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아틀라스

권태기 이별 후회 등등 여튼 재난인 빵준

ㄴ 가사X, 브금ON

성준수와 헤어진 지 딱 90일 되는 날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이며 이기적이고, 제가 사랑하길 한참 전에 관둔 사람이라 하여도, 문득 오늘마저 그를 보지 못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 눈으로 고민하며 밤을 지새운 뒤, 밖에서 새소리가 들릴 때쯤에서야 결심이 확실히 섰다. 그래, 보러 가야지. 한 번만 미친 척 하고 보러 가야겠다.


성준수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전영중은 그저 성준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에 감사했었다. 한창 자기랑 사귀어달라고 성준수를 꼬시던 시절에 밝혔던 포부처럼, 성준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고 감싸주고 챙겨주고 예뻐해 주었다. 성준수는 왜 자처해서 호구가 되려고 하냐고 비난하면서도 전영중의 애정을 거절치 않았다. 오히려 한껏 누렸다. 처음에는 창피해서 귀라도 빨개지던 것이 나중에는 제 쪽으로 건네는 호의를 아주 발칙하게도 날름 받아먹었다. 물론 전영중은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남의 애정은 거절하고 징그러워하면서 내 애정은 받아주는 성준수. 그것만으로 마음은 충분히 풍족해졌다.


오전 6시의 도로는 한가하다. 성준수는 더 이상 전영중과 동거하지도 않았고, 동거하기 전에 살던 집에 살지도 않았다. 쳐다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성준수의 새 건물을 좌측에 두고 블록을 크게 돌자 내비게이션이 길 안내 종료음을 낸다. 입 안이 쓰다.


어느 순간부터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잘해주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도 나름대로 잘해주려고 애쓰는 놈인 것은 맞았다. 그 방법이나 양이 전영중의 생각과는 평행선을 달렸을 뿐.

어느 순간부터 성준수의 목소리는 다정해졌고, 그가 욕을 쓰는 횟수도 줄어들었으며, 무엇보다, 전영중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럼에도 전영중이 보기에는 성준수는 여전히 무심하고, 고집불통이었으며, 무뚝뚝하고 말솜씨가 형편없는 애인이었기에, 성준수의 노력은 허투루 돌아갔다. 그게 다였다.


성준수는 잘 웃지 않았다. 그냥 그런 놈이었다. 남들보다 입 근육이 딱딱하고 덜 발달하였을 뿐에 굳이 웃지 않아도 얼굴 하나로 사회생활 반은 먹고 들어가는 놈. 나머지 반은 독불장군이지만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수 있는 성격이 커버했다.

성준수가 웃는 것을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공간은 두 곳이었다. 농구 코트 위, 그리고 전영중 품 안. 잔뜩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고 끈질기게 들이대면 성준수는 질색을 하고 놓으라 협박을 하고 지랄발광을 하다가도 결국 진이 빠지면 얌전히 안겨있어 주었다. 경계가 내려간 상태에서 전영중이 조금만, 아주 적당히, 그의 눈에 예뻐 보일 정도로, 아주 예쁜 말을 한다면, 성준수는 눈매를 누그러뜨리고 웃었다. 어이없다는 실소나 허탈한 미소일 때가 많았는데, 그런데도 그게 아주 예뻤다.

둘이 헤어진 날에도 성준수가 그렇게 웃었다. 그때는 반대로 전영중이 성준수 품 안이었다. 그때 전영중의 감상이 어땠더라. 음. 역시, 가슴 한쪽이 아플 정도로 예쁘고,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성준수가 외식하자고 했었다. 오랜만이었다.

전영중은 그 제안을 수락하였을 경우의 미래를 떠올렸다. 사람 가득한 레스토랑 한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장신의 남자 둘. 마주치려는 눈과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눈. 말을 걸려는 자와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 자.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와 자신의 감정 또한 납득하지 못해 이 모든 상황에 그저 스트레스만 받고 있는 자. 생각만 해도 멀미 날 것 같았다. 자기혐오가 일었다. 이런 감정을 들게 한 성준수마저 조금 밉게 느껴졌다.

선약이 있다고 했다. 성준수는 재차 권유하지 않았다.


옛날에 성준수와 한번 집에서 건하게 취한 적이 있었다. 겨울이었던 것 같다. 뜨끈한 거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던 둘이 꼴랑 와인 몇 병에 취해서, 얼굴 붉히며 밤새 웃고 떠들었다. 물론 중간에 견해차로 시비가 붙었다 몇번이고 싸울 뻔했다. 하지만 그때 무슨 일인지 둘 다 기분이 좋아 결국 실실 웃으면서 서로를 발로 몇 번 까고 말았다. 영화를 보다가 소등한 거실은 얇은 커튼 틈새로 샌 은은한 달빛 한 줄기가 광원의 전부여서, 마치 아까 봤던 영화의 화질처럼 서로의 얼굴을 비롯한 모든 것에 노이즈가 끼고 번져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둘 다 아직 자러 갈 기분은 아니었는지, 실없는 말을 좀 더 주고받다가, 어찌어찌해서 전영중이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게 되었다. 이상한 일렉팝인지 뭔지 전혀 대중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성준수가 전영중의 개 같은 음악 취향에 대해 물고 늘어지고, 결국 전영중한테 무드 없다고 핀잔을 듣고.

