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빵준 / 이별재회?물

* 동양풍인 것 같으면서도 서양풍이고.. 고전 같으면서도 현대물인 것도 같은.. 모호한 배경입니다

* 언제나처럼 고증 없습니다 엉터리 야매 싫어하시면 보지 말아주세용

전영중은 파랗고 맑은 하늘의 꿈을 꾼다. 구름 한 점 없는 꿈속 하늘은 푸르고, 또 푸르다. 화창한 날씨 특유의 싱그러움과 풋풋한 향이 코를 가득 채우고, 강가의 바람이 귀를 간지럽히며, 지저귀는 새들은 달리는 말의 갈기처럼 - 또는 잔뜩 번진 먹물처럼 - 눈앞을 흐릿하고 재빠르게 지나가며 제 짝을 찾아간다. 햇빛은 지면에 내려앉기까지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며 밝게도 비친다. 따끈한 햇살이 온몸을 담요처럼 감싸면 전영중은 그제야 숨을 한번 고르고, 눈을 뜬다 -

연두색이다.

3월에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처럼, 밥상 위의 잘 익은 완두콩처럼. 꿈과는 다르게 회색빛이 맴도는 안개 낀 하늘에는 한 점의 싱그러운 연둣빛이 박혀 보인다.

전영중은 이가 별과도 다름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작고도 끈질긴 연두색 점을 눈으로 좇는다. 오늘은 강변 바람이 유독 심했다. 점이 좌우로 거세게 흔들린다. 그런데도 높이는 꿋꿋이 변함없음에 그려지는 상황이 있어 작게 웃음이 샌다. 결국 전영중의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은 저 멀리의 목소리다. 형, 영중이 형. 목청도 좋아라, 관찰 탑 1층 저 아래에서 하늘 높이 고개만 쳐들고 내지르는 소리가 한 글자 한 글자 뚜렷하게 들린다. 전영중이 눈동자만 굴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더니, 제 동생인 것을 확인하고선 재차 지평선 너머의 점으로 집중을 돌린다.

-아, 영중이 혀엉! 전영중! 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가 커지자 백기를 든 전영중이다. 알았어, 재석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마침내, 뒤를 돈다. 몇 발짝 안 되는 문을 향하면서도 몇 번이고 재차 고개를 돌리고 싶은 욕구를 참는다. 자신을 다독인다. 아니다, 내일도 날이다. 내일도 날이며, 하늘이 제 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내일도, 모래도, 전영중은 형형색색의 애처롭고도 작은 점들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을 테니. 미련을 떨쳐내며 육중한 철제 문을 밀어내는 얼굴이 잔뜩 찡그린다. 웃음과 울음 그 사이의 기묘한 혼종이다.

끝없이 돌고 도는 돌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면 조재석이 대자로 뻗어 풀밭에 누워있다. 전영중이 가볍게 핀잔을 준다. 너 또 흙이랑 풀 묻힌 채로 식사하러 오는 건 아니지? 아버지가 싫어하셔. 조재석이 관심은 진작에 팔아먹은 말투로 성의 없게 대답한다. 아 뭐, 네, 씻고 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 뒤를 도는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다. 허나 세 발짝 정도 뗐을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한숨이 발목을 잡는다.

-형, 아침마다 그 짓 언제까지 할 건데요.

-....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요...

-...재석아, 신경 끄자.

발끈한 조재석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갑자기 어떤 생각에 온 몸에 힘이 도로 빠졌는지, 축 늘어져 되눕는다. 짧은 머리카락이 흙과 풀과 뒤엉킨다.

-그럴 거면 그냥 방에서 보라고요. 다 잘 보이잖아요. 굳이, 저 높이 올라가서 봐야 하나.

-저기가, 가장 가까운데 어떡해.

-하... 그래서 그럼,

조재석이 혀를 찬다. 이제는 정말 포기한 말투이다. 오늘은 무슨 색이었는데요?

전영중이 연둣빛 점을 떠올린다. 생각만 해도 붉고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타올라 온몸을 노곤하게 적시는 기분이다. 몇번을 봤는가.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내일도. 장정 3년을 닿지 않는 멀리에서 염원과도 같은 점을 수두룩하게 봐왔지만 매번 처음인 마냥 손끝과 귀 끝에 혈액을 불어넣는 심장이 떨리며 박동한다 -

-연두색. 연두색이었어.

오, 조재석이 휘파람을 작게 분다. 다행이네, 잘 계시나봐요.

전영중이 탁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강변은 부러 등진다. 다시 봤을 시, 하늘을 지키던 푸릇한 연이 혹시나 사라졌을까 봐. 그러면 저도 어쩔 줄 모를 테니까. 그래도 말은 이렇게 한다.

-잘 지내겠지, 걔가 누군데...

