나는?"

치명상이었으리라. 다가가기도 전에 페데리코는 알 수 있었다. 죽음의 목전에서 고통과 공포에 시달리며 저도 모르게 시전했을 치료 아츠는 적절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그의 이미 너덜너덜해진 신체를 무논리하게 기워붙였다. 살기에는 과도했고 죽기에는 부족했다. 상체까지는 어떻게든 평범한 부상자로 보였으나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자리에는 인체로 보이지 않는 불규칙한 윤곽이 솟아 있었다. 그는 잡아늘여진 죽음 가운데에 있다.

문을 닫자 빗소리가 멀어졌다. 페데리코는 마루에 빗물을 떨구며 다가갔다.

"베티나 씨는 다른 집행자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으응. 고마워."

"당신이 유인책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아…… 필요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이렇게 해야 했어……."

네 걸음째에 피웅덩이가 워커 아래 밟혔다.

"……당신이 스파이군요."

페데리코는 이곳으로 향하며 이미 확신했던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알리체는 끄덕이려 했지만 턱을 약간 경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페데리코는 그 곁에 몸을 낮추었다. 유언을 들어야 하니까. 알리체는 흐릿한 천사를 향해 고해했다.

"의사 면허를 딴 것부터가 여러 패밀리에 드나들 이유가 필요해서…… 내가 고분고분하다고 믿게 만드는 데에 또 몇 년…… 그 동안 서로에게 중요한 정보를 조금씩 빼돌려서, 때가 되면 치고받다가 싹 다 죽어버리게 만들고 싶었어."

페데리코는 어떤 사무치는 분노나 슬픔이 알리체를 그런 결의로 데려갔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계획입니다. 늦든 이르든 발각되었을 겁니다."

"알아…… 그래서…… 니콜로가 유언을 등록하고 싶다길래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 부추겼어. 타이밍을 맞춰서 베티나를 미끼로 건 거야. 베티나가 내 죄를 뒤집어쓰고 라테라노로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게…… 아주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구……."

알리체는 목을 조금 들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려 했다. 이미 시야가 흐려진 지 오래였기에 코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더이상 대지를 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탄식했다.

"난…… 뭐가 된 거지? 모든 패밀리의 칼잡이들을 몇 년씩 닥치는대로 치료해서 더 많은 살인을 하게 돕고, 요절한 친구의 유언을 이용하고, 거기에 기대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 친구도 팔아넘기는, 이게 대체 뭐지?"

지루한 빗소리. 극적인 번개의 번득임은 없다. 이것은 시라쿠사의 비가 그렇듯 지극히 흔한 풍경이다.

이미 빗물로 흠뻑 젖은 제복에 피는 느린 확산으로 번져들었다. 서늘하게 식은 알리체의 선혈로 무릎을 적시며 페데리코는 대답했다.

"알리체 루나티, 당신은 수탁인 베티나 로소가 지정한 보호 대상입니다."

친구의 이름을 귀에 담은 알리체는 문득 자신이 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하하, 하."

페데리코는 침묵으로 기다렸다. 알리체의 울음이 호흡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조금 잦아들었을 때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세요. 가능한 한 이행하겠습니다."

자신을 긴 죽음 가운데 가둔 의사는 눈물이 자꾸만 넘치는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면서도 웃음을 사그라뜨리지 않았다. 어쩌면 고통으로 인한 경련 때문일지도 모른다.

"칸나스 패밀리 그 개자식들을 다 죽여."

"……그 요청은 이미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잠깐 지체된 페데리코의 대답에 알리체는 놀란 얼굴을 했다. 이어 그는 단속적인, 생명의 마개가 덜걱거리며 열렸다 다시 닫히는 듯한 그 웃음소리를 몇 번 더 냈다.

"그럼 됐어……. 죽여 줘. 너무 아파."

페데리코는 수호총을 쥐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수탁인의 부탁에 따라 그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놓았다. 충돌하는 두 요구 사이에서 잠시 고려한 페데리코는 가방을 열었다.

"제가 상비하는 진통제의 LD50 투여량은 2시간 내에 6회분 이상입니다. 과용할 경우 의식을 잃은 뒤 호흡중추 정지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제게 총 5회분이 있습니다만, 당신의 종족과 체격, 출혈량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빠르게 투여할 경우 당신의 요청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는 그의 말을 느리게, 그리고 완전히 이해했다. 길게 호흡을 당겼다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호사스럽네. 고마워."