한참을 서로의 플리에 대해 갑론을박하던 차, 알고리즘을 탄 휴대폰이 처음 듣는 재즈 음악을 틀어대기 시작했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눈치도 없이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몇 초 간 멍하니 감상하다 눈이 마주쳤다. 뭐가 그리 웃기는지 둘이서 실성한 듯 처웃었다.

전영중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일단 잡은 성준수를 일으켜 한 바퀴 돌렸다. 씨발 뭐하냐며 취해서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질색하면서도 킥킥 거리는 성준수가 약간 웃기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본격적으로 끌어안았다. 미쳤느냐고 묻는 말을 씹고 전영중은 나름 진지하게 리드해가며 성준수와 춤을 추길 시도했다.

둘 다 춤을 출 줄은 몰랐지만 운동신경 출중한 놈들이었으므로 대충 무언가를 엇비슷하게 흉내를 냈다. 성준수는 어느 순간 욕하고 저항하길 포기하고 그냥 머리를 뒤로 재껴가며 박장대소를 했다. 마찬가지로 취한 전영중도 불 꺼진 거실에서 거대한 남성 둘이 춤추는 꼴이 웃기게 느껴지긴 했는지, 준수는 정말 분위기라는 걸 몰라,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귀밑에 코를 묻고 킥킥 거리였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춤을 췄다. 아니, 나중에는 춤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냥 둘이 서로를 약하게 붙잡은 채 거실에 서서 몸이나 음악에 맞춰서 휘청거렸다. 성준수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전영중이 언뜻 보기엔 약간 졸려 보였다. 나른하게 저한테 기대 늘어진 성준수는 미간에 주름도 지고 입꼬리도 미세하게 내려간 표정이라 무언가를 사색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영중은 분명, 그 순간의 성준수가 정말이지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준수야, 속삭이자 성준수가 목덜미에다 대고 뭐라 뭐라 답했다. 제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뭐라고, 안 들려. 분위기 잡지 마, 병신아, 라고 했다. 하하하.

술 기운인지, 과격한 대사 치고는 성준수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서인지 굳이 진실을 추궁하며 제대로 된 답을 듣고자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성준수가 앞으로 가끔만 더, 이런 표정을 제 앞에서 더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성준수의 행동에서는 간절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녀석답지 않은 말들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애절하게 전달되었다. 나 좀 봐, 전영중. 어디 보냐. 야, 영중아, 나 보라고.

황당하게도, 그런 성준수를 보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몇 년이고 고대했던 정서적 보답과 성준수의 매달림에 뒤틀린 희열을 느끼지 않았다. 비로소 전영중은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한테 미약한 혐오감을 느꼈다. 결국 전영중의 생존본능은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 아무리 간절하다고 해도 성준수는 여전히 무심하고, 고집불통이었으며, 무뚝뚝하고 말솜씨가 형편없는 애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유하고 간절하고 따뜻한 성준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기에게 결함이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영중은 성준수를 미워하기로 했다.


결국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은 성준수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원하던 말을 들은 것 치고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울상을 짓고 있었던 전영중과는 다르게 그 말을 내뱉는 성준수는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게 웃고 있었다.


둘이 어떻게 사귀었냐, 하면은 간단했다. 전영중이 쫓아다녔고, 전영중이 꼬셨으며, 전영중이 고백했다.


전영중은 연애할 때, 성준수에게 많이도 맞추었다. 강요받은 것은 아니다. 헤어지겠다고 협박당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었다. 그러면 마음이 풍족해졌다. 성준수를 너무 사랑해서,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었고, 한 번이라도 그가 더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냥,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멋지게 사는 성준수의 삶에 가장 큰 주춧돌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보며, 쟤 봐. 내가 도왔어.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자격으로 내가 응원하고 지지해줬어, 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싶었다.

성준수의 강단 있는 성격과 망설임 없는 실행력은 더 이상 열등감을 유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가득 풍만함을 안겨주었다. 그래, 저게 성준수야. 내 준수라고. 성준수는 육체고 정신이고 아름다운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영중은 당당히 그의 인생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사람마다 애정 표현이 다르다고, 애정의 크기가 다른 것은 아니었는데, 성준수의 애정 표현은 그렇다 해도 너무 사소했다. 성준수 본인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전영중은 몰랐다. 헤어지고 나서 주워들었다. 성준수는 의외로 주변인에게 연애 상담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술이 한 병 이상 들어가면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댔다고 한다. 존나 미안해서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고. 존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냥, 그랬다고 한다.


이별 후, 전영중은 가끔 잠이 안 올 때면 그때 그 노래를 한 번씩 틀어 들어보곤 했다. 성준수와 박자에 맞추어 천천히 춤을 추었던 그 노래 말이다. 침대에 누워 허공에 손을 뻗어 닿지 않는 성준수의 감촉을 되살려봤다. 손안에 들어오던 얄쌍하지만 탄탄한 허리. 몸에 밀착시키면 빨라지는 심장 박동. 턱 언저리에서 느껴지던 간지러운 호흡.

아직도 내게 네가 있었으면.