전영중 X 성준수

입으로는 잘 지낸다 해도 사시사철 성준수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한 건 사실이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성준수가 유배 간 섬은 작고도 초라했다. 궁중 모든 책을 뒤져 그 섬의 지리이며 기후며를 죄다 외울 기세로 하나하나 짚어본 적이 있었다. 연미도(恋美島), 허허벌판, 여름엔 끓고, 겨울에는 언다. 강수량이 높은 편이며 육지와 가까운 강변이 죄다 돌이라 거센 물결에 접근이 쉽지 않다. 더불어 나라의 서쪽 끝에 위치하여 나라에 재앙이 덮칠 때면 아방가르드가 되어 두 팔 벌려 관문처럼 한 차례 막아준다는, 신성한 재난의 섬. 물론 마지막은 흡사 단군이나 길가메시 같은 신화에 불과했지만, 전영중의 심기를 거스르는 데 충분하고 충분했다. 특히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둘을 함께 있는 꼴을 죽어도 보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단호함이나 의지가 보였다. 얼마나 오래 원망하며 앓아누워, 한참을 얼굴을 보기도 거부했었는지.

배에 실려 떠나기 하루 전, 성준수가 어둠 속에서 눈물로 잔뜩 젖은 전영중 양쪽 볼을 잡고 말했더라. 영중아, 전영중. 부러 느리게 내뱉은 목소리는 그 떨림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 전영중은 끄억 끄억 울음을 삼켰다. 뭔데, 준수야 - 죄인도 아닌 주제에 거지꼴로 흰 누더기 하나 걸친 네가 철창 사이에 둔 채 내 얼굴 붙잡고 부탁을 하는데 그게 뭔들 내가 안 들어주겠어. 도둑질도 방화도 살인도 서슴지 않을 테니 말만 해. 물론 전부 입 밖으로 내세우지 못한 말이라 부질없었지만, 성준수는 알아듣는 듯했다. 볼에 닿은 손이 축축한 눈 밑을 살살 쓸었다. 나 연 좀 사줘. 전부 다른 색으로, 형광, 야광이면 더 좋고. 줄은 길게. 내일 나 가기 전까지 사서 배 속에 숨겨줘, 어?

연? 성준수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다급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 빨강은 사과고 포도주야, 맛있는 거 먹은 날 있으면 알려줄게. 노랑은 햇살. 날씨가 좋은 거야, 그런 날은 낚시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게. 파랑은 바람이야. 육지에서의 소리와 냄새가 넘어오면 그런 날은 유독 외롭지 않을 거야. 연두색은 푸른 들이야. 언제나처럼 뜰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으면 세상이 사라지고 너랑 나밖에 안 남는 거야. 그런 날은 네가 미치게끔 보고 싶은 거야, 영중아... 암기의 기회는 한 번이었고, 은근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성준수는 전영중의 머릿속에 이를 각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음날 전영중은 관리들에게 돈을 몇 푼 찔러주고 음식들 사이에 포장된 연을 끼워 넣었다.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었겠지만, 떠나는 애인에게 최소한의 유흥이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마저 내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성준수는 육지에서는 고작 작은 돌덩이로 보이는 곳으로 향해 떠났다. 가까이는 아니지만 멀리도 아닌, 잡힐 듯 안 잡힐 듯 사람 미치게 하는 탄탈라스의 과일처럼, 딱 손아귀 밖의 거리로 떠났다. 성준수와 평생 헤어지고서야 전영중은 제가 앞으로 성준수에 대해 알게 될 것은 죄다 좋은 소식밖에 없을 것이라 깨달았다.

그리하여, 연.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설사 불과 같은 것으로 신호를 주고받기를 시도했다가는 섬 전체를 불질러 놓아야 했기에 성준수가 재빠르게 제시한 대안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을 빼고는 성준수는 날마다 연을 날렸다. 처음에는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던 전영중도 날이 갈수록 드높은 하늘의 작은 연을 찾는 것을 유일한 숨구멍 삼았다. 별것이 아니더라도 성준수의 소식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그리움을 중화시켰다. 오늘은 낚시를 하고 있겠구나, 오늘은 부둣가에서 눈을 감고 육지를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오늘은 나를 무척,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는구나...

언제나처럼, 저녁 시간이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찾아온다. 전영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진절머리나는  이 놀이를 통달했다. 아버지가 와서 자상하게, 허나 단호하게 일컫는다. 준수는 잊어라. 너도 여자를 만나서 우리 가문을 이어가고 왕국을 책임저야지. 재석이가 있다는 사실을 짚으면 아버지는 슬프게 웃었다. 재석이는 우리 애가 아니잖니. 이건 솔직히 왕국이 아니라 조금 큰 마을 아니냐는 말에는 아버지의 인위적인 웃음이 뒤따랐다. 노자의 소국과민 사상과 딱 들어맞는 나라 아니냐. 준수도 잘 살 수 있도록 꾸준히 신경 쓰고 있으니, 너는 그만 잊고 인생을 살거라, 첫째야. 아비 부탁이다... 남의 인생에 훈수 두느라 애꿎은 사람 섬으로 보내어 가두어버렸으면서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전영중이 진절머리가 날 때 즘이면 어머니가 들어와 아버지를 내쫓았다. 따뜻한 말로 공감해주며 전영중을 위로하던 어머니는 말 중간에 노선을 변경한다. 누구네 첫째 딸이 그렇게 공감을 잘하고 말을 잘 들어준다는구나. 한번 만나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래?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면접도 취조도 아니고. 전형적인 천사와 악마 수법에 전영중은 이제 마음의 미동조차 없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영중아... 어머니, 제발.

자기를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어여쁜 애인이 버젓이 살아 섬에서 저를 기다리는데, 전영중이 무슨 수로 잊겠는가.