공증소는 집행자의 안전을 고려하여 치사량에 달하는 약물을 휴대하는 일을 금한다. 페데리코는 장기 외근 임무가 잦기에 따로 허가를 받았다. 과용을 막기 위한 타이머 장치가 달린 케이스를 사용하는 조건이다. 동행이 있는 경우를 위해 두 개까지는 한 번에 꺼낼 수 있었다.

폭주한 치료 아츠의 영향 때문에 인체의 일반적인 위치에 혈관이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페데리코는 변이가 닿지 않은 부위를 살핀 뒤 알리체의 목덜미에 스프링 주사기 두 개를 연달아 눌렀다.

뒤이어 잠시 몸을 일으킨 그는 피웅덩이에서 약간 떨어진 마루에 다시 앉아 공구 파우치를 꺼냈다. 알리체가 그 모습을 희미한 시선으로 따라갔다. 집행자는 창밖의 엷은 가로등 빛에 의지하며 남은 주사기를 봉인한 잠금장치를 해체하고 있었다. 알리체는 삶보다 죽음과 한없이 가까운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공학적인 장례라 할 것이다.

"일단 통증을 완화할 수 있도록 2회분을 먼저 투여했습니다. 3회부터는 의식이 혼탁해질 겁니다."

"아하하. 지금도 오락가락한데."

"연이어 투여했으니 약효가 상정보다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남기고 싶은 말이 더 있으시다면 지금 하시죠."

마루에 뒷머리를 누르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지만 알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몸짓이 조금 전보다 약간 쉬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신변은 다 정리하고 왔어……. 패밀리들에서 빼돌린 자료는 믿을 만한 사람이 이어받을 거야. 당신이 해 줄 일은 더 없어."

"그렇군요."

베티나를 향해서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페데리코는 그 사실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알리체는 집행자의 담백한 수긍이 좋았다. 그는 고통이 더디게 잦아드는 감각, 아니 무감각에 몽롱한 만족감을 느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착한 사람한테 끔찍한 기억을 떠안기게 됐네……. 미안해."

"괜찮습니다."

"아, 잠깐만, 제일 중요한 얘기…… 나 감염된 것 같아. 아츠 유닛이 부서지면서 다리에 박혔어."

페데리코는 치료 아츠가 폭주한 원인을 이해했다.

"당신은 그것을 가장 먼저 말해야 했습니다."

알리체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두려워하거나 책망하는 어투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다. 페데리코는 마치 뜨개질감을 벗삼아 이웃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처럼 손안의 섬세한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맥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아까까지 나도 몰랐어. 정신없이 아프기만 했거든……. 저승길 친구 만들 뻔 했네. 문단속 잘 해야 돼."

자괴한 모반자에게 평온한 죽음을 가져다 줄 약을 준비하며 그는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간 정밀공구가 움직이는 달각거리는 소리와 빗소리만이 지나갔다. 곧 짧고 인공적인 비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분해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페데리코는 남은 세 개의 주사기를 꺼내 알리체의 곁에 가지런히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브러진 이삿짐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덕트 테이프를 발견한 그는 그것을 주워들어 집의 문과 창문과 환풍기를 차근차근 막았다. 더 작은 방으로 옮길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페데리코는 지금 알리체의 몸에서 어느 부위가 이 지연된 생명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섣불리 옮기려다가는 즉사할지도 몰랐다.

알리체는 움직이는 페데리코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그것을 눈으로 따라갔다. 세부를 구분할 능력은 잃었지만 번진 실루엣뿐이라 해도 동작에 걸리는 미세한 지체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밀폐 작업을 거의 마쳤을 때 알리체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당신 다쳤구나."

알리체 스스로도 듣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였으나, 마지막으로 현관의 신문 투입구를 막은 산크타는 테이프를 가방에 넣으며 돌아보았다. 표정 없는 그림자가 담담히 대답했다.

"움직임에 지장이 되는 수준은 아닙니다."

"무슨. 자꾸 멈추던데. 왼팔?"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왼팔 하박입니다."

알리체는 그만 즐거워졌다. 지금 칭찬이 어울리는 시점이야? 나 곧 죽는데. 유쾌한 기분으로 그는 눈짓했다.

"와 봐. 모처럼 의사 노릇 좀 하자."

"……."

거실 중앙으로 돌아온 페데리코는 그 자리에 선 채 알리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허리 아래부터는 한때 루포였던 존재라고 칭해야 할 뒤엉킨 형상으로 그늘에 잠긴 알리체는, 이해, 어련히 이해한다는 투로 낄낄거렸다.

"괜찮아. 같은 실수 두 번은 안 해."