괘씸한 성준수는, 뒤 돌아보지 않는 성준수는, 전영중 생각과는 다르게 결국 끝까지 훌륭하고 멋있었던 성준수는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이미 명확히 했다. 그런데도 전영중은 유치하게 굴고 싶었다. 가슴에 구멍이 생긴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성준수를 다시, 한 번만 더 손에 잡아보고 싶었다. 그의 따뜻한 살 감촉이 그리웠다. 은은한 향이 나는 머리카락에 코를 묻어보고 싶었다.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다시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전영중은, 정말 바보였다.


성준수한테 고백한 날은 지독하게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 야외 약속을 잡았으면서도 바보 둘 중 아무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서로가 가져오리라 막연하게 생각했었나 보다. 급하게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서점에서 병신새끼가 어떻게 이거 하나 안 들고 오냐고, 준수야말로 제정신이 아니라며 한참을 투덕거리던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 물의 양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서점 주인에게 쫓겨났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성준수가 길거리에서 다채롭게도 욕을 하자 주위 모든 사람들이 쳐다봤다. 잘생기고 몸 좋은 남성이 쫄딱 젖어서 저러고 있으면 전영중도 쳐다봤을 것이다. 아니, 전영중도 이미 쳐다보고 있었다. 성준수는 정말로 잘생기고 몸이 좋았다. 그리고 길거리에서도 자기 하고 싶은 말 다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순간 버튼이 눌려 잔뜩 못마땅해진 전영중이 성준수를 흘겨보며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뭐래. 성준수가 짜증을 내며 전영중을 가볍게 밀쳤다. 방심했던 전영중이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철퍼덕. 헉, 야, 미안하, 미쳤어 준수야? 아씨발 미안, 미안, 미안하다고 아 씨바거!

비를 맞으며 두 사람은 추격전을 벌였다. 몇 번을 미끄러지고 넘어질 뻔했는데 한 놈은 잡히면 죽고 다른 놈은 잡으면 죽일 계획이어서 둘 다 죽어라 뛰었다. 결국 팔자에도 없는 어떤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몸이 자산인 두 놈이 위험하게도 빗길에서 뛰고 뛰었다.

성준수 목덜미가 손에 닿을 듯하여 보이자 생각도 하기 전에 붙잡아 아무 벽에나 밀어붙였다. 숨을 가쁘게 마시었다 내쉬면서 약간 올려다보는 시선이 짓궂었다. 젖어서인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잔뜩 반짝거리는 그 얼굴을 보니 어떤 봉인이 풀린 듯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말하기 전에 몇 번을 고심하는 전영중 답지 않게 진짜 멋대로 움직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키스하고 싶어.

성준수의 입술에는 아까부터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것보다 더 먼전 게 있지 않냐. 전영중은 잠깐 고민해보았다. 어쩌면 더 먼저 와야 하는 그게 아까 성준수가 저를 밀친 것에 대한 질책일 수도 있고, 키스해도 되냐는 허락을 구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영중은 한 번 더, 망설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좋아해.

성준수가 피식 웃었다. 봉긋 올라간 광대가 발갛고 예뻤다. 성준수가 허락이라도 하듯 젖어서 축축해진 속눈썹을 움직여 눈을 내리감고 입술을 살짝 벌렸다. 고개를 젖혔다. 거부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순간 성준수가 하늘을 떠받들라고 해도 떠받들었을 정도로, 그냥, 사랑스럽고, 예쁘고, 또...

전영중이 흡, 숨을 들이마시고, 후하아아아, 떨리듯 내쉬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더 이상 달리기의 여파인지 확실치 않았다. 전영중은 그 젖은 입술에 자신의 것을 조심히 가져다 댔다.


더 이상 성준수를 봐도 심장이 옛날처럼 뛰지 않았다. 물론 그 출중한 외모는 여전히 가끔 사람을 놀라게 했지만, 그의 강인함, 실행력, 강단, 믿음 따위를 보고 듣고 느꼈을 때, 더 이상 감흥이 일지 않았다. 더 이상 부럽지도 않고 질투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 그와 대비되어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리하여 그가 밉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그다지 존경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오르지도, 뿌듯하지도 않았다. 그냥, 성준수구나, 싶었다. 내가 아는 애. 질리도록 많이 본 애가, 그냥 자기 성격대로 사는구나. 가끔은 그가 행동하기도 전에 그의 움직임이나 결정이 파악이 되었고, 감탄스럽다기보다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어떨 때는 그가 하던 대로 하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그냥 옮았나 보지, 하고 말았다.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찬양하던, 미치도록 곱씹고 분석하던, 추앙하고 멘토 삼던 성준수의 경건한 정신이 어느 순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자연스럽고 진부하게 느껴졌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외모에 홀렸고, 정신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정신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외모만 보고서라도 계속 사귀어야 하는 것인가. 자기의 사랑은 언제부터 이렇게 얕아졌던 것일까. 과연 이대로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


둘의 연애 말기에 전영중은 성준수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샤워하고 나오기를 침대에서 기다리거나, 말의 뜻을 이해하기를 잠깐 기다리거나의 뜻이 아니었다. 아마 유일하게 전영중이 성준수를 기다려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전영중은 아주 오래 기다렸다. 성준수가 이만 끝내자는 말을 하기를.


