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소재주의: (꿈 속의) 교통사고, 수동적 자살사고의 언급, 동물 착취 제품(모피 코트)의 제작 과정에 대한 짧은 언급

불안한 꿈을 꾸었다.

나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해안을 따라가는 도로 위에 있다. 가속 페달을 밟는다. 운전하는 법은 배운 적 없지만 꿈 속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다.

보다 오래된 기억 속으로 주행하는 동안 라디오에선 잡음 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피고인 쥘 딜루티 린드버그. 그것은 대략 일 주일 전의 기억.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 때에 나는 분명 위즌가모트의 의원들을 보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시계 방향으로 비스듬히 돌리자 방청객 사이에서 드문드문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띈다. 쿠피예를 얼굴에 감은 에스마일 시프.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아들레이드 헤이즐턴. 세월이 지나 주름이 새겨졌으나 루이 누님의 얼굴은 젊을 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곁에 있어야 할 어머니는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의 행적은 임페리우스 저주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까? 무감정한 목소리에 희미한 짜증이 어린다.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은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주저한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다. 앞선 많은 이들이 임페리우스 저주의 영향이었다고 호소했고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든간에 일단은 유예의 시간, 항소의 기회를 얻었다. 시선이 재차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인다. 저기 있다. 기둥 옆에. 초목을 닮은 녹색 눈과 내가 서로를 발견하자 압생트 잔을 단숨에 들이킨 것만큼 목구멍이 타들어간다. 오래 벼른 일탈을 준비하듯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린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든다.

“아닙니다.”

법정이 아주 조용해졌다가 웅성거림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나의 뺨이 뜨거워진다. 새삼스레 참회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그간의 행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왕의 추종자로 여겨지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나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걸음해준 이들에게 걸맞는 대우가 아니었다. 잠시 후 세실 브라이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종신형을 선고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눈은 타오르는 불꽃 같고 목소리는 오래 전의 기억을 불러온다. 끝까지 지켜보라, 끝까지….

나는 최대한 무감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그를 마주본다. 그것이 내가 견지할 수 있는 최후의 존엄이다. 지금까지 그리 명예로운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은 만장일치로 내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루드비크가 중얼거린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나는 가속 페달을 밟는다. 계기판의 속도기가 서서히 높은 숫자를 가리킨다. 명확히 집어 말할 수 없는 기억들이 색상의 소용돌이로 무너진다. 최근으로부터 시작하여 더욱 더 먼 과거를 향하여.

페트리피쿠스 토탈루스. 패색이 짙어지는 전장을 등지고 달아나던 그 날 밤에 레아 세네카 윈필드가 나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외운 주문. 주문에 속박당한 육신을 구조 버스 위로 실어 올리던 새파란 눈. 예감은 레질리먼시의 도움 없이도 찾아온다. 우리 중 이십일 세기를 보는 것은 나다. 그는 이곳 과거에서 죽을 작정이다. 나는 그가 읽기를 바라며 있는 힘껏 마음 속으로 아우성친다. 가로등의 불빛을 등지고 선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버스의 문이 닫히고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이 저절로 풀린다.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나 현실감은 들지 않는다. 레아 윈필드는 죽었다. 죽어버렸다! 나를 두고서. 어쩌면 내가 한 말 때문에….

근육이 힘겹게 경련하며 통증이 올라오는 것을 무시하기로 한다. 나는 코트 안으로 손을 밀어넣어 플라스크를 꺼낸다. 뚜껑을 열고 입에 대자 홧홧한 감각이 목젖을 때린다. 술을 절반 가량 비우기도 전에 기침이 터져나온다. 나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손목으로 눈두덩이를 누른다. 만일 내 어깨가 떨리는 것을 목격한 승객이 있다면 관대하게 모른 척 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디스가 불러냈던 은빛 노루와, 디안서스의 가게에서 피어오르던 차의 향과 앞발을 까딱이던 마네키네코, 임판데가 낮은 목소리로 불러주던 자장가의 가락, 핀갈과 마주 기대어 올려다보던 밤하늘의 별자리,

50mph, 60mph.

아이작이 호시절을 향하여 터뜨린 카메라의 플래시, 언제나 변하는 법이 없는 호젓한 모형 정원에서 총살을 기다리는 아비와 니스 해변을 뛰어다니며 웃던 딸, 오래 기른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언저리에서 잘라내며 딸을 등지던 여인과, 세 통쯤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한 통은 돌려주던 헨, 새카만 피를 게워내며 비틀거리는 나를 붙들고 해독제를 먹여주던 타톨랑,

70mph, 80mph—

학살을 벌이는 카일 클라크를 등지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던 오래된 나, 그런 나를 닮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형극을 펼쳐 보이던 새하얀 마녀와, 나로 인해 정체가 탄로났음에도 끝내 목숨을 끊을 일격은 날리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던 가이의 모습. 머글 태생이더라도 자기 사람인 한은 비호하겠다고 말하던 유진과 정말로 의도한 적 없는 누르의 죽음, 더이상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던 멜로디의 서점과—

90, 100—

터져나오는 식초 아래에서 행복하다고 울먹이며 웃던 레이먼드,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고 폴라리스의 이름 아래 연주를 이어가던 윌리엄….