알리체의 목소리는 꺼질 듯 작았으나 맑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페데리코가 몸을 낮추어 오른편에 앉자 알리체는 손끝을 조금 까닥였다. 손을 들어올리고 싶은 듯했지만 어려워 보였다. 이내 의도를 이해한 페데리코는 움직였다. 그는 어떤 공포도 반감도 없이, 피웅덩이에 잠긴 알리체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팔에 끌어다 대었다.

감염자가 된 알리체는 유닛 없이도 아츠를 쓸 수 있었다. 피칠갑된 손바닥이 페데리코의 팔과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따스한 빛이 어른거렸다. 그 밝음이 천천히 부풀었다. 전해지는 체온처럼, 여명처럼. 심야에 젖어 있던 거실 전체가 잠시 빛의 세례를 받으며 모든 부조리와 비극의 윤곽을 환하게 드러냈다. 이내 빛은 한 점으로 줄어들었다. 붉게 벌어졌던 상처는 모여든 안온한 광점들로 차오르며 스르르 지워졌다.

잔광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페데리코는 쥐고 있던 가느다란 손목을 가만히 알리체의 상체 위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집행자의 낮은 목소리는 무뎌진 청각에도 바르게 가닿았다. 감사합니다……. 알리체 루나티는 그것이 생애 마지막으로 들을 말으로 썩 근사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완료형의 고통이 혈액을 대신해 순환하는 몸을 바르게 뉘였다.

"됐어. 이제 해.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마."

페데리코는 그렇게 했다.

……2분 뒤 집행자는 거리로 뛰쳐나와 문을 세게 닫았다. 젖은 문의 개폐부를 팔뚝의 소매로 닦아내며 그 팔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다시 빗물이 닿기 전 신속하게 테이프로 틀어막았다. 그 와중 그는 현관문에 새겨진 이상한 자국을 보았다. 다급하게 도착했을 때는 지나쳤던, 나무문 위로 날붙이를 거칠게 휘갈겨 그은 자국. 정찰을 하던 시점까지는 이런 것은 없었다. 밀폐를 마친 그는 거리 중앙으로 몇 걸음 물러나 이윽고 문의 전체상을 눈에 담았다.

표식 같았다. 뒤섞인 투박한 선들의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 집행자는 붙박힌 채 문을 마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다면 염려하며 어깨를 두드렸을 만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페데리코는 그것이 숙청의 표식이리라고 추측했다.

그때 그 문이 덜컥거리며 뒤흔들렸다. 동시에 집의 온 창문이 한순간 거리 전체를 밝히며 백열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빗소리.

창 너머라 해도 오리지늄 폭발의 빛을 직시한 시각은 잠시 마비되었다. 눈이 기능을 되찾을 동안 페데리코는 눈꺼풀 안에서 번득이는 빛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높은 습도는 분진의 확산을 둔화한다. 미량의 분진이 새어나왔더라도 빗물에 쓸려 내려가며 비활성 상태가 될 때까지 희석될 것이다. 새벽, 좀처럼 그치지 않는 빗속, 누구도 차마 덧창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는 적막한 이국의 거리 한가운데에 선 채, 찬비도 더이상 식힐 수 없는 냉정한 정신으로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그는, 활성 오리지늄 분진을 막기 위한 조치를 더 취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다하지 못했다는 감각이 들었다.

아마도,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어겼기 때문이다.

귀에 착용한 통신기로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에젤은 단말을 통해 선배의 위치정보가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지만, 섣불리 다가오는 대신 정해진 합류 위치에서 정해진 시간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페데리코는 라테라노로 돌아간 후 수습 집행자 에젤에게 매길 동료 평가의 점수를 한 단계 더 상향 조정했다. 그는 통신 너머 에젤에게 말했다. 시력이 완전히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안개에 묻히는 거리 끝에 초점을 맞추며. 시야가 닿는 길 전체는 비어 있었다. 혼자였다.

"돌발상황이 있어 당초 예정된 합류 지점에서 다소 멀어졌군요. 제2지점에서 40분 뒤 합류하겠습니다."

에젤은 페데리코의 변함없는 목소리에 안도했다. [확인했습니다. 베티나 씨랑 같이 제2지점으로 이동할게요.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대답하기 전 팔을 조금 들어 내려다보았다. 칼날에 찢겨 벌어진 소매 아래의 몸은 생채기 하나조차 없었다. 전투 중 전신에 생긴 작은 상처들도, 피로마저도 완전히 씻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이요?]

"예. 우수한 의사를 만났습니다."

페데리코는 몸을 돌려 젖은 거리를 향했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죽은 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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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병자성사라고 한다면서요… 혼란스러워하는 비종교인…

후반부를 구상하면서 amazarashi - Swipe 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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