성준수가 올해 뛰게 된 구단은 인천 아틀라스였다. 전영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밥 먹듯 입고 다니는 저지에는 농구공을 등 뒤에 짊어진 화난 거인이 그려져 있었다. 전영중은 정말이지 스포츠계에 - 특히 그게 성준수의 구단이라면 더더욱 - 더럽게 안 어울리는 마스코트라고 생각했다. 옛날에 교양 강의로 잠깐 들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직 기억이 났다. 티탄과 신들의 전쟁에서 패배한 티탄 장군 아틀라스. 무슨 팀의 마스코트로 전쟁의 패배자를 삼는가. 볼 때마다 거슬렸다. 물론 성준수가 항상 승리자인 놈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우승만 바라보는 놈이길래 더욱 더 안 어울렸다. 성준수는 지가 입고 다니는 거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나 아는 건가. 인천 아틀라스 성준수. 매우 별로였다. 빨리 트레이드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미친 듯이 성준수가 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새끼.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만남도, 연애도, 이별도, 하나같이 이기적이었던 성준수는 지금 존나게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겠지. 가끔 전영중의 소식을 주워들을 것이다. 아마 한쪽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새끼, 헤어져 달라고 하고 압력을 넣어대서 꾸역꾸역 원하는 대로 해줬더니 존나 자알도 살고 있네, 해대며 낄낄거릴 것이다.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있겠지.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더 웃고 지냈으면.

아, 성준수가 보고 싶었다.


열렬히 사랑할 때는 기꺼이 해주던 일들도, 마음이 식으니까 전부 손해처럼 느껴졌다. 밥을 매번 사기만 하고 한 번도 못 얻어먹은 기분이랄까. 옛날에는 네가 많이 먹는 게 나한테 행복한 거라며 지갑에서 돈이 빠져나가도 좋아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그 한번을 안 사주냐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준수야, 너 아틀라스가 누군지는 알아? 어, 거인. 하 그거 말고 걔 설화 말야. 하늘 떠받잖아. 그럼 왜 하늘을 떠받는지는 알아? 몰라 씨발 떠받고 싶었나 보지 병신아. 병신은 준수 너고. 그거 벌 받는 거야 준수야. 전쟁에서 져서 벌 받는 거라고. 너네 마스코트 지금 패배의 상징이라고, 말이 돼? 준수는 어떻게 그걸 참을 수 있어? 성준수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게 중요해? 응, 뭐? 아니, 설마 아틀라스 그 새끼가 전쟁에서 져서 우리 마스코트 됐겠냐고. 하늘을 받든 거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지. 준수야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해줄래? 하 진짜 이 새끼 왜 갑자기 여기에 꽂혀서 지랄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해봐라. 네가 하늘을 드는 벌을 받았어. 그것도 평생. 그럼 씨발 다 같이 죽자 하고 그냥 놔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굳이 한 평생 바쳐가면서 개 같은 하늘을 계속 들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오... 아니? 근데 걔도 뭔가 세상에 애정이 남아있으니까 포기를 못하는 거잖아. 나름 이 세상도 남겨 놓을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거겠지. 지 인생을 대가로도. 좋은 추억이 많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뭐 그런 거. 오 준수, 존나 낭만적이다 너. 씨발 지가 물어봤으면서 존나 짜증 나게 그 표정 치워라. 성준수 말 잘 듣는 전영중은, 놀리는 표정 치우고 대신에 한껏 과장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준수 너는? 뭔 소리야. 넌 이 세상이 남겨놓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 씨바거 존나 썩어빠졌어 망해도 싸. 아하하하 아핰 준수야 진짜야? 어. 내가 있는데도? 어. 진짜?? 하 씹 귀찮게 굴지 마. 아 준수야 사랑이 식었네 사랑이 식었어. 다시 생각해봐, 진짜? 아씨. 너라면... 남겨놔도 괜찮을 것 같다. ...됐냐? 씨발 어 너무 좋아. 나도 너만 있으면 돼 준수야. 나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망치지 말고 닥쳐봐 준수야 우리 섹스하자. 씨발 뭐?


준수야, 그래도, 그래도 끝까지 날 버리지 말았어야지. 누가 헤어져 준대. 먼저 그만 사랑한 주제에 전영중은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술자리에서 전영중의 옆자리에 앉은 인간은 날마다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나 아직 준수 애인인데, 나는 동의 안 했는데, 그렇게 가버리는 게 어딨냐고... 성준수...


첫 섹스 때도 얼마나 싸웠는가. 누가 넣느냐 마냐 어떤 체위로 하느냐 콘돔은 무슨 맛으로 사느냐 아니 꼭 맛이 있어야 하느냐 준수는 이런 것도 조사를 안 한 거야? 실망이다 아니 나는 네가 내 몫까지 할 줄 알았지 씨바거.

옷까지 다 벗어 넣고 한동안 이러다 보니 결국 스스로 본인들 꼴이 우스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니씨바거 우리 그냥 하지 말까 영중아 응? 플라토닉 어때. 아 씨발, 준수야 미쳤어? 잠시만 너 진심이야? 너 웃음이 나와? 플라토닉? 미쳤나 봐, 나 무조건 너랑 할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기겁하던 전영중도 결국엔 웃었다. 성준수의 웃음은 자주 볼 수 없는 만큼 한번 보게 된다면 그만큼 전염성과 중독성이 있었다. 야 영중아 니 웃을 때마다 거기 달랑거려 제발 나 웃겨서 죽을, 미친 전영중 아, 으흐흑큭큭, 씨이발 성...큽 성준수 이 씨발놈아 그걸 왜 언급, 아니다 너 혼 좀 나야겠다 이리, 큭큭, 와 이 무드 없는 성준수야. 