그놈의 가문이 뭐라고 씨발, 별일 없이 굴러가는 자그마한 나라 주제에 전영중에게 원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하루는 열병이 나 아침에 눈이 떠지질 않는다. 귀가 먹먹하고 목덜미가 후끈후끈한 와중에도 전영중은 편히 쉴 수 없었다. 아, 아직 못 봤는데. 눈을 꾹 감고 설레는 마음으로 관찰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숨을 들이키며 파아란 하늘을 꿈꾼 후, 두 눈에 성준수의 편지를 가득 담아놓지 못했는데. 몸을 함락시킨 잠 사이사이에도 무의식이 비집고 들어가 불안함을 한가득 안겨준다. 몇 번이고 꿈속에서는 관찰탑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하지만 식은땀에 절여 일어날 때에는 언제나 결국 침대 위다. 해롱거리는 상태로 불러본다. 준수야, 성준수우... 목소리가 갈라진다. 눈을 다시 감는다. 성준수가 전영중 볼의 뜨끈한 눈물을 닦아주었다. 병신, 왜 자다가 처울고 지랄이야. 성준수는 흰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을 하고 있었으며 전영중과의 사이에 철창을 두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통풍 솔솔 되는 가벼운 한복을 입고 등에는 낚싯대를 이고 있었, 아니, 상의를 벗은 채 허리춤에는 연둣빛 연을 매달고 있었다. 성준수 뒤로 하늘이 밝아진다. 사라질세라 전영중도 얼른 성준수 볼을 꽉 쥔다. 뒤의 배경은 밝은데, 성준수 얼굴만큼은 지하의 어둠 속에 가려져 있어 도저히 보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전영중과 마찬가지로 축축했다...

전영중은 잠에서 깬다.

-형! 형! 형형형형!

-...아. 뭔데 그래.

-오늘 처음 보는 색이었어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뭐? 좀 더 작게 말해봐, 골 울려...

-아오!

답답한지 조재석이 가슴을 두어 번 텁텁 친다. 숨이 약간 가파른 게 뛰어온 건가 싶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말이 더 차분하게 흘러나온다.

-준수 형. 오늘 형 아파서 제가 대신 보고 왔다고요, 연.

이토록 살면서 조재석이 기특했던 적이 없었다. 전영중은 곧바로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무거웠던 머리가 순식간에 가벼워져 베개에서 들린다.

-무슨 색이었는데.

-그... 솔직히 저도 처음 보는 색이긴 한데,

조재석이 머리를 긁적인다.

-보라색이었어요.

전영중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삐 - 하는 잡음이 메아리치는 머릿속이 붕 뜬다. 시간이 순간 고무줄처럼 늘어나며 느려진다. 보라색, 보라색은 쓸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보라색은,

보라색은 보기 힘든 색깔이지, 빨강과 파랑을 섞어야 나오니까. 달팽이와 꽃을 활용하여 어렵게 만들던 색이야. 고대에도 황제만이 두르고 다녔던 색인데,

성준수의 입술이 제 입술에 내리 앉은 채 속삭였다, 시원한 철창이 볼에 꾸욱 눌렸다 -

보라색은, 흔치 않은 기회이자, 사치야. 누군가의 노고이자 누군가의 자랑이야.

그러니까

씨발 날 보러 오라는 거야...

전영중은 이불을 걷어찬다. 순간 현기증이 나 방 안이 빙글 돌았지만, 그게 아파서 그런 건지 도파민의 급증 때문인지 정확지 않았다. 형, 왜 그래요, 뭔데?! 소리치는 조재석은 안중에도 없다.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혹시나, 혹시나 하는 착각과도 같은 생각 때문에 늘상 준비해 놓은 상비 배낭이 있었다. 장판의 일부를 뜯어내어 숨겨놓은 짐을 집어 들고 그럼에도 왠지 성에 차지 않아 책상을 엎다시피 해 물건을 쓸어 담는다. 성준수한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네가 뭐라도 좋은 거 하나 더 손에 넣고, 나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뒤에서 조재석은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형 정신 차려요 형, 뭔데 왜 그러는데여! 휙 돌아보는 전영중의 눈은 단연코 몸이 아픈 자의 것이 아니다. 준수, 준수가 지금... 아 뭔데요? 아프대요? 아니, 날더러 보러 오래...

-네에?!

형 미쳤어요? 아니 저길 어떻게, 엥? 준수 형도 제정신이, 아니, 영중이 형! 다급한 말소리에 대한 대답으로 가방을 어깨 너머로 던져 맨 전영중이 정신없이 말을 흘린다. 그럼 너도 같이 오든가. 네? 아... 아아아 오케이 콜.


성준수는 유배를 갈 때 기상호 공태성 둘을 두고 고민하다가 기상호를 데려갔었다. 선택 당하는 놈은 자유를 잃고, 선택 받지 못한 놈은 일자리를 잃는 것이기에 고민이 길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내놓는 게 마음이 편한 공태성을 놓아주었다. 햄 빙신가, 내 아니믄 누가 밥해주나? 전영중은 화인지 설움인지를 토해냈던 공태성을 지켜본 기억이 났다. 그때 성질 더러운 우리 준수, 그래도 나름 챙기는 사람이 있었구나, 와는 생각과 함께 일찍이도 낚아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손도 타지 못하는 섬으로 들어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을 때는 정말로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성준수와 함께 가기로 결정한 기상호는 고작 열셋이었다. 내는 밥도 몬하고, 집안일도 서툰데, 와 나를 골랐어요. 전영중의 생각과 비슷한 것을 기상호는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성준수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니 두고 내가 가면 퍽 마음이 편하겠다, 씨바거. 하지만 전영중과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는 귓속에다가 속삭인 내용은 달랐다. 기상호 저 새끼가, 지리랑 날씨를 읽더라고...

