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DAYS 02
료켄유사♀
지난 요약 - 유사쿠가 청혼했지만 료켄은 거절했다. 유사쿠는 침울해 한다.
"그~러니까, 유사쿠쨩이 리볼버에게 결혼하자고 했는데 리볼버가 거절했고 그래서 지금 저렇다는거지?"
"그렇지."
"거절당할게 뻔한데 유사쿠쨩은 왜 그랬대… 쿠사나기, 안 말렸어?"
"말렸다니까. 그런데 엄청 확고해서, 내가 말리는 것보다 료켄을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게 좋을거 같았어."
"어휴……"
두 시간 전 트럭을 인적이 드문 도로변에 주차하자 유사쿠는 잠시 생각 좀 할게. 라며 가게쪽으로 들어가 계속 생각에 빠져 있었다. 유사쿠가 늦는데다 연락까지 안 받으니 걱정한 아이가 쿠사나기에게 연락해 찾아와 데려가려고 했지만 유사쿠는 대꾸도 움직임도 없었다. 쿠사나기는 유사쿠가 생각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바라는지라 아이를 데리고 의자를 꺼내 트럭 밖에 앉았다. 의외로 아이는 상황설명을 듣고 소란스럽게 굴진 않았다. 유사쿠가 마음에 상처를 받은 듯 한게 많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깊은 한숨으로 대화는 끝났고 셋은 그렇게 각자 생각에 빠졌다. 덜컹덜컹, 트럭 위쪽으로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와 빠아앙, 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시끄럽지만 깊게 집중하는 셋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건 역시 아이였다. 아이는 일어나 트럭의 뒷문을 화악 열었다. 어이! 쿠사나기가 깜짝 놀라 다가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이는 쿠사나기에게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꽃다발만 바라보고 있는 유사쿠에게 물었다.
"있잖아, 유사쿠. 결혼이란거 엄청 중요한거지?"
"……어."
조금 늦었지만 대답이 돌아왔다. 유사쿠는 얼굴만 살짝 돌려 아이와 쿠사나기를 바라보았다. 기운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럼 그렇게 중요한걸 왜 리볼버 녀석이랑 하자고 그랬어?"
"……? 옛날에 약속도 했고, 료켄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잡으려고."
"너 하노이의 탑 사건 때, 친구하자고 했는데 녀석이 거절했잖아."
"아이 너 왜 그래? 유사쿠에게 괜한 말 하지마."
"친구도 안 하려는 녀석이 결혼을 할 리가 만무하잖아."
그건 그렇다. 맞는 말이다. 쿠사나기도 유사쿠도 그 말엔 반박하지 못했다. 료켄은 그때 이후로 변했으니까… 그렇다면 녀석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고 유사쿠는 고개를 돌렸다. 꽃다발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결혼같이 중요한걸 들이밀면 좀 그렇지 않냐? 다시 친구하자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결혼이야?"
"약속…"
"약속 말고. 새로운 미래 어쩌구 말고."
"그건…… …모르겠어…"
"즉 너는 리볼버와는 친구보다 결혼이 하고 싶었던 거 아냐?
"그런…가…"
그런가라니, 쿠사나기는 답답했다. 아무래도 아이도 조금 눈치챈 모양인데 당사자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물론 유사쿠가 왜 눈치채지 못하는지 쿠사나기는 알고 있다. 유사쿠는 경험이 없고, 료켄은 유사쿠의 안에서 지나치게 소중하다. '10년 전 나를 구원해준 아이. 세 가지를 생각하라며 희망을 주던 그 아이.' 그 아이가 코가미 료켄이라는 것을 알고 유사쿠는 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친구가 되고 싶어할 만큼. 그러나 이 이후로 유사쿠의 료켄을 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걸, 마음이 변해가는걸 가장 가까운 어른인 쿠사나기만 알았다. 그런것은 인관관계와 경험이 쌓이면서 타인이나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알아가며 터득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유사쿠에겐 그런 것이 부족하다. 로스트 사건의 영향으로 타인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커다랗고 깊은 틈이 생겼고 링크 브레인즈 활동을 하며 정체를 숨기기 위해 더더욱 사람들과 접촉 하지 않았다. 그런 유사쿠에게, 그런 감정은 스스로 깨닫기 힘들다. 료켄이 소중하다는걸 알아채도 '그 아이'의 그늘에 가려져 '그래서 소중하다'라고 결론 내릴 뿐이다. 아무리 냉정하고 판단력이 좋은데다 타인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편이지만 유사쿠는 아직 잘 모른다. 타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렇게 여러가지로 결여된 소녀가 동료로서 가장 가까운 어른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이의 한숨보다 더 큰 한숨이 쿠사나기의 입에서 나왔다. 아까 고민한대로 유사쿠의 사랑은 무척 슬프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래도 쿠사나기는 유사쿠가 좀 더 많은 감정을 경험하는게 미래를 위해 좋을것 같았다. 그래, 물꼬를 터주자. 유사쿠가 알아 챌 수 있게. 유사쿠에게 다가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고 동그란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유사쿠. 료켄 녀석이 너에게 참 소중하지. 맞지?"