서로를 헛구역질할 때까지 잔뜩 간지럼 태우며 소득 없이 놀다가 눈 맞고 불꽃 튀어서 결국 하긴 했다. 그날, 전영중은 또 성준수의 새로운 표정과 새로운 목소리와 새로운 무의식적 습관을 알아냈다. 성준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면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생각보다 신음이 얇았으며, 저 때문에 우는 모습이 존나게 예뻤다.


전영중은 몇 번이나 생각했다. 빌었다. 소원했다.

그러니까 성준수, 제발 눈치 좀 채. 끝내자고 해. 나는 먼저 못해. 너는 할 수 있잖아. 너는 끊어내기 잘하잖아. 너한테 좋은 일 잘하잖아. 이기적이잖아. 그러니까 너 싫어하는 새끼 붙들고 있지 말고 나 좀 보내달라고, 성준수.


하루는 성준수가 섹스 후에 별로였냐고 물었다. 불만이면 어색하고 답답하게 굴지 말고 처 말 하라고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전영중은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그냥. 할 때는 평소처럼 좋았다. 느끼는 것도 평소만큼 느꼈다. 그런데 중간에 성준수 얼굴만 마주치면, 그러면 누가 트럭으로 친 것 같이 숨이 턱 막히고 속이 꽉 조여들어서...


헤어지고 한참 후, 전영중이 거의 울다시피 하며 빌자, 머뭇거리던 성준수 친구들이 결국 백기를 들고 성준수의 말을 이것저것 전해줬었다.

내가 걔한테 미안해서, 존나 걜 볼 면목이 없다 씨발. 걔가 날 존나게 사랑해주는데, 난 해줄 수 있는 표현이 사소한 것밖에 없다. 내 눈으로도, 걔가 내 사랑에 만족 못하는 게 보이는데, 언제까지 있어줄 지 모르겠다. 이런 연애는 오래 안 가지 않냐. 오랫동안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못 받으면 식을 거다, 걔도.

아, 헤어지자 하면? 그러면 사과해야지. 미안하다고. 내가 애인으로서 부족했다고. 대가리 박고 손 모으고 빌어야지,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아니, 내가 왜? 그리고 붙잡아야지 씨발. 난 그 새끼 절대 못 놔.


성준수와 헤어진 날은, 그냥 운이 무척 안 좋았다. 폭우가 내리는 날, 둘은 영화를 보러 갔다. 초등학교 때 옆자리 짝궁과 넘어오면 물건의 주인이 바뀌는 선을 그어놓은 듯 사이에 암레스트를 두고 조금이라도 남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았다. 성준수의 눈 밑이 유난히 짙었다. 전영중도 비슷하게 피로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고 1층으로 올라가 카페에서 음료를 시켰다. 적당히 영화 끝날 때쯤 관이 있는 지하로 다시 내려갈 생각이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연애는 지금 막바지에 있었다.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관계를 성준수가 그 오기와 독기로 겨우 붙잡고 있었다. 성준수 답지 않게 추하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놓치기 싫은 것을 아득바득 잡아두려는 점이 지독히 그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쯤되면 성준수도 느낀 것 같았다. 전영중은 이 연애가 지겨웠다. 아니, 연애가 지겨웠다기 보다는, 전 같지 않음에 싫증과 두려움을 느꼈다. 동경과 열정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을 부여하는 연애는 겁이 났다. 자기가 모르는 새로운 연애. 연애가 아닐지도 모르는 연애. 성준수를 향한 사랑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 성준수의 모든 것에 향한 감흥 없는 익숙함. 전영중은 자기를 두렵게 하는 것을 쳐내는 속도가 빠르고, 그 태도가 확실했다. 성준수도 제 옆에서 수많은 것들이 쳐내지는 것을 봐왔으니 눈치챌 쯤 됐겠지.

아마 이따 내려가면 성준수는 전영중의 길고 긴 부재를 모르는 척 할 것이었다. 묻지도 않겠지.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묵묵히 영화관을 나가고, 동거하는 집으로 향할 것이다. 씻고 같은 침대에서 자겠지. 그리고 내일이면 또 성준수의 상처받은 눈을 한껏 마주쳐야 하겠지.

가슴이 먹먹했다. 오늘마저 성준수가 놔주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자기가 먼저 그만두자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전영중이 차에서 내린다. 건물을 쳐다본다. 성준수가 묵고 있는 곳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눈물이 핑 도는 듯하며 눈앞이 어두 껌껌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일어나서 먹었던 단백질 바가 역류할 것 같다.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땅이 굳건하지 않다. 옆 가로수가 반시계 방향으로 휜다. 전영중이 침을 삼킨다. 현기증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건물 입구로 걸어간다.

준수야, 오랜만이지. 나 왔어.


아직도 가끔은 여전히 자기가 성준수 애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 멍할 때면 침대의 빈 자리를 보며 있지도 않은 성준수를 탓했다. 준수야, 아침에 애인 두고 먼저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경우야? 무슨 매너야, 준수. 나 대체 뭐 하는 놈이랑 사귀고 있었던 거야, 웃겨 정말.