140—

“그러나 비겁한 인간이 생의 마지막까지 꺼내지 않을, 빛 보지 못하나 존재하기는 하는 양심을, 존재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양심을, ……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작가가 되겠다는 거죠?”

괴로움과 책망으로 혼탁하던 한 쌍의 눈을 떠올린 순간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거꾸로 뒤집힌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며 중력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팽이처럼 돌아가는 운전대로부터 손을 떼어냈고—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몸을 옹송그려 무릎을 가슴에 바짝 붙인 채로,

뺨을 때리는 바닷바람에 눈을 떴다.

몇 명이 나를 따라 주춤거리면서 내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거칠고 황량했다. 파도가 사납게 일어날 때마다 새하얀 거품이 끓어올랐고, 통제를 벗어난 머리카락이 내 뺨을 채찍처럼 때렸다. 나는 얼굴에 달라붙은 베이지색 가닥을 닦아냈다. 손끝에 희미한 소금기가 묻어나왔다. 추워서였을까, 잔기침이 늑골을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우리를 이송하는 사람은 죄인에게도 썩 정중했다. 불평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나는 시키는 대로 바위를 따라 내려갔다. 작고 기우뚱거리는 배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염려를 알아차렸는지 뱃사공은 “주문이 걸려 있어서 뒤집어진 적은 없습니다. 아직은요,” 라고 덧붙였다. 생략된 말은 이거였다고 생각한다: 이송 중 사망이라는 편리한 탈출구를 기대하지 말 것.

핀갈이 살아있었다면 웃었을지도 모른다. 배가 뒤집히는 것은 그에게 석방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달아날 위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 중에선 바로 그 전사라는 개념도 포함되었다.

바다는 잿빛이었다. 꼭 저편의 누군가가 모든 색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출렁이는 물살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쪼그려 앉았다. 꼭 검은 호수를 지나 호그와트로 배를 몰던 때가 생각나서 상황에 걸맞지 않게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어 참으며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예컨대, 내가 앞으로 몇 주나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울컥이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상념이 떠올랐다. 과연 세실이 옳다. 아즈카반에 살아서 도착하는 것은 죽음보다 못한 일일지 모른다. 허나 길게 버틸 필요는 없었다. 며칠 울고 애원하다 보면 디멘터들이 정신을 텅 비워준다고들 하니까. 그 점에서 아즈카반은 자비로운 장소다. 입맞춤도, 목을 맬 밧줄도 필요치 않다. 그저 물 먹은 솜처럼 팔다리에 힘을 풀고 그들이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들을 갉아먹게 두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실성하든지 죽든지 하게 되겠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힐데가르트는 내게 살아남아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끈질기고 폭력적인지 깨달으라 말했다. 이디스는 언젠가 우리의 관계를 다시금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했고, 에스마일 역시 내가 살기를 바랄 것이다. 레이먼드는 돌아보라 했고 핀갈은 돌아가라고 권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꾀여낸 루드비크가 외돌토리처럼 이십일 세기를 맞이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다소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앞으로 남은 기나긴 일생 동안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자니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프러드였다. (항상 그 인간이 문제였다.) 이제 막 올바른 길을 저버린 스물 한 살의 청년이 술기운에 혼탁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더러 책을 쓰기를 요구했다. 대중을 위한 프로파간다가 아닌, 피상적이고 얄팍한 동화도 아닌. 바로 그가 원하는 소설 한 편을…. 번잡하고 모순적이고 어리석고 비겁한, 인간에 대한 소설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몇 달, 혹은 몇 주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제아무리 애쓴다 해도 반 년이 한계일지 몰랐다. 하지만 프러드가 요구한 건 책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거였다. 그렇지 않은가? 나에겐 세상의 모든 시간이 주어졌고, 충분한 양의 종이를 가져다 줄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때, 그 사실 자체가 기적적으로 느껴졌다.)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써보는 것이다. 녹아내리는 양초 같은 정신으로 한 자 한 자. 내가 지금껏 외면해 왔던 세상의 모든 괴롭고 초라한 그늘들을. 내가 덫을 놓아 죽이고 가죽을 벗겨내 걸친, 죽어있고 또 살아있는 나의 동족들을 향하여.

사공은 희미한 날숨과 함께 선미(船尾)를 뭍으로부터 떼어냈다. 배가 흔들거리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나긴 복역의 시작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