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행복이 별 건가, 이게 행복이지

3029 준탯

30대가 시작된 준수.

몇 년 전부터 끈질기게 붙어있던 손목과 팔꿈치 부상을 핑계로 프로 은퇴를 했다. 은퇴 전까지 쉬어본 적 없는 준수는 프로팀 코치 제의가 들어왔으나 안식년이라며 들어온 제의를 밀어두곤 아직 프로 선수 중인 마누라 태성의 뒷바라지를 결심한다.

그렇게 준수가 안식년을 가진 지 어언 8개월이 지났다.

나갈 준비를 하던 태성은 소파에 앉아 농구 중계를 보고 있는 준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본다. 준수의 뒷바라지는 의외로... 정말 괜찮았다. 레시피를 정확히 알려주면 요리도 그럭저럭 해냈고, 오랜 기숙 생활과 합숙 생활로 인해 집안일도 나름 괜찮게 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경기력으로 더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어서 그런가 전보다 더 예민함이 빠져 주인 손 타는 고내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래도 태성의 말은 자아 없이 잘 듣는 편이긴 했지만, 은퇴한 뒤로는 욕설도 그렇고, 투닥거리는 일도 꽤 많이 줄었다. 처음엔 이 새끼 바람피우나?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태성이 아니면 집을 나가지 않는 것을 알고는 은퇴한 것에 무릎 꿇을 뻔했었다.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8개월이었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우째... 단 한 번도 아들 만나러 가는 꼴을 못 보지.'

맞다. 매일 집에만 있고, 집 밖을 나올 때라곤 장 볼 때, 출퇴근 운전해 줄 때, 운동할 때가 끝이었다. 그나마 태성이 비시즌이면 데이트 겸 나오긴 하지만 그 외에는 전혀 없었다. 은퇴 전 마지막 경기도 잘 끝냈고, 인성 문제도... 문제될 건 없어서 은퇴하고 지인들 많이 만날까 조금은 불안했던 태성의 마음은 과한 것이었다.

지금도 봐.

비시즌 되자마자 부산 아들이랑 약속 잡은 태성과는 전혀 달랐다.

"햄아, 내 아들 만나고 올게."

"연락 꼬박꼬박하고 늦게 들어오면 뒤진다."

농구 중계를 보다가 준비를 다 끝낸 채 나온 태성을 보곤 바로 일어나 현관에 몸을 기댄다. 허이고, 마누라한테 뒤진다가 뭐꼬. 흘깃, 저만 볼 수 있는 꼬질 준수를 올려다본 태성은 신발 끈을 다 묶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을 돌려 헝클어진 준수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겨준다.

"전하도 좀 친구들 만나라. 은퇴하고 사람 만나는 꼴을 본 적 없다 아이가. 내도 집에 잘 없는데 안 심심하나."

기분 좋은 고내기처럼 태성의 손에 머리를 맡긴 준수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태성을 본다.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굳이."

순간 말을 잃어버린 태성은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다. 서울 아들은 이래 말을 잘하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손길에 드러난 준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다.

"일찍 드올게. 오늘 서방 쌀밥 좀 줘야겠다."


셔터맨 준수가 보고 싶어서 뜬금없이 써봅니다.

즐겁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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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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