그래, 정말 웃겼다. 그렇게 옆에 있었을 때는 제가 먼저 질렸으면서. 더 이상 안 찾았으면서. 성준수가 애인으로 안 느껴졌으면서. 권태로웠으면서. 이제 와서 간절하게 찾는 꼴이란...


그게,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사고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원인은 부실 공사. 얼마 전에 같은 건설이 지은 아파트 단지 하나도 장마의 영향을 받아 무너졌던데, 영화관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나보다. 1층이라 전영중은 코앞이 출구였다. 아무리 바닥이 흔들려봤자 금방 대피할 수 있었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성준수라면, 반드시, 반드시 전영중을 찾으러 그가 있지도 않은 화장실로 향하고 있겠지.

지하 2층에서 설상가상으로 불이 난 것 같았다. 전영중이 내려간 지하 1층은 미미한 열감과 연기로 자욱했다. 아직 전영중이 있는 부분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고 가벼운 진동만 느껴졌다.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구역이었지만 지상으로 올라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영화가 상영되었던 관과 가장 가까운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성준수! 대답이 없자 마음이 급해졌다. 코로 들어온 연기가 정신을 어질하게 만들었다. 목이 건조해가며 간질간질해졌다. 초여름 열기처럼 은은하게 옷 안에 열이 차 살이 접힌 부분에 땀에 서서히 차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뛰어 다니니 어디 깊숙한 곳까지 용케도 들어가 있는 성준수를 찾았다. 그 애는 문이란 문은 열어젖히고 있었다. 동작이 굼떴다. 손목을 낚아챘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치려고 하며 고개를 휙 돌리는 성준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그 시선에서 원망, 안도감, 당돌함 등 보고 싶지 않은 것만 한가득 봤다.

연기는 성준수가 더 오래 노출되어 있었지만 전영중이 요령 없이 고개 꿋꿋이 세워 들고 뛰어다닌 바람에 더 많이 마셨다. 씨발 빌어먹을 건물은 아직도 흔들렸다. 언젠가부터 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잘 안 움직였다. 길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점점 주변 온도가 올랐다. 성준수가 언제 화장실에서 담갔는지, 축축해져 묵직한 자기 겉옷을 전영중 호흡기에 가져다 댔다. 거의 끌다시피 전영중을 부축하던 성준수는 멈추지 않았다. 분명 이미 몸이 망가졌는데 그 눈만은 목표 의식이 또렷했다. 기대고 있는 하얀 몸이 경련했다. 둘은 계속 기침을 했다. 구조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화재도 화재였지만 이제는 정말 바로 위 구역이 무너지기 전에 올라가야 될 것 같았다.

비상구 손잡이가 뜨거웠다. 성준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른 비상구를 찾기에는 상황이 긴박했다. 와르르,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무너지는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성준수가 전영중을 구석으로 밀쳤다. 성준수의 거친 손길, 몸이 기우뚱하는 느낌, 모든 것이 익숙했다. 다만 놀라 커진 성준수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웬 좆같은 결연한 의지밖에 안 보였다. 천장이 무너졌다. 성준수가 때마침 밀어 안전한 모서리의 사각지대에 온 몸이 구겨지며 안착한 전영중의 시야에는 계속 성준수가 있었다. 그놈은 자기보다 체격도 작은 주제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전영중 머리 옆 벽에 팔을 뻗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성준수의 등 뒤로는 무엇인가가 잔뜩 얹혀 있었다. 으으. 신음이 들렸다. 씨바거. 어디선가 작게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성준수가 오른손을 등 뒤에서 휙, 뽑아 들어 전영중 머리 반대쪽에 탁, 고정해 마저 몸을 받쳐 들었다. 손가락 각도가 이상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전영중은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생각했다. 우리 준수 슛 쏴야 하는데... 안 되는데...


네가 하늘을 드는 벌을 받았어. 그것도 평생. 그럼 씨발 다 같이 죽자 하고 그냥 놔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굳이 한 평생 바쳐가면서 개 같은 하늘을 계속 들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근데 걔도 뭔가 세상에 애정이 남아있으니까 포기를 못하는 거잖아. 나름 이 세상도 남겨 놓을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거겠지. 지 인생을 대가로도. 좋은 추억이 많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성준수가 전영중을 쳐다봤다. 우리는, 안 죽을 거야. 이런 소리나 하겠지. 우리는, 둘 다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성준수의 뻔한 대사는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올랐다. 전영중은 기다렸다. 그 뻔한 대사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위에서 다시 한차례의 굉음이 들리고 성준수의 몸이 순간 반으로 접혔다. 입에서 찢기듯 튀어나온 기침 섞인 신음이 가늘고 높은 게 예사롭지 않았다. 뻐그덕. 성준수 위를 온통 덮은 잔해더미에서 묵중한 소리가 들렸다. 성준수가 조금 무너졌던 몸을 바들바들 떨며 다시 올렸다. 자기도 조절할 수 없는지 입이 살짝 벌려져 있었다. 먼지랑 연기가 잔뜩 들어갈 것 같았는데. 조금 미끄러져 내려간 팔을 다시 전영중 귀 옆으로까지 올렸다. 성준수의 눈물에 생리적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 같기도 하였다. 빛이 환하지 않아 확실하지 못했다.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차라리 자기가 성준수 자리에 대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신께 기도를 올렸다. 이 순간만 내가 성준수가 되게 해달라고. 평생 착하게 살 테니까, 제발. 내가 저 고통을 짊어지게 해달라고. 성준수의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전영중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래서 전영중은, 계속 성준수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살아남을 거라고. 성준수가 순간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야, 나는... 힘들 것 같다.