성준수는 기상호를 믿는다. 따라서 성준수를 믿는 전영중도 기상호를 믿어보았다.  전영중이 구비해놓은 작은 배는, 끓어오르는 이마를 식히는 연미도 주변의 거세고 차가운 물결을 타고 매끄럽게 움직인다. 작은 돛단배는 자아가 있는 마냥 알아서 왕자와 그 동생을 지킨다. 하늘도 돕고 물도 도왔다. 평상시 연미도까지의 길은 험했고, 그 물은 거셌으며, 섬의 유일한 부둣가에는 보초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오늘은 부둣가가 조용하다. 전영중이 급하게 배를 바위틈에 끌어다 묶어놓고 각진 언덕을 뛰어 올라간다.

-미친 것.

사랑인지 전영중인지를 디스하는 말과 함께 조재석도 천천히 뒤를 따른다.

바위를 한참을 지나다 보면 구불구불 작은 길이 난다. 길의 양쪽은 부서진 조개껍데기와 날카로운 돌멩이 따위로 뒤덮여 빽빽한 모래사장과 같은 시각적 효과가 있었다. 길은 끝없이 올라간다. 관측 탑처럼, 하늘로, 하늘로. 그리고 길 끝, 나라의 서쪽 끝, 벼랑 끝에는, 성준수가 있다.

-성준수!

끝까지 가오 잡긴. 흰 옷자락만 보고 전영중이 허겁지겁 달려 올라간 곳에서는 언제나처럼 말간 얼굴의 예쁜 성준수가, 언제나처럼 거만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두 손 벌려 서 있다. 주제에 나만 또 보고 싶었냐고, 왜 나만 뛰는데, 잠깐 스쳐 지나가는 불안 섞인 불만은 눈이 마주치자 왈칵 일그러지는 성준수 표정 하나에 언제 존재했냐는 듯 사라진다. 먹먹한 마음으로 그 품에 뛰어든다. 끝까지 한마디 없는 성준수의 작은 머리통이 파묻힌 왼쪽 어깨가 뜨겁게 젖어드는 것을 전영중은 뼈로 새긴다. 내가 뭐라고 너가 이토록 값진 눈물을 흘리는 걸까. 내가 감히 뭐라고...

-준수야, 보고 싶었어.

-....

-너 생각만 했어.

그만 울어. 전영중이 속삭이니까 성준수가 꽉 멘 목소리로 불평한다. 안 울어 씨팔...

전영중이 성준수를 조심히 떼어낸다.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눈매가 선명하고 붉다. 성준수의 단호하고 맑은 눈동자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아침에 졸려서 게슴츠레 뜨고 있을 때도, 놀림당하여 잔뜩 화가나 치켜뜰 때도, 관계 후 나른히 풀려 축축할 때도, 약간 부끄러운 듯 사랑한다 거칠게 속삭이며 가히 예술인 초승달을 그릴 때도. 평생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것이 눈앞에 있으니 속이 일렁이며 감정이 북받쳐왔다. 내가 이걸 한 번 더 놓치면 정말로 병신이 아닐까.

그래서 챙겨 온 것이 있다. 하지만 그걸 전해주기 전에 해야 할 것 또한 있었다. 전영중은 어깨의 배낭을 스르르 밑으로 내려 좁은 길에 툭, 떨어뜨린다. 먼지가 조금 일었다 살포시 두 사람 발 주변에 가라앉는다.

손을 하나씩 성준수 젖은 양 뺨에 올려놓는다. 마치 일 년 전 창살을 사이에 뒀을 때처럼. 다만, 이제는 옥처럼 매끄럽던 피부가 잔뜩 까슬해져 있고, 푸짐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말랑했던 볼살은 어디 가고 메마른 광대뼈만 느껴진다. 전영중 표정이 구겨진다. 분명히 잘 보살피겠다고, 섬으로 가는 것뿐이지, 굶지 않고 부족하지 않게 살게 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전영중 얼굴을 뇌에 각인할 듯이 눈코입 하나하나 뚫어져라 살피고, 익히고, 외우고 있는 성준수의 열렬한 모습을 앞에 둔 채로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양손에 쏙 들어오는 얼굴을 조심히 잡고 제 얼굴과 가까이 한다. 두 입술이 포개어진다. 뜨거운 눈물이 데우고 지나간 입술이 촉촉하다. 키스는 길고 진득했다. 오랜만이지만, 동시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둘 다 급하기보다는 집요한 마음으로 인했다. 내가 너를 보내기 전, 네 입안의 모든 구석을 탐색하리라. 너의 모든 곳의 모든 처음을 앗아가리라. 혀가 얽히는 소리가 질척하다. 전영중 목뒤로 두른 성준수 팔이 족쇄 같았다. 아니, 등을 꽉 붙잡는 손아귀에 마치 족쇄가 되고 싶어 하는 덩쿨의 간절함이 묻어났다. 전영중이 성준수 혀를 살살 긁어가며 달랬다. 사과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까. 미안 준수야, 나 때문에... 미안, 미안... 말로 내뱉었으면 성준수가 절대 받아주기는 커녕 애초에 그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을 속죄였기에 속으로만 되새겼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미안... 