"응……"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응."
유사쿠는 쿠사나기와 눈을 맞추었다. 비록 여전히 어두운 눈빛이지만 료켄을 향한 의지는 또렷하게 빛났다.
"료켄과 어떻게 함께하고 싶은지 생각하다 그 약속이 떠올라서 '결혼해야겠다!' 생각한거지?"
"으응……"
"그렇다고 해도 정말로 당장 결혼하자 하지 않을거야. 아무리 너라도."
"무슨 소리야?"
"아까 아이가 말한 것 처럼, 네가 마음속으로 결혼하고 싶을 만큼 료켄은 네게 큰 의미가 아닐까?"
"그거야, 료켄은……"
"그래. '그 아이'지. 그래도 그 소중함은 결혼과는 다른거잖아. 그렇지?"
"……"
눈빛이 흔들렸다. 료켄을 향한 의지에 빛나는 소용돌이가 일었다. 쿠사나기는 그걸 똑똑히 보았다. 꽃다발을 쥔 손을 유사쿠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꽃다발이 품에 폭 안겼다.
"료켄 녀석이 어떻게 소중한지, 녀석과 뭘 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봐. '그 아이'나 '약속'은 미뤄두고."
"알았어. 아이, 가자. 쿠사나기씨… 오늘 시간 많이 낭비하게 해서 미안해."
"낭비라고 생각 안 하니까 괜찮아."
**
유사쿠와 아이는 평소의 귀갓길과는 다르게 덴시티의 야경이 빛나는 번화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이가 왜 멀리 돌아가냐고 물었지만 유사쿠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가고 싶었다. 정확히는 어떤 것들이 보고 싶었다. 슬슬 주거단지에 불이 꺼지는 시간이지만 번화가는 오히려 더욱 밝아지고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솔티스 한 기와 덴시티고의 학생은 말없이 걸었다. 음악 소리, 대화하는 소리, 고함 소리, 자동차 소리, 신호등 울리는 소리, 호객하는 소리… 시끄러운 와중 둘만 조용했다. 그게 조금 민망했던지 아이는 실없는 말을 던졌다.
"어라~ 유사쿠쨩, 오해받는거 아냐?"
"무슨 오해."
"꽃을 들고 이렇게 멋있는 사람(목을 가린 차림이다)이랑 나란히 밤거리를 걷다니! 누가 보면 오해할라! 아악!"
"생각 중에 방해하지마."
터엉, 아이의 다리를 걷어차자 아이가 아프다는 듯 엄살을 피웠다. 그러다가도 유사쿠가 먼저 가면 서둘러 따라와 발걸음을 맞추었다. 유사쿠는 아이를 신경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링크 브레인즈가 아닌 현실의 번화가. 실제 사람들. 그 중에는 연인사이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하호호 웃으며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 평소에는 관심이고 뭐고 없지만 지금 유사쿠는 그런 것이 보고싶었다. 그래서 굳이 번화가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옆으로 많이 지나간다. 때로 불쾌한 냄새가 나서 그때마다 꽃다발의 향기로 냄새를 무시했다.
"아."
"어이쿠,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잠시 꽃다발의 향을 맡다 어느 커플과 어깨가 부딪혔다. 사람좋게 사과하고 지나가는 둘의 뒷모습에 유사쿠의 시선이 고정됐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둘, 아주 가깝게 붙어 체온을 나누는 둘, 서로를 마주보고 미소짓는 둘…… 어느새 손은 서로의 허리를 감싸 꼬옥 껴안았다.
료켄의 손이 나를 감싸안는다. 동시에 나도 료켄을 감싸안는다.
헛, 하고 유사쿠는 현실로 돌아왔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떠오르는 둘의 모습을 지웠다. 아이는 길 한가운데 멈추고 커플을 바라보는 유사쿠에게 다가갔다. 작은 목소리로 아이가 속삭였다.
"역시 유사쿠쨩은 료켄과 함께 걷고 싶지? 저렇게."
"아냐."
"료켄이 그러자고 하면?"
"……거절하진 않아."
"거봐. 그러고 싶잖아."
유사쿠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도 조용히 따라왔다. 머릿속에 아까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해받는거 아냐? 아무래도 그건 반만 실없는 소리였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붙어 나란히 걷는 둘. 어느정도는 오해가 생길 법한 행동이다. 연인으로. 아이는 '누구랑 거리를 걷고 싶어?'라고 떠보고 싶었던것 같았다. 묻기도 전에 유사쿠가 끊어버렸지만. 료켄과 저러고 싶다. 그건, 즉…… 아까보다 더 세차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웠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파르르, 꽃다발의 포장지가 떨렸다. 그런 생각이 거의 다 없어질 즈음 아이의 목소리가 유사쿠를 다시 이끌었다.