뭐? 되묻고 싶었다. 눈이 커졌다. 뭐? 성준수, 뭐? 성준수의 패배 선언은 처음이었다. 새로웠다. 길고 긴 권태로움 사이의 새로움이 이렇게 마음에 칼을 박고 북 찢는 느낌이라고는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온 힘을 짜내어 입을 열었다. 뭔, 소리... 야, 준수야. 한 줄 완성하는데 기침 때문에 문장이 몇 번이고 끊겼다. 성준수는 거짓말이나 자기 연민을 하거나 어떠한 가능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놈이기 때문에 그가 뱉은 그 대사가 더욱 두려웠다. 뭔 소리야, 준수야. 무슨 소리야, 대체.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눈앞이 잘 안 보였다. 몸이 묵직했다. 전영중이 입을 연 적도 없는 것처럼 성준수는 건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근데, 너는 살 거야.


나름 이 세상도 남겨 놓을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거겠지. 지 인생을 대가로도.

좋은 추억이 많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아니, 사실은 성준수는 처음부터 전영중을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챙겨주고, 주고, 주고, 주고 있었다. 애정 표현은 본래 정해져 있는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잘 때 뒤척이면 남몰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과 같이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온 몸을 던져 무너지는 천장을 대신 붙들고 있어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전영중은 왜 몰랐을까.


전영중의 들썩이는 입술 사이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아씹. 삼켜. 삼키라고. 잠깐 고개를 내려 성준수가 한껏 쥐어짜 내 흘려 넘긴 침은 전영중은 타들어 가는 마음과는 다르게 달콤하게도 느껴졌다. 침을 넘긴 성준수가 다시 욕설을 짓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힘든 것을 넘어서서 숨이 막혀 보였다. 젖 먹던 힘 짜내고 있다는 표현이 드디어 와닿았다. 성준수의 등에 올려져 있는 것은 절대 성인 남성, 아무리 운동을 해서 몸이 좋은 성인 남성이라도, 들 수 없는 무게가 맞았다. 시야에 노출된 온 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영중. 영중아, 내 말, 들려?

전영중이 간신히 응, 내뱉었다.

이거 기억해야... 한다. 똑바, 흐윽, 로, 새겨들어.

응.

우리 헤어져, 알겠냐?

전영중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성준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위에서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환청일 수도 있었다. 성준수가 벽에는 부러진 오른손만 남기고 왼손을 주머니에 가져갔다. 무게가 한 팔에 온전히 실리자 성준수가 구역질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성준수가 아파하는 소리를 들은 귀를 파내고 싶었다. 성준수가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켰다. 순간 액정 가득 채운 빛이 성준수의 얼굴도 뚜렷하게 했다. 지금 힘들어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 치고는 세상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표정이 전영중의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다.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었다. 최고치로 볼륨을 올렸다. 전영중 발치에 내던지듯 두고 얼른 다시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땀 때문에 흐린 시야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무릎을 움직여 전영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씨...히발, 쥐어짜 내듯 신음하면서 신체를 조금 더 세웠다. 그리고 전영중이 뭐라 하기도 전에, 위로 감싸듯 엎어졌다.


전영중은 너무 늦게 깨닫는다. 한없이 가볍다고만 생각했던 성준수의 사랑은 어쩌면 세상 하염없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너라면... 남겨놔도 괜찮을 것 같다.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순간 머리 위에서 온갖 것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임은 근소한 것이었길래 연쇄 작용이 심하지는 않았다. 성준수의 자세는 교묘해서 전영중에게 모든 이물질이 닿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 머리가, 어깨가, 등이, 온 골격이, 잔해를 들쳐지고, 천장의 무게를 감당했다. 전영중이 숨 쉴 틈은 충분했다. 이상한 각도로 꺾여 전영중 뒤 벽에 박은 고개와 그 밑에 이어지는 휘어진 등이 공간을 마련했다.

언뜻 보면 성준수가 전영중을 안고 있다 해도 될 정도로 밀착된 거리인데, 어깨에 그 애의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영중은 눈을 감았다. 한동안, 아주 오랫동안, 기왕이면 평생, 뜨지 않을 계획이었다.


건물 내에서 성준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위치는 한번 들었을 때 바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보러 갈 일 없을 거라고, 잊을 거라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보를 듣자마자 뇌가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리에 필사적으로 새겼다. 이곳으로 가면 성준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이곳에 성준수가 있어, 하면서.

전영중은 납골당에 들어선다. 성준수의 영정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전영중의 눈꼬리가 휘어진다. 아니, 일그러진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역시, 어딜 가나 젤 잘생긴 놈이라니까.


성준수의 노래 덕분에 전영중은 발견되었다. 잔해를 뒤지다, 노랫소리가 들려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배터리 6%로 노래를 질러대고 있는 성준수의 핸드폰만 없었어도 제때 못 찾을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소방대원은 거듭 강조했다. 친구분이 아니었으면 분명 그 불가침의 사각지대까지도 위험했을 거라고 언급했다. 멋있는 분이시라고, 아니, 셨다고, 칭찬을 들었다. 아 그렇군요, 크게 물리적으로 다친 곳은 없어 몇 주 만에 완치된 전영중이 멍하니 대답했었다. 우리 준수가 멋있긴 하죠.