-와씨, 아, 내 눈.

조재석이 멀리에서 중얼거린다. 무너져 내려가는 오두막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기상호가 이두를 벅벅 긁으며 내뱉는 내용도 별 다르지 않았다.

이날 기상호는 눈 말고 귀도 버려야 했다. 전영중 팔목 꽉 잡은 성준수가 오늘은 거실에서 지내라고 했을 때 알아듣고 야외에 텐트나 쳤었어야 했었다. 오랜만에 귀이며 목이며 가슴에 내려앉은 전영중의 입술은 수상할 만치 뜨거웠다. 그저 흥분해서 그런 거라고 하기에는 열감이 장을 지진 것마냥 오랫동안 남아 살이 홧홧했다. 아프냐는 질문에 전영중은 너 보니까 미쳐버린 것 같다고 재차 대답하였다. 대답하는 눈빛이 상당히 돌아 있어 설득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큼성큼 안방으로 기어들어 가 침낭에 전영중을 밀쳐 넘어뜨렸다. 다리 사이로 엉금엉금 들어가 이래봐도 왕자라고 값비싼 천으로 덮인 사타구니에 천천히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선 얼마 후, 손톱을 세워 전영중 등에 박아넣으면서 성준수가 전영중 허리를 안은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절대 품 안에 가둬놓을 셈으로...

서로를 한참을 괴롭힌 후, 전영중은 힘이 전부 빠져 이불 위에 앓으며 누워있는 땀에 젖은 성준수 이마에 입술을 오랫동안 갔다 대었다. 준수야,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작은 가방에서 물건이 끝없이 나온다. 태반은 먹을 것이다. 성준수가 좋아하는 온갖 달달구리가 마룻바닥에 쏟아진다. 다음으로 나온 것은 실타래. 혹여나 연이 망가질 세어라 교체하고 수리할 수 있는 부속품들이 나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쓸어 담았던 잡동사니들 - 못, 붓, 종이, 손수건 등 전영중 책상 위의 물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오랫동안, 가방의 밑에 눌러담겨 있던 소중히 포장된 금 보따리 하나.

-저게 뭐야.

-열어봐.

성준수가 조심스레 보따리를 푼다. 사르륵. 보따리가 열림과 동시에 안의 내용물이 형태를 잃고 무너졌다. 놀라 자세히 보니 종이쪽지들이다. 아주 많은, 질 좋은 종이로 만든. 가장 위에 놓여 있던 쪽지에는 전영중 글씨체로 숫자 1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집어들어 열어 보려고 하니까 전영중이 제 손으로 내용물을 가려 저지한다.

-내일 봐, 나 없을 때.

-편지냐.

-하루에 하나씩. 약속해. 절대 먼저 열어보면 안 돼.

-...알았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전영중이 몸을 숙여 성준수 입꼬리 끝에 쪽쪽쪽, 세 번 입 맞춘다. 그러고선 일어나버린다. 등을 돌린다. 성준수가 야, 불러도 미동이 없다. 영중아, 야.

-준수야,

-....

-....

-...뭔데,

-미안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며 어깨에 성준수가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미안하다 할 시간에, 사랑하라는 말이나 한 번 더 해.

올라가는 길과 다르게 내려가는 길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리다. 분명 경비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시간적 여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영중은 축축 처졌다. 결국 그를 재촉한 것은 조재석이다. 정신 차려요! 미치겠다 이러다 걸리면 형이 책임져요, 알았죠? 발밑에 모래가 느릿하게 바스러진다.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연미도의 좋은 날씨에, 바다가 푸르르고 투명했다. 제 그림자까지 선명하게 비춰보기는 물결을 가만히 응시하며 전영중은 육지에 도달하기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당연하지만, 전부 성준수 생각이다.


7

기억 나? 우리 17살 때. 같이 말 타는 연습하러 산속에 들어갔다가 멧돼지를 만났잖아. 이제 와서 이야기하지만 난 그때 지리는 줄 알았어. 넌 근데 하나도 안 무서웠나 봐. 차분히 나한테는 뒤로 가라고 지시해놓고선, 이 새끼 살려두면 무조건 마을로 내려온다며 너 혼자서 유인하러 사라졌지. 길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지금 보니까 조금 재수 없는 것 같기도 해. 나는 덜덜 떨면서 우리 준수는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을까, 마을에 경험 많고 든든한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데, 생각하면서도 너 혼자 두긴 무서우니까 거의 울면서 따라갔잖아. 근데... 너 운동신경 솔직히 웃기잖아. 내리막길까지 달리다가 아주 화려하게도 굴러떨어지더라. 보는 내가 다 아프게. 내가 그때 너 낚아채서 나무로 올라가자고 안 했으면 넌 지금 진작 숨통 끊겼어, 알아? 근데, 나뭇가지에 눈 찔려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지고 있는 활을 12개 전부 쏴서 그놈을 죽이더라. 심지어 에임도 들쑥날쑥해서는... 나는 아직도 멧돼지가 우리가 올라탄 나무를 박아대는 꿈을 꿔... 정말 무서운 순간이었어. 근데. 이거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건데. 근데, 넌 그래도 정말 빛나더라. 삶과 죽음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 순간까지도 넌 한심하리만치 멋있더라. 집에 갔는데도 온통 너 생각 뿐이었어. 어떻게 저런 몸으로도 끝까지 저렇게 싸울 생각을 하는 거지, 전두엽에 손상이 있는 걸까. 내가 맨날 너 영웅병 한심하다고 말하는데, 솔직히... 그것만큼 너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없는 것 같아, 준수야...

