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Pansy

오두막 by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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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걸음만 걸어도 금세 이마가 땀으로 촉촉해지는 그런 날이었다. 고개를 들자 빈 의자들이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애들이 나가면서 에어컨을 껐는지 교실 안은 선풍기 한 대만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채 말 그대로 후끈거렸다. 고개를 다시 책상에 박았다.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더위를 견딜 자신은 없어서 비척비척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온도를 23도로 맞췄다. 이제 곧 시원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돈 순간 시야에 정확히 교실 한가운데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구불거리는 짧은 머리의 남자애와 긴 머리를 아래로 묶은 여자애 하나. 누구지. 우리 반에 저런 애들이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이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애는 여전히 여자애의 손가락을 만지작대고 있었고 여자애는 그런 남자애를 흐뭇함 비슷한 걸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내 눈길을 돌렸다. 평소엔 반 아이들한테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별일이었다.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주고받고 있다. 공이 허공과 지면을 넘나들 때마다 모래 먼지가 폭발하듯 휘날린다. 나는 조용히 체육관으로 향했다. 지치지도 않는 매미의 울음소리도 녹아내리는 열기도 지겨웠다.

체육관 안은 고요했다. 적당히 에어컨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 하나 없이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슬슬 눈을 감으려던 순간 멀찍이서 흐릿한 윤곽이 아른거렸다. 또 그 두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둘에게 고정됐다.

남학생은 창문에서 내리쬐는 빛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 양옆에서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가 보인다. 여학생은 체육관의 벽을 손끝으로 만지고 있다. 둘 다 왜 저러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쯤 되니 수상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을 지켜볼 때면 나도 모르게 주변 상황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사색에 빠져있던 도중 여학생이 갑자기 몸은 그대로 둔 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충분히 먼 거리에 있는데도 바로 앞에서 그 눈빛을 받아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꼭 저 애와 내 눈동자 사이에 무슨 선이라도 연결된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곤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더 이상 자는 건 글렀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을 올려다보자 두 사람은··· 없었다. 눈을 양손으로 비벼대도, 꾹 감았다 다시 떠보아도 창문 아래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단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닥에 뭔가 있었다. 곧장 걸어가 확인해보니 작은 보라색 꽃잎 하나가 있었다. 손 위에 꽃잎을 올려놓고 빤히 바라보았다. 묘하게 친숙한 느낌이 난다. 잘 떠올리면 뭔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자꾸만 어딘가로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미간 사이를 잔뜩 좁힌 채 머리를 굴려댔다. 그렇게 한참 후, 연신 부드러운 잎을 만지던 손끝이 마침내 멈췄다.

나는 천천히 체육관 밖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졌지만 그런 걸 인지할 겨를은 없었다. 모든 기억이 규격화된 큐브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푸른 숲.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살. 아담한 나무 오두막. 계절이 없는 공간. 소녀와 소년. 영원히 깨지지 않는 시간. 팬지. 이 모든 것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잊고 있었어.

정신을 차려보니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게 단조로운 흑백의 배경처럼 느껴졌다. 오직 교실로 향하는 좁은 길만이 빛났다. 체육관을 지나 모래가 날리는 운동장을 거쳐 실내로 들어서자 미적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불붙은 듯 화끈거리는 발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한 손으로 난간을 대충 잡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1층, 2층, 3층. 한 층만 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매끈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3-10. 드디어 도착했어.

나는 온 힘을 다해 문을 거칠게 잡아 열었다. 교실 한복판에 두 사람이 있었다. 남학생은 의자에 앉아있고 여학생은 그 앞에서 책상에 손을 댄 채 서 있다.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숨을 몰아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 많았는데 잘 나오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랜, 만이야. 이제야, 만났네.” 간신히 두 문장을 내뱉었다. 침을 삼키자 목이 바짝 말랐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두 사람은 날 향해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열린 창문 새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커튼이 펄럭였다. 오늘따라 교실이 유난히 푸르러 보인다. 나는 숨을 천천히 가다듬고 말했다.

“절대 안 잊어버릴 거라고 했는데··· 실패했네. 그래도 늦게나마 기억해냈으니까 조금은 봐주면 안 될까? 안 되려나, 하하.”

두 사람은 가만히 웃을 뿐이다. 나는 슬슬 시간이 다 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조금만 더 빨리 기억해냈더라면···.

“···이번은 너무 늦어 버렸네.” 아쉬움에 새어나간 웃음의 뒷맛이 썼다.

소녀가 내게 다가와 뭔가를 내민다. 동그란 팬지 꽃잎. 꽃을 가까이 가져왔다. 미미한 향기가 코끝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소중히 간직할게. 그리고,” 내가 말했다.

“다음엔 꼭 내가 먼저 찾아갈게.” 그 말에 두 사람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우린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순간 산들거리던 바람이 갑자기 강하게 몰아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 앞을 가렸다. 잠시 뒤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바람 소리가 잠잠해지고 내가 눈을 떴을 땐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다시 팬지의 냄새를 맡았다. 지금은 이거면 됐다. 발을 돌려 교실 앞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뒤돌아 교실 전체를 한 번 눈에 담아보았다. 아까 대화를 나눴을 때의 푸르름은 아직 짙게 남아있었다. 나는 나무 문을 밀고 교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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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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