꽃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낸다.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손에 쥐고 있다. 안치단 문을 열쇠로 열어 작은 피규어를 넣어 놓는다. 성준수의 구단에서 받아온 굿즈다. 플라스틱으로 빚어진 잔뜩 화가 나 있는 남성.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진 거대한 구. 문을 도로 닫으며 전영중은 생각했다. 어쩌면 화가 나 있는 게 아니고 그저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깨에 올려진 무게에. 지켜야 하는 것들에 대한 책임감에. 절대 조금이라도 균형이나 자세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리라는 다짐. 아틀라스의 얼굴에 새겨진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전영중이 성준수의 얼굴에서 봤던 것들 말이다.

준수야, 누가 헤어져 준대. 나는 다시 만나고 싶은데... 나는 헤어진다고 안 했는데. 나는... 아직도 너 사랑하는데. 하려고 했던 수많은 부질없는 말은 삼킨다. 이것 또한 전영중이 성준수한테 물든 수많은 것 중 하나가 되겠다. 성준수는 더 이상 여기 없다. 다시 사귀는 것은 무슨 만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준수야, 전영중이 대신 고심하여 내뱉은 말이다. 내가 잘할게. 내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까지 네가 책임졌으니, 내가 너만큼 멋있게 살게. 평생 잊지 않을게. 사랑해.

말이 끝나니 입술이 짜다. 얼굴이 축축하다. 성준수의 빌어먹게 잘생긴 사진 옆 잔뜩 찌푸린 아틀라스가 여전히 애를 쓰며 지구를 받들고 있다. 두 인물이 지독히 안 어울리는데 뭔가 조화로운 묘한 그림이다. 뒤를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덧붙일 말이 떠오른다. 몸을 홱 돌려 성준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근데 나 궁금한 부분이 있어. 대체 네가 왜 내 세상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준수야, 어? 말해봐. 내 유일한 세상을 뺏어간 주제에. 대체 어떻게 해야 네가 날 살린 게 되냐고?

성준수는 말이 없다. 전영중 또한 입을 재차 여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너 쓸데없이 낭만적이야. 너무 싫어. 최악이야.

주변에 사람들이 몇 번이고 지나간다. 전영중은 계속하여 성준수를 쳐다본다. 영정 사진 속의 성준수의 얼굴 위에 수많은 성준수가 스치고 지나간다. 제 고백을 받아주던 홀딱 젖은 성준수. 어깨에 기대 노래에 맞춰 몸을 함께 움직이던 성준수. 저녁 제안을 거절 당하고 상처받은 성준수. 전영중의 사랑이 간절했던 성준수. 온몸을 펼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감당하던 성준수. 제 몸을 방패 삼으며 끝끝내 앞으로 꼬꾸라지던 성준수.

그렇게 나를 위해 내 세상을 지켜주고 싶었으면 날 평생 놔주지나 말지 그랬어.

정말, 사람 마음 이렇게 흔들어 놓고 가는 건, 반칙이었다.


근데 인천 아틀라스는 또 뭐야. 준수 생각은 잘 알겠는데, 그게 어떻게 농구랑 관련이 있는데. 몰라, 무슨 팬들의 세계를 우리가 받들....... 아 씨발 진짜 모르겠다. 무슨 정신으로 이걸 농구 구단에다 갖다 붙여놓은 거지. 준수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어 존나. 하하하, 근데 알잖아. 요즘은 그냥 조금 멋있고 있어 보이는 거면 개나 소나 다 구단명으로 갖다 붙이는 거. 큭큭큭, 그러긴 하다. 준수 내년에는 구단 바꿔 그냥. 씨발 미친 새낀가, 큭, 미친. 아 아무리 간지난다 해도 이상하잖아. 농구랑 엄청난 박애주의적 심정에서 우러나온 희생정신이랑 뭔 상관이냐고. 물론 우리 준수는 자기 목숨이냐 농구냐 하면 고민할 사람이긴 하지만. 야. 헉, 설마 내가 그 사이에 끼어도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하 진짜 가끔 네 새끼 이럴 때마다 어울려주는 내가 또라이 같다. 고민 안 해 씨발. 욜 이리와 준수 믿고 있었다고. 당연히 농구지. 뭐? 야 성준수 씨 일로 와보세요 제정신이야? 아아 잠깐 아, 씹 아하학, 꺼졐아학... 빨리 뻥이라고 말해. 당연, 아학, 야씨발, 그만! 알았어, 당연히 뻥이지 새꺄! 니가 그때 아득바득 나한테서 고백까지 받아냈잖아. 뭐? 무슨 고백? 죽인다 진짜. 아니, 나 진짜 기억 안 나서 그러는 건데? 무슨 고백? 아이씨, 있잖아. 아틀라스 이야기 하면서. 어, 뭐? 진짜 기억 안 나 새꺄? 너라면... 그거. 나라면? 나라면 뭐. 너라면 내가 대신... 뭐. 뭔데. 뜸 들이지 말고 준수야, 나 너무 궁금해 미치겠어. 너라면... 에이 씨발 몰라 알아서 생각해.

-아틀라스 完


etta jones - if i had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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