빨강 - 나도 그때 너한테 반했어 나를 구하러 실제로 백마를 타고 온 너는 정말 멋있었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영중아

노랑 - 나도 사실 무서웠는데 아닌 척했어

파랑 - 멧돼지? 배고프다 ㅆㅂ 고기 먹고 싶다

전영중이 멍때리듯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다간 피식, 웃는다. 입술이 양옆으로 찢어진다. 박장대소한다, 하하하, 헐, 하하하. 당연히 파란 연이나, 아니면 성준수가 조금 재미스러운 기분이라면 빨강까지 기대해보았는데. 노란색 연이 하늘 높이 날고 있을 줄이야.

성준수는 정말... 재밌는 놈이었다. 그 재밌는 놈이 시간이 얼마 갔다고 벌써 보고 싶었다.

전영중은 제 품 안에 다시 종잇조각을 고이 접어 넣어둔다. 백 가지의 작은 편지는, 세상에 두 개씩 존재했다. 하나는 연미도, 성준수의 방 안에. 하나는 전영중에게. 제작할 때 같은 내용을 두 번씩 작성했다. 그래야 서로 소통이 되니까. 전영중이 하고 싶은 말을 가득 담은 편지 끝에는 꼭 성준수의 안부나 의견을 묻는 내용이 잇따랐다. 그리고 성준수는 제 생각을 담아 관련 연을 하늘 높이 날기만 하면 되었다. 100일. 편지가 끝나는 100일까지는 하루하루 연명하는 기분이다.

한동안을 노란 연을 바라보며 사색하다, 다시 한번 조재석이 밑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문으로 향한다. 내일의 편지를 속으로 생각하고 작게 웃어 보인다. 이제 무엇보다 좋은 것은, 성준수의 기쁜 소식뿐만 아니라 걔의 아픔이나 힘듦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1

준수야, 이 편지를 읽는 방법은 쉬워. 하루에 하나씩 열어보는 거야. 그리고 천천히 내가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쓴 글을 읽어.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 연의 색깔마다 네가 표현할 수 있는 다지선다가 있을 거야. 너는 너의 의견에 따라 연을 골라주기만 하면 돼, 어렵지 않지? 이해했다면 연습해 볼까?

빨강: 웅 >< 이해했어 영중아~

노랑: 나의 낭군, 알겠소.

연두: 듄두는 영듕이가 쓴 편지 열시미 일글께 고마웡 *^^* 

파랑: 하, 자기 글씨체만 봐도 꼴려, 하아, 이해했어.

하양: 씨바거 내가 개멍청해서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 다시 설명해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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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보고싶은 준수에게,

나 궁금한 게 있어. 요즘 경비병 부재 규칙이 어떻게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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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준수야,

우리 첫날 밤 기억 나? 준수 부끄럽다고 얼마나 다리를 오므리던지, 아, 사실 그것마저 정말 귀여웠어. 그때 오일 양도 잘못 조절해서 한 병 다 부었잖아. 근데 사실 그것도 그것대로 섹시했던 것 같아, 준수 온몸이 반들거려선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하 준수야 섹스하고 싶어 나 미친놈 같지... 근데 다른 사람은 꼴리지도 않아, 너만 보고 싶어, 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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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준수, 오늘도 보고 싶어.

날씨가 궁금했어. 다음 기간 중 무난한 날이 있을까? 언제?

빨강: 1-10, 노랑: 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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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준수야, 준수야, 준수야 오늘은 나 얼마나 보고 싶어? 나는 참고로 죽을 것 같아... 난 매일매일 죽을 것 같아,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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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준수야, 잘 지내?

날짜 조합해줘,

빨강: 1, 노랑: 2, 빨강+노랑: 3, 연두: 4, 빨강+연두: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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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준수야

나랑

도망가자

나의 기회이자 사치, 노고이자 자랑이 되어줘

100일 차에는 싱그러운 연둣빛이 하늘을 장식했다.


기상호가 기상을 읽을 때는 치밀했으며, 고려하는 것이 많았다. 첫 번째가 온도와 습도가 되겠다. 이를 객관적인 수치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는 연미도 내의 천연자원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두 번째는 새들의 움직임과 바닷가에 보이는 물고기의 종류였다. 3년의 세월 동안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이자, 동물의 종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어떤 날씨에 출몰하는지까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바람과 전반적인 기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태양과 금성의 밝기,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 바람의 세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정교한 장치가 필요했으며, 이는 전영중이 가져다준 자잘한 도구들과 설명서를 활용하여 기상호가 만들어냈다. 어차피 기상호는 16이 되는 해에 법적으로 독립을 하고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어, 성준수가 없으면 도로 육지로 가 살게 되리라. 이제 정말이지, 성준수가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성을 지니고 있는 기상호와 그의 분석력, 날카로운 눈초리라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운수이자 운명이었다.