"유사쿠. 저기 봐봐. 건너편에."
번화가의 끝, 마지막 횡단보도에 선 유사쿠의 건너편에 다른 커플이 서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속의 둘은 꼭 붙어 키스를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료켄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미소가 떠올랐다.
문득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빨리 뛰었지?
아까부터.
료켄의 손이 나를 감싸안을 때부터.
그 순간 '사실은 ( ) 싶은거지? 사실은 ( )하는 거지?' 아까 아이가 질문을 이어갔다면 최종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어떤건지 유사쿠는 이해했다.
그리고 유사쿠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더는 도망치지 못했다.
**
유사쿠가 복도 끝 공용샤워실에서 씻는 동안 듀얼 디스크 속의 아이는 작은 로봇삐의 도움을 받아 솔티스 기체를 닦았다. 유사쿠가 생각에 빠져있다가 그만 비누를 밟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런 있을 수 없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의 유사쿠는 평소와는 명백히 다르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 유사쿠가 걱정스러웠다. 집에 오자마자 쿠사나기에게 '유사쿠가 알게 된거 같아. 근데 상태가 안 좋은거 같은데?' 메세지를 보내자 '처음이라 그래. 인간들은 가끔 그런 감정을 못 이기거든.' 금방 답장이 왔다. 아이는 그 말대로 가만 두고 있지만 역시 걱정스러운건 걱정스러웠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유사쿠를 몹시 마음고생하게 한 지라 앞으로는 되도록 유사쿠에게 힘든 일이 없길 바랐다. 그런데 오늘 료켄 녀석에게 거절당하며 받은 상처에 커다랗고 낯선 감정에 정말 힘든 날이었을테니 아이는 절로 걱정이 샘솟았다.
"오늘 주인님이 많이 힘드신것 같습니다. (ToT)"
"그게, 네 주인님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서 그래~"
"여자라서 뭐."
"흐아악!!"
어느새 머리까지 말리고 온 유사쿠가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꼭 이럴 때 온다니까! 어? 나 놀래키려고 작정했지? 민망함에 적반하장으로 대답했다. '시끄러워.' 그렇게 말할걸 예상하며 아이는 로봇삐 뒤로 숨었다. 뒤이은 유사쿠의 말은 조금 놀라웠다.
"그런거에 여자고 뭐고 관계없어."
"……나도 알아. 그냥 드라마 대사 해보고 싶었어."
'그런거'를 스스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씻는 동안 여러 생각을 했나보다. 아이는 가끔 드라마에서 보던 '샤워하며 생각하기'를 떠올렸다. 그거, 정말로 인간들이 자주 하는 건가 보네. 나중에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AI라 제대로 못 느끼겠지만.
"잔다. 로봇삐, 불끄고 오프해도 돼."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잘자라~ 바보 로봇삐."
"바보는 금지어 입니다!"
"그러니까 바보라구."
"시끄러워."
결국 마지막은 '시끄러워.' 아이는 로봇삐가 듀얼 디스크함에 자기를 넣자 로봇삐를 쓰다듬어주었다. 불이 꺼지고 작은 방에는 처음에 어둠이 깔리다 곧 가로등 불빛이 차올랐다. 늘 보던 순서. 늘 보던 광경. 아니, 늘 보던 광경이 아니다. 유사쿠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다. 트라우마가 떠올라 그런 경우가 자주 있지만 이번엔 다르다. 쟤, 엄청 피곤할텐데. 아이는 역시 유사쿠가 걱정되었다.
**
'사실은 료켄과 연인이 되고 싶은거지? 사실은 료켄을 좋아하는 거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가시지 않는 질문에 유사쿠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 생길 줄은 전혀 몰랐다. 좋아한다, 연인이 되고 싶다, 그런...... 처음 몰아치는 감정이 몹시 낯선데다 무거웠다. 거기다 료켄이 자꾸 떠올랐다. 늘 떠올랐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따라 떠오르는 것이 아닌 상상 속의 료켄. 잠깐 생각해도 심장이 콩콩 뛰는. 이제는 정말 외면할 수 없다. 유사쿠는 다시 인정했다.
후지키 유사쿠는 코가미 료켄을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사랑의 사회적인 궁극형태가 되어도 좋을 정도로.
결혼.
부부.
그런 미래를 함께 잡고싶을 정도로.
"거절한다."
"듣고싶지 않다."
"돌아가."
료켄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사건의 트라우마와 다른 자신이 어둠 속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부케를 가로등의 빛이 초라하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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