기상은 자연이며, 자연은 규칙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불규칙한 것의 대표적 예였다. 항해의 시작은 순탄했다. 옆 나라에 도착하기까지 필요할 식량 조금, 탁 트인 세상을 누빌 유목민으로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한 자금 조금. 기상호가 일러준 대로 아침에는 안개가 끼어 보초들의 눈을 피해 섬의 반대쪽으로 벗어나는 게 가능하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다시 육지의 해안선을 향하여 배를 돌렸다. 둘의 힘은 배를 운영하기 충분했다. 철저한 준비 끝에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돛도 순조롭게 펼쳤으며 길도 잃지 않았다. 해가 하늘 위로 깔끔한 포물선을 그릴 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점점 맑아졌다 - 안개가 개고 기온이 따스워졌다.

문제는 해가 최고점을 찍고 바다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서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도 전영중에게 침착하라 일러주던 성준수도 돛대가 흔들릴 정도가 되자 입술을 앙다물고 소매를 걷어 배를 지탱하는 것을 도왔다. 경험상 이 정도면 연미도는 진작 흙먼지가 날리고 주먹만한 돌덩이가 모래알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으리라. 서쪽 땅끝 연미도는 나라의 방패이자 수호신이었다. 지진도, 홍수도, 태풍도, 신고식을 하듯이 연미도를 반드시 한 차례 쓸고 지나가면, 육지에 도달해서는 배부른 맹수처럼 자비를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분명 이 바람도 연미도를 덮친 것이었을 텐데, 왜 오늘만큼은 존나 강해 빠졌는지 - 전영중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바스러진다. 준수야, 배가 흔들려. 성준수가 눈에 힘을 준다. 알아, 병신아, 알아.

-하늘이 어두워.

-그래, 곧 비 좀 올 것 같다.

-준수야...

-비 좀 오면 어떠냐?

성준수가 환하게 웃는다. 흐하하, 웃음기에 약간의 히스테릭함이 섞인다.

-우리 같이 비 맞아 본 게 한두 번이냐?

-그래... 그렇지.

전영중도 마지못해 웃는다. 지난 3년 간 힘들고 억지스럽게 늘렸던 입술은 어디 갔는지, 허탈하고 시원한 웃음이 입 밖으로 샌다. 입꼬리가 쭉쭉 늘어난다. 하하, 하하하. 함께 웃으면 웃을수록 무겁게 눌러앉은 가슴이 점점 비워져 가벼워진다. 하하하, 준수야, 우리 진짜 웃긴다. 씨발 영중아, 그러게 말이다.

후두둑, 비가 배의 표면을 때리기 시작한다. 성준수는 흔들리는 배를 어떻게 해볼 생각은 갖다 버리고 배뒷머리에서 방향키를 조정하고 있던 전영중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여기는 바다 위. 자연은 너무 컸고 둘은 너무 작았다. 성준수가 전영중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소리가 사근사근 부드럽다.

-난 이것도 좋아.

-....

-같이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 없고, 떼어놓으려는 사람 없고.

-...준수야.

나 때문에. 미안해... 라는 말이 다시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머리카락을 흠뻑 적셔 눈을 덮고 입가에 흘러내려 입술을 꿰매길래 전영중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을 삼킨다. 미안해할 바에는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더 해달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서.

-...사랑해.

-어, 나도.

인생에서 가장 용기를 많이 끌어모은 순간이었는데, 덤덤한 성준수의 단답형에 실소가 흘러나온다. 물론, 단답형이라고 해서 가볍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겠지만. 성준수가 전영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파악했는지 옷깃을 꽉 붙잡고 마주 본다. 나도 사랑해. 그리고 또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짓씹듯 뱉어낸다. 너랑 사랑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 없는 일이었어, 영중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비의 차가운 물줄기 사이에 전영중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빗물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미지근한 것이 뚝뚝 떨어져 성준수 손을 적신다. 나도, 준수야, 나도... 전영중이 속삭인다. 고작 사람 따위가, 어둡고 파괴적인 대자연 한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빛나고 있는데,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든 인생인데, 무엇보다 너가 후회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나라고 감히 후회할까.

배가 크게 흔들린다. 바람 소리가 시끄럽게 고막을 때린다. 커다란 파도가 둘을 내동댕이친다. 뱃머리에 부딪힌 등이 욱신거린다.

저 지평선 넘어 커다랗게 넘실대는 집채만 한 파도는 천천히 다가왔다...


요즘 전영중이 아침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길래, 하루는 조재석이 전영중 뒤를 쫓아보았다. 향하는 곳은 궁전의 서쪽에 위치한 관찰탑. 옛날에 선조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측할 때 사용했던 건물이다. 전영중이 너머로 사라진 문은 굳게 걸려 닫혀있었다. 하는 수 없이 아래 드넓게 깔린 풀밭에서 전영중이 보일까 위를 쳐다보았다. 조금을 기다렸더니 역시나, 옥상 난간에 전영중의 상반신이 드러난다. 어딘가를 쳐다보는 옆태가 움직일 생각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늘은 연한 하늘빛 자태를 뽐냈다. 눈부시도록 맑고 쨍한 파란이라기보다는, 우윳빛을 잔뜩 섞은 듯한 투명하고 여리여리한, 잘못 건들이면 보석처럼 빛나는 수천 개의 유리조각으로 깨질 것 같은, 그런 파랑이었다. 지나가는 몇 점의 구름은 주근깨처럼 하늘에 드넓게 흩어 펼쳐진다. 전영중의 옆모습은 그러한 파란과 한 데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루는 듯했다. 물의 농도가 짙어 경계가 허물어지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그런 수채화. 평소에는 둥근 두상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이루는 선이 굵고 날카로운 편이다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그 반대였다. 눈을 뗄 수가 없어 하늘에 녹아드는 것 같은 전영중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뭐가 그리도 그를 환하게 만드는 건지, 하나의 광원으로 승격시키는 건지, 조재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상상뿐이었다...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해안가에서는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펼쳐졌다. 첫째 왕자와 그의 불법적 애인이 탈출했단다. 수색대를 지시하던 왕은 후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사과를 하고 싶어도 그 대상이 있어야지. 전영중의 용기를, 그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간과한 죗값이었다.

명령은 간단명료했다. 전영중을 찾든, 성준수를 찾아라. 둘 중 하나라도 찾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 대접하고 궁으로 데리고 와라. 하지만 이는 곧 불가능으로 밝혀졌다. 파도에 휩쓸려온 성준수 시신이 발견되었단다. 그 주변을 중심으로 육지에서도 수색작업이 진행되었다. 어디 숨어있을 지도 모르니 근처 집안까지 싹 뒤지는 아버지를 보며 조재석은 혀를 찼다. 전영중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자의 발언이었다. 전영중도 은근히 낭만을 동경하는 놈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제 낭만이 저렇게 명을 다했는데, 저 혼자 살아가겠다 했을리가. 


금요일 이른 아침 중앙공원은 한가한 편이다. 우선 유치원생들, 초등학생들만 없어도 한참은 허전해진 공간을, 전영중은 갈 길 없이 누볐다. 몇 달 전부터 뛰던 달리기 코스는 공원의 태두리를 크게 따라 도는 것이었다. 이렇게 뛰다 보면 공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놀이를 구경할 수 있다. 개를 산책시키는 부부, 공원의 부착형 운동기구에서 허리를 양옆으로 돌리고 계신 어르신, 두발자전거로 묘기를 연습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연. 의외로 댓바람부터 연을 날리는 사람은 많았다. 아침 7시만 돼도 다양한 색깔이 연이 네다섯 개는 하늘을 난다. 전영중은 아직도 연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움에 빠져 익사할 것 같으면서도 눈을 돌리지 못했다.

오늘은 못 보던 연 하나가 떠 있다. 고급스러운 보라색의 연. 하늘에 띄우면 빛을 받았을 때 빨강이나 노랑처럼 썩 아름다운 효과를 내는 색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영중은 그것을 보자마자... 홀린 듯이. 걸음을 멈춘다. 귀에 노래를 시끄럽게 불러대는 이어폰을 뺀다.

그리고 천천히, 연을 하늘의 북두칠성 삼아, 빨려가듯 걸어간다.

공원이 탁 트인 탓에 멀지 않은 곳에 연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운동장 한 가운데, 몸을 실어 연을 당기며 날고 있는 사람. 전영중은 또 홀린 듯이 그 사람을 쳐다본다. 바람이 세게 부는 데도 날리고 있는 것이, 나름 능숙하게 조절할 줄 아는 것 같아 보이면서도, 팔에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담긴 힘과 연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꺾일 때마다 씨바거 씨바거, 욕을 읊는 태도가 꼭, 처음 날려보는 사람 같기도 하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지 않은 11월의 아침. 푸르스름한 하늘과 먼지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입김. 흐릿한 겨울 아침과 섞이기는 커녕 명백히 대비되어 도드라져 보이는 시허연 피부와 짙은 눈매. 전영중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연을 날리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전영중을 바라본다. 두 눈이 마주친다. 날카롭게 연만을 응시하던 눈이 쟁반만 해진다.

입을 여는 것은 전영중이다. 빠른 걸음으로 성준수한테 다가간다. 그리움이, 아픔이, 반가움이, 환희가, 정신을 압도하여 혹시나, 설마, 제발, 하는 제 두려움을 소멸시킨다.

-준수야,

-전영중? 너 어떻게, 엥. 벌써?

-준수야!

-근데 나... 알아봐?

-성준수.

성준수의 손이 얼레를 떨어뜨린다. 바닥에 부딪힌 후, 얼레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연실을 끝없이 해방한다. 전영중이 망설임 없이 벌어진 팔 사이로 몸을 파고 든다. 몇 년이 지나도 몸을 두르는 따뜻하고 단단함은 집보다 익숙하다. 준수야, 얇은 패딩에 입을 푹 파묻는다. 등을 조심히 껴안는 성준수 손이 덜덜 떨린다. 마치 당장이라도 깨질 것을 다루는, 조심스럽고 또 소중한 손길이다. 사랑해. 몇 년을 홀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으니 이제는 어렵지 않게 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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